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적인 영양실조
<정신적인 영양실조>라는 글의 앞과 뒤를 보충해 다시 썼다.
『살림 비용』을 읽었다.
제발 파리를 버리고 시카고로 와 함께 살자고 앨그렌이 사정했을 때, 보부아르는 이렇게 편지를 보냈다. "난 행복과 사랑만을 위해 살 수 없어. 내 글쓰기와 일이 유일하게 의미를 가지는 곳일지도 모를 이 곳에서 계속 글을 쓰고 일을 하는 걸 단념할 순 없어."
글을 쓰면서 행복과 사랑과 가정과 아이도 가질 수 있지는 않았을까? 보부아르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도 그게 얼마나 호락호락하지 않은 일인지 경험했다. (『살림 비용』, 87쪽)
나는 보부아르는 아니니까, 라고 말하는 데버라 리비. 글을 쓰는, 글을 써서 먹고사는, 글을 써서 아이를 키우는 데버라는 이제 막 이혼을 하고, 혼자가 되어 홀로 선다. 보부아르는 글쓰기와 일을 택했다. 사르트르의 아침을 걱정하는 사람이 되지 않았고, 평생을 호텔에서 지냈다. 오늘날까지도, 여자의 제일 되는 목적이, 삶의 이유가 아이를 낳는 것이라고 믿는 세상에서, 아이를 낳지 않는 삶을 선택했다. 데버라는 아니었다. 사랑했던 남자를 떠나 이제 막 가부장제의 틀을 벗어나기로 한 데버라는 책임져야 할 아이가 있었고, 서재 없이 써내야만 하는 원고가 있었다.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글로 먹고산다는 건 얼마나 고된 일인가. 보부아르는 나비처럼 유유히 혼자만을 책임지면 되겠지만(엄마 생활비를 대기는 했음), 데버라는 그렇지 않았다. 데버라에게는 아이가 있었다. 사노 요코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보부아르가 싫었다. 몸이 튼튼해서 싫었다. 자전거 여행을 하다가 넘어져 치아가 부러지고 그 치아가 볼에 박혔는데도 태연하게 몇 주일이나 여행을 계속했다. 내 친구 중에는 보부아르와 사르트르의 관계를 이상적인 남녀관계로 신봉하고 그대로 따라하는 바람에 인생을 망친 여자도 있다.
그 사람의 결사적인 철학과 행동에 대해 뭐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
나는 그녀의 강인한 체력이 못마땅했을 뿐이다. 이 여자는 뇌나 뼈에 치아가 박혀도 태연하지 않을까? 이런 속내도 다른 사람에겐 말할 수 없었다. 나는 그저 몸 약하고 머리 나쁜 여자였다.
아이가 태어난 후로는 보부아르를 무시할 수 있었다. 그래, 그래, 너 잘났다. 자식이 없으니 그렇게 말할 수 있지. 넌 그렇게 살아. 나하곤 상관없어. 나는 사는 게 힘들거든. 일상이 힘들면 생활이 철학이 돼. (『문제가 있습니다』, 164쪽)
이 글을 썼던 때가 2018년이고, 2017년부터 읽기 시작한 『제2의 성』을 제대로 읽은 건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와 함께였던 2019년이다. 2019년에 『제2의 성』을 읽을 때, 나는 보부아르의 천재성에 완전히 압도당했고(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이해는커녕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조차 힘들어 나의 책 읽기는 ‘감탄’과 ‘환희’ 그리고 고된 ‘입력’의 연속이었다. 2021년, 모임에서 다시 『제2의 성』을 읽었을 때는 책이 처음과는 조금 다르게 읽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눈에 거슬리는 문장들이 있었다.
여자는 기생충처럼 남자가 먹여 살린다. (677쪽)
결혼은 여자를 ‘사마귀 암컷’으로, ‘거머리’로, ‘독’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에, 결혼의 형태를 바꾸고 여성의 조건을 전반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677쪽)
내게도 약간 사노 요코 같은 마음이 생겼다고 할까. 이미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는데, 그럼 나는 어떡하라고요? 회의와 물음이 마음 깊은 속에서 일렁였다. 읽기 싫을 때가 종종 있었지만, 아무튼 끝까지 읽었다. 나 혼자 삐져있던 내가, 나 혼자 화해(?)하게 된 계기는 에이드리언 리치의 글을 읽었을 때 찾아왔다. 여러모로, 여러 장소에서, 여러 위치에서, 에이드리언 리치는 내게 ‘해답’이 되어준다.
가정에 매이지 않는 여성, 이성애적 짝짓기와 출산의 법칙을 거스른 여성은 남성 헤게모니에 커다란 위협을 가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런데도 이런 여성들은 선교사로, 수녀로, 교사로, 간호사로, 결혼하지 않은 이모나 고모로, 사회를 위해 자신의 역할을 다하라는 기대를 받았고, 중산층이면 노동력을 팔지 말고 무상으로 제공해야 했으며, 여성의 처지에 대해 말하고 싶어도 온화하게 말해야 했다. 그러나 모순되게도 이들은 아이들에게 매시간 매인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에 명상하고 관찰하고 글을 쓸 시간이 있었고, 일반적인 여성들의 경험에 관한 강력한 통찰력을 우리에게 전해주었다. 샬럿 브론테(첫 임신 중 사망), 마거릿 풀러(주요 업적은 아이를 낳기 전에 이루어졌다), 조지 엘리엇, 에밀리 브론테, 에밀리 디킨슨, 크리스티나 로제티, 버지니아 울프, 시몬 드 보부아르처럼 ‘아이 없는’ 여성들의 인정받지 못한 연구와 학문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모두 여성으로서 정신적인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다.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215쪽)
에이드리언 리치는 결혼하지 않은 여성, 가정에 매이지 않은 여성, 아이가 없는 여성들이 여성들의 경험에 관한 강력한 통찰력을 우리에게, 결혼했고, 가정에 매여 있으며, 출산해 아이가 있는 여성들에게 전해 주었다고 보았다. 그들의 명상이 우리에게 빛을 비춰주었고, 그들의 글이 우리의 안내가 되었으며, 그들의 자유로움이 결국은 우리의 속박을 끊어내는데 강력한 무기가 되어 주었다고 말한다. ‘정신적인 영양실조’에 허덕이는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고 말한다. 독신 여성, 결혼하지 않은 여성, 아이 없는 여성들이, 우리에게 그런 힘을 주었다고 말이다.
그리고, 최근에 『더 이상 어머니는 없다』를 읽으면서 비로소 나는 내 안의 ‘모성’을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정해진 모성,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모성, 강요된 모성이 아니라, 내 안의 모성, 나 같은 사람만이 줄 수 있는, 나만의 모성에 대해 비로소 긍정할 수 있게 됐다. 후회하지 않으면서, 아무도 원망하지 않으면서, 내 시간과 과거를 안타까워하지 않으면서, 엄마였던 나를, 그리고 엄마로서 살아갈 나를, 그냥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그럼에도 아무런 가치도 없는 그 보석들에 손을 뻗느니 검고 푸르스름한 어둠을 두 발로 통과해 지나는 편이 낫다. (『살림 비용』, 161쪽)
이제 데버라는 가부장제가 주는 가치 없는 보석을 소유하느니 검고 푸르스름한 어둠을 두 발로 통과해 지나겠다고 말한다. 가정이라는 안전(?)한 보호막을 벗어나, 여성 혐오가 만연한 사회에 맞서, 자기혐오의 고통을 이겨내리라 다짐한다. 삶의 비용을 들여 글을 쓰겠다고, 이 글도 그렇게 쓰였다고 말한다. 새로운 시작을 이야기한다. 그 두터운 어둠과 맞서겠다고, 자신의 발로 서서 한 걸음 또 한 걸음을 걸어가겠다고 말한다.
부러움을 안고, 조금의 꼬인 마음 없이. 순전하게.
데버라 리비를 응원한다. 그녀의 건필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