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장
홍성담 지음 / 에세이스트사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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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장:그의 죽음 뒤로 음악이 흘렀다

 

홍성담의 글 제목이다. 이야기라고 해도 좋고, 소설이라고 해도 좋다. 우리 사회를 꼬집고 있는 그런 이야기인데...

 

우리 사회의 모습이 난장이라고 표현될 수도 있고, 이런 사회를 고쳐가는 모습이 바로 난장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제목이다.

 

한 마디로 난장판이었던 우리 사회를 난장을 통해 바로잡지 않았던가. 민중들의 난장과 지배자들의 난장은 다른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다.

 

홍성담의 제목에서 우리는 이 두 개의 난장을 읽을 수 있는데, 결국 민중들의 난장이 지배자들의 난장을 몰아낸다는 쪽으로 책을 읽을 수 있다.

 

그런데, '그의 죽음 뒤로 음악이 흘렀다'라는 또다른 제목이 심상치 않다. 죽음과 음악이라? 그런 생각을 하다가 이 책의 중간을 넘어서면서 갈 길이 막힌 영혼들이 탈출하기 위해서 벌이는 난장 속에서 바로 음악을 발견했다.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꼭두무사들 역시 죽은 뒤에 상여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한다. 세월호로 죽은 아이들의 영혼 역시 음악을 듣지 못했다. 이런 비극적인 죽음 뒤에는 음악이 없다그러나 죽음 뒤에는 음악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영혼들을 보내주는 행위다.

 

세월호의 어린 영혼들이 상여소리를 부르면서 음악이 시작된다. 그들은 이 음악을 자신들만이 아닌 꼭두무사들과 함께 한다. 곧 난장이 된다. 모두가 하나가 되어 음악 속에 빠져든다.

 

음악은 영혼을 위로해주고, 영혼이 제 자리를 찾아가도록 해준다. 그런데 이런 음악을 거부하는 자들, 그들에게는 억울한 죽음은 풀어주어야 할 무엇이 아니고 감춰야 할 무엇에 불과하다. 하여 민중의 난장에는 음악이 있지만, 지배자들의 난장에는 음악이 없다.

 

이 책에서 주인공은 오현주를 쫓고 제거하라고 하는 '검은손'이라고 불리는 지배세력, 검은손의 실체는 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어쩌면 검은손은 실체가 아닐 수도 있다. 우리 마음 속에 있는 두려움, 이기심들이 만들어낸 존재인지도 모른다.

 

우리들이 두려움을 없애고, 이기심을 버리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노래를 부를 때 이런 검은손은 자연스레 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읽을 수 있다. 신랄한 풍자가 돋보이는 이 책을 읽다보면 자연스레 해원이 되는 통쾌함을 느낄 수 있다. 어쩌면 책을 통해서 세월호 영혼들을 위로해주는 것이 홍성담이 목적한 것인지도 모른다.

 

난장을 벌이는 지배자들을 또다른 난장으로 몰아내는 일. 세월호 희생자들에 대해 마냥 슬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풍자를 통해 그들을 우리에게 불러오는 일, 우리들의 난장에 그들을 초대하는 일, 그것이 그들의 영혼이 하늘로 가게 하는 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홍성담의 이 난장, 통쾌하다. 이렇게 통쾌한 글, 예전에 김지하의 '오적'을 읽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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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3
페터 한트케 지음, 윤용호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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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경기에서 승부차기를 없애자고 주장한 사람들이 있었다. 승부차기에 나서는 선수들에게 너무도 큰 불안감을 준다는 이유에서다.

 

마찬가지로 페널티킥을 얻어 차는 선수 역시 엄청난 중압감을 느낀다. 골키퍼는 막으면 대단하다고 칭찬을 받고, 막지 못해도 어쩔 수 없다는 소리를 듣는 반면에 차는 선수는 골을 넣으면 당연한 일이고, 넣지 못하면 그것도 못 넣느냐는 소리를 듣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페널티킥 앞에서 누가 더 불안을 느끼겠는가. 골키퍼가 아니라 차는 선수여야 한다. 그런데... 제목은 반대다. 불안을 느끼는 것은 골키퍼다. 왜 그럴까? 주인공이 골키퍼 출신이어서?

 

아니다. 골키퍼는 지켜야 하는 사람이다. 무언가를 지킬 것이 있는 사람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것을 잃을까 봐 불안에 떤다. 삶에서 지킬 것이 있다는 것, 그것은 행복이기도 하지만 불안이기도 하다.

 

그 점을 골키퍼에 비유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주인공은 블로흐는 골키퍼 출신으로 어느 날 직장을 그만둔다. 이상하게 현장감독이 해고라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 그는 지레 짐작으로 직장을 그만둔다.

 

현장감독이 아무 소리 안 한 것을 해고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상대와 소통을 하지 않고, 자신이 판단해 버리는 것, 그것은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들이 하는 일이다.

 

차는 선수와 골키퍼, 이들은 서로를 속여야 한다. 서로가 소통이 되면 안 된다. 그래서 서로 지레짐작으로 이러겠거니, 저러겠거니 하지만 상대에게 자신의 의도를 정확히 알리지 않는다.

 

어쩌면 삶에서도 마찬가지 아닌가 한다. 블로흐가 직장을 그만두는 순간도 소통의 부재이지만, 그가 직장을 그만두고 난 다음에도 그는 누구와도 소통하지 않는다.

 

극장 매표원과 하룻밤을 자지만, 그녀를 죽여버리고, 죽였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는 장면이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그는 사람들 누구하고도 제대로 소통하지 못한다. 국경 근처 마을까지 가서도 그는 제대로 된 소통을 하지 못한다. 그는 문장을 생각해 내고 완성하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다.

 

문장을 완성한다는 것, 그것은 소통을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는 자신이 있는 모든 곳에서 사람들과 제대로 관계를 맺지 못한다. 소통을 하지 못한다. 이들과 나누는 대화는 자꾸만 어긋날 뿐이고, 그의 행동 역시 제대로 되지 못한다.

 

술집에서의 싸움, 자꾸만 어긋나는 통화, 그리고 대화... 이런 관계들... 소외된 현대인의 모습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이런 모습은 비극이 될 수밖에 없다.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이라고 하지만, 이제 블로흐에게는 지켜야 할 무엇이 없다. 지켜야 할 것이 없으니, 상대의 의도를 읽으려고 할 필요가 없다. 의도를 읽으려 하지 않으면 소통이 될 수 없다. 그것이 살인으로 나타나고 도피생활을 하면서도 누구와도 제대로 된 소통을 하지 못하는 블로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문장을 완성하지 못하는 블로흐.

 

이렇게 소통이 안 되는, 최소한 지킬 것을 잃어버린 사람에게는 사회 속에서도 겉돌게 되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도 할 수 있고...

 

결국 우리는 소통을 해야 한다. 문장이란 무엇인가. 자신의 생각을 완성된 말로 남에게 전달하는 것 아닌가. 이런 문장을 완성하지 못하는 블로흐가 아니라, 문장을 완성하는 우리들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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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26 09: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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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26 10: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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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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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가정을 꿈꾸는 부부. 때는 1960년대. 이들은 아이를 많이 낳고, 전원주택에서 대가족의 삶을 꿈꾼다. 마치 중세의 귀족 가족들이 자신들만의 성에서 삶을 살아가듯이.

 

남들은 아이를 많이 낳는 것에 대해서 반대를 한다. 지금 시대는 그런 시대가 아니다. 하지만 이 부부에게는 많은 아이와 함께 살며 다른 가족들까지 불러 모아 잔치를 하는 것이 행복한 가정생활의 모습이다.

 

그렇게 그들은 경제적으로 준비가 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집을 장만하고 아이를 낳는다. 하나, 둘, 셋, 넷. 이때까지만 해도 부인인 해리엇은 지쳐가지만 그래도 행복한 가정은 유지한다. 표면상으로 이들은 아직은 행복한 대가족이다.

 

시대는 이미 1970년대가 되었다. 중세의 삶에서 멀리도 온 때. 이 때 다섯째 아이를 임신한다. 이 아이는 임신 때부터 다르다. 부정적인 감정이 든다. 왜 아니겠는가. 이미 1970년대는 인구 억제정책을 쓰는 때다.

 

많은 아이가 자랑인 시대가 아니라 부끄럼인 시대다. 이런 모습을 해리엇의 동생이 다운증후군 아이를 낳는다는 얘기로 형상화된다. 정상성을 벗어난 가족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운증후군 아이는 보호를 필요로 한다. 명확하게 장애임이 표가 나기 때문이다. 이 부부가 원하는 가족은 이렇게 표가 나는 상태는 아니다. 그냥 이들은 많은 아이들과 행복하게 지내고 싶을 뿐이다.

 

그럼에도 그 행복은 지속될 수 없다. 다섯째 아이는 지나치게 크고 힘이 센 상태로 태어난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정상적인, 아니 의사가 판단하기엔 정상범주에 드는 아이지만 이 가족의 기준에 다섯째 아이는 정상이 아니다.

 

아이에게 정상의 시선을 주지 않는데 어떻게 아이가 정상적으로 자랄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아이를 내치지 못하는 모성. 이 아이 하나로 인해 친척들이 멀어져 간다. 나머지 아이들도 하나하나 가정을 떠나간다. 남편 역시 가정에서 멀어진다. 그리고 어머니인 해리엇 역시 가정의 행복에서 멀어진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저 다섯째 아이가 남들과 조금 다르게 태어났을 뿐인데, 가정이 해체되어 버린다. 그 해체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지만 결국 집을 팔기로 결정하는 것으로 가정 해체는 기정사실이 되어 버린다.

 

다름이 비정상이 되는 사회가 된 것이다. 그 아이를 버리든지, 다른 아이를 포기하든지 선택의 기로에 선다. 어느 선택도 행복한 가정이 될 수는 없다. 어느 하나를 버리는 것은 이미 행복한 가정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름이 받아들여질 수 없는 사회, 이미 정상의 범주를 정해놓고, 그것에서 벗어난 아이를 다르게 바라보는 시선, 그 시선 속에서 아이는 정상의 범주에 들어올 수 없다. 들어오지 않고, 그 아이의 행동 하나하나는 오히려 정상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자꾸만 어긋나는 관계... 가족은 다름을 포용하고 함께 하는 것인데, 다름을 배제로 바꾸어버리는 순간 이 가족은 깨질 수밖에 없다. 해리엇이 모성으로 아이를 받아들이려 하지만, 그 모성을 다른 가족들은 자신들에 대한 배제로 받아들이지만, 해리엇조차도 다섯째 아이(벤)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므로 다섯째 아이인 벤은 가족을 해체한 아이, 남과 다른 아이가 될 수밖에 없다. 이 아이에게는 자신을 받아들여주는 사람에게서 편안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들과 함께 할 수밖에 없다.

 

결론을 내지 않는다. 소설은. 그게 더 소설답다. 결론은 없다. 이 결론은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다름을 우리는 배제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은지...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 다름이 있는지... 그 다름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생각해 보게 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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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증을 켜다 삶창시선 48
손병걸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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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걸 시인.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선천적인 것이 아니고, 어느 순간 빛을 잃었다고 하는데...

 

하여 시인은 눈으로 보지 않고 통증으로 본다. 시인이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는 길, 그것은 바로 '통증을 켜는' 일이다.

 

손가락에 느껴지는 통증, 손가락에 켜는 통증으로 시인은 자신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전달한다.

 

이런 통증들이 잘 느껴지는 시집이다. 읽으며 마음이 따스해진다. 그냥 내 처지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를 느끼고, 그 존재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이 시집에서 '입동 무렵'이란 시... 이런 삶의 자세를 지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시다.

 

 입동 무렵

 

모두 다 춥다 춥다 껴입을 때

나무는 이파리를 다 벗는다

 

생활의 옳고 그름을

옷매무시 한 가지로 따질 수는 없겠지만

내 삶 오롯이 알몸인 적 없었다

 

삶을 온전히 살아낸다는 말

언 바람을 베어대는

저 나무의 당당한 목소리다

 

깡마른 가지를 휘두르며

때로는 뚝뚝 부러져나가도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듯

나무는 결코 눕지 않는다

 

종내엔 뿌리의 내력을 송두리째 드러내고

딱 한 번 유언을 오롯이 남기겠다는 듯

어둠을 움켜쥔 체 꼿꼿한

전라의 나무 한 그루

 

또 한 겹의 나이테를 여미고 있다

 

손병걸, 통증을 켜다. 삶창. 2017년. 50-51쪽

 

어쩌면 살아가면서 자꾸만 덧씌우기만 한 것이 아닐까. 삶은 이렇게 자꾸 자신을 덧칠하기보다는, 자신을 덮고 있는 것들을 덜어내는 일 아닐까.

 

추울수록 더 입는 것이 아니라, 추울수록 다 떨어내는 나무들처럼 그렇게 우리의 삶도 어려운 때를 만나면 덜어내고 덜어내서 깡마른 알몸으로 버틸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나무에게서 삶의 자세를 보는 시인, 그런 시인의 시를 읽고 삶의 자세를 생각하게 된다.

 

덧글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이다. 너무도 고맙게 잘 읽었다. 마음에 새겨둘 시들이 한두 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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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인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4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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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한 권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나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9쪽) 란 말로 소설은 시작한다.

 

책 한 권의 영향으로 삶이 송두리째 바뀐 사람의 이야기는 많다. 그래서 소설은 처음부터 호기심을 자극한다. 도대체 무슨 책이야? 궁금증을 유발한다.

 

책을 읽고 주인공인 오스만은 방황을 한다. 그는 이미 기존의 세계에서 벗어나 다른 세계에 접어들었음을 깨닫는다. 자신이 살고 있던 세계는 더이상 자신의 세계가 아니다.

 

그는 다른 세계로 가야 한다. 그 세계로 가기 위해 같은 책을 읽었던 사람을 찾는다. 자난이라는 여성에게서 사랑을 느끼고, 그 여성을 통해 메흐메트라고 하는 먼저 책을 읽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그들의 관계는 어긋난다. 메흐메트와 자난이 그에게서 사라진다. 오스만은 그들을 찾아다니다 자난을 만나다. 자난과 함께 메흐메트를 찾는 여행을 한다. 그 여행이 현실적이지 않다. 그들은 버스를 타고 터키의 이곳저곳을 다니며 다른 사람들을 만난다.

 

그 과정에서 도대체 새로운 인생이 무엇인지 밝혀지지 않는다. 마치 청춘의 방황처럼 이들은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계속 움직이긴 하지만 무엇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깨달음은 없다. 결국 메흐메트의 아버지를 만나게 되는 오스만.

 

여기서 과거와 현재의 터키가 중첩된다. 서구화되는 터키를 막고자 하는 메흐메트의 아버지인 나린 박사. 하지만 그 역시 책으로 인한 아들의 방황을 인정하지 못한다. 아들의 행동을 감시하는 사람을 붙이고, 서구화되어 가는 터키를 반대하는 일을 하는데...

 

오스만은 나린 박사와도 함께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서구화된 터키를 인정할 수도 없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젊은이, 그것이 바로 오스만의 모습이 아닌가 한다. 그가 읽은 책 '새로운 인생'은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인생을 제시해주지 못한다.

 

여기서 나중에 밝혀지는 '새로운 인생'이라는 카라멜이 나오는데, 책과 카라멜이 같은 제목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의 쓸모가 비슷하다는 얘기 아닌가. 젊은이들에게 달콤함을 주지만 결국은 사라지고 마는.

 

카라멜 '새로운 인생'을 만들어 판 사람은 나중에 장님이 되지만 그래도 건강하게 잘 살고 있는 반면에, 책 '새로운 인생'을 쓴 사람은 총에 맞아 죽게 된다. 한때의 달콤함이라지만 어린이에게 주는 달콤함은 그 해악이 죽음에 이를 정도는 아니라는 얘기?

 

그렇다면 청년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는 책을 쓰는 일은 목숨을 거는 일과도 같은 일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래서 책에 대해서는 역대 정권에서, 특히 독재정권에서 더 심한 탄압을 하는지도 모른다.

 

탄압이 심할수록 청년들은 이런 책에 더욱 흥미를 지니고 읽게 되고, 책에 쓰여 있는 일들을 실현하려는 노력을 한다. 책에 있는 인생을 현실에서 실현하려는 욕구, 그것들이 바로 청년들이 지닌 욕구고, 그것이 바로 '새로운 인생'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이 소설엔 '새로운 인생'이 세 번 펼쳐진다. 주인공 오스만이 읽고 영향을 받은 책'새로운 인생', 어린 시절에 오스만이 먹었던 카라멜 '새로운 인생', 마지막으로 그것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이 소설 '새로운 인생'

 

우리는 이 '새로운 인생'을 읽으며 새로운 인생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결말은? 새로운 인생은 없다. 모두 덧없음이다. 사라짐이다.

 

오스만은 책의 끝부분에서 천사를 만난다. 그가 젊은시절 만나려 했던 천사를 죽음에 이르러 만나는 것이다. 천사는 삶과 함께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천사는 죽음과 함께 존재한다. 그것을 '자난'이 잘 보여주고 있다.

 

자난'은 터키어로 '천사'라는 뜻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주인공 오스만은 자난을 사랑하고 자난과 함께 하고 싶어하지만 그들은 함께 할 수 없다. 이는 천사는 삶에서 함께 할 수 없는 존재다. 물론 잠시는 함께 할 수 있다.

 

우리 안의 천사들이 작동하는 때가 바로 그런 때이다. 그러나 이런 때는 지속적이지 않다. 우리의 인생에서는 천사보다는 삶의 일상성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오스만이 새로운 인생을 찾아 헤매지만 그가 만나는 인생들은 현실의 삶들일 뿐이다.

 

일상에서 살아가는 일, 자난이 떠난 뒤 오스만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일상으로 복귀한다. 그런 그에게 다시 과거를 회상시키는 일이 생기는데...

 

젊은시절에 새로운 인생을 찾아 헤매는 일은 충분히 가능하다. 그는 현실에서 배척당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해야 할 일이라는 지지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딱 젊었을 때까지다. 이미 일상에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새로운 인생을 찾아 가는 일, 또는 자신의 과거 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때는 죽음만이 새로운 세계로 이끌 수 있다. 오스만 결국 그는 천사를 보게 된다. 일상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그의 꿈을 안은 채.

 

처음에는 서구화냐, 전통고수냐를 놓고 젊은이와 기성세대간의 갈등이 주를 이룰지 않을까 했다. 중반까지도 그랬다. 터키의 역사와 소설의 내용을 생각하면서, 메흐메트를 감시하는 사람들 이름에 시계 이름을 붙여준 것에서 그럴 것이라 짐작했다.

 

하지만 소설은 이것만으로 전개되지는 않는다. 터키의 역사와 기성세대와 젊은세대의 갈등도 다루고 있지만, 도대체 어떤 것이 새로운 인생인 것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새로운 인생'이라는 책도 '새로운 인생'이라는 카라멜도 모두 '새롭지 않다'고 할 수 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이들도 역시 기존의 것들을 융합한 것일 뿐이다.

 

우리들 인생도 마찬가지다. 우리들은 기존에 살아온 사람들과 전혀 다른 세상에서 다른 방식으로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인생은 없다. 그들이 살아온 인생, 방식에 내 삶을 살짝 얹는 것 뿐이다.

 

그래서 결국 이 소설을 읽으며 끝부분에서 이렇게 생각하고 말았다. '새로운 인생은 없다. 우리는 모두 함께 아주 조금 다르게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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