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천 개의 파랑 - 2019년 제4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
천선란 지음 / 허블 / 2020년 8월
평점 :
시간이 등장한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시간이라고 생각하지만, 시간은 결코 균일하지 않다. 시간은 누구냐에 따라 다 다르게 느껴진다. 여기에 사람들은 흔히 죽음을 앞두고 자신들이 살아온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고 한다. 아주 짧은 시간에 인생 전체에 걸친 긴 시간이.
이처럼 시간은 다르다. 시계에서 볼 수 있는 균등하게 분절된 시간이 아니다. 어떤 시간은 한없이 늘어지고, 어떤 시간은 그냥 건너뛴다. 그렇게 다른 시간. 같은 시간을 살아도 다르게 느끼는 시간. 이것이 삶이다.
누구나 다 다른 삶. 그래서 시간이 다르듯이 삶도 달라야 한다. 삶이 같아야 한다고 할 수 없다. 천선란이 쓴 소설 [천 개의 파랑]이다.
파랑, 색깔이다. 그 색깔이 파랑이라는 이름으로 정리가 될까? 시간이 그냥 기계적인 시간, 수학적인 시간으로 누구에게나 똑 같은 시간이 될 수 없듯이, 파랑 역시 마찬가지다. 파랑은 어떻게 보고 느끼느냐에 따라 다 다른 파랑이 된다. 마치 우리들의 삶처럼.
우리들이라고 했지만, 이 우리들은 인간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모든 존재라고 해야 한다. 인공지능에 관심이 많은 지금, 과연 인공지능을 인간과 같은 존재로 봐야 하는지를 논의하기도 한다. 복제인간에 대한 논의를 넘어서...
이 소설에는 로봇이 나온다. 경마 기수로 만들어진 로봇. 이는 인간의 흥미를 위해서 로봇을 이용했다고 할 수 있다. 로봇만이 아니다. 경마를 하려면 말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말에는 속도가 필요하다. 경마가 무엇인가. 인간들이 자동차 경주를 하듯, 말을 경주시켜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일 아닌가.
이런 경마에 참여시키는 말은 생명체로 인정받지 못한다. 오로지 이윤을 추구하는 도구일 뿐이다. 로봇도 마찬가지다. 사람 기수에 비해 효용도가 높기 때문에 도입한 수단일 뿐이다. 그러니 경마에 동원된 로봇 기수나 말은 생명체로 인정받지 못한다. 오로지 경마에 쓸모 있을 때까지만 존재해야 하는 도구일 뿐이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어느 순간 칩이 하나 자리를 잘못 찾아 들어가 학습 능력이 있는 로봇이 된 콜리가 있다. 다른 생명체와 교감이 가능한 로봇. 그래서 말이 힘들어 하자 스스로 말에서 떨어진다.
고장난 로봇. 폐기될 뿐이다. 또 너무 혹사당해 무릎 관절이 나간 말, 투데이. 역시 도태되어야 할 존재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떤가? 주류에 끼지 못하는 그런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도 과연 도태되어야 하는가?
저마다 다른 시간을 살고 있던 사람들. 무언가 하나씩 결핍을 안고 살던 사람들. 보경, 은혜, 연재. 이 가족에게 콜리는 다른 시간을 살되, 함께 하는 시간도 있어야 함을 알게 해주는 존재가 된다. 로봇을 통해서 가족들은 닫혀 있던 세계에서 열린 세계로 점차 나아가게 되고. 여기에 수의사 복희와 말 관리인 민주, 연재의 친구가 되는 지수가 함께 등장한다.
그들은 로봇을 생명체로 대한다. 로봇도 생명체로 대하는 이들에게 말은 함부로 도태시켜서는 안 될 존재다. 이렇게 경주마로서의 생명이 끝난 말 투데이를 살리기 위해 그들이 함께 하는 과정. 이 과정이 콜리가 투데이에게서 떨어지는 짧은 시간에 다 펼쳐진다.
콜리가 천 개의 파랑이 있다고 하듯이, 삶도 모두 다른 삶들이 있고, 이들의 시간 역시 다르게 흘러가겠지만, 이 다름 속에서도 함께 함이 있음을, 결국 삶은 라이프니츠의 말을 빌리면 '창이 없는 단자'가 아닌 '창이 있는 단자'임을 생각하게 한다.
이 열린 창으로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고 함께 하는 시간이 있음을, 그래서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음을 로봇 콜리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말을 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지만, 말을 함으로써 느끼는 것이 있을 수 있음을, 보경 가족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삶은 다양함을, 그것이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모든 것에는 존재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를 인정해야 함을 소설을 읽으면서 생각하게 된다.
처음에 콜리의 독백으로 시작해서, 다시 콜리의 독백으로 끝난다. 여기에 중간 중간 서술자로 등장하는 보경, 은혜, 연재, 복희를 통해서 로봇의 관점에서 본 사람들의 삶과 사람들이 겪는 삶들이 교차되어 나타난다.
이미 처음에 이별이 표현되어 있기에 소설은 이 이별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까 하는 궁금증을 자아내는데, 이를 끝부분에서 작가가 직접 개입함으로써 해결하고 있다. 소설을 비극으로 이끌어가지 않고, 삶에서 겪는 이별을 통해서 한층 더 성숙해지는 그런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그러니 소설에서 극적인 반전을 느낄 수는 없지만, 콜리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에 대해서 예상치 못한 결말을 맞게 된다.
그 점이 이 소설을 SF소설로 만들어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저런 요소들을 떠나서 소설은 각자가 지니고 있는 빈 공간을 서로가 채워줄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어서 좋다. 파랑이 천 개의 파랑일 수 있듯이, 이들의 삶 역시 천 개의 삶이고, 이들의 시간 역시 천 개의 시간일 수 있음을.
이런 다양함이 결국 서로의 비움을 채워줄 수 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