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리굴라.오해 알베르 카뮈 전집 12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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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읽어가고 있는 카뮈의 작품들 중에서 이번엔 희곡이다. 젊은 시절,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아주 오래 전에 카뮈의 '정의의 사람들'을 읽고 많은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이방인'이나 '페스트'라는 학교에서 들었던 작품 이외에 내가 처음으로 읽은 카뮈의 작품이 아마 그 작품일 듯하고, 그래서 카뮈의 소설 말고도 희곡도 읽을 만하다는 생각을 계속 지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번 읽은 두 편의 희곡 중에서 '칼리굴라'는 그다지 감흥이 오지 않았고, '오해'는 엇나가는 운명에 대해서, 인간들의 삶이 이토록 엇나가고 있음에 대해서 생각하게 해서 괜찮은 편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로마의 황제 칼리굴라에 대해서는 조금 알고 있었다. 그가 폭군이었다는 것, 그래서 쫓겨났다는 것, 그것이 전부 다다. 이 희곡에서 그가 폭군인 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변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그런데 어떻게 폭군이 되었나 하는 것에 개연성을 부여하는 것이 바로 희곡이 아닐까 한다.

 

로마의 황제, 절대권력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 그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단 하나만 빼고. 그것은 바로 인간은 죽는다는 사실. 그 진리 앞에서는 황제라도 어쩔 수가 없다. 그렇다면 절대권력의 소유자에게도 자유란 완전하지 않다는 말인가?

 

여기서 '달을 따다 달라'고 하는 말은 결국 소유할 수 없는 진리를 개인의 것으로 소유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욕망, 이 욕망은 바로 죽음을 자신이 조종하려는 마음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죽음마저 조종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완전한 자유에 이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칼리굴라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누구라도 그렇게는 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어차피 막지 못할 죽음을 자신의 뜻대로 해보려 하는 것. 이때부터 궁정에는 피바람이 분다. 그는 죽음의 본질은 어쩌지 못하니 다른 사람의 죽음을, 즉 다른 개체의 죽음을 자신이 조종하려 한다.

 

또한 자신의 죽음에서도 한 발 물러나 있기도 하다. 암살 기도를 알면서도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고 오히려 그런 기도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 죽음을 조종하려는 몸부림이라고나 할까.

 

여기서 부처가 생각났다. 부처 역시 절대권력을 쥘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권력을 탐하지 않는다. 그는 진리를 깨우치려고 한다. 그는 절대로 진리를 소유하려 하지 않는다. 깨우치려 할 뿐이다. 여기서 칼리굴라와 부처의 길이 달라진다.

 

부처의 깨달음, 그 깨달음 뒤의 자유, 그것은 죽음조차도 넘어서는 자유다. 그러니 부처는 진리의 세계에 도달하게 된다. 도달해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사람들에게로 그 진리의 세계를 가지고 온다.

 

'옛다, 여깄다' 하고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우치도록. 스스로 깨우침이 없는 진리는 진리가 아님으로. 그 깨우침으로 죽음을 넘어서도록 안내자가 된다. 칼리굴라는 죽음으로 이끄는 안내자라면 부처는 죽음을 넘어서게 하는 안내자다. 이렇게 다르다. 이런 점을 중심으로 읽긴 읽었는데...

 

그렇다면 '오해' 역시 '죽음 앞에 선 인간'-필립 아리에스의 책 이름이기도 하다- 이다. 오해로 아들과 오빠를 죽인 여인숙 주인들. 그러나 이런 오해는 운명 앞에서 서로의 말이 빗나가는 데서 나온다.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하지 못한다. 말의 비틀림.

 

말은 진실에 한 발 다가서기도 하나 자꾸만 그 자리에서 어긋난다. 서로의 마음을 열어주는 말들이 아니라, 서로가 알아주길 바라는 말들일 뿐이다.

 

즉, 내 감정의 진실을 담아 전달하는 말이 아니라, 상대방이 내 진실을 알아주길 바라지만 미끄러지는 말을 하고 만다. 이 미끄러지는 말들 속에 사람들의 관계가 있다. 아무리 가까운 가족이라도 이렇듯 말들이 미끄러지고 만다면 진실한 관계에 이를 수가 없다.

 

좀더 크게 보면 죽음 앞에서 인간들은 진실한 말들을 주고 받아야 하는데도 자꾸만 말을 비트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진실을 담지 않고서도 남들이 진실을 알아주기만 하는 말들. 그런 말들은 기필코 오해를 부른다. 그리고 오해의 끝은 죽음이다.

 

이런 파멸적인 관계로 치닫는 말들... 마지막 장면이 계속 마음에 울린다. 마음을 받아주는 말들이 끝까지 나오지 않는다. 슬픔에 가득 차 있는 마리아에게 하인이 하는 말, '아뇨.'

 

소통하지 못하는 말들 속에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 아니던가. 그걸 희곡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카뮈는. 그런 생각을 하게 한 희곡 '오해'였다. 

 

희곡이라는 글의 특성 상 무대에서 상연될 것을 전제로 쓰여졌기에, 대사가 많으니 그 대사를 중심으로 읽어가면 빨리 읽게 된다. 그러나 빨리 읽으면서도 지시문에 있는 내용들을 머리 속에서 상상해내야 하기 때문에, 읽어가면서 연극의 장면처럼 머리 속에 내용을 떠올리며 읽게 된다. 그것이 희곡을 읽는 매력이기도 할 것이다.

 

아마, 직접 연극으로 보면 또다른 감흥을 맛볼 수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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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모마일 2016-12-22 09: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카뮈 희곡 중에 칼리큘라는 많이 들어본 거 같아요. 그다지 감흥이 없었다고 하셨는데, 서평을 읽는 동안 한번쯤 꼭 접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해도 마찬가지구요. 좋은 서평 잘 읽고 갑니다.

kinye91 2016-12-22 09:41   좋아요 1 | URL
저한테 그렇다는 얘기니까요. 읽는 사람에 따라서는 다른 느낌이 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요.
 
너 없는 그 자리
이혜경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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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집을 읽으면서 사전에 없는 낱말이 자꾸 머리 속에 맴돌았다. "비끄러지다" 이런 말이 있을 리가 없는데도 이 말이 떠오르는 이유는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에 나오는 인물들이 모두 비틀리고 미끄러지는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두 엇갈린 관계를 맺고 있다. 엇갈린다기보다는 일방적인, 자신의 처지에서 바라보는 관계를 추구하기에 결코 맞물릴 수 없는 관계로 끝나고 마는 그런 만남들을 지속한다.

 

첫소설에서부터 이 점이 드러난다. 첫소설은 이 소설집의 제목이기도 한데, '너 없는 그 자리'라는 소설, 여성 화자의 편지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얼핏 보면 사랑하는 사람이 어쩔 수 없이 떨어져 있을 때 느끼는 애틋한 감정들이라고 착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읽어보면 그것이 아니라 일방적인 감정의 전달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남성에 대한 여성의 일방적인 감정, 이런 일방적인 감정은 사랑이 아니다. 그러기에 이 만남은 지속될 수 없다. 남자는 여자에게 해외 근무 파견을 받았다고 거짓말을 하고, 이것을 알게 되는 여자로 소설이 끝난다.

 

그만큼 둘의 관계는 일방적이다. 일방적으로 사랑에 빠지기 때문에 상대의 감정을, 상대의 처지를 고려하지 않는다. 여기에서는 일방통행만이 있다. 이 소설집에 실린 대부분의 작품들이 그렇다.

 

일방통행. 이것은 소통이 아니다. 소통이 아니기에 제대로 된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이런 관계는 결국 비틀리고 미끌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자꾸만 '비끄러지다'라는 말이 생각났는지도 모른다. 이런 말을 만들어내고 싶었는지도.

 

이 소설의 감상을 한 단어로 표현하라면 그렇게 '비끄러지다' 가 된다. 두번째 소설인 '한갓되이 풀잎만'에서도 일방적인 사랑이 나오고 '북촌'에서도 그렇다. 기다림이 주제인 것 같지만, 결국 함께 할 수 없는 관계로 끝나게 된다. 그런 소설들이 '감히 핀 꽃'에서도 '해풍이 솔바람을 만났을 때'에서도 나타난다.

 

좀 대상이 다르기는 하지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이렇게 비끌어지게 표현한 소설인 '금빛 날개'에서 절정을 이룬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제대로 된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는 현대인. 자수성가한 사람이 자식에게 기대하는 것, 자신의 삶을 유지해가는 것, 그러나 그것은 다른 사람들과 제대로 된 관계를 맺지 못하게 되고, 그것이 결국 자식의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

 

비틀린 관계가 이런 비극을 유발한다는 것을 소설에서는 잘 보여주고 있는데, 그나마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 '검은 강구'다. 물론 토끼 반도라든지 여우 열도, 흑곰, 독수리라는 표현으로 우리나라와 일본, 러시아, 미국을 빗대어서 사할린으로 끌려가 살게 된 우리 민족의 비극을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여기서도 관계는 비틀리고 만다.

 

그래도 이 소설에서 아버지가 결국 사할린에 남는 것으로 끝나지만, 이 아버지 역시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니... 소설의 분위기가 유지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 편 한 편의 소설이 모두 이런 어긋나는, 서로 맞물리지 못하는 관계를 드러내주고 있다. 마치 지금 현대인들이 관계를 맺고 있지만, 서로 함께 가는 관계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지내는, 언제든지 따로 갈 수밖에 없는 관계를 맺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축제'에서 이런 관계가 어느 정도 회복되는 듯도 하지만, 이 소설에서 남편과 함께 한다는 결말을 찾기는 힘들다. 자신의 과거 속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비록 인도네시아에 가서 그런 단초를 마련하기는 하지만, 완전히 극복했다고는 할 수 없다.

 

자신의 과거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 그것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올바로 맺지 못하게 한다. 즉, 자기 속에 갇혀서 남을 보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 한없이 이해해 줄 수 있는 남편이라고 해도 함께 하기는 힘들다.

 

'꿈길밖에 길이 없어'에서 주인공이 자살을 하게 되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은 최선을 다하지만, 자신의 능력으로는 가족을 제대로 돌볼 수 없다는 절망, 그 절망 속에서 정신줄을 놓아버리지만 또 하나의 자기 세계에 갇힌 사람으로 인해 현실로 돌아오게 되는 사람.

 

남을 이해해준다는 행위가 남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음을, 이 소설을 통해 역시 비틀리고 미끄러지는 관계를 만날 수 있다.

 

그렇다. 우리는 사회 속에서 남들과 함께 살아가지만, 어떨 때는 자기 속에 갇혀 자신의 안경만으로 남을 판단할 때도 있다. 자기만의 안경을 고집하는 것, 그것은 제대로 된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게 한다.

 

내 안경이 과연 남을 제대로 보게 했는가? 자신을 남의 위치에 놓아보지 못한 사람, 그런 사람은 결코 온전한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이 소설집의 주인공들처럼 잘못된 관계로 파국에 이를 뿐이다.

 

그러니 이 소설집은 이런 일방통행적인 관점에서 만남을 이루는 것이 어떻게 관계를 파탄내는가를 생각하게 해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한편의 단편들 속에서 답답함을 느끼며 읽지만, 어쩌면 이것이 지금 우리 현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나는 나만의 세계에 갇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며... 나를 되돌아보게 만든 소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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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이문재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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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눅진눅진하다. 이 시집을 읽는 동안 몸이 물에 젖은 옷을 입고 걷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가만히 있지는 못하는데, 자꾸만 걸어야 하는데, 옷은 점점 무거워지는 상태. 그렇다고 길이 편하냐 하면 그것도 아닌.

 

그런 느낌 속에서 허우적거리면서 시집을 읽었다고 해야 하나. 무엇하나 선명하게 마음에 딱 다가오지 않고 끈적끈적하게 들러붙는 느낌을 주는 시들이다.

 

선명함과는 거리가 먼 시들... 그런 시들을 읽으며 마음이 녹초가 된다. 그냥 축 처지게 된다. 세상에 시를 읽으며 어떤 희망을 얻어야 하는데 오히려 시 속으로 점점 빠져들어가 헤어나오지 못하게 되다니.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명징한 언어의 세계에 살다가, 그런 언어를 좋아하다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언어를 만나, 이건 뭐지 하는 기분... 도대체 무어라 정의할 수 없는 대상을 만났을 때의 당혹감. 그런데도 그 끈적한 분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

 

조금만 더 읽으면, 더 생각하면 명징한 의미를 발견할 것 같은 느낌... 그 느낌 속에서 읽고 읽어도 계속 발에는 끈끈이가 붙어있는 듯 경쾌한 걸음을 걷지 못한다.

 

무겁다. 머리를 무겁게 하고,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결코 편하지 않다. 그러니 이 시집에서 어떤 명쾌함을 바랐다가는 낭패를 보기 쉽다. 이게 이 시집의 장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만, 여전히 이 시집은 깔끔하지 않게 다가온다.

 

시인은 이 시집을 1988년에 냈다고 한다. 이것을 2001년에 다시 냈다. 세기가 바뀌었는데 다시 출간한 시집.. 십 년이 지났는데, 세상이 변했는데, 그런데도 이 시집이 다시 나온 것은 시집이 지닌 불명확성 때문일 것이다. 불명확성은 불확정성이라고도 할 수 있으니, 세월이 지나도 계속 의미는 새로운 해석을 필요로 한다는 그런 의미에서.

 

읽으면 읽을수록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야 하는... 발 밑이 끈적끈적하기 때문에 빨리 갈 수 없고,다시 돌아오기도 해야 하는 그런 시들.

 

제목에서도 이 눅진함이 느껴지는데... '젖은 구두'란 표현이다. '젖은 구두' 정말로 열심히 산 생활인의 신발이다. 발에서 땀이 나서 신발이 젖도록 돌아다닐 수밖에 없는 사람의 모습... 그 사람이 잠시 멈춰서 젖은 구두를 '벗고' 다른 세계에 있는 '해에게 보여줄 때' 그때 어떤 생각을 할까. 그것은 어떤 모습일까를 생각하면서 읽게 된다.

 

젖은 구두를 해에게 보여주면 해는 젖은 구두를 말려줄까? 아니면 지금 말려도 소용없어. 넌 계속 걸어야 해라고 할까. 누구든 이 세상에 나왔으면 죽을 때까지 걸어야 할 운명인 걸까? 그것이 '내'가 아니더라도 누구에게든 해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시집 제목이 된 시를 찾는데... 그래도 제목이 된 시가 시집의 대표격이지 않을까 하는 이런 단순한 생각으로... 찾았더니, 이건 제목과 내용이 도무지 연결이 안 된다. 제목이 시 내용에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이런 참... 게다가 제목과는 몇 글자가 다르다. ('내 젖은 구두를 해에게 보여줄 때' - 91쪽.  '를'이라는 조사가 들어갔고, '벗어'라는 말이 빠졌다.) 

 

그러다 제목이 아닌 첫 시행에 제목과 거의 같은 구절이 나오는 시를 찾았다. 이 시집의 마지막에 있다. ('길에 관한 독서' - 169쪽,  첫행이 '한때 젖은 구두 벗어 해게게 보여주곤 했을 때'로 시작한다. 제목과 많이 비슷하지만 똑같지는 않다) 이것 역시 명확하진 않다. 그러나 이런 불명확성 속에서 계속 움직이며 걸어야 하는 사람들... 결국 길 위에 있어야 하고, 신발은 늘 젖어 있어야 하는, 그런 사람들의 운명, 또는 모습을 보게 된 것이 이 시집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멈춤은 곧 죽음이니, 삶은 움직임이요, 정류장이 아닌 길 위에서 걷고 있음이고, 이는 바싹 마른 신발이 아닌 젖은 신발, 젖은 구두여야 한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럼에도 명확하진 않다. 시집은 계속 마음 속에 어떤 찜찜함을 남기고 있다. 이렇게 받아들여도 되나, 다르게 받아들일 수도 있음을 알라고. 꼭 한 쪽으로만 생각하지 말라고.

 

시인의 말에서 그 점을 느꼈다. 제발 하나로만 생각하지 말라고... '시인의 말' 제목이 바로 '자메이카 봅슬레이'다.

 

상반된 것이 하나로 묶여 있는 그 상태... 시는 이렇게 비슷한 언어들이 묶인 것이 아닌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언어들이 모여 있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그것이 시의 역할일 수도 있다고.

 

그러니 이 시집에서 어떻게든 하나로 해석되지 않고, 명확하게 이성으로 정리가 되지 않더라도 우리 삶은 본래 이런 모순적인 것이라고, 그 모순들이 계속 움직이는 것이라고. 그래서 우린 길 위에 있을 뿐이라고. 그 길을 가자고. 그렇게 삶의 다양성, 모순성들을 생각해 보는 이문재 시집 읽기였다고 위안을 하면서...

 

시집 읽기를 마쳤다고 할 수밖에...

 

위에서 언급한 두 시는 길어서 인용을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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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의 운동화
김숨 지음 / 민음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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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의 운동화'

 

이렇게 영어로 표기를 하면 누구의 운동화인지 모른다. 그 시대를 알지 못하면, 그 사람을 알지 못하면.

 

'L'. 그는 바로 '이한열'이다. 87민주화 투쟁의 한 가운데에서 최루탄에 희생된 학생. 86학번이라고 한다. 대학에 들어온 지 갓 일년이 지난 나이. 세상의 불의에 맞서 앞장서야만 했던 나이. 그렇게 당시의 학생들은 소위 386세대라는 이름으로 존재했다.

 

부연 최루탄이 일상생활이던 87년. 하지만 이 소설은 그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의 운동화 이야기다. 낡아가는 이한열의 운동화. 그 운동화를 복원하는 이야기.

 

운동화 복원은 곧 이한열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기도 하고, 87민주화 운동의 정신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왜 우리가 이한열의 운동화를 기억해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국민의 힘으로 얻어낸 민주주의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비록 세월이 흘러 누더기가 되고, 사그라져버릴 것처럼 낡아가고 있지만, 그것은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져서는 안 된다.

 

우리 눈 앞에 있어야 한다. 늘 기억하라고. 그 정신을 잊으면 안 된다고. 그래서 소설에서 복원가인 주인공은 그 운동화를 복원하는데... 생명이 죽어가는 냄새를 맡게 된다.

 

그냥 놓아두거나 복원하지 못했을 경우 마치 생명체가 썩어가듯이 썩어가고 있는 운동화. 그런 냄새는 바로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후퇴를 의미하기도 한다.

 

하나하나 운동화를 복원해 가는 과정에서 서서히 냄새가 없어지지는 않는다. 그렇다. 민주주의를 유지, 발전시키는 것은 서서히 표가 나는 것이 아니다.

 

내부로부터는 서서히 변화가 있겠지만, 변화는 어느 순간 확 우리에게 다가온다. 마치 이 소설에서 썩어가는 냄새가 어느 순간 사라졌듯이.

 

복원이 완성되어 가는 지점에서 냄새는 사라지고 만다. 냄새의 사라짐과 운동화의 복원. 썩어가는 민주주의의 회복... 그렇게 봐야 하지 않을까.

 

아니, 우리가 잊고 있었던 87년 정신을 다시 되살리는 것 아닌가? 서서히 곪아가서 썩어가고 있었는데, 냄새가 우리나라 곳곳에 넘실대고 있었는데, 우리는 애써 외면하고 있었던 것 아닐까. 마치 이 소설에서 다른 사람들은 냄새를 맡지 못하고 있듯이.

 

관심이 없으면 냄새조차 맡지 못하는 상태에 처하게 되는 것 아닐까... 그렇다고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사람까지 그 냄새를 무시하면 안 되지 않나. 어떻게든 냄새를 의식하면서 행동을 해야 한다.

 

복원에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은 정신을 살리는 것이고, 그 때를 잊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과거를 다시 우리에게 되살려 오게 하는 것, L의 운동화는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단지 운동화의 복원 얘기가 아니다. 잃어버린, 또는 잊고 있던 민주주의에 대한 얘기다. 우리는 어쩌면 억지로, 이 소설의 또다른 인물은 이소연이라는 여인이 왼발과 오른발에 맞지 않는 신발을 신겨 아이를 집까지 억지로 끌고 왔듯이, 그렇게 87년 정신을 어거지로 합리화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다시 우리는 광장에 서게 되었는데... 신발의 짝이 맞지 않았음을, 왼쪽과 오른쪽이 바뀌었음을, L의 운동화를 통해... 생각하게 된다.

 

비록 짝을 완전하게 갖추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L의 운동화 복원을 통해 87년 정신만은 잊지 않고, 계승해가고 있음을... 광장에 다시 서는 사람들을 보며 느낄 수 있었다.

 

87년 광장의 한 복판에서 주인을 잃었던 L의 운동화, 이제 다시 그 운동화들이 광장에서 주인을 찾아 함께 걷고 있다. 이 나라 곳곳을... 민주주의의 함성을 울리며.

 

L의 운동화. 지금 여기 다시 복원되어 우리들 발에 있다. 그렇게 L의 운동화는 우리와 함께 한다.

 

이런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이 소설, 요즘의 상황과 너무도 잘 맞는다. 우리가 다시 87년을 재현하게 될 줄이야. 다시 이렇게 L의 운동화처럼 끈을 단단하게 조여매게 될 줄이야. 아마 우리는 L의 운동화를 다시는 잃지 않을 것이다.

 

이 소설이 29년 전 87년 광장으로 나를 데려갔다가, 다시 2016년 광장으로 나를 불러내고 있다. 우리를 불러내고 있다. L의 운동화 복원이라는 소재를 통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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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의 글 알베르 카뮈 전집 19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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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사가가 아니라면 굳이 제대로 발표도 되지 않은 카뮈의 젊은 시절의 글들을 읽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호사가도 아닌 나는 그럼에도 왜 읽는가. 그냥 읽고 싶기 때문이다. 카뮈란 사람의 글을 하나하나 읽어가며 마치 퍼즐 조각을 맞추듯 그에 대해서 맞춰가고 있다고 해야 할까.

 

부연 공기들, 세상이 짙은 안개에 쌓여 있을 때, 그 속에서 무엇인가가 명확히 보이지는 않지만 어떤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왠지 그곳을 거닐고 싶은 욕구를 느끼듯이, 카뮈의 작품은 내게 그렇게 다가온다.

 

실체가 팍 잡히지 않는다. 그냥 안개 속에서 여기저기를 거닐며, 현실과 동떨어진 듯한 느낌을 받을 뿐이다. 아니다. 그의 작품에는 현실이 너무도 잘 드러나 있는 작품도 많이 있다. 그렇지만 이상하게 카뮈란 사람에게서는 어떤 실체가 명확하지 않은, 윤곽이 뚜렷하지 않은, 미술에서 스푸마토 기법이라고 하는 것이 연상된다.

 

그래서 더 매력이 있는지도 모른다. 이거다라고 딱 규정할 수 없으므로.

 

이 책 역시 마찬가지다. 젊은시절, 십대 후반부터 이십대 초반에 쓴 글들이다. 습작이라고 해도 좋고, 치기어린 감상들이 나열된 글들이라고 해도 좋다.

 

하지만 이 글들이 나중의 카뮈를 이루게 된다. 이 책 마지막 부분에 실려 있는 '가난한 동네의 목소리들'을 읽는데, 여기서 나온 글들이 나중에 카뮈의 작품이 되기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과 겉'이라는 제목이 붙은 책 속에 '아이러니'라는 부분에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그만큼 그는 여러 글들을 통해 자신의 작품을 완성해 나갔다고 할 수 있다.

 

그 점에서 읽을 만했다고 할 수 있고, 다른 글에서 읽은 카뮈의 집안 내력이 이 책에서도 살짝 살짝 나오고 있어서 반갑기도 했고.

 

무엇보다 카뮈가 젊은 시절에 지녔던 예술에 대한 생각을 알 수 있어서 더 좋았다고나 할까...

 

  예술은 죽음과 맞서 싸운다. 불멸의 획득을 위햐서 예술가는 헛된 자부심에, 그러나 올바른 희망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은 삶에서 멀어져야 하고 삶을 모른 체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삶은 과도적이고 치명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예술이 '정지'가 되는 동안 삶은 빨리 지나가서 소멸한다. 삶이 연습해보고 시도해보는 (그것도 헛되이, 왜냐하면 삶은 스스로의 과업을 완성하기 위하여 뒤로 돌아갈 수 없으니까) 것을 예술은 실현한다. 삶과 우리의 의식 사이에 여러 가지 예술적 인상들이 무리 지어 응결되어서는 일종의 스크린을 형성한다. 이것은 즉각적으로 도달하게 되는 다행스러운 프리즘같은 것이니 우리는 막연하게나마 해방감을 느낀다.

  삶을 초월하는 곳에, 삶의 합리적인 틀을 초월한 곳에 예술이 존재하고 합일이 존재한다. (153-154쪽)

 

이렇게 예술은 흐름을 정지시킨다. 정지시켜서 우리에게 보여준다. 우리가 볼 수 없는 삶을 예술은 보여준다. 그리고 흘러가 버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곁에 머물게 한다. 따라서 예술가는 죽음으로 사라져도 예술은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카뮈가 이렇게 예술에 대해서 생각하고, 자신의 삶에 대해 생각하고, 그런 결과들이 그의 작품으로 나타났다고 보면 된다.

 

그 점에 대해서 살펴보게 하는 카뮈의 젊은 시절의 글들이라고 보면 된다. 이 글들을 토대로 카뮈의 다른 작품들을 읽으면 카뮈에게 한 발 더 다가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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