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브레드위너 세트 - 전4권
데보라 엘리스 지음, 권혁정 옮김 / 나무처럼(알펍)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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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다시 평범한 아이가 되고 싶어. 학교와 집을 오가며, 다른 사람이 일해 번 음식을 먹고 싶고, 아버지가 계셨으면 좋겠고. 난 그냥 그렇게 평범하고 지루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어." (데보라 엘리스, 브레드 위너, 첫번째 이야기. 나무처럼. 2020년 첫판 2쇄. 136쪽)


이런 것이 소망일 수 있을까? 소망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소박하다. 그렇기 때문에 더 처연하고 슬프다. 누군가는 당연하게 여기는 일들이 누군가에게는 소원이 된다는 사실이. 그런 소원이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아직도 진행 중인 아프가니스탄의 이야기다.


소설은 몇년의 시간을 두고 벌어지는 일을 다루고 있다. 소설이라고 하기보다는 현실이라고 하는 편이 더 좋을지도 모른다. 르포나 다큐멘터리에서 다루기에는 너무도 처참해서 차마 다룰 수 없는 참담함. 비극을 소설은 다룰 수 있기에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이 겪는 참혹함을 이 소설보다 잘 드러낼 수는 없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소설이 무겁게 진행되지는 않는다. 어린 소녀가 주인공이라서 그런지도 모른다. 소녀의 시선과 행동을 따라가다 보니, 그렇게 어둡고 무거운 현실 속에서도 희망이, 웃음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것이 문학의 힘인지도 모른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이라는 꽃을 피워내는.


총 4권이다. 작가의 말을 읽어보면 [브레드위너]라는 제목으로 3부작이 나왔고, 그 후의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4편을 썼다고 한다. 번역은 '소녀 파수꾼'으로 했지만, 영어 제목은 '내 이름은 파바나(My Name Is Parvana')'다. 이 소설의 주인공 파바나.


1권은 아버지가 잡혀간 다음, 남자 없이는 외출이 금지당한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의 삶을 다룬다. 세상에 남자 없이 밖으로 나갈 수 없다니... 그럼 남자가 없는 집은 그냥 집 안에서 굶어죽어야 한단 말인가? 이게 파바나가 남장을 하는 이유다. 파바나만이 아니다. 많은 소녀들이 남장을 하고 일을 하러 나온다.


당연한 일이다. 살아야 하기 때문에. 탈레반이 정권을 잡은 뒤, 외국 유학을 갔다온 아빠는 잡혀가고, 대학을 나온 엄마는 여자라는 이유로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현실. 파바나를 통해 탈레반이 장악한 아프가니스탄의 모습이 펼쳐진다.


2권은 엄마와 언니가 떠나고, 그들을 찾아 떠나는 파바나의 여정이 그려져 있다. 파바나가 엄마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만나는 아이들. 그 아이들 역시 아프가니스탄의 비극을 온몸으로 겪고 있는 아이들이다. 


수많은 지뢰, 인간 대우를 받지 못하는 여성들, 특히 어린 여자들은 사람이 아닌 취급을 받는다. 그들은 재산일 뿐이다. 이것이 과연 사람 사는 세상인가? 우주로 인간을 보내려고 하는 이 시대에 그런 일이 용납된다는 사실 자체가 끔찍한 비극이다.


3권은 프랑스로 가고 싶어하지만 결국은 아프가니스탄에 남아 일을 하게 되는 파바나의 친구 샤우지아의 이야기다. 개인의 행복을 찾아 떠나고 싶지만, 개인은 행복해질지 몰라도 아프가니스탄에 살고 있는 수많은 여성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는다.


아니 여성들만의 삶이 아니다. 남성과 여성을 불문하고 많은 아이들이 지뢰로 발을 잃거나 죽임을 당한다. 또한 여성을 동등한 인격체로 대하려는 남성들도 고난을 겪는다. 탈레반의 극단주의를 비판하는 지식인들 역시 고통을 받는다. 


탈레반을 추종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 사회, 그런 사회를 두고 개인의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 자신이 에펠탑에서 유럽의 풍경을, 안식을 누리고 있을 때 떠나온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누군가가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을 수 없는데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


샤우지아는 그래서 프랑스로 떠나지 못한다. 위라 아줌마를 도와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을 돕는 활동을 하게 된다. 이렇게 탈레반 치하의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녀들이 겪는 비극을 1,2,3권이 다루고 있다면 4권은 몇 년 뒤다. 


그 후의 이야기는 어떻게 되었을까? 탈레반을 축출하는 미군이 등장하면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의 삶은 행복해질까? 아니다. 행복은 외부에서 오지 않는다. 마치 신동엽 시인이 노래한 '봄은'이라는 시처럼 말이다.


봄은 - 신동엽


봄은 / 남해에서도 북녘에서도 / 오지 않는다. // 너그럽고 / 빛나는 / 봄의 그 눈짓은, / 제주에서 두만까지 / 우리가 디딘 / 아름다운 논밭에서 움튼다. // 겨울은, / 바다와 대륙 밖에서 / 그 매운 눈보라 몰고 왔지만 / 이제 올 / 너그러운 봄은, 삼천리 마을마다 / 우리들 가슴 속에서 / 움트리라. // 움터서, / 강산을 덮은 그 미움의 쇠붙이들 / 눈 녹이듯 흐물흐물 /녹여 버리겠지.


신동엽 전집, 창박과비평사. 1985년 3판. 71-72쪽.


별로 나아지지 않는다. 내부에서 변화가 오기는 하지만, 아직은 너무도 미약한 변화이기 때문이다. 파바나의 엄마는 여학생을 위한 학교를 세운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살해의 이유가 된다. 여전하다. 소련과의 전쟁이 끝나도, 탈레반의 통치가 끝나도, 그리고 미군이 들어와도...


미군이 들어오지만 과연 달라졌을까? 현실에서는 미국 역시 소련과 마찬가지로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했다. 다시 아프가니스탄은 탈레반의 통치를 받는다. 여성들은 여전히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남자의 예속물이다.


소설의 마지막 장 제목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해피엔딩이라도?'라는 제목. 그럴 수가 없다. 아무리 소설에서 희망을 주려 해도 희망의 처음이 보이지 않으니.


이 소설이 아프가니스탄이 아닌 외국 작가가 썼기 때문에 이렇게 적나라하게 아프가니스탄의 현실을 표현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들에게 '봄'이 와야 하는데, 소련이나 미국과 같은 외부에서가 아니라 또 탈레반이 신봉하고 있는 종교라는 힘이 아니라, 아프가니스탄에서 살아온 사람들에 의해, 그들이 서로 존중하고 더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움직임을 보일 때, 남성과 여성을 가르는 것이 아니라 같은 사람임을 인정하고 함께 나아가려 할 때 '봄은' 그때 비로소 온다.


파바나나 샤우지아가 그런 봄을 촉발시킬 사람들이다. 그들은 비록 해피엔딩을 꿈꾸지 않지만 좌절하지 않는다. 다른 나라로 피해가지도 않는다. 자신들이 해야할 일을 해나갈 뿐이다. 봄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


파바나와 샤우지아. 그들에게는 아직 아프가니스탄의 현실이 냉랭한 겨울이겠지만, 그들에게는 이미 봄이 와 있다. 남들과 함께 누릴 봄을 예비하고 있는 그들이다.


여기에 꼭 탈레반이 추종하는 이슬람 극단주의만이 아니더라도, 종교는 사람을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 사람이 종교를 위해서 존재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서양의 역사를 보면 종교를 위해 사람이 존재해야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던가. 기독교, 천주교, 이슬람교, 유대교 등등. 지금도 종교로 인해 일어나는 수많은 분쟁들.


이렇게 이 소설은 종교와 사람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도 한다. 4권으로 나뉘어 있지만, 한번 읽기 시작하면 끝까지 읽을 수밖에 없는 아주 흥미진진한 소설이다. 여전히 진행 중인 아프가니스탄의 비극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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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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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소설이다. 한 권이지만 단편소설에 가깝다. 그럼에도 결말을 통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먼 친척집에 맡겨진 소녀 이야기.


얼핏 단순하다. 집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던 아이가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여주는 사람 사이에서 점차 성장해가는 이야기.


아이를 키우는데 연습이 필요하다는 말을 많이 하지만, 연습을 하기 위해서는 준비를 해야 한다. 준비 없는 연습은 없으니까.


그런데 부모가 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연습을 할 수는 없다. 아이는 연습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늘 아이는 실전이다. 따라서 연습이나 준비가 필요하다고 하는 것은 아이 없이 하는 행위일 뿐이다.


다만, 아이 없이 하지만 아이가 있을 때 어떻게 하겠다는 마음가짐을 지니게 되니, 그런 연습은 하지 않는 것보다 훨씬 도움이 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부모는 연습 없이 부모가 된다. 어느 날 아이가 부모에게 온다. 선물처럼 왔다는 말은 아이와 함께 지낼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는 뜻이지만, 느닷없이 부모가 된 사람들에게는 아이는 선물이 아니라 짐일 수 있다.


짐이 되는 아이. 그런 아이를 부모는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준비도 연습도 없었지만 마음가짐 또한 아이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 그런 상황에서 아이는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다. 하나의 실수를 하면 부모는 화를 내고, 그러면 아이는 주눅이 들어 또 다른 실수를 하고.


이런 실수가 반복되면 부모는 이 아이는 어쩔 수 없는 아이라고 여기게 되고, 그런 마음으로 아이를 대하게 된다. 부모의 마음은 아이에게 전달이 되고, 이런 가족은 서로가 서로를 받아들이고 함께 성장해가는 가족이 되지 못한다.


여기저기서 삐걱거리는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 아이는 없어졌으면 하는 존재가 된다. 소설 속 아이 역시 마찬가지다. 


많은 아이를 키우기 힘든 부모가 아이를 맡긴다. 아이는 자신이 있는 곳에서 다른 곳으로 보내진다. 보내진다는 말을 내쳐진다는 말로 바꾼다면 이는 아이가 다른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는 말이 된다.


이곳과 저곳. 아이는 어느 곳이 자신이 있을 자리인지 선택할 수가 없다. 그러니 작가가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아빠가 나를 여기 두고 가면 좋겠다는 마음도 들지만 내가 아는 세상으로 다시 데려가면 좋겠다는 마음도 든다. 이제 나는 평소의 나로 있을 수도 없고 또 다른 나로 변할 수도 없는 곤란한 처지다.' (17쪽)


이런 상황. 아이가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실수를 안 할 수가 없다. 당연히 실수한다. 그때 그 실수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이것이 아이에게는 자신이 맞닥뜨린 다른 세상을 판단하는 가늠할 기준이 된다. 맡겨진 집에서 첫날 오줌을 싸는 실수를 한다. 하지만 새로운 가족은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인다. 오히려 아이가 민망해하지 않도록 대응을 한다.


그러면서 아이와 함께 할 수 있는 일들을 한다. 아이는 차츰 이 가족에서 자신의 자리를 잡아간다. 가족에서 자신의 자리가 없다고 느끼는 아이는 소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겉돌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가족에게는 애물단지가 된다.


그러나 가족에서 자신의 자리가 있는 아이는 당당한 가족 구성원이 된다. 함께하는 가족이 된다. 맡겨진 소녀는 이렇게 자신의 자리를 찾아간다. 가족 구성원이 된다. 그러던 어느 때, 다시 원가족이 데리러 온다.


소녀에게 진정한 가족은 어디인가. 다시 다른 세상으로 내쳐지는가? 원가족에서 입양가족으로 갈 때의 소녀와 입양가족에서 원가족으로 갈 때의 소녀는 같은 소녀가 아니다.


이미 소녀는 성장했고, 가족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있는 소녀가 되었다. 그렇다고 작가가 명확하게 결론을 내고 있지는 않다. 다만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아빠'라는 말 두 번. 이 두 번의 '아빠'가 큰 울림을 준다.


"아빠." 내가 그에게 경고한다. 그를 부른다. "아빠." (98쪽)


경고하고 부르는 아빠가 누구인가? 소녀는 누구를 아빠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짧은 소설이지만 맡겨진 소녀를 서술자로 해서 이 아이에게 어떤 가족이 필요한지, 아이가 성장하기 위해서 가족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단지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가 가족일까? 혈연이 아닌 다른 형태의 가족이 더 가족다운 가족이라고 할 수 있을 때가 있다는 사실. [빨강머리 앤]에 나오는 그런 가족의 모습을 이 소설에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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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연예인 이보나
한정현 지음 / 민음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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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편의 소설이 묶여 있다. 다 다른 내용이다. 그런데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겹치고, 사건들도 어느 정도 겹치기도 해서 연작소설이라는 느낌을 주는 소설집이다. 분명 연작소설은 아님에도.


등장인물의 이름이 같지만, 내용은 소설마다 다르다. 그러니 이 소설들은 서로 연결이 되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이상하게 연결이 된다.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주는 연결성인지, 각 소설에서 펼쳐지는 내용이 서로 연결을 해주는지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아마도 이 둘이 소설과 소설을 이어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소설을 이어주는 이런 요소들은 결국 사랑이다. 있는 그대로의 사랑. 누군가의 편견으로 굴절된 사랑이 아니라, 누군가의 기대대로 행해지는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받아들이면서 나아가는 사랑. 그런 사랑들이 이 소설집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각 소설들은 독립되어 있으면서도 느슨한 연결망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리고 이런 연결망 속에서 우리는 '사랑'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삶의 다른 이름이 사랑이라면, 이 소설집을 통해서 삶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각자의 삶은 각자의 삶이 있다. 함께 살아가면서도 우리는 절대적인 개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내 삶을 누군가 규정할 수 없는 것이다. 내 삶을 온전히 내 삶으로 받아들여 줄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내가 원하는 삶이기도 하다. 그런 삶이 바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사람을 사람으로 보기보다는 어떤 틀에 맞춰서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이미 사회에 존재하고 있는 관점이라는 안경을 통해서 보는 경우. 그런 경우 그 사람을 그 사람으로 보지 않고 사회라는, 틀이라는 관점에서 비틀어서 보게 된다.


즉 틀에서 벗어난 사람을 배제하고 도외시하게 된다. 틀에서 벗어난 사랑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틀에 맞추려고 한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둔갑되어 행사되기도 한다. 사랑이 아니라 폭력인데도, 폭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분위기가 팽배한 사회에서는 틀에 맞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억압받고 배제된다.


그런 모습들이 이 소설집에서 잘 형상화되어 있다. 따라서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은 무겁다. 읽어가면서 무거운 압력을 느낀다. 짧은 소설이라 금방 읽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아니다, 글자들, 문장들이 계속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잡는다.


한걸음 한걸음 소설을 읽어나가는 일이 버겁다. 소설의 무게에 눌려 더 천천히 읽게 된다. 그러면서 과거-현재의 틀을 계속 의식하게 된다. 이 틀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앞으로도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이 소설집에 나오는 인물들을 통해서 실감하게 된다.


이 소설집에 나오는 인물들은 대부분 소수자들이다. 틀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틀에서 벗어나 있다고 틀 속에 갇히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틀에서 벗어나 있기에 편견 없이 다른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다.


"아무렴 어때!" 삶은 삶일 뿐이다. 모두에게 모두의 삶이 있을 뿐이다. 그런 삶은 부끄러운 것도,억압받고 배제되어서도 안 되는 삶이다. 그렇게 있는 그대로 보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그런 사랑이 소설에 스며들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은 무겁지만, 주저앉게 하지 않는다. 무겁지만 한발 한발 나아가게 한다. '우리의 소원은 과학 소년'이라는 소설 속 인물이 하는 말이 마음에 새겨진다.


"이름을 기억할 것" "낙관할 것" (276쪽)


그렇다. 이들은 모두 이름을 지니고 살아가려 한다. 주어진 이름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이름을 짓기도 한다. 소설집 제목에 나오는 '이보나'라는 이름 역시 인물이 직접 지은 이름이다. 이름을 갖는다는 것, 이것은 배제하려는 사회에 맞서 자신을 지키고, 자신도 있음을 알리는 일이다.


트랜스젠더인 인물이 스스로 이름을 '제인'이라고 짓듯이 (제인은 이 소설집 여러 곳에 등장한다. '소녀 연예인 이보나'에서 제인은 자기 스스로 이 이름을 짓고 그렇게 살아가고자 한다), 또한 '우리의 소원은 과학 소년'에서 죽어가는 엄마가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달라고 하고 주인공이 스스로 '안나'라는 이름을 짓듯이, 자신을 같은 사회에서 살아가는 뚜렷한 한 존재로 인식하려는 의도가 이 이름을 짓고, 기억하는 것에 달려 있다.


누군가가 지어준 이름이 아니라 자신이 지은 이름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인물들의 삶은 무겁다. 무겁지만 희망이 있다. 


이 소설집에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기억해야 할 아픈 사건들이 나온다. 그런 사건을 통해서 약한 사람이 더욱 힘들어지는 현실을 작가는 보여주고 있다. 광주민주화운동과 공권력에 의해서 자행된 성추행(성고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등은 물론이고, 성소수자들에 대한 탄압이 얼마나 그들의 삶을 파괴했는지도,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얼마나 폭력적이었는지도 소설을 통해서 잘 드러내고 있다.


무겁지만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래서 소설을 읽으면서 희망을 버리지 않게 된다. 다만 앞으로 나아가는 길에 많은 장애물이 있음을, 결코 빨리 갈 수는 없음을 소설 속 인물들을 통해서 깨닫게 된다.


[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를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보다 나중에 나온 소설인데 읽는 순서가 바뀌었지만, 발표 순서와는 관계 없이 소설 속 현실은 지금-여기에서 우리가 겪고 있는 일임을 잊지 않게 한다.


책을 내려놓기 싫은 마음이 드는, 천천히 각 소설들의 인물들을 따라서 자꾸 뒤돌아보면서 그렇지만 앞을 향해 뚜벅뚜벅 나아가는 읽기를 하게 한 소설집이다.


좋은 작품을 쓴 작가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찾아서 꼭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읽고 난 후에도 여전히 마음에 묵직하게 남아 있는 무거움을 느끼게 한 소설들이니... 그 무거움이 앞으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게 한다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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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녀장의 시대
이슬아 지음 / 이야기장수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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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경쾌하다.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을 이렇게 가볍게 할 수가 있다니. 역시 가장 무서운 비판은 웃음을 동반한 비판이다. 정치인 중에 이런 비판을 가장 잘했던 사람이 고 노회찬이었지.


이 소설은 그렇게 고 노회찬의 웃음을 동반한 날카로운 비판을 떠올리게 한다. 소설의 시작이 '태초에 가부장이 있었다'다. 


가부장제. 당연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되지만, 아직도 가부장제는 공고하다. 소설은 '슬아가 태어나서 가장 먼저 배운 말은 '할아버지'였다.'(7쪽)로 시작한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다. 이 첫장을 제외하면 가부장은 나올 수가 없다.


가부장이 아니라 '가녀장'이 나온다. 딸인 이슬아가 집안을 이끌어간다. 출판사를 차리고 직원을 고용하는데, 직원은 달랑 둘이다. 바로 엄마인 복희와 아빠인 웅.


그렇다. 딸이 모부를 먹여살린다. (이 소설의 강점은 부모라고 하지 않고 순서를 바꾸어서 모부라고 한다.) 모부 역시 딸을 사장으로 여기고 자신들이 맡은 일을 한다.


복희는 살림을, 웅이는 청소 및 운전, 배달을 맡아 일을 한다. 살림을 맡은 복희는 정규직원이기 때문에 그에 합당한 보수를 받는다. 가부장제에서는 상상도 못할 살림이 공식 노동으로 인정된다. 


이렇게 소설은 가녀장을 통해 소위 집안일이라고 하는 살림 역시 노동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가족이 가부장이라는 위계로 지탱되는 것이 아니라, 가녀장을 중심으로, 즉 일을 중심으로 유지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가족 관계를 '서로에게 정중한 타인'(307쪽)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누가 누구에게 속한 존재가 아니라 함께 하지만 존중받아야 할 타인임을 소설은 그들의 관계를 통해서 보여준다. 


'지구에서 우연히 만난 그들은 무엇보다 좋은 팀이 되고자 한다. 가족일수록 그래야 한다는 걸 잊지 않으면서.'(308쪽)


아마도 소설의 거의 마지막에 있는 이 표현이 새로운 가족 관계를 표현하고 있는 말이리라. 가족이 되기까지의 우연, 그리고 그런 우연을 통해 맺는 관계가 종속적인 관계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관계가 되는 상호의존적인 관계임을, 가부장이라는 용어를 폐기하고 가모장이라는 용어를 쓰는 대신, 가녀장이라는 용어를 쓴 이유이기도 하리라.


이런 가족이 만들어가는 일상들이 소설에서 유쾌하게 펼쳐진다. 그렇다고 소설은 가족 관계만을 다루지는 않는다. 가족이 확장되면 사회가 되듯이, 가족이 겪는 일들이 사회적 사건들에서 동떨어질 수가 없다.


따라서 소설은 이들의 모습을 통해서 여전히 우리 사회에 남아 있는 가부장적인 모습들을 생각하게 한다. 무겁지 않게, 웃으면서 비판하는 그런 표현으로. 특히 '남의 찌찌에 상관 마'와 '혼란스러운 가부장', '헷갈리는 식탁 예절'은 가정에서 사회로 시야를 확대하게 해준다.


분명 무거운 주제인데 무겁지 않게 낄낄 웃으면서, 그렇지만 무언가 진한 여운을 느끼면서 읽을 수 있는 부분들이다. 


이렇게 소설에서 다양한 사건들이 벌어지는데, 이 소설을 읽으면서 한편의 '시트콤'을 떠올렸다. 이 소설을 대본으로 바꾸면 그대로 시트콤이 될 수 있음을. 


그냥 웃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웃음 뒤에 바꿔야 할 무엇이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소설이다. 가부장제에 대한 풍자소설이라고 해도 좋은 소설인데.


무엇보다도 이들 가족이 맺어가는 튼튼한 관계가 다른 인물들에게도 자연스레 녹아들어가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어서 좋다. 


시도때도 없이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생기면 연락을 하거나 찾아오는 미란이라는 친구의 모습에서,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있음이 얼마나 행복한지, 또 이것저것 안 해본 일이 없는 웅이가 살다보니 자연스레 그렇게 되었다고 하는, 자신의 일을 하기 위해 타인의 처지가 되어본 사람만이 지니게 되는 삶의 기술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자신과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도 스스럼없이 받아들이는, 자신의 관념을 저항 없이 수정해가는 복희를 작가가 잘 보여주고 있다.


하여 소설은 가족도 정중한 타인이 되어야겠지만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정중한 타인이 되어야 함을 생각하게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웃음을 놓을 수 없는 소설이다. 유쾌, 통쾌, 상쾌라는 말이 통할 수 있는 소설. 촌철살인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오랜만에 웃으면서 읽은 소설. 


우울한 마음을 한꺼번에 날려버린 소설이었다.


덧글


재미있게도 이 소설에는 출판을 하면서 겪는 파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원고를 정확히 넘겼음에도 인쇄 과정에서 페이지가 뒤섞여 그것을 해결하는 내용. '책을 사랑하고 두려워하기'


그런데 소설의 이 부분에서 어라, 이게 작가의 의도인가? 아니면 그냥 실수인가 하는 부분이 있으니, 바로 173쪽. 


'잘 몰랐으니까. 몰라서 무턱대고 씩씩하게 

수 있었다. 지금의 슬아는 그렇지 않다'로 되어 있는데, 씩씩하게와 수 있었다가 줄바꿈이 되어 있는데, 이 사이에 '할'이 들어가야 하지 않나? 


'씩씩하게 수 있었다'가 아니라 '씩씩하게 할 수 있었다'라고 해야 하는데, 이것이 작가의 의도였다면, 정말, 이런 유머를 소설에서 구사하다니 하고 더 웃을 수 있을 테고, 작가의 의도가 아니더라도 출판에 관한 부분에서 이런 일이 생기다니 이런 우연이 하면서 웃을 수 있으니, 이래저래 웃음을 유발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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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체험 을유세계문학전집 22
오에 겐자부로 지음, 서은혜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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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개인적인 체험을 보편적인 경험으로 바꾸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한 소설이 오랫동안 읽힌다. 소설을 읽으면서 작중 인물이 겪는 개인적인 체험이 자신의 삶 어느 부분과 일치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즉 개인적인 체험이 보편적인 경험이 되도록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소설가의 일이다. 오에겐자부로의 이 작품도 그렇다.


작가가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썼다고 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이 작중 인물인 버드가 겪은 일들이 작가 오에겐자부로가 겪은 일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오에겐자부로는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을 작중 인물 버드로 하여금 소설 속에서 다시 개인적인 체험을 하게 하지만, 그럼으로써 독자들에게 보편적인 경험을 안겨준다고 할 수 있다.


아이가 태어났다. 그런데 아이가 정상이 아니다. 수술에 성공해도 정상적으로(?) 살 수가 있는지 의문이다.


소설은 여기서 시작한다. 그리고 주인공 버드는 아이를 받아들일 자신이 없다. 아이로부터 도피하고 싶다. 아이가 차라리 죽었으면 한다. 아이가 자신에게 준 비극을 받아들을 수가 없다. 그는 대학교 때 친구 히미코에게로 도피한다.


히미코와 함께 지내며 아이를 잊으려고 한다. 아니, 아이를 없애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어느 순간, 그것은 도피에 불과함을 깨닫는다. 이 도피의 끝은 자신의 망가진 삶뿐이라는 것을.


소설의 끝부분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아기 괴물에게서 도망치는 대신 정면으로 맞서는, 속임수 없는 방법은 자기 손으로 직접 목을 조르거나, 아니면 받아들여 기르는 것, 두 가지뿐이야. 애초부터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걸 인정할 용기가 없었던 거지." (271쪽)


이런 버드의 체험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이 삶에서 도피하고 있는지 또는 정면으로 맞서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게 된다.


소설의 거의 끝까지 계속 도망만 치는 버드의 모습에서 고난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우리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그것이 과연 바람직할까 생각하게 된다.


불현듯 버드는 자신이 도망만 치고 있음을 깨닫는 듯이 보이는데, 이것은 그동안 그가 자신이 처한 현실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런 과정 속에서 고민하던 그가 그 고민을 떨쳐버리는 것은 한 순간에 불과하다.


그가 술이든 히미코든 관계없이 현실을 잊으려고, 벗어나려고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그는 그가 처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되는데... 그런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현실과 마주서는 것밖에는 없음을 알게 된다.


그가 술을 토해내는 것과 히미코와 가기로 한 아프리카 여행을 포기하는 것이 바로 그렇다. 그렇지만 그가 받아들인 현실이 결코 녹록치는 않으리라.


소설은 그가 '인내'라는 낱말을 찾아볼 작정이었다(276쪽)고 끝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 길은 결코 쉽지 않다. 쉽지 않음에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버드. 그는 긴긴 방황과 도피를 끝내고 이제는 현실로 돌아왔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바로 희망과 인내다. 소설은 이렇게 희망과 인내로 끝난다. 가능성으로 끝나는 것.


버드의 며칠이 어두운 분위기로 시작하지만, 아니다. 그가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댈 때 만났던 젊은 불량배들을 대하는 모습과 나중에 다시 만나게 되는 불량배들을 대하는 모습은 확연히 차이가 난다. 그가 불량배들을 알아보지만 불량배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즉 버드는 도피의 늪에서 빠져나왔던 것이다. 늪에서 빠져나왔다고 해도 그 길이 결코 평탄치는 않겠지만, 그 길을 똑바로 걸어가겠다는 버드의 의지가 그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우리는 버드라는 [개인적인 체험] 속 인물이 겪는 개인적인 체험을 통해서 우리가 살면서 맞닥뜨리게 되는 일들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경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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