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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프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1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12년 2월
평점 :
보르헤스 소설을 읽기 위해서는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그냥 재미있게 읽어갈 수가 없다. 무슨 내용인지, 소설이 무슨 학술서인양 주가 많이 달려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서양이나 남미의 문학, 역사를 알아야만 이해할 수 있는 내용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보르헤스는 묘한 매력이 있다. 이해하기 힘든 소설을 읽는 즐거움이라고 할까. 소설의 미로를 이리저리 헤매고 다니는, 미로 속에서 나오지 못하지 않고 어떻게든 나오게 되는, 자신이 나온 길을 기억하지 못하고, 다시 들어가라고 하면 또다시 헤매게 되는 그런 미로이지만, 그것은 소설의 이해와는 다른 차원인데, 그런 소설들이라는 생각에 심호흡을 하고 그의 소설을 읽기 시작한다.
읽다 놓았다, 다시 읽다, 또 놓았다, 읽다를 반복하는 것은 "픽션들"과 마찬가지지만, 이번에는 좀더 수월하게 읽는다.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라고 하기보다는 이상하게 이 소설집에서는 서사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줄거리가 있고, 내용이 눈에 들어오는 소설들이 있다.
그럼에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소설들도 있지만, "픽션들"을 읽어서인지 친숙한 느낌을 지니며 읽게 된다.
이 소설집에서 첫소설과 마지막 소설을 중심으로 내용을 이해하기로 했다. 처음이자 끝이지만 끝이자 처음인 소설이라고 해야 할까.
뫼비우스의 띠처럼 안과 밖이 구분이 되지 않는, 처음과 끝이 없는 소설. 첫소설 제목은 '죽지 않는 사람'이고 마지막 소설 제목은 '알레프'이다.
죽지 않는 사람, 그 주인공이 바로 호메로스이다. 오딧세이와 일리아드를 쓴. 그렇다. 작가는 죽지 않는다. 죽을 수가 없다. 그들은 작품을 남김으로써 영원히 산다. 유한한 생물로서의 목숨이 아니라 인간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존재하는 존재, 사람들 기억에 영원히 남아 유전하는 존재다.
그러므로 그는 죽을 수가 없다. 죽지 않는 사람이 된다. 이런 작가는 '알레프'를 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본 알레프를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사람.
'알레프란 모든 지점들을 포함하는 공간 속의 한 지점'(204쪽)이라고 하는데, '모든 언어는 상징들로 이루어진 알파벳이고, 그것을 사용한다는 것은 상대방과 하나의 과거를 공유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겁에 질린 내 기억이 간신히 간직하고 있는 그 무한한 알레프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을까?' (208쪽)
'알레프의 직경은 2~3센티미터 정도 되는 것 같았지만, 우주의 공간은 전혀 축소되지 않은 채 그 안에 들어 있었다. 각각의 사물은 무한히 많은 사물들이었다. 그것은 내가 우주의 모든 지점들에서 그 사물을 분명히 보았기 때문이다.' (209쪽)
이것이 작가이다. 첫소설에서는 작가의 시간적 운명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면, 마지막 작품에서는 공간적 운명(?)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작가는 한 공간에서 우주의 모든 공간과 시간을 본다. 그 공간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중첩되어 있다. 한 공간에 지금까지의 우주 역사가 녹아들어 있는 것이다. 그것을 본 사람, 그가 바로 작가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여기서 시작한다. 작가의 목숨은 유한하다. 유한한 생명을 지닌 작가가 무한한 세계를 사람들에게 알려줘야 한다. 그것을 알려줄 수 있는 언어 또한 한계가 있다.
이 한계들을 인정하고 거기에서 시작하는 일. 그것이 바로 작가의 일이다. 그 일이 성공했을 때 작가의 알레프는 작품으로 남는다. 작품 속에서 작가는 죽지 않는 삶을 살게 된다.
소설은 이렇게 순환한다. 처음이 끝이 되고, 끝이 처음이 된다. 우리의 삶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 삶 자체가 바로 알레프라고 하는 듯하다.
우리 삶에는 전 우주의 역사와 삶이 담겨 있다. 이 유한한 삶에 무한함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 보르헤스 소설을 읽으며 한 생각이다.
하여 이 소설집을 읽으면 앞으로 똑바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제 자리로 돌아온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다. 커다른 원에서는 원이 직선이듯이, 우리의 삶은 이렇게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행로를 갈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굳이 안과 밖을 구분할 필요는 없다. 이 소설집의 제목인 '알레프'처럼, 우리 역시 우리 삶의 알레프를 볼 수 있으면 되지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