꾿빠이, 이상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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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김해경.


두 이름이 있다. 이름이 존재라고 한다면, 두 이름은 다른 존재여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상은 알아도 김해경은 잘 모른다.


이상은 작품을 통해서 불멸의 존재가 되었으며, 김해경은 유한한 삶을 마감함으로써 소멸의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작가와 작품은 함께 하기도 하지만, 따로 갈 때도 있다. 특히 작가가 다른 이름으로 작품을 쓴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이 소설은 바로 이런 간격을 소재로 삼아 쓴 소설이다. 불멸의 존재 이상과 소멸의 존재 김해경. 그리고 존재해야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작품 오감도 16호-30호. 


(이상은 자신이 30편을 엄선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것 역시 이상이라는 작가의 비밀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15편 이후의 작품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은.)


이상을, 이상 작품을 소재로 소설을 전개하기에 이 소설에서 서술자는 한 명이 아니다. 소설의 서술자는 세 명으로 각 부분에서 달라지고, 그 달라진 서술의 내용을 통해서 이상에게 다가갈 수 있다.


이상의 데드마스크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기자가 서술자가 되는, 그러나 그 데드마스크는 가짜로 인정이 되지만, 과연 그것이 가짜인지 진짜인지 알 수 없는 내용. 즉, 이상의 얼굴을 떴다는 데드마스크조차도 진위 여부를 판단할 수 없는데, 그의 알려지지 않은 작품에서랴.


여기서 서술자의 삶과 이상의 데드마스크 부분이 겹치면서 소설은 더욱 복잡해지는데, 이 복잡함을 두 번째 부분에서 이상의 삶을 좇아가는 인물을 통해서 세 번째 부분으로 연결시켜 준다.


수기를 쓴 사람. 평생을 이상처럼 살고자 했으나, 삶은 누구에게나 단 한번의 삶. 자신만의 삶이 있기에 다른 사람을 모방하는 삶은 진짜 삶이 될 수 없다. 작품 역시 마찬가지다. 모방은 자신의 작품을 더 잘 쓰기 위한 방편이지, 결코 자신의 작품이 될 수는 없다.


모방이 작가에게 필수적인 과정이라면,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야 한다. 즉, 날아보려 해야 한다. 날아보려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날개 힘에 의존해 난다면, 그 작품은 자신의 것이라 하기 힘들다.


두 번째 서술자의 모습이 그렇다. 그는 이상처럼 살고자 했으나, '이상처럼'은 되어도 '이상은(또는 이상이)' 되지 못한다. 단 한번뿐인 삶을 재현할 수는 없다. 그러니 그가 수기에 쓴 작품들이 그 자신의 작품이 되지 못한다. 그는 이상을 흉내내었을 뿐이다.


날지 못한 사람. 날려고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상이라는 날개에 달라붙어 그냥 그렇게 공중에 떠 있고 싶을 뿐이었다. 이상의 날개에서 벗어났을 때 자신의 작품을, 불멸의 작품을 쓸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되지 못한다.


세 번째 서술자는 학자다. 이상을 연구하는 학자. 그러나 그의 삶 역시 어느 한 곳에 정착되어 있지 못하다. 이 서술자의 삶은 그 자체로 이상의 삶과 비슷하다. 아니다. 서술자는 이상이 아니라 김해경의 삶과 비슷하다고 해야 한다.  


김해경이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났고, 입양이 되었으며, 조선과 일본 또는 근대를 상징하는 다른 나라 사이에서 작품 활동을 했다면, 그런 작품 활동의 결과가 그를 불멸의 존재인 이상으로 만들었다면, 미국에서 자랐지만, 대만 출신이고 입양되었으며, 한국에서 이상 연구자로 활동하는 서술자 역시 김해경의 삶과 비슷하다.


그렇지만 그는 불멸의 존재가 될 수 없다. 이상이라는 존재가 없다면 그의 활동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연구자의 숙명과도 같다. 그래서 연구자는 없던 것을 찾아내야 한다. 작가가 숨겨놓은 비밀을 파헤쳐야 한다.


그런 연구자가 뛰어난 연구자가 될 수 있다. 자신의 연구를 공유하지 않거나 또는 남들 모르게 불쑥 발표하는 연구자들의 모습으로 이 소설 속에 등장한다. 이들은 작가의 비밀을 하나씩은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연 작가의 모든 비밀을 알 수 있는가? 그렇게 모든 비밀을 알게 하는 작가가 불멸의 존재가 될 수 있는가?


그래서 작가는 개인으로서의 삶과 작가로서의 삶이 분리된다. 분리된 삶 속에서 어느 쪽에 자신을 두느냐에 따라 날개를 달고 날아 불멸의 존재가 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날개에 얹혀서 가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불멸의 존재는 많은 사람들을 자신의 날개 힘으로 함께 날게 한다. 이런 작품이 좋은 작품이다. 불멸의 작품이 된다.


작품은 비밀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비밀은 캐고 캐도 끊임없이 재생산되어야 한다. 이상의 작품에 대한 해석, 발견되지 않은 유고 작품에 대한 이야기 등등은 이상을 계속 불멸의 존재로 남게 한다.


개인 김해경은 소멸해도 작가 이상은 불멸의 존재로 남는다. 그리고 그때 이상은 육체를 가진 개인이 아니라 문학사 속에서 영원히 살아 있는 존재가 된다. 그의 작품과 더불어.


그렇다면 작가라면 이상을 추종해야 할까? 아니다. 이상은 모방의 단계에서 그쳐야 한다. 두 번째 서술자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이상과 결별해야 한다. 굿바이. 이렇게 쓰고 싶지만, 소설 제목처럼 꾿빠이라고 해야 한다.


이상과 헤어져 자신만의 세계를 개척하는 사람, 그 사람이 이상을 제대로 계승한 사람이다. 그런 생각을 하게 했다. 이 소설은.

 

이상 작품을, 시나 소설, 또 수필을 읽은 사람에게는 이 소설이 매우 흥미로울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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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녀 이야기 그래픽 노블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르네 놀트 그림, 진서희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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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었다면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소설은 상상을 통해서 장면을 떠올려야 한다면, 그래픽 노블은 그림으로 그려져 있기 때문에 소설을 읽었다면 자신의 상상과 비교하면서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소설을 읽지 않았다면 내용의 전개를 그림에 따라서 따라가기 때문에 다른 맥락의 즐거움을 느낄 수도 있다.


길리어드라는 곳에서 벌어지는 일들. 여성을 동등한 인간이 아니라 수단으로 대하는 세상.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 그들이 했던 행위들.


한 순간에 경제적 무능자로 만들어버릴 수 있고, 그 다음에 모든 권리를 박탈하고 오로지 수단으로서만 지낼 수 있게 만드는 그런 제도.


상상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하지만, 이런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이야기는 상상 속에만 있지 않다. 


모든 권리를 박탈당하고 수동적인 존재로 전락해버리는 사람들. 그렇지만 사람은 그런 상황에서도 벗어날 꿈을 꾼다. 노력을 한다.


메이데이. 그렇다. 구해달라고, 아님 약자들이 힘을 합쳐야 한다는 그런 의미가 암호로 통용이 된다. 그런 상황을 마냥 감내만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사람이 사는 세상이 아니므로.


소설로 읽었을 때도 좋았지만, 그래픽 노블로 보는 것도 좋았다. 오히려 더 섬뜩했다고 할까? 그런 세상이 오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생각. 그리고 [시녀이야기]의 후속편인 [증언들]에 대한 그래픽 노블도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암흑인 세계를 벗어나는 모습을 우리는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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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2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김춘미 옮김 / 비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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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소설이다. 잔잔하다. 특별한 갈등도 없다. 그렇다고 사건이 없지는 않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마치 물결의 흐름에서 겉으로는 잔잔해 보이지만, 속에서는 강한 물의 흐름이 있듯이, 이 소설 역시 그 잔잔함 속에서도 갈등이 있다. 다만 표면에 잘 드러나지 않을 뿐.


일본 사람들의 특징으로 드는 말 중에 겉으로는 잘 드러내지 않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들은 직선적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만, 남들이 알아차릴 수 있게만 말하고 행동한다고 한다. 지금은 달라졌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대등하다고 여기는 상대에게는 이런 태도가 여전히 유지된다고 볼 수 있다.


이 소서에서도 마찬가지다. 감정들이 겉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별로 없다. 말투로 눈짓으로, 행동으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그것을 알아채는 쪽으로 서술이 된다.


건축을 주요 소재로 삼고 있으면서 이런 일본인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인물로 소설의 중심인물인 무라이 슌스케를 들고 있다.


건축가로서 명성을 얻은 그는 사무소를 차린다. 이 사무소에 직원을 뽑지 않다가 소설의 서술자가 직원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여름, 별장으로 가서 국립현대도서관 설계 경합을 준비한다.


이 여름에 겪었던 일들이 소설의 중심이다. 그런데 사건의 갈등보다는 건축에 대한 이야기가 주로 서술된다.


어떤 건축을 하려고 하는지, 건축은 사용자 중심이어야 한다는 무라이의 사상을 중심으로 국립현대도서관을 어떻게 설계하는지, 그리고 그동안 무라이가 설계하고 건축한 집들이 어떤지를 보여주고 있다.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들은 자연과 배치되는 건축이 아닌 자연 속에 녹아들어가는 건축, 그렇다고 자연의 일부가 아닌, 건축은 인위적인 결과물이니까, 인위적이되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건축을 하려고 한다.


또한 건축물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편리하게 쓸 수 있는 건축을 하려고 한다. 그래서 건축하는 사람은 반드시 요리를 해야 한다고 한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사무소 직원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요리를 한다. 요리를 해야 집 안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을 이해하고, 그에 합당한 건축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위압적이지 않은, 그렇다고 너무 구태의연하지도 않은 그런 건축. 서술자는 여름 별장에서 그런 건축의 묘미에 푹 빠져들게 된다.


무라이 선생이 짚어주는 것들을 스케치하면서 느끼게 되는 건축의 아름다움, 그리고 자연에서 느끼는 아름다움이 소설에 잘 표현되어 있다.


읽으면서 숲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어서 좋았다고나 할까? 또 건축이 어떠해야 하는지도 생각할 수 있어서 좋았고.


국립현대도서관 경합을 위한 설계를 할 때 소설 속에서 표현된 이용자들이 어떻게 느끼고 활용할지를 고민하면서 설계하는 장면을 보면서, 예전에 우리나라에서 '기적의 도서관'을 설계할 때도 이런 고민을 하면서 설계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정기용 건축가가 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점들을 이 소설을 통해서 느낄 수 있었다고나 할까. 마음이 잔잔해지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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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르는 질문들 - 마거릿 애트우드 선집 2004~2021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이재경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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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녀이야기][증언들]이 내게 애트우드란 소설가를 각인시켰다. 몇 편의 작품을 더 읽었고, [나는 왜 SF를 쓰는가]와 같은 에세이도 읽었다.


읽을 때마다 실망하지 않았다. [페넬로피아드]만 봐도 그렇다. 타고난 이야기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타고난 이야기꾼은 그냥 되는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가? 그렇지 않다. 이 책을 읽어보면 더 잘 알 수 있다.


관심, 노력, 포기하지 않는 끈기 등등 작가에게는 많은 것들이 필요하다. 그 중에서 질문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질문은 보이는 것을 보이는 대로만 보지 않고, 그 이면에 있는 무엇을 찾으려는 노력이다. 질문이 없는 삶은 수동적인 삶이다.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질문을 해야 한다.


그래서 전체주의 정권은 늘 질문을 막았다. 질문은 곧 자유와 연결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자유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 중 하나가 작가가 아닌가 한다.


이 책에서는 애트우드의 다양한 글들이 실려 있는데, 작가에 대한 글, 작품에 대한 글, 그리고 사회 문제에 관한 글, 자신의 글쓰기에 관한 글 등등.


어떤 글을 읽어도 좋지만, 이 책의 순서에 따라서, 시간 순서에 따라서 글들을 배치해 놓았기 때문에 순서대로 읽으면 더 좋을 거란 생각이 든다.


역사의 흐름을 되돌리려는 순간에 대한 애트우드의 분노, 그렇지만 그것들이 작품 속에 어떻게 녹아들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글들.


글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행동을 통해서도 자신의 신념을 보여주는 애트우드, 특히 레이철 카슨에 대한 글을 보라. 그 글을 통해서 레이철 카슨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선물을 남겨주었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또한 자유를 억압하는 세력들에 대한 분노, 그리고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에 대한 옹호, 이런 것들이 이 책에 너무도 잘 나와 있다.


분명하고 명쾌하게, 그러나 너무 단정적이지는 않게. 작가는 단정적으로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작품을 통해서 보여주는 사람,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그래서 좋은 작품을 읽으면 사람들이 변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애트우드 역시 많은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고, 자신이 사는 세상이 좀더 좋은 세상이 되었으면 하는 희망을 품고 살아왔으며, 작품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애트우드가 어슐러 K 르 귄에 대해서 한 말을 고스란히 애트우드에게 돌려주고 싶다.


'다행히도 르 귄은 우리에게 다차원적 작품, 힘들여 얻은 지혜, 본질적 낙천주의를 남기고 갔다. 그녀의 분별 있고, 명석하고, 교묘하고, 서정적인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지금 더 요긴하다. 우리는 거기에 대해, 그리고 그녀에게 감사해야 한다.' (524쪽)


여전히 애트우드는 우리 곁에 있다. 그렇지만 그녀에게 감사해야 한다. 그녀 작품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세상을 제대로 보는 눈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타오르는 질문들]


방대한 책이지만 읽기 시작하면 손을 떼기가 힘들다. 다양한 분야에 대해서 애트우드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또 애트우드 작품이 어떻게 창작되었는지를 들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책의 장점은 사회에 대해서 질문을 할 수 있다는 것. 


질문을 통해서 우리 사회를 좀더 깊이 있게 볼 수 있다는 것. 단지 서양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 사회를 보는 눈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이 이 책이다.


우리 역시 질문을 해야 한다. 아직도 해야 할 질문, 찾아야 할 문제들이 많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서 이 책은 다른 책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수많은 책들과 연결시켜 주는 책. 좋은 책이란 바로 이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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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피투성이 연인
정미경 지음 / 민음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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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연하다. 이 말로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다.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을.


총 여섯 편 소설이 실려 있는데, 서술자로 남자가 셋, 여자가 셋이다. 균형을 이루고 있다. 


어느 성을 따르더라도 사랑을 주를 이루고 있지만, 그 사랑이 이상하게 어긋나고 있다. 어긋남 속에서도 만남을 찾아 함께 살아가는 것이 사랑이겠지만, 그런 사랑이 어디 쉬운가.


첫소설 '나릿빛 사진의 추억'에서 나오는 남자 서술자. 그러나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일이 벌어진다. 그는 진실과 상관없이 진실을 만들어내야 한다. 즉,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진실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진실이다.


자신들이 믿고 있는 사실을 진실로 만들어야만 하는 시대, 그런 시대에서 진실이 있냐 없냐는 중요하지 않다. 진실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실조차도 만들어내서 자기 만족을 삼으려는 모습.


어쩌면 사랑에서도 이런 모습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보고 싶은 면만 보는 그런 모습들. 그래서 사랑은 눈을 가린다고 했던가. 눈을 멀게 한 사랑이지만, 곧 눈을 뜬다. 그렇게 눈을 떴을 때, 어떤 사랑이 보이는가.


눈 멀었을 때 본 사랑이 보이는가? 아니다. 자신이 그동안 보아왔던, 느꼈던 사랑이 전혀 다른 사랑이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 점을 여자 서술자가 등장하는 '나의 피투성이 연인'에서 볼 수 있다. 남편의 죽음 이후, 자신이 생각했던 사랑이 사랑이 아니었음을(이상하게 김광석이 부른 노래 가사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 떠오르는데..) 알게 된다.


자신이 알고 있던 남편. 그들의 사랑. 그러나 그 사랑 밖에 또 다른 사랑이 있음을. 소설에서는 이런 모습을 전등사에 갔으나 전등사까지 가지 못했던 기억, 그러나 전등사에 갔던 날로 말하는 장면으로 보여주고 있다.


서로 같은 사랑을 하지 못하지만, 그들이 느끼는 사랑의 교집합은 있지만, 그것이 하나가 아니고, 서로 느끼는 교집합이 다를 수 있음을. 그럼에도 그런 사랑을 포기하지 못하는 서술자의 모습을 통해서 사랑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경험하게 한다.


사랑이라는 착각 속에서 죽음으로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어쩌면 맹목적인 사랑은 실질적인 죽음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소설이 '비소 여인'인데, 좀 섬뜩하다.


현실에서는 그런 일이 없겠지만, 이 소설을 사랑이란 이름으로 서로를 옭죄고 서로를 갉아먹는 모습으로 읽으면 그럴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천천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중독이 되는 비소처럼, 사랑 역시 그렇지 않을까, 그래서 깨달은 순간이 이미 너무 늦어버릴 수도 있고, 빠져나오기 힘들어지거나 빠져나오지 않으려 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비소 여인'의 서술자가 남자라면 그래서 비소에 중독되듯이 자신이 생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 나타난다면, 여자가 서술자인 '달은 스스로 빛나지 못한다'는 다른 생활을 경험하고 그 생활에 매력을 느끼지만, 안락한 생활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인다.


즉, 이미 자신의 사랑이 끝났음을, 그런 사랑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지속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자신은 그렇게 살아가겠다는 모습을 드러내는 소설.


많은 사람들 삶이 그렇지 않은가. 자신이 속한 세계의 문제점을 알고는 있지만, 그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


사랑 역시 마찬가지다. 사랑에 모든 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랑은 온전히 하나가 되는 일이 아니라고, 소설은 말하고 있다.


그래서 이 소설집에서 인물들은 사랑 속에서 하나가 되지 못한다. 누군가는 떠나가거나 죽거나 죽이거나 한다. 그렇지만 그것이 사랑임을, 우리의 사랑은 그런 변화, 갈등 속에 있음을 이 소설집은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소설집 제목이 된 '나의 피투성이 연인'의 끝부분에서 작가는, 바로 그런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사랑이 아름답고 따스하고 투명한 어떤 것이라고는 이제 생각지 않을래. 피의 냄새와 잔혹함, 배신과 후회가 없다면 그건 사이보그의 사랑이 아닐까 싶어.' (136쪽)


이런 사랑을 통해서 우리는 희노애락의 감정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그것이 바로 인간의 사랑이 아닐까. 이것들을 없애려고 하는 사랑이 과연 사랑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달은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에서 남자 등장인물인 윤조를 보라. 이 인물은 희노애락이 없다. 무언가로 포장된 듯한, 그러면서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는 그런 인물일 뿐이다. 과연 이런 인물과 살아가는 일이 사랑일까? 작가는 그런 의문을 제시한다. 그래서 이 소설의 끝부분은 이렇게 끝난다.


그런 사랑은 사랑이 아님을 알게 해주는 구절. 


'나는 이제 빛나지 못할 것이며 저녁의 그림자처럼 사라질 거야,. 너와 나의 틈 사이, 거기 희미한 빛이 있었을 뿐.'(244쪽) 


우리 삶에서 사랑이 이렇게 그림자처럼 사라지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스스로 빛나지는 못할지라도 서로를 빛나게 비춰주는 역할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 점이 힘들지만, 바로 그런 사랑의 어려움을 이 소설집은 보여주고 있다. 언급하지 않는 소설도 그렇다. 읽어보면 좋다.


잘 읽히는 소설이다. 그리고 울림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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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23-02-10 10: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무척 좋아하는 소설집인데, 다시 읽어보고 싶네요^^

kinye91 2023-02-10 11:35   좋아요 0 | URL
많은 작품을 읽지는 않았지만 정미경 작가의 소설은 어떤 울림을 마음에 주네요. 다른 작품들도 읽어야겠단 생각을 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