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통 안의 소녀 소설의 첫 만남 15
김초엽 지음, 근하 그림 / 창비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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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고 맨 뒤에 실린 작가의 말. 가슴을 때린다. 그래, 이런 세상이 더 좋은 세상이겠지. 온갖 최첨단 기술로만 이루어진 사회보다는. 


"반짝반짝 빛나는 미래 세계도 좋지만, 그보다 아무도 외롭지 않은 미래를 만날 수 있다면 좋겠다."


많은 과학 업적들이 우연을 통해서 발견이 된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우연히 공기오염을 줄이는 기술을 발견한다. 분진형 나노봇, 에어로이드. 공기를 정화시키는 아주 작은 로봇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그것이 일상에서 쓰이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받는다. 그러면 되었나?


아니다. 부작용이 있다. 어떤 기술도 모든 사람을 완벽하게 만족시키지 못한다. 이렇게 공기 오염 없이 많은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사회에서 하필이면 그 기술에 이상 면역 반응을 일으키는 사람이 나타난다. 소설 속 주인공 지유가 그렇다.


많은 사람이 기술발전으로 행복한 삶을 살지만, 지유는 오히려 통 안에 갇혀 살아야 한다. 이는 남들과 함께 하지 못함을 의미한다. 지유가 기껏 통 밖으로 나올 수 있는 때는 비가 내릴 때. 비가 내려서 에어로이드가 녹아내릴 때.


남들은 우산을 쓰고 다니지만, 이때만큼 지유는 우산 없이, 통 밖으로 나와 거리를 거닐 수 있다. 남들이 우산 없이 다닐 때는 통 안에 있어야 하고, 남들이 우산을 쓸 때 지유는 우산 없이 거닐고 싶어한다.


이렇게 지유는 다른 사람과 함께 걸을 수가 없다. 함께 할 수 없는 신체조건이다. 자, 이런 사회에서 지유는 행복할까? 생명을 이어가겠지만, 지유는 남들로부터 소외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를 과학 소외라고 하면 어떨까? 또는 기술 소외라고... 온갖 과학, 기술이 발전하면 할수록 거기에서 배제되는 사람들이 나올 수밖에 없다. 소외되는 사람들. 그러나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또 다수의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소수의 불편함, 어려움은 무시되기 일쑤다.


소설에서도 마찬가지다. 마치 시혜를 베풀듯이 지유에게 통을 선물하는 업체도 있지만, 이는 그들의 기술을 알리는 목적도 있고, 또 함께가 아니라 당신도 살 수 있는 세상임을 보여주려는 의도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지유에게 다른 존재가 다가온다. 노아. 복제인간이라고 해야 하나. 역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 수 없는 존재다. 노아 역시 갇혀 있다. 이런 노아와 지유가 함께 산책할 수 있을까?


"이 동네를 너랑 같이 산책해도 재밌을 텐데. 그렇지?" (54쪽)


남들과 함께 하지 못한 지유의 마음이 잘 드러난 말이다. 하지만 이들은 함께 산책할 수 없다. 둘 다 소외되어 있지만, 다른 사람들 시선에 노출되어 살아가도 괜찮은 지유와 다른 사람들 눈에 띠면 안 되는 노아이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시대에 둘 다 소외되어 있기는 하지만, 소외의 정도는 다르다. 그렇게 소외되는 사람들 사이에도 차이가 있다. 이 차이가 그들을 함께 하지 못하게 한다. 왜냐하면 함께 하는 순간, 어느 한 존재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철저하게 배제되기 때문이다.


소설은 그 점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둘은 다른 방법으로 함께 한다. 지유는 노아에게, 노아는 지유에게 선물을 준다. 그 선물이 비록 같은 공간, 같은 시간에 함께 있지는 못해도 그들이 함께 하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소외된 존재들의 연대. 그것이 그들을 견디게 해주는 힘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아주 짧은 이 소설은 미래 사회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세상이 어떤 세상일지 생각해 보라고. 지금 기후 위기가 심각하다. 위기가 아니라 재앙임을 몸으로 체험하고 있다. 세계 각국에서. 자, 이 재난을 소설에서처럼 과학기술로 해결하려고만 하면 될까? 


그런 방법이 다시 지유나 노아와 같은 존재를 만들어내지 않을까? 그런 세상이 과연 바람직할까. 그래서 작가의 말이 가슴에 더 와닿는다.


"반짝반짝 빛나는 미래 세계도 좋지만, 그보다 아무도 외롭지 않은 미래를 만날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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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약한 요괴 김동식 소설집 2
김동식 지음 / 요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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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식 소설은 허무맹랑하다고 할 수 있다. 혹평을 하자면 그렇다. 허무맹랑.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이야기. 괴력난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옛날 이야기에서 귀신 이야기가 참 많다.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일들을 이야기를 통해서 이루는 경우, 또 도깨비에 관한 이야기도 많았다. 사람들 욕망을 드러내는 소재로 도깨비를 활용해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김동식 소설은 바로 그런 옛날 이야기와 연결이 된다. 허무맹랑이나 괴력난신이라고 비판만 할 수 있는 소설이 아니다. 그런 이야기들은 바로 우리들이 감추고 있는 욕망을 드러내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김동식 소설 역시 우리들이 감추고 있던, 또는 크게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욕망들을 소설을 통해서 보여준다.


특히 옛날 도깨비에 해당하는 요괴를 통해서. 요괴는 결국 우리들이 욕망의 결집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요괴들이 소설에 많이 등장하는데...


소설은 아주 짧다. 짧아서 읽기에 편하다. 그냥 별다른 생각없이 읽을 수도 있다. 환상적인 이야기 아닌가. 그럼에도 읽은 다음에는 마음 한 켠에서 어떤 의문이 일어난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할까?


그것은 바로 우리들이 지닌 욕망이 이렇게 발현될 수 있음을 소설을 통해 작가가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젊음에 대한 욕구, 돈에 대한 욕구, 아름다움에 대한 욕구, 건강에 대한 욕구 등등. 그렇다고 이런 욕구들을 다 충족시키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아니 이런 욕구, 욕망들이 다 실현되는 사회가 과연 행복한 사회일까?


어쩌면 그런 욕구들을 이용해서 자신의 편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소설집 제목이 된 '세상에서 가장 약한 요괴'를 보아도 그렇다. 이 요괴는 약하다. 누구에게 해를 끼치지도 않는다. 그는 사람을 먹을 뿐이다. 먹는다? 다른 말로 하면 다시 태어나게 한다고 할 수 있다.


젊은 상태로 사람을 돌려놓기 때문이다. 젊음에 대한 욕망. 그런 욕망때문에 사람들을 요괴를 보호하기 시작한다. 그렇다. 사람들의 욕망이 요괴를 세상에서 가장 약한 요괴에서 가장 강한 요괴로 바꾸어 놓는다. 


부작용이 발생하고 만 명 당 한 명이 죽어나가도, 오천 명 당 한 명이 죽어나가도, 또 천 명 당 한 명이 죽어나가도, 이렇게 점점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확률이 높아져도 사람들은 젊음에 대한 욕구를 버리지 못한다. 


욕망 앞에서 눈 멀어 버리는 사람들의 모습. 이 소설집에는 그런 사람들의 모습이 나온다. 그리고 편하게 읽히는 이 소설에서 우리는 무언가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풍자 개그를 보면서 세상을 다른 관점에서 보게 되듯이, 이 소설집을 통해서 감춰진, 또는 드러내지 못하는 우리들 욕망을 요괴를 통해 마주하게 되면서, 우리는 우리들 삶에 대해, 욕망에 대해 다른 관점에서 생각하게 된다.


다른 세상을 보여주는 일, 또는 잘 보이지 않는 세상을 보여주는 일, 소설가가 하는 일이고, 그것을 소설을 통해서 하게 되는데, 이 소설집은 그런 면에서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결코 허무맹랑한 소설이 아니고, 괴력난신에 해당하는 소설이 아니다.


우리 사회, 우리 욕망에 관한 여러 편의 풍자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도깨비를 통해서 옛날 사람들이 자신들의 욕망을 투영했듯이, 김동식은 요괴를 통해서 현대인들의 욕망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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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7-25 16: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 종교학이나 민속학 책인줄 알았는데 풍자소설이었군요^^
도꺠비 소재는 아이뿐 아니라 어른에게도 혹하게 하는 재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소개 감사드립니다

kinye91 2022-07-25 16:56   좋아요 0 | URL
김동식 소설은 아이는 아이대로, 어른은 어른대로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라고 생각해요.
 
성공한 사람 - 교유서가 소설
김종광 지음 / 교유서가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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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소설 하면 이문구가 떠오른다. 충청도 농촌을 배경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썼던 작가. 그런데 지금 농촌이라고 하는 곳이 있을까? 이문구가 소설로 쓴 농촌은 이미 해체되기 시작한 농촌이었다.


산업화라는 명목으로, 근대화라는 명목으로 우리나라 농촌은 농촌으로 남아서는 안 되었다. 농촌은 도시를 지탱해주는 먹을거리를 제공하는 곳, 그것도 값싼 외국산 농산물에 밀려 돈이 되는 몇몇 작물, 축산업 중심으로 재편되었고, 논농사를 지어도 수익이 남지 않는, 쌀값이 터무니없이 낮아진 상태로 수십 년을 지내와야 하는 곳으로 남았다.


이런 상황에서 농민들은 갈수록 줄었고, 소농이라는 개념은 전문서적에나 존재하는 말이 되었다. 기업농이 존재하기엔 농토가 적었고, 소농들이 다품종 소량생산을 하기엔 농사를 짓는 사람도 적었고, 먹고 살기도 힘들었다. 


그렇다고 돈이 되는, 소위 환금작물을 재배해도 때에 따라서 흥망이 갈리곤 했으니, 농촌은 농촌의 특징을 살린 채 존재하기는 힘들어졌다. 농사를 짓지 않으면 보상을 해준다는, 소위 농사짓지 말라는 정책이 실시되기도 했으니...


농촌소설이라는 말도 존재하기 힘든 시대가 되었다. 이문구가 소설로 썼던 농촌은 이제 과거의 농촌이다. 하지만 농촌이 아주 없어지지는 않았다. 휴대전화 없이는 살 수 있어도(적어도 목숨을 잃지는 않는다) 식량 없이는 살 수는 없다. 식량 안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없어져서는 안 될 곳이 농촌이지만, 여전히 농촌은 사라져가고 있다. 아이들 울음 소리를 듣지 못한 농촌이 많다고 하니 말이다. 농촌이라는 말로 시골을 대표했다면, 이젠 농촌이든, 어촌이든, 산촌이든 다 시골이라는 말로 통용할 수 있겠단 생각이 든다.


시골이다. 도시가 아닌 곳. 사람들이 떠나가는 곳. 돌아오는 사람보다 떠나는 사람이 많은 곳. 귀촌이라고 하지만, 소수일뿐이고, 대부분은 도시로, 도시로 나간다. 태어나는 사람보다 죽는 사람이 월등히 많은 곳. 그곳이 바로 시골이다. 


김종광은 바로 이런 시골을 배경으로, 시골사람들을 주인공으로 소설을 썼다. 그는 농촌소설이라고 하지 않고, 시골소설이라고 한다. (350쪽)


농촌이라는 말로 국한시키기보다는 농촌, 어촌, 산촌을 아우르는 말로 시골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리라. 그리고 도시 사람들에게 도시가 아닌 모든 곳은 다 시골이다. 


시골소설이란 표현이 적절하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시골소설에 11편의 소설이 실렸다. 읽다보면 등장인물들이 겹치곤 한다. 하긴 시골에 사람들이 많지도 않으니, 소설 속에서 이 인물들이 다양한 사건을 일으킬 수밖에 없으리라.


그럼에도 시골이라는 말에서 풍기는 퇴색적인 분위기는 나타나지 않는다. 물론 이 소설의 배경인 시골은 낙후되어 있다. 노인들만 득시글댄다. 노인들을 대상으로 보일러를 설치하면서, 제대로 수리도 하지 않는 모습도 나타나고, 종합병원이라고 있어도 노인들 건강을 세심하게 살피지 않고, 그냥 하루하루를 버티는 모습도 나타난다.


조류독감이다 구제역이다 하면 별다른 이유도 없이 가축들을 도살하라는 판에 박힌 정책도 나와 우리 사회를 풍자하고 있는 장면이 제법 있어 웃음을 유발하기도 한다.


시골소설에서 순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미소를 띨 수도 있지만, 이들의 신산한 삶, 그리고 조만간 사라질 삶들이 무겁게 다가오기도 한다. 


물론 전체적으로 이 소설집은 무겁지 않다. 무거운 분위기도 가볍게, 웃음을 유발하는 해학적인 장면이 많다. 이장 선거를 주요 사건으로 삼고 있는 '여성 이장 탄생기'를 보면 웃음이 나온다.


우리나라 정치 현장을 풍자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시골마을에서도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살아야 하는 까닭'에서는 시골 사람들을 모아놓고 하는 교육이 얼마나 형식적이고 가식적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정작 시골 사람들에게 필요한 교육은 하지도 못하고(할 수도 없다. 시골 사람들이 면사무소, 또는 군청, 시청에 근무하는 사람들을 교육해야 한다. 그들은 시골살이를 모르기 때문이다. 농사도 모르는 사람들이 공문에 의거해서 농사 교육을 한다? 우스운 꼴이다), 형식적인 교육으로 서류만 채우는 모습. 그런 형식에 갇힌 공무원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아마도 이 소설에 등장하는 어른들이 돌아가시면 시골도 사람이 살지 않는 곳으로, 자연으로 돌아가게 될 수도 있으리라. 살려고 오는 사람이 없으니... 기껏해야 별장을 짓고 가끔 쉬러 오는 곳이 될 수도 있으니.


그런에도 그렇게 되기까지 시골에 사는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서 산다. 그들은 하루라도 일을 하지 않으면 좀이 쑤셔서 견디지 못한다. 몸이 아파도 일을 한다. 그렇게 일을 하면서 서로 부대끼면서 살아간다.


그런 시골 사람들의 모습, 이 소설집에 잘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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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 주택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81
유은실 지음 / 비룡소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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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따스해지는 소설이다. 어려운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그 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주눅든 모습을 발견하기 보다는, 씩씩하게 그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모습을 만나게 된다.


어렵다고 인상쓰고 포기하고 더 자신을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보면 바라보는 사람도 힘든데, 밝고 힘차게 살아가는 사람을 보면 보는 사람도 힘을 얻게 된다.


소설은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을 비춰주면서 어둠 속에서 좌절해 가는 사람들을 등장시켜서 그런 환경을 고쳐야 한다는 의지와 행동을 유발할 수도 있지만, 어두운 면에서도 밝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여주면서, 그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 소설은 우리 사회에서 통념이라고 할 수 있는 여러 관점들을 다시 생각하게 해준다.


우선 정상가족이라는 말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소설 속 주인공인 수림은 남들과 다른 환경에서 자랐다. 부모에게서 떨어져 할아버지와 순례 씨(소설에서 순례 주택의 주인인 여성 이름이다. 할머니라고 불러야 하지만, 할머니보다는 순례 씨로 불리기를 원한다)의 보살핌으로 자라게 된다.


이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수림은 순례 주택을 자신의 집처럼 생각한다. 오히려 부모와 함께 살게된 아파트를 낯설어하면서. 


순례씨와 할아버지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이 재혼을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결국은 결혼이라는 틀로 묶이지 않는다. 그러면서 친구로, 동반자로 함께 살아간다. 같은 공간이 아니라 순례 주택이라는 같은 장소에서. 소설 속 수림이나 순례 씨를 통해 정상가족이라는 말에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된다.


주거 공간으로 사람들을 분리하는 일이 잘못이라는 점을 깨닫게 한다. 소설 속에서도 이 문제가 다뤄지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종종 붉어지는 문제, 아파트 정문을 폐쇄해서 다른 사람들이 드나들지 못하게 한다든지, 다른 거주지 아이들과 같은 학교에 배정되지 못하게 한다든지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니...


소설에서도 아파트 사람들 중에 특히 엄마가 주택 단지에 사는 사람들을 비하한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그것도 주인공인 수림의 엄마. 인터뷰에서도 그런 말을 했다가 도처에서 비난을 받은 엄마. 이렇게 주거 공간에 따른 갈등이 소설에 나오지만, 그것을 전면에 다루지는 않는다. 그냥 지나가듯이 수림의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다. 물론 엄마는 그 일로 인해 사람들의 비난을 받고 아파트 카페 운영진에서도 밀려나고 만다. 암암리에 구분을 해도 드러내놓고 구분을 하는 모습은 어디서도 인정받지 못한다.


이와 더불어 소설은 주거가 사람들이 풍요롭다는 증거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다. 주거 장소의 차이가 차별로 나타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소설에서는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보다 주택 단지에 사는 사람들이 더 실속있고 알차게 살고 있다는 점을 드러내면서 사는 곳만으로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됨을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마찬가지로 집을 투자의 대상, 돈벌이의 수단, 그리고 부를 과시하는 대상으로 여기는 풍조를 비판하고 있다. 순례 씨는 집세를 결코 비싸게 받지 않는다. 보증금이 있지만, 어려운 사람에게는 보증금조차 받지 않는다. 그렇지만 공동생활에서 지켜야 할 일들은 재계약의 조건이 된다. 돈보다는 공동체를 우선하는 모습. 옥상을 공동의 공간으로 만들어놓고, 누구나 자유롭게 쓸 수 있게 하는 순례 씨.


이런 모습을 보면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던 전세, 월세, 집값을 생각하게 된다. 과연 집이 무엇인가? 적절한 집값은 얼마인가 순례 씨를 통해 집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주거 장소의 차이에 따른 차별과 더불어 고학력 실업자 문제 (소설 속 박사는 시간 강사로 전전하고, 수림 아빠 역시 마찬가지다. 다만, 둘이 대응하는 방식은 다르다. 수림 아빠는 전임이 되기 위해 전념하고 다른 일은 전혀 하지 않는 전형적인 강단형 학자라면, 수림 주택에 사는 박사는 시간 강사 일을 하면서도 온갖 다른 일을 마다하지 않는 현실형 학자라고 할 수 있다)를 드러내고 있다.


참 심각한 주제인데, 순례 주택에 사는 박사의 삶을 통해서도 그들이 얼마나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이런 박사와 대조되어 나오는 인물이 순례 주택에 세들어 사는 미용실 주인의 아들이다.


공부는 못한다. 그래, 이 아이는 고학력 실업자가 될 가능성이 없다. 우선 고학력자가 되지 못할 테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될까? 이 아이에게는 확고한 목표가 있다. 미용사가 되는 일. 그만큼 손재주가 좋다. 그리고 자신도 그것을 알고 그쪽으로 나아가려 한다.


이런 아이에게 대학교육이 필요할까? 고학력이 필요할까? 아니다. 다른 일을 하지 못하는 고학력자보다는 자신의 앞가림을 할 수 있는 이런 아이가 세상에 더 필요하다. 


그러니 학교 성적이 나쁘다고 구박할 일이 아니다. 온갖 특목고를 만들어 (특목고라는 이름으로 어린 시절에 진로를 정하고, 그 쪽 방면으로 뛰어난 인재를 키우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지만, 과연 그런가? 우리나라 특목고는 좋은 대학을 가게 하는 특수한 목적을 지닌 고등학교의 줄임말 아니던가. 특목고 출신들이 어느 대학을 갔는지, 어떤 학과를 갔는지 살펴보라. 오죽했으면 서울영재고(예전 서울과학고)같은 학교에서 의대에 진학하면 학비를 다 반납하라고 하겠는가) 성적 우수자를 우대하는 정책을 펴고 있는 현실에서, 특성화고(어린 시절에 진로를 정하고, 그 쪽 방면으로 나아가는 학생을 키우겠다는 학교... 특목이 아니라 특성이다. 성적을 가지고 이미 차별을 하고 있다)에 진학하는, 또는 진학하겠다는 학생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지 소설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성적 문제는 수림과 언니 미림 사이에서도 서술되고 있다. 성적만이 우선이라는 가정이 어떤 모습인지를 미림과 미림을 대하는 가족들의 모습을 통해서 볼 수가 있다. 마찬가지로 가정에서 수림의 위치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눅들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가는 인물을 통해 소설은 밝은 분위기를 유지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으니, 소설을 통해서 대리 만족을 할 수밖에 없다.


그밖의 인물들 역시 나름 사연을 지니고 있고, 우리 사회의 한 면을 보여주고 있지만, 이들은 순례 주택에 살면서 서로를 인정하고 이해하고 도우며 살아가고 있다.


특히 순례 주택의 주인인 순례 씨는 불의한 돈을 참지 못하는, 자신의 재산을 불리는 목적으로 집을 이용하지 않고,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장소로 집을 생각하고 있으니... 그런 순례 씨의 모습을 통해서 집을 재산가치로만 여기는 사람들을 비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저런 사건들이 일어나고, 그 사건들을 수림의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지만, 소설은 우리 사회가 지닌 모습을 개선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과 사람이 부대끼면서 살아가다 보면 서로가 서로를 돕게 되고, 그때는 겉모습이 아니라 그 사람의 진면목을 알아가게 된다는 그런 소설.


한번 읽기 시작하면 끝을 보아야 할 정도로 몰입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소설 속에 나온 순례 씨의 좌우명이라 할 수 있는 말... 수림이가 가슴에 새기고 있는 말... 이 말이 이 소설을 대변하고 있다고 본다. 우리 역시 이 말을 명심하면 좋겠다.


어두우면 어두워서 밝음을 생각할 수 있어서 감사하고, 그 어둠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게 해줘서 감사하다고... 이때 감사는 현실에 만족하고, 현실에 주저앉으라는 소리가 아니다. 할 일이 있다는 점에 감사하라는 말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니 소설에 나오는 어둠들, 우리 사회에 있는 이런 어둠들, 가볍게 지나가지 않고 우리가 밝음으로 바꾸어야 함을 명심해야 한다.


순례 씨의 말은 다음과 같다.


"관광객은 요구하고, 순례자는 감사한다." (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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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황보름 지음 / 클레이하우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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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많이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읽었겠지. 이 책 제목만 보고 오해했었다. 아, 동네서점에 대한 이야기가 실린 책이구나. 소설이라는 생각은 한번도 해보지 않았다. 제목만 보고, 더 살펴보지 않은 성급함 때문이다. 빨리빨리를 거부하면서도 책을 판단하는데 그 놈의 빨리빨리가 잣대로 작용하지 않았나 반성해 본다.


요즘 동네책방에 대한 소개글들도 많아서 제목에 '어서 오세요'라는 말과 '휴남동 서점'이라는 말에서, 정말로 휴남동이라는 동네가 있고, 그 마을에 있는 책방에 얽힌 이야기겠구나 지레짐작하게 된 것.


그러다 책을 직접 손에 들고, 이를 책의 물성을 느낀다고 할 수 있겠는데, 표지를 살펴본 순간 어라 소설이었어?라는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아, 소설이었구나... 이런... 잘못 생각하고 있었네. 그렇다면 한번 읽어봐야겠네... 동네책방에 얽힌 이야기를 소설로 풀었구나, 어떻게 이야기가 전개될지 읽어봐야지 이런 마음에 읽기 시작.


읽으면서 이 소설의 내용을 떠올렸다. 소설 속 주인공은 자기 서점에 베스트셀러를 가져다 놓지 않겠다고 한다. 어쩌면 이 장면은 예전 텔레비전에서 방송했던 "책 책 책! 책을 읽읍시다"에 관한 일화가 떠올랐다. 책의 다양성... 그건 바로 마을책방들의 다양성과 통할텐데...


그 프로그램에서 선정된 책들은 베스트셀러가 됐다. 수십만 권에서 백만 권 이상까지 팔리곤 했는데, 권정생 선생의 책을 선정하고 싶다고 제작진이 출판사에게 물었을 때 출판사에서 선정되기를 거부했다고, 저자인 권정생 선생도 거부했다는 일화... 이유는 사람들이 직접 책방에 가서 책을 고르는 재미를 빼앗을 수 없다고.


그런데 내가 베스트셀러를 읽다니... 소설 주인공과 반대로 가고 있나? 하는 생각도 순간 했지만, 주인공도 말한다. '베스트셀러에 오른 그 책 자체의 문제는 아니었다'(357쪽)고. '한번 베스트셀러에 오르면 계속 베스트셀러로 남는 현상이 문제였다'(357쪽)고.


그렇다고 베스트셀러를 읽지 말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좀더 다양한 책들을 읽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다. 주인공의 말은. 이 말은 또 대형서점이나 인터넷서점만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과 통한다. 서점을 책으로 비유한다면, 대형서점 몇 곳과 인터넷서점 몇 곳은 베스트셀러에 해당할테니, 이들만으로는 책의 다양성이 사라질 가능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점점 사라져가는 동네책방들... 예전에는 대학가에는 작은 책방들이, 나름대로 주제가 있는 책방들이 있었고, 그 서점을 중심으로 학생들이 책을 사고 만나고 약속을 잡고, 토론하기도 했었다. 동네책방에서도 마찬가지였고... 어느 순간, 사라져버리는 동네책방들...


이 소설은 그러한 동네책방을 중심으로 모여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펼쳐간다. 마치 서점의 주류에서 밀려난 동네책방이듯이, 현대 사회의 삶에서 떨어져 나온 사람들이 서점에 모여든다. 휴남동 서점을 중심으로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보듬어준다. 


주인인 영주, 커피 아르바이트를 하는 민준, 동네 주민으로 서점에 관심을 가져준 민철 엄마(희주), 엄마에 의해 반강제로 서점에 들르게 된 민철, 강연으로 인연을 맺게 된 승우, 또 책벌레 상수, 커피 원두를 제공하는 지미, 비정규직의 팍팍한 삶을 살던 정서 등등이 휴남동 서점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마치 마을의 느티나무에 동네 사람들이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함께 살아가듯이 그렇게 휴남동 서점에도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삶에 대한 이야기들을 공유해간다.


그 삶이 화려하지는 않아도 또 돈을 많이 벌지는 않아도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갈 힘을 얻게 되는 동네책방, 그 책방이 바로 휴남동 서점이다.


가끔 채널을 돌리다 만나는 '동네 한바퀴'란 프로그램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이렇게 마을에서 사람들이 서점을 통해 만나고 이야기하는 과정이 결코 화려하지 않은 마을을 도는 그 프로그램과도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다.


무엇보다도 소설은 일에 치인, 또는 목표에 치인 현대인의 삶에서 한발짝 벗어나게 해주고 있다. 읽으면서 느티나무 그늘에 모여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듯이, 편안하게 소설을 읽어갈 수 있다.


따스한 내용... 지친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는 장소가 소설 속 휴남동 서점이었듯이, 이 소설은 현대를 팍팍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위안을 주는 마을 느티나무 같은 역할을 한다. 


베스트셀러라고 다 읽지 말라는 말은 아니다. 이 소설 속에는 다른 작품들이 소개되고 있다. 아마도 이 소설을 재미있게 또는 감명깊게 읽은 사람은 소설 속 소설을 찾아 읽게 될테니, 이 소설은 책읽기의 다양성에 이바지 하는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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