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넬로피아드 -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 세계신화총서 2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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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모양처 하면? 우리나라는 신사임당, 외국에서는 페넬로페를 든다. 오디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 20년이나 집을 떠나 있는 오디세우스를 기다리며, 구혼자들의 압박을 물리친 여자. 정숙함의 대명사.


그렇게만 알고 있다. 오디세우스에서 페넬로페는 그렇게 간단하게만 언급된다. 주요 역할을 맡지 않는다. 오디세우스의 모험에서 그가 만난 수많은 여성, 여신들처럼, 그냥 지나가는 인물로만 나올 뿐이다. 


그럼에도 페넬로페를 정숙함, 현모양처의 전범으로 내세우는 이유는 바로 남자들의 욕망이다. 여성이란 자고로 남성을 기다리면서 정숙함을 지키는 절개를 지닌 여인이어야 한다고. 정숙함을 지키지 못하면 쫓겨나거나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음을.


오디세우스에서 하녀들이 그렇다. 하녀들은 구혼자들과 놀아났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다. 아무 힘도 없는 하녀들. 귀족이나 왕족들이 하녀들을 건드리면 과연 하녀들이 거부할 수 있었을까? 거부는 곧 죽음이었을텐데...


애트우드가 쓴 이 소설은 오디세우스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오디세우스에서 가려졌던 페넬로페와 하녀들을 중심에 세운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페넬로페가 주요 화자로 나오지만, 악극 형식으로 하녀들 역시 자신들의 이야기를 전달한다. 억울한 죽음.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삶들. 그러나 그들 역시 사람이었음을.


페넬로페 역시 마찬가지다. 남자에게 예속된 삶이 아니라 당당한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렇게 그들의 이야기가 애트우드에 의해서 펼쳐진다.


이야기 전개가 빠르다. 술술 읽힌다. 그러면서 오디세우스 이야기를 재해석했다는 점에서 흥미가 생긴다.


여성의 입장에서 오디세우스 이야기를 풀어간다면 이렇게 풀어갈 수 있겠구나, 어쩌면 하녀들의 모습은 애트우드가 예전에 쓴 소설인 [시녀 이야기]와 연결이 되는구나.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예속된 존재로만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목숨조차도 자신의 것이 되지 못한, 그런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 사람됨을 입혀주고 있는 소설이 바로 이 소설이다. 페넬로페 역시 마찬가지다. 주체로 살아가려 하지만, 그 시대에 과연 그것이 가능했을까? 오히려 남자들에게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산 사람은 헬레네가 아닐까 하는 생각.


페넬로페와 반대로 나오는 헬레네는 이 소설에서도 시종일관 자신만만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그것이 방종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지만, 헬레네는 당당하다. 그냥 남성들에게 빌붙은 삶이 아닌 그들이 자신을 추종하게 하는 삶을 살고 있다.


페넬로페는 이와 반대다. 능력이 있으면서도 드러내서는 안 된다. 오디세우스의 삶 속에 녹아들어가려 한다. 아니 녹아들어간 것처럼 보이려고 한다. 아직은 주체로 나서서는 안 되기 때문에. 그 시대의 한계로.


그러나 이 소설 속에서 시대를 넘나들면서 페넬로페는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여성이 살아온 삶, 또 여성으로서 당당하게 살아가야 함을 자신의 삶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그렇게 신화 속 인물을 재해석한 이야기. 현모양처라는 틀에 가두지 않고, 가부장제 사회에서도 자신의 삶을 당당하게 살아가려 한 사람으로 페넬로페를 불러낸다.


오디세우스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 페넬로페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 이 소설은 또다른 재미를 선사할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다른 관점에서 오디세우스 이야기를 해석할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할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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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12-29 11: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애트우드의 이런 책이 있었군요. 내용에 관심이 가네요.

kinye91 2022-12-29 18:59   좋아요 1 | URL
신화의 재해석. 어쩌면 페미니스트적인 글이라고 해야겠네요. 애트우드 다른 작품만큼 이 작품도 좋았어요.

yamoo 2022-12-29 13: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저도 있는데, 재미없을 거 같아서 처분할 목록에 넣어뒀는데....재밌으면 재고를 해 봐야 겠어요~

kinye91 2022-12-29 19:00   좋아요 0 | URL
저는 오디세우스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아서 좋고 재미 있었어요.
 
프랑스식 세탁소 - 정미경 소설집
정미경 지음 / 창비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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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에 결코 편한 소설이 아니다. 읽으면서 무언가 안개 속을 헤매는 기분이 든다. 소설 내용도 그렇다. 명확하게 무어라 떨어지지 않는다. 이것 저것 사이에 있는 무엇이 바로 이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악인인가 하면 아니다라고 할 수 있고, 착한 사람인가 하면 그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소설은 그만큼 인간이 단면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 여러 면을 지닌 복합적인 존재임을 보여준다.


하나의 삶이 옳다고 또는 그르다고 할 수 없다는 점을 소설은 보여주고 있는데, 그럼에도 그런 삶, 즉 겉으로 보이는 삶을 추구하다 보면 잃는 삶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드러내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남들의 눈에 보이는 삶, 남에게 인정받는 삶을 살고자 자신이 진정 원하는 삶을 잃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게 한 소설이다.


첫소설부터 그렇다. '남쪽 절'

미술전시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전시관에 들어가는 주인공. 세속적인 성공을 향해 비난받을만한 작가에게 출판을 의뢰하는 주인공. 그 과정에서 용산참사가 분명한 그 장소를 지나면서도 그들의 삶을 외면하려고만 하는 주인공.


출판이란 무엇인가? 과연 그늘진 삶을 외면하고 자신의 밥벌이에 충실하려는 출판이 바람직한가? 그것은 어쩌면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더듬거리며 나아가는 자신의 모습이 아닐까? 


이런 길잃음이 '파견 근무'에서 더 잘 나타난다. 판사라는 자리. 지방 판사. 유지 중의 유지. 그러나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 하는 자리. 누구보다 올곧아야 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지만, 카지노에도 하고, 피의자가 흘린 정보에도 눈을 돌리게 된다.


그에게 정의보다는 현실이, 자신의 감정이 더 앞선다. 자, 이런 세상에 정의는 어디 있는가? 우리는 법조인들이 마냥 정의로울 것이라 생각하지만, 판결은 또 공정할 거라 생각하지만, 소설 속 주인공은 판결이 얼마나 자의적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판결을 내릴 수 있는 사건이 얼마나 많은지, 결국 삶은 이것과 저것으로 명확히 나뉘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이 소설의 주인공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남쪽 절'과 '파견 근무'를 연결지어 보면 바람직한 삶은 무엇이라 정의내릴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삶은 미술의 '스푸마토' 기법처럼 뭉개져서 경계가 흐릿하다고 할 수 있겠단 생각이 든다.


하긴 우리들 삶이 어떻게 무엇이다고 단순하게 정의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은 인물들이 지닌 복합성을 드러내고 있다. 


마지막에 실린, 소설집의 제목이 된 '프랑스식 세탁소'를 보면 그렇게 이것이다라고 편가르기 힘든 삶이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이 있지 않을까 하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소설은 두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현실의 인물과 잡지 속의 인물. 잡지 속의 인물을 통해 현실의 인물이 자신의 삶에서 감춰져 있던 면을 드러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도 깨닫게 된다.


남들이 보면 성공적인 삶, 다른 이들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고 있는 인물로 보이지만, 그 이면에 있는 좋지 않은 모습드을 소설은 드러내고 있는데...


최선을 다해서 요리를 했던 요리사는 미슐랭에서 별 두 개를 받자 자살을 한다(이런 결말을 보여주지 않지만, 그렇게 짐작이 된다). 그는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졌고,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다른 평가를 받아들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프랑스식 세탁소'에서는 두 죽음이 나온다. 소설 속 이야기에 나오는 죽음과 소설에서의 죽음. 소설 속 이야기에서는 당사자가 죽음을 선택한다면, 소설에서는 주인공의 주변 인물이 죽음을 선택한다.


하나는 자신의 자부심을 위해, 또 하나는 다른 사람을 지키기 위해. 그렇다면 이 죽음들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한 죽음은 드러내기 위한 죽음이다. 최선을 다한 삶. 그런 삶을 드러내는 죽음이 소설 속 이야기의 죽음이라면, 소설 속 죽음은 감추기 위한 죽음이다.


주인공의 문제를 감추기 위한 죽음. 죽음으로써 주인공의 문제를 덮어버리는 그런 죽음. 결국 이 죽음은 최선의 삶이 아니라 보이는 삶, 보여주는 삶을 지속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소설 속 이야기가 주인공에게 다른 죽음을 계속 떠올리게 한다.


그 죽음이 주인공에게서 떠나지 않는 한 주인공은 감추기 위한, 보여주기 위한 삶만을 살 수는 없으리라.


그래서 정미경 소설은 삶은 이거다 저거다로 나눌 수 없고, 무엇이 정의고, 정의가 아닌지 말하기 힘들지만, 적어도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은 있다고 말하고 있다.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그 사람의 다른 삶들이 있음을, 그것을 인정하고 거기서 나아가야 함을 명확하게 말하지는 않지만 소설을 읽으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그런 생각이 서서히 올라온다. 이게 편하게 읽히지 않는 정미경 소설의 특징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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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가 X에게 - 편지로 씌어진 소설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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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가는 작가다. 존 버거는. 그의 작품을 헌책방에서 만나면 우선 구입하고 본다.. 읽느냐 읽지 않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언젠가는 읽게 되기 때문에.


이 작품은 소설이다. 편지로 씌어진 소설이라고 한다. 편지라는 매체가 지닌 속성은 허구보다는 사실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읽으면서 이것이 과연 소설일까? 사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존 버거의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내용은 단순하다. 이중종신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있는 남자에게 밖에 있는 여자가 보내는 편지 형식이다. 편지를 통해서 바깥 소식을 전하기도 하고,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밖에 있는 여자가 약국에서 일한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약국에서 일하는 사람. 다친 사람을 치유해 주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다친 사람은? 그 사람들은 바로 세계에서 약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자기의 주거지에서 쫓겨난 사람들, 폭력에 시달리는 사람들, 폭격으로 집도 가족도 잃은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주인공인 아이다는 보살펴 주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들과 연대한다. 그렇게 연대하는 모습을 편지를 통해서 감옥에 있는 사비에르에게 보낸다.


세상 약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연대밖에 없다. 그들은 폭력에 호소하지 않는다. 인간띠를 만들어 헬기나 탱크의 폭력에 맞서는 힘. 그것은 바로 평화를 사랑하는 의지밖에 없다.


아이다가 편지에 쓴 이 구절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지금 우리의 삶은 끝없는 불규칙성에 빠져 버렸어요. 그런 삶을 강요한 자들이 오히려 우리의 불규칙성을 두려워하고 있죠. 그래서 그들은 우리를 몰아내기 위해 담장을 세워요. 하지만 모든 걸 막을 수 있을 만큼 긴 담장은 불가능하고, 어떻게든 돌아가는 길은 있기 마련이죠. 위로든 아래로든.' (216쪽)


이중종신형을 선고받은 사비에르가 무슨 일을 했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그렇지만 편지의 내용을 보면 사비에르는 약자들과 연대했을 것이다. 그러한 죄로 감옥에 갇혔을테고. 


그런 그의 모습은 편지에 있는 그가 적어놓은 글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는 신자유주의에 분명 반대하고 있다. 또한 약자들의 편에서 서서 그들이 평화롭게 사는 세상을 꿈꾸고 있다. 그런 죄로 감옥에 갇힌다.


하지만 아이다로 인해서, 그는 갇혀 있다고 할 수 없다. 아이다는 약국을 통해서 약자들을 보듬어준다. 


이 소설이 과연 소설로만 그칠까? 우리 역시 기다란 담장에 갇혀 있지 않나? 담장을 만들고 있는 족속들이 있지 않나? 담장을 통해서 눈과 귀를 가리고 저들이 원하는 대로만 하려고 하지 않나? 하지만 다 가릴 수는 없다. 어디선가 새어나온다. 아이다의 말처럼.


우리 역시 위로든 아래로든 길을 찾을 수 있다. 그래, 눈 앞의 길이 장벽으로 막히면 돌아가면 된다. 그 자리에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존 버거 소설을 읽으면서, 그가 소설에서 우리에게 전하려고 하는 일들이 현재진행형임을 생각한다. 우리에게도 진실과 사랑을 가둘 수 있는 장벽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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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토끼 (리커버)
정보라 지음 / 아작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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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결말이 없는 시대의 소설


고전소설은 권선징악이다. 행복한 결말이다. 그래서 잘 먹고 잘살았다더라로 끝난다. 그러니 너희도 잘살아야 한다. 교훈을 주려고 한다. 도덕을 이야기를 통해서 주입시키는 경우가 많다.


악은 반드시 처벌된다. 선은 복을 받는다. 현실이 힘들더라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 언젠간 복이 찾아올테니. 


고전소설들은 이런 틀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현대소설에 들어와서는 이런 틀이 많이 깨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행복한 결말이 아니더라도, 권선징악 정도는 지키려고 한다.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 아니 법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시대에도 법은 힘센 자에겐 한없이 관대하고 힘없는 사람에겐 거대한 힘으로 다가온다. 이게 현실이다. 이런 현실을 소설이 감추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서도 안 된다. 그러면 소설이 무슨 필요가 있나? 그냥 사건 기사를 쓰면 되지. 아니면 르포르타쥬라고 하는 형식으로 글을 쓰면 된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리얼리즘이라는 이름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리얼리즘 소설에서도 있는 그대로의 현실만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소설은 소설이라는 장치를 통해서 현실을 보여준다.


그런 장치들이 없을 때 소설은 소설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지금처럼 권선징악을 쉽게 말할 수 없는 시대에 소설은 어떻게 쓰여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한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표현한다면 누구도 읽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현실도 팍팍한데, 소설까지 그렇게 팍팍하다면 누가 읽겠는가? 그러니 소설은 여러 장치들이 필요하다. 이 소설집, [저주토끼]는 바로 이렇게 팍팍한 현실을 소설 장치들을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다.


복수가 성공해도 시원하지가 않다. 다른 불행이 따른다. 친구를 위해서 저주를 걸어둔 저주토끼를 만든 할아버지. 저주토끼는 성공하지만, 할아버지 역시 저주의 업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저주는 받는 사람에게만 걸리지 않는다. 거는 사람도 걸린다.


물고 물리는 사회에서 어떻게 한쪽이 일방적으로 성공할 수가 있겠는가? 그것은 기계와의 관계에도 적용이 된다. 소설에'안녕, 내 사랑'이라는 소설을 보면 자신이 만든 첫로봇과의 기억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어하는 사람, 그리고 로봇에 저장되어 있는 기억들을 계속해서 저장하는 새로운 로봇들.


쓸모없어진 로봇을 폐기하려고 할 때, 로봇들이 인간을 해치고 사라지는 모습. 결국 일방은 없다. '머리'라는 소설은 그래서 더욱 섬뜩하다. 자신의 배설물이 만든 존재가 결국 자신을 배설물의 자리로 돌려보낸다는 설정.


여기서 환경오염을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내가 알게모르게 누군가에게 해를 끼쳤을 수도 있고, 그 업보를 받을 수도 있다는 쪽으로 생각해도 된다. 잘못을 바로잡지 않았을 때 그 잘못이 점점 더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는 모습을 '덫'에서 만날 수 있다.


환상적이고, 기괴한 설정으로 소설을 이끌어가지만, 그런 소설적 장치들을 통해서 무어라 설명하기 힘든 삶의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삶을 힘들게 하는 존재가 괴물이라는 단 하나의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 '그가 원했던 것은 복수가 아니었다. 최소한 이런 복수는 원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마을 전체가 '그것'의 존재에 기대어 생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뿐이다.' (229쪽. '흉터'에서)는 서술처럼 그런 괴물을 우리 모두가 함께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하는 '흉터'란 소설. 그리고 인간이 자신의 욕심으로 파탄에 이르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즐거운 나의 집'이나 '바람과 모래의 지배자'라는 소설.


읽으면서 기괴하다는 생각. 이렇게 행복한 결말하고 먼 소설이 있을까 하는 생각. 그렇지만 흥미진진하게 읽히는 소설. 읽고나서 자꾸만 전혀 현실성이 없는 소설들임에도 (변기에서 머리가 나온다든지, 귀신이나 유령이 나타나고 보인다든지, 여우의 몸에서 금이 나온다든지 등등) 현실을 생각하게 하고 있는 소설집이다.


이런 느낌, 작가의 말에서 그래서 그랬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작가의 말이 아마도 이 소설집을 읽고 난 느낌을 가장 잘 대변하고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작가와 독자는 엄연히 다르게 소설을 읽을 수 있음을 알고는 있지만.


'원래 세상은 쓸쓸한 곳이고 모든 존재는 혼자이며 사필귀정이나 권선징악 혹은 복수는 경우에 따라 반드시 필요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필요한 일을 완수한 뒤에도 세상은 여전히 쓸쓸하고 인간은 여전히 외로우며 이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그렇게 쓸쓸하고 외로운 방식을 통해서, 낯설고 사나운 세상에서 혼자 제각각 고군분투하는 쓸쓸하고 외로운 독자에게 위안이 되고 싶었다.

 그것이 조그만 희망이다.' (326쪽. 작가의 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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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소녀 은퇴합니다 소설Q
박서련 지음 / 창비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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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소녀.


예전 만화에서나 들을 법한 이름. 그런데 소설에 마법소녀가 등장했다. 환타지 소설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했더니, 꼭 그렇다고 할 수도 없다.


물론 마법을 부린다. 미래를 보는, 공간을 자유롭게 이동하는, 거대하게 변하는 등등의 마법을 부리는 소녀.


그런데 왜 소녀일까? 한때 만화영화 중에 '세일러문'이 있었는데, 그와 비슷한가? 아니면 닥터 스트레인지처럼 시공간을 자유롭게 다닐 수가 있나?


물론 소설에서 마법소녀들은 자신만의 마법을 행사할 수 있다. 모두가 그러지는 않는다. 마법을 각성한 소녀들. 그리고 그들은 자신만의 마법 기물을 가지고 다닌다.


세상에 적응하기 힘들다고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 앞에 마법소녀가 나타나, 당신이 시간의 마법소녀라고 말한다. 시간을 조종할 수 있는 소녀. 얼마나 매력적인가. 게다가 막강한 힘을 발휘해서 지구가 겪고 있는 기후 재앙을 해결할 수가 있단다.


기후 재앙으로 지구에서 사람들이 살아가기 힘들어질 때 그를 시간의 마법소녀가 해결할 수 있다는 발상. 그렇다. 위기에서는 늘 영웅이 나타난다.


지구가 위기에 처했을 때 '어벤져스'가 나타나지 않던가. 어릴 적 보았던 마징가Z나 태권V, 또는 세일러문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우리의 위기를 다른 존재를 통해서 극복하고자 한다. 그런 꿈을 꾸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자초한 위기를 특정한 영웅에게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


마법 기물, 주인공은 자신이 마법소녀라는 사실도 잘 믿지 않지만, 또한 기물(소설에서는 '마구'라고 나온다)로 받은 것이 신용카드와 비슷하다는 데서 실망하기도 한다. 게다가 자신은 변신도 잘 못하고.


마법소녀들의 일에 관객으로 참여하기도 하니, 참... 그러다 자신이 시간의 마법소녀가 아님을 알게 된다. 그렇게 되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여기서 진짜 시간의 마법소녀가 인류를 멸망시키려 한다.


그 마법소녀에게 인류는 지구의 악이다. 척결해야 할 존재다. 어차피 망해가는 인류, 그 시간을 좀더 앞당기려 한다. 그러다 주인공을 비롯한 마법소녀들과 대결하게 되고... 주인공이 어찌어찌해서 시간의 마법소녀를 무력화시킨다. 그리고 마법소녀에서 은퇴한다.


참, 환상적인데... 가만히 보면 현실을 담고 있는 장면이 있다. 우선 '마구'로 나오는 마법 기물이 신용카드와 비슷하다. 처음에는 별 생각없이 읽다가 소설의 끝부분에 가면 왜 그렇게 설정했는지 알게 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제로섬 게임이다.


누군가의 이익이 누군가의 손해가 될 수 있다. 어떤 일에도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신용카드, 눈에 돈이 안 보이지만 쓰는 순간 어디에선가 돈이 빠져나간다. 결국 공짜는 없다. 지구에 기후 재앙이 몰아닥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람들이 한 행동이 그런 결과를 이끌어냈다.


여기서 더 나아가 힘의 집중과 분배를 생각할 수도 있다. 제로섬 게임, 총량이 같다고 가정하면 누군가가 지닌 막강한 힘은 다른 사람들은 힘이 약화되었단 얘기다. 반대로 누군가가 지녔던 막강한 힘이 소멸된다면 그 힘이 소멸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질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소설은 그 점을 이야기한다. 결국 세상을 바꾸는 것은 한 사람이 아니다. 영웅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일이다. 세상을 바꾸는 일에도 공짜는 없다. 누군가의 도움으로 세상을 바꿨다가는 그 대가를 다시 치러야 한다.


그러니 마법소녀는 은퇴해야 한다. 마법소녀가 마법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세상을 바꾸려 해야 한다. 소설을 읽으면서, 특히 소설의 끝부분으로 갈수록 그 점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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