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이는 물결 - 작가, 독자, 상상력에 대하여
어슐러 K. 르 귄 지음, 김승욱 옮김 / 현대문학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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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귄이 쓴 에세이 선집이다. 많은 글들이 있다. 글 한편 한편을 읽으며 여러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만큼 글에 깊이가 있다. 깊이 내려가 글의 맛을 느낄 수 있다.


제목에 대해 생각에 본다. 마음에 이는 물결이라? 참 마음에 드는 제목이다. 글은 마음에 이는 물결이어야 한다. 마음을 일게 하지 않으면 좋은 글이 될 수 없다.


마음을 일게 한다는 마음을 울린다로 바꿀 수 있다. 그렇다면 마음을 울리는 글은 내 마음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마음까지도 울리는 글이고, 그런 글들이 마음과 마음을 울림으로 연결시켜준다.  좋은 글이다.


마음을 울린다는 면에서 보면 르 귄이 쓴 소설도 좋지만, 에세이도 좋다. 여러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에. 그 중에 이 책의 제목과 연결되는 글들이 후반부에 나온다. 아니, 후반부뿐만이 아니라 도처에서 나온다. 그것이 르 귄이 글을 쓰는 방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제목이 된 말은 버지니아 울프에게서 따왔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몇몇 작가의 작품을 꼭 읽어야지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중에는 이미 읽은 책도 있지만, 다시 읽고 싶어진다. 또 뒤로 미뤄두었던 소설들을 찾아 읽고 싶어지기도 하고. 그만큼 르 귄이 쓴 이 책은 마음을 울린다. 다른 책들과 공명(共鳴)하게 한다.


우선 작가를 중심에 두면 작가가 어떻게 글을 쓰는가에서 [어린 왕자]에 나오는 여우가 말하는 '길들이기'를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이 길들이기가 무엇인가. 바로 기다림이다. 상대에게 곧장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 천천히 스며드는 것. 그리고 책임지는 것. 


울프는 이를 마음에 이는 물결이라고 했다고 한다. 마음에 이는 물결을 통해 단어가 나오고, 그 단어들을 통해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서둘러서는 안된다. 또 다른 '길들이기'다. 르 귄의 말을 인용한다.


'기억과 경험 아래에, 상상과 창조 아래에, 울프의 말처럼 단어 아래에 리듬이 있고, 기억과 상상력과 단어는 모두 그 리듬에 맞춰 움직인다. 작가가 할 일은 그 리듬이 느껴질 만큼 깊이 내려가서 리듬을 찾아 거기에 맞춰 움직이는 것이다. 그 리듬이 기억과 상상력을 움직여 단어를 찾아내게 가만히 가두는 것이다. ...울프는 그것을 마음에 이는 물결이라고 부른다.' (462쪽)


'울프의 이미지는.... 그녀가 생각한 물결은 파도다. 조용하고 매끄럽게 바다 위를 1천 킬로미터 넘게 가로질러 와서 해안에 철썩 부서지는 파도. 파도가 부서져 날아오르면서 단어라는 거품이 된다. 그러니 그 파도, 일정한 박자의 충격은 단어 이전에 존재하며, "단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따라서 작가가 할 일은 그 파도를 알아보는 것이다. 저 멀리 바다에서, 마음이라는 대양 저편에서 조용히 부풀어 오르는 파도를 알아보고 해안까지 따라오는 것이다. 해안에서 파도는 단어를 변화시키거나 스스로 단어가 되어 품고 있던 이야기를 내려놓고, 자신의 이미지를 토해내고, 비밀을 쏟아낼 수 있다. 그러고는 이야기의 대양으로 스르르 다시 물러간다.' (462-463쪽)


산문과 시, 모든 예술, 음악, 춤은 우리 몸, 우리 존재, 이 세상의 몸과 존재가 지닌 심오한 리듬에서 솟아나 그 리듬과 함께 움직인다. 물리학자가 읽는 우주는 아주 다양한 진폭의 진동, 리듬으로 이루어져 있다. 예술은 그 리듬을 따라가며 표현한다. 일단 올바른 박자를 찾기만 하면, 우리의 아이디어와 단어가 그 리듬에 맞춰 춤춘다. 누구나 합류해서 춤출 수 있는 윤무(輪舞)다. 그러면 나는 당신이 되고 장벽이 내려간다. 잠시 동안.' (463-464쪽)


인용한 글들, 참 아름답다. 작품이 이렇게 탄생한다면,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지 않을 수 없다. 서로 마음을 열고 함께 춤출 수 있다. 


이런 글들은 편견에 머물지 않는다. 편견을 깨는 역할을 한다. 작가는 그래서 자신의 편견을 강화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의 편견도 깨지만, 다른 사람의 편견을 깨는 역할도 한다. 그것이 바로 작가다. 


그렇게 편견을 깨기 위해서는 기다림, 적절한 단어가 떠오를 때까지 기다리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 


많은 작품이 언급되지만, 꼭 읽어야지 하는 마음이 들게 하는 작품들을 마음 속에 담게 한다. 그 작품들은 마음에서 빠져나가지 못한다. 마음껏 읽고 함께 춤출 때까지는.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들, 톨킨의 [반지의 제왕]. 그리고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핀의 모험], 세상에 내가 아는 허클베리핀의 모험이 그런 소설이었어? 다시 읽어봐야겠네 라는 생각이 들게 한 이 에세이집이다.('작가와 등장인물',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가설들' 387-410쪽)


무엇보다도 이 에세이집은 르 귄의 소설을 읽을 때 도움이 된다. 물론 이 책에서 르 귄은 자신의 경험과 소설은 큰 상관관계가 없다고 하지만, 독자 입장에서는 많은 도움이 된다.


르 귄이 말했듯이 독자 역시 이 글을 읽으면서 글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고 또 르 귄 소설을 읽을 때 이 글들을 떠올리는 것은 독자의 몫이니... 작가도 이해할 것이다. 왜 자신의 소설을 읽는데 이 글들이 도움이 된다고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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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3-07-23 22: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마음의 물결, 작가가 할일은 마음에 이는 파도를 알아보는 것! 넘 멋있는 표현이네요. 뭉클한 느낌!

kinye91 2023-07-24 06:02   좋아요 2 | URL
르 귄의 글(소설도 에세이도)을 읽으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어서 좋아요.
 
나를 보내지 마 민음사 모던 클래식 3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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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이 이제 우리 시대의 화두가 되었다. 기계 문명이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고 해야 한다. 디지털이 이제는 우리 삶 곳곳에 들어와 있다. 이런 일들 가운데 하나인 챗지피티라는 말이 언론을 장식하고 있어서 '복제'라는 말은 쏙 들어가 버린 듯하다.


한때는 '복제'란 말이 언론을 장식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복제'가 우리 삶의 일부가 되어 언론에서 다루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는 말인지...


하긴 '배양육'이 우리 식단에 들어오는 현실이니, '복제'라는 말은 이제 일상에서 쓰이는 언어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도 인간복제에 대해서는 수긍하기 힘들다.


인간을 복제한 클론이 과연 인간일까? 라는 질문을 할 수가 있는데, 그들에 대해서 과연 우리가 알 수 있을까?


클론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다른 사람을 알 수가 없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오만이다. 그 사람의 내밀한 마음을 어떻게 알겠는가? 자신도 자신을 모르는데... 그렇다면 클론의 마음을 인간이 알 수 있을까?


자신을 복제한 클론을 마주친 인간이 클론이 자신과 똑같다고 여길까? 자신이 클론의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자체가 오만 아닐까?


신이 있다고 가정하자.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신은 창조한 인간의 모든 것을 알 수 있을까? 신은 전지전능하니까 당연히 알아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과연 그럴까?


신이 인간을 창조했고, 신의 뜻대로 인간이 살아간다면 인간의 '자율성'은 어디에 있는가? 아니, 그때 자율성이 있다고 말할 수가 있나?


그렇다면 지금까지 인간이 이룬 것은 무엇인가? 자신의 복제까지도 만들어낼, 생물 복제만이 아니라 과학기술을 이용해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존재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지금, 인간은 여전히 신의 뜻대로 움직인다고 해야 하나?


그렇다. 라고 답할 수 있다면, 클론을 우리 역시 다 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신의 뜻대로 살게 되듯이 클론 역시 인간의 뜻대로 살게 된다. 어떤 어긋남도 없어야 한다. 어긋남 역시 계산에 있어야 하기 때문에.


만약,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면? 이때는 인간 복제는 해서는 안 된다. 아니, 해도 된다. 다만 복제된 클론이 자율성을 지니고 살아가는 인간이 뜻대로 해서는 안 될 자율적 존재라고 인정을 한다면.


이렇게 되면 클론을 인간의 질병을 치유하기 위해서 만들어낸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클론 역시 인간의 한 부류이므로. 우리가 인종이나 민족으로 인간을 구분하듯이, 여기에 클론이라는 또 하나의 부류가 첨가된다고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지나친가? 지나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클론이 생각할 수 있다고? 그들은 그냥 주입된 것을 표출할 뿐이라고? 어떻게 아는가? 클론의 뇌 속으로 들어가 보았는가? 뇌의 조직, 기능을 다 안다고 해도 생각이 어떤지 정확히 맞출 수 있는가? 없다. 뇌라는 보이는 형태와 뇌가 작동해 일으키는 생각은 같지 않다. 


그러니 클론이 인간의 복제라면 생각하는 능력이 있다는 말이고,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존재라는 말이 된다. 이들을 단지 인간의 병치료를 위해서 도구로 사용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소설은 이런 클론의 문제를 클론의 처지에서 서술하고 있다. 캐시를 서술자로 선정하고 있다. 소설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다면 캐시의 성장소설로 읽을 수 있다. 캐시의 학창시절부터 어른이 된 후까지가 소설의 시간적 배경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읽다보면 곳곳에서 캐시가 보통 인간과 다르다는 점을 알게 된다. 기증자, 근원자라는 말이 나오고, 조금 읽다보면 캐시가 복제인간이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읽으면서 복제인간인 캐시의 관점으로 사건을 따라가게 된다. 인간과 같이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캐시를 보면서, 그런 캐시가 결국은 자신의 일부를 기증하는 삶을 살다가 생을 마감하게 될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알게 된다.


캐시와 루스, 그리고 토미. 이 셋의 애증관계, 성장관계. 그렇지만 여기에 얽힌 복제인간에 대한 관계. 그들이 자란 헤일셤이라는 곳은 복제인간을 인간답게(?) 가르치는 곳. 어차피 장기기증으로 죽어갈 그들에게도 인간다운(?) 생활을 하고, 교육을 받게 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곳.


이곳은 기부자의 기금으로 운용이 되고, 이들 목표는 클론 역시 교양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리는 것. 그러나 이들은 외부에 의존해서 운영하려고 했고, 또 클론을 자신과 함께 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들이 한시적으로 시혜를 베풀어야 할 존재라고 생각하고 운영했다.


철저히 인간의 관점에서, 시혜를 준다는 관점으로, 그러니 클론들이 자신들의 처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그렇게 가르쳐야 한다는 루시 같은 선생은 떠날 수밖에 없다.


클론에게 자신들의 처지를 정확히 알리지 않고 최대한 시혜를 베풀어야 한다는 입장과 클론들이 자신들의 처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입장의 차이. 작가는 명확히 이야기하지 않지만, 작중 인물인 토미가 "루시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 에밀리 선생님 생각이 아니라 말이야."(374쪽)라는 말을 통해서 엿볼 수 있다.


복제인간이라고 해도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 즉, 복제인간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어야 한다. 인간을 수단으로 대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자신의 복제인간이라 해도 또다른 자율적 존재임을, 존중해야 할 존재임을, 결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됨을 알아야 한다.


작가는 복제인간을 서술자로 택함으로써, 그들이 어떻게 고민하고 성장하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줌으로써 복제인간에 대한 문제에 대해 간접적으로 답을 하고 있다.


생물학에서 시도하는 복제인간을 넘어서서 이제는 컴퓨터과학기술로 인공지능이 인간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게 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아니, 벌써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인공지능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이런 인공지능의 흐름에 밀려서 복제인간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언급되고 있지 않은데, 인간 '복제', 이렇게 묻혀서는 안 될 주제다. 특히 지금처럼 마음만 먹으면 '인간' 복제가 가능한 시대에서는.


이 소설을 읽으며 문학의 힘을 생각해 본다. 왜 과학자가 될 사람들이 어린(젊은) 시절에 문학 작품을 읽어야 하는지... 아니, 그들에게 영재교육이 아니라 문학작품을 읽혀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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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바키 문구점
오가와 이토 지음, 권남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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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류의 소설이 최근에 많아졌다. 어떤 특정한 장소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마음을 열어가고, 위로를 받는 그런 소설들.


일본 소설로는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 우리나라 소설로는 [어서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와 [책들의 부엌], [불편한 편의점] 등이 그렇다.


이 소설 역시 그렇다. 츠바키 문구점을 중심으로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다른 소설들이 주인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상처를 보듬어 주고 있다면 이 소설은 문구점 주인인 포포가 자신이 하는 편지를 대필해주는 일을 통해서 다른 사람의 마음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마저도 치유한다는 데서 차이점을 보인다.


그만큼 편지란 쓰는 사람과 받는 사람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데, 이 편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물론 내용이겠지만, 내용만큼이나 글씨 역시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각자의 사연을 지닌 사람들이 츠바키 문구점에 들러 편지를 대필해 주기를 바란다. 그런 마음을 읽은 포포는 그 사람의 마음을 편지에 오롯이 담으려 한다.


감정이입. 포포는 그 사람에게 감정을 이입하고, 그 사람이 되어 편지를 쓴다. 단순히 대필이 아니라 그 사람이 되어 마음을 전달하는 일.


편지는 그런 역할을 한다. 또한 편지는 즉각적이지 않다. 동시성이 아니라 시간의 차이가 편지가 지닌 가장 큰 특징이다.


자신이 손으로 직접 쓴 편지를 우체통에 넣으면 상대에게 가 닿는 시간이 꽤 걸린다. 이메일로 전송하면 거의 즉시 상대에게 도달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그 시간의 차이만큼 편지는 쓰는 사람에게도 받는 사람에게도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볼 시간을 준다. 


그런 편지가 이제는 거의 사라져가고 있는데, 빨리빨리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느긋하게 마음을 전달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한다.


손으로 편지를 쓰면서 온몸으로 자신의 감정을 느낄 수도 있고, 그런 마음이 편지에 나타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좋겠단 생각을 하는데...


이제는 거리에서 우체통도 찾기 어려워졌으니, 편지를 쓰는 일이 더욱 힘들어지긴 했지만.


이 소설은 읽으면서 마음이 편안해진다. 잔잔한 물결, 또는 부드러운 바람이 몸을 감싸주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한다.  포포를 따라가면서 마음을 다독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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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다섯, 그럴 나이 우리학교 소설 읽는 시간
나윤아 외 지음 / 우리학교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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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다섯. 보통 중2다. 질풍노도의 시기라고도 하고 사춘기라고도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중2병이라고도 한다. 중2병이라는 말은 쓰지 말자는 움직임이 많아서, 가급적 그 말은 쓰지 않으려 하지만 여전히 그 말을 쓰는 사람도 있다. 사실 중2가 병은 아니지 않은가. 


[열다섯, 그럴 나이]라는 제목으로 다섯 편의 소설이 묶였다. 열다섯에 겪음직한 일들을 소설을 통해서 보여주고, 이 나이 대의 사람들이 읽으면서 자신만이 아니라 많은 열다섯들이 그런 일들을 겪고, 또 고민하면서 지낸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려는 의도가 담겼다고 볼 수 있다.


열다섯에 무엇을 고민하는가? 남들과 다른 자신의 모습을 꿈꾸고(영웅-히어로), 새로운 기술을 이용해 소통을 하며(스마트폰을 이용한 SNS-톡방), 자신의 현재 모습에 실망해 다른 삶을 꿈꾸기도 하고(이번 생은 망했어-이.생.망), 사이버 세계에서 뜻하지 않게 피해를 입게 되기도 하며(몸캠피싱), 친구관계로 고민을 하기도(인싸) 한다.


아마도 청소년기에 영웅을 꿈꾸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영웅이란 세상과 동떨어진 특출난 존재가 아니라 바로 우리 주변에 있는 보통 사람일 수 있다는 사실.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서 영웅을 발견할 수 있을 때, 그럴 때 공상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로 넘어올 수 있음을 첫번째 소설, 탁경은이 쓴 '캡틴 아메리카도 외로워'에서 만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삶이 아닌,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사는 사람. 그럼에도 무언가 조금이라도 남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영웅이 아닐까 하는, 그럼에도 그런 영웅은 외로울 수밖에 없음을 소설이 보여주고 있다.


그런 외로움을 견뎌내고, 자신이 바라는 삶이 무엇인지 찾아가는 사람을 만나는 나이, 그 나이가 열다섯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여기에 수시로 울리는 까톡, 까똑 소리. 아마 하루에 수십 번, 아니 수백 번은 그 소리를 들을 테다. 요즘 열다섯 살 사람들은. 하지만 과연 그 카톡으로만 소통이 잘 될까? 서로 바쁘다는 핑계로 만나서 이야기를 하지 않고, 카톡으로 대화하는 세상이 과연 좋기만 할까?


이 카톡으로 인해서 벌어지는 일들이 이선주가 쓴 '앱을 설치하시겠습니까'에 나오고 있다. 누구나 편하게 쓰는 카톡 앱을 깔지 않은 사람이 있을 때 소통방법? 편한 앱인데 굳이 안 깔겠다고 하는 아이를 이해 못하는 아이들. 또 그때만 깔고 지우면 되는데도 깔지 않는 아이. 과연 어떤 아이에게 감정이입을 해야 할까? 


소설은 끝부분에 반전이 있다. 단지 앱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임을, 남들과 함께 어울리는 법을 잃어가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을 담고 있지 않나 한다. 꼭 열다섯의 문제는 아니다. 이는 지금 사회관계서비스망(SNS)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직면한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열다섯의 고민을 넘어 우리 모두의 고민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현재 모습에 만족하지 못하는 청소년들이 많다. 당연하다. 청소년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에 불만이 많다.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고, 저런 사람이 되고 싶기도 한 때.


자신이 한껏 초라해 보이고 다른 사람은 다 멋있어 보이는 그런 때, 그런 때 보이는 모습을 환상을 동원해 범유진이 '악마를 주웠는데 말이야'란 소설로 썼다.


악마가 소원을 들어준다. 고전에서 많이 나오는 설정을 활용했다. 그리고 그 소원이 결국은 자신의 본 모습을 사랑하게 한다는 결말로 나아간다.


그렇게 부러워하는 다른 사람의 삶도 알고 보면 저마다의 고민과 어려움이 있다는 사실을 소설이 보여주고 있다.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라고, 자신에게서 출발하라고, 하지만 그 일이 얼마나 힘든지를 악마를 동원해서라도 다른 존재로 나아가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결국은 자신에게로 돌아올 수밖에 없고, 이번 생은 망했다고 말해도, 그 생이 바로 자신의 생이니, 여기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하는.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부작용이 속출했는데, 그 중 가장 심각한 것은 사람을 속이고 괴롭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소위 '피싱'이라고 하는 일들. 보이스 피싱은 잘 알려져 있는데 몸캠피싱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최근에 많이 붉어져서 아는 사람도 많아졌지만, 이 몸캠피싱이 청소년들에게 행해진다는 사실.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해도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가해자보다는 피해자가 더 고통받는 현실, 그런 현실을 나윤아가 '악의와 악의'라는 소설로 썼다.


현실적이다. 누구에게도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은 더 의미가 있다. 청소년들에게 경각심을 준다기보다는,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지녀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서 더 이야기하고 있다.


악의로 가득한 세상에서도 선의를 지닌 사람은 있는데, 청소년기에 세상에 대해서 지녀야 할 마음은 악의로 가득찬 세상이 아니라, 선의가 넘치는 세상이어야 한다.


어려울 때 누군가 손을 내밀어줄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다른 사람의 악의에 어느 정도는 견딜 수 있다.


무엇보다 소설은 행복한 결말을 내지 않는다. 몸캠피싱이 쉽게 해결되지 않음을 소설이 보여주고 있는데, 그럼에도 바로 그런 일이 터졌을 때 대처하는 마음 자세가 중요함을, 세상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고, 무엇보다도 자신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음이 중요함을 이 소설에서 느낄 수 있다.


마지막 소설은 청소년기에 가장 중시하는 친구 관계다. 서로 웃고 떠들고 함께 하는 친구 사이지만, 과연 그들은 서로를 잘 알고 있을까?


늘 아이들 중심에 있는 아이가 어느날 사라져 버리고, 그 아이를 중심으로 모여 있던 아이들이 정작 그 아이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음을 우다영이 '그 애'라는 소설로 펼쳐보인다.


또 소설을 읽다보면 친구란 어떤 존재인지 생각하게 된다. 내 주장보다는 상대의 말을 들어주고, 상대의 마음을 어루만져 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친구 관계가 좋음을.


즉 친구를 잘 사귄다는 말은 상대의 마음을 읽을 줄 안다는 말이고, 소설은 사라진 그 애를 통해서 그런 자세를 가르쳐준다.


이렇게 다섯 편의 소설들이 열다섯에 겪을 만한 일들을 다루고 있다. 아마도 청소년들이 읽으면 바로 자신들의 이야기임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청소년들이 읽으면서 자신들의 모습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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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몽
황석영 지음 / 창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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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우리나라 부를 대표하는 곳. 부자들이 사는 곳. 이곳 아파트 값이 얼마나 비싼지 보통 사람들은 전세로 들어가 살기도 힘들다. 일반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은.


하지만 강남이 처음부터 이렇게 부촌이었을까? 아니다. 강남은 강북에 비해 허허벌판이었다.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곳이 바로 강남이다.


이 강남 개발을 둘러싸고 얼마나 많은 이권들이 오갔을까? 이제는 과거의 일이 되어버렸지만, 강남 개발로 떼돈을 번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들이 떼돈을 벌 때, 순전히 자신의 노력만이 아니라 운과 연줄이 작동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강남 개발을 둘러싼 이야기. 역사 책이 아니라 소설로 만날 수 있다. 바로 이 책이다. 강남몽. 우리나라 고전소설에 '몽(夢)'자 들어가는 소설이 많은데 이는 현실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꿈을 빌려온 것이다.


황석영 역시 '지금 여기서 벌어지고 있는 사람살이가 어쩌면 꿈과 같이 덧없는 가상의 현실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378쪽. 작가의 말에서)것이라고 하면서 자신이 '강남몽'이라고 제목을 붙인 이유를 대고 있다.


즉, 강남 개발에 뛰어들어 떼돈을 번 사람들의 삶이 가상 현실과 같다고, 그들이 사는 삶은 진정 우리가 추구하는 삶일까 하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소설이 문제적 개인의 이야기라고 한다면, 이 강남몽은 강남 개발을 둘러싼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우리들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하고 있다.


주요 인물이 5명이다. 이들은 서로 얽히고설킨다. 그럴 수밖에 없다. 개발에 따르는 인물 군상을 황석영이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시작은 박선녀다.(1장 백화점이 무너지다) 유흥업소를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보면 된다. 박선녀는 김준의 내연녀가 되는데, 김준은 일제시대 일제의 정보원 노릇을 하다가, 해방 후에는 미군 정보국에 붙어 지낸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바탕으로 정보를 얻어 은퇴한 뒤에 개발 사업에 뛰어든다. 이렇게 김준의 이야기가 펼쳐진 다음에는(2장 생존만으로는 부족하다) 부동산업자가 등장한다.(3장 길 가는 데 땅이 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전세사기에도 공인중개사가 개입되어 있다고 하는 말들이 있는데, 당시는 더했다. 부동산업자와 짜고 땅값을 올리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개발과 관련된 유흥업소, 건설업자, 그리고 부동산업자가 나왔으면 다음에는 누가 나와야 할까? 소설은 현실을 반영하듯이 조폭들이 등장한다.(5장 개와 늑대의 시간) 개발이 되면 상가가 많아지고, 이 상가를 끼고 주먹들이 진출하는 것이다. 단지 주먹만으로? 아니다. 이들 역시 권력을 끼고 활동을 한다. 


강남 개발을 둘러싼 하이에나들이라고 할 수 있는 네 주체가 나왔다. 이들의 삶은 부를 향해 가고 있지만, 그런 부는 모래 위에 지은 집에 불과하다.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 소설은 '몽'자를 달고 있는 역할을 하듯이 미리 손을 털고 나온 사람을 제외하고는 다들 몰락한다.


현실의 부귀영화가 덧없다고 하는 '몽자류' 소설을 계승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고전소설의 결말을 따라가면, 이 중 누군가가 깨달아야 한다.


"아, 이것이 아니었구나!" 


현시대에 이렇게 고전소설의 주인공처럼 깨달을까? 아니다.이들은 실패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고, 다른 더 강한 외부 조건을 향해 가려고 할 것이다. 마치 국내 자산이 부족하면 외국 자산을 끌어오듯이.


나라 경제가 파탄났을 당시 국제 통화 기금(일명 IMF)에서 기금을 받고, 그들이 제시한 대로 노동유연화 정책을 펼치게 된 것처럼, 현실은 고전소설에서 말하는 깨달음으로 가지 않는다. 그냥 없는 사람만 더 힘들어질 뿐이다.


그렇다고 소설에서까지 이렇게 현실의 비참함을 고스란히 보여주어야 할까? 황석영은 여기서 한발 나아간다. 현실을 깨지는 못하겠지만, 그런 현실 속에서도 꿈 속 삶이 아닌 현실의 삶을 사는 사람이 있음을.(5장 여기 사람 있어요)


마지막 장에 나오는 정아를 통해서 현실을 사는 사람이 끝까지 살아남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몽'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정아가 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함께 갇혀 있던 박선녀가 자신이 정아 집안 사람들을 위해 다 해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한 말.


"사모님이 다 해줄 수 있단 말씀 다신 하지 마세요." (338쪽) 


이 말로 황석영은 꿈이 아닌 현실을 사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강남 개발로 떼돈을 벌고 여전히 떵떵거리며 살고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는,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사람들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앞에 나온 네 사람의 삶은 '몽'에 가깝다면, 정아의 삶은 꿈이 아닌 현실이다. 이렇게 꿈과 현실을 보여줌으로써 황석영은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생각하게 한다.


소설을 읽다보면 현대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이름들이 나온다. 소설이라서 약간 변형을 가했지만, 강남 한복판에서 무너진 백화점이라면 누가 모르겠는가? 또한 강남 개발에 얽힌 여러 이야기들도 마찬가지다. 다만, 그들이 추구했던 삶이 '몽'에 불과해야 한다고, 그런 꿈은 깨게 해야 한다고 마지막 장에서 '여기 사람 있어요'라는 말을 통해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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