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시가 아니다 세계사 시인선 139
이승훈 지음 / 세계사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제목이 참 도발적이다. 시인이 시집을 내면서 제목을 '이것은 시가 아니다'라고 하다니. 이런 식의 제목을 본 적이 있다. 마그리트의 그림이었던가. 파이프를 그려놓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한 제목.

 

시인은 '자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시집 [비누](2004) 이후 내가 관심을 둔 것은 한마디로 현실을 그대로 옮기는 것. ... 이런 시쓰기가 노리는 것은 시 따로 인생 따로 노는 이 시대 시인들의 위선과 오만을 미적으로 비판하고 근대 부르조아 예술이 강조한 이른바 자율성 미학을 파괴하고 일상과 예술의 단절을 극복함에 있다. 물론 이런 극복이 현실 환원주의나 거친 리얼리즘으로 퇴행하지 않기 위해서는 不二 사상을 지향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삶에는 무슨 의미도 본질도 없고 그저 흘러가는 과정이 있을 뿐이다. 아방가르드 니힐리즘을 사랑하자.'

 

그러면서 시집의 뒷부분에 비평가의 해설을 실지 않고 본인의 시론을 싣고 있다. 시집으로서는 특이한 형식이다. 시론의 제목도 또한 특이하다. '누가 코끼리를 보았는가'다.

 

결국 시란 무엇이다라고 명확하게 정의할 수 없다는 얘기가 되겠는데, 시가 언어로 이루어지는 이상, 본질과 실제 또 그를 반영하는 문제에서 어떤 미끄러짐이 생길 수밖에 없다.

 

어떤 이들이 간혹 말하듯이 말하고 싶은 무엇이 있는데 그것을 표현할 언어가 없다고 하지 않는가. 그 마음이 언어로 표현되었을 때 표현하고 싶은 마음이 온전히 드러나는가 하면 그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시인이 '현실을 그대로 옮긴다'고 했는데, 이것은 불가능하다. 불가능하기에 현실에서 일어난 일들을 언어로 표현했다고 하지만, 그래서 '이것은 시가 아니다'라고 하지만, 그 언어로 인해서 '이것은 시가 된 것'이다.

 

시론에서도 나오지만 뒤샹이 변기를 가지고 '샘'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순간, 변기는 예술이 된다. 다른 공간에서 다른 이름을 얻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다. 이 시집에 수록된 시도 비록 시인 이승훈이 또는 대학교수 이승훈이, 한 가정의 구성원인 이승훈이 겪은 일들을 사실적으로 - 사실 사실적으로라는 말은 많이 고민해야 한다. 과연 사실적으로 우리의 생활을 표현할 수 있을까. 언어 자체가 이미 사실에서 벗어나 있는데 - 표현했다고 하지만, 언어로 표현된 순간, 그 사실들은 다른 상황에 자리잡게 된다.

 

만약 이러한 일들을 일기에 적었다면 일기라고 할테고, 수필로 발표했다면 수필이 되었을테고, 시론이라는 주장하는 글로 발표했다면 시론이 되었을 거다. 그러나 분명 시인은 '시'라고 발표했다.

 

시인이 시로 발표했을 경우, 그 언어들은 시로 인정을 받는다. 그것이 언어의 사회성이다.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니 시인이 '이것은 시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것은 시이다'라는 주장을 좀더 강하게 하는 것이다.

 

시란 특정인의 것만이 아니라, 특정 언어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라고, 우리의 생활 자체가 시가 될 수 있다고 그렇게 말하는 듯이 들린다.

 

어차피 언어라는 것 자체가 사실과 떨어져 있는 것이니,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사실들, 사건들은 시가 될 수 있음을, 시를 특정한 형식에 가둬두어서는 안 됨을 시로 보여주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시집을 읽어가면서 또 시론을 읽으면서 시론에 불교의 예를 든 것 때문인지 십우도(심우도라고도 한다)가 자꾸 생각났다.

 

그 중 유명한 십우도의 열 가지 과정은 다음과 같은데...

 

1. 심우() - 소를 찾는 동자가 망과 고삐를 들고 산속을 헤맴 

2. 견적() - 소 발자국을 발견함 

3. 견우() - 동자가 멀리서 소를 발견함 

4. 득우(牛) - 동자가 소를 붙잡아서 막 고삐를 씌움 

5. 목우() - 거친 소를 자연스럽게 놓아두더라도 저절로 가야 할 길을 갈 수 있게끔 길들임 

6. 기우귀가() - 동자가 소를 타고 구멍 없는 피리를 불면서 본래의 고향으로 돌아옴 

7. 망우존인() - 집에 돌아와 보니 애써 찾은 소는 온데간데 없고 자기만 남아 있음

8. 인우구망() - 소 다음에 자기 자신도 잊어버린 상태

9. 반본환원(源) 이제 주객이 텅빈 원상 속에 자연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비침

10. 입전수수() - 지팡이에 큰 포대를 메고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감

 

시 쓰는 과정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무엇이 시일까를 찾아 헤매다 시를 발견하고 시를 쓰다가 결국 시도 잊고 자신도 잊는 단계에 이르는 상태. 시와 자신이 하나가 되는 상태가 8. 인우구망 정도 아닐까 하는데...

 

그러나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 자신의 삶 자체가 시가 되는 상태, 그런 상태에서 다른 사람들의 삶 자체도 시가 되는 상태로 나아가야 한다. 즉,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불교에서 해탈은 자신만이 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과 함께 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참선 이후 깨달음을 얻은 다음에는 저잣거리로 나오지 않던가.

 

시도 마찬가지다. 시인 자신만의 세계가 아니라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온 시, 아니 사람들의 삶 자체도 시가 되는 경지... 그런 경지를 어쩌면 시인은 이야기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물론 내 멋대로의 곡해일 수 있지만, 불교의 십우도와 이 시집의 시들, 그리고 시론이 연결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도대체 어떤 시들이냐고? 그냥 시집의 맨 처음에 실린 시만 인용해 본다. 이 시집의 시들은 다 이런 형식의 이런 내용의 시들이다.

 

담배

 

  깊은 밤 술에 취해 택시를 타면 담배 생각이 나고 난 기사 옆 자리에 앉아 기사에게 말한다 담배 한 대만 피웁시다 그러세요 어떤 기사는 허락하고 에이 좀 참으세요 어떤 기사는 참으란다 깊은 밤엔 많은 기사들이 담배를 허락하고 난 창문을 반쯤 열고 담배에 불을 붙인다 담배가 떨어져 기사에게 담배를 빌릴 때도 있다 어느 해던가? 성냥을 켜던 나를 보고 기사가 말했지 선생님 이상하네요 아니 켜기 쉬운 라이터를 두고 왜 성냥을 넣고 다니십니까? 네 성냥이 좋아서요 라이터는 무겁고 성냥은 가볍잖아요? 그런 밤도 있었다

 

이승훈, 이것은 시가 아니다. 세계사. 2007년 초판 2쇄. 15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