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워도 외롭지 않다 정호승의 시가 있는 산문집
정호승 지음 / 비채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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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은 유명한 시인이다. 이렇게 시작한다. 그를 만난 적은 없다. 단지 얼굴을 본 적은 있다. 안치환 시노래 콘서트에서. 그때 정호승이 나와서 시를 낭송했다. 


안치환이 시에 곡을 붙여 노래를 부르는데, 시도 좋지만 노래도 좋았다. 거기에 정호승이 직접 낭송하는 모습을 보기도 했으니, 그런 호사가 없었다.


2007년이었다. 서강대에서 이루어졌던. 그렇게 정호승을 시로만이 아니라 노래로도 만났다. 그때 받았던 안치환의 사인. 여기에 정호승 시도 있다.


그리고 이제는 시와 산문이 하나가 된 책으로도 만나게 되었다.


정호승의 시가 먼저 한 편 나온다. 그리고 그 시에 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시와 산문. 서로 다른 것 같지만 다르지 않음을 글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시도 좋지만 시와 관련된 산문을 읽으면서 시인 정호승이 아닌, 인간 정호승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 정호승이 만난 사람들, 그리고 그 시가 어떻게 해서 우리 곁에 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사연.


한편 한편의 시와 산문이 다 좋다. 읽으면서 마음이 따뜻해진다. 글을 통해서 위안을 얻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인간 정호승의 모습을 알 수 있게 해준다는 데 이 책의 묘미가 있다. 시인의 개인 생활에 대해서 우리는 잘 모르고 있지 않은가.


그냥 시를 통해서 만나든지, 아니면 산문을 통해서 짐작을 할 뿐인데, 이 책은 정호승 자신이 자신의 이야기를 시를 통해서 산문으로 풀어내주고 있다. 


살아온 이야기, 살아가는 모습, 그리고 삶을 대하는 태도. 그렇게 정호승은 시와 산문을 통해서 시와는 다르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 책에서는 정호승이 만난 많은 사람들이 나온다. 그들을 통해서 깨달은 바를 이야기하고, 또 어느 한 편에 치우치지 않은 모든 존재를 사랑으로 보려는 자세가 나타나 있어서, 자신만을 중심으로 여기는 삶을 반성하게 한다.


또한 첫글에서 말하고 있듯이 온전한 삶만이 삶이 아니라 깨어진 삶도 삶임을, '산산조각'이라는 시를 통해서, 그 시와 관련된 이야기를 통해서 전해주고 있다.


그렇다. 우리 삶은 바로 이것이다. 삶의 순간순간이 모두 삶이고, 그것이 온전한 삶임을. 꼭 온전한 삶을 찾으려 헤맬 필요가 없음을. 그냥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살면 된다는 마음을 갖게 한다.


정호승의 시하면 마음에 위안을 준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 책에 실린 산문들도 그렇다. 마음에 위안을 주는데 시와 산문을 가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는 책이다.


그냥 생각날 때마다 한편씩 읽어도 좋을 책이다. 곁에 가까이 두고 틈틈이 읽으면 좋을 책.


덧글


읽다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었다. 그 부분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더라면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


윤동주에 관한 글이다. 윤동주의 무덤을 찾아갔던 일화를 이야기해주는 글에서,, 류기천 씨의 말이라고 하는데...


"... 윤동주의 친어머님은 일찍 죽고, 그 후에 윤동주는 새어머니 밑에서 자랐는데, 그 어머니가 중풍을 일으켜..." (440쪽)


내가 알기론 윤동주는 새어머니 밑에서 자란 적이 없는데... 검색을 해보니, 어머니 김룡(김용) 씨는 1948년에 돌아가신 걸로 나와 있다. 그렇다면 용정에 있는 류기천 씨의 이 말에 대해서 책에서 부연 설명을 해주었더라면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을 했다. 


우리나라 국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가운데 한 명인 윤동주에 관한 이야기인데, 이 책을 읽고 윤동주의 가족관계에 대해서 잘못 알 수도 있지 않나 하는 우려가 생겼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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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릭스와 크레이크 미친 아담 3부작 1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차은정 옮김 / 민음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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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한 판단은 다 다르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 또는 만나지 않는 사람에 대한 판단 역시 다르다.


다름을 인정하고 공존하면 좋겠지만, 이 다름이라는 이유로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해서도 안 된다. 그냥 다르다고 넘어갈 수 없는 문제가 있다. 바로 인류의 생존에 관한 문제라면.


과학기술은 계속 발전하고 있다. 후퇴라는 말은 과학기술에는 없다. 어려운 문제에 부딪히면 그 난관을 과학기술의 힘으로 해결해 나가려고 한다.


전염병이 발생하면 백신을 개발하고, 식량위기가 닥치면 화학농법이라든지 또는 대체육과 같은 과학기술을 이용한 식량 개발을 하고, 기후 위기에 봉착하면 또다른 과학기술로 해결하려고 한다. 


계속 발전되는 과학기술. 이런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종'이라는 개념이 희박해지고 있다. 유전자변형, 또는 유전자 조작이라고 하는 기술이 지금도 많이 발전하고 있고, 대체육이라는 개념까지도 나오고, 스마트팜(스마트농장이라고 흙과 관계없이 농사를 짓는 기술)도 운영이 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우리를 유토피아로 이끌까? 역사를 보면 유토피아를 만들겠다고 주장하면서 사람들을 디스토피아로 몰아넣은 경우가 한둘이 아니지 않은가?


유토피아란 명목으로 디스토피아로 사람들을 이끌어가는 경우를 보면서도 '다름'이라고 인정해야 할까? 그 다름을 용인해야 할까? 아직 오지 않은 세계니, 판단을 유보하고 한번 지켜보자고 해야 할까? 결과나 나타난 다음에는 돌이킬 수 없을텐데도.


이 소설은 그런 디스토피아를 그리고 있다. 현생 인류가 너무 많다고, 현생 인류는 사라지고 새로운 인류가 나타나 (완벽하게 조작된 유전자를 타고난, 그래서 그들에게는 갈등도 없는, 오로지 채식으로도 생활이 가능한, 죽음이라는 말을 모르는 그런 존재들) 지구에서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를 실행에 옮긴 사람이 등장한다.


뛰어난 과학기술 능력으로 그는 인간을 창조하고 (그의 별칭이 크레이크이고, 그가 만든 새로운 인류를 크레이커라고 부른다) 현생 인류를 멸망시킬 바이러스를 유포한다. 급속도로 퍼지는 바이러스, 백신을 개발하지 못한 상태에서 인류는 속절없이 죽어간다.


세상은 폐허가 된다. 이 폐허가 된 세상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있다. 크레이크의 친구. 그가 크레이커들과 살아가면서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으로 소설이 진행이 된다.


온갖 유전자 조작들이 성행하고, 다양한 변종 동물들이 만들어졌지만, (소설에서는 이 동물들 이름을 늑개, 너구컹크, 돼지구리 등으로 부른다) 그것을 철저하게 통제하는 집단과, 그 집단에 끼치 못한 일명 평민층이 존재하는 세상. 


이는 분명 유토피아는 아니다. 그러니 이런 세상을 없애려고 하는 크레이크의 시도. 어느 정도는 성공했다. 그는 자신이 창조한 인류인 크레이커들이 이 세상에서 새로운 인류로 살아가기를 바란다. 물론 그의 의도는 실현되지 못한다. 그 자신이 죽었으므로.


과학기술로 차별이 이루어진 사회는 유토피아가 될 수 없다. 아마도 과학기술은 그것을 점유하고 이용할 수 있는 사람과 이용할 수 없는 사람을 가르고 차별할 것이다. 또다른 차별사회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차별사회를 없애겠다고 현 인류를 모두 죽게 만드는 방식 또한 또다른 차별을 낳을 수밖에 없다. 자신까지 포함해서 다 죽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새로운 인류가 자리를 잡을 때까지 가르칠 존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세상 역시 차별이 존재하는 세상, 즉 자신이 원하는 방향에 찬동하고 따르는 사람들은 계속 살아갈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 또는 이런 과학기술에서 소외되어 있던 소위 평민층들은 이유도 모른채 죽어갈 수밖에 없다.


그런 세상은 유토피아가 아니라 디스토피아다. '다름'이 인정받아야 하는 한계가 있다. 소설은 그 점을 생각하게 한다. 그러면서 최근에 나타난 지구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전세계를 팬데믹이 빠뜨린 코로나19는 말할 것도 없고, 어떤 새로운 질병이 발생해서 인류를 위험으로 몰아갈지 모른다. 그것도 과학기술의 발전이 만들어낸 부작용일 수 있다.


소설에서 등장하는 대체육은 이미 만들어지고 있으니, 이제는 종을 파괴한 인류의 기호에 맞는 동물들이 등장할 수도 있다. 인간은 다양한 종들을 멸종시키고 있지만, 반대로 다른 종들을 창조하고 있기도 하다.


소설 속 크레이크는 자신이 신이 되고자 했다. 현생 인류를 없애고 새로운 인류를 창조한. 물론 자신이 창조한 인류에는 지도자도 신도 없을 거라고 말했지만, 소설은 그렇지 않음을, 그들 역시 우리 인류가 걸어왔던 길과 비슷하게 갈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니 소설은 과하기술의 한계가 어디까지여야 하는지 생각하게 한다. '다름'이라고 다 인정받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 또한 과학기술은 과정과 예측 결과까지도 공유되지 않으면 인류를 유토피아가 아니라 디스토피아로 이끌 수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미친 아담' 3부작이라고 하는데, 이 책은 1부다. 1부부터 애트우드답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 권들도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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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 머리 앤 (양장) TV애니메이션 원화로 읽는 더모던 감성 클래식 2
루시 모드 몽고메리 지음, 애니메이션 <빨강 머리 앤> 원화 그림, 박혜원 옮김 / 더모던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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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텔레비전에서 만화영화로 봤다. 정말 재미있게. 


앤의 천방지축인 모습이, 실수투성이인 그 행동들이, 상상에 빠져 다른 것들을 잊고 있는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러웠다고나 할까?


어쩌면 현실에서 하지 못하는 행동을 앤이 대신 해준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앤의 말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많은 말들 속에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말들을 찾곤 하기도 했고.


그러다가 소설로 읽었다. 번역을 다시 했을테지만, 이 책의 특징은 만화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대략 내용을 이해할 수 있게 만화의 그림들이 실려 있다.


과거를 되살려주기도 하지만, 소설 속 인물들을 상상하는데 제약을 주기도 한다. 가령 마릴라 같은 경우는 마른 사람으로 나온다. 소설에는 '마릴라는 큰 키에 몸에 굴곡이라고는 없이 꽤 마른 편이었다'(20쪽)고 되어 있다. 하지만 만화에서는 마릴라를 마른 몸에 큰 키라고는 볼 수 없다. 오히려 뚱뚱한 편이라고나 할까?


아마 만화를 보지 않았다면 마릴라를 성마른 사람으로 상상하면서 읽었을테다. 하지만 만화가 먼저 뇌리에 박혀 있으니, 이 번역된 소설도 마찬가지다. 만화를 떠올리면서 읽게 된다. 이것이 문제가 되기도 하지만, 오히려 과거를 불러내는 역할을 하기도 하니... 만화 영화를 본 사람들에게는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번역본이라고나 할까.


소설은 만화와 같은 감동을 준다. 앤의 성장을 따라가면서 웃고 울고 하게 된다. 그만큼 앤은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아니,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전파하는 사람이다.


앤과 같이 지낸 매슈와 마릴라는 사랑을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 그들의 단조로운 삶, 흑백의 삶에 앤이 들어옴으로써 화려한 칼라로 바뀐다. 한꺼번에 바뀔 일은 없지만 조금씩 조금씩 그들은 사랑으로 변해간다.


사랑을 주는 사람이 된다. 앤으로 인해서 자기 의사를 좀더 강하게 표현하게 된 매슈, 그리고 탐탁하게 여기지는 않지만 앤에게 유행을 따르는 옷을 만들어주는 마릴라. 소설의 후반부에 가면 마릴라는 자신의 감정을 앤에게 표현한다. 무뚝뚝한 마릴라가 변한 것이다. 린드 부인이 마릴라가 부드러워졌다고 할 만큼. 그리고 앤이 만나는 많은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사랑에 감싸이게 된다.


앤은 감수성과 상상력이 풍부한 아이다. 그런 감수성과 상상력을 억누르지 않아야 한다. 집에서든 학교에서든 어린 시절의 감수성, 상상력은 권장되어야 하는데, 과연 지금 우리는 그렇게 하고 있나 생각해 보게 된다.


소설을 읽다보니 어쩌면 우리 교육은 앤보다는 다이애나를 원하고 있지 않나 싶다. 순종적이고 현실적인, 그래서 어른들에게 예쁨을 받는 아이. 하지만 다이애나처럼만 살면 변화와 성장은 없다.


순응만이 있을 뿐이다. 자신의 길을 만들어가지 않는다. 어른들에게서 주어진 길만을 갈 뿐이다. 다른 길을 볼 생각도 없이. 과연 미래 세대에게 그런 길로만 가라고 해야 하나? 


소설은 아니라고 한다. 끝에 무엇이 나올지 모르지만 앤처럼 자신의 길을 만들어가야 한다. 주어진 길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길.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앤과 같이 감수성과 상상력을 잃지 않아야 한다.


감수성은 자신의 주변 모든 것을 사랑으로 볼 수 있게 하고, 그것들과 더불어 사랑이 넘치는 세상을 만들어가게 하는 힘이 된다. 마찬가지로 상상력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미래를 볼 수 있게 한다.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게 한다. 미지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게 한다. 그렇게 앤은 성장해 가고, 그런 성장의 모습을 담고 있는 소설이 이 소설이다.


즐겁게, 재미있게, 감동받으면서 읽을 수 있는 소설. 그러다 문득, 앤의 나이가 몇 살이었더라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양 나이로 16세하고도 몇 달이 지났다고 하니, 우리 나이로 치면 겨우 17세다. 고등학교 1학년이다. 1800년대 후반 또는 1900년대 초반의 일이라고는 하나, 11살에서 16살까지 앤이라는 고아가 겪은 일이다. 너무도 많은 일들, 그리고 이렇게 성숙할 수가 있나 싶은 그런 나이.


어쩌면 우리는 아이들을 너무도 어린 시절에 붙박아두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앤의 나이를 생각하면서.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상상하고,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가도록 하기보다는, 그 아이들이 충분히 갈 수 있다고 어른들이 여기는 길이 만들어질 때까지 어디로도 가지 못하게 하고 학교에 잡아두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 변화하고 성장할 기회를 빼앗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 우리나라 청소년들은 앤처럼 실수하고, 그 실수에서 하나하나 배워가는 시간을 갖지 못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 앤처럼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하지 않나 하는 안타까움.


청소년들이 읽기보다는 어른들이 이 소설을 읽었으면 좋겠다. 모두들 앤과 같은 시절이 있었을 테니. 앤처럼 말하고 행동하지는 못해도, 앤과 같이 감수성이 뛰어나고, 상상력이 풍부했던 시절을 거쳤을 테니.


그 과거를 떠올리면서 현재 어른이 되어 앤처럼 자라나는 아이들을 속박하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봐야 한다. 마릴라가 앤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지지해주면서 자신의 생각과는 맞지 않는 옷들을 앤에게 만들어주듯이 그렇게 어른들이 변해야 한다.


그래서 이 소설은 어른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소설이다. 물론 청소년들이 읽어도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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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리의 이야기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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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 소설이다.


'거리의 이야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거리의 이야기. 집을 잃고 버려진 땅에 자신들의 거처를 만들고 생활하는 사람들 이야기다.


소설은 단 하루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 하루라는 시간에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일생이 담겨 있다. 처절히 파괴되어 가는 그들의 삶이.


킹은 개 이름이다. 개를 서술자로 삼아 소설을 전개한다. 킹은 떠돌이 개다. 어떻게 이곳으로 왔는지를 말해주지 않지만, 부두에서 비코를 만난 이후 이들과 함께 지낸다. 일정한 거처가 없는 개가 함께 살 수 있는 사람을 만나 지내면서 그들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해준다. 


즉 가장 낮은 시선에서 낮은 곳에서 사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준다. 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이야기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없는 사람끼리 서로 의지하면서 살아가면 좋겠지만, 버려진 땅이 언제까지나 버려진 땅으로 남아 있을 수는 없다. 자본은 그런 땅을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개발을 해야 한다. 그래서 개발이라는 이름에는 쫓겨남이라는 이름이 늘 함께 한다.


그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개발을 통해 그곳에서 삶을 이어나가지 못한다. 그들은 그곳에 남을 만한 여력이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우선 되는 능력은 바로 지불할 능력이 있느냐다. 지불할 능력이 없으면 나가야 한다. 


하지만 나갈 수 없는 사람들. 그들은 버틸 수밖에 없다. 결국 개발은 강제 철거와 연결이 된다. 돈이 있는 사람이 살기 위해서 없는 사람들을 쫓아내야 하는 현실. 그런 현실을 존 버거는 소설을 통해서 고발하고 있다.


킹은 이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들 사이에도 갈등이 있고, 또 돈이 개입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서로를 인정하고 의지하면서 살아간다. 킹 역시 마찬가지다. 떠돌이 개를 서술자로 등장시켰기 때문에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 역시 정착되지 못하고 또다시 떠돌 수밖에 없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렇게 남기 위해서 저항하려 해도 결국은 쫓겨날 수밖에 없는 사람들. 그들이 최루탄에 쫓겨 모여 있던 곳에서 외치는 말은 '우리 여기 있어!'(204쪽)다. 그렇다. 그들은 거기에 있다. 그곳에도 사람이 있다.


사람이 있는데, 보여서는 안 되는 사람이다. 그들은 그곳에서 사라져야 한다. 보이지 않아야 한다. 철거되어야 한다. 그것도 그들에게 다른 삶터를 마련해주는 오랜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그냥 집행할 뿐이다.


오래 전에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 '상계동 올림픽'을 본 적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올림픽이 개최되어 세계에서 많은 손님들이 오는데, 그 손님들에게 보여서는 안 될 것들이 있다고 했다. 판자촌, 노숙인, 노점상 등등. 선진국임을 과시하기 위해 좋지 않다고 여겨지는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게 밀어붙였다.


어떻게 했는가?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은 보이지 않는 곳으로 쫓겨났다. 아무리 저항해도 강한 힘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게 쫓겨난 그들이 다시 또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쫓겨났다. 그 영화는 그런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일을. 지금도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거처를 잃는 사람들이 있으니...


존 버거의 이 소설은 그때 일, 또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일이 떠오르게 했다. 여전히 자본은 이윤을 위해서라면 사람을 보지 않는다. 자본은 사람을 가린다. 사람을 보이지 않게 한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외친다.


"우리 여기 있어요!"라고... 바로 여기에 우리가 있다고. 우리도 살아갈 권리가 있다고. 하지만, 그 외침은 자본에게까지 가 닿지 않는다. 자본에 가 닿기 전에 공권력이라는 이름 앞에서 산산히 흩어진다. 소멸해버리고 만다. 이 소설에서처럼.


너무도 슬픈 모습.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저려온다. 소설을 읽으면서 자꾸 우리나라 현실이 겹쳐져서 마음이 편치 않았는데... 그럼에도 이런 소설을 통해서 우리는 보이지 않게 하려는 사람들을 삶을 볼 수 있게 된다.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조세희 작가가 생각난다. 그의 작품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공'도 생각이 나고. 고인의 명목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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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의 증명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7
최진영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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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절하다. 그렇지만 괴기스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들 사랑이 이렇게 할 수밖에 없으므로. 더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사랑이므로.


사랑하는 사람을 잊지 않기 위해 더 오래 살라고 하는 죽은 사람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기 싫어서 자신의 몸의 일부로 만들려고 하는 사람이나. 그들이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지므로, 이들의 사랑을 괴기스럽다거나 공포스럽다고 느낄 수가 없다.


막다른 골목. 딱히 내가 잘못한 일도 없는데 더이상 출구가 보이지 않을 때, 사람이 사람이 아니라 물건으로, 돈으로 판단되는 세상에서 그럼에도 너와 함께 있어서 살 수 있다는 그런 사랑.


소설은 현재와 과거, 과거와 현재가 얽히면서 전개된다. 담이와 구의 시점이 번갈아 가면서 나오고, 둘의 이야기가 달라지는 지점도 있지만 겹치게 되면서 그들의 사랑을, 그들의 상황을 점차 이해하게 된다.


사람으로 살고자 했으나 사람으로 살게 하지 않는 세상에서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구와 그를 보낼 수 없는 담. 그들의 사랑.


처절한 사랑이다. 죽어서도 잊지 못하는, 죽은 사람을 잊지 못하는 그런 사랑. 하지만 세상은 그들의 사랑을 내버려둘까?


그들의 사랑을 순수하게 바라볼까? 아마도 세상에 이런 사실이 알려진다면 괴기스러운, 정상이 아닌, 미친, 사이코패스인 이라는 수식어가 붙고, 이들의 사랑은 세상 사람들의 흥미거리로 전락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담은 구를 보낼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담은 누구보다 오래 살아남기를 바란다. 자신이 이런 행동을 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때까지 살겠다고 한다.


이 세상에서는 절대로 인정받지 못할 사랑이기에, 이 세상에 대한 기대를 하지 않는다. 담은 그렇다. 구 역시 마찬가지다. 죽음 이후의 세계에 다시 만난다는 믿음을 가질 수가 없다. 


왜냐하면 자신이 죽은 뒤 죽은 다른 사람을 만나지 못했기에. 그렇기 때문에 구는 담이 오래 살기를 바란다. 그런 담을 자신이 바라보고 있으므로. 천년 만년 그렇게 담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영원한 사랑 이야기로 이 소설을 읽어도 되지만, 이들을 이렇게 내몬 사회, 아이 때는 모든 것을 사람으로 보지만, 어른이 되면 사람도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는 말이 이 소설에 나오는데, 그렇게 사람을 돈으로, 물건으로 판단하는 사회의 모습을 이 둘의 사랑에서 보게 된다.


그것을 거부하는 삶이 얼마나 힘든지, 그렇게 살 수 없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음을. 적어도 담이와 구가 말했듯이 아이들에게 그런 세상을 물려주지는 말아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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