전투는 공동의 이해관계 혹은 정치적 목적을 가진 특정 집단과 외부의 일정한 적 사이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성과 남성 내부에서 그리고 여성과 남성 사이에서 벌어진다. 모두가 조만간 어느 한 편에 서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어느 한 편에 선다는 것은 우리 내부의 일정 부분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우리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무너지고 새로운 정체성을 창조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47쪽)
여성이라는 하나의 ‘계급’이 역사적으로 지속적인 착취의 대상이 되어 왔다는 사실은 남성에게는 물론 여성에게도 불편하다. 남성은 남성의 논리로, 여성은 여성의 논리로 이에 반대한다.
여성에 대한 억압은 경제적인 면에서 성공함으로써 사회문화적으로 그 영향력을 확대시킬 수 있었다. 사냥을 통해 아주 가끔 얻을 수 있었던 고기가 중요했기 때문이 아니라, 사냥을 위해 개발된 도구가 사냥 뿐 아니라 살인과 전쟁을 위한 무기로 변모해서 이를 통한 남성 집단의 이익이 극대화되었을 때(160쪽), 인류 초기 여성들이 가지고 있던 경제적 위상이 추락했다. 주된 식량 공급자로서 기능했던 여성들은 침략 전쟁에 성공한 상대 집단, 정확히는 상대 남성 집단의 소유물이 되었다. 납치된 여성은 사유재산 축적의 직접적인 원천이 되었고(158쪽), 농업노동자이며 노예를 생산할 수 있는 여성노예는 남성노예보다 더 높은 가격에 낙찰되었다(159쪽). 156쪽, 여성은 가축이 되었다,는 이런 맥락으로 이해된다.
또 다른 측면의 여성 착취는 여성의 신체에 대한 통제다. 성적 결정권에 대한 통제력을 여성으로부터 갈취하려는 노력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왔으며, 이는 어느 정도 성공한 듯 보인다. 성적인 자유를 누리는 것 뿐만 아니라, 임신과 출산의 자율권을 주장하는 여성에 대한 비난은 너무 비일비재해서 ‘자연스럽게(?)’ 여겨질 정도다. 이 세상 어느 나라도 범죄의 피해자가 피해자가 되었다는 이유로 비난받지 않는다. 성범죄만이, 성범죄의 피해자만이 피해자라는 이유로 비난받는다.
위의 두 문단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30분 정도 이야기하면, 여자들만 모인 자리에서도 퇴출당한다. 결혼하지 않은 친구 두 명과 이 이야기를 진지하게 나눴다. 이 친구들에 대해 말하자면 이미 당연히 알고 있는 바였고, 다정한 친구들은 내가 이런 문제에 진지한 관심을 가지는 것에 대해, 네가 왜?라고 묻지 않았다. 일찍 결혼해서 아이 둘을 낳고 평범한 가정 생활을 하는 네가 왜?라고 묻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자주 만나는 보통의 전업주부들에게는 위 두 문단의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 일단 억압받고 있다는 데에 대한 자각이 없고, 보통의 사람 사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아들만 둘 키우는 엄마들이 쉽게 ‘요즘 여자애들이 얼마나 여우 같은지’를 이야기할 때마다 가슴이 철렁한다. 내가 그 여우다. 남의 집 귀한 아들, 엄청 노력해서 애지중지 키워낸 내 아들의 얄미운 최후 수령인. 하지만 기억해 주세요. 저도 귀하게 키운 딸이에요. 손에 물 한 번 안 묻히고 시집 온 그런 귀한 자식이예요.
위의 두 문단을 이해하고 나서야, 이 문단을 읽는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사이의 관계, 다시 말하면,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착취와 끝없는 자본축적과 ‘성장’의 패러다임 사이의 관계,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와 식민지에 대한 착취와 예속의 관계에 대해 풀리지 않는 질문이 계속되고 있다. (38쪽)
가장 확실한 ‘타자’였던 여성을 종속시키는 과정을 통해 인간 남성은 자연, 식민지의 종속과 이에 대한 착취를 구체화할 수 있었다. 남성=문명, 여성=자연이라는 등치 과정을 통해 여성을 문명화 시켜야 하는 ‘대상’으로 설명한 것이다. 이를 통해 자연에 대한 착취와 식민지에 대한 침공을 합리화시켰다.
최근에 읽은 『다크룸』을 기억나게 하는 장면이다.
파니차의 이야기는 오랜 전통의 일부였다. 1180년 『예루살렘의 역사History of Jerusalem』라는 연대기에서 추기경 자크 드 비트리는, 유대인 남성은 “여성처럼 약하고, 호전적이지 않으며, 한 달에 한 번 피를 흘린다고 알려져 있다. 하느님은 그들을 욕되게 하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가없는 수치심을 내리셨다”고 주장했다. (381쪽)
반유대주의의 일환으로 유대 민족에 대한 혐오가 극대화된 이면에는 유대인 남성의 여성성에 대한 선전이 지속적으로 이용되어 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XX년’이 여성에 대한 욕이 아니라, 남성에 대한 가장 치욕적인 욕으로 통용되고 있는 현실도 이에 대한 구체적인 실례가 될 수 있다.
이 책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문단은 여기.
이 이슈를 자신의 의식 속에 받아들이게 되면, 그들은 남성이든 여성이든 자신들이 한편으로는 피해자일 뿐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남성과 여성을 모두 속박하고 있는 착취와 억압의 체제에서 자신도 공범자라는 점을 인정해야만 한다. 진정으로 자유로운 인간관계로 가고 싶다면 이제껏 해온 공모 행위를 포기해야만 한다. 이는 이 체제에서 특권을 가진 남성만이 아니라, 이 체제에 물질적 존재 기반을 두고 있는 여성도 마찬가지이다. (47쪽)
이삿짐 정리와 계속되는 코로나 방학으로 나른한 어느 오후, 둘째를 데리고 집 앞 커피숍에 잠깐 나왔다. 크림비엔나를 주문했는데, 아인슈페너 일반적으로는 비엔나커피라 불리는 그 커피를 마시기 위해서였다. 책은 촬영을 위해 잠깐 등장해 주셨다. 나의 안락함, 나의 취향, 내가 즐기는 이 한 잔의 커피마저도 사실은 억압과 착취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마주하기 두렵다. 2020년 상반기 최고의 책으로 꼽고 싶은 이 책을 마저 읽기가 주저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