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미제라블 4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04
빅토르 위고 지음, 정기수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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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다. 이제 소설은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 코제트와 마리우스의 사랑, 그리고 혁명. 이 4부의 제목이 그것을 알려주고 있다.

 

플뤼메 거리의 서정시는 두 연인을 나타낸다.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두 사람, 그들에게 세상은 온통 그들의 것이다. 세계를 모두 자신의 마음에 받아들이는 것, 세계를 내 것으로 만드는 것,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이렇게 서정시를 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서정시의 시대만 지속된다면 사람들이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세계를 온통 내것으로 만드는 그런 서정시의 시대는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 비록 사랑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라도 그들이 겪어야 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사랑에 빠지는 일은 서정시가 되겠지만, 그 사랑을 유지해 나가는 일은 서사시가 되어야 한다. 이제 자신을 세상에 내놓고 세상과 싸워야 한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사회와 치열하게 대립해야 한다. 주변의 사람들과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이야기 없이 감정이 넘쳐나는 서정시에서 이야기가 있는, 사건이 있고 갈등이 있는 서사시로 넘어가게 된다. 소설은 두 사람의 사랑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들의 사랑이 맺어지기 위해서는 사건과 갈등이 있어야 한다.

 

그 사건과 갈등을 이겨내야 한다. 서사시의 주인공은 영웅들이다.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지는 못하더라도 자신의 운명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 그 운명을 비켜가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

 

여기에 사회 문제까지 겹쳐져서 생 드니 거리의 서사시가 된다. 단지 두 연인의 사랑에서 사회에 대한 사랑으로 사랑이 확장되는 것이다. 더 큰 갈등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그들이 겪어야 하는 운명이다.

 

그렇다. 사람들에게 운명은 절대로 비껴가지 않는다. 운명은 사람들에게 곧장 다가온다. 자, 어떡할테냐 하는 식으로.

 

코제트와 마리우스를 중심에 놓으면 그들의 사랑에 이야기가 생기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장발장의 처지에서 보면 또다른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에게는 사랑의 차원이 달라져야 하는 지점에 와 있는 것이다.

 

평생 사랑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아온 사람에게, 이제 사랑이 찾아왔는데, 그 사랑을 떠나보내야만 하는 사랑이라니... 하여 서정시에서 서사시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

 

방대한 서사시로 가는 과정에서 여러 인물들이 나오게 된다. 이제는 영화로 친숙해진 인물, 앙졸라를 비롯해 에포닌, 가브로슈가 나온다.

 

이 인물들이 얽히고 설키는 과정을 통해서 작품은 방대한 서사시로 흘러간다. 이제는 개인들만이 아니라 프랑스 혁명이라는 지점에 사람들이 맞닥뜨리게 된다.

 

바리케이트 앞에 선 사람들, 그들의 운명은? 여기까지가 4부다. 그들이 그 운명을 거부하지 않고 운명에 맞서게 되기까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소설이 전개되는데...

 

4부 플뤼메 거리의 서정시와 생 드니 거리의 서사시 : 1. 몇 쪽의 역사 - 2. 에포닌 - 3. 플뤼메 거리의 집 - 4. 아래에서의 구원이 위에서의 구원이 될 수 있다 - 5. 시종이 같지 않다 - 6. 어린 가브로슈 - 7. 곁말 - 8. 환희와 비탄 - 9. 그들은 어디로 가나? - 10. 1832년 6월 5일 - 11. 폭풍과 친해지는 미미한 존재 - 12. 코랭트 주점 - 13. 마리우스가 어둠 속으로 들어가다 - 14. 장엄한 절망 - 15. 옴므 아르메 거리

 

줄거리만으로 느끼지 못하는 감동을 받을 수 있다. 작가의 직접적인 개입이 이렇게나 자주 일어나다니 하는 생각을 하고, 혁명에 대한 빅토르 위고의 생각을 알 수 있고, 주변 인물들을 통하여 주인공들의 삶에 더 잘 접근할 수도 있다.  

 

여기에 마리우스가 혁명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과정이 공화국에 대한 투철한 사명감보다는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절망에서 나왔다는 것, 그러나 그 절망은 바로 순수함이고, 그 순수함으로 인해 혁명의 순수함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

 

또 영화나 줄거리만으로 느꼈던 코제트에 대한 인상, 코제트를 요즘 시대로 생각해 20대일 거라고 착각하는데, 이 때가 겨우 십대라는 것, 1832년에 많아야 17살이었다는 것.

 

우리나라로 치면 이제 겨우 고1이다. 투표할 수 있는 나이를 만 18세로 하자는 안을 내느니 마느니 하는 이 나라에서 17세에 이미 사랑에 빠졌고, 마리우스의 나이와 합쳐도 40이 안 되는 나이에 그들은 이미 어른으로서 존재하고 있다.

 

혁명에 참여한 가브로슈는 어떤가? 그는 코제트보다도 더 어린 나이이니 말할 것도 없고, 사랑에 빠져 자신의 목숨을 바친 에포닌 역시 코제트와 동갑이 아니던가.

 

우리나라 춘향이, 로미오와 줄리엣 등 당시의 나이를 생각하면서 읽어갈 수밖에 없는 낯설음. 그만큼 우리는 독립하는 시기를, 정신의 성숙시기를 뒤로 늦추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

 

개인의 감정에만 빠져 있는 서정시에서 우리 역시 사회로까지 시야를 확대해야 하는, 그래서 사건과 갈등이 있는 그런 서사시의 세계에 처해 있다는 생각.

 

이제 남은 건 5부다. 소설은 결말을 향해 가고 있다. 점점 더 흥미로워지고 있다. 줄거리를 이미 다 알고 있음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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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미제라블 3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03
빅토르 위고 지음, 정기수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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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3권이다. 중반에 접어들었다. 소설은 정점으로 치달아야 하는데, 아직도 주요 인물에서 멈춰 있다.

 

레미제라블의 주인공을 셋으로 줄인다면 장발장, 코제트, 그리고 마리우스 아니던가. 물론 팡틴이 있지만 팡틴은 장발장과 코제트를 만나게 해주는 매개 역할에 머무른다고 할 수 있으니. 또 작품 내내 등장하는 인물, 장발장을 드러나게 해주는 인물로 자베르와 테나르디에가 있지만, 이들을 주인공으로 하기는 좀 그렇다.

 

이번 권에서는 '마리우스'다. 청년이다. 우리나라도 치면 대학생이다. 우리나라가 엄혹한 독재 시절이었을 때 대학생들은 민주주의를 위해서 앞에 나섰다.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하기 힘들 때, 전태일이 대학생 친구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을 때 대학생들은 자기들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깨달았다.

 

그들은 민중 속으로, 노동현장으로, 그리고 민주화 운동의 맨 앞으로 나섰다. 청년들이었다. 배운다는 것의 의미를 민중 속에서 실천하는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미래를 현재에 살았다. 기득권층이 과거를 현재에 살았다면, 이 소설에서 왕당파들이 그렇다, 대학생들은 미래를 현재에 살았다. 그들이 살고 있는 현재에는 미래가 있었다. 그 미래를 현재로 끌어오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청년들이었다.

 

이 소설에서 마리우스 역시 그런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런데, 이 권에서 마리우스는 아직 미래를 현재로 끌어오지 못하고 있다. 그는 아직 미래를 꿈꾸지 못한다. 다만 과거에서 벗어나려고 하고 있을 뿐이다.

 

철저한 왕당파인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왕당파, 우리나라로 치면 보수주의자였던 - 사실 우리나라는 보수주의라고 하기보다는 수구라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린다 - 그가 공화국 편에 섰던 - 이것도 좀 그렇다. 나폴레옹이 처음에는 공화국을 수호하는 수호자 역할을 했다면, 그는 나중에 공화국을 붕괴시키고 왕정으로 돌아간 사람 아니던가. 나폴레옹 편에 섰다고 해서 공화국 편이라고 할 수는 없다 - 아버지에 대해 알게 되고 할아버지의 품을 떠난다,

 

할아버지의 품을 떠나지만 아직 공화국을 자신의 신념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한다. 비록 그가 공화국을 신념으로 삼는 친구들과 만나기는 하지만. 이 친구들에 대한 서술이 4. ABC의 벗에 나온다.

 

마리우스가 공화국의 신념을 지니고 민중들을 위해서 혁명의 앞에 나서기까지는 좀더 시간이 필요할 듯하고. 이 권에서는 마리우스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그가 코제트를 만나는 장면으로 나아간다.

 

물론 마리우스가 일방적으로 코제트에게 반하는 것이고, 또 장발장이 테나르디에를 알아보지 못하고 도와주러 왔다 곤경에 처했다가 위험에서 벗어나는 장면으로 이 3권이 끝나지만...

 

정말로 불쌍한 사람들, 사회의 하층민들이 나온다. 그들이 그렇게 타락할 수밖에 없는 이유, 그들이 사회의 괴물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 그들은 사회의 불안요소가 되는데,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를 바꿔야 함을 소설의 곳곳에서 드러내고 있다고 보면 된다.

 

민중에 대해서 환상을 지니지 않게 하는 서술들이다. 그러나 민중들에 대해 환상을 가질 필요는 없지만 그들에 대해 적대감을 가질 필요 역시 없다. 소설을 읽다보면 그 점을 깨달을 수 있다.

 

3부 마리우스 : 1. 파리의 미분자 - 2. 위대한 부르조아 - 3. 할아버지와 손자 - 4. ABC의 벗 - 5. 불행의 효험 - 6. 두 별의 접촉 - 7. 파트롱 미네트 - 8. 악독한 가낸뱅이

 

이제 주연들은 모두 등장했다. 앞으로는 이들이 프랑스의 혁명적 순간에 어떻게 살아가는지가 나올 것이다. 사회는 변혁에 직면해 있다. 이 변혁에 직면했을 때 거기에 대처하는 사람들의 모습, 그것이 앞으로 전개될 소설의 내용일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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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미제라블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02
빅토르 위고 지음, 정기수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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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코제트 : 1. 워털루 - 2. 군함 오리옹 - 3. 고인과 한 약속의 이행 - 4. 고르보의 누옥 - 5. 어둠 속 사냥에 소리 없는 사냥개떼 - 6. 프티 픽퓌스 - 7. 여담 - 8. 묘지는 주는 것을 취한다

 

2부다. 제목은 코제트다. 가련한 어린아이. 그러나 장발장에게 사랑을 일깨워 준 아이. 그렇다고 해도 코제트가 주인공으로 서술되는 분량은 아주 적다. 왜냐하면 코제트를 중심으로 하기에는 너무 어리기 때문이다. 겨우 여덟 살이다. 우리나라 나이로 치면 이제 초등학교 1학년.

 

코제트가 겪어야 할 불행은 어머니와 떨어져 살 수밖에 없다는 것, 가정에서 떨어진 아이들이 행복하기는 참 힘들다. 물론 환경에 따라서는 행복해질 수도 있지만, 이 소설이 1860년대에 나온 것을 생각하면 가정을 잃은 아이, 특히 엄마를 잃은 아이의 생활이 어떠했을지는 짐작할 수 있다.

 

엄마인 팡틴은 돈을 내고 아이의 양육을 부탁하지만 엄마의 눈에 띠지 않는 아이가 어떤 대우를 받는지는 소설에서 너무도 잘 서술되어 있다.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생계 때문에 아이를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맡기지만, 그곳에서 얼마나 많은 사건 사고들이 있었던가.

 

결국 엄마의 눈에 들어오게 하기 위해 감시카메라까지 설치하고 그것을 인터넷에 연동시켜 언제든지 부모가 살펴볼 수 있게 하는 방법까지 동원되지 않는가.

 

그런데 이런 방법이 없던 그 과거에는, 아이는 전적으로 양육자의 선의에 맡겨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양육자인 테나르디에는 인간성을 상실한 부류다.

 

그가 얼마나 못된 인간인지를 또 뒤편의 내용과 연결짓기 위해서 이 2부는 워털루 전투에서 시작한다. 장황하게 워털루 전투를 묘사하고 있는데, 그 끝부분에 가면 드디에 테나르디에가 등장한다.

 

전투에서 죽은 사람들의 몸에서 온갖 귀중품을 훔쳐가는 인간으로. 그런 인간이 다른 사람의 아이를 제대로 키워줄 리가 없다. 그에게는 돈이 전부인 것이다. 돈을 제때 부쳐줄 때도 코제트를 잘 대해줬다고 할 수 없는데, 돈을 잘 부쳐주지 않았을 때 어떤 대우를 했겠는가. 테나르디에 부부는 코제트를 식모보다도 더 못한 존재로 부려 먹었다.

 

부모 없는, 또는 부모의 눈에서 멀어진 아이들이 겪을 수 있는 고난, 그리고 그 아이를 둘러싼 사람들의 모습. 꼭 다 그렇지는 않지만, 인간성을 상실한 불쌍한 사람과 인간성을 상실하지 않은 사람이 2부에 나온다.

 

결국 사건은 코제트를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중심 사건은 장발장과 그 주변 인물들이다. 장발장이 수녀원에 들어가 자리를 잡기까지의 과정.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들. 코제트를 만나고 코제트를 데리고 가, 팡틴에게 한 약속을 지키는 과정.

 

그리고 코제트는 이제 장발장에게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되는데, 그것을 수녀원 생활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다.

 

그는 두 번 갇혀 지내는데, 한 번은 감옥, 또 한 번은 수녀원이다. 모두 다 철조망 안에 갇혀 있지만, 한쪽은 증오와 억압이 있다면 한쪽은 사랑이 있다.

 

불쌍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한쪽은 정말로 불쌍한 사람들이고, 한쪽은 성스러운 사람들이다.

 

'그토록 비슷하면서도 그토록 사뭇 다른 그 두 장소에서, 그토록 판이한 그 두 종류의 인간들이 똑같은 일을 수행하고 있었다. 즉 속죄를.' 453쪽.

 

그러나 그 속죄의 종류가 다르다. 감옥에서는 자신의 죄에 대한 속죄를 하고 있다면 수녀원에서는 다른 사람을 위한 속죄를 하고 있다. 이기적인 모습과 이타적인 모습.

 

'인간의 너그러움 중에서도 가장 숭고한 것, 즉 남을 위한 속죄다.' 453쪽.

 

이렇게 장발장은 깨닫는다. 이 깨달음은 앞으로 그의 삶을 이끌어주는 역할을 한다. 즉 그는 불쌍한 사람에서 이제는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는 사람, 코제트를 위해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불행한 삶을 살던 코제트를 위한 삶, 그 삶을 살기 위해 장발장은 여기까지 왔던 것이다. 단지 코제트만을 위해. 아니다, 코제트와 같은 삶을 사는 불쌍한 사람을 위해 장발장은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제 그는 코제트를 통해 미리엘 주교의 정신에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되는 것이다. 세상의 '레 미제라블들'에게 그는 다가갈 것이다. 이런 그로 인해 이제는 불쌍해지는 사람은 그가 아니라 그 주변의 사람들, 테나르디에나 자베르 같은 사람이 되겠지.

 

장발장이 미리엘 주교의 정신에 한 발 더 다가설 수 있게 하는 존재, 그것이 바로 코제트다. 사랑을 몰랐던 장발장의 마음에 사랑으로 가득차게 해주는 존재, 코제트. 이제 장발장은 자신의 마음에도 사랑을 채우게 되었다.

 

3부는 마리우스다. 이제 소설은 더 확장되어가려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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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미제라블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01
빅토르 위고 지음, 정기수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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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축약본으로 읽었던 책, 제목은 "장발장"이다. 주인공의 이름을 따서 책 제목을 붙였고, 우리는 '레 미제라블'이라는 제목보다는 '장발장'이라는 제목으로 이 책을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어릴 적 읽었던 축약본으로 이 책을 다 읽었다고 생각하고, 더 이상 읽지 않는다. 이 책이 무려 5권이나 되는 분량이라는 사실도 다시 읽기 힘들게 한다. 그럼에도 완역본을 읽고 싶어졌다. 소설은 작가가 쓴 그대로 읽어야 더 맛을 느낄 수 있지 않나.

 

게다가 '레 미제라블'은 뮤지컬 영화로도 만들어져 많은 사람들이 보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사람들에게 '레 미제라블'은 마치 춘향전이나 홍길동전처럼 다 읽지는 않았지만 내용은 알고 있는 그런 소설이다.

 

전체적인 줄거리를 알고 있어서 완역본을 읽으면 감흥이 덜하지 않을까 걱정을 했는데, 전체적인 줄거리가 감흥을 받는데 별로 지장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세세한 부분의 묘사를 읽어가는 데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축약본에서 생략된 부분을 읽으면서는 축약본이 줄거리를 중심으로 참 많이도 생략했구나 하는 생각도 하면서 읽을 수 있고.

 

이제 '레 미제라블' 읽기의 시작이다. 겨우 1권을 읽었을 뿐이다. '레 미제라블'이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쓰인다면, 당시 프랑스 사회에서 억압받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가 바로 이 소설이라고 보면 된다.

 

상류층 사람들 이야기도, 귀족 이야기도 아닌, 사회 하층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 그러나 너무도 힘들어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살아가기 힘든 사람들 이야기라고 보면 된다.

 

첫권의 제목이 바로 '팡틴'이다. 팡틴을 첫권의 제목으로 삼은 이유가 무얼까? 사회 하층민 중에서도 가장 무시당하고 버림받은 사람, 바로 매춘에 종사하는 여성이 아닐까 하는데... 매춘에 종사하는 여성들을 비하하고, 사람 취급하지 않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데...

 

위고는 이 소설의 처음을 매춘에 종사하게 되는 여인, 팡틴으로부터 시작한다. 이들도 사람임을, 이들을 이렇게 만든 것은 개인의 타락한 성품이 아니라 사회제도임을, 그래서 사회제도를 고쳐야 함을, 팡틴이라는 여인을 통해서 보여준다.

 

여직공으로서 한량이라 할 수 있는 사람에게 버림받고 아이를 낳아 길러야 하는 여자. 이 여자에게는 일이 필수적인데, 남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로부터 괴롭힘을 받아 결국 직장에서 쫓겨나는 여자.  

 

직장에서 쫓겨난 여자가 자기 아이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 그것도 비열하게 아이를 볼모로 돈을 뜯어내는 사람들에게 속고 있는 여자는 결국 마지막 단계인 몸 파는 단계까지 간다.

 

생존을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전락. 그런데도 인간의 고귀한 품성을 잃지 않는다. 그것은 개인의 품성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팡틴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첫 시작에 팡틴을 놓은 이유가 바로 이것일 것이다. 가장 밑바닥에서 고통받는 사람, 그 사람도 인간성을 잃지 않고 살려고 몸부림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 아니었을까.

 

제목은 팡틴이지만 시작은 미리엘 주교로부터 시작한다. 축약본에서는 생략된 부분이다. 미리엘 주교에 대한 부분이 100쪽이 넘게 전개되는데... 이 주교가 장발장을 감화시키는 것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렇게 성스러운 사람으로 시작하는 것은, 소설에서 장발장이 이 주교의 단계에까지 오르게 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 아니겠는가. 주교 역시 젊은 시절엔 방탕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주교가 된 이후 그는 성자의 삶을 산다.

 

인간은 변할 수 있다는 것, 그것도 좋은 쪽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미리엘 주교를 통해 시작부분에서 보여주고 있다. 결국 장발장 역시 미리엘 주교처럼 변할 수 있다는 것, 매춘에 종사하지만 팡틴 역시 미리엘 주교처럼 살 수 있다는 것.

 

비참한, 불쌍한 사람들, 이 사람들이 늘 불행하고 불쌍한 것이 아니라 이들도 이 주교처럼 성스러룬 삶을 살 수 있다는 것, 그런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소설의 첫권이 보여주고 있다고 본다.

 

다만, 주교처럼 살기가 얼마나 힘든지, 사람들이 지닌 편견이 얼마나 강한지, 그것을 극복하고 살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소설에서는 계속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삶은 그렇게 사회에 종속당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소설의 또다른 축인 자베르 역시 불쌍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자기 틀에 갇혀 사는 사람. 다른 의미에서 가엾은 사람이 바로 이 자베르 형사다. 그가 얼마나 가엾은 사람인지 이 첫권에 잘 나타나 있다.

 

비참한 사회 속에서도 인간성을 지키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들이 비록 사회경제적으로는 불쌍한 사람, 비참한 사람, '레 미제라블'이겠지만, 이들의 정신은 숭고하고 성스러울 수 있다는 것, 그것을 첫권이 보여주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사회경제적으로 상층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추악한지, 그들보다 한참 못한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얼마나 더 충만한 삶을 사는지 우리는 지금 보고 있지 않은가.

 

역설적으로 '레 미제라블'은 바로 그런 상층부에 있는 사람들, 영혼이 썩어있는 사람들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게 하는 소설이다.

 

이제 팡틴을 지나 코제트로 간다. 순수한 어린이가 겪는 고통, 그 아이의 성장으로 소설은 전개된다.

 

이 첫권의 작은 제목들은 다음과 같다.

 

1부 팡틴 : 1. 올바른 사람 - 2. 추락 - 3. 1817년에 - 4. 위탁은 때로 버림이다 - 5. 하강 - 6. 자베르 - 7. 샹마티외 사건 - 8. 반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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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중심 삶창시선 47
정세훈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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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명징하다. 시에 쓰인 낱말들도 그렇고, 시를 이루고 있는 주제도 그렇다. 명확하게 다가온다. 아니  마음으로 에둘러 오지 않고 직접 마음에 꽂힌다. 그렇게 시가 쓰였다.

 

이유는 단순하다. 시가 바로 시인의 삶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을 시로 썼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순하다? 그 삶이 바로 노동의 삶이기 때문이다. 거짓이 없는 노동의 삶.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노동하며 살아온 사람의 삶이 이 시집에 오롯이 드러나 있다. 그렇게 시인은 시를 통해서 우리나라에서 소외되어 온 노동을, 노동자들을 시의 중심으로 다시 불러내고 있다.

 

잊혀진 것 같지만 노동은 잊혀져서는 안된다. 우리가 생각하지 않고 있는 순간에도 노동은 이루어지지고 있고, 이 노동현장에는 아직도 차별과 억압이 존재하고 있기에.

 

이것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른 것으로 포장해도 감춰질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일들을 시인은 다시 시를 통해 불러내고 있다.

 

그래서 명징하기는 하지만 마음이 아프기도 하다. 아직도 이런 일이? 라는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아프기도 하지만, 이제는 스스로 잊으려고 애써 눈 감고 지내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더욱 아프다.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감출 수 없는 것이 노동현장일텐데... 아직도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차별을 받고 심지어는 생명의 위험까지 감수하면서 일을 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에 시인이 눈 감아서는 안되지.

 

이 시집의 제목이 되기도 한 '몸의 중심'이라는 시, 중심이라는 말을 다시 생각하게 해준다. 시인이 이런 표현을 해서 그런지, 국정 농단으로 언론의 중심에 서 있는 사람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떠올리게 된다.

 

이들이야말로 진정 우리 사회의 중심일텐데... 우리는 너무도 이 중심을 잊고 지내오지는 않았는지.

 

시를 보자.

 

몸의 중심

 

몸의 중심으로

마음이 간다

아프지 말라고

어루만진다

 

몸의 중심은

생각하는 뇌가 아니다

숨 쉬는 폐가 아니다

피 끓는 심장이 아니다

 

아픈 곳!

 

어루만져 주지 않으면

안 되는

상처난 곳

 

그곳으로

온몸이 움직인다

 

정세훈, 몸의 중심, 삶창. 2016년. 26-27쪽

 

얼마나 진실한 표현인가. 얼마나 명징한 표현인가. 마음 속으로 곧장 날아와 꽂히는 말이지 않은가.

 

'어루만져 주지 않으면 / 안 되는 / 상처난 곳'이 몸의 중심이라니. 그렇다. 우리 몸의 중심은 바로 이곳이다. 아픈 곳, 상처난 곳, 그래서 우리가 늘 어루만져 주어야 할 곳.

 

몸의 중심이 이럴진대 사회의 중심은 어디인가? 정치권의 꼭대기에서 권력을 누리는 자들인가. 경제력을 바탕으로 노동자들의 희생으로 자신들의 부를 축적해 사적으로 써버리는 경제권력들인가. 기타 힘있는 자들인가?

 

아니다. 우리 사회의 중심은 바로 어루만져 주어야 할 사람들, 상처받고 고통받는 사람들, 그래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그들, 드러나지 않으나 사회를 지탱해가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중심이다.

 

주목받지 못하는 곳에서, 소외받는 곳에서 그래도 우리 사회를 지탱해가도록 노동하는 사람들, 우리 인간들의 생명을 유지해나가도록 노동하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사회의 중심'이다.

 

우리의 관심도 이제는 국정농단을 넘어 이렇게 '사회의 중심'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들이 아프지 않도록. 더는 아프지 않도록 말이다.

 

이번 시집을 읽으며, 특히 이 시를 읽으며 든 생각이다.

 

덧글

 

출판사에서 보내준 시집이다. 너무도 잘 읽었기에 고맙고 기쁘다. 잊고 있었던 것을 다시 생각해낸 기분을 느낀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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