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적인 영양실조
시몬 드 보부아르와 데버라 리비
나는 고작 요만큼이지
‘아이 없는’ 여성의 지적 성취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표현한 에이드리언 리치에 대해서는 이렇게 두 개의 글을 썼다. (내 글에 내 글을 인용할 때 많이 거시기하지만, 앎비앎 친구 쟝쟝님이 괜찮다고 해서 부끄러움을 접어두고 링크를 건다. https://blog.aladin.co.kr/798187174/12662668, https://blog.aladin.co.kr/798187174/13944978)
<강제적 이성애와 레즈비언 존재>는 에이드리언 리치가 쓴 <피, 빵, 그리고 시>(1980)에 담겨 있는 글이다. 이 글은 ‘강제적 이성애’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고, 어떤 방식으로든 페미니스트이되 이성애자인 여성들에게 거부감을 줄 수 밖에 없다. 내용 자체가 그렇다. 그녀는 남자와 결혼했다. 촉망받는 작가이자 시인이었지만 서둘러 결혼했고, 아들을 셋 낳았다. 아내였고, 엄마였다. 이성애자 여성으로서의 삶을 살았던 그녀가 가정을 벗어난 후에 쓴다. 강제적 이성애가 여성들을 얼마나 억압하고 있는지 쓴다. 이럴 때 그 감옥을 탈출한 여성의 목소리는 어떤가. 그러니까, 내가 말하는 건 그 톤이다.
이 글은 분열을 확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성애자 페미니스트들이 이성애를 여성들의 힘을 빼앗는 정치적인 제도로 검토해보고 이에 도전해볼 것을, 나아가 변화시키기를 촉구하기 위해 썼다. (234쪽)
예전에 ‘아이 없는’ 여성에 대한 에이드리언 리치의 글에서도 느꼈지만, 내가 지금 읽고 있는 책은 번역본이기에 그 중 일부는 번역가의 노고일 것이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느껴진다. 에이드리언 리치는 신중하다. 비난하지 않으면서 격려하고, 명확하게 말하면서도 부드러움을 놓치지 않는다. 영어로 읽어보지 않았으니까, 이건 나의 ‘느낌’일 수도 있겠다. 아직 이 짧은 글을 끝까지 읽어보지 못했으니, 내가 전체를 제대로 파악했다고 확신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나는 그녀의 이런 태도를 존경한다. 여성으로서 여성을 존중하는 모습. 강압적이지 않으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말하는 진실한 제언들.
필리스 체슬러의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페미니스트>에 보면 케이트 밀렛, 우리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천재 작가 케이트 밀렛이 체슬러에게 어떻게 행동했는지 나온다. 당시에 체슬러는 지독한 이성애자였고(본인이 직접 밝힌 부분이다. ‘나는 남자를 너무 좋아한다’), 그래서 페미니즘 운동의 선두에서 투쟁하고 있었지만, 레즈비언니즘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는데, 밀렛이 자꾸 체슬러에게 접근하는 거다. 이른바 성애적 접근. 그걸 알아챈 체슬러는 밀렛을 사랑하고 존경하지만, 그와의 개인적인 만남은 피하려고 노력했다.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밀렛이 보석처럼 빛나는 사람인 걸 알았고, 천재들이 흔히 범하는 크고 작은 약점에 대해 알았고, 밀렛의 성적 지향이 자신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체슬러는 밀렛과의 관계를 끊지 않았다. 나는 체슬러를 읽으면서, 물론 그 책이 어디까지나 체슬러의 관점에서 쓰여졌다는 점을 기억해야겠지만, 그런 체슬러의 모습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 속에서도 연대를 포기하지 않는 마음이 너무나도 근사했다.
나는 여중, 여고, 여대를 나왔다. 만났던 사람들 대부분이 여성이었다. 나 좋다고 따라다니는 남자가 없었고, 나도 좋아서 따라다니던 남자가 없었다. 짧은 직장생활 기간을 빼면 남자(들)과 친밀히 접촉(?)할 시간과 공간과 여건이 안 되었다. 결혼 후에는 더 심해졌다. 둘째 아이를 낳은 후, 어느 시점에 깨달았다. 나를, 개인으로서 나, 혹은 인간으로서의 나에게 가장 큰 도움을 준 사람들은 대부분, 정확히는 90 퍼센트 이상이 여성이라는 것을. 내가 좋아하는 사람도 여자였고,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도 여자였다. 나를 위로해주는 사람도 여자였고, 내게 용기를 준 사람도 여자였다. 나를 웃게 해주는 사람도 여자였고, 나랑 놀아주는 사람도 여자였다. 내게 책 선물을 제일 많이 보내주는 사람도 여자였고, 좋은 책이 나왔다며 권해주는 사람도 여자였다. 내가 좋아하는 남자들은 화면 ‘속’에 갇힌 남자들이어서, 평생에 얼굴 한 번 보기도 어려운 사람들이었고. 그때서야 비로소, 나는 생각했다. 남자 없는 세상, 남자와의 관계가 필요 없는 세상이 가능하겠구나.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여자들과의 관계만으로도 충만한 세상, 완벽한 세상이 가능하겠구나.
그리고 이 경우, 내게는 딱 하나의 빈 틈이 존재했다. 우리 모두 그렇듯, 나 역시 지적으로 우월한 사람에 대한 추앙의 마음이 있다. 지적으로 충만한 사람, 지적으로 나를 이끌어주는 사람에 대한 동경이 있다. 오 천년 가부장제의 역사는 위대한 여성들의 이름과 얼굴과 업적을 모두 지워버렸기에 나는 그런 여성을 좀처럼 찾을 수 없었다. 페미니즘을 읽으면서부터 서구의 천재 여성들을 차례로 ‘영접’하는 신기한 일들이 연이어 일어났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나의 말, 나의 언어를 가진 천재를, 나는 기다렸고.
그리고, 아!!! 나는 드디어 만났다.
이런 저서를 내신 분이 바로 정희진 선생님이다. 한글로 쓰는 기쁨을 주신 세종대왕에게 감사드리고, 한글로 가능한 사고의 드넓은 폭과 깊이와 넓이를 보여주신 정희진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레베카 솔닛의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가 큰 화제를 모았던 적이 있었다. 보통은 이 상황을 이렇게 해석한다. “남자들은 자꾸 여자를 가르치려 든다. 남자들은 툭하면 잘난 척을 한다.” 나도 그 책을 읽고 짧은 감상을 남겼는데, 나는 이렇게 썼던 거 같다. “레베카 솔닛 같은 똑똑한 여자도 아무것도 모르는 남자가 헛소리할 때 그걸 ‘듣고 있다’. 책의 저자는 이야기를 듣고 있고, 그 주제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남자는 ‘그 책’(레베카 솔닛의 다른 책)이 정말 훌륭하다고 떠들어댄다.” 선생님은 이 책을 이야기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니, 그러니까. (남자들이) 뭐, 가르칠 게 있어요? 그니까, 뭘 가르치겠다는 거에요? 내용이 있어요, 가르칠 내용이?” (오디오 매거진 참고하시면, 음성 지원 가능)
마지막은 역시나 거다 러너에게로 간다.
가부장적 전통 속에서 훈련된 사고인 우리 자신의 사고에 대해 비판적이 되기. 결국, 그것은 지적 용기, 즉 혼자 우뚝 설 수 있는 용기, 우리에게 닿는 것보다 더 멀리 뻗으려는 용기, 실패를 감수하는 용기를 발달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아마도 사고하는 여성에게 가장 큰 도전은 안전과 승인을 추구하는 욕망으로부터 그 모든 것 중에 가장 '비여성적인' 자질 - 세계를 다시 질서짓는 권리가 스스로에게 있음을 주장하는 최상의 자기과신인 지적 오만 - 로 옮겨가려는 도전이다. 신을 만드는 자의 자기과신, 남성 체계건설자들의 과신으로. (397쪽)
자기 과신과 지적 오만으로 무장하자.
강제적 이성애의 허울을 고발하고, 결혼 강제를 비난하자.
남자를 덜 좋아하고, 여자를 더 좋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