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부는 쪽으로 가라 김소진 문학전집 5
김소진 지음 / 문학동네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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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소설이라고 하지만 우리에게는 꽁트라는 이름이 더 친숙하다. 주로 5쪽을 넘기지 않는 아주 짧은 소설들.

 

장편, 중편, 단편이라는 말에 다시 장편(掌篇)이라는 말이 어색해서(장편이라고 한글로 쓰면 아주 짧은 소설과 긴 소설이 같은 글자로 어떤 소설을 이야기 하는지 알기 힘들게 되어 버리니) '엽편소설'이라는 말로도 쓰이는 소설들이다.

 

짧은 소설들은 특징이 있다. 사건은 하나여야 하고, 인물들도 최소화되어야 한다. 게다가 결말 부분에서 극적인 반전이 있어야 한다.

 

결말을 독자가 다 예상할 수 있는 것이면 재미 없다. 이미 익숙한 결말에 독자들이 새로움을 느낄 틈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주 달라서도 안 된다. 도무지 독자가 예측할 수 없는 결말이라면 독자들의 손에서 멀어진다.

 

그래서 꽁트는 힘들다. 너무 익숙해서도, 그렇다고 너무 독창적이어서도 안 된다. 아, 그렇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해야 한다.

 

여기에 결말은 주로 행복한 결말이어야 한다. 비극이어서는 안 된다. 비극을 느끼기에는 분량이 너무 짧기 때문이다. 또 사람들은 꽁트를 자신의 마음을 위로받기 위해서 또는 가벼운 마음으로 읽으려 한다.

 

그러니 꽁트는 가볍다. 결말도 행복하다. 예측 못한 반전도 있다. 이래서 읽는 재미가 있다. 김소진의 다른 소설들, 중편 이상 되는 소설들이 과거로, 과거로 가서 현재를 재구성해내고 있다면, 그래서 전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면 이 소설집에 있는 소설들은 경쾌하다.

 

왜 이렇게 경쾌할까 했더니, 본래 이 소설집은 '사보'에 썼던 것들을 모아 놓았던 것이라고 한다. '사보'가 무엇인가. 회사에서 내는 홍보 책자 아니던다. 이런 책자에는 직장인들의 생활이 담겨야 하지만, 직장인들의 생활이 무겁고, 어둡고, 비극적이어서는 안 된다.

 

직장생활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경쾌하게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단지 직장만이 아니라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도 마찬가지로 밝고 명랑하게 보여줘야 하고.

 

그래서 이 소설집에서는 밝음과 명랑함, 사랑이 넘쳐난다. 긍정적인 에너지가 넘쳐난다고 할 수 있다.

 

김소진 소설 읽기의 어두운 터널에서, 사회의 중압감에서 빠져나와 밝은 햇살을 즐기며 걸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한편 한편의 소설들이 그렇게, 어디론가 여행을 갈 때 버스나 기차 좌석에 앉아 읽으면 더욱 기분이 좋아질 것 같은 그런 소설들이다.

 

우울할 때, 직장생활이 너무 힘들다고 느낄 때, 가정생활에서 만족감을 못 느낄 때, 여기 소설들 읽어보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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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21 08: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21 09: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신풍근배커리 약사 김소진 문학전집 4
김소진 지음 / 문학동네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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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진 전집을 1권부터 순서대로 읽었으면 좋았으련만, 도서실에서 빌린 책이 그 순서를 무시하게 만들어 버렸다. 우선 있는 책부터 읽어야 했기 때문.

 

순서가 바뀌었다고, 또는 건너뛰었다고 소설을 이해 못할 것은 없다. 소설이란 그 한 편 한 편이 독립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이 독립적인 소설들이 읽다보면 하나로 꿰어지는 어떤 일관성이 있지만.

 

김소진 소설의 일관성은 바로 '기억'이다. 자신의 경험을 과거로 과거로 되돌리는 기억. 그 기억을 현재로 불러내는 일. 그래서 어떤 소설을 읽어도 김소진 개인의 경험과 그의 기억을 찾아낼 수 있게 된다.

 

이 소설집에 있는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에서는 전집의 1권이 된 "장석조네 사람들"의 제목을 지닌 장석조네 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목마른 뿌리'라는 소설은 비록 통일이 된 미래를 가정하고 있지만 월남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대부분의 소설에서는 작가가 된 자신이거나 대학생이 된 인물이 등장한다.

 

이토록 김소진 소설에서는 김소진이라는 작가 개인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또한 그의 가족도. 여기에 80-90년대 사회 분위기 역시 인물들의 기억 속에서 재구성 되고 있다.

 

그의 기억을 따라가다 보면 이제는 아득하게 먼 과거가 된 듯한 시기가 눈 앞에 떠오른다. 기껏해야 30여년 전인데도 조선시대 이야기를 듣는 듯한 느낌을 주는, 그런 우리나라의 과거.

 

결국 그의 소설에서는 현재적 갈등은 그다지 심하지 않다. 소설이 현재에서 시작하기 때문이 아니라 현재에서 앞으로 나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현재를 뒷받침하기 위해 그는 과거를 불러낸다. 미래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재현해 내고만 있다.

 

한때 사회주의권이 무너지고 문학에서도 '후일담 문학'이라고 하는 것이 유행했었다. 일본식의 용어를 따서 '사소설(私小說)'이라는 말도 했었고. 그들은 이제 과거를 들려주고자 했을 뿐이다. 미래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온몸과 온정신을 바쳤던 사회주의가 속절없이 무너지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세대.

 

소위 운동권이라고 하는, 일명 386이라고 하는, 자랑스럽게도 자신들의 과거를 드러내었던, 그러나 컴퓨터로 따지면 386은 구식 중에서도 구식이고, 얼마 쓰이지도 않고 486에, 펜티엄에 자리를 내주고 만 그런 컴퓨터 아니던가.

 

김소진 소설을 읽으면 그런 386컴퓨터의 운명이 생각난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제자리에 멈춰서서 과거를 회상한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한때는 최신식이었지만 곧 쓰임새를 잃어버린 그런 인물들이 그의 소설에서 주종을 이루고 있으니.

 

온갖 과거를 끄집어내지만 그 과거가 생산적으로 인물을 밀고 나가지 않는다. 인물은 그냥 멈춰있을 뿐이다. 멈춘 상태에서 과거 속으로 무한히 들어간다. 어쩌면 김소진이 더 살았다면 이제는 과거들을 종합해서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하기 전에 그가 세상을 떠난 것이 아쉽기만 하다. 이 전집에는 두 편의 미완성 유고가 있다. 한 편은 짧은데 (내 마음의 세렝게티), 또다른 한 편은 좀더 길다. (동물원)

 

'동물원'이나 '내 마음의 세렝게티'나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동물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온다. (물론 '내 마음의 세렝게티'에서는 본격적으로 동물이야기가 나오기 전에 소설이 끝난다. 완성이 안 되었다. 그러나 연수원에서 훈련받는 사람들 모습이 바로 동물이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동물원'이란 소설 역시 마찬가지다. 소설 속에서 '남생이'이야기가 언급되고 있고, 또 여자의 입을 빌려 동물원에서 만난 수달 이야기도 언급되고 있지만, 주된 이야기의 인물은 대학생이 된 영기의 경험이다.

 

그의 경험이 과거 회상을 통해 펼쳐지는데, 이런 회상 속 인물들의 모습이 '동물원'에 갇힌 동물들의 모습을 연상하게 하고 있다. 더 진행이 되었어야 하는데 미완으로 끝난 점이 아쉽다.

 

주인공이 취재를 해야 하는 나비, 화려하지만 인간에게 잡히면 박제가 되어야 하는, 자본주의 시대에서는 광고 속에 존재해야 하는, 그런 나비... 이것과 인물들이 얽힌 이야기가 잘 맞물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여하튼 두 권째 읽은 김소진의 소설에서 인물들이 하는 과거 회상을 통해서 그다지 멀지 않지만 너무도 멀게 느껴지는 우리나라의 과거를 만날 수 있게 된다. 어떤 소설을 펼쳐도 그렇게 이 과거는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때 변두리 사람들의 삶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 우리의 기억을 불러낸다는 점이 김소진 소설의 매력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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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사회와 그 적들 김소진 문학전집 2
김소진 지음 / 문학동네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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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읽었는데, 또 책도 있었는데, 물론 이 판은 아니었지만, 읽으면서 내용이 어렴풋이 생각나는 소설이 별로 없다. 그냥 소설의 분위기만 느껴질 뿐이다.

 

역시 단편들에 대한 기억은 오래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소설에 대한 분위기는 남아 있다. 김소진의 소설들, 밝다기보다는 어두침침한 느낌, 무언가 칙칙한 느낌을 준다는 느낌만 남아 있는데, 역시 다시 읽으니 마찬가지다.

 

마치 기형도의 시집을 읽을 때처럼 어두운 분위기,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작가의 운명을 예감하기라도 한 듯이 기형도도 김소진도 그리 오래 살지 못하고 우리 곁을 떠났다.

 

우리 곁을 떠났어도 작품은 남아서 그들의 이름을 알리고 있는데, 이번에 읽은 김소진의 소설은 전집으로 나온 것 중에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이라는 소설집이다. 많은 단편들이 실려 있는데...

 

김소진의 약력을 알면 소설 속에서 김소진 개인사가 잘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소설들에서 대학생이 나온다. 이는 김소진의 경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 이런 대학생 또는 기자라는 직업, 소설가나 시인이 된 인물이 꼭 나오고, 이 인물과 관계를 맺는 인물들로 소시민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나온다.

 

여기에 이런 지식인 말고 아버지나 어머니 철원댁에 대한 서술에서는 공통된 점들이 나온다. 아버지는 월남한 사람, 전쟁 중에 포로로 거제도에서 남한을 선택한 사람, 어머니는 철원댁으로 불린다는, 억척스럽게 가족을 먹여 살리는 민중의 전형. 그리고 한 마을에서 만났던 사람들.

 

결국 김소진의 작품은 지식인과 그 사회의 기층을 이루는 민중이 함께 나오는데, 민중을 주인공으로 삼는 듯하지만, 실질적인 주인공은 바로 지식인이다.

 

대학생 서술자, 기자 서술자 등등 작가 자신의 모습이 다분히 반영된 인물이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에 등장해서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민중들의 삶에 대해서 낙관적인 전망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냥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사회가 민주화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기층민중들의 삶이 더 나아지지 않은 상태, 이들에게는 정권만 바뀌었을 뿐인 모습.

 

민중들과 지식인들이 어떻게 갈등하고 있는지, 마치 이들은 함께 있으면서도 함께 하지 못함을 보여주는 소설이 전집의 제목이 된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이다.

 

시위하다 죽은 열사의 주검을 지키는 자리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여줌으로써 서로가 같은 목적으로 한 자리에 있지만, 그들이 함께 하지 못하고 있음을, 함께 할 수 없음을 짧은 소설을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

 

민중들은 이런 운동권들 사이에서도 밀려나고 마는 관계, 도대체 민중에게 무엇이 열린 사회일까를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민중의 적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고.

 

그렇다고 지식인들이 만족하고 사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들 역시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극적인 변신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 '혁명기념일'에 나오는 석주- 대부분은 자신들의 지향과 지금의 삶의 괴리를 느끼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여기에 소설은 현재에서 시작해서 과거로, 이 과거에서 다시 또 다른 과거로 간다. 이런 과거에서 다시 현재로 돌아오는 구성들을 주로 택하고 있는데, 이는 과거들이 중첩되면서 현재 인물의 모습을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현재를 살아가는 인물이 지금 왜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가를 소설이 서술되면서 과거의 모습들을 통해 우리는 알 수 있게 된다.

 

단편이라고 단순한 구성을 택한 것이 아니라, 김소진의 소설은 이렇게 짧은 소설 속에서 여러 층의 시간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시간들이 바로 인간 삶의 복잡성이고, 이것을 단순명쾌하게 말할 수 없음을 소설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게 김소진 소설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또 [새우리말 큰사전]을 독파했다는 작가의 이력답게 우리말들이 많이 나온다. 어쩌면 사라져 갈 우리말들이 김소진의 소설을 통해서 자리를 잡고 버티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시간의 중첩, 우리말들의 향연, 이 속에서 지식인과 함께 있지만 함께 하지는 못하는 민중들, 그런 우리나라 80-90년대의 모습을 김소진의 소설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아마도 소위 386이라고 하는 지식인들은 김소진의 소설을 통해서 자신들의 과거를 반추해낼 수 있을 것이고, 그 시대를 모르는 사람들은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통해 우리 현대사를 간접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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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광수 시선
마광수 지음 / 페이퍼로드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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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의 중심에 있던 사람이다. 학자로서가 아니라 소설가로서 그는 외설스런 작품을 썼다는 이유로 구속되기도 했다.

 

작품의 외설성을 판단하는 것이 판사, 검사라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그는 자신의 작품으로 대학교수직에서 해직되기도 하니, 참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산 사람이다.

 

우연히 헌책방에 들렀을 때 어떤 사람이 "즐거운 사라"가 있느냐가 했고, 책방 주인은 귀한 책이라고 헌책이었음에도 그다지 싸지 않은 가격으로 판매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아무리 제도권에서 막아도 책이 읽히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그의 소설들이 재판정에서 판단하는 사람들의 정서와 일반 사람들의 정서가 다름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는데...

 

그런 그가 삶을 스스로 마감했다. 이 세상과의 불화를 스스로의 손으로 끝냈다.  대학을 정년 퇴직하자마자 스스로 삶을 끝낸 사람. 다른 세상에서는 글로 인해 억압을 받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는 마음이 먼저 들었다.

 

그가 살아있을 때 낸 마지막 시집이다. 그의 시집에서 여러 시들을 본인이 골라 실었다고 한다. 한글로만 '시선'이라고 되어 있어, 시선집인지, 마광수가 바라보는 시선인지 헷갈렸는데, 출판사 소개들에 작가가 고른 시선집이라고 되어 있다.

 

몇 편을 찾아보니 다른 시집에 실려 있던 시들이 실려 있다. 그런데 참 친절하지 못하다. "시선"이란 제목으로 책을 냈고 8부로 나누어 시집을 냈는데, 그 시들이 어느 시집에 실려 있던 시들인지 아예 알려주지 않는다.

 

그래서 언제 발표된 시인지, 어느 시집에 실린 시인지, 이 시집의 순서가 시대순인지조차 알 수가 없다.

 

시선집을 내면 좀 이런 점을 고려해서 냈으면 좋겠다. 적어도 한 작가의 작품 활동을 결산하는 시집 아닌가. 그런 시집에 출처를 밝혀주면 다른 시집들을 찾아 읽어볼 마음도 생기도 더 좋지 않은가.

 

시집 곳곳에서 죽음의 냄새, 사회와의 불화가 넘쳐난다. 그를 구속까지 몰고간 성에 대한 자유로운 표현은 물론이지만, 성욕이 넘치는 것은 죽음과도 상통하니, 어쩌면 이 시집을 내면서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령 이 시집에 실려 있는 '자살자를 위하여'라는 시를 보면 그는 자살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자살자를 비웃지 마라 / 그의 용기 없음을 비웃지 마라 / 그는 가장 용기 있는 자 / 그는 가장 자비로운 자 / 스스로의 생명을 스스로 책임 맡은 자 / 가장 비겁하지 않은 자 / 가장 양심이 살아 있는 자' (자살자를 위하여. 3연. 120-121쪽)

 

여기에서 그는 여차하면 자신의 생명을 자신의 손으로 끊을 마음이 있음을 비치고 있다. 그렇게 세상이 자신을 받아들여 주지 않으면 자신이 세상을 버리겠다는 의미, 그것은 양심이 살아 있고, 비겁하지 않는 행동이라고, 스스로 생명을 책임 맡은 것이라고 하고 있다.

 

얼마나 세상과 불화했으면, 자신의 삶에 대해서도 세상의 통념에 반대되는 생각을 지니게 되었을까? 그만큼 그는 이 세상과 화해하기가 힘들었는지도 모른다.

 

'한국에서 살기'라는 시를 이를 잘 알 수 있다. 청년들만 '헬조선'이 아니었던 거다.

 

'한국에서 살기는 너무나 힘들어 / 뭘 해도 안 되고 뭘 안 해도 안 돼 /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어' (한국에서 살기. 1연. 73쪽)

 

학자로서도 작가로서도 그는 신산한 삶을 살았다. 자신의 욕망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것이 잘못이라고 하는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이보다 더한 짓들을 하면서도 그것을 글로 표현하면, 문학으로 표현하면 안 된다고 하는 사회에서 그는 견디기 힘들었으리라.

 

얼마나 사회에서 비난에 시달렸으면 '내가 죽은 뒤에는'이라는 시를 썼겠는가.

 

'내가 죽은 뒤에는 / 내가 [윤동주 연구]로 박사가 되었지만 / 윤동주처럼 훌륭한 시인으로 기억되긴 어렵겠고  // 아예 잊혀져 버리고 말든지 / 아니면 조롱섞인 비아냥 받으며 / 변태, 색마, 미친 말 등으로 기억될 것이다 // 하지만 칭송을 받든 욕을 얻어먹든 / 죽어 없어진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으랴 / 그러 나는 윤회하지 않고 꺼져버리기를 바랄뿐' (내가 죽은 뒤에는. 전문. 85쪽)

 

어떻게 기억이 될까? 세계적으로 변태라고 이름난 사드 후작도 자신의 작품을 남겼고, 요즘에도 읽히고 있지 않은가.

 

마광수의 작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세대를 앞서 나왔기에 외설 판정을 받고 그의 문학생활을 힘들게 했지만, 작품은 작품으로 읽혀야 하는데, 여기에 사회적인 잣대,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었으니 그가 견디기 힘든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이 시선집에 실린 시들은 어려운 시가 하나도 없다. 그냥 직설적으로 이야기한다. 천상병의 후기 시가 천진난만한 사람의 시선으로 쓰였다면, 그래서 그의 시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다면, 마광수의 시들은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욕망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윤리, 도덕으로 가린 욕망들을 그는 가차없이 드러낸다. 직설적으로 표현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욕망을 발현하고 싶어하면서도, 실제로는 발현하고 있으면서도 마광수의 작품을 불편해 하는지도 모른다.

 

어두컴컴한 곳에서 은밀히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 남들 모르게 비밀스럽게 행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런 성적인 일들을 그는 공개적으로 백주대낮에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윤리는 인륜이고, 본성은 천륜이라는 허균의 말이 갑자기 생각났다. 마광수는 이런 천륜, 자신에게 주어진 본성을 문학으로 드러냈을 뿐일 것이다.

 

그것이 인정을 받지 못해서 그렇지.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다. 우리는 문학을 문학으로 포용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르지 않았는가. 그렇기 때문에, 마광수의 이런 "시선"이란 시집도 아무렇지도 않게 출간되어 읽히고 있지 않은가.

 

이 시집에서 압권은 '내가 쓸 자서전에는'이다. 그가 살아온 삶들이 이 시에 실려 있다.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 감정이 잘 담겨 있다. 마음이 쓸쓸해지는 시다. 이 전문은 찾아서 읽어보는 것이 좋을 듯하니, 여기서 인용은 하지 않겠지만...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저 세상에서는 이렇게 문학을 윤리, 도덕, 사회적 제도의 잣대로 재는 일이 없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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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콩달콩맘 2017-09-14 09: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2017-09-14 19: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15 08: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알레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1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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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 소설을 읽기 위해서는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그냥 재미있게 읽어갈 수가 없다. 무슨 내용인지, 소설이 무슨 학술서인양 주가 많이 달려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서양이나 남미의 문학, 역사를 알아야만 이해할 수 있는 내용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보르헤스는 묘한 매력이 있다. 이해하기 힘든 소설을 읽는 즐거움이라고 할까. 소설의 미로를 이리저리 헤매고 다니는, 미로 속에서 나오지 못하지 않고 어떻게든 나오게 되는, 자신이 나온 길을 기억하지 못하고, 다시 들어가라고 하면 또다시 헤매게 되는 그런 미로이지만, 그것은 소설의 이해와는 다른 차원인데, 그런 소설들이라는 생각에 심호흡을 하고 그의 소설을 읽기 시작한다.

 

읽다 놓았다, 다시 읽다, 또 놓았다, 읽다를 반복하는 것은 "픽션들"과 마찬가지지만, 이번에는 좀더 수월하게 읽는다.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라고 하기보다는 이상하게 이 소설집에서는 서사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줄거리가 있고, 내용이 눈에 들어오는 소설들이 있다.

 

그럼에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소설들도 있지만, "픽션들"을 읽어서인지 친숙한 느낌을 지니며 읽게 된다.

 

이 소설집에서 첫소설과 마지막 소설을 중심으로 내용을 이해하기로 했다. 처음이자 끝이지만 끝이자 처음인 소설이라고 해야 할까.

 

뫼비우스의 띠처럼 안과 밖이 구분이 되지 않는, 처음과 끝이 없는 소설. 첫소설 제목은 '죽지 않는 사람'이고 마지막 소설 제목은 '알레프'이다.

 

죽지 않는 사람, 그 주인공이 바로 호메로스이다. 오딧세이와 일리아드를 쓴. 그렇다. 작가는 죽지 않는다. 죽을 수가 없다. 그들은 작품을 남김으로써 영원히 산다. 유한한 생물로서의 목숨이 아니라 인간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존재하는 존재, 사람들 기억에 영원히 남아 유전하는 존재다.

 

그러므로 그는 죽을 수가 없다. 죽지 않는 사람이 된다. 이런 작가는 '알레프'를 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본 알레프를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사람.

 

'알레프란 모든 지점들을 포함하는 공간 속의 한 지점'(204쪽)이라고 하는데, '모든 언어는 상징들로 이루어진 알파벳이고, 그것을 사용한다는 것은 상대방과 하나의 과거를 공유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겁에 질린 내 기억이 간신히 간직하고 있는 그 무한한 알레프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을까?' (208쪽)

 

'알레프의 직경은 2~3센티미터 정도 되는 것 같았지만, 우주의 공간은 전혀 축소되지 않은 채 그 안에 들어 있었다. 각각의 사물은 무한히 많은 사물들이었다. 그것은 내가 우주의 모든 지점들에서 그 사물을 분명히 보았기 때문이다.' (209쪽)

 

이것이 작가이다. 첫소설에서는 작가의 시간적 운명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면, 마지막 작품에서는 공간적 운명(?)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작가는 한 공간에서 우주의 모든 공간과 시간을 본다. 그 공간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중첩되어 있다. 한 공간에 지금까지의 우주 역사가 녹아들어 있는 것이다. 그것을 본 사람, 그가 바로 작가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여기서 시작한다. 작가의 목숨은 유한하다. 유한한 생명을 지닌 작가가 무한한 세계를 사람들에게 알려줘야 한다. 그것을 알려줄 수 있는 언어 또한 한계가 있다.

 

이 한계들을 인정하고 거기에서 시작하는 일. 그것이 바로 작가의 일이다. 그 일이 성공했을 때 작가의 알레프는 작품으로 남는다. 작품 속에서 작가는 죽지 않는 삶을 살게 된다.

 

소설은 이렇게 순환한다. 처음이 끝이 되고, 끝이 처음이 된다. 우리의 삶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 삶 자체가 바로 알레프라고 하는 듯하다.

 

우리 삶에는 전 우주의 역사와 삶이 담겨 있다. 이 유한한 삶에 무한함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 보르헤스 소설을 읽으며 한 생각이다.

 

하여 이 소설집을 읽으면 앞으로 똑바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제 자리로 돌아온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다. 커다른 원에서는 원이 직선이듯이, 우리의 삶은 이렇게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행로를 갈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굳이 안과 밖을 구분할 필요는 없다. 이 소설집의 제목인 '알레프'처럼, 우리 역시 우리 삶의 알레프를 볼 수 있으면 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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