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에 사무치다
서정춘 지음 / 글상걸상 / 2016년 11월
평점 :
품절


짧다

 

서정춘의 시는 짧다. 그렇게 짧을 수가 없다. 점점 길어지는 요즘 시에 비한다면 서정춘이 쓴 시는 '아하, 나는 시간보다 재능이 모자라 더 짧게는 못 썼소' (시인의 말. 33쪽)라고 말할 정도로 짧다.

 

그렇다고 일본의 하이쿠와 같은 느낌을 주지 않는다. 일본의 하이쿠가 우리나라 선시(禪詩)와 같은 느낌을 준다면 서정춘의 시는 선시보다는 서정시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무언가 마음을 끌어당기며, 짧은 시구절 속에서도 어떤 장면을 떠올리게 하고, 그 장면을 통하여 감정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짧지는 길고 큰 울림을 주는 시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첫시집 '죽편'을 읽고 든 생각이 이 시집을 읽으면서도 변하지 않았다.

 

시들의 길이만 짧은 것이 아니다.

 

시집에 수록된 시들이 29편이다. 대부분의 시집들에 수록된 시들이 80편에서 120편 정도에 해당한다고 보면 많이도 적은 분량이다.

 

그만큼 절제된 시들이 실렸다고 보면 된다. 시인의 감정이 극도로 절제되어 표현된 시들이 또 절제되어 시집에 수록되었다.

 

29편의 시, 그것도 짧은 시들이기에 읽고 또 읽고, 자꾸 읽게 된다.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렇게 읽으면서 장면을 떠올리고, 생각에 잠기고 시가 주는 느낌에 푹 젖게 된다.

 

그래서 읽는 시간은 짧아도 시를 느끼는 시간은 짧지 않다.

 

 

시집이 참 마음에 든다

 

시집을 '가내수공업'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출판사인 글상걸상에서 기계로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만든 시집이란다.

 

시집이라고 하면 사람의 손때가 묻은 느낌을 주는 것이 더 좋은데, 그에 딱 알맞다. 겉표지부터 느낌이 참 좋다. 게다가 시집 제목을 시인이 직접 쓴 글씨로 장식했다. 이보다 더 손맛을 느낄 수 있게 할 수 없다.

 

옛책을 만나는 듯한 느낌을 주는 표지와 책의 제본이 색다른 느낌을 준다. 그것이 또한 좋다. 종이의 두께가 시의 길이와 반비례해서 두깝워서 좋다. 시집을 넘길 때 손에 잡히는 그 두터움이 손끝에 남는다.

 

 

이 시집에 실린 시 중에 첫시집 '죽편'과 통하는 시 한 편을 보기로 한다.

 

대나무 1

 

벼(稻)과의

풀이

나무가 되기까지

살아 온 날까지

살아 갈 높이의

아찔함이었을.

 

서정춘, 이슬에 사무치다. 글상걸상, 2016년. 9쪽.  

 

왜 대나무가 절개의 상징이었는지 생각하게 한다. 윤선도는 '오우가'에서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라고 읊으며, '사시에 푸르다'고 대나무의 절개를 칭송하고, 그래서 친구라고 노래했지만, 대나무가 그 절개를 지키기 위해서는 '벼과의 풀이' 지난한 세월을 꿈꾸며 버티며 지내온 세월이 더해져 커다란 '나무'가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 '아찔함'을 이겨냈을 때 비로소 풀이 나무가 되고, 우리에게 삶을 알려주는 존재가 된다는 사실. 그래서 대나무는 본래부터 나무가 아니었음을.

 

우리의 인생에서도 우리가 살아온 날들은 과거 우리가 살아가야 할 날들의 높이, 그것의 아찔함이었음을 생각하도록 한다. 그런 아찔함이 없었다면, 그 아찔함을 이겨내지 못한다면 그냥 풀로 살아가야 한다.

 

이토록 참 짧은 시들이 모여 있는 시집이다. 서두르지 않고 손으로 만든 시집이기도 하고. 그래서 소중하다. 시의 길이도 짧고 수록된 시의 양도 적지만 어떤 시들보다 길고 깊고,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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