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인 (반양장) 창비청소년문학 107
천선란 지음 / 창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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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끝에 실린 작가의 말로 이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다.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뒤틀린 어른이 뒤틀린 아이를 만들고,그 아이가 자라 뒤틀린 어른이 되어 다시 뒤틀린 아이를 만드는 세상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렇게 온전한 어른이 사라진 세상이 되기 전에, 상처와 슬픔이 무기가 되어 또 다른 출혈을 일으키는 세상으로 향하지 않도록, 그런 마음으로 썼다.' (389쪽)


불모지의 땅을 산 사람이 있다. 그 땅에 화원을 만들겠단다. 미친 소리로 치부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화원엔 식물들이 자란다. 나인은 그런 화원에서 자란 아이다.


어느 날 나인은 실종된 아들을 찾는다는 전단지를 발견하고, 그 아이가 사실은 죽었음을 알게 된다. 가출이 아니라 죽음. 죽음에 관련된 아이. 그리고 그를 은폐하는 어른들. 나인 역시 모른 체 하면 그만이다. 누구도 알려고 하지 않는 일이기에.


하지만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슬픔을 나인은 외면하지 못하다. 그러다 그 즈음 자신이 지구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외계인.


그렇다. 우리는 자신과 다른 사람을 외계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렇게 외계인이라고 부르면서 그를 인정하면 얼마나 다행일까 싶지만, 외계인이라 언급하는 순간, 다름이 차별이 될 가능성이 많아진다.


외계인을 보았다고 주장하는 박원우는 그래서 친구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당한다. 물론 그의 가정형편도 거기에 한몫 보탰겠지만.


원우는 미친 놈 소리를 듣지만 그것으로 죽음에까지 이르러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권도현이라는 친구에게 밀려 죽게 된다. 그렇다면 권도현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당연히 원우를 살리려 해야 했지만, 그의 부모는 원우의 죽음을 무마하려 한다. 없던 일로, 원우는 그냥 가출한 학생이 되어야 했다.


전후 사정을 숲으로부터 전해들은 나인. 나인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친구들과 힘을 합친다. 물론 여기에는 친구들만이 아니라 어른들의 도움도 받게 되고. 원우의 문제는 해결된다.


다만,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나인과 어울리는 친구들과의 관계, 이들은 나인을 무조건 믿어주고 함께 행동했다. 외계인이든 아니든 친구라는 관계가 달라지지는 않으니까. 


그렇지만 문제가 해결된 후 이들은 각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 나인 또한 자신의 삶을 살아가야 하고. 


그렇게 사람들은 함께 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따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나인 역시 마찬가지다. 이렇게 보면 이 소설은 나인의 성장을 다룬 소설이 된다. 나인은 여러 일을 겪으면서 성장한다. 외계인이든 아니든 자신이 나고 자란 이 땅에서 살아가기를 선택한.                                        

이렇게 소설은 살인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이 지구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이 어떠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식물성을 띤 외계인 나인을 주인공으로 삼은 이유가 그것이다.


나인이 지구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지구에 뿌리를 내렸다는 말, 이는 바로 지구에서 함께 고통받으면서도 그것을 이겨내려는 삶을 선택했다는 말이다.


힘들다고 그냥 떠나버릴 수는 없음을. 그 힘듦 속에서도 삶을 찾아야 함을, 나인의 성장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소설에서 도현이나 주변 친구들이 원우를 대하는 태도는 다름을 차별로 인식하고 행동하는 경우다. 


작가가 '타인을 이해하지 못할 때, 타인에게 이해받지 못할 때 우리가 종족이 다른 외계인이라고 생각하며 언제나 마음이 편안해졌다.'(389쪽)고 했는데, 이것이 바로 다름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아닐까 한다.


그런데, 과연 이런 자세를 지닌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인의 친구인 현재나 미래처럼 무조건 믿어주는, 그래서 다름은 그냥 다름일 뿐인 그런 자세를 지닌 사람이 얼마나 될까? 오히려 세상엔 도현이처럼 친구였다가도 그 다름을 받아들이지 못해 배제하고 차별하는 태도를 지닌 사람이 더 많지 않을까.


그들이 행하는 행동이 소설처럼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않겠지만, 죽음과 비슷한 상태로 몰아가지는 않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도현이 주변 사람들이 원우를 배척하듯이. 다름이 바로 차별이 되어 배제하듯이.


그런 사회가 잘못된 사회고, 그런 어른들이 많은 사회가 바로 뒤틀린 어른들 사회라면, 바로 이 뒤틀린 어른들 사회를 바로잡으려고 하는 나인과 같은 아이가 있어야 한다. 그런 아이들이 외계인 취급을 받는 경우가 많다.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공연히 튀는 아이들이라고. 하지만 이런 아이들로 인해 뒤틀린 어른 사회가 재생산을 멈춘다. 이런 외계인 같은 아이들이 있어야만 뒤틀린 사회가 바로잡힐 수 있다.


소설이 흥미로우면서도 무언가를 계속 생각하게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뒤틀리지 않은 외계인 같은 존재들을 우리가 찾으려고만 하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으므로.


그러므로 이 소설을 읽고는 주변을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 역시 뒤틀린 어른들이 아닌지 하고. 이런 뒤틀림을 보여줄 외계인 같은 존재들이 주변에 있는지를... 그리고 주변에 있다면 감사해야 한다. 그들의 존재에 대해서.


그들을 경원하고 몰아내려고 하지 말고, 그들과 함께 뒤틀림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외계인을 주인공으로 했지만, 굳이 외계인이라고 하지 않아도 좋다.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 그래서 생명을 죽이는 일에 분노하는 사람.


나인은 분명 외계인인 누브 족으로 나오지만, 이렇게 나인과 닮은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 사회에는 이런 외계인들이 많으니, 그들을 찾아보는 것도 괜찮겠다 싶다. 찾으려는 마음을 먹는 순간부터 마음이 따스해질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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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드차일드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이수현 옮김 / 비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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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 기발하다는 표현을 하면, 누구나 생각할 수 없고, 특별한 사람만이 생각할 수 있다는 쪽으로 여겨질 수 있다.


특히 작가들의 상상력에 대해서는 작가라서 지닌 상상력이라는 생각을 하기 쉽다. 그렇기에 이런 상상력은 작가에게 맡기고 우리는 현실에 충실하자는 쪽으로 가기도 한다.


그런가? 상상력이 작가에게만 필요한가? 아니다. 우리는 누구나 상상력을 지니고 있다. 자기만의 상상에 빠져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것을 글로 옮겨 남에게 읽히는 사람이 작가일 뿐이다.


옥타비아 버틀러 소설을 몇 권 읽었다. [킨]을 비롯하여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 재미있게 읽었다. 작가의 상상력에 감탄하기도 하면서.


이번 작품은 단편소설집이다. 일곱 편의 소설이 실렸다. 모두 다른 내용이지만, 상상력을 자극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단지 가상의 세계라고만 생각하지 않고 우리가 바라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다. 또는 우리가 겪지 않았으면 하는 세계가 그려져 있기도 하고.


첫작품인 '블러드 차일드'부터 그렇다. 테란이 틀릭의 숙주가 된다. 숙주가 되어 아이를 낳게 된다. 그것도 여성은 인간의 아이를 낳아야 하기 때문에 가능하면 남성이 숙주가 되어 다른 생명체의 아이를 낳아야 한다.


이런 세상. 보호자가 필요한 세상이고, 수술을 통해서 아이를 낳을 수밖에 없는 현실임에도 누군가는 해야한다는, 그래야 테란이 보호를 받고 종족을 유지할 수가 있다. 즉 누군가의 희생으로 종족이 유지되는 세상이다.


테란을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틀릭을 외계 생명체로 바꾼다면, 외계 생명체가 인간을 보호하면서 자신들의 종족을 재생산하는 대상으로 인간을 이용하는 세상? 어쩌면 외계 생명체에 대한 두려움을 일으키는 일들이기도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음을, 이 소설을 읽으면서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외계 생명체와 인간의 갈등과 공생을 다룬 소설이 하나 더 있는데, '특사'라는 소설이다. 외계 생명체가 지구에 온다면 침공일까? 그들과 공생할 수 있는 길은 없는가? 처음에는 서로 소통이 되지 않아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겠지만, 소통하려는 노력 속에서 서로가 타협할 수는 없을까?


'특사'라는 소설은 외계 생명체와 공생하는 인간의 존재를 보여준다. 앞으로 우주 시대라면 그렇게 살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최근에 감염병이 창궐하는데, 감염병으로 인류가 글을 읽는 능력을 잃거나 말을 하는 능력을 잃은 사회를 그리고 있는 '말과 소리'라는 소설은 섬뜩하다.


인간이 소통할 수 있는 도구인 말과 글을 잃는다면 어떻게 될까?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넘어갈까? 그렇게 될 가능성도 있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다 그럴 수는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되고 인류는 혼란에 빠지게 되겠지만.


그럼에도 누군가는 말과 글을 기억할 수 있다. 기억한다는 것이 질투를 유발할 수도 있긴 하지만 그들로 인해서 희망은 남아 있게 된다. 이 소설은 디스토피아에서 유토피아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 소설로 읽힌다.


이 소설집에서 무엇보다도 소설의 역할이 무엇인지,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 '마사의 책'이다. 신이 마사에게 인류를 구원할 능력을 주고 한 가지를 하라고 한다. 마사는 무엇을 선택할까? 그리고 마사는 자신의 선택을 기억하기를 원할까?


어쩌면 작가는 인류를 위해서 무언가 한 가지를 하는 사람이다. 작가의 책이 바로 그렇다. 인간에게 꿈을 주는 역할을 작품이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은 작가와 작품에 대한 이야기, 또 작품이 인간에게 주는 의미를 이야기하는 소설로 읽을 수가 있다.


소설 외에 두 편의 수필이 실려 있는데, 한 편은 버틀러가 작가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짤막하게 쓴 글이다. 비록 짧지만 버틀러의 삶을 엿볼 수 있어서 좋은 글이고, 한 편은 글을 쓰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재능이나 영감을 잊으라는 말, 오로지 습관에 기대라고 하는 말. 그렇다. 버틀러의 말대로 '습관은 실제로 나타나는 집요함이다'(279쪽)


이런 습관이 버틀러를 유명한 작가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버틀러를 흔히 SF작가로 분류한다. SF작가든 아니든, SF소설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 의문을 품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버틀러의 말로 대답을 대신한다.


'과거, 미래, 현재에 대한 SF의 사고가 무슨 쓸모가 있을까? 대안적인 사고와 행동을 경고하거나 고려하는 SF의 경향은 무슨 쓸모가 있을까? 과학과 기술, 혹은 사회 조직과 정치 방향이 미칠 수 있는 영향에 대한 SF의 탐구는 무슨 쓸모가 있을까? 기껏해야 SF는 상상력과 창조력을 자극할 뿐이다. SF는 독자와 작가를 다져진 길 밖으로, '모두'가 말하고 행하고 생각하는 좁고 좁은 오솔길 밖으로 끌어낸다. 지금 그 '모두'가 누구든 간에 말이다.' (274쪽)


이게 어디인가? 버틀러의 소설이 바로 이렇게 '좁고 좁은 오솔길 밖'으로 우리를 끌어내고 있으니... 주어진 길에서 벗어나는 즐거움. 새로운 길을 걷는 즐거움. 버틀러 소설에서 느낄 수 있다. 그것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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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주 먼 섬
정미경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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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아이 이우, 점점 눈이 보이지 않게 되어 섬으로 돌아온 남자 정모, 듣고 말할 수 있지만 어느 순간 말하지 못하게 되어 남들에게 듣지도 못한다는 소리를 듣는 아이 판도. 판도를 데려다 키운 이삐 할미.


섬에 사는 주요 인물 넷이다. 이 중에 소설을 이끌어가는 서술자로 등장하는 인물은 이삐 할미를 빼고는 셋. 


섬과 연결된 뭍에 사는 사람으로는 정모의 친구이지만 사업가 아버지를 둔 태원이 있고, 이우를 정모에게 맡긴 이우의 엄마 연수가 있다. 


태원이 간혹 서술자로 등장하기는 하지만 이는 섬에 사는 사람들의 삶과 대비하기 위한 장치로 기능한다. 그가 사는 삶은 섬에서 사는 사람들의 삶과는 반대의 삶, 즉 아버지 아래에서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정모는 모든 일을 접고 섬에 들어온다. 그가 하려는 도서관 만드는 일은 서울에서 하는 활동과는 상관 없다. 그는 섬에서 다른 삶을 살게 된다. 마찬가지로 소위 문제아라는 소리를 듣는 이우도 마찬가지다. 


이우가 어긋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누구에게도 이해를 얻지 못한 이우는 사고로 인해 섬으로 보내진다. 그간 살아왔던 삶과는 전혀 다른 삶 속으로 들어오게 된 것. 


판도는 그렇다고 할 수 없지만, 아예 어린 시절에 혼자가 되어 이삐 할미의 손에서 자랐기 때문에 전의 삶과 지금의 삶을 비교할 수 없지만, 그가 말을 잃게 된 과정을 보면, 판도 역시 다른 삶을 산다고 할 수 있다.


정모, 이우, 판도는 섬에서 다른 삶을 산다. 이때 삶은 그동안 살아왔던 삶과 비교하면 긍정적인 쪽으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태원 역시 다른 삶이긴 하지만 그 삶은 부정적인 쪽으로다. 정모의 말을 빌리면 학창 시절에 말썽피우던 태원에게서 느낄 수 없던 거리감을 돌아온 태원에게서 느껴진다고 했으니... 이는 돈만 아는 아버지 영도를 닮아간다는 표현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섬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뭍으로부터 분리되어 자신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들어 긍정적인 쪽으로 변화를 이끌어낸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섬에서 사는 사람들은 각자 섬이기도 하지만 또 연결되어 있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상처를 알아도 그 상처를 더 덧내지 않고 감싸 안아주는 생활들.


특히 소설의 처음에 등장하는 이우의 변화가 바로 '섬'의 긍정적인 모습을 잘 드러낸다. 이우가 점점 변해가는 모습. 사람들과 어울리는 모습. 그러면서 자신을 긍정하게 되는 모습 속에서 소설은 '섬'이라는 장소가 주는 긍정성을 보여준다.


제목은 '당신의 아주 먼 섬'이지만, 갈 수 없는 섬이 아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가 닿은 섬도 아니지만, 열려 있는 섬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섬'이라는 제목을 지닌 정현종과 함민복의 시를 떠올렸다. 그리고 이 소설은 이 두 시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정현종 시는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 그 섬에 가고 싶다'이고 함민복 시는 '물 울타리를 둘렀다 / 울타리가 가장 낮다 / 울타리가 모두 길이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모두 짧은 시다. 하긴 섬이 은 뭍에 비하면 작으니, 섬에 관한 시도 짧아야 한다.


그렇다면 소설은? 시보다는 길어야 하겠지. 이 시들이 하고 싶은 말을 정미경의 이 소설에서 다 하고 있다고 본다.


서정적 자아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을 통해 소설은 사람들 사이에 있는 섬, 그리고 그 섬을 어느 정도 엿본 사람들의 이야기, 모두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지만, 울타리가 길이 될 수 있는 사람들 관계.


우리는 모두 독립된 존재이기도 하지만 연결된 존재이기도 하다. 그런 사실을 이 시들이 보여주고 있다면, 정미경은 세 인물을 통해서 닫힌 존재들이 조금씩 열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할 수 있다.


이렇듯 작가는 '섬'이라는 장소를 통해서 사람들의 관계를 보여준다. 닫혀 있는 듯하면서도 열려 있는, 그렇다고 쉽게는 갈 수 없는 그런 섬, 그것이 바로 사람들의 관계임을.


당신은 이해하기 힘든 존재이지만 아주 먼 섬이 갈 수 없는 섬은 아니니, 당신에게 갈 수 있는 길은 열려 있다는, 당신이라는 섬이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지만 그 울타리는 길이기도 함을, 이 소설을 통해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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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들의 연인
정미경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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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경 소설집을 읽다. 7편의 소설이 묶여 있다. 공통된 주제를 찾기 힘들지만, 소설이란 원래 삶을 표현하는 문학 아니던가. 그러니 삶에서 겪음직한 일들이 이 소설집에서 표현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전체적으로 이 소설집을 읽으면서 '욕망'에 대해서 생각했다. '욕망?' 무엇에 대한 욕망일까? 다양한 욕망이 있겠지만, 우선 '돈'에 대한 욕망을 꼽을 수 있겠다.


돈이라는 말, 자본이라는 말, 어느 정도는 생계에 꼭 필요한 돈. 이 돈을 위해서 살지는 않는다고 하지만, 대부분 돈 앞에서 무력해지는 인간들의 모습 아닌가?


'돈'은 어느 정도는 있어야겠지만, 더 많아지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될까? 이를 욕망으로 바꾸어보자. 욕망은 삶을 능동적으로 이끄는 역할을 한다. 그렇지만 욕망이 충족된 다음에는 어떻게 될까? 내가 이룰 것을 다 이루었노라 한다면? 그 다음 삶은 어떤 모습을 띨까?


'너를 사랑해, 들소, 내 아들의 연인'에서는 돈을 매개로 욕망을 이야기 할 수 있다. 안정된 자리를 잡지 못해서, 돈 때문에 위기 상황에 처한 자산관리사와 여전히 시간 강사 역할밖에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자신들의 욕망을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관계. 그것이 너를 사랑한다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그들은 사랑을 위해서 또다른 매개체를 필요로 할 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것이 바로 '돈'이다. 자신들이 바라는 생활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돈'.  그 돈을 지니고 있는 사람을 이용해서 욕망을 실현시키려 하지만, 과연 그 욕망이 실현되었을 때 그들 관계가 지속될 수 있을까?


너를 사랑한다고 하는 말이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욕망을 포기하지 못하는, 어쩌면 욕망의 크기 앞에서 자신들의 사랑을 이용하는 그런 관계. 이런 관계의 뒤틀림이 '들소'라는 소설에서 잘 나타난다.


조각가. 예술가다. 돈하고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주인공이 남편과 갈등을 하는 이유는 돈에 있다. 자신의 일을 돈과 관련지어 할 수밖에 없는 상황. 이상적인, 사회사업가라 할 수 있는 남편에게 반했지만, 함께 살아가면서는 그 점이 바로 싫어지는 이유가 된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 아니라 돈을 위한 예술을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 사회사업을 한다고 하지만, 그 사회사업에는 '돈'이 필수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다. 그것을 하지 못한다면 자신이 그 사람을 떠날 수밖에 없다. 이별이든 죽음이든.


소설 속 남편의 죽음은 그래서 필연이다. 다만 예술가로서의 자신을 찾는다면 다시 남편의 일에 대해서 욕망에 대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작품이 들소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이미 사라져 버린 동물. 여기서는 이제 '돈'은 개입하지 않는다. '돈'이 개입하지 않을 때 예술은 자기만의 특징을 지니게 된다. 


'돈'에 얽힌 이야기는 '내 아들의 연인'으로 넘어가면 개인과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 대 관계의 문제가 된다.


가난한 사람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이 살아온 환경과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관계가 문제가 된다. 결국 사람 대 사람의 관계가 아니라 관계 대 관계의 문제가 되기 때문에 그런 관계는 지속될 수밖에 없다.


차이, 그 사람을 욕망하지만, 그 사람이 지닌 관계는 용납할 수가 없는, 용납할 수가 없다는 말이 적확한 것이 개인으로서 만났을 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 주변의 사람들과 만났을 때는 문제가 도드라져 보이게 된다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욕망의 테두리에 개인은 받아들일 수 있지만 그 개인이 지니고 있는 관계들까지는 받아들이기 힘들고, 또 내 욕망의 테두리가 아닌 내가 지니고 있는 관계의 테두리로 확장하면 그 개인조차도 받아들이기 힘들어지게 된다.


사랑에도 개인이 아닌 집단으로서의 관계가 있음을, 그러한 집단이 서로 다르면 어울리기 힘들어짐을 '내 아들의 연인'이라는 소설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욕망의 끝을 보지 않으려는 몸부림, 아니 욕망의 끝을 본 다음에는 더 이상의 삶에 의미를 찾지 못하게 됨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 바로 '밤이여, 나뉘어라'다.


늘 내 앞에 있던 존재, 천재라고 불리던 친구가 몰락한 모습,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나 역시 내 욕망의 끝을 보게 된다. 그래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나는 친구의 몰락한 모습을 인정하지 않아야 한다.


그 친구 역시 아마도 자신의 욕망의 끝을 보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더이상 나아갈 곳이 없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자신을 견딜 수 없게 된다. 결국 순간이여 멈추어라 하고 말하는 순간, 사람의 삶은 끝나게 된다.


그러니 우리는 늘 욕망해야 한다. 인간이 용납할 수 없는 욕망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추동하는 욕망. 그러니 돈을 위해서 사랑을 이용하는 것은 관계의 파탄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또한 맹목적인 이상 추구 역시 파탄날 수밖에 없다. 현실을 떠난 이상은 공허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욕망을 갖지 않아서도 안 된다. 욕망이 없는 상태, 이를 갈망이 없는 상태라고 한다면 그때부터는 삶이 무의미해진다. '밤이여, 나뉘어라'에 나오는 천재처럼. 


결국 이 소설집을 읽으며 어떤 욕망을 지녀야 하는가? 욕망이라는 말이 부정적이라면 어떤 갈망을 지녀야 하는가로 바꾸면 된다.


다양한 내용의 소설들이지만, 돈에 대한 욕망이 결코 우리 삶을 행복하게 하지는 못함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과 욕망(갈망)을 상실했을 때의 인간의 모습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


삶이란 이렇게 다양한 욕망과 갈등들이 얽혀 있는 것임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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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의 제왕 - 전6권 세트
존 로날드 로웰 톨킨 지음, 한기찬 옮김 / 황금가지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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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읽어봐야지만 하다가 미루고 또 미뤘던 소설. 반지의 제왕. 영화를 먼저 보아서 그런지, 굳이 소설을 읽을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에 선뜻 손에 잡지 못했던 소설이다.


그러다 영화와 소설이 같지 않음을, 서로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옴을 알고 있으면서 읽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톨킨의 이 작품을 르 귄이 엄청나게 칭찬하고 있으니, 안 읽을 수가 없다.


사서 소장하면서 꼼꼼하게 읽으면 좋겠지만, 그렇게까지는 못하고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었다. 예전 판본이다. 예전 판본답게(?) 글자도 작고 빽빽하다. 눈이 피곤하다. 게다가 6권이나 되지 않나.


1부, 2부, 3부 각 2권씩.


오랜 시간 읽어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지만, 읽다보면 순식간에 시간이 지나갔음을 깨닫게 된다. 그만큼 흥미롭다. 물론 읽으면서 영화에서 받던 인물들을 떠올리기도 하고, 영화와 다른 점을 찾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놀란 점은 호빗 족의 나이다. 프로도를 어리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는 영화에서 호빗들이 작은 키로 나오기 때문에 착각한 것이다. 소년의 모험이 아니다. 호빗의 나이로 프로도는 50이 되어서야 모험에 나서게 된다. 


함께 모험에 나서는 샘이나 메리, 피핀 역시 어린 나이라고 할 수 없고. 하지만 나이가 중요하랴? 자신의 공간을 떠나지 못했던 존재가 다른 공간을 여행한 다음에 다시 돌아오게 되는 성장소설의 구조라고 해도 좋다.


환상적인 장면이 많이 나와 환상소설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인간이 중심이 된 세상만을 생각하지 않고, 인간이 지금처럼 문명을 이루지 않고 살던 시대, 자연과 공생하면서 살던 시대를 생각하면, 이 소설에 나오는 환상적인 장면들은 어떻게 우리 인간이 자연을 떠나게 되었나를 생각할 수도 있게 한다.


그래서 엔트 족들이나 요정들의 이야기를 그냥 환상으로만 치부할 수 없다. 이제는 자연과 소통을 할 수 없게 된, 각자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된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소설에서 1기, 2기, 3기라고 시대를 구분하고 3기가 반지의 시대라고 하지만, 이 반지의 시대는 아직 인간이 자연과 분리가 되지 않은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 반지의 시대가 지나면 인간의 시대가 되고, 자연은(요정이나 엔트와 같은 다른 존재들은) 뒤로 물러나게 된다.


이 장면을 읽을 때 미야자키 하야오가 만든 '모노노케 히메(원령공주)'에서 동물들의 크기가 점점 줄어드는 장면, 인간이 철(총)을 이용해 신을 죽이는 장면이 떠올랐다. 톨킨은 이 소설에서 인간이 죽이지 않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자연히 그들의 영향력이 줄어들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기는 하지만, 결국 인간이 중심인 시대로 흐르게 됨을 보여준다.


반지를 운반하는 사명을 띤 프로도, 그를 수행하는 샘, 그리고 같은 호빗족으로 프로도와 함께 하겠다는 메리와 피핀, 여기에 여행을 하면서 만나게 되는 아라고른(영화에서는 아라곤으로 나온다)과 요정 레골라스, 난장이 김리 그리고 보로미르. 이들을 인솔하는 마법사 간달프.


이야기는 단순하다. 반지를 없애기 위해서 조력자들과 함께 떠난다. 그 과정에서 갈등도 겪고, 어려움도 겪는다. 그러나 결국은 반지를 없앤다. 


단순히 이렇게만 판단할 수가 없음을 소설을 읽어가면서 알게 된다. 반지를 운반하는 여정에 함께 하는 사람들은 각자 자신들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소설은 빌보가 쓴 이야기를 프로도가 이어서 쓰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의 모험이 이야기로 전승되는 것이다. 이 이야기 속에 반지를 운반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프로도는 책을 끝내지 않는다. 책을 끝낼 사람은 샘이다.


프로도가 끝까지 반지를 운반하는데 함께 했던 충실한 조력자 샘. 샘은 호빗 마을에 돌아와 자신의 이야기를 써내려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모험의 끝이다. 영웅들의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우리들의 삶으로 이야기는 계속되어야 한다. 그래서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샘의 말로 끝난다.


"자, 내가 돌아왔어."(6권 228쪽)


소설은 위대한 여정을 끝난 인물들의 위대한 삶으로 끝나지 않는다. 혁명은 위대함을 넘어서 일상으로 돌아와 일상에서 행복한 삶을 살 때 완성된다.


파괴된 것들의 재건. 일상성의 회복. 여기에 영웅은 퇴장해야 한다. 소설에서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프로도로 끝맺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가 이야기를 완성하지 않고 샘에게 다음 이야기는 샘의 이야기라고 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이런 점에서 왕이 된 아라고른으로 이야기를 끝맺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위대한 마법사인 간달프도 또 반지 운반자였던 프로도도 모험의 시대가 끝났을 때 물러나야 한다. 그들이 그렇게 모험을 한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일상의 회복 아니겠는가?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면서 살아가는 사회. 그런 모습이 일상이 된 사회여야 한다고 톨킨은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러므로 그들의 모험은 일상에서 끝나야 한다. 그러니 샘이 자신이 돌아왔다고 하는 말로 소설을 끝맺을 수밖에 없다.


반지를 없애고 사우론을 퇴치하면서 소설이 끝날 거라 생각했는데,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호빗으로의 귀환. 그리고 호빗에서의 또다른 일들. 그 일들이 끝나고서야 비로소 일상이 회복됨을 보여주고 있어서 더 좋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그냥 읽어보면 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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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이카 2023-07-29 13: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kinye91님, 안녕하세요? <밤의 언어>에서 르 귄이 자신보다 어린 나이에 톨킨을 알게 된 사람들을 부러워 한다고 고백했었지요. 르 귄의 <반지의 제왕> 해석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저는 늘 kinye91님이 읽으신 것을 몇 년 후에 읽고 있더라구요. 어쩌면 이 <반지의 제왕>도 몇 년 뒤에는 읽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

kinye91 2023-07-29 13:22   좋아요 1 | URL
에로이카 님 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르 귄의 말을 조금 바꾸면 저는 조금 더 젊은 시절에 르 귄의 작품을 읽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해요. 소설도 또 다른 글들도 너무 좋더라고요. 그래서 르 귄이 말한 작품들을 읽고 싶어지기도 했고요. 저 역시 르 귄이 말한 작품들을 언젠가는 읽어야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