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피투성이 연인
정미경 지음 / 민음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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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처연하다. 이 말로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다.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을.


총 여섯 편 소설이 실려 있는데, 서술자로 남자가 셋, 여자가 셋이다. 균형을 이루고 있다. 


어느 성을 따르더라도 사랑을 주를 이루고 있지만, 그 사랑이 이상하게 어긋나고 있다. 어긋남 속에서도 만남을 찾아 함께 살아가는 것이 사랑이겠지만, 그런 사랑이 어디 쉬운가.


첫소설 '나릿빛 사진의 추억'에서 나오는 남자 서술자. 그러나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일이 벌어진다. 그는 진실과 상관없이 진실을 만들어내야 한다. 즉,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진실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진실이다.


자신들이 믿고 있는 사실을 진실로 만들어야만 하는 시대, 그런 시대에서 진실이 있냐 없냐는 중요하지 않다. 진실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실조차도 만들어내서 자기 만족을 삼으려는 모습.


어쩌면 사랑에서도 이런 모습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보고 싶은 면만 보는 그런 모습들. 그래서 사랑은 눈을 가린다고 했던가. 눈을 멀게 한 사랑이지만, 곧 눈을 뜬다. 그렇게 눈을 떴을 때, 어떤 사랑이 보이는가.


눈 멀었을 때 본 사랑이 보이는가? 아니다. 자신이 그동안 보아왔던, 느꼈던 사랑이 전혀 다른 사랑이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 점을 여자 서술자가 등장하는 '나의 피투성이 연인'에서 볼 수 있다. 남편의 죽음 이후, 자신이 생각했던 사랑이 사랑이 아니었음을(이상하게 김광석이 부른 노래 가사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 떠오르는데..) 알게 된다.


자신이 알고 있던 남편. 그들의 사랑. 그러나 그 사랑 밖에 또 다른 사랑이 있음을. 소설에서는 이런 모습을 전등사에 갔으나 전등사까지 가지 못했던 기억, 그러나 전등사에 갔던 날로 말하는 장면으로 보여주고 있다.


서로 같은 사랑을 하지 못하지만, 그들이 느끼는 사랑의 교집합은 있지만, 그것이 하나가 아니고, 서로 느끼는 교집합이 다를 수 있음을. 그럼에도 그런 사랑을 포기하지 못하는 서술자의 모습을 통해서 사랑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경험하게 한다.


사랑이라는 착각 속에서 죽음으로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어쩌면 맹목적인 사랑은 실질적인 죽음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소설이 '비소 여인'인데, 좀 섬뜩하다.


현실에서는 그런 일이 없겠지만, 이 소설을 사랑이란 이름으로 서로를 옭죄고 서로를 갉아먹는 모습으로 읽으면 그럴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천천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중독이 되는 비소처럼, 사랑 역시 그렇지 않을까, 그래서 깨달은 순간이 이미 너무 늦어버릴 수도 있고, 빠져나오기 힘들어지거나 빠져나오지 않으려 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비소 여인'의 서술자가 남자라면 그래서 비소에 중독되듯이 자신이 생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 나타난다면, 여자가 서술자인 '달은 스스로 빛나지 못한다'는 다른 생활을 경험하고 그 생활에 매력을 느끼지만, 안락한 생활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인다.


즉, 이미 자신의 사랑이 끝났음을, 그런 사랑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지속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자신은 그렇게 살아가겠다는 모습을 드러내는 소설.


많은 사람들 삶이 그렇지 않은가. 자신이 속한 세계의 문제점을 알고는 있지만, 그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


사랑 역시 마찬가지다. 사랑에 모든 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랑은 온전히 하나가 되는 일이 아니라고, 소설은 말하고 있다.


그래서 이 소설집에서 인물들은 사랑 속에서 하나가 되지 못한다. 누군가는 떠나가거나 죽거나 죽이거나 한다. 그렇지만 그것이 사랑임을, 우리의 사랑은 그런 변화, 갈등 속에 있음을 이 소설집은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소설집 제목이 된 '나의 피투성이 연인'의 끝부분에서 작가는, 바로 그런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사랑이 아름답고 따스하고 투명한 어떤 것이라고는 이제 생각지 않을래. 피의 냄새와 잔혹함, 배신과 후회가 없다면 그건 사이보그의 사랑이 아닐까 싶어.' (136쪽)


이런 사랑을 통해서 우리는 희노애락의 감정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그것이 바로 인간의 사랑이 아닐까. 이것들을 없애려고 하는 사랑이 과연 사랑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달은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에서 남자 등장인물인 윤조를 보라. 이 인물은 희노애락이 없다. 무언가로 포장된 듯한, 그러면서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는 그런 인물일 뿐이다. 과연 이런 인물과 살아가는 일이 사랑일까? 작가는 그런 의문을 제시한다. 그래서 이 소설의 끝부분은 이렇게 끝난다.


그런 사랑은 사랑이 아님을 알게 해주는 구절. 


'나는 이제 빛나지 못할 것이며 저녁의 그림자처럼 사라질 거야,. 너와 나의 틈 사이, 거기 희미한 빛이 있었을 뿐.'(244쪽) 


우리 삶에서 사랑이 이렇게 그림자처럼 사라지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스스로 빛나지는 못할지라도 서로를 빛나게 비춰주는 역할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 점이 힘들지만, 바로 그런 사랑의 어려움을 이 소설집은 보여주고 있다. 언급하지 않는 소설도 그렇다. 읽어보면 좋다.


잘 읽히는 소설이다. 그리고 울림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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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23-02-10 10: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무척 좋아하는 소설집인데, 다시 읽어보고 싶네요^^

kinye91 2023-02-10 11:35   좋아요 0 | URL
많은 작품을 읽지는 않았지만 정미경 작가의 소설은 어떤 울림을 마음에 주네요. 다른 작품들도 읽어야겠단 생각을 하고 있어요.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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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죽었다.'(7쪽)로 소설은 시작한다.


군더더기 없는 문장이다. 우리말 문장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문장. 주어와 서술어만으로 이루어졌다. 주어와 서술어를 꾸며주는 말이 없다. 죽음 앞에서는 어떤 수식도 필요하지 않다는 듯이.


이 간단한 문장에 여러 수식이 들어갈 수 있다. 여러 문장이 들어갈 수 있다. 소설은 그렇게 많은 문장들이 이 문장이 나오기 전까지의 일들을 말해준다. 수많은 사건들과 수많은 감정들. 


그러다 소설은 첫문장의 주어인 아버지를 꾸며주는 말로 끝난다. 


'그게 나의 아버지, 빨치산이 아닌, 빨갱이도 아닌, 나의 아버지.' (265쪽)


결국 죽은 사람은 어떤 수식어로 지칭되는 사람이 아닌, 그의 삶이 어떻더라도 내게는 나의 아버지일 수밖에 없다. 즉, 다른 수식어로 불리던 아버지가 그 많은 수식어를 지니고 살아온 나의 아버지였음을 깨닫는 과정을 이 소설이 다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소설 제목이 '아버지의 해방일지'인데, 소설은 아버지가 해방이 되고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삶들을 다른 사람들의 입을 통해 듣고, 서술자의 기억을 통해 듣는 과정이 전개되지만, 결국은 바로 서술자 자신이 해방되는, 아버지를 규정하고 있던 수많은 틀로부터 해방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소설 첫문장인 '아버지가 죽었다'는 아버지를 둘러싸고 있는 이념, 신념, 평가 등을 다 떨쳐내고, 내가 규정했던 아버지가 죽었음을, 이제 내게서 그런 아버지가 떠나가고 그 모든 것을 지닌 아버지, 나의 아버지가 왔음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어떤 삶이 나를 구속하고 있었을까? 나는 아버지에게서 어떤 해방을 찾으려고 했을까? 바로 우리나라 현대사의 질곡이다. 이념으로 갈라진 우리나라 현대사가 우리들의 삶을 어떻게 옭아매고 있었는지를 이 소설은 아버지를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사는 것이 사람의 삶이 아닐까? 아버지는 아니라고 한다. 사람이니까 겪게 되는 일일 뿐이라고 한다. 사람이닝께란 말. 이 말로 아버지는 자신의 이념을 포기하지는 않았지만, 함께 사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들과 함께 살아가려 한다. 


읽으면서 손을 뗄 수가 없게 되는데, 아버지의 삶이 다른 사람들을 통해 하나하나 드러날 때마다, 아버지의 다른 모습을 발견해가는 서술자와 같은 관점에서 우리가 소설을 읽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감춰졌던 진실들이 드러나고, 또 현재 우리나라 현실도 함께 드러내면서 소설은 아버지의 삶이 과거에 매달리지 않고 현재에도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첫문장의 간결함을 메워주는, 자주 나오는 부사어가 있다. 하나는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되어 있고, 하나는 등재되어 있지 않다. 이 소설에서 아버지의 삶과 또 다른 사람들의 삶을 수식해주는 말을 찾으라면 나는 '하염없이와 항꾼에'를 찾겠다.


하염없이 : 1. 시름에 싸여 멍하니 이렇다 할 만한 아무 생각이 없이   2. 어떤 행동이나 심리 상태 따위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계속되는 상태로


어떤 의미여도 상관없다. 이 소설에서는 비슷하게 전개되기 때문이다. 빨치산 투쟁으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삶은 바로 이런 '하염없이'라는 부사어에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의지가 아니라 시대의 격류에 휩쓸려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 가족을 잃고 또는 기다리면서 또는 그 가족으로 인해 사회에서 온갖 핍박을 받으면서도 무언가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기다리는 사람들.


우리나라 현대사를 살아갔던 수많은 민중들의 삶을 표현하라면 바로 이렇게 '하염없이'라는 말로 꾸며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하염없이'로만 끝나서는 안 된다. 아버지의 장례에 모인 사람들을 보면 좌파, 우파 가릴 것이 없다. 여기에 이주민의 아이까지 나오니, 그야말로 모두가 함께 하는 자리가 된다. 빨치산이었던 아버지, 빨갱이였던 아버지의 죽음에 보수와 진보, 그리고 이주민까지 함께 하는 모습.


소설은 이렇게 '하염없이'로 끝나지 않는다. 서술자가 아버지를 꾸미는 많은 말들을 떼어놓고, 아버지, 바로 '나의 아버지'라고 하는 순간, 여태까지 아버지를 꾸미고 있었던 수많은 수식어들은 버려야 할 수식어가 아니라 나의 아버지 속에 들어가 있는 말이 된다. 


그냥 그렇게 꾸미지 않아도 그 모든 것이 바로 아버지였고, 나의 아버지였음을 서술자는 깨닫는다. 그 말을 이 소설에서 찾으면 '항꾼에'라는 전라도 사투리라고 할 수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인터넷 검색을 해보면 '함께'라는 말의 전라도 경상도 사투리라고 한다. 함께 한다.


이 소설에는 이 '항꾼에'가 많이 나온다. 그렇게 함께 하는 삶. 다른 사람들과도 그렇지만, 자신의 삶 속에서도 여러 모습이 함께 있음을 보여주고, 그 다양함이 바로 사람임을, 삶임을 생각하게 한다.


그러니 어떤 특정한 한 모습으로 그 사람을 재단하고 받아들일지 멀리 할지를 결정하고 행동하지 말아야 한다. 수많은 죽음을 목격하고 살아돌아와 빨갱이라고 감옥생활까지 한 아버지의 삶은 바로 이 '항꾼에'에 담겨 있다.


아버지가 원하는 세상도 바로 그런 세상이었을 터.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좌파, 우파 가리지 않고 자기 자리를 잡고 아버지를 추모하는 모습. 그런 아버지의 유골을 아버지의 흔적 곳곳에 뿌리는 서술자, 자신들의 머리 위로 뿌려지는 유골의 모습에서, 아버지는 어떤 수식어 하나로 재단할 수 없는 그 모든 수식어가 '항꾼에' 담겨 있는 사람임을, 그런 삶을 살았음을 서술자는 깨닫게 된다.


우리 역시 소설을 읽으며 그 점을, 지금까지 '하염없이'처럼 의지와 의식과 무관하게 흘러가는 대로 살아온 삶에서 벗어나 '항꾼에'와 같이 함께 살아가는 삶으로의 전환. 그 전환에는 바로 어떤 특정 말로 사람을 규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 다양함이 함께 있는 존재가 바로 사람이라는 사실.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소설의 뒷부분에 


'죽음은 그러니까, 끝은 아니구나, 나는 생각했다. 삶은 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부활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화해나 용서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231쪽)


'어쩐지 아버지가 여기, 함께하는 느낌이었다. 살아 있는 우리와 항꾼에.'(263쪽)


이 문장들을 통해 아버지의 죽음은 바로 이렇게 또다른 사람 속으로 들어오는 과정이고, 한면만 보이던 아버지의 다양한 면이 보이고, 그런 면이 모두 아버지였음을 깨닫게 됨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소설은 아버지의 해방일지라고 했지만, 결국은 나의 해방일지로 나아간다. 나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닫혀 있던, 하나라고 믿고 있던 세계에서 열린 세계, 다양한 세계로 함께 나아갔으니까.  


재미있게 그러나 감명하면서 읽은 소설이다. 이런 좋은 작품 앞으로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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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슐러 K. 르 귄의 말 - 상상의 세계를 쌓아 올리는 SF 거장의 글쓰기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
어슐러 K. 르 귄.데이비드 네이먼 지음, 이수현 옮김 / 마음산책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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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작가였다. 장르소설이라는 말을 거부했던 사람. 세상을 남성과 여성 또는 다른 성으로 구분하는 것을 거부했던 사람. 작가라는 소명 의식을 지니고, 세상을 작품 속에 끌어왔으며, 작품을 통해서 다른 세상을 보게 한 사람.


시도 썼다고 하는데, 시집은 읽어본 적이 없어서 이야기를 하지 못하지만, 시와 소설은 분명 다르니, 르 귄이 소설에서 했던 작업과 시에서 했던 작업은 공통점도 있지만 차이점도 있을테다. 여기에 우리가 흔히 수필이라고 하는, 논픽션 글들도 썼으니, 오랜 세월에 걸쳐 다양한 글쓰기로 세상에 참여했던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재미있게, 생각하면서 읽은 작품들이 많다. 수필집도 그렇고, 소설도 그렇고. 이번에 나온 책은 르 귄의 마지막 글이라고 보면 된다. 글이라기보다는 말이라고 해야겠지. 글로 적힌 말들. 


데이비드 네이먼이라는 사람이 질문을 하고 르 귄이 대답을 한 말들을 모아 놓은 책이다. 말년의 르 귄을 알 수 있는 책이기도 하지만, 이 책은 르 귄의 작품을 읽었다면 더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소설, 수필집을 읽었다면 그간 르 귄이 한 말들이 정리되어 있단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러면서 다시 한번 르 귄의 생각을, 르 귄의 작품을 생각할 기회도 만날 수 있고.


무엇보다도 르 귄은 글에는 리듬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글은 말을 문자로 나타내지만, 문자로도 충분히 소리를 보여줄 수 있다. 낭독의 중요성. 그렇게 소리내어 읽으면서 소설이든 시든 리듬을 느껴야 한다고 하는 말. 수긍이 가는 말이다.


예전에 학교 교육에서는 학생들에게 시나 소설을 읽히는 경우가 많았다. 여러 학생들 앞에서 낭송하게 하는 활동. 그래서 글이 마음 속에만 머물지 않고 입을 통해서 밖으로 나오기도 했다. 이런 소리내어 읽기의 중요성.


읽기는 속에 담아두기 위해서 겉으로 드러내는 활동이 되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학교에서도 낭송을 잘하지 않는다고 한다.


아니, 르 귄도 비판하고 있지만, 낭송만이 아니라 학교에서 읽기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중고등학교에서 국어 시간이 주는 일이야 그렇다치더라도, 국어에서도 읽기가 축소되어 있다고 한다.


시나 소설의 분량이 줄어들고, 고전이라고 불리는 작품들은 이제는 구닥다리라는 소리를 들으며 퇴출되고 있는 현실이지 않은가.


이렇게 읽기가 줄어들면 자연스레 문학작품을 읽는 시간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읽는 활동이 줄어들다 보니, 말(글)은 점점 줄어들고, 간략해지고, 긴 문장은 점점 사라지게 된다. 또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빈 공간보다는 시각적으로 상상력을 메워주는 영상이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상상은 공상이 아니다. 현실을 바라보게 하는 또다른 관점이다. 그런 점에서 시나 소설은 상상을 다루는 예술이다. 이런 상상을 통해서 사람들은 현실의 부조리를 극복할 수 있다. 시와 소설이 인간과 함께 해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게 때문에 르 귄이 한 말,


'미국에서 상상력에 대한 두려움은 아주 뿌리가 깊어요. 갈수록 소설을 적게 읽히는 학교들만 봐도 드러나죠. 요새 학교에서 시를 읽기는 하는지도 모르겠고요.' (44쪽)


'독재자들은 언제나 시인들을 두려워하잖아요. 시인은 정치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여기는 많은 미국인에게는 이상해 보이겠지만, 남아메리카나 다른 독재 치하의 나라에서는 사실 조금도 이상하지 않아요.'(83쪽)


이런 말을 떠나서 예술은 중요하다. 우리들의 삶을 위해서. 그리고 그런 예술에는 성의 구분이 있을 수가 없고, 장르의 구분이 있을 수가 없다.


편가르기를 하고 담장을 쌓아 서로 교류를 하지 않는 일들은 예술의 세계에서 일어나서는 안 된다. 그것은 상상력을 죽이는 행동이다. 


르 귄의 마지막 대담집을 읽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작품만큼이나 여러 생각을 하게 하는 르 귄의 말이었다.


이 책의 마지막에 실린 번역자가 르 귄과 주고받았다는 편지에 있던 한 내용... 세상에? 2008년에 주고받았던 내용이 지금 다시 읽으니, 이런! 이런! 한탄이 나오고 있으니...


그 말을 인용하면서 이 글을 맺는다. 이 글에 대한 감상은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우리 president(대통령)는 별명이 presi-ro-dent(rodent는 설치류)라는 말까지 써가면서. ... 르 귄의 답장 앞부분은 이렇게 시작한다.


여기에서는 당신의 나라에 대해 쓸 만한 소식을 얻기가 무척 힘들어요. 우리 신문은 외국 뉴스를 거의 싣지 않고, 아시아는 중국과 일본만 '존재'하죠. 한국에서도 (이전의 우리처럼)  presirodent를 뽑았다니 유감스럽네요!' (1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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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독 밀리어네어 - Q & A
비카스 스와루프 지음, 강주헌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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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에 영화로 봤다. 감명 깊게 본 영화였다. 당시에는 이 영화가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도서관에서 이 책을 보기 전까지는, 그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우연히 서가에 꽂혀 있는 이 책을 보면서, '어라! 영화 원작이 있었어?'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냥 빌려서 읽게 되었다.


시작부터 강렬하다. '나는 구속되었다. 퀴즈쇼에서 우승한 대가로.'(9쪽)


상금이 어마어마하다. 요즘 우리나라 돈으로 하면 10억 정도의 상금이 걸린 (10억 루피라고 소설에 나오는데, 인도 1루피가 15원이 조금 넘는다고 하니 지금 환률로 환산하면 150억 정도 된다고 해야겠다. 150억을 상금으로 걸고 하는 퀴즈쇼는 없을테니, 10억 정도로 하자. 그래도 어마어마한 상금이 걸린 퀴즈쇼일테니) 퀴즈쇼에서 우승했다. 


우승한 대가가 구속이다. 자, 왜 주인공은 구속되었을까? 소설은 이렇게 첫문장부터 흥미를 유발한다. 그리고 경찰서에서 고문을 당하는 (증거가 없을 때 증거를 만들어내는 가장 좋은 수단이라고 부패한 경찰이 생각하는 수단. 지금은 고문을 하는 나라는 거의 없고, 인도에서도 고문은 아마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겠지만, 부패한 경찰에게는 고문이든 뭐든 범죄자를 만들어내는 일이 더 중요하니) 순간, 변호사가 등장하여 그를 데리고 나간다.


변호사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는 주인공. 이름이 람 모하마드 토머스. 람은 인도 힌두교에서 크리슈나 신이 환생했다는 '라마'를 의미하고, 모하메드는 이슬람교를 토마스는 천주교(기독교, 소설에서는 주인공을 키워준 사람이 신부니까, 천주교로 하는 것이 더 좋을 듯)를 의미한다.


즉 주인공의 이름에 세 종교가 들어 있듯이 그의 삶 또한 보통 사람들의 삶과는 달랐으리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아이. 그리고 우연히 신부의 손에 자라지만 신부가 살해당하고 소년원(고아원)에 보내지고, 다시 팔려가서 탈출하고, 빈민가에서 자라면서 다양한 경험을 하는 그.


그가 살면서 겪게 된 일과 퀴즈 문제가 겹치면서 소설은 12번째 문제까지 삶과 문제를 연결짓고 있다. 아니, 12번째 문제에서는 퀴즈쇼를 하는 집단의 사기를 드러내고, 각 문제마다 그가 겪은 삶이 인도의 삶뿐만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이, 특히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거의 버려지다시피한 사람들이 겪게 되는 일들이 펼쳐진다.


그리고 그 일들을 통해서 그의 몸에 각인된 지식이 퀴즈쇼에서 정답을 맞히는데 일조한다. 단순히 빈민가 삶을 이야기하지 않고, 각 계층들의 위선적인 삶, 진실한 삶 등을 잘 드러내고 있는데...


소설의 결말에서 주인공은 행복한 삶을 찾았지만, 과연 이렇게 행복한 삶을 찾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을 하기는 하지만.


퀴즈쇼에 나오는 지식들이 삶의 지혜하고는 거리가 먼 단편적인 지식을 물어보는 경우가 많지만, 그럼에도 그런 지식들을 직접 체험을 통해서 알게 된 사람에게는 단지 퀴즈가 아니라 자신의 삶이라는 점을 생각하게 한다. 


소설은 무엇보다도 각 문제에 해당하는 주인공의 삶을 보여주면서 인간들의 여러 모습을 보여준다. 부자지만 인색한 사람, 가난하지만 베풀 줄 아는 사람, 자신을 위해서 자식을 버리는 사람, 위선적인 가학성 성애자, 그럼에도 올곧게 살아가려고 애쓰는 사람.


가난 속에서도 우정과 사랑을 잃지 않고 그것을 지켜나가려는 사람. 그래, 세상에 권선징악이 있다고 믿으면 지금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좋은 세상이 되겠지.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악을 조금씩이라고 사라지게 할 수 있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좋겠지.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그런 희망을 주는 소설이다. 흥미진진하게, 추리 소설의 요건도 갖추면서 전개되지만, 무엇보다도 사람다움을 잃지 않고 살아가야 한다는 점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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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대전 Z 밀리언셀러 클럽 84
맥스 브룩스 지음, 박산호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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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월드 워 Z]의 원작 소설이다.

소설이 번역될 때는 영화로 만들어진다고 했다. 소설을 먼저 읽었으면 영화를 다르게 봤을까 하는 생각. 영화를 먼저 보고, 원작인 이 소설을 읽었으니... 순서야 바뀌었지만, 영화와 소설의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좋았다.


소설을 읽으면서 아직까지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19를 떠올리게 되었는데...


공통점은 먼저 중국에서 시작했다? - 소설에서도 좀비들이 중국에서 먼저 활동하는 것처럼 나온다. 그런데도 서양 사람에게 이름은 '아프리카 광견병'이라고 불린다. 특정 지역의 이름을 붙이는 일, 그 지역을 낙인찍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 이 소설이 나올 때는 중국과 미국이 지금과 같은 갈등을 일으키지 않았기에, 중국에 대해서 지금보다는 긍정적인 쪽으로 소설에서 서술이 되어 있다. 


두번째는 원인을 알 수 없다. 왜 좀비들이 발생했는지, 어떻게 좀비들이 전세계에 거의 동시에 발생해서 재난을 일으켰는지를 알 수 없다. 원인을 알 수 없으니 치료법을 알 수 없다. 소설에서는 치료법이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영화와 마찬가지로 좀비들이 불식되지 않았다. 좀비는 계속 살아남아 있다. 코로나19 역시 3년이 지나갔음에도 여전히 사그라들지 않는다.


세번째는 격리다. 격리? 사람들을 격리할 수밖에 없다. 누가 좀비고 아닌지를 구분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장벽을 쌓거나 아니면 만나지 말아야 한다. 소설이나 영화에서는 코로나와 같은 비대면 활동이 많이 나오지 않으나, 만약 코로나19 이후에 이 소설이 쓰였다면 아마도 비대면 활동이 중심이 된 인류의 모습이 나오지 않았을까 한다.


네번째는 죽어가는 사람들은 약자들이다. 강자들은 안전한 곳에서 살아남는다. 다는 아니지만, 약자보다는 생존할 확률이 높다. 모든 질병이 그렇다. 전쟁도 마찬가지다. 


이런 공통점이 있지만, 코로나19는 바이러스고 좀비는 죽은 사람이 움직이는 상태니, 대처방법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에서 사람들이 좀비에 대처하는 방법, 우선 피하고 봐야 한다. 그러나 피하기만 할 수는 없다. 결국 좀비에 맞서야 한다. 그러나 개인이 맞설 방법은 없다. 좀비 퇴치법은 나왔다. 뇌를 없애면 된다. 


소설과 영화가 갈라지는 지점이다. 영화에서는 무언가 대비책을 만들어야 한다. 적어도 좀비들에게 공격당하지 않는 방법을 관객들에게 보여줘야 한다. 따라서 영화에서는 질병이 대안으로 나온다.


즉 기생하는 존재는 자신도 살아가야 하니 건강한 숙주를 필요로 한다. 바이러스 역시 마찬가지다. 숙주가 사라지면 바이러스도 사라진다. 그래서 치명률이 높은 바이러스는 널리 퍼지지 못한다. 퍼뜨릴 숙주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병에 걸린 사람들을 공격하지 않는 좀비를 설정한 이유는 이러한 기생(바이러스)의 특성을 생각해서일 것이다. 그런데 소설에서는 그런 이야기가 없다. 


좀비는 아무 생각이 없다.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 좀비에 물리거나 좀비의 물질이 몸에 들어간 사람이 좀비가 되니, 의학 문제로 가지 않는다.


구체적인 원인을 밝히고 해결책을 제시하기보다는 좀비를 퇴치하는 부분에 강조점을 둔다. 퇴치라고 했지만, 전쟁이다. 좀비와 벌이는 전쟁. 그래서 제목이 세계대전 Z다.


전쟁! 이 전쟁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누굴까?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쓰는 효과적인 전략, 전술은 무엇인가?


소설을 읽으면 전쟁은 어떤 형태로든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좀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대부분의 나라들이 선택한 전술은 일반인들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군대가 좀비를 유인하여 섬멸하기 위해 일반인들을 이용하는 것이다.


일반인들이 미끼가 된다. 그 다음에야 군대가 좀비들을 소탕한다. 그 과정에서 일반인들이 얼마나 죽어가는지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고려할 대상의 우선 순위에서 뒤로 밀린다.


이렇게 전쟁의 살벌함을, 또한 그 전쟁을 수행한 군인들 역시 정신적 고통으로 삶을 유지하기 힘듦을 이 소설은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바로 이런 좀비들이 왜 발생했는지 원인을 밝혀야 한다.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좀비가 뚝 떨어진 것은 아니다. 분명 이유가 있다. 그것도 인류의 생활방식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많다.


그것을 밝혀내야지만 좀비와의 전쟁을 끝낼 수 있다. 세상에 어떤 바이러스는 완전히 지구상에서 없애기는 힘드니... 


이 소설을 읽으면서 코로나19로 고통을 받은 3년,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 코로나를 생각하면서, 우리들 생활방식이 어떠해야 하는지 돌아봐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영화 [월드 워 Z]를 본 사람들, 아마 이 소설을 읽으면서 비교해보면 재미있을 것이다. 특히 군대 문제, 그리고 희생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읽으면 더 좋을 것이고... 전쟁은 어떤 형태로든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하게도 될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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