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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일기 알베르 카뮈 전집 17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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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왜 떠나는가?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기 위해서, 새로운 문화를 맛보기 위해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 아니면 낯선 곳에 자신을 떨어뜨려 놓아 낯설어진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서... 이도 아니면 낯설어진 자신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자신을 다시 한 번 바라보고, 혹 놓치고 있는 자신을 찾기 위해서.

 

결국 여행은 '나'를 발견하기 위해서 한다. 그것이 현실을 벗어나는 것이든,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이든 어쨌든 최종 귀결은 바로 '나'이다.

 

그래서 여행은 현재까지의 '나'에다가 여행을 통해 얻은 새로운 '나'를 더할 수 있게 된다. 여기에 여행의 묘미가 있다.

 

내 여행도 그렇지만 다른 사람의 여행을 엿보는 것도 비슷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내가 할 수 없는 경험을 다른 사람의 경험을 통해 간접적으로 추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자신이 가본 곳에 간 다른 사람들의 여행기를 읽어보면 자신이 미처 느끼지 못했던 것, 발견하지 못했던 것을 찾을 수 있어서 더 좋을텐데...

 

불행하게도 나는 카뮈가 여행하고 나서 일기를 쓴 이 나라들을 가보지 못했다. 아직도 나에게는 미지의 세계다. 그럼에도 이 나라들에 대해서는 지구촌화 시대답게 텔레비전이나 책을 통해서 많이도 접했으니 그리 낯설지도 않다.

 

이 낯설지 않음을 토대로 카뮈의 여행일기를 읽어가려 했다. 물론 터무니 없는 생각이었음을 몇 장을 넘기지 않아 깨닫게 되었지만.   

 

카뮈가 여행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필요한 경우에는 여행을 했고, 그 여행의 경험을 자신의 작품 속에 남기곤 했다고 하는데...

 

이 여행일기는 독특하게도 작가수첩에도 들어가지 않고 그렇다고 특별하게 어떤 작품으로 체화되지도 않았다고 한다.

 

물론 남미의 여행은 그의 작품 속에 남아 있기도 하지만, 이 여행일기가 그의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독자적인 작품으로 남아 있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아직은 어떤 것으로 변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일기.

 

그래서 그는 이 책에 실린 두 곳, 미국과 남미를 여행하면서 주로 사실에 중심을 두면서 일기를 썼다. 나중에 어떻게 작품을 쓰겠다는 작가수첩과는 다른 면모를 보이는 것이다.

 

만난 사람들, 그 곳의 풍습과 자연, 그리고 자신의 건강 등을 구체적으로 쓰고 있어서 여행을 하면서 카뮈가 어떤 상태였는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를 이 책을 통해서 알 수 있게 된다

 

이런 구체적인 면... 가령 이 책의 33쪽에는,

 

  흑인 문제. 우리는 마르티니크 출신의 한 흑인을 이곳에 파견시킨 적이 있다. 그는 할렘에 숙소를 정했다. 그 사람은 다른 프랑스 동료들과 자신이 같은 인종이 아니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아차렸다.

  그와는 반대되는 관찰. 버스 속에서 내 앞에 앉았던 평범한 백인이 일어서서 늙은 흑인 부인에게 자리를 양보한다.

 

프랑스에서도 알제리를 식민지로 삼아 흑인들을 차별한 경우도 있었고, 파농의 경우처럼 마르티니크 출신의 프랑스인들 역시 차별을 받았는데... 그것이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서술한 다음, 미국의 특징으로 백인이 흑인에게 자리를 양보한 일을 나열한다.

 

이런 일화를 통해 흑백문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며, 인종차별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라는 점을 은연 중에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이상한 점은, 아무리 남부와 북부가 달랐다고 해도, 카뮈는 주로 뉴욕 쪽에 있었을테니 북부에서만 흑백의 인종차별이 많이 완화되었음을, 그러나 남부에서는 1960년대까지도 흑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백인이라는 개념은 찾을 수 없었음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결국 카뮈가 본 미국식 민주주의도 일부에 불과했음을 지금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미국에 대한 카뮈의 인상 또 하나... 36쪽에..

 

  철학과 관련된 도서 카드들을 찾아본다. W. 제임스, 그게 다였다.

 

유럽에 비해서 미국의 철학이 빈곤함을, 철학이라고 해봐야 겨우 실용주의 하나임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보면 될테고...

 

이런 식으로 여행을 통하여 세계와 자신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느낌을 정리하는데... 그가 미국과 남미 여행을 할 때는 유럽에서 주로 배를 타고 갔으니, 배를 타고 가며 바다에 대해 느낀 점.

 

이것은 카뮈의 바다에 대한 욕망이자 자신의 삶에 대한 태도라고 할 수 있어서, 우리가 알아둘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바다를 무척 사랑했다. - 이 고요한 무한을, 이 다시 덮이는 물길을, 이 매끄러운 길들을. 처음으로 수평선이 인간의 호흡과 맞먹는 크기를, 인간의 대담함만 한 넓이를 갖는다. 나는 늘, 인간들에 대한 강한 관심과 부산하게 움직이고 싶은 허영, 그리고 이 망각의 바다에도 손색이 없고 죽음의 환희와도 같은 이 무한한 침묵에도 손색이 없는 나 자신을 만들고자 하는 욕망, 이 두 가지 사이에서 찢어져 있었다. 나는 이 세상과 나의 동류들과 얼굴들에 대한 허영에 마음이 끌린디. 그러나 이 세기의 곁에서 나는 나만의 규칙을 가지고 있다. 바다, 바다와 닮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바로 그것이다.  54쪽.

 

이런 구절이 바로 여행일기에서 미국 여행을 마치게 되는 마지막 부분에 나온다. 그리고 다음은 남미 여행인데... 이 여행은 미국 여행보다 힘들어 카뮈를 매우 힘들게 한다. 그러나 광대한 자연에 마음을 빼앗기고, 그에게서 희망을 찾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카뮈의 여행일기를 읽으면서 곧 카뮈가 여행한 곳의 풍습이나 문화를 엿볼 생각을 멈춘다. 그리고 카뮈의 여행을 따라가면서 나 역시 이런 카뮈라는 낯선 존재에게서 '나'를 찾으려 노력한다. 이것이 카뮈의 여행일기를 읽는 또 하나의 목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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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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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지 길지 않은 소설이다. 오죽했으면 이 문학전집에 이 한 편을 싣지 못하고 또다른 소설 "직소"가 실려 있겠는가.

 

140쪽 간신히 되는 소설이기에 빠르게 읽을 수가 있다. 서문과 후기 사이에 세 편의 수기가 실려 있어, 수기의 내용을 중심으로 소설이 전개된다.

 

일종의 액자소설이라고 하지만, 서문과 후기는 소개하는 역할만 하고 있고, 서문에서 사진 세 장으로 이 소설의 내용을 짐작하게 해주고 있다. 어렸을 때 사진, 학창시절의 사진, 그리고 그 이후의 사진. 이렇게 세 장의 사진인데... 이 사진에서 느끼는 점을 서술자가 직접적으로 알려줌으로써 소설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후기에서는 이 세 편의 수기가 어떻게 자신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고 있으니, 후일담이라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세 편의 수기 내용인데, 한 편 한 편이 서문에서 제시한 사진과 연결이 된다. 즉, 사진에서 느껴졌던 점을 사진의 주인공이 쓴 수기를 통하여 왜 사진에서 그런 느낌을 받게 되었는지 알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읽으면 읽을수록 음습한 느낌이 드는 소설이다. 분위기가 칙칙하다. 단 한 번도 밝은 면을 보여주지 않고 어둡고 음울한 분위기를 계속 드러낸다.

 

순진무구하다는 어린시절조차도 자신의 얼굴에 가면을 씌울 정도로 남을 의식하는 주인공이라니... 결국 그의 삶은 시작부터 자신의 인생이 아닌 남이 기대하는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남에게 자신의 진면목을 드러내지 않으려 일부러 하는 행동들, 익살들... 이런 가면을 그는 평생 쓰고 살아가게 되는데... 자신이 무시했던 친구에게 자신의 정체를 들켰을 때의 낭패감.

 

그 친구는 가식이 없기 때문에 주인공의 가식을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한 말은 어떤 예언처럼 그의 행동을 규정하게 된다.

 

그는 여인들에게 사랑을 받을 거라는, 다른 사람과 관계맺기를 못하는데 여인들에게 사랑을 받는다? 이것은 자신이 생활의 최전선에 나서는 것이 아니라 생활에서 회피해 여인의 품으로 도망간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단 생각이 든다.

 

그는 힘들 때마다 여인의 품속으로 도피하고, 그런 그를 여인들은 받아주는데, 그 받아줌이 그를 다시 생활로 내보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 속으로만 들어가게 만든다.

 

여인들과 살면서도 결코 술에서 담배에서, 나중에는 약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에게 있어 현실은 자신이 살아가는 실제 현실이 아니라 자신의 머리 속에 있는 현실일 뿐이고, 실제 생활에 맞닥뜨렸을 때는 두려움과 공포로 인해 도망가 버려야 할 실제일 뿐이다.

 

이런 그에게 사람에 대한 신뢰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그는 사람을 자신의 판단 속에서 재단하고 그렇게 대할 뿐이다. 자신이 가면을 쓰고 있기에 사람들의 민낯을 볼 수가 없는 것이다.

 

결국 자신은 다른 사람으로 인하여 인간 실격이 되었다고 생각하겠지만 이는 그 스스로 자처한 일일 수밖에 없다.

 

남들에게 자신의 민낯을 보여주지 못하고, 늘 감추기만 하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과 제대로 된 관계를 맺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그에게 남은 것은 죽음 뿐이고, 죽음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는 사회에서 격리되는 일밖에는 없다.

 

세 번째 수기에서 이런 일이 잘 서술되어 있는데...

 

다자이 오사무의 자전적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는 (실제 그의 삶과 이 소설을 비교해 보면 비슷한 점이 너무도 많다. 그렇다고 이 소설을 그의 자서전으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 나름대로 허구적인 장치를 했을테니) 소설인데 그의 생애가 비극적이듯이, 이 소설 역시 비극으로 끝난다.

 

그럴 수밖에 없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가면을 쓸 수밖에 없다면 이는 형식적인 만남일 뿐이고, 만남 하나하나가 고통일 수밖에 없을테니 말이다.

 

다자이 오사무라는 일본 소설가를 좀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준 소설이라는 점 정도... 그리고 뒤에 실린 "직소"애서 유다와 예수의 관계, 특히 유다에 대해서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는 점은 좋았던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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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락 알베르 카뮈 전집 3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198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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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주저리 주저리 읊조리는 말들의 향연. 그것뿐이다. 이 소설은. 주인공은 클레망스라는 사람. 전직 변호사라고 자신을 소개하는데, 그가 주절거리는 공간은 암스텔담, 그 중에서도 이국적인 이름을 지니고 있는 바(bar)라고 할 수 있는 '멕시코 시티'다.

 

등장인물이 여럿일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클레망스 혼자다. 그의 말을 들어주는 상대가 누군지는 전혀 알 수 없으며, '바'의 주인 - 고릴라라고 불리는 - 도 그의 대사 속에서나 등장할 뿐이다.

 

그러니 이 소설에서는 클레망스의 말에 따라서 내용을 파악해야 한다. 그냥 그의 말을 듣는 처지에 우리 역시 설 뿐이다. 그는 바로 앞에 있는 상대에게 말을 하는 것 같지만 사실 이 소설을 읽는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이다.

 

무슨 말을? 그것이 바로 이 소설의 핵심이지 않을까 싶은데... 이 소설은 겨우 140쪽을 조금 넘을 뿐이다. 책의 편제로 140쪽을 조금 넘으니, 앞 부분을 제외하면 140쪽도 제대로 안 되는 분량이다. 그런데도 장편소설이라는 말을 쓰는데... (카뮈가 생전에 완성한 장편소설은 <이방인>. <페스트>, <전락> 세 작품이다. - 김화영의 해설, <전락>의 구조와 물의 이미지에서. 이 책 234쪽) 그 말은 동의하기 힘들고.

 

짧은 분량이지만 한 사람의 말이라는 점에서는 길다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시간은 5일에 걸쳐 있다. 즉, 5일에 걸쳐서 '바'에서 처음 만난 사람과 지속적으로 만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그에게 들려주는 형식인 것이다.

 

독백이라고 할 수 있지만, 무언가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데... 이 책에 실려 있는 해설을 읽어도 무슨 말인지 감을 잡기 힘들다. 해설이 오히려 작품 이해를 어렵게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냥 소설이라고 생각하자. 뭐, 카뮈를 실존주의니 누보 로망이니 뭐니 하는 그룹에 넣지 말고, 그의 다른 작품들도 생각하지 말고 그냥 이 작품만 생각하자.

 

남들의 해설은 다 지워버리고 내 감에 따라 이 작품을 이해하자. 그러면 된다. 무엇이 더 필요하랴.

 

이 소설의 핵심을 바로 두 번째 날 첫부분에서 찾았다.

 

"재판관 겸 참회자"

 

이게 <전락>이라는 소설의 핵심이 아닐까 한다. 재판관은 남들 위에 있는 사람, 남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사람. 그 사람은 위에 있기를 좋아하고 한사코 위에 군림하려고 한다.

 

마치 '난 너에 대해서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내 말은 절대로 옳다'라고 하는 듯한 태도를 지니고 있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재판관'이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이런 '재판관'의 자세를 지니고 있다.

 

다른 사람의 행동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태도를 지니는지 살펴보라. 우리는 남들에 대해서 그들보다 위에 있다고 여기고 그들을 재단한다. 과감하게 단호하게.

 

이런 자세를 우리들 대부분은 지니고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 클레망스도 마찬가지다. 더구나 그의 직업이 변호사 아니던가. 변호사란 무엇인가? 남을 변호해주는 사람. 변호하기 위해서는 의뢰인보다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심지어는 판결을 내리는 판사보다도 위에 있다고 여겨 판사에게 변호인의 상황을 알려주고 판사가 제대로 판단하게 도와주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는 고귀하며 남들에게 인정받고 있는 사람인 것이다. 자신의 잘못은 없다. 자신은 너무도 관대하고 괜찮은 사람이다. 이런 태도를 지닌 사람, 바로 '재판관'이다.

 

그러나 우리는 늘 '재판관'일 수는 없다. 우리는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이기에 실수도 하고 잘못도 한다. 그런 잘못을 깨닫고 참회하기도 한다.

 

참회의 자세를 생각해 보라. 우선 무릎을 꿇는다. 무릎을 꿇은 행위, 자신을 낮은 곳에 위치시키는 행위다. 위에 있다는 재판관의 자세와는 정반대의 자세다.

 

그리고 남의 잘못을 판단하기 보다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그것에 대해서 반성하고 고치려고 하는 사람이다. 작품의 주인공은 클레망스는 이 소설의 중간부를 지나면서 '재판관'에서 '참회자'가 된다.

 

'참회자'가 되었지만 그는 진정한 참회를 하지 못한다. 세상에서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점을 깨뜨려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 깨뜨림, 그것이 바로 일탈로 나타난다. 일탈을 통해 그는 사람들이 생각하던 자신의 모습을 버리게 된다.

 

이러면 위에 있던 그가 아래로 내려오게 된다. 소설의 제목대로 '전락'인 것이다. 그렇다고 이 '전락'이 나쁜 것일까?

 

아니다. 오히려 '전락'하지 못한 사람들이 더 나쁘지 않을까? 그들은 한사코 재판관의 위치만을 고수한다. 자신을 아래로 내려보내지 않는다. 아래는 너무도 위험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래로 내려온 클레망스는 더이상 파리에 있을 수가 없다. 그가 암스텔담으로 온 이유는 바로 이것 아닐까 한다. 아래로 내려온 참회자. 그에게는 '전락'한 자신의 삶을 이해해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 사람이 바로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그 사람에게 이야기를 함으로써 자신을 구원하려 한다.

 

이렇게 이해하고자 한다. 더 많은 것들이 나타나야 하겠지만 '재판관 겸 참회자'라는 말을 통해 이 소설을 판단하고자 한다.

 

여기서 마음이 갑갑해졌다. 우리는 누구나 다 '재판관 겸 참회자'이다. 그래야 한다. 재판관에만 머물러서도 안 되고, 참회자로만 지내서도 안 된다. 이 이중성을 잘 조화시켜야 한다. 그런데... 정말 우리 사회는 이럴까?

 

재판관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 어떤 잘못이 있어도 그들은 재판관으로서만 군림하려고 하지 않나. 결코 참회자의 자리로 내려오려고 하지 않는다. 어떤 이상한 논리를 내세워서라도 그들은 재판관의 자리를 버리려 하지 않는다.

 

반면에 이런 그들은 대다수 국민들을 참회자로만 지내게 하려고 한다.

 

'너희는 아래에만 있어야 한다. 너희들의 의식이 깨어 재판관으로서의 권리를 행사하려 하면 안 된다.'

 

그래서 그들은 정보를 통제하고, 자신들의 위치에 오를 수 있는 길을 자기들끼리만 공유하려 하며,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서로 도와 그 자리에서 '전락'하지 않으려 한다.

 

"낮은 데로 임하소서." 이것이 참회자의 모습이다. 그리고 이런 모습을 이 소설에서는 예수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 예수는 절대적으로 '재판관'일 것 같지만, 이 소설에서는 '참회자'의 모습으로도 나타난다. (이 책 115-116쪽을 보라.)

 

하지만 예수와 달리 이렇게 낮은 곳으로 오지 않는 사람들, 그들에게 무슨 가능성이 있겠는가. 그들에게 참회자의 모습을 상기시키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 소설이다.

 

'전락'을 읽자. 우리 안에 있는 이 두 모습, '재판관 겸 참회자'를 발견하자. 그리고 그것을 거부하려는 사람들에게 보여주자. 당신들에게도 이 두 모습이 있다고.. 거부하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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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레옷을 입은 구름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210
이은봉 지음 / 실천문학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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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문학사' 하면 무언가 사회변혁을 꿈꾸는 그런 내용의 책들이 많았다. 출판사 이름에도 '실천'이 들어가지 않는가.

 

그래서 실천문학사 시집하면 왠지 사회 비판이나 사회 변혁의 내용이 많이 담겨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80년대 실천문학사에서 나온 시집들이 했던 역할, 그 출판사에서 펴냈던 책들이 했던 역할이 이렇게 내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이은봉의 이 시집 '걸레옷을 입은 구름'도 그런 생각에서 구입을 한 시집이다. 제목부터 자극적이지 않은가. '걸레옷을 입은 구름'이라니.

 

분명 환경, 생태를 다룬 시들이 많을 것이야. 그걸 토대로 우리 삶에 대해서 성찰하게 하는 시들이 많겠지 라는 생각을 지니고 읽었는데... 웬걸, 아니다. 잘못 짚었다.

 

사회 비판이라기보다는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꽃, 나무들에 대해서 따스한 감성을 지니고 바라본 내용들의 시가 많다.

 

그야말로 비판을 앞세우지 않고 따스한 시선을 따라가게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우리 역시 자연과 하나가 되게 하는 시들이 이 시집 도처에서 보인다.

 

그래서 제목도 꽃이름들이 많고 나무들도 많이 등장하고 한다. 조금은 실망하다가 좀더 생각해 보니, 70-80년대 운동권이었던 사람들이 나중에 환경주의자, 생태주의자로 바뀌는 모습들, 진보정당이라고 하는 민노당, 정의당 이런 정당들 말고 녹색당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많다는 사실.

 

생태와 운동이 따로 갈 필요는 없지만 생태를 도외시한 운동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음을, 그리고 치열하게 살았던 사람들 중에 주변의 작은 것들을 따스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한 지 오래되었다는 점이 - 예를 들면 황대권의 "야생초 편지"를 보라 - 이 시집을 다시 보게 됐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창한 이념이 아니라 주변의 '작고 하찮고 쓸쓸한 것들'에 애정을 가지고 바라보는 일, 그것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마음 자세라면 사회의 부조리한 면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일일테니 말이다. 생태에 대한 관심이 사회에 대한 무관심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대한 따스한 관심, 서두르지 않고 조금씩 따스한 온기를 퍼뜨림으로 가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렇게 작은 것들에 대해서도 따스함을 지니는데, 어떻게 사회의 비리에 눈감을 수 있겠는가. 오히려 사회의 비리에 대해 목소리를 높여 비판하는 것보다 자기 자리에서 조금씩 조금씩 바꿔가는 모습, 그것이 조금씩 조금씩이라도 전파되어 가게 하는 모습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읽게 된 시집이다.

 

그 정점은 바로 자신의 몸에 사는 미생물들, 세균들까지도 사랑하게 되는 일 아닐까 싶다. 세상에 나와 연관되지 않은 것들은 없고, 그것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는 일, 시인의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

 

셋집

 

  내 몸에도 세 들어 사는 놈들 있구나

  그렇구나 내게도 세 내어줄 집 있구나

 

  발가락에, 사타구니에, 겨드랑이에 빌붙어 마음대로 번식하는 박테리아야 바이러스야 자잘한 세균아

  내 몸 이곳저곳을 떠돌며 온갖 질병을 일으키는 녀석아

  위장에, 간장에, 허파에 멋대로 터 잡고 불쑥불쑥 증식하는 박테리아야 바이러스야 쪼잔한 병균아

  내 몸 이곳저곳을 떠돌며 각종 질병을 일으키는 자식아

  내 피는 탁하다 칙칙하다 더럽다

  별별 욕망이 다 녹아 있는 공중변소의 변기처럼 역겹다

  수도 없이 피 맛을 보아온 너희들도 잘 알리라

  너희들 역시 생명이기는 하잖니

  셋돈 한 푼 받지 않고 살 집 내어주었으니 주인치고는 인심 한번 좋구나

  셋집 주인의 권리쯤은 제발 좀 인정해주거라 행여 집주인까지 쫓아낼 생각은 말거라

 

  내 몸에도 세 들어 사는 놈들 있구나

  아싸, 내게도 세 내어줄 집 있구나.

 

이은봉, 걸레옷을 입은 구름, 실천문학사, 2013년. 86-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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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6-07-23 0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저는 `비봉사`에서 나온 정치철학책들을 봤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요즘 들어 우리 사회가 나보다는 남을 소외된 이들에 대한 관심이 늘어난 것 같습니다. 시민의식이 많이 늘어났다고 저만 느끼는 것인지는 모겠지만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kinye91 2016-07-23 14:44   좋아요 1 | URL
이 시민의식의 성장이 어쩌면 정치권에서 개헌 논의로 나타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요. 87년 이후 민주화로 얻어진 헌법이 이제는 한계가 보이기 시작하니까 좀더 나은 사회를 위해 헌법도 개정하자 이런 논의를 사회 일각에서 시민단체에서 했고, 이를 정치권이 받을 수밖에 없는 사회가 되지 않았나 해요. 이런 것이 바로 사회에 대한 `따스한 시선`들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하기도 하고요.

겨울호랑이 2016-07-23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경영에서 `복리효과` 또는 `스노우볼 효과`라고 하는데 우리 사회의 변화도 그런 것 같아요. 그리고, 다소 엉쭝하게도「드래곤 볼」에 나오는 `원기옥`도 생각나네요. 온 우주의 에너지를 조금씩 모으는.. ㅋ kinye91님 글 읽으니 여러 생각이 교차합니다. 감사합니다.^^
 
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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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016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수상작이라고 유명해진 소설이다. 나온 지가 한참 되었는데, 제법 읽혔음에도 외국에서 상을 한 번 받으니 다시 베스트셀러의 대열에 든 소설이다. 

 

한강이 쓴 소설을 읽은 것은 "소년이 온다"가 처음이다. 광주민주화 운동을 다룬 소설. 그 많은 광주민주화 운동에 관한 소설들이 나왔음에도 한강 소설은 나름의 독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여러 사람의 관점으로 광주민주화운동을 바라보는 것. 그런 느낌을 바로 이 소설에서도 받았다. "채식주의자"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연작소설이다.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이라는 세 편의 소설이 묶여 있다. 제목이 다른 단편들이 모여 있지만 내용이 연결이 된다. 연작소설이라지만 작은 소제목을 지닌 장편소설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다만, "소년이 온다"와 비슷하게 사건마다 주인공이 다르다. 즉, 한 인물과 얽힌 사건들이 서로 다른 사람들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소설은 바로 "영혜"를 중심으로 서술된다. 그렇다고 "영혜"가 주인공이 된 적은 없다. "영혜"를 둘러싼 인물들이 때로는 서술자로 때로는 주인공으로 등장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이 소설에서는 "영혜"를 빼놓으면 안된다.

 

"영혜"가 실질적으로 소설을 이끌어가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첫번째 소설인 '채식주의자'에서는 영혜의 남편이 서술자이자 주인공이다. 어느날 갑자기 채식주의를 선언한 영혜를 바라보는 나의 관점.

 

그 남편은 우리나라 보통사람을 대표한다. 적당히 속물적이고 적당히 가정적이고, 적당히 남을 의식하는 결코 튀지 않으려 하는, 그렇다고 다름을 인정하지도 않는 그런 사람.

 

그런 사람에게 자신의 아내가 '채식주의'를 선언한 것은 일탈이다. 보통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그는 그것을 참을 수 없다. 자신의 영역에서 아내가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다름을 포용하고 자신의 영역을 넓혀가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자신의 영역만을 고수하며 그 영역에서 벗어나는 사람은 배제해야만 하는 사람, 그것이 바로 영혜의 남편이다. (그가 이러한 보통에서 벗어나는 것을 얼마나 싫어하는지는 영혜가 브래지어를 하지 않는 것을 의식하는 모습에서 너무도 잘 드러난다. 그에게 자신의 아내가 브래지어를 하지 않는 것은 사회적 관습, 즉 보통의 삶에서 일탈한 것이고, 이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된다)

 

이런 배제를 합리화하기 위해 그는 처가를 동원한다. 장모와 처형. 이들에게 아내의 채식이 일탈임을, 다시 자신의 영역으로 돌아오게 압력을 넣으라고 한다. 그러나 결과는? 영혜는 자해로 병원에 가고, 정신병원에 입원하며 둘은 결국 이혼하게 된다.

 

보통사람들에게 무언가 다른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사람, 자신의 영역에서 함께 할 수 없는 사람이다.

 

이 지점에서 두 번째 소설이 등장한다. 이 소설 '몽고반점'에서는 바로 보통 사람이 아니라 보통사람에서 특별한 사람으로 변화해가는 사람이 주인공이다. 바로 영혜의 형부.

 

그는 예술가다. 요즘 말로 하면 비디오 아티스트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사회적 문제를 다루는 예술가였다. 사회에서 보통에 가까운, 사회를 거스르는 것 같지만 사회를 바른 방향으로 이끌려고 노력하는 극히 정상으로 보이는, 보통 예술가.

 

그가 어느 순간 아내에게서 처제의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있다는 말을 듣고 예술적 영감을 얻는다. 극히 개인적인 예술적 영감. 사회에서 용납될 수 없는 예술적 영감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그는 자신이 고수하고 있던 영역에서 나와야 한다.

 

그 영역에서 나옴은 일상의 규범에서 나와야 함을 의미하고,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이해받기를 포기할 때만 가능해진다.

 

함께 예술하는 후배에게도 온전히 이해받지 못한 그는 영혜의 몸에 꽃을 그리고 자신의 몸에도 꽃을 그려 서로 교합하면서 그 장면을 비디오로 찍는다.

 

규범에 얽매인 것이 아닌 규범을 초월해 개인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예술. 그것이 순수함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예술이라고 해도 (이런 점에서 어른이 되어도 몽고반점을 지니고 있는 영혜는 순수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이런 사회의 때가 묻지 않은 순수는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그 순수에 충격을 받아 그 세계로 들어서는 예술가 또한 마찬가지다) 그런 예술이 과연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을끼?

 

자신에게 가까운 사람에게 이해받을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다. 영혜가 다시 정신병원에 가고, 그가 가정에서 떨어져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된다.

 

이 상황에서 소설은 '나무 불꽃'으로 간다. 가장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영혜의 언니. 그는 동생은 이혼당하고,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행위를 한 남편과 헤어진다. 그러면서도 그는 혈육이라는 이유로 영혜를 돌본다.

 

영혜를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그를 받아들이려 한다. 받아들이려 하지만 영혜의 언니는 정상인의 관점에서 영혜를 자신의 영역으로 돌아오게 하려고 한다.

 

자신의 영역을 지키려 하고, 그 영역을 지키기 위해 삶의 모든 것을 바친 사람이 바로 영혜의 언니다. 그런데, 그런 삶이 의미가 있을끼?

 

자신의 삶은 보통의 틀에 갇혀 버린, 남의 시선에 스스로를 가둔 삶이지 않았을까 하는 깨달음, 그런 깨달음을 영혜를 통해서 얻게 된다.

 

이 소설에서 가장 변화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 자신의 틀을 깰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영혜의 언니인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이지만, 자신의 삶에만 매몰되지 않고, 자신의 삶에 거리를 두고 되돌아볼 줄 아는 사람.

 

이런 사람은 자신의 영역만을 고수하지 않는다. 다름을 무조건 배제하지 않는다. 다름을 인정하고, 그 다름을 껴안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필요한 사회다.

 

채식주의자를 통해서 다르다는 것이 어떻게 배제되는지를 알 수 있는데, 이런 배제가 우리 삶 전반에 걸쳐서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영혜나 영혜의 형부는 사회적 통념에서 벗어난다는 이유로 사회에서 배제당한다. 그렇게 배제하는 사람이 자신을 보통이라고 생각하는,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영혜의 남편 같은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이 의식하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레 다른 사람을 배제하는 모습, 이것이 이 소설의 앞 두 소설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바로 세 번째 소설에서 찾을 수 있다. 자신의 영역에서 벗어나기. 자신의 영역을 다르게 보기. 그래서 자신의 삶만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여기까지 소설은 나아가고 있다. 하지만 이뿐일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 소설에서는 더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는데... 더 많은 정리가 필요한 소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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