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베트의 만찬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이자크 디네센 지음, 추미옥 옮김, 노에미 비야무사 그림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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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과 장미'를 읽으며 알게 된 책. 이런 소설이 있었다니, 아니 이 소설이 영화로도 만들어졌다니. 그것도 이 소설의 작가인 이자크 디네센이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원작이 된 소설을 쓴 사람이었다니. 그 작품의 주인공이 바로 자신의 이야기였다니. 이토록 유명한 작가를 지금에서야 알게 되다니...

 

해설에 실려 있는 헤밍웨이가 1954년 수상 소감으로 했다는 말. 그만큼 능력을 인정받은 작가다.

 

'이 상은 나보다는 다음 세 사람, 칼 샌드버그, 버나드 베렌슨, 그리고 아름다운 작가 이자크 디네센에게 돌아갔어야 한다' (318-319쪽)

 

이 소설집에는 총 5편의 소설이 묶여 있다. 바베트의 만찬을 비롯하여 폭풍우, 불멸의 이야기, 진주조개잡이, 반지가 실려 있는데, 하나같이 다 읽을 만하다. 재미도 있고, 상상을 넘어서는 이야기의 힘도 있다.

 

특히 '불멸의 이야기'에서는 이야기가 현실을 넘어서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고, '폭풍우'에서는 이야기가 현실로 들어왔을 때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폭풍우'에 나오는 한 구절. 이것이 바로 이야기와 현실의 관계를, 우리가 이야기를 이야기로 받아들이지 않고 현실로 받아들였을 때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를 깨닫게 하고 있다.

 

'경험과 통찰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니 사랑에 빠진 젊은 여배우를 제외하고는 누구나 일상생활을 무대에 올려놓는 것은 모순이며 불경한 짓임을 안다. 그렇게 되면 무대가 일상을 한 차원 높게 승화시키기보다는 일상이 무대를 한 차원 낮게 끌어내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상은 온통 뒤죽박죽이 되고 말 것이었다.' (116-117쪽)

 

그렇다. 이야기는 이야기여야 한다. 이야기를 현실로 끌어오면 그때부터 비극이 시작된다. 그래서 이야기로만, 이야기를 현실로 가져오려 하지만 그것은 계속 이야기로 남게 되는 것을 '불멸의 이야기'라는 소설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야기가 현실과 맞닥뜨렸을 때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을 '진주조개잡이'에서 엿볼 수 있으며, 주인공이 다른 이야기속으로 도피하면서 생활의 안정을 찾은 것을 그 소설을 통해서 볼 수 있다.

 

우리는 이야기 속에서 산다. 이야기를 들으며, 이야기를 만들며, 이야기를 하면서 살아간다. 그런데 이야기를 할 때 우리는 그것이 이야기라는 것을 인식한다. 이야기는 이야기일 뿐이다. 이야기가 현실과 착종이 되는 순간, 배우가 극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순간 비극은 시작된다. 이 소설집의 다른 소설들은 그런 이야기의 역할, 이야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좀 결이 다른 작품이 바로 '바베트의 만찬'이다. 하녀로 지내는 바베트가 복권에 당첨되어 만 프랑이라는 돈이 들어오자 주인들을 위해 만찬을 차리겠다고 한다. 검소하게 종교적 실천을 하며 살아왔던 주인들인 자매는 내켜하지 않지만 결국 바베트의 소원을 들어주고, 마을 사람들 역시 자매들의 말을 좇아 만찬에 참여한다.

 

음식은 화려하고 맛있고, 돈이 많이 든다. 바베트는 자신이 당첨된 일만 프랑을 모두 만찬을 차리는데 쓴다. 그런 바베트에게 자매는 "우리를 위해 가진 돈을 모두 쓰다니."(65쪽)라고 말하지만, 바베트는 "마님들을 위해서라구요? 아니에요. 저를 위해서였어요." (65쪽)라고 말한다.

 

왜? 바베트는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빵만이 아니라 장미가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고 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제 평생 가난하게 살려고, 바베트?" ... "아니에요. 전 절대로 가난하지 않아요. 저는 위대한 예술가라니까요. 위대한 예술가는 결코 가난하지 않아요. 마님. 예술가들에겐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것이 있어요." (66쪽)

 

그렇다. 우리는 모두 삶에서 예술가가 되어야 한다. 전문적인 예술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우리들 삶 자체가 예술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 삶에서 빵만큼이나 장미도 중요한 것이고, 그 점을 소설 '바베트의 만찬'이 잘 보여주고 있다.

 

'바베트의 만찬'에서는 먹을거리만큼이나 우리들을 살리는 것은 바로 인간의 자존감이라는 것, 빵과 장미가 함께 해야지만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 어떨 때는 빵보다는 장미가 더 중요하기도 하다는 것을 생각하게 하고, 나머지 작품들에서는 이야기의 힘을 생각하게 된다.

 

이자크 디네센은 천상 이야기꾼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 삶이 더 풍성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으니,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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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사 바틀비 - 미국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허먼 멜빌 외 지음, 한기욱 엮고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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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사 바틀비' 많이도 들어본 제목이다. 여러 곳에서 필경사 바틀비가 하는 말이 인용되곤 했는데...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

 

어떤 때는 노동자들의 주체 의식을 드러낸 말로 이 말을 인용하곤 했는데,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에서 자기 주장을 명확하게 하는 대사로 말이다. 그런데 읽어보니,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으로 이해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바틀비가 왜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라고 이야기하는지 소설 속에서는 별다른 개연성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냥 바틀비는 자기가 하고 싶지 않아서 그 말을 하고 일을 거부할 뿐이다. 어떤 설명도 없다. 합리성도 없고.

 

그가 그렇게 버티자 변호사가 견디지 못하고 사무실을 옮기지만 바틀비는 그 자리를 고수하다가 끌려가고 만다. 왜 그랬을까? 어쩌면 바틀비는 현대 노동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예전부터 '필경사 바틀비'를 읽고 싶었는데, 읽고 난 뒤에는 이상하게도 그리 큰 울림이 남지 않았다.

 

바틀비를 이 단편집 속에 있는 헨리 제임스의 소설 '진품'의 주인공들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변하는 세상 속에서 과거에 머물러 있는 인간. 그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인간. 자신들을 귀족의 모습을 담은 진품이라고 생각하지만, 결코 그림에서는 그러한 모습을 드러낼 수 없는 사람들. '진품' 속 인물인 모나크 부부는 스스로를 '진품'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들은 진품이 아니라 골동품에 불과하다. 그것도 현대에 보존할 가치가 없는 그러한.

 

여러 소설이 실려 있는데, 당시 미국의 상황을 짐작케 하는 소설들도 있고, 새로운 기법을 보여주는 소설들 도 있다. 총 11편의 소설이 시대 순으로 실려 있는데, 미국 단편 소설들을 읽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그 중에 샬롯 퍼킨스 길먼이 쓴 '누런 벽지'는 현대 페미니즘을 미리 보여준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성이 자기의 의사를 인정받지 못하고 남들에 의해 갇혀 지내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다른 사람을 자기 관점으로 옭매이는 것, 지금도 자주 일어나고 있는 일이긴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비극적이고 잘못된 일인지를 이 소설을 읽으면 깨달을 수 있다.

 

오래 된 소설이지만 소설을 통해서 내 관점이 아무리 좋고 올바르다고 하더라도 남에게 일률적으로 강요할 수 없음을, 그것도 주류에 속한 사람이 비주류에 속한 사람에게는 그렇게 하면 재앙적인 결과를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음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여기에 미국 흑인 노예들에 관한 백인들의 관점을 풍자적으로 표현한 창스 W. 체스넛이 쓴 '그랜디썬의 위장'도 재미있게 읽을 만하다. 백인들의 위선, 그런 위선을 반전으로 까발리는 그랜디썬이라는 흑인의 모습이 통쾌하다.

 

이렇듯 이 단편집에서는 미국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소설도,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과거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소설도 있다. 거기다 공포물이라고 할 수 있는 소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에드가 앨런 포우의 '검은 고양이'같은 작품도 있고, 처음 읽는 작품이지만 검은 고양이와 비슷하게 결말이 괴기스러운 윌리엄 포크너의 '에밀리에게 장미를'이란 소설도 만날 수 있다.

 

이 단편집에는 이밖에도 종교의 문제를 다룬 '젊은 굿맨 브라운', 표류하는 구명 보트에서 서로 돕고 지내는 네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 '소형 보트' 등 다양한 경향의 작품이 실려 있어서 근대 미국 단편 소설을 한번에 읽을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천천히 한 작품씩 읽어도 좋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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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라
토니 모리슨 지음 / 을유문화사 / 199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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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모리슨 소설 중에 두 번째로 읽은 소설. 최근에 다시 번역이 되어 출간된 책이 있지만, 중고서점에서 발견한 이 책, 아주 오래 전 번역본으로 읽었다. 책 사진이 알라딘에 나와 있지 않으니.. 아주 오래 전에 출간된, 1993년에 출간된 책이다.

넬과 술라. 우리나라 말로 풀이하면 달동네라고 할 수 있는 바닥촌에서 살아가는 흑인들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 소설인데, 그 중에서도 동갑내기 넬과 술라가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격이 정반대인 듯하지만 이들은 쌍생아라고 할 수 있다. 교양있는 엄마에게서 자란 넬과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엄마에게서 자란 술라. 그런데도 이들은 서로 통해 늘 붙어 있고, 함께 지내게 된다. 서로를 이해하면서.

 

어린 시절 여러 사건들을 겪는데, 흑인들이 겪는 일, 특히 여성들이 겪는 일들이 소설 속에 잘 드러나고 있고, 넬이 결혼하고 술라가 떠나면서 소설의 1부가 끝난다. 여기까지 함께 했던 두 소녀의 어린 시절이다.

 

2부는 10년이 지나서다. 술라가 다시 돌아온다. 그런데 불길한 기운과 함께 돌아온다. 술라가 돌아오고 넬은 남편을 잃게 된다. 술라로 인해 마을 사람들 역시 긴장하게 되고, 오히려 자신들이 해야 할 역할에 충실하게 된다.

 

마치 물고기들이 많은 수족관에 상어를 넣어두면 물고기들이 더 살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연상시키는 그런 장면들인데... 자유롭게 살아가던 술라 역시 한 남자에게 자신을 정착시키려 하는 순간 버림받는다.

 

그렇다. 술라가 지금까지 보여준 삶은 정착과는 거리가 먼 삶이었다. 그냥 자신이 하고자 하는 대로만 살아가는 모습. 그것을 자유라고 하겠지만 넬과의 관계에서 보면 그건 두려움이다. 자신이 없을 때 자유로 자신을 포장하는 그런 모습.

 

결국 흑인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런 위악의 모습을 지닐 수밖에 없음을, 그마저도 잃게 되면 바닥의 삶으로 떨어짐을 술라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넬은 이미 그러한 정착하는 삶을 받아들였기에 약해 보이지만 끝까지 살아남게 되고, 술라는 반대로 강해 보이지만 속은 더 없이 여린 존재이기에 살아남을 수가 없게 된다. 이렇게 이들은 서로의 모습에서 자신을 느끼며 지냈던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두 여인을 중심으로 흑인 마을에서 흑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그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아와 고통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지만, 결코 그 고통에 굴복하지 않는 태도를 만나게 된다.

 

소설 마지막에 후일담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에서 넬이 죽은 술라를 그리워하는 것으로 소설이 끝나는데... 이는 이 둘이 하나임을 알려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 속에서 흑인들은 가장 높은 지대에 살고 있지만 가장 힘든 삶을 살아간다. 그렇다고 백인들에게 굽실대지도 않는다. 그들은 서로 돕고 산다. 어려움 속에서도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보인다.

 

후일담에 해당하는 부분에서 이들 삶을 엿볼 수 있다. 나이 든 사람을 대하는 태도. 요양원에 노인들을 보내는 모습에 관해서...

 

백인들은 늙은이들을 내보내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흑인들의 경우 그들이 가도록 하게 하는 데는 상당한 대가가 지불되었다. 혹시 어떤 이가 늙고 홀로됐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가서 마루를 닦아 주거나 요리를 해주었다. 그들이 미치거나 다룰 수 없게 되었을 때에만 그들은 요양소로 떠나도록 되어 있었다. (221쪽) 

 

어려운 환경에서도 이렇게 살던 흑인들도 개발의 붐에 밀려 공동체를 잃어가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

 

이젠 어떤 장소조차 남겨져 있지 않고, 각자의 텔레비전과 전화를 가지고 있고, 남의 집들에는 점점 덜 들르는 각각의 집들만 있게 되어 버렸다. (223쪽)

 

술라라는 악역으로 인해 마을 사람들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술라가 죽은 뒤 그들은 구심점을 잃고 다른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년 후 마을은 위에서 언급한 대로 공동체가 아닌 그냥 스쳐지나가는 장소가 되어 버린다.

 

이렇게 소설은 흑인 마을의 부침을 두 여인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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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예술가의 초상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
제임스 조이스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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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스 읽기 두 번째.

 

이번에는 자신의 이야기를 썼다고 알려져 있는 소설이다. 소설이라고 하지만 자전적 성격이 강하다고 해야겠다. 성장소설이라는 이름으로 불러도 좋고.

 

성장소설이지만 어린 시절부터 젊은 시절까지만 이야기하고 있다. 더블린을 떠나려고 하는 장면에서 끝나고 있는데... 시간 순서대로 사건이 전개되면 좋겠지만, 전체적인 흐름은 시간의 흐름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중간중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거나 자신의 의식을 가감없이 서술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의식의 흐름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조이스 소설이 읽기 어려운지도 모르겠다. 순간순간 생각나는 장면으로 넘어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읽기에 그다지 어렵지 않다. 먼저 너무 어렵다고 생각하는 순간, 읽기에 지장을 받는지도 모른다.

 

아일랜드라는 상황에서 아일랜드라는 민족주의를 벗어난 사람으로 조이스를 평가한다면, 이 소설에서도 아일랜드 민족주의가 강하게 드러나고 있으며, 거기에 완전히 동조하지 못하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스티브 디덜러스. 디덜러스라는 성이 특이하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다이달로스를 영어식으로 변형한 성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다이달로스가 누구인가? 세상에 만들지 못할 것이 없는 장인 아닌가. 즉, 창조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주인공의 성을 디덜러스로 한 것은 현재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사람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소설에서는 민족주의와 더불어 종교와 교육이 성장의 주요인으로 등장한다. 당연히 성장소설이기 때문에 배움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자각하는 상태, 그래서 자신의 길로 나아가게 되는 과정, 이것이 바로 성장소설이고, 이 성장소설에서는 도움을 주는 조력자나 또는 환경이 나타나게 마련이다.

 

이 소설도 예외는 아니다. 아일랜드 민족주의가 뿌리 깊에 박혀 있는 가족과 주변 분위기에서 그것을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스티븐과 여기에 그의 성장에 밑거름이 되는 예수회가 등장한다. 스티븐이 예수회 소속 학교에 다니기 때문이고, 그런 교육 속에서 한때 성직자가 되고자 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동양이나 서양이나 학교 교육의 폐쇄성, 폭력성을 이 소설에서도 만날 수 있는데, 어린 시절 다녔던 학교에서 받게 되는 체벌, 그 다음에 만나게 되는 지옥에 대한 장광설... 꼭, 체벌 다음에 벌점제로 학생들을 통제하는 우리나라 교육현실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기에 절대적 권위를 휘두르는 교사들, 하지만 그에 순종하지 않는 학생들... 에고, 참)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은 성직자가 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자유, 그가 추구하는 것은 그러한 인간의 자유이기 때문에 성직으로의 길을 포기한다. 그는 대학 생활 때 이미 작가로 친구들에게 인정을 받는다. 그렇게 자기 길을 찾아가는 과정이 이 소설에 나타나 있다.

 

따라서 이 소설을 읽다보면 제임스 조이스라는 사람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 수 있게 된다. 그가 가톨릭 교육을 많이 받았으며, 아일랜드 민족주의에 둘러싸여 있었다는 것, 그럼에도 그러한 환경에 빠지지 않고 자기 길을 찾아가게 되는 과정을 만나게 된다.

 

제임스 조이스라는 작가가 작가로 서기까지, 어린시절부터 청년시절까지를 배경으로 쓴 소설. 조이스를 알기 위해 비록 소설이지만 이 작품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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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린 사람들 창비교양문고 32
제임스 조이스 지음, 김정환 외 옮김 / 창비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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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에 범우사에서 나온 소설 '율리시즈'를 사놓고, 읽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냥 책꽂이 어디엔가 꽂혀 있다가 자꾸 밀려밀려 이제는 어디에 있는지 관심도 가지지 않은 소설이 되고 말았다.

 

이야기는 엄청 들었는데, 읽어야 한다는 소리를 계속 들었는데, 막상 읽으려니 너무 어렵다는 생각. 지레 포기하게 만든 소설. 대충 이야기만 듣고, 다른 책에 실려 있는 해설만, 그것도 아주 짤막하게 쓴 글만 읽고 만 소설인데...

 

제임스 조이스는 언젠가 읽어야지 하고 미뤄둔 작가. 그러다 어떤 책을 읽다 조이스 소설을 읽으려면 먼저 '더블린 사람들'부터 읽으라고. 그 소설은 다른 소설에 비해 그다지 어렵지 않다고 써 놓은 글을 발견했다. 그래 이거야. '더블린 사람들'부터 읽어야지. 그런데 이 책을 어디서 본 기억이 있는데...

 

기억을 되살려 보니 도서관에서 지나쳐 가면서 본 적이 있다. 오래 전에 번역된, 창비에서 나온 소설. 문고본 크기로 나온 소설을 본 적이 있어, 마침 시간도 나고, 모처럼 여유 있는 시간이 있을 때 제임스 소설을 읽자 하고 도서관에서 가서 빌려온 책 두 권.

 

'더블린 사람들(창비)'과 '젊은 예술가의 초상(민음사)'

 

'더블린 사람들'부터 읽기 시작. 그래, 어렵지 않다. 뭐, 어차피 번역으로 읽는 건데,조이스가 쓰는 영어의 오묘한 맛을 알 수는 없지만, 번역본으로 전체적인 사건과 인물, 배경을 파악하는데는 지장이 없다.

 

총 15편의 단편 소설이 실려 있고, 이 소설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겹치지 않는다. 아마도 더블린이라는 한 장소에 살고 있지만, 다양한 사람들을 소설을 통해서 등장시키고 있다. 이들이 겪는 일, 그리고 이들이 생각 등을 조이스가 표현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형식의 소설을 우리나라에서 찾으면 어떤 소설이 있을까 생각해 보니, 이문구가 쓴 "우리 동네"나 양귀자가 쓴 "원미동 사람들"이 떠올랐다. 한 장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이 겪는 일들을 통해 우리들 삶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

 

조이스가 쓴 '더블린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다. 아일랜드라는 나라, 영국의 식민지였던 나라, 그래서 더블린 사람들은 양가적인 감정을 지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한때는 번성했는지 어땠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영국의 변방 도시다.

 

런던이라는 곳에 비하면 더블린은 퇴락해 가는 옛도시에 불과하다.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아무리 자부심을 지니고 있더라도 이들은 런던에 피해의식을, 열등감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퇴락해 가는 도시답게 사람들의 삶도 미래지향적이라기보다는 과거지향적(특히 '죽은 사람들'이라는 소설에 잘 나타나 있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에게는 밝은 미래가 아니라 힘든 현실이 더 바싹 다가와 있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소설이 어두침침하지 않다. 우울하지 않다. 무언가 밝은 분위기가 느껴진다. 소설 속 인물들의 삶이 결코 행복하다고 할 수 없는데도 그들이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단 생각이 들지 않는다.

 

아무리 어려운 환경이라도 사람들은 살아간다. 그것도 웃으면서 살아간다. 왜 너는 힘든데 힘든 모습을 보이지 않냐고 하는 것은 폭력이다. 자신의 환경에서 그것에 맞게 살아가면서 거기서 행복을 찾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이런 인간의 모습이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에 잘 나와 있다. 이문구나 양귀자의 소설을 보라. 이들 역시 몰락해 가는 농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나 위성도시라고 하는 소도시에서 아웅다웅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 역시 환경이 좋지 않다고 늘 찡그리고 살지 않는다. 그들의 삶에도 행복이, 웃음이, 즐거움이 있다.

 

'더블린 사람들'이란 소설도 마찬가지다. 퇴락해 가는 도시 더불린에서 결코 행복하다고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나오지만, 이들은 그 환경에서도 나름 잘 살아간다. 바로 이것이다. 이게 삶이다. 소설은 이렇게 우리들 삶을 보여준다.

 

조이스가 아일랜드를 떠나 세계인으로 살고자 했다고, 편협하게 아일랜드 민족주의를 고수하지 않았다고, 오히려 그것을 비판했다고, 더블린 사람들은 그런 그의 사상이 잘 드러나고 있다고 하는 해설도 있다는데... 물론 그런 모습이 보인다. 그러나 아일랜드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비록 그것이 퇴락해가고, 사라져가야 할 것이지만, 여전히 더블린 사람들에게 남아 있음을, 그럼에도 새로운 세대들이 성장해 가고 있음을 소설은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에 실린, 아마도 이 소설집에서 가장 긴 소설인 '죽은 사람들'에서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게이브리얼의 연설 가운데 한 토막이 이를 말해준다.

 

'새로운 세대가 우리들 한가운데서 자라나고 있습니다.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원칙에 따라 움직이는 세대들입니다. 그들은 이 새로운 사상에 대해 진지하며 열광적이고, 그들의 열정은 잘못된 방향일 때조차도 대체로는 진지하다고 저는 믿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회의적이고, 또 이렇게 표현해도 된다면, 사유로 고통받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262쪽)

 

그러면서 그는 '저는 과거에 오래 머무르지는 않겠습니다.'(263쪽)고 말한다. 그렇게 미래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야 함을, 더블린 사람들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조이스 소설의 첫걸음, '더블린 사람들' 그래,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조이스가 난해하다면, 우리나라에서도 이상이라는 난해하기로 유명한 소설가가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우리는 이상 소설을 배우고 읽는다. 조이스도 마찬가지다. 영국에서 중요 작가로 그의 작품을 배우고 읽는다고 하는데...

 

선입견을 버리고 그냥 소설로 읽으면 된다. 그렇게 읽을 시도를 해야 한다. 그런 생각을 하게 한, 어쩌면 제임스 조이스라는 작가에 대해서 두려움을 조금은 떨쳐내게 한 소설집이 이 '더블린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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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둘리 2020-01-10 08: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려울 것 같아, 요즘엔 읽고 고민할 여유가 없으니 나중에 읽어야지..이런 식으로 사놓고 읽지 않은 책이 도대체 몇 권인지....kinye91님의 글을 보고 새삼 생각하게 되네요..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kinye91 2020-01-10 09: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직 읽지 않은 책들이 참 많아요. 그래도 언젠간 읽겠지 하는 희망을 지니고 있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