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9
제임스 M. 케인 지음, 이만식 옮김 / 민음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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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하게 이 소설을 소개할 필요는 없다. 세계문학전집에 속한다는 이유만으로 명작이라고 할 필요도 없다. 이 소설은 그야말로 통속소설이다. 옛날 말로 하면 통속잡지에나 실려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 그런 소설. 한마디로 싸구려 소설.

 

이렇게 혹평을 하면? 글쎄... 읽히지도 않는 명작과 잘 읽히는 통속소설, 어느 것이 더 좋을까? 작가에게, 아님 독자에게?

 

명작과 통속을 어떻게 구분하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 통속이라는 말이 너무 저속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니, 이를 대중이라는 말로 바꾸자고 할 수 있다. 이젠 통속소설이 아니라 대중소설이다. 많은 사람들이 읽는 소설이다.

 

많은 사람들이 읽다보니 자꾸 사람들 입에 회자된다. 회자되면서 작품에 대해서 이런 저런 말들을 하게 된다. 이 말들이 살을 붙여 작품이 점점 심오해진다. 대중소설이 우리 삶에 어떤 의미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도 계속 읽힌다. 명작을 쓰는 작가라는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준다. 이 소설에 영향을 받았다는 작가도 나온다. 이제는 대중소설을 넘어서기 시작한다. 명작의 반열에 오른다.

 

세계문학전집에 당당하게 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니 사람들이 아, 좋은 소설이겠구나 하고 또 읽는다. 읽기의 선순환이 일어난다. 그렇게 소설은 통속, 대중, 명작, 고전을 떠나 자기 자리를 확고하게 만든다.

 

이 소설이 그렇다. 읽으면서 어떤 깊은 의미를 찾으려 할 필요가 없다. 신문 사건사고란에서 볼 수 있는 일이 소설에서 펼쳐지기 때문이다.

 

부랑자가 어느 곳에서 어떤 여인을 만난다. 그 남편이 권하는 대로 그곳에 머무르고, 그 여인과 밀회를 즐긴다. 밀회를 즐기다 보니 남편이 거슬린다. 죽여버려야 한다. 한번에 성공하지 못한다. 이들은 어설프기 때문이다. 이 어설픔이 남들 눈에 다 보이는데, 자기들은 진지하다. 두번째 성공한다. 그리고 이들은 함께 산다.

 

함께 살지만 부랑자는 방랑벽이 있다. 떠나고 싶어한다. 하지만 여자는 떠나고 싶어하지 않는다. 살인에 공모한 두 사람, 비밀을 공유하는 두 사람이 어긋나기 시작한다. 어긋나지만 이들은 서로를 떠나지 않는다. 이것이 사랑으로 묶여 있든, 아니면 배신에 대한 두려움으로 묶여 있든.

 

결국 우연이든 의도이든 부랑자는 여자를 죽게 만든다. 자동차 사고다. 그리고 그는 이전 범행까지 밝혀져 감옥에 있다. 감옥에서 교수형을 받을지 집행유예를 받을지, 감면될지 알 수가 없다. 알 수가 없는 상태에서 회고록을 쓴다. 이것이 바로 이 소설이다.

 

많이 들어본 줄거리 아닌가. 그런데 제목이 내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소설 내용에는 우체부(포스트맨을 우편배달부라 번역할 수 있다)가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해설을 읽어보면 제목을 붙이기 위해 작가와 출판사가 여러 고민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 두번 벨을 울리거나 문을 두드리는 우편배달부를 떠올리고, 이것을 제목으로 삼았다고 한다. 두번 벨을 울린다. 여기에 착안을 하자. 소설에서 사건은 두 번 일어난다.

 

우선 그리스인 남편을 살해하는 행동이 두 번 일어난다. 그리고 부랑자인 '나' 역시 두 여자를 만난다. 또 검사에게 '나'가 여자를 배신하고, 여자 또한 '나'를 배신한다. '나'는 여자를 두 번 떠났다가 돌아온다. 같은 검사 앞에 두 번 서게 된다. 보험사가 두 번 등장한다. 경찰도 역시 두 번 등장한다.

 

두 번... 비슷한 일이 반복되는 것, 그것도 안 좋은 쪽으로 두 번 하다보면 결국 파멸로 향하게 된다. '나'가 감옥에서 교수형을 기다리고 있듯이.  두 번째에는 파멸이 기다리고 있다. 이렇게 소설은 사건의 완결을 향해 두 번 비슷한 사건을 등장시킨다.

 

부랑자인 프랭크와 그를 사랑했던 코라. 이들은 사랑이라고 생각했지만, 온전히 서로에게 서로를 내어주는 사랑이 아니다. 여자는 머무르려 하고, 남자는 떠나려 한다. 여기에 살인이 끼어들게 되고... 처음 살인을 저지르려 할 때는 고양이가 등장하더니, 여자를 죽게 만들 때는 고양이과인 '퓨마'가 등장한다.

 

두 번, 두 번은 소설을 비극으로 이끌어간다. 치정살인극이라고 할 수도 있는 내용에 그래도 힘을 주는 것은 이런 제목에 따른 읽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냥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작품...영화로 만들어졌을 정도로 빠른 사건 전개, 인물들의 단순한 성격 등... 이것이면 된다. 더 이상 무엇을 바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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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3 09: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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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3 10: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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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7
소포클레스 지음, 강대진 옮김 / 민음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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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은 내용을 다 아는 듯해서 결국 제대로 읽지 않는 작품들을 말한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이디푸스 콤플렉스', 결국 아들이 아버지를 경쟁자로 생각하고 어머니를 사랑하는 정신 문제라는 말, 외디푸스 콤플렉스라고도 하는데...

 

그렇게 내용을 알지만 정확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읽지는 못했던 작품.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짤막한 내용으로 알고 있던지, 아니면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지식으로 아는 체 했던 작품. 소포클레스의 비극이라는 것은 지식으로만 존재했는데...

 

그리스로마 신화를 읽는 참에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을 비롯한 그의 비극 작품들을 함께 읽기로 했다. 그리스로마 신화를 좀더 깊이 있게 알기 위해서다.

 

이 책에는 '오이디푸스왕, 안티고네, 아이아스, 트라키스 여인들' 이렇게 네 편이 실려 있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은 사람이라면 약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익숙한 내용이라서 쉽게 읽을 수 있다.

 

내용 중심이 아니라 표현 중심으로, 그리고 인간이란 무엇인가, 도대체 인간의 운명은 정해진 것인가, 그 운명을 거스를 수는 없는 것인가. 거대한 운명 앞에서 파멸해 가는 사람들의 모습, 그것이 바로 비극인 것인데...

 

쿤데라가 쓴 작품 '농담'이 생각나기도 했다. 쿤데라는 이 작품에서 주인공으로 하여금 오이디푸스를 빌려 당시 공산주의 정권을 비판하고 있으니 말이다.

 

자기 잘못이 아니라도 결과가 잘못되었다면, 실수라고 하더라도 잘못된 결과를 유발한다면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

 

오이디푸스는 이 점에 대해서 우리에게 전해주는 것이 많다. 오이디푸스, 그는 평생을 신실하게 살려고 했다. 또 많은 사람들을 고난에서 구해주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는 운명 앞에 무력했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리라는 신탁. 그는 그 신탁에서 벗어나고자 했으나 그 행동이 신탁이 실현되게 한다.

 

그래,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 나는 매 순간 최선을 다해서 옳은 길을 갔을 뿐이다. 그런데 내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고통을 초래했다는 책임. 그 책임을 피해가지 않으련다. 오이디푸스는 그래서 장대한 비극이다.

 

인간성을 극한으로 몰아가는 비극이다. 이런 모습은 '안티고네'에서도 나타난다. 오이디푸스의 딸인 안티고네. 왕이 시체를 장례지내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지만, 그것은 천륜에 어긋난다는 생각으로 오빠의 시신을 장례치러주고 죽음에 이르게 되는 사람.

 

천륜과 인륜... 인간이 만든 법을 어겼을 때 죽음에 이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신이 내린 윤리를 어길 수 없다는, 형제를 그냥 땅에 내버려둘 수 없다는 안티고네의 마음과 행동.

 

이 장면은 '아이아스'에서도 나온다. 트로이 전쟁에서 아킬레우스의 죽음 이후 그의 무구를 놓고 오뒷세우스와 경쟁을 하지만 결국 오뒷세우스에게 무구를 넘겨주게 되는 아이아스. 아킬레우스 다음으로 그리스 군에서 가장 용맹한 장군이지만, 그는 아킬레우스의 무구를 받지 못하자 원한에 차 살인을 저지르려 한다.

 

그런 죄 때문에 자살한 그의 시체를 아가멤논과 메넬라오스가 장례를 치르지 못하게 한다. 그리스에서 가장 큰 형벌은 시체를 묻지 못하게 하는 것. 그렇다. 신체를 온전히 땅에 묻어 하데스에게 가도록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 그것은 가장 큰 형벌이기도 하다.

 

안티고네나 또 아이아스에서 그 동생인 테우크로스에게는 이런 형벌은 타당하지 않은 명령이다. 그러니 그들은 목숨을 걸고 시체를 매장하려 한다. 가만 생각해 보면 헥토르의 죽음도 그렇다. 아킬레우스는 헥토리를 전차에 매달고서 그의 시체를 훼손한다. 그때 아버지 프리아모스가 찾아가 시체를 돌려달라고 애원하는데...

 

그리스 인들의 사고 방식에서 시체를 매장하는 것, 훼손하지 않고 장례를 치르는 것은 인간의 최후에 대한 기본적인 윤리다. 그런 윤리를 행하지 못하게 하는 것, 인간의 법. 그 법에 맞서 천상의 윤리를 주장하는 인간. 다행히 테우크로스는 오뒷세우스의 도움으로 아이아스의 장례를 치를 수 있게 되지만...

 

죽음도 불사하면서 신의 윤리를 실행하려는 인간의 모습, 실수라도 끝까지 책임지려는 인간의 모습, 비극이 보여주는 인물들. 책임을 요리조리 피해가려는 인간들이 득시글한 지금... 비극은 그런 인간들이 인간의 법에도 충실하지 못한, 인간성을 지니지 않은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 부분, 사랑으로 인해 비극으로 끝나는 데이아네이라와 헤라클레스의 사랑. 인간은 맹목일 수밖에 없다. 눈이 먼다. 앞뒤를 잘 살펴야 하는데, 비극은 행동을 한 다음에 뉘우침이 따른다는 것이다.

 

행동을 먼저 해놓고, 아차 하는 후회가 뒤따르니, 이것이 바로 인간의 모습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후회를 하면서 살아가는가.

 

비록 의도한 잘못보다 실수로 인한 잘못이 용서를 받기는 쉽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실수를 끝까지 책임지는 자세를 지니는 인간성, 죽음까지도 받아들이는 그런 인간성의 극한. 그것이 바로 비극에서 나오는 인물들의 모습이다.

 

그래, 인간성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인간의 모습, 그것이 바로 지금까지 우리를 인간답게 만들어준 요소이지 않을까 한다. 비극이 그 점을 보여주면서 우리에게 우리 삶에 책임을 지라고, 그렇게 말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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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1 11: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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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1 12: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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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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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먼저 다가온 밀란 쿤데라의 첫작품이라고 한다. 소설 끝에 '1965년 12월 5일에 마침'이라는 글이 있다.

 

1965년이면 프라하의 봄이 일어나기 3년 전이다. 그만큼 공산주의가 많이 희석되던 시대라는 얘기다.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서서히 변해가던 때, 두 시대에 걸쳐 있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소설에 나온다.

 

'루드빅, 헬레나, 야로슬로브, 코스트카'가 각 장의 제목으로 나오는데, 이들이 '나'라는 관점을 취해 자기 입장에서 소설을 이끌어간다.

 

이 네 사람이 모두 한데 얽혀 있게 되는데, 읽어갈수록 이들의 관계가 흥미롭게 전개된다. 그럼에도 전체적인 주인공은 루드빅이라고 할 수 있다.

 

열렬한 공산당원이었지만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지녔다고 평가받던 루드빅은 여자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 농담 - 그는 농담이라고 하지만 남들은 절대 농담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 세상에 스탈린이 정권을 잡고 있던 그 시대에 트로츠키 만세를 글로 썼으니 -으로 인해 전락하게 된다.

 

농담이 한 사람의 운명을 바꿔놓은 것인데, 그는 그 농담으로 인해 증오심을 품게 된다. 바로 자신을 심판한 제마넥에 대한 증오, 그 증오를 덮을 수 있었던 루이체와의 사랑, 그러나 그는 자기 처지에서 루이체를 사랑한 것이지 루이체 처지에서 사랑한 것은 아니었음을 그 당시에는 알지 못한다. 결국 루이체가 떠나고, 그 이유를 나중에 코스트카에게서 듣게 된다.

 

그만큼 젊은 시절 그들은 모두 가면을 쓰고 그 가면에 맞는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가면, 다른 사람이 기대하는 자신의 모습이라고 해도 좋으리라.

 

사회주의에서 -또는 공산주의라고 해도 좋으리라 - 원하는 인간상을 자신의 모습에 실현시키기 위해 사는 삶, 그것이 밖에서 또 멀리서 보면 참으로 우스워보이는 마치 농담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당사자에게는 농담이 아닌 치열한 삶일 수밖에 없음을 루드빅이 겪는 경험을 통해 보여준다.

 

그런 루드빅의 경험과 같이 야로슬로브가 하는 일, 민속음악을 계승해 발전시켜 나가는 것 역시 자신들에게는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되지만 젊은 세대에게는 이미 지나간 구시대의 유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소설은 야로슬로브의 아들인 블라디미르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젊은이들이 현대적인 것에 열광하는 것 역시 가면 속의 삶일 수 있다는 것, 무엇이 가면을 벗어던진 삶인지는 결국 모른다는 것.

 

이것이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말을 곧이곧대로 해석하는 것도 위험하지만 모든 것을 농담으로 처리하는 것도 역시 위험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경직된 사회에서는 농담이 통할 리가 없으므로, 이 소설은 당시 공산주의 사회였던 체코의 모습을 비판한다고도 할 수 있다.

 

사람들은 가면 뒤 자신의 모습을 찾고자 한다. 진실한 자신의 모습, 그렇지만 과연 가면 뒤에 자신의 얼굴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루드빅도, 야로슬로브도 그리고 헬레나도 마찬가지다.

 

헬레나, 아마도 평생을 가면 속에서 살아야 할 인물이었는지도 모른다. 제마넥에게 반해 결혼했고 확고한 공산주의 신념을 지니고 있는 여자. 제마넥이 시대의 변화에 영합하는 것을 보면서 실망하고 자기 신념대로 살아가려 하지만, 제마넥에게 복수하려고 자신에게 접근한 루드빅에게 마음을 주고 결국 욕망을 받아들이게 되는 여자.

 

루드빅은 복수를 위해 헬레나를 이용하지만 결국 자신이 한 일은 환영에 불과했다고 깨닫게 된다. 마치 야로슬로브가 평생을 추구했던 민속음악이 사그라져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듯이.

 

결국 루드빅이 농담으로 편지에 쓴 글로 인해 이들은 모두 하나로 엮이게 된다. 엮이게 되면서 체코의 당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러면서 과연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게 해준다. 어떤 사회가 우리가 사람답게 - 이 사랍답게란 말, 너무도 어려운 말이다. 답이 없다- 살 수 있는 사회인지 생각하게 해준다.

 

모두가 하나로 흘러가는 사회는 분명 아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농담이 통할 리가 없다. 농담이 통하지 않는다는 얘기는 웃음이 사라진 사회라는 것이니 그런 사회는 꽉 막힌 사회다.

 

반대로 농담만 난무하는 사회도 분명 아니다. 그런 사회에서는 진실이 없다. 서로가 서로를 가볍게만 대할 뿐이다. 서로 스치고 지나가는 관계.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 농담이 통하는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 아닌가. 사람 사이에서 농담이 통한다는 얘기는 서로 소통이 된다는 얘기다. 소통이 되지 않는 관계에서 농담은 치명적인 위험을 일으키게 된다.

 

바로 루드빅이 모든 것을 진지하게만 받아들이던 첫 여자 친구 마르케타에게 농담을 편지 내용으로 써 전락하게 되듯이.

 

그런데 읽으면서 묘한 생각이 떠올라 사라지지 않았는데, 어쩌면 쿤데라는 마르크스가 주장한 '공산주의 사회'를 농담으로 생각한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 그래서 마르크스의 그 농담이 전세계를 뒤흔들어 놓았다 사라졌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 치명적 농담이 세계사적 사건이 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루드빅을 통해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

 

그건 아닐 것이다. 마르크스의 주장을 농담이라고 하기보다는 그의 말을 교조적으로 그대로만 따르려는 사람들이 다시 마르크스의 말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 농담일 거라고 말하려 하지 않았을까.

 

전체의 흐름 속에서도 개별적인 흐름은 존재하니, 그런 개별적 흐름을 존중하지 않고서는 전체 흐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 소설에서 그 점을 이야기하고 싶었겠지.

 

그래서 불교에서 말하는 '화두'가 떠올랐고. 화두 중에 부처를 욕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얼마나 불손한가. 그러나 이런 말들을 불교를 모독하는 말이 아니라 불교를 더욱 풍성하게 하는 말들로 받아들이고, '벽암록'이니 '무문관'이니 하는 책으로 엮어낸 것이 아니겠는가.

 

'부처가 무엇입니끼?' 라는 질문에 '똥막대기'라고 대답해도 용납이 되는 종교. 그것이 직설적인 욕이 아니라 돌려서 말하는 농담, 즉 말 뒤에 숨어 있는 의미를 찾으라는 권고로 받아들이라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이 바로 소통이고, 농담이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리라.

 

그러므로 농담으로 인해 한 인생이 확 바뀌는 사회는 사람들이 살기 힘든 사회다. 소통이 안 되는 사회다. 그렇다고 소통이 안 되는데, 모든 것을 농담이었어라고 눙치는 사회는 더욱 아니라고 생각한다.

 

당시 사회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는 말을 한 루드빅은 아주 사적인 편지에서, 그것도 자신의 여자친구에게만 보내는 편지에서 농담을 한 것이다. 사적인 것을 공적인 것으로 바꾸어 처벌하는 사회는 문제지만, 반대로 공적인 자리에서 한 말을 농담이었다고,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한 말을 농담이었다고 눙치는 사회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

 

그것은 농담이 아니라 공격이고 자신을 위장하는 행위에 불과하다. 이 점은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인물들이 얽히고설킨 관계, 각자 '나'로 등장해 자기 이야기를 하면서 그 이야기들이 날줄과 씨줄이 되어 잘 엮여 한 편의 소설을 이루고 있다. 쿤데라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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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겔 스트리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2
V.S. 나이폴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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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배경은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고 나서 근대화를 이루는 시대와 같다. 2차대전이 끝난 직후 어린시절에 경험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으니 말이다.

 

트리니나드 토바고... 영국의 식민지였다고 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원주민이나 아프리카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백인들에게 지배를 당하고 있는 나라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나라에서도 빈민가에 해당하는 미겔 스트리트... 여기에 사는 사람들 이야기 모음이 바로 이 소설이다.

 

우리나라 소설에서 표현된 빈민가 사람들의 생활이 그렇듯이 미겔 스트리트에 사는 사람들 역시 그 도시에 푹 절어 살고 있다.

 

도무지 전망이 없는, 희망이 없는 그런 나날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에게서 어떤 윤리를 바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그날그날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인데, 기가 막히게도 도덕하고는 거리가 먼, 또 그들 스스로 자신들을 무시하는 생각과 행동을 하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함께 살아간다.

 

불우한 상황이고, 서로 으르렁거리기도 하지만, 또한 폭력이 난무하는 동네이긴 하지만 이들은 서로 어울려 살아간다. 어찌하겠는가. 그렇게 함께 살아가지 않으면...

 

소설에 등장하는 열여섯 명의 인물들(소설의 서술자를 제외하고, 각 인물은 하나의 장을 차지하고 있다)은 각자의 개성으로 살아간다. 이들 중에서 죽게 되는 사람도 있고, 동네를 떠난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이 동네에서 살아간다.

 

그냥 그렇게, 별다른 희망 없이. 아마도 이 소설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이 해트일 것이다. 해트는 처음부터 등장해 마지막까지 등장한다.

 

소설의 서술자인 내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마지막 장 바로 전이 바로 '해트'에 관한 장인 것을 보면, 그가 미겔 스트리트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이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고, 도박을 좋아하는 그, 여자를 멀리했던 그가 여자에게 배신당하고 결국 감옥에 가는 과정이 서술되어 있고, 해트가 감옥에 가게 되는 순간, 소설의 서술자인 나는 자신이 성장했음을 깨닫게 된다.

 

이제 서술자는 아이의 눈으로 동네 사람들을 바라보던 것에서 어른의 눈으로 동네 사람들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그것은 전망 없는 이 동네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 동네에 계속 머무른다면 난폭해지고 결국 알콜 중독이나 여자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게 됨을...

 

서술자의 어머니는 이 동네를 떠나라고 한다. 떠날 수 있는 길, 그것은 바로 유학이다. 개천에서 용 나듯이 그곳을 떠나야만 하는 것.

 

참으로 슬픈 것은 개천을 떠난 용은 결코 개천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 개천은 그에게 생각하기도 싫은 곳이라는 점.

 

이 미겔 스트리트라는 소설이 나이폴의 자전적인 소설이라면, 그가 얼마나 이 동네를 떠나고 싶어했는지를 알 수 있다.

 

자기 성장의 밑거름이 된 이 동네는, 또 동네 사람들은 자기 삶에서 지워버려야 할 동네이자 사람들인 것이다.

 

그점이 느껴져 그렇게 감동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우리는 어려운 시절을 회상하며 그래도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데, 이 소설에서는 그런 점이 느껴지지 않으니 말이다. 어쩌면 건조하게 당시 사람들의 행동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1940년대 후반 트리니나드 토바고, 특히 빈민가였던 미겔 스트리트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왜 주인공이 이곳을 떠나야만 했는지 생각하면서 읽으면, 우리가 살아가야 할 곳이 어떤 곳이어야 하는지ㅡ 우리는 마을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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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5 09: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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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5 10: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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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 클래식 레터북 Classic Letter Book 5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육후연 옮김 / 인디북(인디아이)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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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꾸러기 아이가 성장하는 이야기. 일본 근대문학을 이끈 나쓰메 소세키의 성장소설이다. 성장소설이기에 작가의 경험이 많이 녹아 있다고 봐야 하는데, 작가가 한 해 동안 영어 교사로 근무했다고 하니 이 소설에도 어느 정도는 작가의 경험이 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소설 내용이야 경쾌하게 빠르게 진행이 되어 읽기에 부담이 없다. 짤막한 문장들로, 또 다양한 사건들로 읽기에 전혀 부담이 없는데...

 

성장소설이니 몇 가지를 생각해야 한다. 일본 근대 문화를 알 수 있겠거니 하지만, 사실 일본 근대문화에 대해서는 잘 나와 있지 않다. 학교 교육이 중시되고 있는 것을 제외하면.

 

우선 성장에 절대적인 지지자가 필요하다는 것. 엄마가 일찍 죽고 아버지에게 못난 놈으로 취급받는, 형에게조차도 인정받지 못하는 주인공을 하녀인 기요가 전폭적으로 지지해 준다. 도련님은 훌륭한 사람이라고.

 

그 사람을 온전히 받아주는 사람이 있는 성장기를 거친 사람. 그런 사람이 악한 행동을 할 수가 없음을... 비록 성급하고 즉흥적으로 행동하는 주인공이지만 표리부동한 사람을 싫어하고 옳다고 하는 것을 실천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주인공에게 그래도 기요라는 주인공을 전적으로 받아들여주는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저기서 잔소리를 듣고 야단만 맞고 넌 쓸모 없는 놈이야라는 소리를 들으며 지내는 환경에서 그나마 자신을 인정해주는 단 한 사람도 없는 상태라면,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 그런 인정을 해주는 사람의 중요성, 이 소설에서 그 점을 찾을 수 있다.

 

또 하나는 지방 교육의 문제... 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수학교사로 부임하지만 그는 처음부터 아이들을 무시한다. 도시 출신이라는 이유로 시골 아이들을 무식하다고 자기와 동급으로 대하지 않는다. 실수를 하고도 그냥 넘어가는 모습, 동료 교사들을 무시하는 모습 등은 도시인이 지방을 대하는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편견을 가진 사람을 학생들이 교사로 인정할까? 학생들은 본능적으로 안다. 말과 행동이 같은 사람과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을. 그들은 말과 행동이 같은 사람은 교사로 인정하지만(이 소설에 나오는 멧돼지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교사처럼)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은 교사로 인정하지 않는다.

 

주인공이 도쿄에서 와 학생들에게 인정받기까지는 꽤나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러니 그의 행동 하나하나는 학생들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다. 그가 먹는 음식부터 하는 행동까지. 그러나 익명에 익숙했던 도시인은 사생활이 완전히 까발려지는 시골 생활을 견딜 수 없어 한다.

 

주인공도 그랬다. 그는 학생들과 갈등을 한다. 자신이 우위에 있다는 생각으로 학생들과 하나가 되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이것은 교사는 학생들을 이끌어야 한다는 교사 우월주의를 보이는 근대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가 학생들과 친해지는 것은 패싸움을 통해서다. 물론 주인공은 학생들의 반응을 칭찬인지 아닌지 구분을 못하지만... 자신들과 함께 싸우는 교사를 보면서 학생들이 마음을 열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사는 어찌해야 하는가. 바로 멧돼지 선생처럼 바른 말을 할 줄 알아야 하고, 또 학생들을 이해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20대 초반에 교사 생활을 하면서 주인공은 사람을 알아가게 된다. 겉으로만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를 다양한 교사 군상들을 만나면서 깨달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장소설이다.

 

성장소설을 읽는 것, 그것은 우리의 삶을 다른 사람에게 비춰보는 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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