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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 수 있는 여자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이은선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11월
평점 :
제목이 살벌하다. 먹을 수 있는 여자라니... 먹는다는 행위는 삶을 유지하는 기본적인 행위인데, 세상에 먹을 수 없는 여자도 있나 하지만, 있다.
먹는다는 행위가 능동적인 행위 같지만, 상당히 수동적임을 알 수 있다. 먹는다는 행위는 어떤 틀에 맞춰 있을 때가 많다. 사실 우리는 장소에 따라서 먹는 음식도 다르고, 먹는 방법도 다르지 않은가. 심지어는 의상까지도 다르게 해야 하니.
그렇다면 먹을 수 있는 여자라는 말은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 수 있는 여자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다른 관계들에 의해 틀지워진 삶이 아니라 자신이 만들어가는 삶. 주인공 메리언 이야기다. 전도 유망한 변호사 피터와 연애 중인 메리언은 어느 날 피터로부터 도망치려 한다. 이유는 없다. 그냥 몸이 움직인다. 이것은 무엇일까? 피터라는 남성으로부터 조여오는 틀을 몸이 먼저 거부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도망친 메리언에게 피터는 결혼하자고 말한다. 그냥 그렇게 둘이 결혼을 한다면 별 문제가 없다. 하지만 이때부터 메리언에게 먹을 수 없는 음식들이 하나 둘 생겨난다. 먹을 수 없는 음식이 생겨난다는 것은 메리언이 결혼을 했을 때 자신의 뜻대로 행동할 수 없는 일들이 많다는 것이다.
우선 직장을 그만두어야 한다. 남성이라는 성별을 지닌 친구를 만날 때도 눈치를 봐야 한다. 애를 낳으면 애에 종속되어 다른 활동을 할 수 없다. 또한 남편의 취향에 맞게 집안을 꾸며야 한다. 남편의 비위를 맞춰야 한다 등등.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이 생기고 이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이 어느 순간부터는 할 수 없는 일이 된다. 자신의 취향에 맞게 자유롭게 먹었던 음식도 이제는 남을 고려해야 한다. 그렇게 자신을 잃어간다.
그러니 먹을 수 없는 여자가 되어 간다. 하나 둘 먹을 수 없는 음식들이 늘어갈 때 메리언은 피터와 결혼을 앞둔 파티에서 또다시 도망친다. 다른 남자 덩컨에게 가지만, 덩컨 역시 메리언과 함께 할 수 없는 사람이다. 덩컨은 메리언을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는 존재로밖에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덩컨은 오로지 자신의 문제에만 관심이 있다.
메리언은 결국 피터와 헤어지게 되고, 직장도 다시 구하려고 한다. 그러는 과정에서 메리언은 여자 모양의 케이크를 만든다. 이것을 먹는 메리언. 그래서 제목이 먹을 수 있는 여자다. 이중의 뜻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이제 자신의 의지대로 먹을 수 있게 된 메리언, 또 하나는 메리언을 먹을 수 있는 여자 케이크.
먹을 수 있는 여자는 여성의 몸을 한 케이크를 먹음으로써 메리언은 자신이 먹을 수 있는 여자임을 보여준다. 이제는 어떤 음식이든 제 뜻대로 먹을 수 있다. 이는 강요된 여성성에 갇히기를 거부하는 모습이다. 이제는 자신의 뜻대로 세상을 살아가려 한다는 선언이다.
남자 또는 다른 어떤 관계에 종속된 삶이 아니라 자신이 주체로 살아가겠다는 선언. 이 선언이 바로 여자 모양의 케이크를 먹는 메리언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애트우드가 쓴 거의 첫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음식을 비유로 들어서 여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사실 천박하게 먹는다는 표현을 여성에게도 쓰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그래서 처음 이 제목을 보면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다. 먹을 수 있는 여자는 자신에게 만만한 여자라고. 그러다 소설을 읽어가면서 어, 아니네, 하게 된다. 먹을 수 있는 여자는 세상을 당당한 주체로 살아가는 사람임을 알게 된다.
그렇게 되기까지 여러 우여곡절을 겪지만, 결국 자신을 찾아낸 주인공의 모습에서 우리도 당당하게 먹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시녀이야기]나[증언들] 또는 [미친 아담 3부작]과 같지는 않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흥미를 돋우는 소설이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은 애트우드의 첫소설, 그리고 다음 소설들에서 애트우드가 다루는 내용들이 어느 정도 나타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