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순양함 무적호 민음사 스타니스와프 렘 소설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최정인.필리프 다네츠키 옮김 / 민음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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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니스와프 렘이 쓴 소설 읽기, 세 번째. 이번에는 우주 전함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소설이다. 우주를 가로지르는 모험이 나올 것이라 예상했지만, 그렇지는 않다.


'우주 순양함 무적호'라는 제목만으로 보면 항공모함을 연상하게 하고, 우주를 가로지르면서 위용을 자랑하는 그런 소설일 거라 생각했는데,(제대로 보지는 않았지만 마치 스타트렉의 우주선처럼) 한 행성에서 실종된 또다른 우주선을 찾아가서 겪게 되는 내용이다.


즉, 낯선 행성에서 만나는 모험을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행성에서 만나는 존재가 생명체라 아니라는데 이 소설의 특이점이 있다.


우주에서 우리는 진화는 생명들이 한다고 알고 있다. 무생물들은 진화를 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지금 연구하고 있는 로봇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할 수 있다. 과연 그럴까? 


우리는 인공지능이 스스로 학습에서 진보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로봇들은 진화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이 기계에도 있다고 한다면, 그때 세상은 어떤 세상이겠는가?


만약 그 기계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다른 존재들을 없애고, 자신들만의 행성을 만들었다면? 그 행성에 인간이 가서 개입하는 것이 옳은가?


이 소설은 그런 점을 생각하게 한다. 60년대에 기계가 진화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 점도 놀랍지만, 그런 기계도 하나의 존재로 인정해야 한다는 작가의 생각이 놀랍기도 하다. 


지금도 인공지능은 인간에게 종속된 존재로만 여기는 사람도 많은데... 인공지능이 아니더라도 복제인간을 어떻게 여길 것인가에 대한 논쟁도 많은데, 이 소설을 읽으면 인공지능이든 복제인간이든 인간의 손을 떠나서 자신들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다면, 거기에 인간이 개입해서는 안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많은 일들을 그 행성에서 겪은 뒤, 주인공은 로한은 이렇게 생각한다.


'과학자들 중 누구도 자신과 공감하지 못하리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제 로한은 실종자들의 비극을 알리기 위해서, 더불어 이 행성을 지금 상태 그대로 놓아두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기 위해서 함선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모든 것이, 모든 장소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야. 그는 천천히 아래로 내려오면서 생각했다.' (316쪽)


어떤 행성이든 인간의 지배 아래 둘 수는 없다. 그 행성들은 행성들 나름대로 존재할 의미가 있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이 또다른 식민지로 다른 행성을 삼아야 한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여러 행성을 지구에 있는 다른 지역으로 바꾸어 말하면 지구에서 살아가는 각 존재들은 자신들의 삶을 꾸릴 권리가 있으므로, 그들의 삶을 자신들의 삶과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하거나 또 자신들의 삶에 맞추려고 강제해서는 안 된다고 할 수 있다.


이성이 없는 기계가 진화해서 자신들의 행성에서 살아가게 된다는 설정, 그리고 그 행성이 인간이 침입했을 때 벌어지는 일들. 그런 일들을 겪으며 인간이 깨달아 가는 과정. 이 과정이 이 소설에 잘 나타나 있다.


소설을 읽으면서 소설 속에 나타나는 알갱이와 같은 기계들, 그들은 하나의 개체로서는 약하지만 함께 뭉치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는 존재로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집단지성의 모습이기도 하고, 진화의 결과이기도 하다는 쪽으로 소설이 전개되는데... 이 존재들이 영화 '빅 히어로'에 나오는 작은 자석같은 금속들을 떠올리게 했다.


그것들도 하나의 개체는 독립적이지만 약한 존재인데, 결합하면 어떤 형태로든 변신이 가능하고 또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데, 이 소설에 등장하는 알갱이들도 그러하다. 마치 구름처럼 몰려다니며 위력을 발휘하는 존재들.


하여 60년대 상상력이 현대에 영화에도 반영이 되고, 과학기술의 발전에도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데, 그런 점보다도 인간 우선주의를 벗어나야 한다는 점을 이 소설에서 읽어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은 점이 바로 인용한 로한의 생각에 담겨 있다고 본다. 로한의 생각처럼 과학자들은 공감하지 않겠지만. 아니, 공감하는 과학자도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 소설 속 과학자들과는 다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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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 민음사 스타니스와프 렘 소설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이지원 옮김 / 민음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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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에 나온 소설. 1960년대 창작된 소설이라고 한다. 우주를 배경으로 상상력을 발휘한 소설인데... 


지금 읽어도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 소설이다. 여전히 우리가 꿈꾸는 모습들이 소설 속에 나오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라는 제목으로 우주 여행을 하면서 겪은 일들을 서술하는 부분. '이욘 티히의 회고록'이라는 제목으로 그가 만난 사람들에 대한 회상이 실린 부분, 그리고 끝으로 이욘 티히의 청원서가 실려 있는데, 얼핏 잘못 읽으면 사실을 다루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소설이기 때문에 허구이고, 상상의 세계이긴 하지만, 이 상상의 세계가 허무맹랑하다고만 할 수는 없다. 실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우리가 여전히 실현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물론 우주를 여행하는 일은 아직도 멀다. 이 소설에서처럼 우주 이곳저곳을 여행하면서 상상을 넘어선 경험을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정말로 우주를 여행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어떻게 알겠는가. 평행우주란 말이 있고, 시간의 뒤집힘이란 말도 있는데, 내일의 내가 오늘의 나를 만나는 일이 생기지 않으란 법이 어디 있는가.


이 소설 첫번째 부분이 바로 이렇다. 한 편의 코미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소설인데, 우주선이 고장났다. 고쳐야 한다. 그런데 혼자서는 할 수가 없다. 누군가는 잡아주어야 너트를 조일 수가 있는데, 우주선에는 혼자만 타고 있다. 


우주선에는 나 혼자만이 있어야 하는데, 시간이 뒤집힌 세계에서 나는 혼자가 아니다. 또다른 나'들'이 우주선에 있다. 그들은 오늘이 월요일이라고 하면, 화요일의 나, 수요일의 나, 토요일의 나, 일요일의 나 등으로 미래의 '나'가 시간의 뒤틀림으로 우주선에 동시에 나타난다.


이거야 원. 이런 나'들'이 얽히고 설킨 관계를 유지하다가 결국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 소설 첫부분을 이루고 있다. 


이렇게 소설은 이욘 티히의 우주 여행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데, 이욘 티히가 우주 여행을 하면서 겪게 되는 온갖 일들을 여러 일지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그 중에는 지금 우리가 생각할 수도 있는 일들이 있는데... 역사적인 사건들을 교묘하게 비틀어서 소설 속에 등장시키기도 한다.


종교에 대한 비판도 있고, 정치체제에 대한 비판도 소설 속에서 찾을 수가 있다. 여기에 두 번째 부분이라 할 수 있는 회상 부분에서는 인공지능에 대해서, 영혼에 대해서 지금도 분명하게 이야기하지 못하는 것들을 소설을 통해서 고민하게 하고 있다.


인간이 달에도 가지 못한 때, 인공지능 로봇이 존재하지도 않았던 때, 이 소설은 이미 지금 우리가 만들어가려고 하는 로봇들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러한 길로 가려는 과학자들을 보여주고 있고. 


현실에서 이루어지기 힘든 일들이라기보다는 우리들이 계속 추구해 나가는 일들이 이 소설 속에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소설의 끝에 실린 '우주를 구하자: 이욘 티히의 탄원'을 보면 우주 문제를 지구 문제로 국한시키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들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소설 속에 나온 문장을 보자. 이 문장이 어찌 과거의 문장이라 할 수 있겠는지...


'이런 변덕스러운 욕심을 충족시키고자 우리는 우주의 에너지를 낭비하고, 운석과 행성을 오염시키고, 대보호 구역의 재정을 텅 비게 하고, 우주에 한 발짝 내딛을 때마다 오만 가지 쓰레기를 버리면서 전 우주를 거대한 쓰게리 폐기장으로 만들고 있다. 이제는 우리가 지켜야 할 원칙을 기억하고, 적극적으로 실행할 때다. 단 한 순간도 지체할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서, 나는 우주를 구하고자 경종을 울린다.' (563쪽)


과학적 지식과 더불어 역사, 철학, 문화적 지식이 있으면 이 소설을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겠단 생각을 한다. 소설 속에 나타난 비판의식을 찾아 읽는다면 더 재미가 있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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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의 미, 칠월의 솔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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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좀 성향이 다른 소설들이 실려 있다. 성향이 다르다고 해도 공통점을 찾으라고 하면 찾지 못할 것도 없다. 어차피 우리네 인생이란 거기서 거기 아니던가. 다 다른 인생이지만 다 비슷한 인생이기도 하다.


소설 역시 마찬가지다. 인생을 글로 표현한 예술이 소설이니, 소설들도 공통점을 지닐 수밖에 없다. 물론 공통점을 통한 다른점을 보여주는 소설이 좋은 소설일테지만.


사람이 사람을 만나 얼만큼 이해할 수 있을까? 사실 잘 이해할 수 없다. 첫소설에서 그런 미끄러짐이 잘 나온다. 미끄러짐이라기보다는 자신들에게 최고의 순간이었던 때, 그때는 비록 그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도 자꾸만 마음에 남아 있던 장면. 그런 장면들을 보여준다. 두번째 소설 '깊은 밤, 기린의 말'에서도 마찬가지다. 


말을 잘 못하는 아이, 그러나 기린이라는 소리에 웃음을 짓는 아이. 이 아이에게는 기린이라는 말이 최고의 순간일 수 있다. 남들은 몰라도 자신에게는 최고의 순간. 그 순간은 영원히 간직된다. 삶에서 언제든지 불러낼 수 있는 순간이 되니.


소설집 제목이 된 '사월의 미 칠월의 솔'이 그렇다. 이모, 미국에 간 이모. 엄마와 이모의 말이 다르지만, 그래서 이모를 잘 모르지만, 이모에게도 한창 때가 있었음을. 그때가 이모 인생에서 가장 아름웠던 순간이었음을.


빗소리를 들으며 음계의 미에서 솔까지... 도에서 시도 아니고, 미에서 솔이다. 짧은 순간이다. 그러나 그 짧은 순간이 바로 인생에서 정점에 이른 때일 수 있다.


어쩌면 짧아서 더 아쉬운, 그런 한창 때. 그런 순간을 작가는 사월의 미, 칠월의 솔이라고 표현했다. 그런 순간을 남들이 알 수 있을까?


그 순간을 겪은 사람이 이야기해줘도 사실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할 뿐이다. 그렇지만 당사자에게는 가장 좋은 시절, 마음 속에서 영원히 지우지 못할 그런 순간이 된다. 그러니 남의 인생을 안다고 말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 알 수 있다.


제목도 특이한'주쌩뚜디피니를 듣던 터널의 밤'이라는 소설을 보면 엄마에게 어떤 순간이 가장 좋았던 순간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남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최고의 순간. 그 한창 때. 그런 순간으로 돌아가기는 힘들겠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모두들 자신에게 최고였던 순간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


그런 사실로 인해서 인생은 조금 더 풍요로워질 수 있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김연수 소설을 읽으면서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의 어려움보다는, 누구나 다 자신의 인생에서 한창 때가 있었음을 느꼈다.


비록 남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자신에게는 최고의 순간이었음을, 그 한창 때가 누구나에게 다 있음을 이 소설집을 통해서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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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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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 김연수 소설집을 읽으면 맨 처음에 실린 소설에서 이 소설집의 공통점을 찾고자 하는 욕망을 느낀다. 그리고 다른 소설들을 그 틀에 끼워맞추려고 한다. 그러면 안 되지 하면서도 무언가 일관성을 찾으려고 한다.


이 소설집에서는 '암흑물질'에 꽂혔다. 암흑물질, 우주를 이루고 있는 물질인데 아직 밝혀지지 않은 물질. 그것도 우주의 90% 정도를 차지한다고 하니, 빙산이나 무의식을 생각하면 된다. 빙산도 우리에게 보이는 부분은 10%가 채 안 될 수도 있고, 우리 무의식 역시 의식에 비하면 무궁무진하다고 할 수 있으니...


암흑물질은 분명 존재한다. 그런데 찾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찾지 못함, 이는 아직 우리에게는 알지 못하는 세계라는 뜻이기도 한다. 불가지(不可知)의 세계. 알 수 없으니 말할 수 없다고 하겠지만, 알 수 없다고 말하지 못하지는 않고, 또 말할 수 없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없다.


우리 삶이 그렇지 않겠는가? 삶을 보여주는 소설 역시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김연수 소설집을 읽으면서 다양한 삶이 나오지만, 이들 삶은 필연이라고 할 수 없다. 그들이 겪는 일들은 우연들이 겹치면서 이루어진다. 우연들은 예측을 빗나가고, 나중에야 한 줄로 꿰어 그렇구나, 그래서 이렇게 됐구나 생각할 수 있을 따름이다.


소설집에 첫번째로 실린 소설 '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에서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그리고 이 구절이 나를 김연수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을 이 구절에 매이게 만들었다.


'암흑물질은 관측이 불가능하므로 존재를 증명할 수가 없다. 우리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것임에 틀림없는, 이 어둡고 비밀스럽고 거무스름한 물질이 우리 우주의 90퍼센트를 차지한다.' (11쪽)


이 구절이 소설집 마지막에 실린 '달로 간 코미디언'과 연결이 된다. 시각장애인이 등장한다. 그리고 시각장애인은 이렇게 말한다. 역시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무엇. 그것을 생각하게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관장은 자신이 보지 못하게 되면서 시각적 세계가 사라졌듯이 그 시각적 세계 안에서 자신의 몸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존재, 투명인간의 존재, 유령의 존재가 됐다는 걸 알아차렸다.' (275쪽)

 

시각장애인이나 암흑물질뿐이 아니다. 우리 삶은 우리가 모르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그 일부분에 불과할 뿐. 그러니 삶에 대해서 제대로 알기가 힘들다. 알기 힘들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정해져 있지 않으니, 시각장애인이 사막으로 걸어가듯이 우리는 삶이라는 사막을 매순간 걸어갈 수밖에 없다.


소설집 제목이 된 '세계의 끝 여자친구'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에게는 세계의 끝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그냥 자신이 살고 있는 공간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렇게 삶은 다양하고, 모르는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모르는 세계, 그렇지만 막연히 자신에게 다가오는 세계. 우리는 그런 세계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누구도 세계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기 때문에, 자신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있기 때문에, 그보다 더 모르는 다른 존재와 함께 살아가고 있기에 지금 눈 앞에 있는 세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내가 보고 듣고 겪고 있는 현실이 다가 아니라는 것. 그 점을 이 소설집을 통해서 명심하게 된다. 어쩌면 보이지 않는, 알지 못하는 세계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음을, 그런 불가지의 세계가 또는 암흑물질이 우리 삶을 둘러싸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삶은 보이지도 말해지지도 않는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달로 간 코미디언'에서 여주인공의 이 말이 바로 우리 인생이 암흑물질로 가득차 있음을 말해주고 있지 않나 한다. 이것이 인생임을.


'나는 아무도 없는 편집실에 앉아서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들어. 처음에는 이야기를 따라가지만, 나중에는 감정의 흐름을 지켜봐. 그럴 때면 그들의 인생이란 이야기에 있는 게 아니라 그 이야기 사이의 공백에 있는 게 아닐까는 생각마저 들어. 그런데 편집은 목소리 사이의 공백을 없애는 일이잖아. 목소리와 목소리 사이에서 기침이나 한숨 소리, 침 삼키는 소리 같은 걸 찾아내서 없애는 거야 그러면 이상하게 외로워져.' (237쪽)


우리 인생은 이렇게 편집되지 않는다. 바로 편집되지 않은, 보이지 않는 더 많은 요소들이 우리 인생에 있다. 이번 김연수 소설집을 읽으며 인생이란 참으로 많은 암흑물질로 둘러싸여 있다는 생각을 했다. 불가지의 세계이지만,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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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령작가입니다
김연수 지음 / 창비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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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다는 행위. 알고 있는 것을 언어를 통해 다른 드러내는 일. 언어학 이론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쓰인 것이 쓰려고 하는 존재를 온전히 드러낼 수 있을까? 존재와 글 사이에는 어떤 간극이 있지 않을까?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 어디까지 진실인가? 사실과 진실을 구분하기 힘들듯이, 우리는 언어를 통해서 진실에 다가갈 수 있을까?


이번 김연수 소설집은 이렇게 빗나감을 보여주고 있다. 쓴다는 말이 직접 나온 소설도 있지만, 그런 말이 나오지 않은 소설도 빗나감이 주를 이루고 있다.


빗나감, 어긋남, 아니 알 수 없음. 한낮 속에 서 있을지라도 진실은 알 수 없다는 것. '이렇게 한낮 속에 서 있다'는 소설이 그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보이는 어떤 행위에 대해서 판단하지만, 과연 그 판단이 진실일까? 보여짐이 진실과 일치할까. 어쩌면 쓴다는 행위와 보여짐이라는 것이 비슷하지 않을까. 쓰는 순간 그 대상에게서 멀어지듯이 보여지는 순간 가려지는 것이 있음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일제시대 친일과 북한군에 점령당한 서울에서 한 부역 행위. 쉽게 말할 수 있을까? 그들의 친일이나 부역은 어디까지 진실일까? 소설 속에서 그런 행위를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어긋남, 빗나감을 이렇게 잘 보여주는 문장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친일을 하면서 했다는 말이 참... '일본이 승리한다고 믿는 게 아니라 일본이 승리한다고 믿는다는 그 사실만을 믿는 것'('이렇게 한낮 속에 서 있다 '중에서. 236쪽)


이 말 속에는 거리가 있다. 도대체 진실은 없다. 교묘하게 거리를 둔다. 쓴다는 행위가 이렇지 않을까 하는데... 쓰기는 자신을 돌아보고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말이 무색할 지경이다.


그렇게 이번 김연수 소설집에서는 쓰기가 진실을 드러내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진실을 밝히는 일이 불가능함을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특히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에서는 쓰는 행위가 많이 나오는데, 그 쓰기가 진실을 향해 가지 않고 오히려 진실을 가리는 쪽으로 간다.


설산을 넘으면 진실을 만나는 일이 아니라, 설산에서 길을 잃고 마는 일. 이 소설은 그런 과정을 보여준다. 자신을, 또 애인을 알기 위해서 글을 쓰지만, 글을 쓰면서 진실은 사라지고 기록만 남게 되고 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럼에도 쓰기를 포기하지 못하고, 등정을 하면서도 계속 써 나가지만, 그는 자신이 알고 있던 구절마저도 잊게 된다.


설산 속에서 실종이 되는 그와 마찬가지로 글은 진실로 가지 않고 진실로 가는 사람을 헤매게 한다. 그런 모습이, 사람과 사람이 만나더라도 서로 빗나가는 관계를 보여주는 소설들이 이 소설집을 차지한다.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 모두가 그렇다고 봐도 된다. 필연이 아닌, 진실이 아닌, 그냥 그렇게 보여진 것, 쓰인 것들만으로 파악할 수밖에 없는 관계. 그래서 서로 이해 불가능에 빠질 수밖에 없는 관계.


그런 관계들을 김연수 소설이 보여주는데... 이 소설들을 읽으면 '이것이다'라고 주장하는 일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 생각하게 된다.


보여지는 것에 가려진 진실이 있고, 쓰여진 것이 아니라 쓰이지 않은 진실이 있는데, 그것들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보여진 것, 쓰인 것을 기반으로 판단을 내린다면, 그 관계는 파탄에 이를 수밖에 없음을... 


특히 사람의 관계는 더욱 그러함을 소설을 통해서 생각하게 된다. 소설집 제목이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에서 알 수 있듯이, 작가는 글을 통해서 세계를 보여주는 사람이다. 그러니 작가라는 말에는 쓰기라는 말이 이미 내포되어 있다.


그런데 그냥 작가가 아니라 유령 작가다. 유령은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존재, 또는 존재하지 않으나 존재하는 존재다. 그렇게 유령은 언어 뒤편에 있는 존재다. 그런 존재가 쓰는 글. 유령작가가 쓰는 글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 유령작가란 말에서 이 소설집에 실린 쓰기 행위가 지닌 거리, 빗나감이 느껴지고, 서로가 서로 관계를 맺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는 현실임을 생각하게 된다.


소설이 보여주는 세계가 바로 그렇다. 현실과 같은 듯하면서도 현실이 아닌. 그래서 우리에게 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쓰기의 모습. 하지만 소설은 그런 빗나감을 통해서 우리가 현실을 다시 보게 만든다. 


김연수 이번 소설집을 통해서 내가 알고 있는 것이 과연 다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쓰이지 않은 것, 보여지지 않은 것에 대해서 생각도 해보게 하는 소설이기도 하고. 특히 다른 존재와의 관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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