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보고 싶어하는 세상
장강명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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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SF소설이라고 하지 않는다. 자신이 쓴 소설을 STS(Science, Technology and Society) SF라고 하고 싶다고 한다. 자신의 소설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 이는 독자들에게 이런 식으로 읽어달라는 주문과도 같다.


즉, 자신이 쓴 소설을 과학과 기술이 사회와 맺는 관계 또는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중심으로 읽고, 그 소설을 통해 당신이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서, 당신이 살고 싶은 세상에 대해서 생각하라는 얘기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만큼 지금 과학기술이 곧 이룰 미래의 모습이 소설에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소설에서는 외계 생명체가 등장할 필요가 없다. 물론 이 소설집에서도 원소기호의 이름을 딴 외계에 사는 생명체 이야기가 나오기는 한다. 그것도 불멸(부활)과 독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지만, 이는 독재정권에 대한 우화로 읽힐 수가 있다. 


이 소설집에서 가장 긴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소설 '아스타틴'(229쪽-360쪽)이다. 란타넘족 원소기호에서 이름을 따오고, 이들이 절대권력을 잡기 위해서 싸우는 장면을 무협이나 폭력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소설을 연상시키면서 전개하지만, 독재자가 영구 집권을 할 수 없음을, 다른 세계를 추구하는 존재가 나타남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한 편의 활극을 통해 독재정권의 말로를 보여주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소설을 예외로 하면 나머지 소설들은 모두 배경이 지구에 살고 있는 인간들이다.


제목이 된 소설 '당신이 보고 싶어하는 세상'은 증강현실을 다룬다. 증강현실로 자신이 보고자 하는 면만 볼 수 있는 세상이 된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소통할까? 내가 심한 욕을 해도 상대는 자신이 듣고 싶어하는 말로 번역해서 듣게 된다.


마찬가지로 비루한 현실을 보지 않고, 증강현실로 왜곡된 현실을 보게 된다.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들이 실제와 일치할 필요가 없는 세상. 


모든 사람이 이러한 증강현실로 세상을 보게 되면 과연 그 세상은 어떻게 될까? 소통이 가능할까? 소통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불편한 진실을 보거나 듣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즉 자신에게 유리한 것들만 보고 들을 수 있는 세상에서 굳이 진실을 대면하려 하지 않는다.


이 소설을 다른 쪽으로 넘겨보면 '데이터 시대의 사랑'이 된다. 옛날에는 점쟁이를 찾아가 만남의 의미를 들으려 했다면 이제는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통계 또는 알고리즘으로 무장한 통계로 만남을 예측하는 세상이 된다면.


이런 세상에서는 자신이 데이터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부터는 데이터에 종속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데이터로 분석한 내 행동이 이러했기에, 이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데이터의 예측대로 행동하려는 경향이 강해지지 때문이다. 이는 증강현실로 현실을 왜곡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삶에는 불확실성이 존재하고, 이 불확실성으로 인해서 인간의 자유의지가 작동한다고 볼 수 있는데, 데이터에 기반한다면 자유의지를 부정하게 된다. 이미 그렇게 하도록 되어 있다는, 예정설로 회귀하게 된다. 이것이 증강현실 속 인간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그럼에도 장강명은 '데아터 시대의 사랑'에서 결말을 데이터 시대에서 인간의 불확실성을 받아들이는 시대로 끌어온다. 이게 인간이라는 듯이.


이 불확실성을 다른 면으로 살펴보면 '알래스카의 아이히만'이 된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차용한 이 소설은 인간의 뇌에 다른 사람이 겪은 경험을 이식할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된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악의 평범성'이란 말을 탄생시킨 아이히만에게 유대인이 수용소에서 겪었던 일을 경험하게 하는 기술이 있다면, 과연 그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상대의 경험을 자신의 뇌에 이식한다고 해서 그 경험이 온전히 자신의 경험이 될 수 있을까? 인간이 인간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이렇게 이식될 수 있을까?


그런 감정의 전이가 된다면 사람들이 서로 맺는 관계에서 불확실성이 없어질 것이다. 그런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일까? 저 사람이 무엇을 느끼는지 내가 똑같이 알 수 있다면? 또 내가 무엇을 느꼈는지 상대가 정확하게 느낄 수 있다면? 


그럼 인간 관계가 좋아질까? 오히려 더 좋아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관계에서는 틈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과 상대가 함께 채워야 할 틈. 거리라고 해도 좋다. 이런 틈과 거리가 바로 불확실성에서 비롯하고, 불확실성은 함께 노력하면서 틈과 거리를 채우는 역할을 하기에 인간 관계를 더욱 풍요롭게 한다.


우리는 불확실성 때문에 불안해 하지만, 바로 그 불확실성 때문에 오히려 더 생동감 있는 관계를 맺게 된다. 이를 글쓰기에 적용해 보자. 작가들은, 굳이 작가가 아니라도 사람들은 글을 쓰다가 막히는 때가 있다. (사이보그의 글쓰기)


글이 도통 써지지 않을 때, 글감이 떠오르지 않을 때가 있다. 이 역시 자신이 하는 일이 불확실성에 빠지는 경우다. 그런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 뇌를 자극하는 기계가 발명된다고 하자. 그 기계를 사용하면 이런 단절을 겪지 않아도 된다.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계에 의해서 글을 자동적으로 쓰게 된다면? 


이런 글에서 생동감을 느낄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한 발 더 나아가자. 인간에게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무엇인가 하면 논쟁이 있겠지만 '뇌'가 빠지지는 않는다. 뇌의 죽음은 인간의 죽음이니까.


따라서 뇌를 중요하게 여겨서 뇌만 남겨도 인간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많은 작가들이 이러한 뇌에 대해서 소설을 쓰기도 했는데,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뇌' 역시 마찬가지다. 이런 작품과 비슷하게 뇌만 지니고 우주로 나아간 사람들 이야기가 있다. '당신은 뜨거운 별에'다.


뇌를 로봇에 장착해서 금성을 탐사한다.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 그런데 그 뇌를 또 이익집단이 통제할 수 있다면? 자신의 뇌지만 자신을 고용한 사람들이 자극을 통해 뇌를 통제한다면 과연 그때의 나는 나인가? 오히려 남이 하라는 대로 하는 기계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지니게 된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그런 점을 생각해야 한다. 뇌만 남은 인간, 아니 뇌를 다른 기계에 이식한 인간. 그리고 그 뇌를 다른 집단이 통제하도록 하는 인간. 이는 자유의지가 없는 인간이다. 자유의지가 없다는 말은 자신의 행동이 초래할 불활실성을 제거했다는 말이다. 그런 사회에서 사는 인간이 과연 행복할까? 작가는 인물이 탈출하는 것으로 그런 세상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보고 있음을 우리에게 알리고 있는데...


여기까지 언급한 소설들은 지금 우리 시대에 개발을 하려 하고 있는 기술들이다. 이런 기술들이 실용화된다면 그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 우리가 행복한 사회일까를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작가의 말에 공감하게 된다. 그의 삼단논법을 보자.


1. 오늘날 과학기술은 나의 삶과 내가 사는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다.

2. 나는 좋은 삶을 살고 싶고, 좋은 사회를 만들고 싶다.

3. 그러므로 나는 과학기술을 통제해야 한다. (401쪽) 


이 삼단논법을 통해서 그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기술이 우리 삶과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킬까? 그 변화는 바람직한가?'하고 폭넓게, 적극적으로 따져 묻고 싶다. 우리가 어떤 기술에 대해서는 개발하거나 사용하지 말자고 혹은 사용을 제한하자고 합의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해야 한다고 본다. 사실 우리는 이미 그런 일을 하고 있다.' (401-402쪽)고 말하고 있다.


작가가 이 소설을 쓴 이유다. 그리고 자신이 쓴 소설에 그냥 SF소설이 아니라 STS(Science, Technology and Society) SF라고 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 작품집에 있는 소설들 읽으면서 현대 과학기술이 가고 있는 길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한다. 논의해야 한다. 우리는 계속 이 지구에서 살아가야 함으로.


읽으면서 역시 장강명이다 하는 생각을 했다. 사람들에게 잘 읽히는 소설을 쓰는 작가, 사람들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작가 장강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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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트하우스
욘 포세 지음, 홍재웅 옮김 / 새움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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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첫부분부터 뭐야?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번역으로 읽어서 원문의 문체를 모르겠지만, 적어도 번역문에서 독특한 문체를 느낄 수 있다.


소설인데, 탁-탁-탁 하는 리듬을 느낄 수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짧은 문장들이 계속 나온다. 이토록 간결한 문장들이 연속될 수 있나 싶을 정도다. 게다가 같은 단어들, 같은 문장들이 반복된다. 상황도 반복되고. 


음악에서 도돌이표가 있는 듯이 소설은 계속 나아가다 돌아가고 또 나아가다 돌아가고, 반복, 반복의 연속이다. 이런 문장들 속에서 리듬을 느낄 수 있다.


첫부분을 보자. 짧은 문장. 반복되는 문장을 만나게 된다. 이런 부분이 또 계속해서 나온다. 자꾸 앞으로 돌아가, 돌아가 하는 듯이. 도돌이표. 불안에 싸여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이 이런 도돌이표와 같지 않을까, 그런 점을 표현한 걸까 하는 생각도 들게 하는 문장들의 반복이다.


'나는 더 이상 밖에 나가지 않는다. 불안감이 엄습하여 나는 밖에 나가지 않는다. 이 불안감이 엄습해 온 것은 바로 지난 여름이었다. 나는 적어도 10년은 보지 못했던 크누텐과 다시 마주쳤다. 크누텐과 나, 우리는 늘 함께였다. 내게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그게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그 불안 증세로 내 왼팔, 내 손가락이 쑤신다. 난 더 이상 밖에 나가지 않는다.' (8쪽)


인물이라고 해봐야 겨우 셋인데, 아니 소설을 이끌어가는 인물은 둘인데, 이름이 나오지 않는 '나'와 '크누텐'


'나'는 시작부터 우리가 말하는 일반적인 보통의 범주에서 벗어난 모습을 보인다. 그는 자신의 방에서 나오지 않는다. 불안감에 휩싸여 있다. 그런 불안감을 이겨내기 위해서 글을 쓴다. 글쓰기가 치유의 한 방식이지만, 여기서 글쓰기는 치유가 되지 않고, 그의 불안감을 계속 심화 확장하는 역할을 한다.


그는 글쓰기를 통해서 자신의 불안감을 계속 떠올린다. 왜 불안한가? 별것도 아니다. 그 별것 아닌 것이 별것이 되는 것. 이 소설이 지닌 장점이다.


그런데 '나'는 그렇다치는데, 뒤로 가면 '크누텐'이 서술자가 되는 부분들이 있다. 이상하게 다른 인물인데도 이들의 서술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비슷하다. 둘다 무언가 모를 불안에 차 있다.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감정을 드러내지 못하고 그냥 감정을 안으로 안으로 들여 자신의 행동을 제약한다. '나'도 그렇고 '크누텐'도 그렇다.


이러니 이들은 어릴 적 친구라고 해도 계속 어긋날 수밖에 없다. 나와 크누텐의 관계만이 아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도 잘 관계 맺지 못한다. 무언가 계속 어긋난다. 크누텐의 아내와 만나는 장면에서 그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런 만남을 크누텐에게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 이 점은 크누텐도 마찬가지다. 무언가가 관계를 맺는데 실패하게 한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안으로만 들어가는 태도 때문인지도 모른다.


보트하우스라는 낡은 곳, 아무도 찾지 않는 곳. 그래서 어린 시절 그들의 피난처이자 놀이터이기도 했던 그곳이 나오지만, 그 보트하우스처럼 '나'도 '크누텐'도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지 못하고 제 자리에서 쇠락해갈 뿐이다.


보트하우스는 그들의 삶을 대변하고 있는 장소가 되는데, 그들에게 의미가 있던 그 장소가 이제는 그냥 쇠락한 공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 만큼 자신들을 옥죄고 있는 불안들도 별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들이 그렇게 마음 졸이고, 불안에 떨던 많은 상념들이 삶에는 별다른 의미를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관계는 파탄날 뿐이다. 크누텐이 아내와 제대로 관계를 맺지 못하는 이유가 어린 시절의 어떤 경험때문이라면, 그런 경험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보트하우스처럼 그 자리에서 그냥 낡아갈 뿐이라는 것, 자신의 삶을 갉아먹을 뿐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이 점은 '나'도 마찬가지다. '나'가 변변한 일자리도 갖지 않고, 그나마 어린 시절부터 해오던 연주일을 하던 것에서 이제는 집 안에만 처박혀 글만 쓰는 일은 관계의 파탄이다. 외부와 연결돼 있던 끈을 놓아버리고 만 것.


하여 인물들의 이런 모습을 보면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데, 그런 짜증을 작가는 짧은 문장들을 경쾌하게 배치함으로써 누그러뜨리고 있다.


이들의 우유부단함, 관계맺기의 실패 등이 경쾌한 문장으로 소설을 끝까지 읽어가게 만들고 있다. 아마도 내용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문장이 짧고 경쾌했다는 사실은 남을 것 같다. 


자신들의 삶을 짓누르고 있는 무거운 생각들의 늪을 작가의 문장처럼 날렵하고 경쾌하게 벗어던졌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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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수학특성화중학교 시즌 2. 1~3 세트 - 전3권 수학특성화중학교
김주희.이윤원 지음, 녹시 그림 / 뜨인돌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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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1에 이어 시즌2다. 역시 세 권으로 이루어졌다. 시즌1에 나오는 인물들에 새로운 인물이 추가되고, 사건이 벌어지는 장소가 달라진다. 그리고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사실 중학생이 개입되기에는 너무도 큰 사건이다. 그렇지만 중학교 때 이런 사건을 해결한다는 환상을 품은 학생도 적지 않으니, 중학생들의 환상을 채우는 데는 이만한 이야기도 없겠단 생각도 든다.


시즌1에 나오는 악당이 제로다. 왜 이들이 악당이 되었는지 전 편에서는 알 수가 없었는데, 2에서는 피타고라스와 연결지어 어느 정도 짐작하게 한다.


질서, 인간 지식으로 설명이 가능한 것. 이것을 벗어난 것에 대한 증오. 그래서 무리수를 발견하고 주장한 피타고라스의 제자인 히파수스가 죽임을 당한다는 얘기가 시즌2에 등장한다. 그의 죽음이 바로 테러와 연결이 되고, 이것이 제로와 연결이 되게 만든 것.


소설이 어느 정도 개연성을 지녀야 한다면 왜 그런 사건을 일으키는지를 알려주기 위해서 피타고라스와 히파수스를 등장시켰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중학생들이 겪을만한 모험을 가미해서 사건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


즉 어른들 세계에 제로가 있다면, 아이들 세계에는 성찬이라는 새로운 인물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노을, 란희, 파랑, 아름이 있고. 여기에 성찬이 사건을 만들어가기 위해서 무리수라는 인물을 등장시키고.


이 소설을 요약하면 썸, 아이돌, 성적, 모험이라고 할 수 있다. 학교 생활을 해야 하니 당연히 성적이 들어가고, 수학특성화중학교라고 하니, 수학에 관한 내용이 간간이 나와 사건을 해결할 수 있게 하고 있다.


문을 연다든지, 온수를 튼다든지, 식사를 할 때 간식을 더 받는다든지 할 때마다 수학과 관련된 문제가 나오고, 그를 풀어야지만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게 한 전개다.


그렇다고 이렇게 수학 문제만 나오면 대부분은 흥미를 잃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 나이 때의 아이들이 겪는 소위 말하는 '썸'탄다는 말에 해당하는 연애 비슷한 감정들과 관계들이 나온다. 이것이 풋풋한 아이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제로라는 악당을 통해서 모험을 겪게 되는 아이들의 모습을 통해 간접적으로 흥미진진한 모험을 하게 한다. 책을 통해서 하는 간접 경험. 이것 역시 괜찮은 방법이다.


다만, 현실에서 겪을 수 있는 고민들은 이 소설에 나오지 않는다. 환상을 충족시켜주는 내용으로 전개되다 보니, 등장인물들이 모두 대단한 능력자들이다. 그리고 문제가 커다란 위기 없이 해결이 된다.


이것이 이 소설을 편하게 읽을 수 있게도 한다. 어차피 문제는 해결될 것이고, 그 과정을 따라가면 되니까. 


소설을 통해서 현실을 반추하고,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어떻게 지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하기보다는 경쾌하고 발랄하게 사건을 진행함으로써 현실을 잊고 다른 사람의 세계에 몰입하게 하는 경험을 하게 해주는 작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건마다 등장하는 수학에 관한 문제들이 수학이 실제 생활과 어떻게 연결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어서 비록 조금일지라도 수학은 우리 생활과 별 관계가 없다는 생각을 없애는데 도움을 준다.


빠르게, 위기에 처한 주인공을 보면서도 마음 졸이지 않고 읽을 수 있는, 그러면서 수학 문제도 한번 등장인물들과 함께 풀어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소설이다.


청소년들이 읽으면서 수학이 이렇게 쓰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그런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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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수학특성화중학교 시즌 1. 1~3 세트 - 전3권 수학특성화중학교
이윤원.김주희 지음, 녹시 그림 / 뜨인돌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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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특성화중학교'


수학 영재를 키운다고 세울 수 있는 학교다. 과학고가 있으니 수학고가 없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하지만 현실에서 수학고는 없다. 과학고에 수학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영재고가 있는데, 이 영재고가 바로 수학과 과학에 뛰어난 학생들이 있는 학교 아니던가.


고등학교도 그런데 수학특성화중학교라고 하면 특목고가 아니라 특목중이다. 이런 학교가 있다면 어떨까 생각을 해보기도 하지만, 글쎄?


제목은 이렇지만 수학특성화중학교답게 수학 문제를 푸는 일이 많은 학교로 설정이 되어 있지만, 소설은 중학생들을 중심으로 사건을 서술하고 있다.


진노을, 허란희, 임파랑, 박태수, 한아름이라는 중학생 다섯이서 겪는 갈등과 호감이 한 축을 이루고, 여기에 교사로 나오는 정태팔, 김연주, 류건과 관련된 사건이 또 한 축을 이룬다.


그리고 이 두 축이 맞물려 사건이 전개된다. 1권은 비교적 가볍게. 요즘 인공지능이라고 할 수 있는, 거의 알파고를 넘어서도 한참 넘어서는 '피피'라는 이름의 프로그램이 노을에게 발견되는 과정이, 2권에서는 류건과 관련된 제로라는 단체와의 갈등이 심화되고, 3권에서는 그러한 갈등이 해결이 된다.


이런 서술 과정에서 수학 문제가 간간이 나오는데... 물론 중학교 수준의 문제다. 그래서 소설을 읽으면서 함께 문제를 풀어볼 수 있다.


즉, 수학을 어렵게만 여기던 학생들에게 수학에 대한 흥미를 불어넣어 주려는 의도가 담겨 있는 소설이라고 보면 된다.


그렇다고 수학 문제가 많이 나오면 아마도 중학생들은 책을 덮고 말 것이다. 그래서 적당하게 문제를 배분하고 있다. 많이가 아니라 적게, 필요할 때, 즉 모험을 할 때 힌트를 주는 식으로, 그 힌트가 바로 수학과 관련이 있게 만들고 있다.


무엇보다 학생들 사이에 벌어지는 호감과 갈등이 중학생들의 흥미를 이끌어내고 있으며, 여기에 컴퓨터와 관련된 다양한 사건들이 펼쳐져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수학특성화중학교라는 제목에 수학에 관련된 이야기가 많을 거라고 하지만, 학생이 수학 천재이고, 그런 학생들에게 수학과 관련된 행사를 많이 한다는 설정으로, 수학이 우리 생활에서 얼마나 밀접한 관련이 있는지를 보여주려는 의도라고 보면 된다.


보통 학생들보다 배경이 좋은 인물들이 설정되었다는 점에서 아마도 학생들이 감정이입을 하기보다는 자신과는 다른 멋진 학생들의 이야기를 본다는 관점에서 읽을 가능성도 많지만, 오히려 그것이 수학과 거리를 두어서 좀더 객관적으로 수학을 볼 수 있게 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한다.


이것저것 다 떠나서 중학생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들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 소설이다.


청소년들의 모험과 성장소설이라고 해야할까, 여기에 수학이 양념처럼 가미되어 있는 소설이다. 중학생들이 좋아할 만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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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견자들
김초엽 지음 / 퍼블리온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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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디스토피아다. 지구의 지상에서 살아갈 수 없게 된 인간. 외계에서 온 범람체들에 의해 지상을 빼앗기고 지하로 스며들어 살아가는 인간 세계가 나온다. 범람체들은 거의 무한증식이다. 자신들과 접촉한 대상에 들어가 그 대상을 지배한다.


그렇게 여겨지는 범람체들과 공생할 수 없는 인간들은 그들을 피해 지하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지상을 찾으려는 노력을 한다. 지상을 찾기 위해서 지상을 탐색할 파견자들을 내보낸다. 파견자들은 지상을 탐색하고 범람체들을 없애는 방법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지하에서도 계속해서 범람체들에 의해 감염되는 사람들이 나온다. 이들은 인간들과 함께 살 수 없다. 광증이라고 표현한다. 미친 사람. 그런 사람은 격리되어야 한다. 그들은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격리시설로 옮겨진다. 그 격리시설을 가족들조차도 방문하지 못하지만.


지상은 범람체들에 의해 잠식당했고, 지하에서도 범람체들에 감염되는 사람이 속속 나오는 상황에서 인간들은 범람체를 없앨 연구를 한다. 지상을 되찾으려 한다.


파견자들은 그러한 막중한 임무를 띤 사람들이다. 그런 파견자가 되고 싶은 태린이 있다. 이제프를 사랑하는, 그래서 이제프와 함께 지상을 거닐고 싶은.


파견자 시험을 보는 와중에 태린은 자신의 머리 속에서 다른 존재를 감지하게 된다. 그 존재와 대화를 하게 되기도 한다. 의존하기도 하지만 시험 마지막에 자신이 이름 붙인 '쏠'이라는 존재에 휘둘려 폭주하고 만다. 대형사고를 친 것이다.


태린에 대한 징계는 이제프의 도움으로 추방이 아니라 파견이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아주 위험한 임무를 띠고 두 명의 파견자들과 함께 파견되는 태린. 여기서 태린은 다른 세계를 인식한다. 자신의 머리 속에 있는 존재의 정체도 깨닫게 된다.


지상과 지하, 범람체들과 인간, 그 사이에 있는 범람화된 인간들. 그렇다. 이제 지구에는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존재들이 탄생하기 시작했다. 그들을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문제. 이는 공생이냐 파괴냐의 갈림길에 서게 한다.


공생의 조건. 서로 다른 존재임을 인정하면서 자신을 지키면서 자신을 내어줄 수 있어야 한다. 즉 범람체들도 인간을 완전히 잠식해서는 안 되고, 인간 역시 범람체들을 인정하지 않아서는 안 되고 지구에서 영원히 몰아내려 해서도 안 된다.


이 사이에 범람화된 인간이 있다. 범람화된 인간 중에서도 태린과 같이 범람체와 공생하는, 두 자아가 동시에 한 몸에 존재하는 존재들도 있다. 바로 태린과 선오가 그런 인물들이다.


인류는 어떤 선택을 해야할까? 소설은 범람체로 인해 지하로 쫓겨난 인간들의 세계인 디스토피아에서 시작한다. 그렇다. 인간은 자신들이 살던 터전에서 쫓겨났다고 여긴다. 그들은 지상을 다시 찾아야만 한다고 한다.


그 과정은 범람체와 인간의 전쟁일 수밖에 없다. 이런 전쟁을 막으려는 존재들이 나온다. 변화를 인정하고, 다름을 받아들이면서 함께 살아가자고 하는 존재들. 범람체들 역시 인간을 이해하는 과정을 거치고, 인간들 역시 범람체들을 이해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해하기 위해서는 접촉이 있어야 한다. 접촉 없는 이해는 없다. 이런 접촉을 이끄는 존재가 바로 태인이다. 선호다. 이들은 지상에서 오는 신호를 감지하고 이를 이해하려 한다. 그런 과정에서 범람체들과 또 범람화된 인간들을 만나게 된다.


만남에서 오는 이해, 특히 쏠과 공생하면서 다른 존재를 받아들인 태린. 이들은 전쟁이 아닌 공생을 택한다. 자신이 사랑하는 이제프를 희생시키면서도...


집단과 개인의 공생. 집단 속에 개인이 완전히 녹아들지도 않고 또 개인을 위해 집단을 없애지도 않은 함께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과정이 소설에서 펼쳐진다.


범람회된 인간들은 인간이 아닌 것이 아니라 변한 인간, 즉 다른 형태의 인간일 뿐이라는 인식으로 가는 지난한 과정. 세 존재들이 경계를 정하고, 또 서로 경계를 허물면서 살아가게 되는 과정을 소설은 보여주고 있다.


디스토피아에서 유토피아로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유토피아는 단일성에서 오지 않음을, 유토피아는 다양함에서, 다양함을 인정하는 관계 속에서 만들어짐을 생각하게 한다.


중간지대의 확장이 유토피아로 가는 길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이는 태린이 경계지역에서 범람체들과 인간들을 연결짓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에 인간들의 인식이 범람화된 인간들도 인간이라고 바뀌어 간다. 


'그들은 우리를 움직이는 징그러운 시체라고 생각해. 그래서 그냥 땅속에 파묻어버려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이왕 파묻을 거면 무기로 써먹고 묻겠다는 거지. 하지만 우리는 죽은 게 아니야.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게 됐다. 그걸 원하지 않았다고 해도.' (363쪽)


범람회된 인간, 즉 전이자들은 이런 대우를 받고 있었다. 그러다 경계지역이 생기고 점차 서로 접촉하면서 사람들의 생각은 변한다. 바로 이렇게.


'경계 지역에서 새롭게 살아가는 전이자들의 삶을 목격하자, 도시 사람들의 생각도 바뀌었다. 그것도 삶이라는 것. 단지 다른 방식의 삶일 뿐이라는 것을 직접 보았으니까.' (418쪽)

 

그렇다고 한번에 확 변하지 않는다. 유토피아는 결과가 아니다. 과정이다. 디스토피아가 결과라면 변해가는 과정, 서로가 서로를 이해해 가는 과정이 바로 유토피아다. 


'앞으로도 그 균형이 지금처럼 유지되리라는 법은 없었다. ... 태린은 경계 지역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이 그 답을 찾아내주기를 바랐지만, 어쩌면 아이들도 명확한 답에는 다다르지 못할지도 모른다. 단지 불균형과 불완전함이 삶의 원리임을 받아들이는 것, 그럼에도 끊임없이 움직이며 변화하는 것, 멈추지 않고 나아가는 것만이 가능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419쪽)


이렇게 소설은 태린이 점차 각성해가면서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잇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이는 디스토피아에서 유토피아로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결코 쉽지 않은, 어쩌면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존재를 잃는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나아가야 하는 길일 수도 있다.


그렇게 김초엽은 다른 생명체에 잠식당하는 지구의 모습을 그리면서 그것이 정복이 아니라 공생으로 갈 수 있음을, 우리가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야 함을 소설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결코 쉽지 않겠지만.


이를 현실에 반영하면 사람들의 이주를 생각하면 된다. 이주민들을 자신들의 삶을 위협하는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새로운 삶을 만들어가야 함을. 그들과 소통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고민해 봐야 함을. 이주민이 우리 사회에 많이 유입되고 있는 이때, 그들과 어떻게 지내야 할지를 범람체, 인간, 그리고 전이자들의 관계로 치환해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결코 상상 속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 현실의 이야기가 소설 속에서 펼쳐진다는 생각이 든다. SF소설은 공상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현실을 반영하는, 우리에게 이 현실에서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소설이기도 하다.


SF소설은 공상이 아니라 상상임을, 이렇게 다른 관계로 치환해서 생각해 볼 수 있음을, 이 소설이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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