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토피아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이 파괴되고, 사람들은 서로를 죽이기 시작한다. 미국에서는 노예제가 형태만 바꿔서 다시 창궐하고, 마약에 취한 사람들은 마을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죽인다. 광기에 휩싸인 세상이다.
사람이 사람을 믿을 수 없고, 자신이 살던 마을에서도 살아갈 수가 없게 된다. 부자 마을들은 중무장하고, 경비원을 고용해 나름대로 안전을 도모하지만, 그보다 못한 지역에서는 장벽을 세워도 약탈자들에게 습격을 당하게 된다.
극한으로 몰린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는 이제 사람은 함께 해야 할 존재가 아니라 자신을 위협하는 존재일 뿐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을 죽여야만 하는 현실.
최근에 유행한 좀비 영화들과 비슷하다. 함께 지냈던 사람들이 좀비가 된다. 왜 좀비가 될까? 그들이 나쁜 행동을 했기 때문에? 나쁜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징벌로 좀비로 변하나? 아니다. 좀비로 변하는데 그 사람이 살아온 행적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도, 경제적, 정치적, 도덕적, 신체적, 성별, 연령 구분이 없다. 그냥 좀비에게 물리면 좀비가 된다.
그리고 좀비는 조금 전까지 함께 했던 가족이라도 죽여야 하는 존재가 된다. 안 그러면 나도 좀비가 되니까. 따라서 좀비 영화는 디스토피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인과응보라는 말이 통하지 않는... 디스토피아에서 인과응보가 존재할까? 인과응보가 통하지 않기 때문에 디스토피아가 된다.
인간이 살아가는 지구를 디스토피아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 그 많은 종교가 창시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종교가 아니더라도 철학이든, 윤리든, 법이든 인간은 디스토피아에서 살지 않기 위해 서로를 제약할 수 있는, 또는 권장할 수 있는 사상, 문화, 제도를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 사상, 문화, 제도들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혼란이 시작된다. 혼란은 이 소설에서 불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마을을 불태우고, 산을 불태우고, 사람들 이성을 불태워 약탈과 살육으로 나아가고 있듯이, 사람들을 디스토피아로 몰아간다.
혼란 속에서 중심을 잡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든다. 홉스가 말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벌어진다. 뿌리를 잃은 사람들... 정착하지 못하는 사람들. 모두가 디아스포라가 된다. 아주 부유하여 권력을 쥐고, 무력을 사용할 수 있는 몇몇을 제외하고는.
이런 상황에서 자본가는 정치가와 결탁해 노동자들을 노예로 전락시킨다. 그들은 노예와 같은 상황에 처해 노동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은 다른 부랑자들에게서 자신들을 지킬 수 없기에 여기저기로 살기 위해서 떠날 수밖에 없다.
공동체 해체... 살아남는 방법은? 마치 신의 저주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신이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게 했듯이 사람들도 살아남을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 방법, 그것이 바로 씨앗이다. 성경에서 빌려온 이 씨앗 개념은 주인공이 살아남기 위해 씨앗을 보존하고, 소설의 끝에 가서 씨앗을 심기로 결정하면서 디스토피아에서도 인간은 살아남아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비록 실패를 예견하고 있더라도 시도해 보는 일. 최후까지 씨앗을 포기하지 않고, 어떤 씨앗이든 싹을 틔우리라 믿고 행동하는 일.
인간은 미래를 알 수는 없다. 다만 예측은 할 수 있고, 그 예측을 실현하기 위해 행동을 할 수 있다. 미래를 위한 행동. 이것이 바로 씨앗을 뿌리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혼자가 아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고통에 무심할 수가 없다. 다른 사람의 고통이 자신의 고통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그 고통을 해소해야 한다. 이 소설에서는 초공감증후군이라는 말로 나오는데, 불교에서 말하는 네가 아프니 나도 아프다는 말과 통한다.
이런 공감능력을 지니고 있는 주인공 로런... 마을이 파괴되었을 때 주인공은 로런은 홀로 떠나려던 계획에서 두 사람과 함께 떠난다. 셋이서 떠나는 삶을 찾는 여정. 여기에 한 사람, 한 사람 계속 일행이 추가된다. 사연이 있는 사람들, 성별도 인종도, 살아온 배경도 다른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고 함께 하면서, 이들이 정착할 곳을 찾아 가는 여정이 펼쳐진다. 다른 사람의 고통과 쾌락을 함께 느낄 수 있어서 함께 한다는 사실이 부담되고 위험하기도 하지만, 로런은 가면서 이렇게 계속 사람들을 합류시킨다. 이것이 바로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자세다.
그 과정에서 온갖 참상을 목격하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는다. 로런이 말하는 '지구종'을 위해. 이때 지구종은 지구에 뿌리는 씨앗이라는 의미다. 지구가 망해가고 있지만, 인류가 멸망으로 치닫고 있지만, 그럼에도 씨앗을 뿌리는 사람이 된다는, 소설에서 로런은 지구에 국한하지 않고 우주로 자신의 사고를 확장한다.
인류는 지구에서 우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지금 당장 지구에서 살아가기도 힘듦에도 우주를 생각하는 로런. 그래서 그는 자신의 종교를 '지구종'이라고 한다. 물론 이때 종은 씨앗 '종'자라고 할 수 있지만, 새로운 종교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자신들이 성공한다는 보장을 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이 자리에서 살아가겠다고 결심하고 행동하는 사람들... 소설을 읽으면 결말 부분에서 그들이 심은 씨앗들이 언젠가는 싹을 틔울 수 있겠다는 희망을 느끼게 된다.
소설 마지막에 실린 성경 구절, '<누가복음> 8장 5-8절'. 인용하지 않겠지만, 찾아보면 많이 본 구절일 것이다. 그리고 이 구절을 통해 이 소설은 디스토피아에 유토피아가 내재되어 있음을 우리로 하여금 발견하게 한다.
유토피아는 디스토피아에서 나올 수밖에 없음을... 그런 씨앗 뿌리는 사람들로 인해 우리가 유토피아의 꿈을 꿀 수 있음을.
옥타비아 버틀러의 [킨]에 이어서 읽은 두 번째 소설... 앞 소설과 마찬가지로 무척 흥미롭게, 한번에 죽 읽히는 소설이다.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