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전문학 11 - 임경업전 외
장덕순 지음 / 명문당 / 199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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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고전문학 하면 내용을 다 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 읽었다고 착각한다. 어렸을 때부터 여러 경로를 통해 들었기 때문에, 또 학교에서 배웠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실제로 다 읽은 경우는 별로 없다.

 

그냥 대충 아는 것과 제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것은 다르다. 고전소설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홍길동전이나 심청전, 춘향전, 흥부전만 해도 그냥 알고 넘어갈 뿐. 또 조웅전이나 류충렬전 같은 작품, 구운몽, 사씨남정기와 같은 작품도 마찬가지다.

 

제목을 알고 내용도 웬만큼 알기에 안다고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이 책에 실려 있는 소설 중에서 '박씨전'도 마찬가지다. 허물을 벗고 미녀가 되고, 청나라 장수를 혼내주는 도술을 쓰는 여인. 전쟁으로 인한 상실감을 소설을 통해서 극복하고자 했다는 이야기. 남자가 주인공이 아니라 여성이 주인공이 되는 몇 안 되는 고전소설. 이렇게 알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냥 넘어간다. 마치 다 읽은 것처럼. 하지만 다 읽어야 한다. 소설을 다 읽으면 더 많은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박씨전은 이시백의 아버지로부터 시작한다. 영웅소설의 기본 특징. 신이한 출생 아니던가. 이시백의 아버지는 출중한 사람이지만 오랫동안 자식을 낳지 못한다. 그래서 기도를 하고, 기도를 통해 아들을 얻는다. 이 아들은 태어나면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다. 영웅소설의 두번째. 탁월한 능력.

 

그러나 그는 시련을 겪어야 한다. 영웅소설의 세번째 역할. 시련과 극복. 이시백은 천하제일의 박색이라고 할 수 있는 박씨와 결혼을 한다. 지금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얼굴도 보지 못한 신부와 결혼하는 것. 오로지 아버지가 정혼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부인이 박색이다. 예나 지금이나 외모 중요하다. 오죽하면 박씨를 전신성형에 성공한 사례로 이야기하겠는가.

 

이 시련은 박처사라는 박씨 부인의 아버지라는 조력자를 통해 박씨가 탈을 벗으면서 해결이 된다. 개인적인 시련... 이상하게 여기까지는 박씨 부인이 주인공이 아니라 이시백이 주인공이다. 그를 중심으로 영웅소설의 모티브가 작동한다.

 

그렇다면 박씨 부인은, 우선 못생기게 태어난다. 신이한 출생. (세상에 미추가 신이한 출생의 기준이 될 수 있나, 그래서 세상에서 보아주지 못할 박색이라고 하는데, 시아버지 되는 사람은 그런 박씨의 외모를 문제삼지 않는다. 그는 앞부분에서 박씨의 조력자다) 박씨 부인은 뛰어난 재주가 있다. 탁월한 능력. (비록 언급만 되고 있지만, 말이나 연적에 관한 이야기에서 잘 드러난다. 이 부분에서부터 박씨가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시련 및 극복. (남편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후원에 건물을 짓고 피화당이라고 이름 짓는다. 화를 피하는 곳. 이때 화는 병자호란이다. 나라로 보면 그렇다. 하지만 시어머니와 남편으로부터 구박을 받지 않는 곳이라는 의미도 있어야 한다. 이게 시련이다. 곧 조력자를 만나 극복하게 된다. 허물을 벗은 것. 미녀가 된다. 그리고 부부 사이가 좋아진다)

 

자, 이시백과 박씨 부인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여기까지다. 이들의 시련은 모두 극복되었다. 쌍둥이 아들까지 낳고 행복하게 사는 일만 남았으니까.

 

그렇지만 소설이 여기서 끝나면 별 의미가 없다. 영웅소설은 개인의 문제를 사회, 나라의 문제로 확장해 가는 데서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나라의 고난이 나온다. 전쟁을 겪게 되는 것. 병자호란이다. 이미 진 전쟁. 역사적 사실까지 바꿀 수는 없다. 그렇다면 가상의 인물을 등장시켜 복수해야 한다. 용홀대다. 용골대 동생으로 나온다. 박씨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존재. 또 왕대비가 끌려가는 것을 막는다. 세자와 대군들만 청나라로 가게 된다.

 

시련이다. 극복이 나와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래서 마련한 것이 잡혀간 세자와 대군을 데려오는 것. 임경업이 사신으로 가 모셔온다. 여기서 당시 사람들의 사고가 드러난다. 세자는 금은보화를 가지고, 대군은 백성을 이끌고, 막내 대군은 그냥 가고 싶다고 말한다. 

 

당시는 소현세자가 왕위를 물려받지 못하고 봉림대군이 효종이 된 상태. 북벌론이 기승을 부리고 있던 때. 그렇다면 누가 인정받는 왕자가 되어야 하는가? 호왕이 선물을 준다고 말해보라고 했을 때 이들의 답은 당시 지배층이나 백성들의 생각을 반영하고 있어야 한다.

 

북벌? 백성을 위한 왕자는 세자가 아니라 봉림대군이다. 그가 곧 효종이다. 이것이 당시 주류의 생각이다. 이 소설에서도 역시 그렇게 표현이 된다. 비슷한 시기를 다루고 있는 [임경업전]에서도 이 내용은 변하지 않는다.

 

자, 이게 극복방법이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청나라의 발전된 문물을 받아들여 내부적으로 발전을 해서 청나라와 비슷한 또는 청나라를 극복하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 복수의 방법으로 채택되지 않는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소현세자와 같이 발전된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신들의 과거로부터 한발 물러나 세상의 발전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한다.

 

한데 당시 양반들에게는 그런 눈이 없다. 있어도 탄압당한다. 말을 못한다. 백성들 역시 마찬가지였겠지. 이런 모습을 [박씨전]은 잘 드러내고 있다. 그 다음에는 임경업의 죽음... [박씨전]에서 임경업은 후반부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임경업전]에서는 그 전말이 더 자세하게 묘사되고. 그래서 [박씨전]과 [임경업전]은 함께 읽으면 좋다.

 

[박씨전]에서 그 신통력 있는 박씨가 임경업의 죽음에 대해서는 모르쇠한다. 신통력을 발휘하지 않는다. 이시백 역시 마찬가지다. 그냥 관망한다고 보는 편이 옳다. 물론 임경업에 대해서는 옹호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어떤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 이런 뒷이야기가 굳이 있어야 하나 싶다. 그럼에도 임경업의 최후에 대해서 [임경업전]도 아닌 [박씨전]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임경업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서 사람들이 분노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다만, 여기까지다. 더이상의 행동은 없다.

 

영웅소설의 마지막은 대업을 이룬 다음에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다. 잠자는 듯이 죽었다는 표현. 여성이 주인공이 되는 이 소설도 앞과 뒤는 이시백이 주인공이 된다. 박씨는 중요한 역할을 못한다. 다만, 소설의 중간, 전쟁이 일어나기 전과 일어난 다음에 신통력으로 활약하는 박씨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이렇게라도 여성 영웅을 등장시키고 있다. 난세에는 영웅이 필요하다. 그것이 남성이든 여성이든. 하지만 어떻게든 해결이 된 상태에서는 이런 여성 영웅은 필요하지 않다. 박씨전의 뒷부분에서 박씨가 그다지 큰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은 이런 이유다. 더이상 여성들의 힘을 살려줄 수가 없는 상태. 아직 우리 사회는 갈 길이 멀었던 것이다.

 

박씨전은 여기서 멈춘다. 그래도 이런 여성 영웅이 있었다는 것, 이것은 나중에 난세만이 아니라 평시에도 여성들이 삶의 중심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이 된다. 일상에서의 여성 영웅이 나오기 위해서는 더 많은 세월을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지금 이 시대에도 여성 영웅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느낀다면 그만큼 이 사회는 덜 발전한 것이다. 고전을 읽는 이유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보기 위해서이기도 하니...

 

박씨가 겪었던 일들을 과연 지금 여성들이 겪지 않고 있는가? 이들도 박씨처럼 허물을 벗든지, 아니면 자신을 이해해 줄 조력자를 만나든지 해야 하나 생각해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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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도 좋게 딱 걷는사람 시인선 19
황형철 지음 / 걷는사람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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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때인만큼 도대체 이렇게 어수선한 세상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자괴감. 과학기술이 발전하면 할수록, 의학이 발달하면 할수록 그만큼 부작용도 크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달리는 차를 거부할 수는 없으니, 적당한 제동장치를 마련해야 하는데...

 

그 제동장치에 대한 고민도 없이 그냥 발전이라는 환상에 휩싸여 있던 우리들의 뒤통수를 한 순간 바이러스가 또는 다른 것들이 친다. 사정없이. 이건 몰랐지 하면서. 너네 한번 당해봐라 하는 듯이.

 

몇 년 간격으로 '신종'이라는 이름을 단 바이러스들이, 질병들이 나오고 있다. 부작용이다. 항생제가 듣질 않는 슈퍼바이러스가 출현하고, 기존에 있던 바이러스들이 변종을 일으켜 기존 약으로는 잘 치료가 되지 않는 경우가 늘고 있다. 그것도 특정한 지역, 특정한 연령대에서만 일어나지 않고 전지구적으로, 전연령대에 걸쳐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런데, 한번 이런 일이 일어나면 그 반응은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에 집중한다. 누군가 책임을 져야 자신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듯이. 우리 모두가 책임을 져야 할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 듯이.

 

황형철 시집을 읽으며 제목 '사이도 좋게 딱'이란 자연스럽다는 말을 떠올렸다.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내 탓 네 탓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려움을 서로 보듬고 가는 것.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그것이 바로 자연의 일이고 사람의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함께 함. 시집에서 두 시가 지금 상황과 더불어 마음에 남았다. 물론 시인은 지금 상황을 전혀 알지 못했겠지만... 시에서 그때 그때에 맞는 상황을 발견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니.

 

    다저녁 무렵

 

"당신 원통함을 내가 아오

힘내소, 쓰러지지 마시오

 

5·18 엄마가 4·16 엄마에게" (진도 팽목항의 어느 현수막에서)

 

기교나 수사 따위에

애써 공들이지 않아도 괜찮아

그저 분하고 답답한 마음 알아주는 것

내 일인 양 가슴이 저미어 다름없이 흔들리고

애틋하고 가엾이 생각하여 가만있지 못하는 것

정작 힘써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아 보탬 주는 것

시시하다 싶을지 모르지만

시란 그런 것

정치도 그런 것

 

황형철, 사이도 좋게 딱. 걷는사람. 2020년. 44쪽.

 

시가 그런 것이란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정치도 그런 것이라는 것은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잊고 있었는데, 이 시를 읽으며 다시 떠올리게 됐다.

 

그래 정치란 무엇인가? 어려운 사람, 분하고 답답한 마음이 있는 사람들 보듬어 주는 것 아니겠는가. 정치인이란 무엇인가. 바로 힘써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아 보탬을 주는 사람 아닌가. 네 탓 내 탓 공방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자연스런 정치인 아니겠는가.

 

자신을 드러내는 행위, 기교나 수사를 남발하는 말들을 할 필요가 없다. 그냥 정말로 '애틋하고 가엾이 생각하여 가만있지 못'해 어떤 일이라도 하는 사람, 조용히 안아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정치인이다. 그런 정치를 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흔히 하던 말인 '밥 한번 먹자'란 말을 쉽게 할 수 있어야 한다. 한가족이라도 함께 밥을 먹지 못하는 격리 대상자들에게 이 말, 밥 함께 먹자라는 말, 얼마나 가슴에 와닿는 말이겠는가.

 

  밥 한번 먹자

 

거짓말은 아니지만

언제 밥 한번 먹자, 밥 한번 먹자

잘 지키지도 않는 공수표를 던지는 건

밥알처럼 찰지게 붙어살고 싶기 때문이지

단출한 밥상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것만으로

어느 틈에 허기가 사라지는 마법을

무엇이라 설명해야 할까

제아무리 공복이라도

뜸 들일 줄 알아야 밥맛이 좋듯

세상일은 기다려야 할 때가 있어

공연히 너를 기다리는 거야말로

너에게 가는 도중이라는 걸 알지

가지런히 숟가락 놓아주듯

허전한 마음 한구석도

네 옆에 슬쩍 내려두고서는

그랬구나 괜찮아 괜찮아

위로받고 싶기도 하거니와

모락모락 갓 지은 밥처럼

뜨거운 사람이고 싶기 때문이지

 

황형철, 사이도 좋게 딱. 걷는사람. 2020년. 23-24쪽.

 

식구(食口)라는 말. 함께 밥을 먹는 입. 그런 식구. 격리 대상자가 되면 식구라도 함께 밥을 먹지 못한다. 마주 앉아 따뜻한 밥을 함께 먹지 못한다. 하물며 식구가 아닌 사람임에랴. 그만큼 감염병은 우리에게 많은 제약을 준다.

 

지나가면서 인사치레로 했던 말. 언제 밥 한번 먹자. 이 말이 이렇게 소중한 말일 줄이야. 이 말이 이렇게 가슴에 와닿을 줄이야. 새로운 질병으로 밥을 같이 먹자는 말을 쉽게 할 수 없는 지금. 다시 예전처럼 '밥 한번 먹자'는 말을 자연스레 할 수 있는 때가 빨리 오기를... 식구들끼리 예전처럼 아무런 거리낌없이 함께 밥을 먹는 때가 오기를...

 

그래서 모두가 자연스레 사이도 좋게 딱 밥 한번 같이 먹는 일이 많아지기를...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인 지금... 봄은 봄이어야 하므로. 하루라도 빨리 우리들 생활에도 봄이 오기를... 황형철의 시집을 읽으며 마음을 다독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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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의 한국 현대문학 수업 - 세계문학의 흐름으로 읽는
이현우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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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 소설에서 다룰 만하다고 여기는 작가 10명을 선정해 그의 소설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 책이다. 한국 현대 소설사에서 나타난 작가가 꽤 많은데 그 중 10명을 추리는 것도 일일텐데, 그들의 소설에 대해서 세계 문학과의 관련 속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더 힘든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이 책에 나와 있는 작가들이 우리나라 현대 소설을 대표하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작가는 많고 좋은 작품도 많다. 하지만 이 책에서 다루는 소설가들은 한 시대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한 시대를 대표한다는 말이 좀 그렇다면 소설의 경향을 대표하거나 주도한 사람이라고 하면 되겠다. 그런 작가와 작품들을 선별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으니, 로쟈, 이현우의 설명을 따라가면 우리나라 현대소설의 흐름을 어느 정도는 알 수 있게 된다.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황석영 편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로쟈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시대의 핵심적인 모순에 대해서, 본질에 대해서 파악하고 그 문제를 파고드는 소설을 써야 한다. 그것이 현대소설이고 소설가의 역사적 책무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쓰는 것은 엔터테인먼트이기 때문에 소설과는 다른 것이다. 소설가가 아니더라도 잘 쓰는 사람들은 많다. 굳이 소설을 쓰겠다고 한다면 시대의 핵심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여러 제약 때문에 단편으로는 곤란하고 장편으로 확쟁돼야 한다. (173쪽)

 

이것이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관점에서 10명의 소설가와 소설을 골랐다고 생각하는데, 여덟 번째인 이문열까지는 평가나 생각이 조금 다르더라도 그래도 한 시대의 대변하는 그런 작가라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이인성과 이승우에 대해서는 좀 의아한 생각이 든다. 이문열과 비교하기 위해서 작가와 작품을 선정했다고밖에는 생각이 들지 않으니...

 

1950년대에서 시작한다. 소위 전후문학이라고 하는 소설들... 손창섭을 다루고 있다. 이견이 없다. 손창섭이 전후 우리나라 사람들의 암담한 생활을 잘 그리고 있다는 데는 동의하니까. 이 시작부터 로쟈는 장편소설이 없음을 안타까워 하고 있다. 말 그대로 단편은 삶이나 시대의 어느 한 면만을 표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삶, 그 시대의 핵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장편이 되어야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손창섭은 장편소설을 쓰지 못했다고...

 

이런 한계는 다음 작가들에게서도 이어진다. 60대를 열어젖힌 최인훈에게서도 같은 한계를 그는 발견한다. [광장]은 장편이라기보다는 중편에 해당하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하여 이런 시대적 상황을 잘 드러내는 작품을 쓰는 작가가 필요한데, 로쟈가 다루고 있는 작가는 이병주다. 사람들 사이에서 저평가된 작가라는. 그의 작품 [관부연락선]을 대상으로 해방전후 우리 사회의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책의 내용은 그것보다는 이병주라는 작가를 재조명하는 쪽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에 새로운 감수성을 개척했다는 김승옥, 리얼리즘 소설가라고 할 수 있는 황석영을 다루면서 1960-70년대 우리 사회의 모습을 이들 소설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때 나온 소설들은 단편이라서 한계가 있다고 하고, 장편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김승옥은 기독교로, 황석영은 역사소설로 나아간 것이 아쉽다고 하고 있다.

 

독재자를 비판한 작품으로 평가하고 있는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 이 부분의 해석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그리고 이런 [당신들의 천국]만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 우리 사회는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과 같은 소설이 나올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선진국으로 진입해야 한다고, 경제개발을 해야 한다고 강한 독재로 정책을 밀어붙이고, 결과 경제성장은 이루었지만 그것이 누구를 위한 것이었던가. 자본주의가 정착되면서 자본가와 노동자의 갈등이 드러나고, 그것을 표현하는 소설이 필요해진 것. 산업화 시대를 대표하는 소설, 내용은 리얼리즘이지만 표현은 모더니즘이라고 할 수 있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이후 자본주의 모순을 다룬 장편소설이 나와야 하는데...

 

성장소설로 넘어가게 된다. 경제성장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고 사회의 주류를 형성하는 사람들이 지식인 계층이 된 것. 교양이 필요한 시대. 소위 교양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성장소설이 등장하고 많이 읽히게 된다. 이런 흐름을 주도한 것이 이문열이고 [젊은 날의 초상]이다. 그렇지만 이 소설은 처절한 삶의 현장에서 떠난 관념에서의 성장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다음 두 소설가는 이런 이문열의 성장소설과 비교하기 위해 들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인성의 아주 낯선 소설 [낯선 시간 속으로]와 이승우의 [생의 이면]

 

아버지 부재의 이문열이 아버지를 넘어서기 위한 성장소설을 썼다면 이인성은 살아있는 아버지를 넘어서기 위해 썼고, 이승우는 아버지뿐만이 아니라 어머니도 없는 부재 상태에서 성장하는 소설을 썼다고.

 

이렇게 로쟈는 넓은 의미의 사회 속에서 개인의 자리를, 사람들의 삶을 추구하는 소설들에서 이제는 가정에서 자아를 형성해가는 소설로 마무리를 하고 있다.

 

작가와 작품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세계문학과의 연관성도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 점이 한국문학을 세계문학 속에서 파악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가령 성장소설이라는 부류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는 이문열, 이인성, 이승우를 예로 들면 이문열에게서는 괴테이야기를, 이인성에게서는 제임스 조이스와 카프카를, 이승우에게서는 헤세와 지드의 이야기를 함께 하고 있다. 그밖에 황석영에게서는 고리키를, 김승옥에게서는 토마스 만,이병주에게서는 발자크를 함께 언급하고 있다.

 

로쟈는 이 책을 통해 우리나라 문학을 세계문학과 연결지어 우리들 시야를 더 넓혀주고, 지금 우리 시대에 필요한 소설은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소설(소설가)을 기대하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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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얼라이브 - 남자를 살아내다
토머스 페이지 맥비 지음, 김승욱 옮김 / 북트리거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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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남자를 만드는가? 근성으로 하는 힘겨루기가 바로 남자를 만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주 많다.  (185쪽)

 

남자 하면 떠올리는 것이 바로 이런 폭력성이다. 그것을 용감함이라고 포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용감과 폭력은 다른 개념이다. 용감은 즉 용기는 성별에 상관없이 발휘될 수 있는 자질이다. 자신을 지키려는, 또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는 굳센 의지가 필요한 일이고, 용기를 발휘하는 사람에게 남자답다느니, 여자답다느니 하는 말을 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폭력은 좀 다르다. 여성성이 평화와 쉽게 연결이 되고 남성성이 폭력성과 쉽게 연결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지금까지 세상은 흘러 왔다. 그래서 남자 하면 힘겨루기를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이 책에서 남자가 되어 가는 과정에 있는 사람을 통해서도 이것은 계속 환기되고 있다.

 

어릴 때부터 자신 안에 있는 남성을 느끼고 남성이 되고 싶어하는 사람, 그러나 생물학적으로 여성으로 태어났기에 두 번의 피해를 당하게 된다. 아니 더 많은 피해가 있었겠지만,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당하는 피해는 수를 헤아릴 수 없으니, 이 책에서는 두 번의 피해가 중첩되어 나타난다.

 

어린 여성으로 추행을 당하는 9세 때 이야기와, 여성임이 밝혀져 목숨을 건지게 되는 29세 때 이야기. 전혀 다른 결과인 듯하지만 본질은 같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다른 존재에게 규정당하는 것이다. 강도에게는 남성이 아니라는 이유로, 소녀라는 이유로 아빠(의붓아빠라고 해야 하나, 나중에 유전자 검사 결과 친부가 아니라고 밝혀지니)에게 특정한 존재로 규정당하는 것이다.

 

자신을 자신이 규정하지 못하고 남들에게 규정당하는 존재로 생물학적으로는 여성이지만 여성성을 부정하고 남성성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 그는 그래서 남성이 되려고 한다. 남성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무엇이 남자를 만드는가? 라는 질문은 이렇게 해서 나오게 된 것이다. 단지 생물학적으로 가슴이 없고, 양경(陽莖)이 있다고 남성인가? 그는 가슴 절제 수술을 했다. 그러나 목소리는 여전히 얇고 가늘고 톤이 높다. 테스토스테론을 맞기로 결정을 한 이유도 외면도 바꾸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그 과정을 시행한다. 일반적으로 남성으로 생각되는 특징들이 몸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렇게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서도 남성으로 인정받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그가 완전한 남성이 된 것인가?

 

이런 질문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완전한 남성, 여성은 없다. 도대체 어디에 기준을 둔단 말인가? 이 책에 이런 말이 있다.

 

남자를 만드는 것은 아무도 보지 않을 때 그가 내보이는 모습이다. (186쪽)

 

이 말은 외면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폭력성이 남성을 대표한다고, 남성으로 살기 위해 폭력을 사용해야 한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어떤 삶을 살지 스스로 결정하고, 그것에 책임을 지면 된다는 말이다.

 

결코 남을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신 안에 있는 존재를 발견하고 그 존재를 인정하고, 그 존재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여성으로 성전환을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무엇이 여자를 만드는가? 라는 질무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언제나 집에 와 있었다. (203쪽)

 

이 표현으로 남자를 또 여자를 만드는 것은 어느 순간에 확 일어나는 일, 즉 테스토스테론이라는 남성 호르몬 또는 에스트로겐이라는 여성 호르몬 주사를 맞거나 또는 성전환수술을 하거나 법적으로 성전환 인정을 받은 때로부터가 아니라 이미 자신은 그 존재로 살아오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이 책에서 동생이 했다는 말. 그 말 속에 다 들어 있다.

 

"누나는 항상 나한테 형이었어." (216쪽)

 

책 제목 [맨 얼라이브]를 '남자를 살아내다'로 번역하기도 했는데, 그런 만큼 이 책은 성전환자의 이야기다. 논픽션이라고 한다. 사실에 기반한 자신의 이야기라는 거다. 물론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은 바꿨겠지만, 사실인 이야기다. 그만큼 성전환자로 살아가는 것이 힘들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성전환하기도 힘들지만 하기까지의 과정도, 그 다음에 겪어야 할 일들도 매우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함을 이 책은 잘 보여주고 있다. 다른 사람이 잘 인정하지 않는 자신 안에 있는 자신을 찾아 살아가려고 할 때 겪을 수 있는 외적으로 내적으로 겪게 되는 괴로움과 갈등을 잘 보여주고 있는 책이다.

 

그리고 성전환자의 삶을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시작하지도 않지만, 마찬가지로 어느 순간을 종점으로 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들의 삶이 과정이듯이, 이들의 삶도 마찬가지임을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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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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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남미 페루에서 일어난 일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물론 소설이다. 사실이라고 해도 소설로 창작이 된 이상 소설이라고 해야 한다. 소설을 가지고 사실이다 아니다 논쟁을 할 필요는 없다. 다만 소설로 창작이 되었다는 것은 개연성이 있는 이야기란 뜻이다.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 그러므로 현실이라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일. 그래서 소설을 읽는다. 간접체험을 할 수 있으므로. 그 간접체험으로 우리가 삶에서 시행착오를 덜 겪을 수 있으므로.

 

작가는 분명 사실에 기반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또 소설 속의 인물은 현실의 삶에 간여해서는 안 된다(6쪽.서문)고 하고 있다. 즉, 사실에 기반하지만 소설을 소설로 읽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소설을 통해서 그런 간접체험을 했다면 현실은 소설에서 벗어나 자신의 체험으로 현실을 인식하고 거기에 대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로 들린다.

 

그럼에도 이 소설 제목에 있는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는 두 가지를 떠올리게 한다. 물론 부정부패와 독재로 얼룩졌던 라틴아메리카 현대사를 제외하고 말이다. 이 소설 주인공인 판탈레온을 보면서는 독일 나치스의 아이히만이 생각났고, 특별봉사대는 일제 군위안부를 떠올리게 했다.

 

세상에 옳고 그름을 떠나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미치도록 잘하는 인간이 있는데, 그것이 유대인 학살을 용이하게 했던 존재가 아이히만이라면, 한나 아렌트가 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보라. 그는 자신이 한 일에 일종의 자부심마저 지니고 있다.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했다는 그런 자부심.

 

이 소설에서는 군위안부를 특별봉사대란 이름으로 조직하여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판탈레온 대위가 그런 존재다. 그 역시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한다. 그것도 자부심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평가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임무에 대하여 깊게 생각해 보지도 않는다. 과연 그런 일을 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바람직하지 않은지는 고려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명령 너머를 사유할 수 있는 힘이 없다. 오로지 주어진 일을 잘 하기를 바랄 뿐이다. 거기에 도덕관념은 끼어들 여지가 없다.

 

오히려 효율성만을 따진다. 군인들이 민간인을 강간하는 것을 막기 위해 특별봉사대를 조직하여 그들의 성욕을 해소하게 한다. 그것도 잘하기 위해서 횟수, 시간 등을 통계내고 먼저 흥분하도록 책자를 제공하는 일까지 한다.

 

그에게는 오로지 특별봉사대원들에게 군인들이 성욕을 해소해서 민간들을 강간하는 사건이 터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목표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그러나 역사적으로 군대를 따라다녔던 위안부들의 존재를 이토록 잘 드러낸 소설이 있을까 싶을 정도다.

 

그렇지만 소설은 결코 무겁지 않다. 아주 가볍다. 유머가 넘친다고 해야 하나? 광신도들이 십자가에 사람이나 다른 생명체들을 매다는 장면에서도 긴박감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아주 가벼운 문체로 넘어가기 때문일 것이다.

 

광신도와 특별봉사대. 아마존 밀림에 존재하는 그러나 소위 지도층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없어져야 할 존재, 가려져야 할 존재들. 이 두 존재들과 여기에 관계된 인물들이 모자이크 식으로 소설 속에서 짜여져 있다.

 

이 이야기와 저 이야기가 섞여서 나오는데, 그렇다고 이야기의 흐름을 놓치게 되지는 않는다. 여러 이야기가 막 섞여 있지만 전체적인 흐름을 유지하고 있으며, 그래서 인물들의 특성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대신 무겁지 않게 비극적인 사건에 다가가게 된다. 읽을 때는 무겁지 않게 아주 경쾌하게 소설을 읽어가지만 읽고 나서는 많이 무거워진다.

 

세상에 아이히만과 같은 존재를 주인공으로 만나는 소설을 읽고 어떻게 가벼워질 수 있겠는가. 우리 주변에 이렇듯 최선을 다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다하고 본인은 사회를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행동하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게 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소설 속에서 한 장군은 이렇게 말한다.

 

"적어도 그 자는 그걸 엉망으로, 그러니까 아주 불완전하게 조직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바보는 특별봉사대를 육군에서 가장 효율적인 조직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272쪽)

 

사실 우스꽝스런 정책을 입안하는 지도층을 비아냥거려야 하는데, 그걸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실현되도록 하는 중간관료들이 있다. 그런 관료들로 인해 말도 안되는 정책이 실행되고 더 많은 사람들이 그 일에 휩쓸리게 되는데, 소설 속 인물인 판탈레온 대위 역시 그런 인물 중 하나다.

 

그에게는 잘못된 정책을 비판하거나 그것을 고의로 태업을 함으로써 좀더 바람직한 정책으로 바뀌게 할 생각, 능력이 없다. 이런 인물들로 인해 잘못된 정책이 잘 시행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럼에도 일의 전모가 드러나면 지도층은 부인하기 일쑤다. 군위안부 문제를 보라. 군에서 분명 관여를 했음에도, 모르쇠로 일관한다.

 

이 소설에서도 마찬가지다. 판탈레온은 비밀로 하라는 명령을 미스 브라질의 죽음으로 어기게 되는데, 이때 군부에서는 우리가 익히 일본 군부, 정부가 한 반응에서 알 수 있는 일들을 똑같이 한다.

 

"특별봉사대라고 일컬어지는 조직은 그 어떤 경우에도 군사 기관이 될 수 없으며, 그것은 민간 거래업체로 임시로 우연히 군에 의해 묵인되었을 뿐 군의 지원을 받지도 않았고, 군 당국에 의해 공식화되지도 않았으며, 군과 그 어떤 관계도 없다고 밝혔다." (329쪽)

 

어찌 이리도 똑같을 수 있을까? 마치 작가가 우리나와와 일본에서 일어난 일을 알고 있었던 듯이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세계 각국에서 일어났던 일들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판탈레온 대위도 특별봉사대에 관한 문서들, 자료들을 모두 없애버리지 않는가.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된 정책을 이렇게 가려버리고 부인해 버리는 것. 그리고 책임을 상층부가 지는 것이 아니라 명령에 복종한 관료들에게 지우는 것. 이것이 바로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런 점들을 소설을 통해서 작가는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아직도 군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 처해 있다. 그 점을 생각하면 이 소설은 참으로 섬뜩하다. 소설 속에서는 끝났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판탈레온이라는 실행자를 주인공으로 소설이 전개되었기 때문이지만, 끝부분에서 부분부분 드러나는 특별봉사대원들의 삶은 결코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읽고 많은 생각과 토론이 필요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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