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에서 온 편지 삶창시선 49
김수열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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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머리를 쓸 필요가 없다. 읽으며 마음을 열기만 하면 된다. 더이상 다른 것은 필요 없다. 최근 시들이 어려워지는 경향이 있다면 김수열의 이 시는 그 반대 방향이다.

 

결코 어렵지 않다. 그냥 읽으면 된다. 읽으면 무슨 내용인지 머리 속에 들어온다. 아니 머리보다는 먼저 마음에 들어온다.

 

시가 마음을 울리는 문학이라면 그에 충실한 것이 바로 김수열의 이 시집에 실려 있는 시들이다. 그래서 한 번이 아니라 자꾸 읽게 된다. 어느 부분을 펼쳐도 좋다.

 

마음 속에 들어오는데, '고부'(42쪽), '102살 할매도 여자다'(46쪽) 같은 시들은 잔잔한 미소를 짓게 하지만  4부에 있는 시들은 마음을 아리게 한다. 우리나라의 아픈 상처, 아직도 아물지 않은 4.3의 아픈 상처를 시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제주도에 살고 있다. 또 자신은 중심이 아닌 변방의 시인(102쪽)이라고 한다. 그만큼 그는 출세라든지 명망이라든지 하는 것에 거리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시집에 실린 '예감, 바닷가 학교'와 같은 시를 읽다보면 시인이 교사라는 사실도 알 수 있다.

 

따스한 눈길로 아이들을 바라보듯이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제주도에 따스한 시선을 주고 있다. 얼마나 따스한지 가슴이 찡해지는 시가 있다. 바로 '천원식당 할머니'

 

천원식당 할머니

 

할머니 별이 되셨다

끈덕지게 달라붙은 암세포 당하지 못해

요양 위해 문 내린 지 얼마 만에

그 문 다시 열지 못하고

대인시장 천원식당 할머니

별이 되셨다

 

별이 되기 전 할머니는 병상에 누워

노점상 할머니들 끼니는 어찌 때우는지

난방도 안 되는 여관방에 살면서

저녁이 되면 어김없이 찾아와

천원 내고 한 끼 먹고 남은 음식을 들고 가

다음날 아침 때우는 아흔 넘긴 노인네 생각에

식당 문 열게 해달라 빌고 빌었다

 

방송에 나오고 세상에 알려지면서

여기저기 할머니 같은 어진 마음들

쌀이며 고추장이며 갓김치 보내오고

대인시장 이웃들

생닭이며 두부며 콩나물 두고 가고

누구는 천 원짜리 밥 먹고 오만 원짜리 슬쩍 넣고 가고

 

할머니는 세상이 이렇게 고마운데

아예 돈 안 받고 그냥 줄까 하다가

먹으면서 떳떳하라고

당신처럼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밥값 천 원 선불로 받으셨다

 

그 할머니 별이 되셨다

대인시장 밤하늘 참 환해지겠다

 

김수열, 물에서 온 편지, 삶창. 2017년. 44-45쪽.

 

말이 필요 없는 시다. 이렇게 따스한 사람들, 밝은 사람들이 많은 우리나라다.

 

그런데도 이들의 사랑을, 이들의 마음을 받아들여 제도로 만들어야 할 모 정당의 국회의원들이 하는 말을 보면 가관이다.

 

나라에서 하는 복지정책을 포퓰리즘이라고 매도한다. 재원을 확보하지 않고 인기를 얻으려고 하는 정책이라고 손가락질을 하는 국회의원들이 있다.

 

도대체 자신들이 왜 그 자리에 있는지 모르나 보다. 이렇게 낮은 곳에서도 열심히, 성실히 마음을 열어가며 있는 것들 조금씩 내어주며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를 제도로 정착시키는 것이 국회의원들이 할 일 아닌가.

 

저들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며 정권을 비난하는 것, 그들의 직무유기다. 제발 이런 시를 읽고 정신차리길 바란다.

 

여기에 4.3에 관련된 많은 시들, 강정에 관련된 시들... 제주도는 아직도 과거 비극을 완전히 청산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제주도의 슬픔이 치유되는 것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제반 갈등들이 해소되어야만 될 터인데...

 

'꿩사냥, 갈치'와 같은 시들을 보면 이런 비극에 마음이 섬뜩해 지기도 한다. 다시는 되풀이 되지 말아야 할 이념으로 인한 살상. 시인은 시를 통해 우리 마음을 울리기도 하지만 이렇듯 우리 현대사의 비극을 불러와 잊지 말아야 함을 자연스레 깨닫게 한다. 

 

최근에 '효리네 민박'이라는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어 제주도, 특히 효리네로 민박을 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는데... 그 프로그램을 잘 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이들이 단순히 연예인이 운영하는, 텔레비전에 나오는 민박집이 있는 제주도라는 생각으로 가지 않고, 제주도에 녹아 있는 아픔들, 슬픔들도 느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이 시집을 통해서 사람들의 잔잔한 정을 느낄 수도 있지만 이런 제주의 아픔, 슬픔도 느낄 수 있다. 그럼에도 이를 이겨내고 씩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느낄 수 있고...

 

마음을 울리는 시... 마음에 들어와 박히는 시... 시를 읽으며 슬픔에 젖기도 하고, 웃음을 짓기도 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덧글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이다. 시를 읽는 좋은 시간을 갖게 해준 출판사, 고맙다. 이런 좋은 시집들이 삶창에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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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경준 작품집 - 지만지 고전선집 282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현경준 지음, 윤송아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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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경준'이라는 이름은 참으로 생소하다. 일제시대 얼마 되지 않는 소설가들을 적어도 이름은 들어보았다고 생각했는데, 현경준이라는 이름은 그 생소한 이름에도 들지 않았다.

 

그런데 우연히 헌책방에서 현경준 작품집이라는 책을 보고, 살짝 들춰보니 일제시대에 소설을 쓴 작가다. 일제 후반기에 리얼리즘 소설을 쓴 소설가, 한국전쟁 때 종군작가로 참전했다가 전사했다고 한다.

 

비록 시대는 한참 지났지만 문학사에 이름을 올리는 작가니 한 번 읽어보자고 골라 들었는데... 두 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한 편은 "탁류" - 사실 "탁류"하면 채만식의 탁류를 떠올린다. 그만큼 채만식의 "탁류"는 우리나라 근대문학사에서 확고한 자리를 잡고 있다 - 다른 한 편은 "유맹(流氓)"이다. 

 

"탁류"는 짧은 단편으로 일제 말기 전향을 강요당하는 지식인들, 자신들의 위치를 읽은 지식인들의 모습에 갈등하는 주인공이 나온다.

 

고향에 돌아왔지만 이미 세상은 변했고, 친구들 가운데서도 변한 사람들이 많은 상황. 그럼에도 그 상황에 머무를 수는 없다는 자의식. 그렇게 갈등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짧막한 소설에 담고 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시대였으리라. 그렇다고 자신이 살아온 과정을 부정할 수도 없었으리라. 과거는 과거, 현재는 현재라고 생각하고 살기에는 너무도 치열하게 살아왔으리라.

 

그 삶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변화를 추구하기엔 일제는 너무도 강고하다는 생각을 하고, 서서히 변해가는 주변 사람들을 보며 갈등도 했으리라.

 

그럼에도 굴복할 수 없다는 지식인의 자의식,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의지를 이 소설에서 볼 수 있는데...

 

채만식의 소설에서는 장편에서 순수하게 살고자 하는 주인공을 휩쓸어버리는 거친 세상을 "탁류"라는 제목으로 잘 표현했다면, 이 소설에서는 '지식인'들을 휩쓸어가고 있는 모습을 '탁류'로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집에서 "유맹"이 읽을 만하다. 그런데, 이 소설은 친일이다 아니다 논란이 좀 되고 있다고 한다. 읽어보니 논란이 될 만하다.

 

만주의 어느 부락, 폐쇄된 부락이다. 다른 말로 하면 '게토'라고도 할 수 있다. 그 부락을 갱생하고자 하는 사람과 그 부락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보고서 형식으로 쓴 소설이다.

 

이 부락의 구성원들을 분석한 앞의 내용을 보면 '중독자, 밀수업자, 도박상습범, 사기횡령범, 기타'로 되어 있다. 즉, 사회에서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을 갱생시키려고 만든 부락이다. 수용소라고도 할 수 있는데... 수용소와 다른 점은 이들이 마을을 떠날 수 없다는 점을 빼고는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을 교화시키는 소장의 열정이 표현되어 있고, 그런 소장을 도와 열심히 일하는 긍정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순동이와 순녀 같은 인물을 보면, 일제시대 만주에서 살아가는 조선인들의 비참한 삶을 보여주고 있다는 긍정성을 덮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일제가 이런 부랑자라는 명목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을 이렇게 감시하고 가두고 억압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 점은 이 소설의 긍정성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전체적인 내용은 이런 일제의 활동을 긍정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이 소설에서 드러나지 않는, 왜 이들이 아편중독자가 되었는지, 이들을 왜 이렇게 가두고 있는지 등을 생각하면서 읽어야한다는 생각이 든다.

 

일제시대, 참 암담한 시절, 그것도 더 암담한 만주국 시절을 이 소설을 통해 알 수 있다는 의미, 그 정도. 현경준 소설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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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고양이가 내게로 왔다 낮은산 키큰나무 14
김중미 지음 / 낮은산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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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은 존재들을 감싸안는 이야기. 소설을 통해서 상처를 치유하고 있다. 이 소설은 그렇게 마음의 상처를 치유한다. 소설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사회복지사. 남들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지만, 정작 자신의 몸을 돌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사회복지사의 업무가 너무 과중에서 과로로 쓰러진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남을 위하는 사람조차, 자신을 위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게 일하는 현실에서, 이보다 더한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게 살아갈까. 우리는 가끔 자신의 상처에 가려진 남들의 상처를 보지 않으려 한다.

 

그런 남들의 상처를 볼 수 있게 만들어주는 소설이 바로 이 소설이다. 고양이를 통해서, 고양이와 함께 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이 소설에 등장하는 고양이는 여러 마리지만 이 중에서 모리와 크레마(나비), 마루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여기에 사람으로는 연우, 연우 아빠, 은주가 중심이 되고.

 

결국 고양이들은 모두 연우네 집에 모이게 되는데, 이런 고양이들로 인해 닫혔던 연우의 마음이 열리게 된다. 연우가 자신의 상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상처, 다른 존재들의 상처도 볼 수 있게 된다.

 

첫자식들을 잃고 연우네로 들어오게 된 모리는 친구가 된 고양이 또롱이를 이웃 개에게 잃게 된다. 또롱이를 유일한 말상대로 여기던 연우가 충격을 받고 더 마음을 닫게 되는 과정이 소설의 첫부분에 나온다.

 

엄마도 잃고, 사랑하던 고양이도 잃고, 아빠는 먹고 살기 바빠서 마음을 열고 서로 대화할 시간도 부족하고, 그렇게 닫힌 마음을 지닌 연우.

 

이런 연우의 행동이 모리를 더욱 힘들게 하고, 모리 역시 또롱이를 잃은 슬픔과 연우 가족의 상처 속에서 상처를 받게 된다. 작은 몸집이 지나치게 비대해지고 온갖 질병에 걸리게 되는. 활동성을 잃게 되는 모리.

 

두번째 부분에서 은주와 크레마(나비)이야기가 펼쳐진다. 길고양이 수컷 나비... 철거를 반대하는 은주네를 만나게 되는데... 마음씨 좋은 은주가 주는 음식으로 은주와 나비는 마음을 열고 만나게 된다. 그러나 철거반대투쟁 과정에서 마음을 다친 아빠로 인해 은주네는 파탄나게 되는데...

 

지지리도 가난한 사람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살았던 사람들, 그 사람들을 한 순간에 내쫓는 재개발, 재개발로 이득을 보는 사람들, 오히려 더 피해를 보는 원주민들... 그 과정에서 어떻게 한 가정이 파탄이 나는지... 은주네를 통해서 알 수 있는데... 여기서 나비는 시력을 잃게 되고, 연우네로 입양되게 된다. 크레마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마루 역시 마찬가지다. 가난한 사람과 함께 살았던 집고양이. 그럼에도 가난 때문에 함께 살 수 없게 된 마루. 집고양이로 어미 없이 새끼 때부터 사람과 살았기에 고양이로서의 표현을 할 수 없는 마루.

 

이 마루가 연우네 집으로 입양되어 다른 고양이들과 지내는 과정.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 소설에서 잘 전개되고 있다.

 

결국 새끼 고양이인 레오까지 네 마리의 고양이들이 자신들의 상처를 안고 상처를 받은 연우와 함께 살아가게 되는 이야기. 이 과정에서 연우가 차차 마음을 열고, 자신의 상처를 들여다보고, 다른 존재의 상처까지 볼 수 있게 되는 이야기다.

 

다른 존재의 상처를 볼 수 있게 된다는 것, 그것은 자신의 상처에 갇혀 지내는 것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비록 상처를 없앨 수는 없지만, 그 상처로 인해 또 다른 상처를 받지는 않게 된다.

 

소설은 그래서 상처를 바로보게 한다. 고양이들의 상처를 통해 연우의 상처를 치유하듯이, 우리 역시 소설을 통해 우리가 지니고 있는 상처들을 대면하게 된다. 그런 상처를 인정할 때 비로소 다른 존재들의 상처들도 눈에 보이고 마음에 다가오게 된다.

 

여기서 공감이 시작된다. 공감이 시작되면 서로 마음을 열 수 있다. 마음을 열고 지내는 관계, 이것이 공동체다. 이런 공동체에서는 이제 상처는 서로가 함께 보듬고 나아가야 할 대상이 된다.

 

그런 과정... 이 소설은 고양이의 관점에서, 사람의 관점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마음이 따스해지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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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 일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4
장 주네 지음, 박형섭 옮김 / 민음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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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라고 하면 인물들 간에 일어나는 사건이나 갈등이 잘 드러나야 하는데, 이 소설은 한 인물의 독백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그것도 과거 회상으로, 어떤 특이한 사건을 경험할 수는 없다.

 

그러니 주절주절대는 주인공의 목소리를 한없이 따라갈 수밖에 없다. 지리한 소설. 그리고 비도덕적 소설. 아마도 도덕적인 생각을 지닌 사람이라면, 또 소설을 통해서 무언가를 얻으려 한 사람이라면 이 소설은 실망만을 안겨줄 것이다. 끝까지 읽지 않고 중간에 뭐 이 따위 소설이 다 있어 하면서 집어치울 것이다.

 

제목 그대로 "도둑일기"니까. 도둑이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니까. 소설에서도 직접 이런 구절이 나온다.

 

'배반과 절도와 동성애가 이 책의 근본 주제이다.' (245쪽)

 

이것이다. 고아로 자란 주인공이 고아원에서 또는 감옥에서 동성애에 빠지게 되고(?) 수많은 도둑들과 동성애들을 만나 온 과정을 이야기해주고 있는 소설. 학교 교육을 충실히 받은 소시민적 도덕관을 지닌 사람에게는 이 책은 너무도 비도덕적인, 청소년들을 타락으로 몰고가는 나쁜 소설일 것이다. 아마도 어떤 이는 왜 이런 소설이 세계문학전집에 포함되느냐고 따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소설이라기보다는 장 주네의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장 주네의 삶이 실제로 이랬다고 하니, 이 소설의 주인공은 어느 정도 장 주네라고 할 수 있다.

 

환경이 사람을 만드는가, 사람이 환경을 만드는가라는 고전적인 질문은 필요없다. 자신의 필요에 의해 살아온 인물의 모습, 환경이나 사람이 아니라, 그냥 자신의 욕구대로 살아온, 어쩌면 그것을 본능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살아온 한 인물이 바로 이 소설에 나온다.

 

환경 탓을 하지도 않고, 사람 탓을 하지도 않는다. 그 시간, 그 공간에서 그냥 자신에게 필요한 삶을 살아갈 뿐이다.

 

없으니 훔칠 뿐이고, 남자가 좋으니 남자를 사귈 뿐이고, 필요가 없어지면 배신할 따름이다. 진실한 관계? 그런 것은 없다.

 

그냥 필요에 의해 만나고 이용하고 헤어질 뿐이다. 여기에는 경찰도, 도둑도, 강도도 모두 똑같을 뿐이다.

 

그런 삶에서 어떤 도덕을 발견하려고 하면 안 된다. 도덕적 설교를 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그게 그냥 삶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데란 말이 자꾸 떠오른다. 장 주네는 결국 감옥에서 글을 쓰기 시작한다. 글을 쓰기 시작함으로써 그는 도둑의 세계에서 문학, 문화의 세계로 나오게 된다.

 

그가 이런 도둑일기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단지 악의 세계를 보여주기 위함이 아닐 것이다. 악의 세계를 절대악이라고 할 수 없음을, 오히려 그들의 삶에도 선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에게는 그들 나름의 사랑이 있는 것이다.

 

사랑때문에 괴로워하기도 하고, 배신 때문에 괴로워하기도 하고, 자신의 삶에서 수치심을 느끼면 견딜 수 없게 되기도 한다. 이들은 그냥 악할 뿐이다.  선이 무엇인지, 교육을 받지 못했기에 배운 사람들이 지닌 알량한 도덕심은 없다.

 

알량한 도덕심으로 무장한 배운 사람들, 그들은 도덕을 무기로 오히려 약한 사람들을 더 악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지 않는가.

 

장 주네가 이 소설을 통해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이 이 사회에서는 비록 '악의 세계'에 속해 있지만, 그것은 우리가 없애버려야 할 절대악이 아니라, 바로 우리 삶의 어두운 면이라는 것 아니겠는가.

 

즉, 그들이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우리들 삶에 함께 하는 존재들이라는 것, 장 주네의 삶을 통해 보면 이들 역시 우리와 같이 울고, 웃고, 사랑하고, 행복해지길 바라고 있다는 것.

 

그렇다면 결국 우리는 무언가 근원적인 접근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들을 그냥 나쁜 놈들이라고 욕하기는 쉽지만, 그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그들 역시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기에...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그것을 장 주네가 자신의 삶을 기록한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도둑일기"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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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04 08: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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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04 08: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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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04 09: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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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04 09: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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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과 마르가리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54
미하일 불가코프 지음, 정보라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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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각도 이런 착각이 없다. 제목을 보자마자 '와, 이건 벨라스케스에 관한 소설인가 보다' 하고 생각했으니... '달과 6펜스'가 고갱에 관한 소설이듯이, 마르가리타라는 이름은 벨라스케의 그림인 '시녀들'에 나오는 공주 이름이니...

 

거장은 벨라스케스이고, 마르가리타는 공주이겠고, 그렇다면 이 그림이 어떻게 그려졌는가를 중심으로 소설이 전개되겠지, 배경은 스페인일테고 하는 얼토당토 하지 않은 생각을 하게 된 것.

 

아니다. 해설을 조금 보니 스페인이 배경인 화가 이야기는커녕 러시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야기다. 거장은 화가가 아니라 그냥 거장이라고 불리며, 그는 소설가이다. 그리고 마르가리타는 공주가 아니며 거장을 좋아하는 유부녀이다. 그뿐이다.

 

여기에 '거장과 마르가리타'가 소설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그다지 크지 않다. 마르가리타는 그래도 많이 나오는 편인데, 거장은 아주 적은 부분에서만 나온다. 그럼에도 그가 주인공인 이유는 소설 속의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본디오 빌라도' 이야기가 그의 소설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소설과 또 소설 속의 소설로 구성되어 있으며, 1930년대에 구상되고 쓰여졌다고 할 수 있는 소련 소설에서 보기 힘든 환상적인 모습을 많이 지니고 있다. (이 소설의 작가인 미하일 불가코프는 1940년에 사망했으며, 이 소설은 그가 살아있을 때 나오지 못하고 죽은 다음에도 한참 지나서 그의 세번째 아내 덕분에 출간되었다고 한다. 원고 역시 그가 아내에게 구술한 내용이라고 하고)

 

사회주의가 막 건설되고 자리를 잡아가려고 할 때 악마와 신이 등장하는 소설이라니... 당시에 발간이 안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악마든 신이든 이들은 인간과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다. 이들은 바로 우리 인간이 지닌 양면인 것이다. 인간의 양면성... 소비에트 사회의 양면성... 이것이 바로 이 소설에 등장하는 환상적인 인물이 지닌 모습이다.

 

주인공은 볼란드라는 악마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분명 악마다. 악마 하면 우리 인간을 유혹하고 해를 입히는 인물로 나타나야 하는데, 이상하게 소설을 읽어갈수록 그는 인간에게 해로운 존재가 아니라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된다.

 

그와 함께 다니는 다른 수행원들이 인간 사회에 못된 짓을 하지만, 그 과정에서 소비에트 사회가 지닌 모순들이 함께 드러난다. 그들의 악행이 모순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데... 사회에서 인정받고 있는 인물들이 어떻게 안 좋은 행위들을 하고 있는지가 그들을 통해서 하나하나 까발려진다.

 

사회주의적 인간, 이타적인 인간, 공동체를 사랑하는 인간, 그런 소비에트의 모습을 기대했다가는 실망하게 된다. 어쩌면 이 소설이 출간되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사회주의가 정착, 발전되어 가야 할 시기인 1930년대 소련 사회는 오히려 사람들의 곤궁이 드러나고, 곤궁으로 인한 탐욕이 발현되는 사회, 또다른 특권층이 대두하고 있는 사회임을 이 소설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특권층이 나오고, 그들은 일반인들과는 다른 삶을 살고, 공동체에 대한 사랑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악마를 통해서 너무도 잘 드러난다.

 

세상에 자본주의의 반대 편에 선 사회주의에서 소비를 지향하는 군중들의 모습과 돈이라면 어떻게든 지니려고 덤비는 소설 속 인물들을 통해서 당시 사회가 사회주의 건설에 실패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신을 떠난 사회는 선전과는 달리 더 힘든 사회임을... 악마를 통해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악마는 나중에 주인공들에게 평안을 준다. 세상에 악마의 힘으로 평안을 얻는다? 어떻게 가능할까?

 

소설의 말미에 신(예수로 추정되는)의 심부름꾼이 악마에게 와서 그들에게 평안을 주라는 부탁을 한다. 악마 역시 수락하고. 이는 두 가지 면에서 평안을 얻게 되는데...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반대되게 한 빌라도가 평안을 얻는 것과, 그런 소설을 쓴 거장과 마르가리타가 평안을 얻는 것.

 

방대한 분량이긴 하지만 읽기 시작하면 빠르게 읽어갈 수 있다. 그만큼 이야기의 몰입도가 높다. 악마라는 환상적인 인물이 등장하여 사건을 마치 마술과 같이 전개해 가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이런 환상성 속에서도 진실을 찾을 수가 있으니...

 

어쩌면 지금 우리 사회는 신을 추방한 사회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신은 추방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신을 추방했다면 악마 역시 추방했어야 하는데, 우리 주변엔 이런 악마의 유혹에 굴복한 사람들이 많지 않은가.

 

그렇다면 추방당한 신을 다시 불러올 때다. 우리 눈 앞에 보이는 신이 아니라 우리 마음 속에 존재하는 신... 그것을 어떤 이름으로 불러도 좋다. 다만, 우리 현실에서 보이는 수많은 탐욕들이 바로 악마의 존재를 알려주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런 악마의 존재를 인식하는 순간, 우리는 악마에게서 벗어날 궁리를 하게 된다.

 

그 궁리 속에서 우리에게 신은 다시 돌아온다. 우리의 평안을 위해서. 하여 이 소설을 악마가 이끌어가고 있지만, 다른 쪽에서 보면 신이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다고 보면 된다. 그 점을 '본디오 빌라도'이야기가 소설 속의 소설로 들어간 이야기일 것이다. 그를 고통으로 해방시켜주는 쪽으로 소설의 결말이 나니까.

 

이 소설은 악마의 관점에서 우리를 바라보게 한다. 볼란드는 어느 나라든 갈 수 있다고 했으니.. 탐욕에 가득차 있으면 그는 언제-어디서건 나타난다. 이 소설에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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