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샹보 거리
가브리엘 루아 지음, 이세진 옮김 / 이상북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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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 루아. 역시 애트우드 책을 읽다가 읽어야지 결심한 작가. 그렇게만 생각했다. 이 책을 펼치면서 작가 약력을 보기 전까지는.


이런 이런, 가브리엘 루아가 바로 그 작가였구나. 머리 속에서 사라진 기억을 탓해야 하는지, 참... 오래 전에 한 방송사에서 "책 책 책! 책을 읽읍시다!"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선정된 책들은 웬만하면 사서 읽었는데...


  그때 선정된 책 중에 가브리엘 루아가 쓴 [내 생애의 아이들]이 있었다. 교사로 근무하면서 만났던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 소설이라고 해도 좋고, 수필이라도 해도 좋을 그런 작품이었단 느낌이 남아 있는데...


  잔잔하단 느낌. 그냥 읽으면서 마음이 편해지는 작품이었다. 그런 기억은 있다. 작가 이름은 기억하지 못했지만. 그런데 이 작품도 그 작가의 작품이었다니... 참.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다. [내 생애의 아이들]보다 더 앞선 시기를 다루고 있다. 작가의 자전소설이라고 생각하면, 작가의 어린시절부터 교사가 된 시점까지를 다루고 있다.


  짧은 소설, 최성각 용어대로 하면 '엽편소설'이라 할 만한 작품들이 많은데, 아주 어린 시절, 어린아이의 눈으로 본 어른들의 모습부터, 점점 자라면서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모습이 소설집이 진행될수록 나온다.


결코 상류층이라고 할 수 없는, 어쩌면 우리나라 작품 '검정 고무신'을 연상하게 하는 그런 인물들과 배경이 나오는데, 그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추억에 잠길 수가 있다.


이미 지나온 세계에 대한 향수라고 할까?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어린시절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해야 할까? 이 소설집은 그러한 마음이 들게 한다.


비록 배경이 캐나다의 시골 마을이지만, 우리나라 50-60년대를 떠올리게 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어린 소녀의 눈으로 본 마을 사람들, 그리고 가족들, 그들의 이야기.


어려운 환경임에 분명하지만, 소설은 우울하지 않다.우울한 내용이 나와도 그런 일이 우리 인생에서 거쳐야 할 통과의례처럼 여겨진다. 한편의 동화를 읽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한 아이의 성장기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소설은 시간이 흐르다가 마지막 소설에 이르러서는 서술자가 교사가 되어 끝난다. 아련하게 과거를 추억하게 하는, 우리가 거쳐온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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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3-03-20 12: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저 《내 생애의 아이들》 잔잔하고 따뜻하게 기억하는데 그 전의 시간이라니 궁금하군요
담아갑니다^^

kinye91 2023-03-20 12:53   좋아요 2 | URL
잔잔하고 따뜻한 소설이었어요. 읽으면서 마음이 포근해지는 느낌을 주는 소설이라서 좋았어요.

은하수 2023-03-20 13:01   좋아요 1 | URL
네 그럴거 같아요
품절이라서 어쩔수없이 중고로..ㅠ
그래도 잘 읽어보겠습니다^^*
 
디어 라이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3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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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어라 딱 정의할 수 없는 삶이다. 우리가 계획한 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어느 순간,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무엇인가에 휩쓸려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갈 수도 있는 것이 삶이지 않을까?


한 가족을 이루고 자식을 낳고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삶도 있겠지만, 그런 삶을 분명 거부하지 않고, 또 큰 불만도 없는데, 그 틀에서 벗어난 삶으로 나아가는 자신을 발견할 때도 있지 않은가.


앨리스 먼로가 쓴 소설집. 우연찮게도 첫소설집과 마지막 소설집을 읽게 되었다. 이 소설집에서 이 작품을 끝으로 더이상 작품 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말이 나왔는데, 그 후 작품을 썼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으니, 그냥 그렇게 생각한다.


첫번째 소설집에서는 여성들의 삶을 주로 다루었다면, 이 소설집에서는 딱히 여성들의 삶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그냥 우리들 삶이 나온다.


목적을 정해놓고, 또는 틀을 정해놓고 그 틀에 맞춰사는 삶이 아니라 흐름에 따라 이리저리 변하는 삶들.


그래서 이 소설집을 읽으면서 '정상가족'이란 말을 떠올렸다. 과연 정상가족이라는 말이 통용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소설집이다.


남녀가 만나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우리말대로 백년해로하는 삶, 그것이 정상가족일까? 그런 삶을 정상이라고 하는 언어로 규정지으면, 다른 삶들은 정상에서 벗어난 삶이 되지 않을까?


먼로의 이 소설집에서는 이런 정상성이 정상이 아님을, 어쩌면 우리 삶은 규정할 수 없는 다양한 삶들도 이루어져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첫소설에서 이런 점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제목부터 그렇다. '일본에 가 닿기를'. 우리 삶이 이럴지도 모른다. 나는 편지를 쓴다. 그리고 병에 담아 태평양에 놓아둔다. 그 편지가 일본에 가 닿기를 바라면서.


즉, 목적지가 명확하지 않다. 가 닿을 수 있을지, 닿지 않을지 알 수가 없다. 그럼에도 나는 편지를 쓴다. 그것이 삶이므로.


이런 삶 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받아들여야 한다. 정상이라고 규정되어야 할 삶은 없다. 삶은 모두가 정상이다. 그러니 정상가족이란 말도 없다. 아니 있다고 하더라도 모두가 정상가족이다.


모든 삶은 정상이고, 모든 가족은 정상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신에게 다가오는 삶.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에 갇혀 있으면 피하려고 할 것이다. 마음은 이미 떠났지만 몸은 떠나지 못하는 삶을 정상이라는 틀에 가둬놓고 살아가게 된다. 과연 그런 삶이 정상일까? 먼로는 그렇게 묻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소설의 끝에서 주인공은 '정상'이라는 말에 갇히길 거부한다.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그녀는 피하려 하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서서 다음에 다가올 일을 기다렸다.'('일본에 가 닿기를' 중에서. 41쪽)


바로 이것이 삶이고, 삶은 그렇게 우연과 우연히 겹쳐 이루어진다는 생각. 수많은 우연들 중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소설집이다.


여기에 이 소설집 끝부분에 실린 네 편의 소설들은 앨리스 먼로의 자전적 소설이라 할 수 있다. 먼로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이 소설들을 읽으면 먼로의 소설에 나온 인물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먼로 소설을 읽으려면 이 소설집에 실린 네 편의 단편 소설을 먼저 읽으면 좋겠단 생각이 든다. 한편 한편 모두 읽을 만한 소설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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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그림자의 춤 앨리스 먼로 컬렉션
앨리스 먼로 지음, 곽명단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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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트우드가 쓴 책을 읽다가 발견한 소설가다. 노벨문학상을 받았다고 했는데, 기억에 없다. 어느 순간부터 노벨문학상은 문학상이고, 내가 읽는 작품은 작품이다라는 태도를 지니게 되었다.


한때는 노벨문학상을 탔다고 하면 꼭 읽어봐야겠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는데, 이제는 노벨문학상이 무엇이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


상을 받았다는 사실보다도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소개한 소설이라는 점에서 꼭 읽어봐야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읽으면서 애트우드의 추천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첫소설부터 버지니아 울프가 쓴 '자기만의 방'을 연상케 하는 작품이다. '작업실'이란 소설인데, 작품을 쓰기 위해서 집이 아닌 작업실이 필요하다는 여성의 말. 이 작품이 꽤 오래 전에 쓰였는데, 지금도 집은 이런 의미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씁쓸한 마음이 일기도 하고.


조금은 나아졌으려나? 이 소설에서 이런 표현이 나온다. 생각해 보자.


'집은 남자가 일하기에는 아주 좋다. 남자가 일감을 가져오는 집은, 말끔히 청소가 되어 있고 일하기에 딱 좋도록 남자 중심으로 새로 배치할 수도 있다. 남자에게는 일이 있다는 걸 누구나 알아준다. 따라서 으레 전화를 받는 일도, 어디 두었는지 모를 물건을 찾는 일도, 아이들이 왜 우는지 알아보는 일도, 고양이 먹이를 주는 일도 기대하지 않는다. 방문을 닫아걸어도 무방하다. 방문이 닫혀 있고 그 방 안에 엄마가 있다는 걸 아이들이 안다고 생각해 보라.(생각해 보라고 남편에게 말했다.) 왜냐, 아이들은 그런 생각을 하는 자체도 용납하기 어려울 테니까. 여자가 허공을 응시한 채, 남편도 자식도 없는 엉뚱한 곳을 바라보는 건 자연의 섭리를 저버린 짓과 마찬가지라고 여길 테니까. 그러니 여자에게 집이란 남자와 같은 곳이 아니다. 여자는 누구들처럼 집에 들어와서 이용하고 마음대로 다시 나가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여자는 곧 집이다. 떼려야 뗄 수 없다.' ('작업실'에서. 13쪽) 


하지만 작업실을 얻었다고 해도 집에서와 완전히 다른 삶을 살지 못한다. 임대해 나간 작업실에서도 주인은 남자다. 여자는 보조 역할을 할 뿐이다. 게다가 남자 주인은 여성 임대인을 함부로 대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허락을 받는 일, 형식적인 허락이야 받지만, 언제든 마음대로 여성 임대인의 작업실을 드나들 권리가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마치 호의를 베푸는 듯한 태도로.


여성 임대인이 이런 태도를 용납하지 않으면 그때부터 태도가 돌변한다. 어떤 꼬투리를 잡아서라도 여성 임대인을 비난한다. 견디기 힘들 정도가 된다.


결국 집이든 작업실이든, 여성은 독립적인 존재로 인정받기가 힘들다. 지금은 좀 나아졌다고 하겠지만 먼로의 소설 당시는 그렇다.


이렇게 여성은 남성의 간섭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는 없다.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생활을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한다.


이 소설집에는 주인공이 대부분 여자다. 그만큼 여성의 삶에 관심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소설이 '사내아이와 계집아이'란 소설이다.


어린 시절에는 남성과 여성의 구분을 그리 하지 않는다. 집안일에도 물론 어느 정도의 분리는 있지만, 계집아이가 아버지를 돕는 일을 막지는 않는다. 그러나 어느 순간이 되면 성에 따른 일의 구분이 생기고, 행동에도 차이가 난다.


말을 도살하는 장면에서, 말이 도망치려고 했을 때 그동안 아버지의 일을 도와주던 딸은 말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문을 닫으라는 아버지의 말을 거역한다. 문을 열어둔다. 생명의 소중함을 깨달아가는 순간이다.


자연과 인간의 삶이 닫히지 않고 열리는 순간을 표현했다면, 그동안 소심했던 남동생은 반대로 행동한다. 말을 도살하는 일이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듯이, 문을 닫지 않은 누나를 비난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아버지의 말이 성차를 확인하게 한다.


"계집애일 뿐이니까."('사내아이와 계집아이'에서. 227쪽)


이 성차는 앞으로 세상을 살아가는데 많은 걸림돌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비관으로 끝나지 않는다. 세상을 아름답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으므로.


소설집의 마지막 소설 '행복한 그림자의 춤'에서 이 점은 극명하게 드러난다. 마살레스 선생님은  남들에게 인정받지 못하지만, 자신만의 세계를 꾸준히 살아간다. 그래서 남들이 보기에 딱하다는 표현이 어울리지만, 서술자는 딱하다는 표현을 할 수가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선생님은 이 각박한 세상에 행복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이 마음에 남는다.


'우리는 도대체 왜 딱한 마살레스 선생님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걸까. 분명코 하고도 남을 이 상황에. 그건 행복한 그림자의 춤이 우리를 방해하기 때문이고, 그 음악은 선생님이 사는 저쪽 나라에서 보낸 코뮈니케이기 때문이다.'('행복한 그림자의 춤'에서. 386쪽. 코뮈니케-문서에 의한 국가의 의사 표시를 뜻하는 프랑스어로, 외교상의 공문서, 정부의 공식 성명서 따위를 이른다.고 주로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이 소설집에서는 당시 시대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지금과는 다른, 그렇지만 어쩌면 지금도 통용되고 있는, 그런 삶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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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3-03-13 11: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머 표지가 좀 많이 화사해졌어요^^
전 구판으로~~좀 칙칙했죠
저도 이 책 보면서 아파트 베란다 너머로 보이는 저 녹색 원룸들 위 옥탑방 한칸 나만의 비밀장소로 갖고 싶다고 생각했었어요^^
매일 거기로 출근도장 찍는 상상이요. 거기서 책보고 화분키우고 점심 해먹고 내방아 잘 있어 이러면서 걸어서 집으로 퇴근하는 그런 상상이요. 상상하게 하는 힘이 삶을버티게 해주는 앨리스 먼로의 책이 었어요.

kinye91 2023-03-13 19:57   좋아요 1 | URL
꽤 오래된 소설이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생각할거리를 주고 있어요.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그 중 하나고요.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 정호승의 시가 있는 산문집
정호승 지음 / 비채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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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은 유명한 시인이다. 이렇게 시작한다. 그를 만난 적은 없다. 단지 얼굴을 본 적은 있다. 안치환 시노래 콘서트에서. 그때 정호승이 나와서 시를 낭송했다. 


안치환이 시에 곡을 붙여 노래를 부르는데, 시도 좋지만 노래도 좋았다. 거기에 정호승이 직접 낭송하는 모습을 보기도 했으니, 그런 호사가 없었다.


2007년이었다. 서강대에서 이루어졌던. 그렇게 정호승을 시로만이 아니라 노래로도 만났다. 그때 받았던 안치환의 사인. 여기에 정호승 시도 있다.


그리고 이제는 시와 산문이 하나가 된 책으로도 만나게 되었다.


정호승의 시가 먼저 한 편 나온다. 그리고 그 시에 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시와 산문. 서로 다른 것 같지만 다르지 않음을 글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시도 좋지만 시와 관련된 산문을 읽으면서 시인 정호승이 아닌, 인간 정호승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 정호승이 만난 사람들, 그리고 그 시가 어떻게 해서 우리 곁에 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사연.


한편 한편의 시와 산문이 다 좋다. 읽으면서 마음이 따뜻해진다. 글을 통해서 위안을 얻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인간 정호승의 모습을 알 수 있게 해준다는 데 이 책의 묘미가 있다. 시인의 개인 생활에 대해서 우리는 잘 모르고 있지 않은가.


그냥 시를 통해서 만나든지, 아니면 산문을 통해서 짐작을 할 뿐인데, 이 책은 정호승 자신이 자신의 이야기를 시를 통해서 산문으로 풀어내주고 있다. 


살아온 이야기, 살아가는 모습, 그리고 삶을 대하는 태도. 그렇게 정호승은 시와 산문을 통해서 시와는 다르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 책에서는 정호승이 만난 많은 사람들이 나온다. 그들을 통해서 깨달은 바를 이야기하고, 또 어느 한 편에 치우치지 않은 모든 존재를 사랑으로 보려는 자세가 나타나 있어서, 자신만을 중심으로 여기는 삶을 반성하게 한다.


또한 첫글에서 말하고 있듯이 온전한 삶만이 삶이 아니라 깨어진 삶도 삶임을, '산산조각'이라는 시를 통해서, 그 시와 관련된 이야기를 통해서 전해주고 있다.


그렇다. 우리 삶은 바로 이것이다. 삶의 순간순간이 모두 삶이고, 그것이 온전한 삶임을. 꼭 온전한 삶을 찾으려 헤맬 필요가 없음을. 그냥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살면 된다는 마음을 갖게 한다.


정호승의 시하면 마음에 위안을 준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 책에 실린 산문들도 그렇다. 마음에 위안을 주는데 시와 산문을 가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는 책이다.


그냥 생각날 때마다 한편씩 읽어도 좋을 책이다. 곁에 가까이 두고 틈틈이 읽으면 좋을 책.


덧글


읽다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었다. 그 부분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더라면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


윤동주에 관한 글이다. 윤동주의 무덤을 찾아갔던 일화를 이야기해주는 글에서,, 류기천 씨의 말이라고 하는데...


"... 윤동주의 친어머님은 일찍 죽고, 그 후에 윤동주는 새어머니 밑에서 자랐는데, 그 어머니가 중풍을 일으켜..." (440쪽)


내가 알기론 윤동주는 새어머니 밑에서 자란 적이 없는데... 검색을 해보니, 어머니 김룡(김용) 씨는 1948년에 돌아가신 걸로 나와 있다. 그렇다면 용정에 있는 류기천 씨의 이 말에 대해서 책에서 부연 설명을 해주었더라면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을 했다. 


우리나라 국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가운데 한 명인 윤동주에 관한 이야기인데, 이 책을 읽고 윤동주의 가족관계에 대해서 잘못 알 수도 있지 않나 하는 우려가 생겼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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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릭스와 크레이크 미친 아담 3부작 1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차은정 옮김 / 민음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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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한 판단은 다 다르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 또는 만나지 않는 사람에 대한 판단 역시 다르다.


다름을 인정하고 공존하면 좋겠지만, 이 다름이라는 이유로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해서도 안 된다. 그냥 다르다고 넘어갈 수 없는 문제가 있다. 바로 인류의 생존에 관한 문제라면.


과학기술은 계속 발전하고 있다. 후퇴라는 말은 과학기술에는 없다. 어려운 문제에 부딪히면 그 난관을 과학기술의 힘으로 해결해 나가려고 한다.


전염병이 발생하면 백신을 개발하고, 식량위기가 닥치면 화학농법이라든지 또는 대체육과 같은 과학기술을 이용한 식량 개발을 하고, 기후 위기에 봉착하면 또다른 과학기술로 해결하려고 한다. 


계속 발전되는 과학기술. 이런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종'이라는 개념이 희박해지고 있다. 유전자변형, 또는 유전자 조작이라고 하는 기술이 지금도 많이 발전하고 있고, 대체육이라는 개념까지도 나오고, 스마트팜(스마트농장이라고 흙과 관계없이 농사를 짓는 기술)도 운영이 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우리를 유토피아로 이끌까? 역사를 보면 유토피아를 만들겠다고 주장하면서 사람들을 디스토피아로 몰아넣은 경우가 한둘이 아니지 않은가?


유토피아란 명목으로 디스토피아로 사람들을 이끌어가는 경우를 보면서도 '다름'이라고 인정해야 할까? 그 다름을 용인해야 할까? 아직 오지 않은 세계니, 판단을 유보하고 한번 지켜보자고 해야 할까? 결과나 나타난 다음에는 돌이킬 수 없을텐데도.


이 소설은 그런 디스토피아를 그리고 있다. 현생 인류가 너무 많다고, 현생 인류는 사라지고 새로운 인류가 나타나 (완벽하게 조작된 유전자를 타고난, 그래서 그들에게는 갈등도 없는, 오로지 채식으로도 생활이 가능한, 죽음이라는 말을 모르는 그런 존재들) 지구에서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를 실행에 옮긴 사람이 등장한다.


뛰어난 과학기술 능력으로 그는 인간을 창조하고 (그의 별칭이 크레이크이고, 그가 만든 새로운 인류를 크레이커라고 부른다) 현생 인류를 멸망시킬 바이러스를 유포한다. 급속도로 퍼지는 바이러스, 백신을 개발하지 못한 상태에서 인류는 속절없이 죽어간다.


세상은 폐허가 된다. 이 폐허가 된 세상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있다. 크레이크의 친구. 그가 크레이커들과 살아가면서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으로 소설이 진행이 된다.


온갖 유전자 조작들이 성행하고, 다양한 변종 동물들이 만들어졌지만, (소설에서는 이 동물들 이름을 늑개, 너구컹크, 돼지구리 등으로 부른다) 그것을 철저하게 통제하는 집단과, 그 집단에 끼치 못한 일명 평민층이 존재하는 세상. 


이는 분명 유토피아는 아니다. 그러니 이런 세상을 없애려고 하는 크레이크의 시도. 어느 정도는 성공했다. 그는 자신이 창조한 인류인 크레이커들이 이 세상에서 새로운 인류로 살아가기를 바란다. 물론 그의 의도는 실현되지 못한다. 그 자신이 죽었으므로.


과학기술로 차별이 이루어진 사회는 유토피아가 될 수 없다. 아마도 과학기술은 그것을 점유하고 이용할 수 있는 사람과 이용할 수 없는 사람을 가르고 차별할 것이다. 또다른 차별사회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차별사회를 없애겠다고 현 인류를 모두 죽게 만드는 방식 또한 또다른 차별을 낳을 수밖에 없다. 자신까지 포함해서 다 죽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새로운 인류가 자리를 잡을 때까지 가르칠 존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세상 역시 차별이 존재하는 세상, 즉 자신이 원하는 방향에 찬동하고 따르는 사람들은 계속 살아갈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 또는 이런 과학기술에서 소외되어 있던 소위 평민층들은 이유도 모른채 죽어갈 수밖에 없다.


그런 세상은 유토피아가 아니라 디스토피아다. '다름'이 인정받아야 하는 한계가 있다. 소설은 그 점을 생각하게 한다. 그러면서 최근에 나타난 지구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전세계를 팬데믹이 빠뜨린 코로나19는 말할 것도 없고, 어떤 새로운 질병이 발생해서 인류를 위험으로 몰아갈지 모른다. 그것도 과학기술의 발전이 만들어낸 부작용일 수 있다.


소설에서 등장하는 대체육은 이미 만들어지고 있으니, 이제는 종을 파괴한 인류의 기호에 맞는 동물들이 등장할 수도 있다. 인간은 다양한 종들을 멸종시키고 있지만, 반대로 다른 종들을 창조하고 있기도 하다.


소설 속 크레이크는 자신이 신이 되고자 했다. 현생 인류를 없애고 새로운 인류를 창조한. 물론 자신이 창조한 인류에는 지도자도 신도 없을 거라고 말했지만, 소설은 그렇지 않음을, 그들 역시 우리 인류가 걸어왔던 길과 비슷하게 갈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니 소설은 과하기술의 한계가 어디까지여야 하는지 생각하게 한다. '다름'이라고 다 인정받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 또한 과학기술은 과정과 예측 결과까지도 공유되지 않으면 인류를 유토피아가 아니라 디스토피아로 이끌 수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미친 아담' 3부작이라고 하는데, 이 책은 1부다. 1부부터 애트우드답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 권들도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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