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답지 않은 카프카
묘조 기요코 지음, 이민희 옮김 / 교유서가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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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가 대단한 작가임에는 틀림없다. 그가 살아있을 때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은 것보다 죽은 다음에 받은 관심이 훨씬 크고, 그의 작품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계속 나오고 있으니 말이다.

 

어떤 작가는 살아있을 때 인기가 있다가 죽은 다음에는 곧 잊혀지고 마는데, 그래서 문학사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지도 못하는데, 카프카는 몇몇 작품으로 또 일기로 편지로 세계 문학사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특히 그의 작품 중에서 "변신"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품이고, 누구나 한 번쯤은 읽는 작품, 읽지 않았어도 얘기는 들어본 작품이지 않은가.

 

그가 쓴 작품은 이해가 되기도 하고, 이해가 되지 않기도 하는데... 그래서 어떤 방식으로도 해석이 가능해서 다원적인 해석이 되는 작품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대체로 카프카는 문학에 자신의 전 삶을 걸었던 작가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평가받아 왔다. 작품에서 완전을 추구하기에 미완성 작품이 많았다고, 그가 죽으면서 남긴 유언은 자신의 작품을 모두 폐기하라는 것.

 

유언집행자인 막스 브로트가 카프카의 유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가 남긴 작품들을 출판해서 전세계에 알렸다는 것.

 

이 정도는 모두가 공유하는 사항이었다고 생각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카프카의 유명한 말이 있지 않은가. '문학은 도끼여야 한다'는 그런 말.

 

그만큼 그는 문학에서만은 완전함을, 범속함을 뛰어넘으려고 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책은 그런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 놓는다.

 

물론 문학에서 완전을 추구했다는 사실을 바꾸지는 않는다. 다만 카프카 하면 생각나는 우울, 절망, 고독 등을 전복시킨다.

 

카프카는 명랑하고 재치가 있으며 여자를 좋아하고 또 장사에도 무척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는 것.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람들을 이용할 줄 알았다는 것. 비령한 카프카가 되나?

 

그렇게 카프카의 편지와 작품과 일기를 연관시켜 주장하고 있다.

 

카프카가 여자 문제에 있어서는 순진무구하지 않았음은 알고 있었으니 별 다른 문제는 아닌데, 그가 장삿속에도 밝았다는 것, 그리고 끊임없이 주변 사람들을 이용하고 그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고 했다는 것, 특히 자신이 만난 여인들과 가족들에게는 더더욱 그러했다는 주장을 펼치는데...

 

텍스트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렇게 해석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다. 카프카란 사람이 문학에만 목숨을 걸었다면 그가 보험공사의 직원으로 끝까지 다니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다.

 

하지만 자신의 가족이 있고 살아야 하고 무명작가에 불과한 카프카가 직업을 그만두긴 어려웠을 거란 생각이 들고, 그러기에 더욱 직업과 문학의 경계에서 갈등할 수밖에 없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떨쳐버리긴 힘들다. 이 책을 읽었음에도.

 

여자 관계, 특히 이 책은 펠리체 바우어로 알려진 카프카와 두 번 약혼을 하고 모두 파기하게 되는 여자를 중심에 놓고 이야기를 펼쳐 나간다.

 

이 책에서는 펠리스로 나오는데 - 독일어로 읽는 것이 (펠리체는 독일 사람이니)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또 우리나라 카프카 전집에도 펠리체로 번역이 되어 있으니, 펠리체로 한다 - 그 여인이 능력있는 여인이었기에 카프카의 관심을 얻을 수 있었다고... 외모는 그다지 뛰어나지 않아서 카프카의 관심 밖이었으나 세상을 살아가는 능력에서 관심을 얻었다는 관점이다.

 

이는 카프카가 경제에 큰 관심을 가졌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하고, 그것을 그의 편지와 일기와 작품을 통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경제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니, 특히 작가들은 자신이 창작에 전념할 수 있는 경제력을 가지길 얼마나 갈망하는가... 직업을 가져서 시간을 뺏기지 않고 창작활동을 할 수 있다면 하고 바라는 작가들이 많으니, 이를 카프카의 단점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고.

 

"카프카답지 않은 카프카"라고 제목을 붙였지만 사실 카프카의 다른 면에 대한 고찰이라고 하는 편이 더 좋다. 이 모든 것을 합쳐서 카프카가 되는 것이니.

 

한 가지 새로운 주장은 카프카의 작품은 모두 카프카의 편지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가 작품을 출간하지 않겠다고 한 것, 유언으로 모두 불태우라고 한 것도 역시 작품을 출간하라는 주장, 그렇게 하라는 의도를 보인 것이라는 주장인데...

 

세상 어느 작가가 자신의 작품이 읽히지 않길 바라겠는가. 그러니 편지가 읽는 사람을 생각하고 쓰여지듯이 작품 역시 읽는 사람을 생각하고, 그 사람들이 읽기를 바라고 쓴다. 말은 "읽지 마, 읽지 마." 하지만 작가들의 이 말은 "제발 내 작품 읽어 줘."라는 것.

 

읽어달라는 말을 돌려서 작품으로 보여준 것이 바로 카프카의 작품이라는 말인데... 어느 정도 타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그것이 카프카답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카프카답다. 자기 작품에 흥미를 느끼게 만들고 있으니까.

 

읽기는 편한 책이다. 그리고 카프카의 작품에 대해서 편지에 대해서 더 생각하게도 해주는 책이기도 하고.

 

하지만 내 생각은 이 책의 내용은 결국 '카프카다운 카프카'였다는 것. 새롭다기보다는 카프카에 대한 생각을 더할 수 있는 책이라는 것.

 

덧글

 

203쪽 소소한 오타... 사실 관계 바로잡을 것.

 

'혼담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발리와 요제프 폴락은 1912년 9월 15일에 결혼식을 올렸다. ... 이듬해인 1913년 1월에 여동생인 발리가 결혼했고...' 라고 되어 있는데, 앞뒤가 안 맞는다. 1912년 9월에는 결혼식이 아니라 약혼식이다. 이 책의 뒷부분으로 가면 이 사실이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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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동 시전집
김규동 지음 / 창비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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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규동 시인,  1925년에 세상에 나와 2011년에 돌아가시다. 작은 거인이라고 불릴 수 있는 분. 전집에 실려 있는 사진을 보면 주위 사람들과 키 차이가 꽤 난다. 그리고 체격도 참으로 왜소하다. 그러나 김규동 시인을 회상한 사람들의 글과 그 자신의 글, 그리고 시를 보면 작은 체격에도 큰 마음을 품고 사신 분이 아닌가 한다.

 

군사독재시절에는 거리에 앞장서서 나서기도 했던 분이고, 시를 통해서도 현실이 정의롭지 못함을 고발한 분이기도 하다.

 

북쪽이 고향인데, 스승인 김기림 선생을 만나러 왔다가 이산가족이 되어 버린 시인. 돌아가시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교정을 본 것이 이 시전집이다.

 

시인의 시들이 거의 모두(혹시 발표되지 않은 원고를 누군가가 유고로 갖고 있는지는 모르니까) 실은 시집이 바로 이 시전집이다.

 

앞부분에는 김규동 시인의 생전에 활동하는 모습이 찍힌 사진이 몇 장 있고, 사진도 그리 많지도 않다. 깔끔한 시인의 모습을 알 수 있다. 발표된 시집 순서대로 - 중복된 것은 빼고 - 실려 있다. 뒷부분에는 미발표 시들과 이동순 교수의 김규동 시 해설이 실려 있다.

 

실로 한 시인의 모든 시들을 모아놓은 방대한 시집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시인이 시로 활동한 것이 60년이 넘는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시집 또한 적은 편, 작은 편에 든다고 할 수 있다.

 

1948년 "후반기" 동인으로 활동한 시인이 2005년까지 9편의 시집을 냈다는 것은 다작이 아니라 과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치열하게 삶을 살았고, 시를 썼다고 할 수 있다.

 

나에게 김규동 시인은 '하나의 무덤'으로 먼저 다가왔다. 남북이 대치되어 있는 상황에서, 전쟁까지 겪고도 아직까지 평화를 만들어내지 못한 우리들에게 이 시는 '죽어서 비로소 하나가 된 함경도 어부의 아들인 미소년과 지리산 기슭 농군의 아들로 태어난 김일병이 어떻게 해서 한 무덤 속에 나란히 누워, 서로 손잡고 지리산 한라산 백두산 금강산을 다녀오며 평등하게 자유로이 살고 있다는 내용. 죽어서 비로소 형제의 우애를 굳게 맹서'하게 되었다고 하는 시.

 

이제는 죽어서가 아니라 살아서 함께 웃으며 함께 손잡고 다녀야 하지 않겠냐던 시인, 그런 시인이 결국 남북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떴으니...

 

처음부터 시집을 주욱 읽어가다 보면 시인의 시가 어떻게 변해왔는가를 알 수 있고, 그럼에도 시인이 처음부터 끝까지 관점을 유지하고 있는 시는 어떤 시인가를 알 수 있다.

 

시인은 시를 통하여 사회로부터 도피하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시를 통하여 현실로 돌아오려고 했다. 현실과의 만남, 그것이 바로 시인이 추구하는 시였다고 할 수 있다.

 

민주화 투쟁을 위해서 희생된 사람들, 고통받는 사람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인의 삶이었던 분단된 삶. 이북에 두고온 가족, 특히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통일에 대한 열망이 시를 통하여 잘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시인이 만났던 또다른 시인들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그 시인들 중에 '목마와 숙녀'를 쓴 박인환에 대한 시가 가장 많다. 그만큼 시인에게는 요절한 박인환 시인이 안타까운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이제는 하늘나라로 돌아가신 김규동 시인, 작은 몸집에 또 60평생 넘게 쓴 시치고는 작은 시집이지만 그 분의 삶은 컸고, 이 시집 또한 울림이 큰 시집이다.

 

9편의 시집을 순서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나비와 광장(1955년 산호장), 현대의 신화(1958년 덕연문화사), 죽음 속의 영웅(1977년 근역서재), 깨끗한 희망(1985년 창작과비평사), 하나의 세상(1987년 자유문학사), 오늘밤 기러기떼는(1989년 동광출판사), 생명의 노래(1991년 한길사), 길은 멀어도(시선집, 1991년 미래사), 느릅나무에게(2005년 창비), 미간 시편

 

 

여기에 김규동 시인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시인이 쓴 자전적 에세이 "나는 시인이다"를 읽으면 더 좋을 것이다. 시인의 삶과 생각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그래, 내게는 김규동 시인의 대표작인 이 '하나의 무덤'을 여기에 적는 것으로 그의 시전집에 대한 글을 마치고자 한다.

 

하나의 무덤

 

탱크를 몰고 나왔던

함경도 어부의 아들인 미소년과

지리산 기슭 농군의 아들로 태어난

김일병이

어떻게 해서

한 무덤 속에 나란히 누웠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세월이 흐르고

산천은 변했으나

여기서는 예포가 울리는 일도 없고

꽃다발을 들고 찾아오는 이도 없다

그들이 지녔던 일체의 쇠붙이는

흙에 묻혀 한줌 가루가 된 지 오래고

여러 짐슬들이

그들과 더불어 함께 놀고

구름이 또한 두 넋을 가상히 여겨

그들의 머리 위에 정답게 머문다

김일병이 미소년의 손을 잡고

지리산 한라산 구경하러 다녀왔는가 하면

미소년은

김일병과 어깨동무하여

백두산 금강산 개마고원도 돌아왔단다

오도가도 못하는 휴전선도

훨훨 날아다니며

해와 달을 벗하여

농사를 짓고 고기를 잡았다

남북의 두 젊은이는

통일된 삼천리 강토 위에서

평등하게 자유로이 살고 있다

이 허술한 언덕

잡초 우거진 남녘 기슭에

누가 억울한 두 전사자의 시체를

함께 묻어줬는지

잘은 모르지만

여기를 지나는 이는

죽어서 비로소

형제의 우애를 굳게 맹서한

젊은 남북 전사의 가엾은 넋 앞에

다만 머리를 숙이고

깊은 생각에 잠기는 것이었다.

 

김규동 시전집, 창비. 2011년. 375-3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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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민(愚民)ngs01 2017-02-10 10: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군사 독재시절에나 있을 법한 블랙리스트 사건의 장본인은 관저에 처 박혀서 시간 끌기로 나오고 있으니 정말 화가 납니다.

kinye91 2017-02-10 12:34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역사는 반복하지 않는다고 하던데, 어째 자꾸 안 좋은 역사가 반복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면 안 되는데... 바로잡히겠지요. 곧.
 
이것은 시가 아니다 세계사 시인선 139
이승훈 지음 / 세계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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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참 도발적이다. 시인이 시집을 내면서 제목을 '이것은 시가 아니다'라고 하다니. 이런 식의 제목을 본 적이 있다. 마그리트의 그림이었던가. 파이프를 그려놓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한 제목.

 

시인은 '자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시집 [비누](2004) 이후 내가 관심을 둔 것은 한마디로 현실을 그대로 옮기는 것. ... 이런 시쓰기가 노리는 것은 시 따로 인생 따로 노는 이 시대 시인들의 위선과 오만을 미적으로 비판하고 근대 부르조아 예술이 강조한 이른바 자율성 미학을 파괴하고 일상과 예술의 단절을 극복함에 있다. 물론 이런 극복이 현실 환원주의나 거친 리얼리즘으로 퇴행하지 않기 위해서는 不二 사상을 지향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삶에는 무슨 의미도 본질도 없고 그저 흘러가는 과정이 있을 뿐이다. 아방가르드 니힐리즘을 사랑하자.'

 

그러면서 시집의 뒷부분에 비평가의 해설을 실지 않고 본인의 시론을 싣고 있다. 시집으로서는 특이한 형식이다. 시론의 제목도 또한 특이하다. '누가 코끼리를 보았는가'다.

 

결국 시란 무엇이다라고 명확하게 정의할 수 없다는 얘기가 되겠는데, 시가 언어로 이루어지는 이상, 본질과 실제 또 그를 반영하는 문제에서 어떤 미끄러짐이 생길 수밖에 없다.

 

어떤 이들이 간혹 말하듯이 말하고 싶은 무엇이 있는데 그것을 표현할 언어가 없다고 하지 않는가. 그 마음이 언어로 표현되었을 때 표현하고 싶은 마음이 온전히 드러나는가 하면 그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시인이 '현실을 그대로 옮긴다'고 했는데, 이것은 불가능하다. 불가능하기에 현실에서 일어난 일들을 언어로 표현했다고 하지만, 그래서 '이것은 시가 아니다'라고 하지만, 그 언어로 인해서 '이것은 시가 된 것'이다.

 

시론에서도 나오지만 뒤샹이 변기를 가지고 '샘'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순간, 변기는 예술이 된다. 다른 공간에서 다른 이름을 얻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다. 이 시집에 수록된 시도 비록 시인 이승훈이 또는 대학교수 이승훈이, 한 가정의 구성원인 이승훈이 겪은 일들을 사실적으로 - 사실 사실적으로라는 말은 많이 고민해야 한다. 과연 사실적으로 우리의 생활을 표현할 수 있을까. 언어 자체가 이미 사실에서 벗어나 있는데 - 표현했다고 하지만, 언어로 표현된 순간, 그 사실들은 다른 상황에 자리잡게 된다.

 

만약 이러한 일들을 일기에 적었다면 일기라고 할테고, 수필로 발표했다면 수필이 되었을테고, 시론이라는 주장하는 글로 발표했다면 시론이 되었을 거다. 그러나 분명 시인은 '시'라고 발표했다.

 

시인이 시로 발표했을 경우, 그 언어들은 시로 인정을 받는다. 그것이 언어의 사회성이다.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니 시인이 '이것은 시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것은 시이다'라는 주장을 좀더 강하게 하는 것이다.

 

시란 특정인의 것만이 아니라, 특정 언어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라고, 우리의 생활 자체가 시가 될 수 있다고 그렇게 말하는 듯이 들린다.

 

어차피 언어라는 것 자체가 사실과 떨어져 있는 것이니,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사실들, 사건들은 시가 될 수 있음을, 시를 특정한 형식에 가둬두어서는 안 됨을 시로 보여주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시집을 읽어가면서 또 시론을 읽으면서 시론에 불교의 예를 든 것 때문인지 십우도(심우도라고도 한다)가 자꾸 생각났다.

 

그 중 유명한 십우도의 열 가지 과정은 다음과 같은데...

 

1. 심우() - 소를 찾는 동자가 망과 고삐를 들고 산속을 헤맴 

2. 견적() - 소 발자국을 발견함 

3. 견우() - 동자가 멀리서 소를 발견함 

4. 득우(牛) - 동자가 소를 붙잡아서 막 고삐를 씌움 

5. 목우() - 거친 소를 자연스럽게 놓아두더라도 저절로 가야 할 길을 갈 수 있게끔 길들임 

6. 기우귀가() - 동자가 소를 타고 구멍 없는 피리를 불면서 본래의 고향으로 돌아옴 

7. 망우존인() - 집에 돌아와 보니 애써 찾은 소는 온데간데 없고 자기만 남아 있음

8. 인우구망() - 소 다음에 자기 자신도 잊어버린 상태

9. 반본환원(源) 이제 주객이 텅빈 원상 속에 자연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비침

10. 입전수수() - 지팡이에 큰 포대를 메고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감

 

시 쓰는 과정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무엇이 시일까를 찾아 헤매다 시를 발견하고 시를 쓰다가 결국 시도 잊고 자신도 잊는 단계에 이르는 상태. 시와 자신이 하나가 되는 상태가 8. 인우구망 정도 아닐까 하는데...

 

그러나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 자신의 삶 자체가 시가 되는 상태, 그런 상태에서 다른 사람들의 삶 자체도 시가 되는 상태로 나아가야 한다. 즉,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불교에서 해탈은 자신만이 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과 함께 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참선 이후 깨달음을 얻은 다음에는 저잣거리로 나오지 않던가.

 

시도 마찬가지다. 시인 자신만의 세계가 아니라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온 시, 아니 사람들의 삶 자체도 시가 되는 경지... 그런 경지를 어쩌면 시인은 이야기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물론 내 멋대로의 곡해일 수 있지만, 불교의 십우도와 이 시집의 시들, 그리고 시론이 연결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도대체 어떤 시들이냐고? 그냥 시집의 맨 처음에 실린 시만 인용해 본다. 이 시집의 시들은 다 이런 형식의 이런 내용의 시들이다.

 

담배

 

  깊은 밤 술에 취해 택시를 타면 담배 생각이 나고 난 기사 옆 자리에 앉아 기사에게 말한다 담배 한 대만 피웁시다 그러세요 어떤 기사는 허락하고 에이 좀 참으세요 어떤 기사는 참으란다 깊은 밤엔 많은 기사들이 담배를 허락하고 난 창문을 반쯤 열고 담배에 불을 붙인다 담배가 떨어져 기사에게 담배를 빌릴 때도 있다 어느 해던가? 성냥을 켜던 나를 보고 기사가 말했지 선생님 이상하네요 아니 켜기 쉬운 라이터를 두고 왜 성냥을 넣고 다니십니까? 네 성냥이 좋아서요 라이터는 무겁고 성냥은 가볍잖아요? 그런 밤도 있었다

 

이승훈, 이것은 시가 아니다. 세계사. 2007년 초판 2쇄.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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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에 사무치다
서정춘 지음 / 글상걸상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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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다

 

서정춘의 시는 짧다. 그렇게 짧을 수가 없다. 점점 길어지는 요즘 시에 비한다면 서정춘이 쓴 시는 '아하, 나는 시간보다 재능이 모자라 더 짧게는 못 썼소' (시인의 말. 33쪽)라고 말할 정도로 짧다.

 

그렇다고 일본의 하이쿠와 같은 느낌을 주지 않는다. 일본의 하이쿠가 우리나라 선시(禪詩)와 같은 느낌을 준다면 서정춘의 시는 선시보다는 서정시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무언가 마음을 끌어당기며, 짧은 시구절 속에서도 어떤 장면을 떠올리게 하고, 그 장면을 통하여 감정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짧지는 길고 큰 울림을 주는 시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첫시집 '죽편'을 읽고 든 생각이 이 시집을 읽으면서도 변하지 않았다.

 

시들의 길이만 짧은 것이 아니다.

 

시집에 수록된 시들이 29편이다. 대부분의 시집들에 수록된 시들이 80편에서 120편 정도에 해당한다고 보면 많이도 적은 분량이다.

 

그만큼 절제된 시들이 실렸다고 보면 된다. 시인의 감정이 극도로 절제되어 표현된 시들이 또 절제되어 시집에 수록되었다.

 

29편의 시, 그것도 짧은 시들이기에 읽고 또 읽고, 자꾸 읽게 된다.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렇게 읽으면서 장면을 떠올리고, 생각에 잠기고 시가 주는 느낌에 푹 젖게 된다.

 

그래서 읽는 시간은 짧아도 시를 느끼는 시간은 짧지 않다.

 

 

시집이 참 마음에 든다

 

시집을 '가내수공업'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출판사인 글상걸상에서 기계로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만든 시집이란다.

 

시집이라고 하면 사람의 손때가 묻은 느낌을 주는 것이 더 좋은데, 그에 딱 알맞다. 겉표지부터 느낌이 참 좋다. 게다가 시집 제목을 시인이 직접 쓴 글씨로 장식했다. 이보다 더 손맛을 느낄 수 있게 할 수 없다.

 

옛책을 만나는 듯한 느낌을 주는 표지와 책의 제본이 색다른 느낌을 준다. 그것이 또한 좋다. 종이의 두께가 시의 길이와 반비례해서 두깝워서 좋다. 시집을 넘길 때 손에 잡히는 그 두터움이 손끝에 남는다.

 

 

이 시집에 실린 시 중에 첫시집 '죽편'과 통하는 시 한 편을 보기로 한다.

 

대나무 1

 

벼(稻)과의

풀이

나무가 되기까지

살아 온 날까지

살아 갈 높이의

아찔함이었을.

 

서정춘, 이슬에 사무치다. 글상걸상, 2016년. 9쪽.  

 

왜 대나무가 절개의 상징이었는지 생각하게 한다. 윤선도는 '오우가'에서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라고 읊으며, '사시에 푸르다'고 대나무의 절개를 칭송하고, 그래서 친구라고 노래했지만, 대나무가 그 절개를 지키기 위해서는 '벼과의 풀이' 지난한 세월을 꿈꾸며 버티며 지내온 세월이 더해져 커다란 '나무'가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 '아찔함'을 이겨냈을 때 비로소 풀이 나무가 되고, 우리에게 삶을 알려주는 존재가 된다는 사실. 그래서 대나무는 본래부터 나무가 아니었음을.

 

우리의 인생에서도 우리가 살아온 날들은 과거 우리가 살아가야 할 날들의 높이, 그것의 아찔함이었음을 생각하도록 한다. 그런 아찔함이 없었다면, 그 아찔함을 이겨내지 못한다면 그냥 풀로 살아가야 한다.

 

이토록 참 짧은 시들이 모여 있는 시집이다. 서두르지 않고 손으로 만든 시집이기도 하고. 그래서 소중하다. 시의 길이도 짧고 수록된 시의 양도 적지만 어떤 시들보다 길고 깊고,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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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부르며 살았다 - 마종기 시작詩作 에세이
마종기 지음 / 비채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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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종기 시인은 내게는 친숙하지 않은 시인이다. 물론 문학과지성사에서 그의 시집이 꽤 나왔기 때문에 이름은 많이 들어보았지만, 그의 시집을 사거나 시를 읽은 기억은 없다.

 

무엇인가 그의 의사라는 직업과 동화작가 마해송의 아들이라는 점, 우리나라에 살지 않고 미국에 살고 있다는 점이 그를 내게서 멀어지게 했나 보다.

 

다른 시인들의 시를 읽어도 되니 마종기의 시는 나중에 읽자 하는 생각, 여기에 그가 의사라는 직업과 문학을 융합하여 의학과 문학이라는 분야에서도 글을 썼으니 시인보다는 학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그냥 그렇게 넘어갔었는데...

 

헌책방에서 이 책을 보자 이번에는 마종기의 책도 한 번 읽어보자, 얼마나 좋은 기회냐 본인이 자신의 시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책인데... 이런 생각으로 사게 된 책.

 

사실 2대에 걸쳐 문학을 하는 경우가 꽤 많다. '남한산성'이나 '칼의 노래'로 알려진 김훈도 아버지가 소설가였으며, 작년에 '채식주의자'로 외국문학상을 타서 유명해진 한강 역시 아버지가 소설가 한승원이고, 시인으로 유명한 황동규의 아버지는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소나기'의 작가 황순원이니, 이렇게 2대에 걸쳐 문학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마종기도 그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우선 그는 의사로서의 경험을 시에 잘 살려 표현하고 있고 - 이것은 이 책의 앞부분에 잘 나온다 - 그가 미국에 간 것은 자의 반 타의 반이었음을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고 - 그가 무슨 시국사건에 관련되어 군 법정에서 재판을 받은 것이 얼핏 이 책에 나온다, 그때 석방 조건으로 구금 되었을 때의 일을 말하지 않는다와 우리나라를 떠나서 돌아오지 않는다가 있었다고 한다 -  또 읽으면서 마종기의 시를 읽지 않았다고 했는데 다른 책이나 매체를 통해 접해본 시들이 꽤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버지 덕으로 시인이 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세 번의 추천을 거쳐 시인이 되었으며, 시를 어렵게 쓰는 것이 아닌 읽는 사람이 이해하고 감동을 받을 수 있는 시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지니고 시를 썼기에 그의 시는 어렵지 않다.

 

또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을 잘 드러내고 있어서 자신의 상황에 맞는 시들을 발견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여기에 시인이 직접 자신의 시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으니 이 책은 그야말로 금상첨화라 할 것이다.

 

시인이 등단 50주년을 맞이하여 50편의 시를 고르고, 그 시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이고, 뒷 부분에 후배시인들이 말하는 마종기 시인 또는 마종기 시가 있기에 마종기라는 시인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는 책이다.

 

그는 말한다.

 

'나는 내 시가 내 독백이고 주장이고 진심이고 노래이기를 간절히 원하면서 한 편의 시를 쓴다.' (142쪽)

 

이 말은 시에 그의 진정한 마음이 담겨 있다는 것이고, 이런 마음이 독자에게 전달이 될 수 있도록 시를 쓰고 있다는 말이다. 시가 독자에게 다가가 말을 거는 상황, 그것을 생각하고 그는 시를 쓴다고도 할 수 있다.

 

한 편 한 편의 시를 읽는 재미도 좋고, 그 시에 얽힌 이야기를 듣는 재미도 좋은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신문에서 본 기사가 떠올랐다. 이제는 공대생도 인문학을 공부해야만 졸업을 할 수 있다는. 그렇게 교육정책을 추진한다는. 그런데, 인문학을 공부해야만 이라는 말은 인문학을 이수해야만 이라는 말로 들리는데... 이수한다고 꼭 인문학적 성찰을 하는 것은 아닌데...

 

오히려 인문학적 성찰을 할 수 있는 사회적, 문화적 조건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지... 무슨 학점만 따면 다 인문학적 소양이 생기는 것이 아닐테니 말이다. 이건 가장 눈에 보이는, 그러나 가장 인문학하고 거리가 먼 정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대표적인 예로 이 책 214쪽에 있는 마종기 시인의 의과생 동기들의 이야기를 보자.

 

'... 내 의대 동기들은 의대 졸업 대 대학 졸업 자격을 검사한다는 학사고시라는 것을 치렀는데, 그 중 국어 시험에서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 언제나 점잖은 적 말이 없구나. / 관이 향기로운 너는 /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라는 예문의 시에서 "모가지가 긴 이 짐승"은 아래 중 무엇이냐는 질문에 하나같이 사슴을 뽑지 않고 기린을 뽑은 친구들이다.' (214쪽)

 

노천명이 '사슴'이라는 시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건 문제도 아닌데... 이 시를 모르고 있는 사람이거나 또는 배웠지만 금방 잊어버린 사람에게는 당연히 기린일 수 있는 문제. 그러나 이때 의과생들이 과연 국어 과목을 배우지 않았는가. 국어라는 시험이 의대 졸업 학사고시에도 있었다는데... 이건 교과목 이수의 문제가 아니다. 인문학이 생활과 함께 하는 문화 조성이 먼저다. 그 점을 고민하지 않는 것.

 

그러나 마종기 시인은 이런 친구들이 자신의 시를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시를 쓰고 싶다고 하니, 이것이 바로 인문학 정신 아니겠는가 등등. 

 

이런 이야기도 들을 수 있어서 여러모로 재미있는, 생각할거리가 있는 이 책 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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