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 윌리엄! / Oh, William!
올해 읽은 책 아니고 작년에 읽은 책이다. 정리 안 하려고 했는데 안 하면 너무 서운할 테고. 근사한 소설이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책은 다 좋지만 신간도 이렇게 재미있을 수 있다는 게 신기하고 감사하다. 오래오래 건강하시길, 한 권 아니 두 권 더 써 주시기를 바랄 뿐이다.
윌리엄은 루시 바턴의 첫 번째 남편이다. 캐서린은 윌리엄의 어머니, 루시의 시어머니다. 루시의 생각, 느낌, 감정을 제외한다면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루시의 이야기보다 더 큰 몫을 차지한다. 의아하다고 말하기는 그렇지만 어색하게 느껴지는 지점은 윌리엄에 대한 루시의 심경이다. 사랑했던 사람과 결혼하고, 이혼하고, 그리고 다시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남매처럼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이 내게는 여전히 신기하다. 헤어진 뒤에도 ‘쿨하게’ 지낸다는 것. 루시는 윌리엄이 자신에게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쓴다.
William is the only person I ever felt safe with. He is the only home I ever had. (38p)
나는 한 번도, 어떤 남자에게서도 이런 느낌을 받았던 적이 없다. 안전하다고 느낀 적이 있고, 편안하다고 느낀 적도 있지만 이런 표현이라니. 글쎄, 난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랬던 사람, 내게 집 같았던 사람과도 헤어질 수 있다. 더 이상 그 사람을 참아낼 수 없을 때,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게 아무런 의미가 없을 때, 두 사람은 헤어진다. 진짜 궁금한 건, 사랑에 빠지고 그와 결혼하고 사랑이 식고 그와 이혼하는 과정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그를 ‘다시’ 만나는 마음이다. ‘미운정 고운정’이라는 옛말이 있기는 하지만, 나는 미운정과 고운정의 공존에 회의적인 편이다. 다면적이고 다층적인 인간에 대해 당연히 여러 감정이 들 수 있고, 또한 그것이 우리네 현실이지만, 고운정을 다 상쇄해 버리는 미운정이, 또 다른 고운정으로 희석될 수 있는가. 나는, 아니라고 본다.
오랜 시간을 함께한 사람이 선사하는 친숙함을 사랑하지만, 이 정도의 배신이면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을 듯한데. 나라면 말이다. 루시는 그러지 않았고. 자주 그를 만나고 그를 돕고 그의 도움을 받는다. 이해되지 않는 세계, 혹은 이해하고 싶은 마음을 지나, 이 책은 <단발머리 선정 2022년, 올해의 소설>이다. (아무래도 ‘올해의 선택’ 페이퍼 못 쓸 각) 축하드린다.
2.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전체주의의 기원
끝까지 읽지 못한 책이 종종 출현(?)한 건 6-7년 전부터인데, 이제는 제법 익숙해졌다. 다 읽었다, 다 끝냈다, 에 너무 큰 의미를 둘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많이 가벼워지기도 했다. 다만 이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다 읽었다!’ 를 하기 위해서 끝까지 읽었다. 페이퍼를 여러 번 쓰기도 했고, 남은 내용을 대략 알고 있지만 그래도 아렌트의 ‘마지막 문장’까지 따라 읽고 싶었다. 그래서, 이 문장을 이렇게 만났다.
이는 마치 이 마지막 순간에 그가 인간의 사악함 속에서 이루어진 이 오랜 과정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교훈을 요약하고 있는 듯했다. 두려운 교훈, 즉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349쪽)
다음 책은 <전체주의의 기원>이고, 내용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두께로 승부해도 어느 책에도 뒤지지 않을 듯하다. 그 위용에 걸맞게 기대 만발이다.
3. 마리 앙투아네트
친구 중에 책 읽기를 즐겨하지 않지만, 책을 좋아하는 친구가 있었다. 친구는 내가 책을 읽고 있으면, 그 책을 빌려달라 했고, 책을 빌려주면 그 책을 열심히 읽었다. 그렇게 내 책을 다 읽고 나면, 똑같은 책을 사서 자기 책장에 꽂아 두었다. 그렇게 매번 친구는 내 책을 빌려 읽었다. 책 고르는 나의 안목을 인정한 것인가.
내게도 그런 일이 일어났는데, 도서관에서 빌려 읽다가 책을 구입하게 되었기에, 도서관 책으로 읽고, 구입한 새 책은 책장에 꽂아두는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증거자료 1 : 도서관 책과 내 책의 다정한 모습). <단발머리 선정, 2022년 올해의 책> 되시겠다.
프랑스 혁명의 질곡과 당대 사회에 대한 깊은 이해, 그리고 민중의 삶을 잘 녹여낸 츠바이크의 솜씨야 더할 말이 필요 없다. 외국인이며 젊은 여성인 왕비에 대한 전 국민적 혐오와 현재의 언론이라 할 팜플렛 산업과의 정치적, 상업적 결합은 마리의 삶을 통째로 흔들었다. 철없는 어린 아이에서 마지막 순간에도 위엄을 갖췄던 왕비로 변신한 그녀의 삶과 죽음을 쭉 따라가다 보면, 책추천의 대가 잠자냥님 말씀처럼 ‘흑흑, 가여운 여자…’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마리 앙투아네트를 다시 보게 하는 대목이 너무나 많다. 내 마음을 빼앗은 건 (역시나) 마리 앙투아네트와 페르센 백작의 사랑 이야기 되시겠다.
두 사람의 사랑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는 건 두 사람의 사랑에는 ‘일상의 지루함’이 자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공주이며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와 귀족인 페르센이 함께하는 모든 순간은 다른 이들의 ‘재생산 노동’으로 채워졌을 테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사랑은 너무나도 아름답다. 아름답다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겠지만, 아름답다, 두 사람의 사랑은.
그녀가 세상에서 신처럼 숭앙을 받고 많은 아첨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 그녀의 총애를 피했던 페르센은 그녀가 도움을 필요로 하고 고독해졌을 때 사랑하겠다고 나섰다. (282쪽)
마리에 대한 페르센의 사랑은 ‘낭만적 기사도’의 한 가지 양식일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사랑은, ‘사랑 뭘까’의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우리가 바라는 사랑, 우리가 기대하는 사랑은 이런 사랑이 아닐까. 무조건적인 사랑. 자신을 온전히 희생하면서까지 사랑하는 이를 지켜주는 사랑, 오직 그 사람만을 위하는 사랑, 그런 사랑 말이다. 이런 사랑에 제일 근접한 모습이 부모의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흉흉한 세상에 요즘은 부모의 사랑이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고, 진실하고 참된 부모의 사랑은 의도와는 다르게 옆길로 빠지기 쉽고, (내가 자주 주창하는 바) 지나친 사랑은 오히려 건강에 해로울 뿐이다.
그래서, 다시 묻는 질문. 사랑, 뭘까. 이런 사랑, 정말 가능한 걸까.
4. 이 달의 진도
그래서 이달의 책 준비는 이렇다. 작년의 마지막 책들과 같이 사이좋게 쌓아보았다.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의 <페미니즘 이론과 비평>을 시작으로, 어슐러 르 귄을 넘어 스트래선까지. 나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어디로 가고 싶은지도 알지 못한 채.
오늘, 오늘을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