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를 사는 시인 김시종 재일코리안총서 6
호소미 가즈유키 지음, 동선희 옮김 / 어문학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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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이름이다. 녹색평론에서 그의 자서전에 대한 서평을 읽기 전까지는 그냥 지나치고 넘어갔던 인물.

 

중고서점에서 이 책을 보기는 했지만,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굳이 일본에서 일본어로 시를 쓴 재일한국인(어쩌면 그에겐 재일한국인이라는 말보다는 재일조선인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그에게 조국은 분단된 나라가 아니라 하나로 통일된 나라이기 때문이다)에게 관심을 기울일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일본에서 활동한 작가들 중에 기껏 이름을 안다고 해야 김석범과 이회성 정도, 최근에는 서경식의 책을 조금 읽고 있지만, 서경식은 소설이나 시를 쓰는 작가라기보다는 에세이를 쓰는 사상가 쪽에 더 가깝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김시종에 대해 더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녹색평론을 읽다보니 김시종이 제주 4.3에 관련이 되어 있었으며, 그로 인해 일본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는 점, 그가 우리나라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서도 "광주시편"이라는 시를 썼다는 것이 그에 대한 책을 읽게 만들었다.

 

생각난 김에 중고서점에 들러 사서 읽기 시작한 책, 그가 일본어로 시를 썼지만 일본어에도 조선어의 흔적이 담겨 있고, 시의 내용에는 조국의 현실과 그의 삶이 처절하게 녹아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반도 북쪽 원산에서 태어나 일제시대에 그곳에서 살고 일본어를 조선어보다도 더 잘 구사하던 그가 갑작스레 다가온 해방으로 조선어에 대한 인식을 하게 되고, 조선어를 익히다가 다시 제주도에 살게 되어 4.3에 관련되는 파란만장한 삶.

 

그의 삶 자체가 디아스포라의 삶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남과 북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이었고, 자리잡고 사는 일본에서도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시인이었다.

 

그는 본래 사회주의사상에 경도되었으나 여러 가지 일로 인해 북한 쪽과는 거리를 두게 되었고, 최근에는 남한을 방문하여 여러 활동을 하기도 한다고 한다.

 

그의 시에는 이러한 삶의 아픔이, 역사의 비극이 잘 드러나 있는데, 이를 그의 첫시집의 분석에서부터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 이 책이다.

 

어떻게 그의 시에 4.3이 녹아들어가 있는지, 또 일본에서 재일한국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힘든 모습들, 그리고 광주민주화운동이 그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를 작품을 통해서 살펴보고 있기에 김시종이라는 시인 입문서로는 적당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온몸으로 조국의 비극을 겪은 시인인 김시종은 비록 일본어로 시를 썼다고 하지만 우리 문학사에서도 소홀히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작품에서 놓치지 않고 있는 것이 조국의 현실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 민족의 분단, 이념 대결이 없었다면 어쩌면 일본에 살 수밖에 없게 된, 그래서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이런 사람들이 거의 없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이제는 이들도 우리라는 틀 안에 받아들여 우리라는 틀을 더 넓게 더 유연하게 확장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시집 중에 번역된 것도 있다고 하고, 그의 자서전도 번역이 되어 있으니 시간 나는 대로 읽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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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세가 들려주는 나비 이야기 - 반짝임과 덧없음에 대하여
헤르만 헤세 지음, 박종대 옮김 / 문예출판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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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가장 잘 알려진 작가 중에 하나가 헤르만 헤세가 아닐까 한다. 그의 작품이 중고등학교 필독도서 목록에 올라있어서이기도 하겠지만, 그의 작품이 우리나라 사람들 성향에 맞기도 했기 때문이리라.

 

데미안, 수레바퀴 아래서, 싯다르타, 지와 사랑, 유리알 유희 등 그의 작품은 너무도 많이 알려져 있다. 여기에 중학교 때 그의 '나비'라는 소설 - 공작나비, 공작나방이라고도 한다-을 배우니 그는 여러모로 친숙한 작가이다.

 

그런 그의 글들 중에 나비에 관련된 글을 모은 책이 바로 이 책이다.

 

나비는 애벌레-번데기-나비의 단계를 거치는데, 이를 사람의 정신적 성숙의 단계로 보면 될 듯도 하다. 헤세가 나비를 좋아하는 이유 역시 이런 것과 관계가 있을 듯한데...

 

이 책에 실려 있는 '공작나비'를 보면 이런 관계를 알 수 있다. 애벌레처럼 무언가를 생각하지 않고 본능, 욕망에 충실한 단계, 이 때 이 소설의 주인공은 다른 것은 다 무시하고 오로지 나비를 잡는 생각, 활동에만 몰두한다.

 

그러다 이런 활동이 번데기처럼 자기만의 세계에 갇히게 되는 경우가 있다. 비록 에밀이라는 친구가 너무도 까칠한 모범생이어서 상대방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는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의 말이 타당성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틀 속에 갇혀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이 단계가 바로 번데기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에밀에게 자신의 나비를 다시는 보여주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언제까지 번데기로 지낼 수는 없다. 고치를 깨고 나와야 한다. 고치를 깨는 순간, 나비가 된다.

 

이 순간이 인생에서는 어떤 깨달음의 순간인데, 이 소설에서 공작나비를 훔치다 망가뜨리는 장면, 그 이후 사과 장면에서 이루어진다.

 

자신의 욕망만을 충족시키기 위해 한 행동이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음을 알게 된 순간, 욕망대로만 행동하지 않는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

 

그렇게 소설은 정신적 성숙의 단계를 나비 수집을 통해서 보여주는데, 이것은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과정에 비유할 수 있다.

 

헤세가 나비를 좋아한 이유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어떤 사람을 보아도 그 현재의 모습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앞날을 볼 수 있는, 즉, 사람에게는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여기에 '공작나비'라는 소설이 헤세의 개인적인 체험과 관련이 되어 있음을 이 책에서 말해주고 있으니, 헤세에게 '나비'는 소설의 소재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생활이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나비'에 관한 헤세의 여러 글들을 뽑아 실어서 헤세가 나비에 대해 느낀 감정, 감탄, 표현 등을 누릴 수 있는 책이 바로 이 책이다. 나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읽으면 좋을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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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 북한문학
신형기.오성호.이선미 엮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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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계에서도 블랙리스트 문제가 불거졌는데...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라는 말이 무색하게 자기와 성향이 맞지 않는 작가들을 배제하는 정책을 펴는 정부가 과연 민주주의 정부일까 하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그렇다고 반성하지도 않고 잘못을 남에게만 미루고 있는 형편이니, 문화강국이 되긴 애초부터 힘든 일이었나 보다. 문화강국이란 다양성을 보장하는 분위기에서 나올 수 있을텐데... 블랙리스트라니...

 

우리나라 사람이 우리나라 문학을 하는데도 정부와 성향이 맞지 않으면 블랙리스트에 올라간다. 그렇다면 북한 문학을 하는 사람은?

 

블랙리스트 정도가 아니라 국가보안법으로 처벌을 받을 수준이 될테다. 다행스럽게 북한을 찬양하는 문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북한 문학을 정리해서 소개하는 정도면 국가보안법에는 걸리지 않나 보다.

 

우리나라 내로라 하는 출판사에서 '북한문학'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펴냈으니 말이다. 그래도 검색해 보면 이 책은 품절이란다. 아마도 국문학을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나 유용한 책이라서 더이상 나오지 않나 보다.

 

우연히 알라딘 중고서점에 들렀다가 케이스뿐만이 아니라 비닐로 포장되어 전혀 뜯어보지도 않은 듯한 이 책을 발견했다. 무척 두껍다. 1500쪽이 넘으니 엄청 방대한 양이다. 게다가 가격이 만만치 않다. 6만원이다.

 

그러나 중고서점의 장점이 무엇인가? 한참 싼 가격에 책을 구입할 수 있다는 것 아닌가. 이 책 정가의 약 40%에 샀다는 기억이 있는데...

 

무엇보다도 북한문학을 연구하는 학자는 아니지만, 우리나라 문학이 남과 북으로 나뉘어 영원히 다른 길을 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한다.

 

영구분단을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어찌됐든 통일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통일을 위해서는 남과 북의 언어가 교류되어야 하고, 문화가 교류되어야 한다. 이런 문화 교류의 대표적인 예가 문학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적어도 남과 북 사이의 문학에서는 번역이라는 또 하나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니까, 우리는 그냥 출판된 것을 읽고 감상하면 된다. 남에서는 북의 문학을, 북에서는 남의 문학을 이렇게 서로 감상하다 보면 다양성 속에서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분단 추구의 문학이 아니라 통일 지향의 문학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데...

 

해방직후부터 김일성 사망까지의 기간 동안에 북한에서 창작된 시와 소설 중에서 선자들이 (신형기, 오성호, 이선미) 엄선해서 실은 작품들이 있다.

 

읽으면서 북한과 우리나라 문학이 엄청난 차이가 났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렇게 서로 교류를 하지 않으면 문학에서도 분단이 고착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하게 됐다.

 

우리나라 문학이 걸어온 길과는 너무도 다른 길을 걸어왔다는 생각... 결말이 보이는 소설들, 그런 결말을 향해 우직하게 나아가는 소설들, 그 소설들과 비슷한 주제를 지니고 있는 시들...

 

이 책에 실린 문학작품들은 다양성보다는 주제에서 통일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다양한 문학적 실험보다는 그 사회에 맞는 문학을 하도록 유도되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이미 지나온 시대의 문학이기에, 그 상황에서 이런 문학이 중심을 이루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이 책은 의미가 있다.

 

또 분단된 문학에 통일의 물꼬를 틀 수 있는 작업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하고.

 

하여간 극도로 경색된 남과 북의 상황. 이제는 어떤 교류도 없는 상황. 통일을 서로 원한다고 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통일과는 반대로 가고 있는 상황. 이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우선 교류가 되어야 한다.

 

가벼운 교류부터 시작해야 한다. 문학인들, 학자들, 경제인들, 체육인들 이런 사람들부터 교류를 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다양한 문화를 함께 만들어 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이 책을 읽게 됐다.

 

이 책이 그런 교류의 교두보 역할을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도 하며.. 비록 지금은 그러하지 못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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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션들 보르헤스 전집 2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 민음사 / 199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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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을 펼쳤다가 조금 읽다가 다시 내려놓은 책인지 모른다.

 

도대체 무슨 소설이 이래? 하다가, 이건 소설도 아니다, 소설에 무슨 주가 더 많냐 하다가, 그만두자 하다가 그래도 보르헤스인데, 자꾸 인용이 되는 작가인데 한 권쯤은 아니 한 편쯤은 읽어야 하지 않나 하다가.

 

몇 년을 묵혀두었다가 다시 펼쳐 들고 읽어도 역시 모르겠다. 환상적 사실주의라고 하는데 마치 사실인 것처럼 진술을 하고 있지만 사실과 허구를 교묘하게 섞여 놓은 것이 보르헤스의 소설이라고 하는데 기본적인 지식이 없으니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부터 허구인지 알 수가 없다.

 

환상과 사실을 구분하기 힘드니... 참.

 

이 책에는 많은 단편들이 묶여 있는데, 이 단편집의 이름이 [픽션들]이다. 픽션이란 허구라는 뜻이니 이 소설들에서 나오는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들이 아무리 역사적 사실이라고 해도 그것을 곧이 곧대로 믿으면 안 된다.

 

1부와 2부로 나뉘어져 있는데 1부에는 역사적 사실을 알아야 그것들이 어떻게 교묘하게 비틀어져 있는지를 알 수 있는 소설들이 대부분이고, 2부는 그래도 나름대로 사건이 있는 소설들이 제법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인물과 인물의 갈등이 잘 드러나 있다기보다는, 인물과 인물의 갈등이 있더라도 그것이 묘하게 표현되고 있어서 안개 속을 헤매듯 흐릿한 이미지들을 떠올릴 수 있을 뿐이다.

 

그나마 그런 갈등이 잘 드러나 있는 소설이 '죽음과 나침반' 정도 또는 '칼의 형상' 정도 된다고 할 수 있겠다.

 

나는 1부의 소설을 읽다가 혹시 몇백억 년이 지나서 지금의 역사가 사라지고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존재들이 이 소설을 발견한다면, 이것을 소설로 볼까 역사로 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들은 이 소설을 중심으로 역사를 재구성하려고 하지 않을까? 그렇게 재구성한 역사를 마치 정통한 역사인 양 가르치고 배우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만큼 모르는 상태에서 읽으면 역사인지 허구인지 헷갈리기 때문이다. 1부에 실린 소설 제목 몇 개를 보자.

 

'틀뢴, 우크발, 오르비스 떼르띠우스', '바빌로니아의 복권', '바벨의 도서관'

 

하나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 소설을 읽게 되면 무슨 고고학적 사실을 추구하는 연구서 정도로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우리는 이것들이 분명 허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소설이니까. 소설이라고 알고 읽기 때문이다.

 

그다지 마음에는 와닿지 않지만 그래도 인내심을 가지고 다 읽었다는 점, 읽어가다 보니 자연스레 속도가 붙고 흥미도 생긴다는 점. 무엇이라고 딱 정리를 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리 못 읽을 소설도 아니라는 점.

 

특히 '기억의 천재 푸네스'에서는 사실을 기억한다는 것과 그것을 가지고 사고를 한다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고 하는 점, 우리가 세세한 점을 기억한다고 하더라도 어떤 통찰에 이르기 위해서는 기억만으로는 안 된다는 점.

 

사실들을 꿰는 일반화, 개념화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점을 이 소설을 통해서 작가가 직접 주장하고 있고, 이는 역사를 공부할 때 역사적 사실들을 암기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역사적 사실들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어떤 것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해주기도 했고...

 

역시 소설을 읽을 때 명심해야 할 것들은 지엽적인 사건, 사실들 하나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고.

 

'배신자와 영웅에 관한 논고'에서는 겉으로 드러난 면만을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배신자와 영웅이 같은 인물일 수도 있다는 점, 영웅에게서 어쩌면 우리를 배신하는 배신자의 모습을 볼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볼 수도 있었다.

 

그래도 역시 보르헤스의 소설은 어렵다. 다시 읽어도 어려울 것이다. 그만큼 서양의 문학과 역사, 지리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어느 부분이 역사적 사실을 비틀었는지를 알고 읽으면 보르헤스의 소설이 재미있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비록 '기억의 천재 푸네스'처럼 모든 것을 기억하지는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 유럽의 문화, 문학, 역사, 지리를 안다면 이 소설들 속에 파편처럼 흩어져 있는 많은 요소들이 한 줄로 꿰어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한다.

 

아직은 그렇지 못하기에 그의 소설은 어렵다. 재미를 느끼기도 힘들다. 그러나 주를 무시하고 그냥 본문만 소설이지 하면서 읽으면 그리 못 읽을 소설도 아니다. 이해나 해석은 뒤로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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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와 한국의 시인들 고려대학교출판부 인문사회과학총서 64
김재혁 지음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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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알게 된 것이 언제였던가. 아니 안 적은 있었던가. 그의 이름을 안다고 해서 그를 안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런데도 릴케는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시인이다. 그의 이름을 한 번쯤은 들어보았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릴케를 잘 모르면서도 한컴 타자연습에 있는 윤동주의 '별 헤는 밤'에 이 릴케가 나오니, 이름을 들어보지 않을 수가 없다.

 

학창시절에, 중학교 때쯤이던가, 책받침을 써야 하던 그 때, 연예인들의 사진이 책받침에 등장하기 전에 책받침에 빠지지 않고 등장했던 소재들이 시였고, 그 중에 릴케의 시도 있었다.

 

그렇게 윤동주의 '별 헤는 밤'과 함께 책받침을 통해 릴케는 나에게 다가왔다. 그냥 시인으로. 그를 더 알고 싶은 마음도 없이. 왜 그가 이렇게 유명한지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아마도 내게 다가온 시는 '가을날'이었을 것이다.

 

가을날

 

주여. 시간이 되었습니다, 여름은 아주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던지시고,

평원에는 바람을 풀어줍소서,

 

마지막 열매들을 가득가득하도록 명해 주시옵고,

그들에게 이틀만 더 남녘의 낮을 주시어,

무르익는 것을 재촉하시고

무거워가는 포도에 마지막 달콤함을 넣어주소서―

 

이제 집에 없는 사람은 집을 지을 수 없습니다.

지금 혼자인 사람은 그렇게 오래도록 살 것이며,

깨어 앉아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이며

나뭇잎이 구를 때면 가로수 사이를,

이리저리 불안하게 방황할 것입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김주연 옮김, 검은 고양이, 민음사. 1994 개정증보판 1쇄. 22쪽.)

 

아마 번역하는 사람에 따라 언어가 달라지긴 하겠지만 가을을 맞이하여 겸허하게 기도하는 그런 느낌을 받는 데는 별 지장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기도조의 시로써 나에게 다가왔는데, 무언가 애련한 느낌을 자아내는 그런 시들이었는데, 그런 릴케를 우리나라 시인들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자신의 시창작에 참조했다는 사실을 이 책은 알려주고 있다.

 

릴케의 영향을 구체적으로 살핀 책이 되는데, 일제시대에는 박용철과 윤동주, 해방이 되고 난 뒤에는 김춘수, 김현승, 전봉건, 김수영, 박희진, 허만하, 이성복, 김기택 등이 릴케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릴케의 시에서도 영향을 받고, 그의 시가 지닌 소재라든지, 표현방식에서 영향을 받은 시인들, 그리고 시를 살펴 알려주고 있으며, 릴케의 산문에서 시적 지향점을 찾았음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릴케의 산문으로 유명한 것이 두 편인데, 그 중 하나는 "말테의 수기"이고 또 하나는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다.

 

모두 릴케가 시를 대하는 태도를 알게 해주는 산문들인데, 그런 글을 읽고 자신의 시창작에 영감을 얻은 우리나라 시인들이 한둘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릴케의 영향이 이렇게 지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는 우리나라 시인들이 릴케의 시를 그냥 따라한 것이 아니라 시인의 성향과 우리나라의 현실 속에서 그의 시를 창조적, 능동적으로 받아들였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일방적인 영향이 아니라 변용이 일어나고 있음을, 그래서 우리나라 시가 더욱 풍요로워졌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비교문학을 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영향관계를 살펴 창조적 변용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밝히고 우리나라 문학을 더욱 풍성하게 하는 그런 연구.

 

새삼 예전에 교과서에서 배웠던 우리나라 시인들의 시를 다시 읽으면서 릴케의 시와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살펴보는 좋은 시긴이었다. 이 책을 읽는 시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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