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층을 누르고 문이 열렸는데 어둡다. 한발 다가서니 굳게 닫힌 문이 보인다. 이 상황에 대한 두 가지의 판단이 존재한다. 첫번째, 코로나19 확진자 발생으로 병원이 폐쇄되었다. 두번째, 오늘이 병원 휴원일이다. 1층으로 내려와 병원에서 발송한 문자를 확인했다. 3월 27일 금요일 5시에 진료 예약입니다. 오늘은? 오늘이 몇 일인데? 아, 26일. 목요일. 이 병원을 10년 넘게 다녔는데 목요일 휴원인 걸 바로 지금 알게 된 것처럼. 오후 4시 53분, 아 오늘이 목요일이구나. 제정신이 아닌가, 스스로를 추스르며 전철역으로 향한다. 나는 왜 제정신이 아닌가.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건조기에 넣고 청소기를 돌리고 급한 걸음으로 나서면서도 책 한 권 챙기는 정신을 가지고 있던 나는, 그 날이 목요일인지, 27일 금요일이 아니라, 26일 목요일인지 왜 몰랐단 말인가.
내가 처음으로 n번방 기사를 읽게 된 건, 국민일보를 통해서였다. <[n번방 추적기 1] 텔레그램에 강간노예들이 있다, 국민일보 2020-03-09,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4327469> 주범이 잡히기 2-3주 전이었는데, 이전에 작성된 기사를 그 때쯤 처음 봤다. 아침에 기사를 읽고 믿을 수가 없었다. 오후에 다시 한 번 기사를 읽는데 손이 벌벌 떨렸다. 주범이 잡히고 그렇게 n번방이 세상에 알려졌다.
작년부터 취재했다는 ㅎ신문 기자 인터뷰를 들었다. 기사가 한 번 나가자 박사방에서 기자에 대한 신상을 털어오면 vip방으로 업그레이드를 시켜주고 성노예를 마음껏 부릴 수 있게 해준다는 공지가 있었다고 한다. 기자는 물론 가족사진까지 공개됐다. 그 사람이 누구든, 자신의 이름과 신상, 그리고 가족사진까지 공개된다면 공포심을 느끼는게 당연하다. 두고 보자, 뒤돌아보게 해 줄께, 이런 문자를 받은 후에 나는 괜찮아,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이 잔인하고 악랄한 집단의 협박 속에서 그 어린 아이들은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었다. 하라는 대로 연출하고, 하라는 대로 옷을 벗었다. 지금 아니면 언제, 이 문제가 이렇게 전 국민적 관심을 받게 될 것인가,를 생각해본다.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이 잔혹한 범죄에 대한 처벌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지금이다. 더 미룰 수 없다.
범죄집단의 악랄함보다 더 기가 막히는 건, 범죄집단의 하소연이다. 한 번 봤을 뿐이다, 호기심으로 들어갔다, 한 번 본 게 무슨 큰 죄냐. 이런 말이 더 잔인하다. 더 악랄하다. 벗은 아이들의 몸을 매개로 희희덕거리며 즐거워했던 자신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거다. 억울하다는 말, 자신들도 피해자라는 이 말이 어떻게 가능한가. 나는 답을 찾았다. 제정신 아닌 상태에서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두 번째 읽고 있는 정희진 선생님 글에서 답을 찾았다.
차별은 심한데 인식이 낮은 사회에서는 가해자가 피해자가 된다. 남성의 자연스런 일상이 여성에게는 모욕, 차별, 생명 위협이다. 남성은 자신의 행동에 대응하는 여성의 목소리를 ‘행복권 침해’로 생각하고 증오와 피해의식을 느끼기 쉽다. (21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