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백 - 제1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표백'이란 제목에는 강제라는 말이 들어 있다. 희지 않은 존재를 희게 만드는 일이 바로 표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표백에는 자기 뜻에 반해 변화된다는 의미를 포함되고 있다. 그렇다면 희게 되는 존재는 누구일까? 세대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기성세대는 아니다. 이미 기성세대는 희게 되었든, 그렇지 않든 제 색깔을 지니고 또는 잃고 살기 때문이다. 이는 제 색깔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제 색깔에 대해서 고민하는 세대는 기성세대를 잇는 세대다. 젊은세대다. 젊은세대는 기성세대의 뒤를 이어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자기 색깔을 지니고... 그런데 이미 사회에는 기성세대가 자리잡고 있다. 자리를 비켜주지 않으면서 젊은세대에게 자신들의 뒤를 이으라고 한다. 어떻게?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세대갈등이라는 말도 이래서 나온다. 젊은세대가 기성세대를 잇기 위해서는 기성세대의 틀에 맞추어야 한다. 자기만의 틀을 가지고 사회에 진출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러니 그들의 성공사례가 언론에 오르내리는 것 아니겠는가. 대다수가 그렇다면 굳이 언론에서 다루지 않는다. 희소한, 뉴스 거리가 될 만한 일이어야 다룬다. 


이렇게 젊은세대가 사회에 진출하는 길이 어려워졌다. 자기만의 색깔을 가지고서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사회에 진출할 수 있을까? 기성세대가 원하는 색깔에 맞춰야 한다. 자기 색깔이 아닌 사회가 원하는 색깔.


그런 색깔이 무엇일까? 소설은 흰색이라고 한다. 제목이 표백이다. 하얗게 만드는 일... 하얗지 않는 존재를 인위적으로 하얗게 만드는 일이 바로 표백이다. 이 제목에 따르면 젊은세대는 결국 기성세대의 뜻에 맞춰 자신의 색깔을 바꿔야 한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것을 거부하면 어떻게 될까? 사회에 진출할 수 있을까? 진출하더라도 과연 제 색깔을 유지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또 그들 후대에게도 자신만의 색깔을 유지하면서 살아가라고 할 수 있을까?


장강명 소설이 대부분 그렇듯이 이 소설도 빠른 속도로 읽힌다. 그가 쓴 소설들은 망설임이 없다. 결론을 향해서 치닫기 때문에 순식간에 한 권을 다 읽어내게 된다. 그런 다음 생각을 하게 된다. 작가가 무엇을 말하려 했을까?


왜 제목이 표백일까? 이미 표백된 세상에 나온 젊은세대들이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우리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런 현실 속에서도 자신만의 색깔을 지니고 살아야 한다고 하고 있나?


소설에서는 세연을 중심으로 자살하는 청년들의 모습, 그런 그들을 지켜보는 서술자의 모습이 표현되고 있다. 그렇다. 자기 색깔을 잃은 젊은이들이 기성세대에 동화되지 않고 거기서 벗어나려 죽음을 택하는 모습들...


읽으면서 빛의 삼원색을 합치면 흰색이 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각자 자신의 색깔을 지니고 살아가야겠지만, 사회 생활을 하다보면 자신의 색깔을 잃고 다른 색깔들과 합쳐질 수밖에 없다. 우린 빛과 같은 존재이기는 하지만, 사회에서는 제 빛을 내지 못하고 결국 흰색으로 수렴되고 만다.


표백된 세상에서 살 수밖에 없다. 자연스레 나를 잃어간다고 할 수 있는데, 반대로 색의 삼원색을 합치면 검은색이 된다. 색, 빛을 자연이라고 신이라고 하고, 색을 인위적, 사람이라고 한다면, 자연과 신은 흰색이 되고, 이는 우리가 넘볼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즉, 나를 잃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색의 삼원색을 합친다면, 이는 인간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습이라고 한다면, 결국 인간의 세계는 검정의 세계일 수밖에 없다. 인간들이 모여서 만들어가는 세계가 암담한 세상이라는 뜻일까? 


흰색과 검정색의 대비, 신과 인간의 대비... 기성세대와 젊은세대의 대비. 흑과백. 세상은 흑백으로 이루어져 있을까? 아니다. 이는 개성을 인정하지 않는, 각자의 삶을 존중하지 않는 사회에서나 가능하다. 


신의 세계인 종교가 지배적인 사회는 흰색의 세계다. 이 세계에서는 다른 색깔을 용인하지 않는다. 빛도 삼원색이 있는데,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다 합쳐진 흰색만 인정한다. 이런 세상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이미 기성세대가 짜놓은 세계에서 더이상의 변화를 할 수 없다고 느낄 때 젊은세대가 만나는 일은 바로 이런 흰색의 세계다. 


그렇다면 그들은 이 흰색의 세계에 대비해 자신들의 세계를 만들려 한다. 자신의 세계를 만들 때, 서로 다른 삶들을 인정해주고, 그 삶들이 하나하나 소중한 삶이라고 여겼으면 좋으련만, 여기서 다른 사람들의 삶에 개입하려고 한다. 그런 다 다른 색들을 인간세상에서도 합치려고 한다. 그럴 대 나오는 색깔은 검정색이다. 죽음의 색이다.


젊은세대가 자살로 가는 경우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들은 흰색의 세계도 거부하지만, 자신들이 지니고 있는 색깔을 인지하고 인정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각자 가지고 있는 색들을 합쳐 죽음의 검정색을 만들어낸다. 그것만이 최선이라고 하는듯이.


소설은 여기서 검정색이 젊은세대가 택할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서술자가 거리를 두고 자살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들 삶은 각자의 색깔이 있는데, 그 색깔들을 하나로 합치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보여주려 하고 있다.


흰색도 검정색도, 자신을 잃고 다른 존재에게 자신을 내맡겨버리는 일이므로, 자신의 색깔을 지니고 살아가야 함을, 그 삶이 비록 힘들고 비루하게 느껴지더라도 소중한 자신만의 색깔임을, 표백을 거부하고 또 검정이 되기를 거부하는 삶임을 생각하게 한다.


그렇다. 이 소설은 기성세대에 대항하는 젊은세대의 좌절을 보여주고 있지만, 거기서 머물러 기성세대에 편입되거나 또는 자신의 색깔을 잃고 검정이 되는 삶이 아니라, 그 속에서도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야 함을 생각하게 하고 있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으므로... 그렇게, 우리 삶은 자기들의 색깔을 잃지 말아야 함을, 결코 표백되지 않아야 하고, 또 남들과 합쳐져 검정이 되지도 말아야 함을 잘 보여주고 있는 소설이다.


재미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아픈 곳들을 건드려서 우리로 하여금 이 사회 속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하는 소설, 지금까지 읽었던 장강명의 소설은 그랬다. 남은 작품들도 찾아 읽어봐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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