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히 졸업 - 소설가 9인의 학교 연대기
장강명 외 지음 / 창비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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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집을 기획한 사람은 세 가지를 작가들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그것이 이 소설의 기본 방향인데...

 

1. 고등학교를 중심으로 고등학생의 이야기를 합니다. (중학생이어도 좋습니다.)

2. 르포 문학을 추구합니다. 가능한 직접 겪은 일이나 실제로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해 주세요. 자기 시대에만 잠시 있었고, 그래서 내 세대만 알았던 무엇인가를 기록해 주세요.

3. 르포를 추구한다 해도 당연히 소설입니다. 자신의 학창 시절을 소재로 단지 한 편의 소설을 써 주세요. (401-402쪽)

 

얼핏 보면 2와 3은 모순되는 것 같은데, 사실 중심은 3에 있다. 소설이다. 그런데 소설은 현실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 르포 문학의 성향을 지닐 수밖에 없다. 특히 학교를 소재로 소설을 쓴다면 어떤 것을 써도 르포 문학이 될 수밖에 없다.

 

왜냐, 학교는 지금도 비정상이 정상인 곳이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 학교다. 그러므로 이상한 일을 써도 소설이 된다. 픽션이 된다. 그 픽션이 팩트와 결합해 팩션이라는 독특한 말을 성립시킨다. 이게 학교다.

 

아홉 명의 작가가 참여했다고 한다. 소설집은 시대를 역순으로 배치했다. 2015년에서 1990년으로 25년, 약 한 세대를 거슬러 가면서 학교를 이야기한다. 아니 그런 비정상의 학교에서 살아남은 학생의 이야기를 풀어간다.

 

읽으면서 학교는 여전하구나, 여전히 비정상이구나 하는 생각, 나 역시 살아남기에 급급했구나 하는 생각. 그러면서도 살아남았음을 안도하는 마음이 드는 것은, 여전히 학교에서 살아남으려 기를 쓰는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대학입시라는 좁은 문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고, 그 좁은 문으로 와 몰려들고 있는 현실에서, 학교는 좁은 문에 한 명이라도 더 들어가게 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여기에 다른 것들은 끼어들 여지가 없다. 특히 고등학교에서는.

 

백세 시대를 살아가는데, 달랑 1년을 두고도 쉬지 못하는 아이들, 갭이어(gap year)는 상상도 못하고, 기껏 자유학년제라고 중학교 1학년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나라. 아마도 중학교 1학년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입시에서 가장 멀리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여전히 좁은 문은 통과해야 할 문이고, 이 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도 허용이 되는 사회인 것이다. 이런 학교에서 지내는 아이들이 정상적이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이다.

 

자기가 발음을 잘못하면서 잘못된 발음을 따라한다고 야단치는 꼴이 되는 것이다. 무시무시한 학교 현실이 너무도 잘 드러나 있는데, 어떻게 하나같이 교사들이 비정상으로 나오는지... 그나마 정상적이라고 할 수 있는 교사들은 학교에서 살아남지 못한다. 쫓겨나거나 자신의 발로 나가거나. (전혜진, 1995년. 비겁의 발견에서 송선생, 김상현, 1990년. 나, 선도부장이야에서 오선생)

 

이 두 소설에서 나오는 그나마 정상이라고 할 수 있는 아주 소수의 교사말고는 모두가 체제에 순응하거나 오히려 학생들을 억압하는 존재로 나온다.

 

('장강명. 2015년. 새들은 나는 게 재미있을까'에서 급식비리를 저지르고 그를 무마하려는 학교의 모습, 이사장을 비롯해, 교장, 교감 등등 정말 비리 덩어리 교사들이 나온다. '이서영, 2001년. 3학년 2반'에서는 성소수자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교사들이 나오고, '김보영, 1992년. 11월 3일은 학생의 날입니다'에서는 학생회 활동에 대한 탄압, 또는 학생 자치에 대한 무지를 보여주는 교사들이 등장한다. 25년이라는 편차에도 자신들만이 겪었던 일이라는 게 없다. 학생들은 학교라는 공간에서 무슨 데자뷰를 보듯이 비슷한 일을 겪고 그 곳에서 벗어난다. 그래서 소설집 제목이 [다행히, 졸업]이다.)

 

서로가 서로를 괴롭히는, 학교에 갇혀 지내는 학생들 모습이 우리에 갇혀 사육되는 가축들을 연상시킨다. 이들은 좁은 공간에서 지내는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해 서로가 서로를 공격한다.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도 마찬가지다.

 

문제가 있는 학교에서는 눈에 보이는 폭력이, 공부를 잘한다는 부유하고 능력있는 집안의 학생들이 많은 학교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폭력이 난무함을 (정세랑, 2000년. 육교 위의 하트) 알 수 있는데, 이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은 쉽게 폭력을 쓰진 않았다. 하지만 다른 면으로 비열했다. 정교한 방식으로 비열했다. (224쪽)

 

비정상적인 학교에서 비정상적인 존재는 교사만이 아니다. 학생들도 비정상적으로 물들어간다. 그것이 단순하냐 복잡하냐의 차이일 뿐이다. 그리고 그런 모습이 사회에서 다시 나타나게 된다. 결국 학교는 우리 사회의 비틀어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라는 말이 있다. 그럼에도 학교에서 살아남으려는 아이들, 그것도 인간답게 살아남으려고 하는 아이들. 그런 모습을 작가들은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자신들이 겪은 학교에서 그치지 않고, 그럼에도 우리는 인간으로서 살아가야 함을, 그런 결심을 하는 아이들이 있음을, 그렇게 우리가 지내왔음을 이 소설집은 보여주고 있다.

 

언급 안한 작가들도 있어서 그 작가들과 시대, 제목을 언급하며 글을 마친다.

 

김아정, 2010년. 환한 밤.

우다영, 2004년. 얼굴 없는 딸들

임태운, 2002년. 백설공주와 일곱 악마들

 

임태운의 소설은 명랑소설을 읽는 느낌을 준다. 야자에서 도망쳐 길거리 응원을 하는 모습을 경쾌하게 담아내고 있는데... 김아정과 우다영의 소설은 여학생을 주인공으로 그들이 겪는 내면의 모습들을 잘 담아내고 있다.

 

한편 한편 읽으면서 학교로 과거 여행을 떠나게 되지만, 그럼에도 과거 여행이 아니라 현재 학교와 아이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마음이 편치는 않지만, 이게 현실인 것을 어쩌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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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들 시녀 이야기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김선형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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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녀 이야기'를 읽었으면 꼭 읽어야 할 소설이다. 시녀 이야기에서 나온 그 뒷이야기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 못했던 반전이 있고, 또 결말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긴박감을 유지한다.

 

길리어드가 배경이다. 전체주의 국가. 전체주의 국가는 외부의 힘으로부터 붕괴하기도 하지만, 내부로부터 붕괴하는 경우가 더 많다. 왜냐하면 전체주의 자체에 이미 권력 분쟁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권력자들은 정보를 독점함으로써 또 자신들의 지위를 위협하는 사람들을 제거함으로써 권력을 유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권력의 자리에 오르려고 하는 사람들은 늘 나온다. 항상 남의 권력 밑에서 눈치를 보며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떻게 하든 상대의 약점을 잡으려 노력하고, 약점을 잡는 순간 상대를 끌어내리거나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용을 하게 된다.

 

이런 사회가 지속되기는 힘들다. 시녀들에서는 시녀의 증언을 중심으로 소설이 펼쳐졌다면 이 '증언들'은 그 이후 세대와 길리어드에서 중심을 이루는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시녀 이야기에 나오는 시녀의 딸들이라고 추정되는 두 자매를 주인공으로, 아주머니들의 정점에 있는 리디아를 중심으로 아주머니들 사이에서도 권력을 잡기 위해 벌이는 암투. 이런 암투들 속에서 길리어드를 내부로부터 붕괴시키는 힘들이 나타난다.

 

이렇게 소설은 세 명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 인물들이 나오는 장 표지에 그림으로 그것을 알 수 있는데, 그 중 한명인 아주머니들의 정점에 서 있는 리디아 아주머니의 증언 장에는 펜이, 길리어드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령관집 딸로 나오는 아그네스가 나올 때는 두건을 쓴 소녀의 그림이, 그리고 길리어드 밖에서 자란 니콜(데이지)이 나오는 장에서는 머리를 묶은 소녀의 그림이 나온다.

 

이렇게 세 사람의 증언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꿰어 맞춰지는데... 길리어드의 치부를 알고 있는 사람이 정보를 외부로 내보내는 일.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 왜 길리어드 초창기에 아주머니라는 여성에게는 특권 계급이라 할 수 있는 계급이 생겼는지를 리디아 아주머니를 통해서 알 수 있게 된다.

 

어느 쪽을 억압하려 하지만 이미 자신이 살던 세계에서 인격이 형성된 사람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살아남아 어떻게든 길리어드의 붕괴를 보고자 하는 인물을 만나게 된다. 남들을 속이고 권력의 정점에 올라가 수많은 정보를 다룰 수 있게 되는 인물. 그런 인물은 정권의 붕괴를 이끌어낼 수 있다.

 

여기에 이런 사람에게 동조할 수 있는 인물이 만들어져야 하는데, 그런 인물들은 나름대로 개연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는, 남자들의 추악한 모습을 겪은, 소녀들이 등장하고 그들에게 도움을 주어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과정이 나타나게 된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지만, 길리어드의 붕괴를 보는 것은 젊은 세대에 한정된다.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세대들이 이끌어가야 하는 것이다. '시녀 이야기'가 나오고 나서 미국에서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 '증언들'은 이런 작품들이 나온 다음에 쓴 소설이다.

 

그러니 작가는 더 많은 제약이 있었을 것이다. 전편이 있고, 드라마가 이미 나왔기 때문에 이 작품들과 상충되는 내용으로 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시녀 이야기'와 드라마에 직접 나타나지 않은 공간을 메워주는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단지 빈 부분을 채워주는 것만이 아니라 길리어드라는 전체주의 국가가 어떻게 붕괴되어 가는지를 세 명의 여성을 중심으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권력자들인 남성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저열한 존재라고 여겨지던 여성에 의해 붕괴되는 길리어드를 보여줌으로써 어느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억압하는 사회는 존재할 수 없음을 생각하게 한다.

 

흥미진진한 소설이다... 시녀 이야기를 읽고 이어 읽으면 재미가 배가 되는 그런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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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녀 이야기 (리커버 일반판, 무선) 시녀 이야기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김선형 옮김 / 황금가지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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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정 자체가 끔찍하다. 인간을 이렇게 통제할 수가 있다니. 조지 오웰의 '1984'에 나오는 빅브라더를 이 소설에서는 도처에서 만날 수 있다.

 

빅브라더라는 전제 권력만이 아니라 주변 모든 사람들이 감시자가 될 수 있는 사회. 그런 사회에서 자유란 무엇일까? 자유란 결국 복종하는 것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체제를 벗어나거나 거부하려는 행동들은, 또 생각들은 처절하게 처벌을 받는다. 그것도 법에 의해서이기도 하지만, 속박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서도.

 

시녀들... 빨간옷을 입은 다른 사람의 아이를 낳아주어야만 하는 여자들. 그들의 목표는 오로지 출산이다. 출산을 하지 못하면 이들은 쫓겨난다. 쫓겨남. 그것은 사람이 견딜 수 없는 일을 하는 곳 (소설에서는 콜로니라고 나온다)으로 보내지거나 또는 죽음을 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성이되 비여성이 되는 것.

 

소설은 이렇게 남성중심의 사회를 그리고 있다. 철저히 통제되는 사회. 남성중심이라고 하지만 남성들에게도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자유로운 것은 최고 지배층에 속하는 일부에게만 해당할 뿐이다. 장벽에 자주 걸리는 시체들. 그들은 체제를 부정하거나 다른 종교를 믿거나 다른 신념을 지닌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런 죽음은 홍보를 위해서도 늘 전시된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사회에서 시녀가 된 여성이 나온다. 오브프레드. 세상에 모든 시녀들 이름은 오브로 시작한다. 오브(of). 소유격이다. 여성은 자신의 이름을 빼앗긴다. 누구의 것으로만 존재하게 된다. 자기 이름을 잃는다. 아니 빼앗긴다.

 

반면에 이름을 지닌다는 것, 독립된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먼 미래 소설들을 보면 이름이 없다. 그냥 몇 호 몇 호라고 하든지 아니면 다른 명칭이 주어진다. 이름이 있으면 자아의식이 생기고, 주체적으로 행동하려는 마음이 생긴다.

 

하여 예전부터 지배자들은 피지배자들에게서 이름을 빼앗으려고 했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이름을 몇 개나 가지고 있으면서도 (족보에 올라가는 이름과 친구들 사이에서 불리는 이름 또 자신의 작품에 저자를 명기할 때 쓰는 이름 등, 본명에 호니 자니 해서 자신을 잘 드러내는 이름을 붙이며 살았다) 평민이나 천민들이 제대로 된 이름을 갖게 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그냥 돌쇠, 개똥이 등이었을 뿐이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시녀들은 모두 오브로 시작되는 이름을 갖는다. 자신이 어떤 사람집에 사느냐에 따라 그 이름을 자연스레 갖게 된다. 그러니 다른 곳으로 가거나 죽임을 당하면 다른 사람이 그 이름을 그대로 쓴다.

 

끔찍한 환경이다. 가정을 이루고 살던 사람이 한 순간에 가정을 잃고 자기 딸도 빼앗기고, 시녀가 된다. 아이 낳는 기계가 되는 것이다. 아이를 낳지 못하면 쓸모 없어진 기계 취급을 받아 폐기처분되듯이 사라져야 한다.

 

이런 과정을 시녀의 독백체로 담담히 풀어나간다. 그렇지만 상황은 비참하다. 철저한 디스토피아다. 자신들은 유토피아를 건설한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주장일 뿐이다. 다른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유토피아는 없다. 그것은 디스토피아 또는 지옥일 뿐이다.

 

그리고 그런 세계일수록 다른 생각이나 행동은 용납하지 않는다. 체제 유지를 위해서 무력과 비밀경찰들에 의지한다.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게 한다. 그리고 철저하게 계급을 나눈다. 도처에 감시자, 밀고자가 있는 사회. 이런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것. 끔찍한 일이다.

 

특히 여성을 아이 낳는 기계 취급하는 사회, 이 길리어드 사회에서 여성은 지배층의 아내를 제외하고는 하녀나 시녀가 된다. 경제 활동부터 정치 활동까지 어떤 활동도 할 수 없다. 오로지 재생산을 위해서만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여성들을 감시하고 교육하는 존재로 여성을 불러낸다.

 

하지만 이런 사회에도 틈은 있다. 사람들을 아무리 옥죄어도 숨쉴 틈을 발견해 내는 것이 사람이다. 저항한다. 어떤 세상에도 저항하지 않는 사람만으로 구성된 사회는 없다. 오웰의 '1984'에서도 저항하는 사람이 나오고,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도 소위 야만인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저항하는 집단이 있다. 이들의 암호는 '메이데이'. 주인공은 저항단체에 의해 구출된다. 그렇게 소설은 끝난다. 아니 소설은 후일담으로 아주 오랜 후일에 주인공이 녹음한 소리를 정리하고 분석한 학자의 발표로 끝난다.

 

그런 사회가 있었음을. 시녀의 이름은 끝내 밝히지 않는다. 프레드 역시 누군지 밝히지 못한다. 다만 추정되는 두 명의 인물이 있음을 학자의 발표가 말해주고 있다. 지배층 역시 숙청을 당하고 기록이 말살되는 것이다.

 

여성이 가장 심하게 억압당하고 있는 사회에서 남성들 역시 자유롭지 않고 또 지배층 역시 자유롭지 않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그러면 억압받는 존재가 있는 사회에서는 그 누구도 자유롭지 않고, 언제든 억압받는 존재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

 

지배하는 권력자도 지배받는 사람들도 자유롭지 않은 사회, 그런 사회를 좋은 사회라고 강변하는 언론들, 그 가치를 스스로 내면화 한 사람들. 이 소설은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시녀인 화자를 통해 들려줌으로써 그런 사회가 얼마나 끔찍한지를 생각하게 하고 있다.

 

지금 사회는 이 소설에 나오는 길리어드보다는 많이 세련되어 있지만 감시 사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코로나19로 우리들 행동 하나하나가 얼마나 쉽게 남들에게 공개되는지를 몸소 체험하지 않았던가.

 

내 행위들이 모두 기록으로 남는 시대, 또 그것을 남들이 알아낼 수 있는 사회, 정보가 집적됨으로써 정보를 관리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힘이 넘겨지는지를 생각하는 요즘인데, 이 소설을 읽으며 지금 우리 사회가 소설 속 길리어드처럼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소설 속 길리어드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많이 다르지만, 그런 직접적인 폭력은 나타나기 힘들지만 더 세련된 체계가 작동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우(杞憂)... 그래, 이런 생각은 기우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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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주파수 - 청소년 테마 소설 문학동네 청소년 41
구병모 외 지음, 유영진 엮음 / 문학동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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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테마 소설집이다. 청소년기에 느끼는 불안을 주제로 일곱 명의 소설가가 쓴 소설을 모아놓았다. 청소년기에 느끼는 불안은 청소년들마다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이런 테마 소설집에서 동일한 주제라고 하여도 다양한 내용을 다룰 수밖에 없다.

 

소위 말하는 정통 리얼리즘 기법으로 쓴 소설도 있고, 환상적인 기법이 나타나는 소설도 있다. 그럼에도 청소년기에 느끼는 불안이 어떤 것인지 알려고 그것에 주파수를 맞춰 읽게 된다. 물론 주파수가 알려져 있지 않기에 정확히 맞춘다는 보장은 없다.

 

이것이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청소년들마다 느끼는 불안은 다를 수밖에 없고, 그들이 우리에게 보내는 신호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 이 청소년에게 잘 적용되었던 것이 다른 청소년에게는 부작용을 일으킬 수도 있다. 그러니 해법은 하나다. 주파수가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

 

우리가 여행을 가면 동일한 방송이라고 할지라도 지역에 따라서 주파수가 달라진다. 주파수를 옮겨야지만 그 방송을 들을 수가 있다. 청소년기에 느끼는 불안도 마찬가지다.

 

진형민, 헬멧

최영희, 단추인간 보고서

구병모, 유리의 세계

오문세, 거울 속에 있다

최상희, 어디에도 있는

김진나, 나딸

송미경, 마법이 필요한 순간

 

이렇게 일곱 편의 소설이 있는데... 청소년기에 접하게 되는 다양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헬멧'은 오토바이를 쉽게 연상할 수 있게 한다. 청소년기에 질주 본능을 어쩌지 못해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폭주족들을 연상하지 않아도 아르바이트로 오토바이로 배달을 하는 청소년들도 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는 가장 최소한의 요소가 바로 헬멧이다. 귀찮더라도 써야 할 것.

 

'단추인간 보고서', 환상적인 표현인데, 사람의 몸에 단추 구멍이 생긴다. 똑딱이 단추. 그것이 몸의 구멍을 닫고 있는 데 단추를 열어본다는 것. 그것이 무엇일까? 자신의 본질을 들여다보고,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으로 살아간다는 것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을 들여다보기를 두려워하는지도 모른다. 그런 점, 자신의 내면, 또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솔직하게 파악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모습이 청소년기에 불안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유리의 세계'에서는 기존의 관습에 저항하는 청소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어쩌면 불필요한 유리 상자 속에 갇혀 사는 어른들과 달리, 유리 상자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세상은 쓸모만으로만 구성되지 않고 쓸모없음이 함께 할 때 더 아름다울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으니, 청소년기에 겪는 일들이 꼭 쓸모 속으로 가둬버릴 수 없음을, 그렇게 쓸모 속에 갇혀 있는 것에 대한 불안을 다루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거울 속에 있다'와 '어디에도 있는'은 외모와 학교라는 곳에서 불안을 느끼는 청소년의 모습을, 나딸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 자라나는 청소년의 불안을, '마법이 필요한 순간'은 세상을 멈춰버리고 싶은 욕망에 휩싸이는 청소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불안, 삶에서 완전히 없앨 수 없다. 아니 불안을 없애서는 안 된다. 이 불안은 우리 삶에 꼭 필요하다. 다만 이런 불안을 인식하고 그것을 정면에서 마주치고 이겨내려고 해야 한다.

 

그럼에도 청소년기에는 불안함을 느낀다. 그런 불안함이 삶과 함께 하고 있음을 이 청소년 테마 소설을 통해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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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 썰록
김성희 외 지음 / 시공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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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는 문학보다는 영화에서 더 유행했다. 세상이 각박해질수록 좀비가 예술에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 '월드 워 Z'가 있고, '부산행'이 있고 또 기타 등등 많은 좀비 영화들이 있었는데, 물론 좀비 영화도 문학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좀비는 인간이었던 존재, 지금은 인간이 아닌 존재다. 우리나라 귀신과 좀비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데 다른 점은 귀신은 주로 밤에 나타난다면 좀비는 시도때도 없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또 귀신은 자신에게 해를 입힌 존재를 응징하는 역할을 주로 한다면 좀비는 불특정 다수를 공격한다.

 

이런 점에서 차이가 많이 나는데, 지금은 귀신의 시대가 저물고 좀비의 시대가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세상이 명확한 인과관계로 맺어지기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너무도 얽히고설켜 무엇이 원인이고 결과인지 정확하게 가를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니 좀비가 등장해 아무나 눈 앞에 보이는 존재를 물어뜯고 마는 것. 어쩌면 세상에 좀비와 같은 존재들이 득시글거리고 있는 현실을 예술로 승화시켜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예술 작품에서 좀비가 많이 등장하고 유행한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에 좀비와 비슷한 존재들이 있음을 우리들이 무의식 중에 자각하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 책은 우리나라 소설을 좀비를 등장시켜 재탄생시킨 작품들을 모아 놓았다. 고전소설이라고 하는데, 근대소설에 들어가는 작품도 있으니, 우리 소설과 좀비의 만남 정도 되겠다.

 

대상이 된 우리나라 소설은 (아니 다섯 편이 모두 소설이라고 할 수는 없다, 관동별곡은 정철이 쓴 가사 작품이니까. 가사 작품은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시와 수필의 요소를 갖추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정철의 관동별곡, 김시습의 만복사저포기. 주요섭의 사랑 손님과 어머니,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황순원의 소나기다.

 

이들을 각자 좀비와 만나는 작품으로 재탄생 시켰는데... 기존 작품의 틀을 유지한 작품도 있고, 기존 작품에서 빈 틈을 찾아내 메운 작품도 있다.

 

관동별곡, 강원도 관찰사로 가는 정철의 이야기...갈 때 만나는 좀비, 좀비들을 퇴치할 수 있는 약(김치)을 만드는 것. 관료들의 무책임. 이런 것들을 잘 버무린 김성희가 쓴 소설인데... 제목을 영화 부산행을 연상할 수 있게 '관동행: AMA TO GWANDONG'이라고 했다.

 

이 소설을 읽으며 우리가 학교 다닐 때 죽어라 외웠던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을 쓴 정철을 떠올리기보다는 몰락한 양반, 꾀죄죄한 양반을 떠올리지만, 그럼에도 단점을 장점으로 만들어내는 주인공에게 공감할 수가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로 일컬어지는 김시습의 '금오신화'에 실려 있는 작품 중 하나인 만복사 저포기를 비틀어서 '만복사 좀비기'로 바꾼 정명섭의 소설. 소설에서는 부처님과 내기에 이겨 귀신과 결혼하는 사람이야기지만, 여기서는 그 자신이 좀비로 죽임을 당하는 쪽으로 내용이 바뀌었다. 좀비와 인간의 구분은 보통 아주 명확하게 나오는데, 이 소설에서는 끝에 가서야 좀비와 인간의 구분을 알 수 있는 추리적인 요소까지 겸비하고 있다. 만복사 저포기의 기본 축을 바탕으로 내용을 뒤집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로도 만들어지고 지금은 옥희의 말투를 재미있어 하기도 하는 '사랑 손님과 어머니'를 비튼 소설 '사랑 손님과 어머니, 그리고 죽은 아버지'라는 작품은 전건우가 썼는데, 예전 관습을 거스르지 못하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원작 소설을, 자신에게 주어진 한계를 스스로 탈피해 나가는 여성 주인공으로 어머니를 내세운 것이 특징이다.

 

좀비 앞에서도 결코 당황하지 않고 당당하게 그들을 물리치는 여성 주인공. 소설에서는 아버지가 죽은 것으로 나오지만 이 작품에서는 아버지가 살아 있고, 결국 죽음에 이르고 좀비가 되는, 가부장의 모습 그리고 그에 동조하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다. 가부장적 사회가 여성에게는 좀비처럼, 또는 좀비보다도 더 무서운 족쇄였음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조영주가 쓴 '운수 좋은 날'은 제목을 그대로 따왔다. 다른 작품들이 제목을 조금씩 변형했다면 이 소설을 제목을 그대로 쓴 대신 내용은 크게 변형했다. 아마도 제목을 다른 것으로 했다면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을 떠올리기 힘들지도 모른다. 물론 작품의 끝부분에 김첨지가 등장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두 소설의 연관성을 짐작하기가 쉽지는 않다.

 

이 작품이 지닌 참신성은 김첨지가 오래도록 살아남은 데 있다. 좀비는 오래 살아남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피가 공급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끊임없이 살아있는 인간의 목을 물어 뜯는다. 피를 먹어야 하기 때문. 그렇기에 그들은 인간에게 위협이 되고, 인간과 좀비는 목숨을 걸고 서로를 없애려고 한다. 피, 고기. 육식성의 극한, 살인. 그것이 좀비다.

 

이 작품은 이런 틀을 벗어난다. 채식 좀비의 등장이다. 좀비가 채식을 한다? 그렇다면 인간과 적대적일 이유가 있을까? 없다. 오히려 육식을 하는 인간을, 그런 좀비를 거부하려 한다. 그게 이 작품이다. 새로운 좀비를 제시한 작품.

 

차무진이 쓴 '피, 소나기'는 슬프다. 원작 '소나기'도 슬프지만 이 소설은 좀비가 된 소녀가 또 죽게 되는 데서 슬픔은 배가 된다. 좀비이기 때문에 공격적이고 피를 원하는 것은 공통적이지만 말을 할 수 있는 좀비. 이를 이해하는 소년. 소년에게만은 공격하지 않는 소녀 좀비.

 

또 한번의 죽음을 맞으며 '죽기 직전에 제 할아버지한테 자기가 죽거든 입었던 옷을 꼭 함께 묻어달라고." (330쪽)말했단 구절, 소나기의 마지막 구절을 다시 한번 만나게 하는 것으로 소설의 결말을 삼은 작가는 소녀의 첫번째 죽음을 우리에게 불러옴으로써 소녀의 죽음을 좀비의 죽음으로 치환하지 않게 한다.

 

이런 식으로 다섯 편의 작품이 예전 작품을 토대로 새롭게 탄생했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작품을 이런 식으로 비튼 것들은 우리 문학이 지속적으로 재탄생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도 다양한 활동들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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