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남들의 세계사 - 2014년 제47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죄 3부작
이기호 지음 / 민음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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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


무소불위의 힘을 자랑하던 때가 있었다. 이 법으로 옭아맨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전국 도처에서 창조되었던 간첩들. 이들을 만들어낸 법이 바로 국가보안법이었다. 참 악용되기 쉬운 법이었고, 독재 정권 유지를 위해서 꼭 필요한 법이기도 했지.


나라가 국민을 위해서 제대로 기능을 한다면 국민들에게 나라를 사랑하지 말라고 해도 사랑할 수밖에 없다. 나라가 국민 삶에 도움이 된다면 어느 국민이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행동을 하겠는가. 아마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사람이 있으면 법이라는 이름이 작동하기 전에 국민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막을 것이다. 나라가 제대로 된 나라라면.


그런 나라일수록 국가보안법같은 법은 있을 필요가 없다. 법이 많다는 얘기는 거꾸로 읽으면 위반자가 많다는 얘기고, 이는 나라가 사회가 불안정하다는 얘기다. 즉 사람들이 사람들을 제대로 존중하지 않을 때 작동하는 기제가 바로 법이다. 그리고 이 법을 강력하게 시행하면 할수록 사람들 삶은 퍽퍽해진다.


법이 그럴진대, 법 중의 법이라고 하는 헌법이 아니라, 헌법 위에 군림하던 국가보안법 (아직 폐지 안 되었다고 알고 있지만, 요즘은 거의 유명무실한 법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직도 국가보안법이 소환되는 경우가 있으니, 이 법 생명력이 질길 뿐만 아니라 여전히 위력도 지니고 있다)이 왕노릇을 하던 때. 독재정치가 판을 치던 때. 각종 정보기관이 이 법을 업고 온갖 사건을 만들어내던 때.


소설은 그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전두환이 정권을 잡고 안정시키려 할 때, 권력을 위해서 많은 사건들이 필요하고, 또 미국에 잘 보이려 할 때, 미국에 반대하는 시위나 집회들은 국가의 안녕을 해치는 행위고, 반국가적인 행위니,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해야 한다고 하던 때.


그래서 소설은 어둡고 무거워야 한다. 이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을 당했는가. 죄도 없이, 아니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잡혀들어가 죄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또 죄를 만들어가는 사람들.


소설 배경과 인물이 이럴진대 어떻게 소설이 무겁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이 소설은 무거움과는 거리가 있다. 물론 내용은 무거운데 작가가 서술 방법을 통해서 덜 무겁게 소설을 읽게 하고 있다.


풍자, 비꼼이다. 서술자가 전면에 등장해 이렇게 읽어라, 저렇게 읽어라 잔소리(?)를 하는 각 부분의 도입부에서 이미 독자들은 무거움에 짓눌리지 않고, 그래 어디 이야기해 봐라 들어주지 하는 자세를 갖추게 된다.


작가는 이야기꾼의 자질을 십분 발휘해 우리를 그 엄혹했던 시절로 이끌어간다. 고문으로 피해를 보는 사람, 뜻하지 않은 사건에 휘말리는 사람, 그리고 자신들의 출세를 위해 사건을 조작하는 사람, 또 조작한다는 의식도 없이 믿는 사람.


글자를 모르는 이름은 복이 많은 나복만이라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소설이 전개되는데, 나복만이 겪는 일에 분노하기 전에 우선 거리를 두게 된다. 서술자가 너무 드러나게 개입하고 있기 때문인데... 그렇지 않았다면 이 소설을 끝까지 읽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우리 현대사에서 일어났던 , 개인과 가정을 파탄내는, 인간관계를 맺기 힘들게 하는 일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가벼운 문체로 소설이 전개되지만, 내용은 전혀 가볍지 않다. 오히려 그런 일이 있었구나, 또 그런 일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나복만의 일이 종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서에서는 그 사건을 종결시키지 않고 후일담을 전해주고 있는데... 어찌 끝날 수 있겠는가.


사건을 조작했던 사람이든, 당했던 사람이든, 그들에게는 평생 짊어지고 가야할 짐이 되었을 사건들이었을테니...


읽다가 왜 차남들의 세계사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남, 둘째 아들? 이 소설에서는 이런 차남에 대한 이야기가 두 번 나오는데(내 기억으로는) '아무것도 읽지 못하고, 아무것도 읽을 수도 없는 세계. 눈앞에 있는 것도 외면하고 다른 것을 말해 버리는 세계, 그것을 조장하는 세계 (전문 용어로 '눈먼 상태'되시겠다.). 그것이 어쩌면 '차남들의 세계'라고 말해 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179쪽)라고 나온다.


이 말에 따르면 '차남들의 세계'는 눈먼 자들의 세계라고 할 수 있고, 눈먼은 권력에 눈 멀든, 또는 자신들의 생계를 위해서 권력의 부정을 눈 감든, 진실에서 멀어진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이때 말하는 '차남들의 세계'는 바로 권력자(그것도 미국에 잘보이려고 하는 독재권력과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들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이 차남은 장남처럼 인정받고 싶어한다. 힘들이지 않고 (물론 가부장적 세계에서 통용되던 일이다) 집안의 권위를 상속받던 장남과는 달리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야 했던 차남들은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 자신의 권력을 만들어간다. 


독재자들은 정당성 없이 권력을 잡았기 때문에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 하기 위해서 불법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렇게 벌어지는 일들을 '차남들의 세계사'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차남 이야기가 나오는 첫번째에 다시 이런 구절이 덧붙여진다.


'우리 이야기에는 한 가지 진실이 더 숨어 있다. 이미 눈치챈 사람들도 있겠지만......' (179쪽)라고. 그렇다면 '차남들의 세계'는 이런 권력자들의 세계만이 아니란 얘기다. 그렇다면 차남들은 어떤 존재들. 그들의 세계사는 어떤 세계사? 


소설 뒷부분에 성경이야기를 끌어들여 이런 말이 나온다.


'보좌신부님은 그때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카인과 아벨' 이야기는 유효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지요. 우린 모두 형제들이고, 이 세상은 두려운 한 명의 형과, 두려움에 떠는 수많은 동생들로, 차남들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그것이 바로 신의 뜻이라는 말씀도 하셨지요. 더 큰 문제는 우리 차남들 스스로가 형을 두려워하다가 숭배마저 하게 된 상황, 신보다 형을 더 믿게 된 현실을 개탄하기도 하셨지요.' (279쪽)   


이때 차남은 바로 국민들이다. 독재자에게 핍박받는 사람들. 그들은 독재자를 두려워하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추앙하게 된다. 많이 본 듯한 느낌을 주지 않는가? 우리나라 대통령 중에 존경할만한 대통령은? 이라는 질문에 누가 많이 뽑히는지 심심찮게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으니... 


그렇다면 이 소설은 두 방향에서 전개된다고 할 수 있다. 독재자와 그를 추종해서 독재권력을 유지하게 해주는, 진실에서 멀어진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세계와 형에게 핍박을 받고 두려움에 떨면서 죽임을 당하기도 하는 사람들의 세계.


그래서 소설은 다른 두 세계가 공존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고, 이를 보여주기 위해 나복만이라는 사람을 중심으로 소설을 이끌어가고 있다. 그렇다. 나복만은 권력을 쥐고 흔드는 차남들에 의해 핍박받는, 또다른 차남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차남들의 세계사'에는 독재정치가 판치던 우리나라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다. 어느 편에 속해있든, 이들은 차남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이 소설은 이처럼 흥미롭게 술술 읽히지만,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은 우리 현대사의 아픔을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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