앰 아이 블루? 곰곰문고 101
브루스 코빌 외 지음, 조응주 옮김 / 휴머니스트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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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패턴을 찾아내려고 하는 특성이 있다고 한다. 무질서에서도 특정한 질서를 찾아내고, 모양을 찾아내려고 하는 인간. 그래서 우리는 무작위로 펼쳐져 있는 별들에서도 온갖 모양을 발견한다. 별들을 이어서 궁수자리, 사자자리, 오리온자리, 카시오페이아, 북두칠성 등등 이름을 붙인다. 


특정한 패턴을 발견하지 못하면 불안해 하는 경우도 있다.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는, 미지에 대한 두려움. 그래서 미지의 존재에 이름을 붙인다. 이름을 붙이는 행위는 패턴을 만들어가는 인간의 모습을 잘 드러내준다고 할 수 있다.


그때서야 안심하는 존재. 그런데 패턴에서 어긋난 존재가 있으면? 무시하거나, 없애려고 하거나 한다. 자신의 틀로 설명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름을 존중해야 한다고 하지만, 그 다름도 자신의 패턴에서 벗어나지 않았을 때 적용이 되는 경우가 많다.


성소수자에 관해서는 더더욱 그렇다. 차별금지법에 대한 반대, 학생인권조례에 대한 반대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성소수자를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데 있다. 성소수자는 사회에서 용인되어서는 안 되는 존재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어떤 사람은 '더럽다'고 표현하기도 하고, '비정상적이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더럽다고? 무엇이? 깨끗함의 반대로 쓰이는 더러움이라는 말을 사람의 성정체성에 쓸 수 있는 말일까? 또한 성정체성을 정상, 비정상으로 나눌 수 있을까? 


요즘은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이 많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우리나라에서 성소수자는 여전히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힘들다. 사회적 시선을 의식하기도 하지만,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가족에게서 인정받지 못한다는 두려움도 많기 때문이다.


성소수자를 둔 가족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가족 중에 성소수자가 있으면 그 자체로 바라보지 않고, 사회에서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바라볼까를 먼저 생각한다. 그리고 두려워한다. 사회에서 배척받을까 봐. 사회의 패턴에서 떨어져 나오게 될까 봐 두려워한다.


그 두려움이 성소수자에게 향한다. 그래서 성소수자는 사회는 물론이고 가족에게서도 인정을 받지 못하고, 거리두기를 당한다. 커밍아웃을 하든, 아웃팅을 당하든, 성소수자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힘든 삶을 살아가게 된다. 여기에도 저기에도 속하지 못한 상태로. 이 소설집에서도 이런 문제를 다룬 소설들이 있다. 


다행히도 이 소설집에 나오는 소설들은 대부분 희망을 주는 결말을 맺고 있는데... '다름'을 말로만이 아니라 가슴으로도 받아들이려고 하는 모습을 보이는 인물들을 통해서 소설을 읽으면서 '성소수자'를 받아들이는 또다른 패턴을 발견하게 된다.


이 소설집이 2005년에 초판본이 출판되었다고 하는데, 읽은 기억이 없다. 아마 그때에는 이런 소설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나 보다. 아님 홍보가 덜 되었던지... 그때만 해도 지금보다도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더 심했을 땐데, 그럼에도 책이 출간되었다는 이야기는, 이제 우리 사회도 성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할 때라고 여기는 분위기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때 왜 읽지 못했을까? 성소수자 이야기는 나에게는 여전히 남 이야기였을까? 내 주변에서 나 성소수자야 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그냥 다름을 인정해야지 하면서도, 가까이 여기지 못했던 일이었다. 내 삶의 패턴에 성소수자는 들어와 있지 않았다. 좁은 분야에만 국한되어 있었던 내 삶의 패턴.


그렇다면 16년이 지나서 출판된 이 복간본에 있는 이야기들은 이미 과거에 묻힌 이야기들일까? 아니다. 여전히 진행 중인 이야기다. 그래서 이 책이 더 의미 있다. 이 책에는 다양한 성소수자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또 이 책이 내 눈에 띤 건, 내 삶의 패턴에 성소수자들의 삶도 들어올 수 있게 많은 성소수자들 이야기를 만났고 이들의 이야기가 여전히 진행 중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책을 발간하기도 한 작가가 한 말이 가슴에 와닿는다. 차별금지법을 앞두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도 이 작가의 말을 곱씹을 필요가 있다. 성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라고 성소수자 작가만이 쓸 수 있는 글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성소수자를 지지하는 사람은 성소수자만이 아니다. 누구나 할 수 있다.


  이 주제를 품격과 권위를 가지고 다룰 수 있으리라 믿는 작가들, 이들이 참여한 작품이라면 모든 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싶어 하는 유명 작가들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부탁했습니다. "제발 게이나 레즈비언이 등장하는 이야기 한 편만 써 주세요." 

  딱 그렇게만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동료가 그 부탁을 들어주었습니다. 그 결실로 얼마나 다양하고 정감 있고 멋있는 이야기들이 쏟아졌는지요. 얼마나 진실한 이야기들이! (9쪽)


  오늘날 미국 어느 곳에서든 남성은 남성을 사랑할 자유가 있습니다. 심지어 결혼도 할 수 있습니다. 여성 또한 여성을 사랑하고 배우자로 삼을 수 있습니다. 젠더로 정체성에 꼬리표를 붙이는 관념에 대해 많은 이들이 과거에는 없었던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변화 속에서 자아를 찾아가는 청소년은 다양한 경로로 지원받고 건강한 롤 모델도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쪽)


이 말이 남 나라 이야기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우리나라도 이런 작품집이 나오고(최근에는 우리나라에서도 성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들이 소설로 많이 나오고 있다), 편견을 지니지 않고 이런 작품들을 읽고, 또 '자아를 찾는 청소년이 다양한 경로로 지원받'을 수 있는 상황으로 나아갔으면 좋겠다. 자신의 성정체성 때문에 목숨을 끊는 그런 사람이 더이상 나오지 않는 사회.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 한편 한편이 다 소중하고, 또 읽으면서 재미와 감동을 느낄 수 있을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책 제목이 된 "앰 아이 블루?"라는 소설은 여러가지로 생각해 볼 만하다.


아라비안 나이트에서 또는 우리 옛이야기에서 차용한 소원을 들어주는 이야기를 들어서 자신의 성적 지향을 표시하는 파란색이 보이게 해달라는 소원... 이 소원을 통해서 사람들은 파란색에도 다양한 농도의 색깔이 있으며, 자신의 말과 전혀 다른 지향을 지닌 사람도 있음을...


그렇게 자연스럽게 아웃팅되게 만든 사회... 아웃팅이지만 비장하지 않다. 오히려 웃음이 나온다. 그래서 더 좋다. 왜냐하면 이 소설에서 '성소수자'가 자신의 성정체성을 남들에게 드러내지 않고 살지만, 그렇다고 고립되고 배제된 상태에서 살아가고만 있지는 않다는 사실. 남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잘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성소수자라는 말을 쓰지만, 우리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우리와 다른 성정체성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음을, 또 자신조차도 자신의 성정체성을 잘 몰라서 혼란스러워하고 있음을, '앰 아이 블루?'라는 소설을 통해서, 그리고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을 통해서 생각하게 된다.

 

인간은 패턴을 인식하는 동물이라고 했다. 패턴을 만들고 인식하고, 아주 오래 전에는 동성애라는 사랑도 하나의 패턴이었다. 그러다 중세를 거치면서 동성애는 사랑의 패턴에서 배제되었다. 다시 세월이 흘러 근대에 들어서, 현대에 들어서 동성애는 다시 사랑의 한 패턴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패턴 역시 고정되어 있지 않다. 사회에 따라서 우리의 인식에 따라서 변해간다. 변함, 이것 또한 사람이 세상을, 인간을 이해하는 패턴 아니겠는가.


'성소수자'를 다룬 소설집이지만 무겁지 않다. 칙칙하지 않다는 말이다. 가볍게, 즐겁게 읽을 수 있다. 이 점이 더 좋다. 성소수자를 다룬 소설이 꼭 비장해야 할 필요는 없다. 박상영 소설에서도 이런 내용이 나왔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만큼 우리나라에서도 이젠 이 소설집을 엮은 작가가 말한 것처럼 변해가고 있다고 할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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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ri 2022-05-21 10: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복간되었군요.
예전 낭기열라라고 출판사 파란색 표지로 읽었던기억이 납니다. 그 출판사 책을 따라 읽던 시절이 있었거든요.

kinye91 2022-05-21 10:29   좋아요 2 | URL
가끔 어떤 책을 읽으려고 하는데 절판이 되어서 구할 수가 없는 때가 있는데요, 이렇게 복간되어 독자들을 만나는 책이 있으면 반가워요. 또 그때는 몰라서 못 읽었던 책을 지금은 읽을 수 있어서 좋기도 하고요. 좋은 책들이 복간되어 독자들을 만나는 기회가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페스트의 밤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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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소설이다. 긴데, 한번 읽으면 빨려들어간다. 사건이 사건을 일으키고, 결말이 어떻게 될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페스트라는 감염병이 민게르라는 섬에서 발생한다. 여러 민족들이 함께 살고 있는 오스만제국령인 섬, 민게르. 


이곳에 파견된 의사는 피살이 되고, 중국으로 가기로 했던 파키제 술탄과 그 남편 누리가 민게르 섬으로 방향을 돌려 가게 된다. 섬에서는 페스트가 창궐하지만, 그 페스트를 대하는 방식은 민족에 따라, 또 종교에 따라 다르다.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이나 행위를 포기할 수 없는 사람들은 방역 당국의 조치들을 거부하고, 어기고, 또한 방역당국에서도 여러 민족들의 상황에 따라서 방역조치를 일관되게 취할 수가 없게 된다.


이런 상황, 낯설지가 않다. 팬데믹이 선언된 상황에서도 방역 수칙을 위반하는 집단이 있는 모습은 현대에도 다르지 않으니 말이다. 여기저기서 뚫린 방역은 결국 섬을 페스트가 휩쓸고 가게 만든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감염병에 대응하려고 했지만, 결과는 참혹할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방역에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소설에서는 민게르 섬에서 여러 정치권력과 종교, 그리고 민족들이 갈등하고,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감염병에 대처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이러한 감염병을 이용해서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이루려는 사람들도 있고.


감염병이 소설을 이루는 한 축이라면 민게르라는 작은 섬이 독립국가로 가는 과정을 페스트와 연결시키는 과정이 한 축이다. 여기에 터키 사람인 작가 오르한 파묵이 지니고 있는 오스만제국에 대한 생각도 드러나고 있고.


여러 말이 필요없는 소설이다. 읽으면서 다양한 집단이 어떻게 페스트에 대처하고, 이용하는지를 소설을 읽어가면서 따라가기만 해도 된다. 그러면 지금 코로나19로 인해 겪었던 일들이 자연스레 겹쳐지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아니라 사람들의 안전, 건강을 생각하는 사람이 방역을 주도해야 한다는 점, 그리고 그런 과정은 무력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 길고 어려운 과정을 거치겠지만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는 조치들을 취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하게 한다.


위에서부터 일방적으로 내려지는 지침으로는 방역이 성공할 수 없다. 죽음이 아무리 두렵다고 하더라도 자신들이 평생동안 지녀왔던 신념과 위배되는 행위를 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하물며 종교적 관습이 관계되었을 때는 말할 것도 없고.


또 일이 잘 해결되지 않을 때 희생양을 찾는 모습도 소설에 나오는데, 지금 시대에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여기에 방역을 한다고 봉쇄를 하는 모습. 민게르 섬을 봉쇄해버리는 오스만제국과 영국, 프랑스 등의 강대국 모습은, 코로나19로 국경이 폐쇄되고, 출입국을 금지하던 현대 우리들의 모습과도 겹쳐진다.


방역이 잘 안되었을 때 겪게 되는 혼란에 대해서도 소설에서는 잘 묘사하고 있고... 이렇게 파티제 술탄의 편지에서 촉발되어 소설을 썼다고 작가가 이끌어가는 이 소설에서는 감염병이 한 나라에 끼치는 영향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길지만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19의 상황과 관련이 지어지기 때문에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무엇보다도 이 소설에 나오는 민게르 섬이 겪었던 그런 과정을 우리는 이제는 겪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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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장성주 옮김 / 비채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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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토피아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이 파괴되고, 사람들은 서로를 죽이기 시작한다. 미국에서는 노예제가 형태만 바꿔서 다시 창궐하고, 마약에 취한 사람들은 마을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죽인다. 광기에 휩싸인 세상이다.


사람이 사람을 믿을 수 없고, 자신이 살던 마을에서도 살아갈 수가 없게 된다. 부자 마을들은 중무장하고, 경비원을 고용해 나름대로 안전을 도모하지만, 그보다 못한 지역에서는 장벽을 세워도 약탈자들에게 습격을 당하게 된다.


극한으로 몰린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는 이제 사람은 함께 해야 할 존재가 아니라 자신을 위협하는 존재일 뿐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을 죽여야만 하는 현실.


최근에 유행한 좀비 영화들과 비슷하다. 함께 지냈던 사람들이 좀비가 된다. 왜 좀비가 될까? 그들이 나쁜 행동을 했기 때문에? 나쁜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징벌로 좀비로 변하나? 아니다. 좀비로 변하는데 그 사람이 살아온 행적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도, 경제적, 정치적, 도덕적, 신체적, 성별, 연령 구분이 없다. 그냥 좀비에게 물리면 좀비가 된다.


그리고 좀비는 조금 전까지 함께 했던 가족이라도 죽여야 하는 존재가 된다. 안 그러면 나도 좀비가 되니까. 따라서 좀비 영화는 디스토피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인과응보라는 말이 통하지 않는... 디스토피아에서 인과응보가 존재할까? 인과응보가 통하지 않기 때문에 디스토피아가 된다.


인간이 살아가는 지구를 디스토피아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 그 많은 종교가 창시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종교가 아니더라도 철학이든, 윤리든, 법이든 인간은 디스토피아에서 살지 않기 위해 서로를 제약할 수 있는, 또는 권장할 수 있는 사상, 문화, 제도를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 사상, 문화, 제도들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혼란이 시작된다. 혼란은 이 소설에서 불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마을을 불태우고, 산을 불태우고, 사람들 이성을 불태워 약탈과 살육으로 나아가고 있듯이, 사람들을 디스토피아로 몰아간다.


혼란 속에서 중심을 잡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든다. 홉스가 말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벌어진다. 뿌리를 잃은 사람들... 정착하지 못하는 사람들. 모두가 디아스포라가 된다. 아주 부유하여 권력을 쥐고, 무력을 사용할 수 있는 몇몇을 제외하고는.


이런 상황에서 자본가는 정치가와 결탁해 노동자들을 노예로 전락시킨다. 그들은 노예와 같은 상황에 처해 노동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은 다른 부랑자들에게서 자신들을 지킬 수 없기에 여기저기로 살기 위해서 떠날 수밖에 없다.


공동체 해체... 살아남는 방법은? 마치 신의 저주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신이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게 했듯이 사람들도 살아남을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 방법, 그것이 바로 씨앗이다. 성경에서 빌려온 이 씨앗 개념은 주인공이 살아남기 위해 씨앗을 보존하고, 소설의 끝에 가서 씨앗을 심기로 결정하면서 디스토피아에서도 인간은 살아남아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비록 실패를 예견하고 있더라도 시도해 보는 일. 최후까지 씨앗을 포기하지 않고, 어떤 씨앗이든 싹을 틔우리라 믿고 행동하는 일.


인간은 미래를 알 수는 없다. 다만 예측은 할 수 있고, 그 예측을 실현하기 위해 행동을 할 수 있다. 미래를 위한 행동. 이것이 바로 씨앗을 뿌리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혼자가 아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고통에 무심할 수가 없다. 다른 사람의 고통이 자신의 고통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그 고통을 해소해야 한다. 이 소설에서는 초공감증후군이라는 말로 나오는데, 불교에서 말하는 네가 아프니 나도 아프다는 말과 통한다.


이런 공감능력을 지니고 있는 주인공 로런... 마을이 파괴되었을 때 주인공은 로런은 홀로 떠나려던 계획에서 두 사람과 함께 떠난다. 셋이서 떠나는 삶을 찾는 여정. 여기에 한 사람, 한 사람 계속 일행이 추가된다. 사연이 있는 사람들, 성별도 인종도, 살아온 배경도 다른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고 함께 하면서, 이들이 정착할 곳을 찾아 가는 여정이 펼쳐진다. 다른 사람의 고통과 쾌락을 함께 느낄 수 있어서 함께 한다는 사실이 부담되고 위험하기도 하지만, 로런은 가면서 이렇게 계속 사람들을 합류시킨다. 이것이 바로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자세다.


그 과정에서 온갖 참상을 목격하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는다. 로런이 말하는 '지구종'을 위해. 이때 지구종은 지구에 뿌리는 씨앗이라는 의미다. 지구가 망해가고 있지만, 인류가 멸망으로 치닫고 있지만, 그럼에도 씨앗을 뿌리는 사람이 된다는, 소설에서 로런은 지구에 국한하지 않고 우주로 자신의 사고를 확장한다. 


인류는 지구에서 우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지금 당장 지구에서 살아가기도 힘듦에도 우주를 생각하는 로런. 그래서 그는 자신의 종교를 '지구종'이라고 한다. 물론 이때 종은 씨앗 '종'자라고 할 수 있지만, 새로운 종교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자신들이 성공한다는 보장을 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이 자리에서 살아가겠다고 결심하고 행동하는 사람들... 소설을 읽으면 결말 부분에서 그들이 심은 씨앗들이 언젠가는 싹을 틔울 수 있겠다는 희망을 느끼게 된다.


소설 마지막에 실린 성경 구절, '<누가복음> 8장 5-8절'. 인용하지 않겠지만, 찾아보면 많이 본 구절일 것이다. 그리고 이 구절을 통해 이 소설은 디스토피아에 유토피아가 내재되어 있음을 우리로 하여금 발견하게 한다.


유토피아는 디스토피아에서 나올 수밖에 없음을... 그런 씨앗 뿌리는 사람들로 인해 우리가 유토피아의 꿈을 꿀 수 있음을. 


옥타비아 버틀러의 [킨]에 이어서 읽은 두 번째 소설... 앞 소설과 마찬가지로 무척 흥미롭게, 한번에 죽 읽히는 소설이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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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엘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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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에 읽은 소설. 테드 창이 쓴 [당신 인생의 이야기]


무언가 독특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단편집이어서 흐릿한 윤곽으로만 남아 있는 소설들이었다. 언젠가 다시 읽어야지 하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이번에 나온 테드 창의 [숨]을 읽으면서도 예전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으니... 그때 느꼈던 감정들보다는 좀더 명확해졌다고 해야 하나.


몇몇 소설들은 마음을 울리기도 했다. 그래, 이런 소설이 바로 상상 속에서 현실을 느끼게 하는 소설이지. 소설은 어차피 상상의 산물인데, 그냥 상상의 세계에만 머물지 않고 상상의 세계 속에서 현실 세계를 불러오는 역할을 하지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이 소설집 첫번째 실린 소설,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은 타임머신을 연상하게 하는 소설인데, 타임머신 하면 기계를 생각하지만, 이 소설에서 과거와 미래를 오가게 하는 대상은 문이다. 문은 물질적으로는 이쪽과 저쪽을 나누는 경계이기도 하지만 이쪽과 저쪽을 연결시켜주는 대상이기도 하다.


과거와 미래를 오가는데 기계보다는 문이 더 현실적으로 다가오는데, 이는 다른 많은 작품들에서도 다루고 있는 문제다. 전세계적인 열풍을 일으켰던 [해리포터] 시리즈에서도 기둥에 있는 보이지 않는 문으로 호크와트로 가는 열차 플랫폼으로 가지 않던가.


하지만 이 소설에서 중요한 요소는 문이 아니다. 과거와 미래로 여행을 한다? 이 얘기와 과거와 미래를 바꿀 수 있다가 연결이 되면? 


이런 '연금술사의 문'은 역사를, 삶을 바꿀 수 있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과거의 나를 바꾸면 현재의 나는 존재할 수 있을까? 미래의 나를 바꾸면 현재의 나는 어떻게 될까? 쉽지 않은 문제다.


이 소설에서는 운명을 바꿀 수는 없다. 운명은 시간의 문으로 아무리 들락거려도 바뀌지 않는다. 자신이 문으로 들어가 운명을 바꾸려고 행동을 해도 결과는 같다. 그렇게 되어 있는 자신을 만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같은 지점으로 돌아온다. 비록 결말에서 상인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지만, 운명이 바뀌지 않는 소설 과정을 보면 그는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간다. 그리고 자신이 본 운명대로 살아가게 된다. 어떤 과정을 거치든.


이 소설과 더불어 소설집 마지막에 실린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이 연결된다. 운명은 우연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우연들이 필연을 구성한다는 사실. 


'그렇게 되었다'는 결론이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 다만, 그렇게 되는 계기는 다양하고, 거기에 관여하는 존재들도, 상황들도 다양하다는 점을 이 소설이 잘 보여주고 있다. 이상하게 자유의지가 개입할 여지가 없는 소설들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중간중간에 변하지 않는 운명을 만들어가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자유의지'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즉, 자기 삶에 책임을 지는 사람은 자신일 수밖에 없으며, 그것을 남에게 전가하는 일은 어리석은 자기기만에 불과함을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이란 소설을 통해서 알 수 있게 된다.


물론 이 소설에서는 평행우주와 같은 과학적 상상력이 도처에서 나오고 있다. 최첨단 기술들과 수많은 평행우주에서 살아가는 나'들'이 나온다. 


그럼 이런 나'들'은 같은 삶을 살까? 아니다. '나'라고 해서 모두 '나'와 똑같지 않다. 나'들'은 '나'가 나름대로 살아가는 존재일 뿐이다. 모두 다른 삶을 산다. 어떤 계기로? 수많은 계기들이 있다. 그러니 똑같이 행동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나'는 그 많은 나'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일무이한 '나'로 존재해야 한다. 그러니 불안할 수밖에 없다. 이 불안이 바로 자유다. 불안은 '나'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자기의지로 결정해야 하는 데서 나온다. 


결말이 정해져 있는 듯하지만, 결정론으로 자유의지는 전혀 없는 듯 여겨지지만, 이 소설을 읽다보면 자유의지가 결국 그런 삶으로 자신을 이끌어가고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이 소설집 마지막에 실린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에서는 특히 더...


여기에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는 조금 긴 소설인데, 여러모로 생각할거리를 주고 있다. 역시 가상세계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 사람과 동물과의 관계, 사람과 식물, 또 사람과 기계와의 관계 모두에 적용될 수 있는 소설이다.


함께 지냄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정성이 필요한지를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기도 하다. 이런 소설들과 더불어 짧은 소설을 통해서도 테드 창의 상상 세계를 만날 수 있다.


그 상상세계들이 상상 속에만 머물지 않고 우리 현실로 오고 있음을 이 소설집은 너무도 잘 보여주고 있다. 상상을 현실로!와 더불어 상상 속을 노닐면서 현실의 내 삶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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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시스 세탁소 습격사건 모들 씨어터북 2
김정숙 지음 / 모시는사람들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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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랫동안 공연이 되었던 연극 대본이다. 그냥 대본집이라고 하기보다는 뒤에 대담집과 그 연극에 대한 비평도 실려 있어서, 이 작품에 대한 전반적인 모습을 알게 해주는 책이다.


세탁소. 빨래를 해주는 곳이다. 빨래란 더러움을 씻어내는 행위인데, 이 희곡은 옷만이 아니라 마음도 빨아주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돈에 눈먼 사람들... 또 갈수록 각박해져 가는 세태. 인정이 메말라가는 세상이라고 하지만, 그럼에도 인정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어서 위안이 된다.


우리 삶이 사막을 건너는 행위라면, 인정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런 사막에서 만날 수 있는 오아시스라고 할 수 있다.


희곡은 1편과 2편이 있는데, 내용은 조금 다르지만 등장인물들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는다. 다만 돈때문에 삶이 더 힘들어지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1편보다는 2편에서 더 쪼들리는 세탁소 주인 강태국의 모습이 드러난다.


그럼에도 희망을 잃지 않는다. 사람다움을 잃지 않는다. 잃을 뻔하기도 하지만,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오아시스를 발견하기는 어렵지만, 오아시스를 발견한 다음에는 얼마나 위안을 받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오아시스 세탁소 주인인 강태국은 비록 자신의 삶은 힘들지라도 그가 살아가는 모습 자체가 다른 사람들에게 위안을 준다. 그들이 계속 살아갈 수 있는 희망, 힘을 준다.


1편에서 아이에게 친절을 베풀지만 성추행으로 오해하는 젊은 엄마, 이만큼 사람들 사이에 믿음이 사라졌다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지만, 또 어머니보다는 어머니의 돈이 더 귀중한 자식들의 모습에서 물질만능주의에 빠진 사회를 보여주고 있기도 하지만, 세탁소 주인 강태국을 통해서 그들 또한 위안이 필요한 존재임을 드러내고 있다.


한번에 변하지는 않겠지만, 강태국이라는 사람의 존재가 그들 마음에 서서히 스며들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1편 끝부분 사람들을 세탁하는 장면에서 옷만이 아니라 마음까지도 세탁하는 통쾌함을 만날 수 있어서 좋고, 2편에서는 그렇게 살아가는 강태국을 인정하는 모습이 드러나서 좋다.


극적인 반전은 없지만 희곡을 읽으면서 강태국에게서 어떤 위안을 받게 된다. 그런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것과 같은 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1,2편을 다 읽고 나면 마음 한구석이 따스해진다.


아직도 이러한 사람들이 있음을, 그러한 사람들로 인해 세상은 조금이라도 따스해지고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옷만이 아니라 마음도 세탁해주는 세탁소, 오아시스 세탁소. 그런 세탁소를 습격한다는 내용의 작품. 읽어도 좋고, 연극으로 봐도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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