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형대에 걸린 시
김수영 지음, 김종욱 엮음 / 아라(도서출판)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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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형대에 걸린 시'

 

김수영 전집에 실리지 않은 글들을 발굴해 모아놓은 책이다.

 

책형대, 지금으로 말하면 십자가 정도라고 하면 되겠다. 책형(磔刑)은 기둥에 묶어 세우고 창으로 찔러 죽이던 형벌이라고 하니, 책형대는 그런 형벌을 당하는 기둥에 해당할 것이다.

 

자신의 시를 책형대에 걸어두었다는 것은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에 무관심하지 않고 할 말을 하겠다는 것이다. 전집에 있는 글에서 '시란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라고 했던 시인의 정신과 어울리는 다짐이다.

 

4.19가 일어나고 이승만의 하야 선언이 있은 뒤 김수영은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고 이 글에서 말하고 있다. 

 

'4.26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통찰하지 못하는 사람은 미안하지만 시인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불쌍한 사람들이 소위 시인들 속에 상당히 많이 있는 것을 보고 정말 놀랐다' (35쪽)

 

'시대의 윤리의 명령은 시 이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거센 혁명의 마멸 속에서 나는 나의 시를 다시 한 번 책형대 위에 걸어놓았다' (36쪽)

 

이런 치열함이 지금까지 김수영 시를 읽는 이유가 되고 있다. 시인이 어떤 자세를 지녀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이 글이 김수영의 미수록 원고 제목이 된 이유이기도 하겠다.

 

산문만이 아니라 미수록 시도 세 편이 실려 있고, 번역한 글들과 좌담이 이 책에 실려 있다. 특히 산문 중에서는 김수영의 포로생활을 잘 알 수 있는 글들이 - 시인이 겪은 포로 생활, 나는 이렇게 석방되었다 - 있다. 의용군으로 끌려갔다가 포로로 잡혀 거제도에서 포로 생활을 하던 그때의 김수영을 만날 수 있어서 좋다.

 

여기에 실린 소설가 김이석의 죽음에 따른 문인들의 생활에 대한 좌담은 문인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고 있는지가 잘 나와 있는데... 예나 지금이나 문인들은 풍족하게 살기 힘든 것이 현실이니.

 

얼마 전에 최영미 시인의 말이 논란이 되었다. 생활하기가 힘든 시인이 자신에게 호텔방 하나를 빌려주는 호텔이 있으면 좋겠다는 말... 그러면 자신을 만나러 온 사람들 때문에 호텔 홍보도 되고, 호텔의 영업에도 도움이 될테니 방 하나를 자신에게 빌려주었으면 한다는.

 

그런데 시인이 무슨 벼슬이냐고, 다른 문화인들은 어떻게 하느냐고... 참 많은 반론들이 나왔고, 시인에게 호텔방을 제공하는 업체는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때도 문인들이 먹고 살기 힘들어 어떤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그런 좌담을 했는데, 이들이 제시하는 것이 신간이 나오면 도서관에서 구입하도록 하는 도서관법 제정이다. 책이 많이 팔리면 인세로 작가들이 먹고 살지 않을까 하는 그런 바람.

 

꼭 문인만이 아니더라도 모든 사람이 자신이 하고 싶어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사회적 토대를 마련해야 하는데... 그런 정책이 많이 나오고 있으니 잘 살펴서 실현가능하게 하는 것도 우리의 일이겠다.

 

그동안 누락된 김수영의 글들을 모아놓았다는 의미... 김수영의 포로생활을 시인의 글을 통해 알 수 있다는 것, 그리고 4,19에 대한 김수영의 생각 등을 다시 한 번 만나게 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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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 소설
한강 지음, 차미혜 사진 / 난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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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소설이라고 해서 읽었는데, 소설로 보기가 참 힘들다. 짧은 글들이 이어져 있을 뿐이다. 물론 이 짧은 글들을 꿰고 있는 소재는 바로 '희다'이다.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은 '흰' 것들에 대한 단상.

 

'나, 그녀, 모든 흰' 이렇게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읽다보면 이어지는 내용이 나오기도 한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흰'이 밝음 보다는 어둠 쪽에 더 가깝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보통 '흰'은 밝은, 깨끗한, 순수한, 맑은, 가벼운 등등의 의미를 불러일으키는데, 이 소설에서는 영어 제목부터가 '어두운, 무거운, 슬픈' 등등의 느낌이 나게 한다. 영어로 표기되어 있는 것이 'The Elegy of Whiteness'다.

 

엘레지(Elegy), 사전을 찾아보면 '비가(悲歌)'라고 나온다. 슬픔의 노래라는 뜻이다. 흰이 비가라니... 그렇다. '흰'은 어떤 슬픔을 불러일으킨다. 1부인 '나'로부터 시작하지만 이 '나'는 부재의 나다. 없는 나다.

 

바로 나자마자 세상을 뜬 아이로부터 시작한다. 그렇게 시작해서 다시 아이로 간다. 결국 없음에서 시작에 없음으로 가는 인생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없음에서 시작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있음으로 만들지만, 그 있음 역시 없음 속에 존재하게 된다.

 

'흰'은 다양한 색채들과 함께 존재하지만 그 색채들을 다시 '흰'으로 만든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생이다.

 

굳이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는 말을 떠올리지 않아도 된다. 지금 내게 있는 수많은 색채들은 바로 '흰'을 바탕으로 한다. '흰'을 바탕으로 하지만 이들은 시간이 지나면 '흰'으로 돌아간다.

 

'흰'을 우리는 거부할 수가 없다. 세상에 나온 아이가 처음으로 보는 것은 '흰'일 것이다. 빛... 세상의 빛, 그 다음 아이는 '흰'것으로 자신의 몸을 감싼다. '배내옷'이다. 이렇게 자신을 감싼 것에서 이제 새로운 '흰'이 나온다.

 

바로 엄마의 젖이다. 젖으로 아이는 생명을 유지한다. 그러나 젖은 외부에서 온다. 자신의 '흰'으로 살아가야 한다. 이 때 나오는 '흰'이 바로 이다. 우리 삶을 유지시켜줄, 음식을 씹을 수 있게 해주는.

 

그러다 다시 '흰'이 나오기 시작하면 이제는 처음에 왔던 없음으로 돌아갈 준비를 해야 한다. 검었던 머리가 하얘지고, '흰' 이들이 하나둘 빠져나갈 때... 이제는 다시 한 줌의 재가 될 준비를 한다. 나중에 이 재조차도 없음으로 돌아가게 된다. 텅 빈 흰으로.

 

'없음'에서 태어나 다시 '없음'으로 가는 길, 이 길에서 우리는 수많은 '흰'들을 만난다. 짧은 글들 속에 온갖 '흰'들이 나오지만 이 '흰들'은 바로 우리 삶이다. 

 

하여 소설 속에서 '나와 그녀, 그리고 모든 흰'으로부터 우리는 삶을 만나게 된다. 자신의 삶을 보게 된다.  

 

짧은 글들의 모음이고, 이 글들이 작가의 슬픔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지만, 그 슬픔으로 해서 '흰'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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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도둑 김소진 문학전집 3
김소진 지음 / 문학동네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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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읽은 김소진의 소설집이다. 김소진 소설의 특징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단편들이 주를 이루지만 단편 속에 곁가지로 뻗어가는 많은 사건들이 중첩되어 있다.

 

이런 중첩은 장편소설에 더 잘 어울리는데 단편소설에 이런 사건들과 인물들이 나와 이야기의 끝맺음이 잘되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지식인 소설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이는 생각이 많은 소설이라는 뜻이다. 짧은 것에서도 여러 가지를 다 이야기하고 싶은 욕구.

 

여전히 등장인물들은 지식인들이다. 그리고 과거로 향해 하고 있다. 제목이 되는 '자전거 도둑'만 해도 단편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사건이 과거와 현재로 나뉘고 있다. 많은 과거들과 회상이 중첩되어 있어 짧은 소설에도 여러 사건들을 만나볼 수 있다.

 

단편소설에서는 그래도 많은 이야기들이 짧은 분량에 녹아 있기에 상상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았는데, 이 전집에 실려 있는 '양파'라는 소설은 단편을 넘어섰는데, 이 소설을 읽으며 민중들의 삶과는 괴리가 있다는 느낌믈 강하게 받았다.

 

김소진 작품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일반 민중이 아니라 지식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 민중들의 삶은 과거에나 존재하고, 그것도 어린 시절 자신의 경험 속에만 존재하는데, 어른이 된 자신은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 상태.

 

민중들의 삶에서 떠난 자리에서 있는 주인공들이 '양파'에 등장한다. 한때 운동권이었지만 지금은 사회에서도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 어느 정도가 아니라 인정받는 자리라는 표현이 어울리겠다. 정치인이 되어 꽤나 유명해졌고, 화가로서 자신의 입지를 마련했으며, 의사, 기자 등등이 된 인물이 등장하니 말이다- 인물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들을 통해서 민중들의 삶이 스쳐지나가듯 나오지만 주된 서술의 방향은 이들이 어떻게 사회에 적응해 가는가 하는 점에 있다.

 

변절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사회의 변화에 맞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래서 읽기에 불편하다. 차라리 단편에서 느꼈던 어두운 분위기, 과거의 그 어두침침한 모습들에서는 과거 우리 모습을 발견하고 현재를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할 수 있었는데, 이 '양파'라는 소설에서는 자신을 잃어가는 지식인의 모습을 통해 민중들의 삶이 소설에서 사라졌다는 아쉬움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소설 역시 완성이 되지 않았다. 완성이 되었다면 민중들과의 현재 삶이 더 표현되었을텐데, 그 점은 좀 아쉽다.

 

이 전집을 통해 김소진의 소설 가운데서는 단편들이 더 생각할거리가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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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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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집의 제목이 된 소설은 없다. 그러니까 제목은 "바깥은 여름"이지만, 이 소설집에 실려 있는 소설들은 전체적인 내용으로 제목을 뒷받침하고 있지, 어느 한 편이 대표가 되어 제목으로 나오지는 않는다.

 

그래도 이상하다. 한 소설가가 썼으니 공통된 주제가 있겠지만, 이 소설집에 수록된 7편의 소설들이 각자 시간을 두고 다른 문예지에 실렸으니, 이들을 공통된 주제를 상정하고 소설을 썼다고 하기엔 좀 문제가 있어 보인다.

 

그런데도 제목이 된 소설이 없으니, 제목과 소설들의 연관성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도대체 왜 이런 제목을 붙였을까?

 

반대로 생각해 본다. "바깥은 여름"이라면 안은 무엇이란 말인가? 안은 여름과 상반되는 계절은 겨울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바깥은 즉, 겉으로 드러나 있는 생활은 여름이지만, 실제로 그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겨울이라는 말이 된다.

 

겨울, 삶의 혹독함. 모든 것을 떨어버리고, 털어버리고 본질만 남기는 계절이다. 그 본질에서 이제는 여름을 향해 견뎌내야 하는 계절이 바로 겨울이다. 그렇다. 제목을 거꾸로 읽는다. 그만큼 이 소설에 나온 인물들의 삶은 하나같이 '겨울'에 해당한다.

 

모두 힘들다. 첫소설인 '입동'에서는 아이가 죽고, 두번째 소설인 '노찬성과 에반'에서는 개가 죽고, 세번째 소설인 '건너편'에서는 크리스마스를 지나 헤어지게 되고, '침묵의 미래'에서는 사라지는 언어, 그만큼 사라지는 삶이 나오고, '풍경의 쓸모'에서는 교수가 되지 못하는 주변에서 맴돌 수밖에 없는, 한창인 여름에 접어들지 못하고 있는 강사가 나오고, '가리는 손'에서는 다문화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이야기,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에서는 사고로 남편을 잃은 사람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모두들 중심에서 벗어나 있다. 한창 때를 만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의 삶은 '겨울'에 해당한다. 아마도 이런 상황을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 마지막 소설인 '어디로 가고 싶은신가요'의 인물인 명지가 앓고 있는 병이지 않나 싶다.

 

'장미색 비강진'이라는 피부병. 피부감기라고도 한다는데, 소설에서만 있는 상상 속의 질병인 줄 알았더니, 검색해 보니 실제로 일어나는 질병이다. 많이들 겪는 질병인가 본데... '주로 몸통에서 사지로 퍼져나가는 반면, 얼굴이나 햇빛 노출 부위, 손발바닥에 나타나는 경우는 드물다'고 설명되어 있다.

 

역시 소설은 현실을 반영한다는 말이 맞다. 이 질병을 통해 소설의 제목을 거꾸로 읽게 됐다. 눈에 보이는 부분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남들은 이런 질병을 앓고 있어도 잘 모른다는 얘기 아닌가.

 

소설 속 현석이 명지의 아픔을 알지 못하고, 어렴풋이 나마 짐작하게 되듯이, 또한 이 소설집 속의 인물들의 삶 역시 남들에게 그 아픔이, 슬픔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은 속으로 힘들어 하고, 아파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바깥은 여름'인데 '안은 겨울'은 그런 삶을 살아가게 된다.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이 진실의 전부가 아님을 소설은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결국 소설은 겉으로 드러나는 생활만을 보지 말고 드러나지 않는 생활을 보아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지금 우리의 삶이 그렇다고.

 

이 소설집의 소설들이 간결한 문장으로 빠르게 전개된다. 무성한 여름을 느낄 수 있는 문체가 아니라 낙엽들이 생기는, 그리고 가지만 남게 되는 가을, 겨울의 문체라고 할 수 있다.

 

빠르게, 간결하게 읽히는 소설이지만, 인물들의 삶을 통해서 이런 뼈대들만 보면 안 된다. 그 뼈대들이 추구하는 잎들을 보아야 함을 생각하게 한다.

 

소설은 '입동'으로 겨울에 들어섰음으로 시작하지만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에서 삶은 겨울이지만 이 겨울이 봄으로, 여름으로 가고 있음을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발표 순으로 소설집을 엮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이제는 '바깥은 여름'이니 우리 안도 여름이어야 한다고, 그렇게 해야 한다고... 겨울의 삶은 영원하지 않다고. 작가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인물들의 삶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여름을 꿈꾸어야 한다는 생각을 이 소설집을 읽으며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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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가 이별의 날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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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의학, 과학, 기술이 발전하면서 생활환경이 나아졌고, 그 나아진 환경으로 인해 평균수명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예전에는 환갑이라고 하면 오래 산, 경사스러운 일이었는데, 요즘 환갑잔치를 한다고 하면 젊은데 무슨 잔치냐는 핀잔을 듣게 된다.

 

환갑을 넘어 80이 기본이 된 지 오래. 이제는 백세 시대를 눈 앞에 두고 있다. 그런데 이런 백세 시대에 예상하지 못한, 어쩌면 예상한 복병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치매다.

 

자신을 잃어버리고 목숨만 부지하고 있는 상태... 이 소설에서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상반된 죽음이 나온다.

 

인간이 살아있는 것을 머리와 몸으로 나눌 수는 없지만, 그렇게 분류를 한다면 머리가 먼저 멈춰버리는 사람이 있고, 몸이 먼저 멈춰버리는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소설은 그렇게 분류하고 있다.

 

할머니는 머리보다 몸이 먼저 멈춰버린 분이다. 그래서 할머니의 기억은 온전하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몸보다 머리가 먼저 멈춰버린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치매다. 몸은 움직이는데, 머리는 멈춰버린 상태.

 

머리가 점점 기능을 상실해 갈 때 할아버지는 손자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여러 이야기를 한다. 이 소설은 그렇게 하루하루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로부터 멀어져 가는, 이별해 가는 사람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주머니에서 뭔가를 계속 찾는 기분. 처음에는 사소한 걸 잃어버리다 나중에는 큰 걸 잃어버리지. 열쇠로 시작해서 사람들로 끝나는 거야." (103쪽)

 

할아버지의 상태는 이것이다. 최후까지 할아버지는 할머니와의 기억을 놓지 않는다. 그것을 놓아버릴 때, 그에게는 이제 기억 속의 사람은 없다. 새로운 사람만 있을 뿐이다. 얼마 전에 본 "장수상회"에서 기억이 없지만 감정은 살아남아 있는 상태.

 

그것과 유사하다고 해야 할까? 결국 몸과 머리가 모두 멈춰버릴 때 이제 다른 사람들의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우리 인간은 그렇게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삶을 위해서 자리를 비켜준다. 그 비켜줌에 머리가 먼저일지 몸이 먼저일지는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결국 비켜주는 것은 일치한다.

 

자연스럽다면 자연스러운 그 과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받아들이는 모습을 짧막한 소설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짧지만 소설이 다루고 있는 내용은 결코 짧지 않다. 우리 인생이 시작될 때는 아주 조금밖에 나아가지 못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멀리 나아간다. 멀리 나아가더라도 자신이 돌아올 길을 잊지는 않는다.

 

그러나 더 나이가 들면서 서서히 너무도 멀리 나간 자신을 발견하고, 다시 돌아올 길을 찾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소설에서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맨 처음에는 어디로 가는 길이었는지 잊어버리다 지금까지 어디를 지나왔는지 잊어버리고 결국에는 지금 있는 곳이 어딘인지를 잊어버리고……" (107쪽)

 

마지막, 지금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잊어버리게 되면 그때는 떠날 때이다. 다른 세대에게 자신의 자리를, 자신의 모험을 물려줄 때다. 그렇게 우리는 이별을 한다.

 

이별을 맞이하는 자세... 소설에서 손자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떠나보내며 이별에 대해서 알아간다. 이별에 대해서 더이상 알 수 없게 될 때 그때는 자신이 떠날 때이다.

 

소설에서 손자는 자신의 자식과 함께 나온다. 다시 할아버지와 손녀의 관계가 시작된다. 그렇게 이별을 하지만 우리는 또다른 만남을 통해 이별을 완성한다.

 

이것이 인생이다. 평균수명이 늘어난 만큼 이제는 이별을 맞이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 짧은 분량 속에 결코 짧지 않은 삶을 담고 있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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