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
카렐 차페크 지음, 정찬형 옮김 / 모비딕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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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짤막한 소설들이다. 소설이라고 생각하면서 읽으니 소설이라고 생각하지, 그냥 읽으면 수필을 읽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엽편소설이라고 해야 하나? 아주 짧은 소설. 그러나 이 짧은 분량에 반전이 들어 있다. 이런 반전으로 인해서 글을 읽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주로 범죄에 관한 소설들이 많은데, 추리소설이라고 생각하면서 읽어도 좋고, 짤막한 내용을 통해서 우리들의 인생이 이러한 일들이 엮이고 엮어서 이루어지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도 된다.


삶은 필연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 필연을 만드는 것이 우연들이 아닐까? 우연이 겹치고 겹쳐 우리들의 삶을 필연으로 이끌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 [왼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에는 유독 도덕적인 도둑(살인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부정하지 않는다. 인정한다. 그리고 그에 합당한 벌을 받으려고 한다. 이게 정의다.


적어도 자신들이 어떤 행위를 했는지를 알고, 그 행위가 지닌 의미도 인식하고 있으므로.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 그것이 바로 삶임을 생각하게 하는데...


짧은 소설이기 때문에, 이들은 그냥 책임을 진다. 어떤 이유도 제시되지 않는다.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책임을 지고, 자신이 저지른 일이기 때문에 책임을 진다.


'결혼 사기꾼'이라는 소설을 봐도 그렇다. 결혼을 빌미로 사기를 치지만, 그는 자신이 정직한 사람이라고 한다. 자신에게 필요한 비용을 제하고 순순히 경찰에게 잡혀간다. 그것도 경찰이 다른 경찰에게 넘기려고 하니, 꼭 그 경찰이 자신을 체포하라고 하면서 기다리기도 한다.


자신의 행위를 변명하거나 부인하지 않는다. 첫 소설인 '늙은 죄수의 이야기'도 그렇고, '도둑맞은 선인장'도 그렇다. 이들은 행위를 부인하지 않는다. 인정한 다음 그에 걸맞는 처벌을 받으려고 한다.


이렇게 다양한 소설들이 실려 있는데, 대부분의 소설들은 무겁다기보다는 가볍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풍자보다는 해학이라고 해야 하나. 슬며시 웃음을 머금게 되는 소설들이 많다. 


소설 속에서 살인 사건이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역겨운 피냄새가 아니라 우리들 삶에서 겪지 않았으면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불쾌한 일들 정도로 여기면서 읽게 만들고 있다.


그렇다고 그냥 웃음으로만 넘길 수는 없다. 해학이 그렇지 않은가. 웃음 속에 들어 있는 삶의 진실들. 그 점을 찾을 수 있게 하고 있으니...


이것저것 다 떠나서 가볍게 읽기 시작해도 좋다. 읽을수록 매력을 느끼게 되는 차페크 작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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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니아 나라 이야기 세트 - 전7권 나니아 나라 이야기 (네버랜드 스토리 북스)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폴린 베인즈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 시공주니어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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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 마법사의 조카 


  나니아 나라 이야기의 첫권이다. 영화 나니아 연대기를 봤다면, 이 첫권은 좀 생소할 것이다. 주인공이 영화와는 전혀 다르니 말이다. 그렇지만 첫권은 바로 나니아의 시작이다. 나니아라는 나라가 창조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나니아에서 놀라운 모험을 하는 네 남매의 이야기는 그 다음부터다. 그러니 이 첫권은 나니아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그곳에 어떻게 가게 되었는지, 또 마법의 옷장이 어떻게 해서 만들어졌는지를 이야기해주고 있다.


  디고리와 폴리가 등장한다. 디고리의 외삼촌이 만들어낸 반지로 다른 세계로 가게 된 아이들. 이 아이들이 다른 세계에서 아슬란이라는 사자를 만나고, 아슬란이 나니아를 창조하는 과정을 지켜보게 된다.


  그리고 젊음, 생명의 사과 - 창조와 사과, 또 아슬란은 아담의 아들, 이브의 딸이라는 말을 쓰고 있으니, 이 부분만 보면 기독교적 요소가 많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창조론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정확히 사과라고는 나오지 않지만 많은 사람들이 선악과를 사과라고 하니, 그 사과가 첫권에 등장하는 것은 기독교 문화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할 수 있다 - 가 나온다.


이 사과를 가지고 와 엄마의 병을 고치는 디고리... 그가 남은 사과 몸통을 정원에 심었더니, 곧 사과나무가 되고, 나중에 사과나무가 쓰러졌을 때 디고리가 그 나무를 가지고 옷장을 만든다는 내용으로 첫권이 끝난다.


그러니 첫권은 다음에 전개될 나니아 모험의 도입부라고 할 수 있다. 이제는 마법의 반지가 아니라 옷장을 통해서 나니아로 가게 될테니 말이다.


아마도 첫권은 나중에 쓰여졌을텐다. 해설을 읽어보면 이 전집 2권이 먼저 쓰였다고 하니 말이다. 2권부터 시작하기에 개연성이 약하니, 아이들이 나니아로 가게 만들기 위해서 옷장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그것이 왜 디고리 교수의 집에 있게 되었는지를 설명해야 했으리라.


하여 첫권은 나니아 나라 이야기의 도입부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세월이 흘러 다른 아이들로 인한 모험이 시작된다.


2권 --- 사자와 마녀와 옷장


영화로도 만들어진 부분이다. 네 남매의 모험이 그려진 부분. 마녀와 대결하여 승리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그런데 여기서 아슬란의 희생과 부활이 나타난다. 인간이 저지른 잘못을 대속하기 위한 아슬란의 행동. 기독교를 떠올리게 하는데, 결국 정의는 승리한다고 귀결된다고 할 수 있다.


남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 그리고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지 못했을 때 벌어지는 일들, 하지만 두려움에 굴복하기 보다는 두려움을 딛고 나아갈 때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이룰 수 있음을 이번 편이 보여주고 있다.


마녀의 겨울에 맞서는 네 남매의 모험이 자세하게 표현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마녀로 인해서 고통받는 세계, 그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어떠해야 하는지, 우리가 지녀야 할 자세는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네 남매의 모험이라고 하지만 아슬란을 중심으로, 나니아에 거주하는 존재들의 이야기가 더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위급상황에서도 일상을 유지하려는 비버 부인이라든지, 자신에게 온 손님을 환대하는 모습이 바로 그렇다.


3권 ---  말과 소년


  이번에는 나니아가 아닌 칼로르멘이라는 나라에서 나니아로 가는, 정확히는 아첼랜드로 가는 여정이 나온다. 한 소년의 성장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다. 물론 나니아에서 칼로르멘으로 납치된 말이 둘 나오고, 여행을 함께 하게 되는 아라비스라는 소녀도 나온다. 


  샤스타에서 코르가 되는 이야기. 칼로르멘에서 나니아 이웃인 아첼랜드의 왕자가 되는 아이. 그 과정에서 겪는 모험. 그리고 이 모험을 전부 주관한다고 할 수 있는 아슬란.


  어디서 많이 들어본 적 있는 이야기 같지 않은가. 샤스타는 배로 강을 따라 내려오다 어부에게 발견이 된다. 버려진 아이, 구출, 그리고 탈출. 이런 과정은 보통 영웅이야기에서 많이 나온다. 자신이 누구인지 몰랐다가 자신을 찾는 이야기. 샤스타가 코르가 되는 과정이 바로 그런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자신만의 성공이 아니다. 칼로르멘이라는 나라의 위협으로부터 아첼랜드를 구해내는 역할을 하게 되니, 이는 거대한 성장 서사가 된다. 


이런 구절이 있다.


'샤스타는 선한 일을 하면 그 대가로 항상 더 힘들고 막중한 일이 기다리게 마련이라는 걸 아직 배우지 못했던 것이다.' (170쪽)


선한 일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리고 선한 일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으로 더 선한 일들을 이끌어낸다는 것을 작가는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게 나니아 이야기 3권은 한 아이의 성장으로 끝난다. 모두가 행복해지는 결말. 우리가 이야기에서 기대하고 있는 결말이다.


이 이야기에서 '모세'가 떠오르는 것은 나만 그런 걸까? 아닐 것이다. 첫권이 천지창조라면, 두 번째 이야기는 인간의 죄를 대신해 죽는 대속이 나온다면, 3권은 모세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성경 이야기가 순서대로 나오지 않는다고 해도, 이 이야기에서 성경의 이야기, 또는 교훈을 떠올리기는 쉽다.



4권 ---- 캐스피언 왕자


나니아도 세월이 흐른다. 천년 왕국이 있기는 힘들다. 평화롭던 나니아 역시 다른 왕조로 바뀐다. 왕조의 흥망성쇠야 역사에서 흔히 있는 일이지만, 문제는 왕조가 교체되면서 나타나는 차별과 탄압이 문제다.


융합이 되면 모르겠지만, 기존 문화, 관습을 바꾸려는 과정에서 저항이 일어나고, 그 저항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폭력이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폭력은 차별을 낳고, 차별은 억압으로 이어지면서 또다른 저항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다시 왕조 교체가 일어날 시기가 온다. 나니아가 그렇다. 이번 권에서는 나니아가 텔마르 사람들에게 정복당한 이후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텔마르를 이방인이라고 할 수 있지만, 나니아 이야기에서는 통치자가 누구인지를 따지지는 않는다. 그가 어떻게 통치하느냐가 중요하다. 그러니 아담과 이브의 자손이라는 피터, 수잔, 에드먼드, 루시가 나니아를 다스릴 수 있었던 것.


캐스피언 왕자 역시 텔마르 출신이다. 그렇지만 그는 나니아의 전통, 문화를 존중한다. 그러니 그는 통치자가 될 자질을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그의 고난과 성공 과정이 펼쳐진다. 그냥 나니아의 통치자가 될 수는 없으니, 이 과정에서 피터 등이 다시 등장한다. 캐스피언이 성공하게끔 도와주는 조력자로서. 그리고 이번 권에서는 피터와 수잔이 다시는 나니아로 돌아올 수 없음을 밝힌다. 그들은 나니아로 올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고.


이번 권을 읽는 아이들에게는 출신보다는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점을 알려준다. 자신의 출신을 고집하는 난쟁이가 있고,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난쟁이도 있으며, 작은 몸집으로도 자신의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난장이들이 나오니 말이다. 게다가 텔마르의 이방인이라 할 수 있는 캐스피언조차도 그들은 망설임 없이 통치자로 받아들인다.


이는 출신이나 신체, 피부색 등이 그 존재를 판단하는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은영 중에 받아들이게 하고 있다. 게다가 가장 어린 루시의 눈에 먼저 아슬란이 보이고, 나무들이 움직이는 모습이 보인다는 점에서 순수한 마음, 열린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깨닫게 해주고 있다.


또한 이번 권은 톨킨이 쓴 [반지의 제왕]과 비슷한 점도 있다. 압도적인 무력 우위를 보이는 집단에 대항해 나무들이 함께 하는 것. 반지의 제왕에서는 엔트라고 나오는데, 이 책애서도 그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 즉, 순수한 마음, 정의로운 일에는 모든 존재들이 함께 함을 보여준다.


5권 ---새벽 출정호의 항해


  이번 권은 바다 여행이다. 4권에 나왔던 캐스피언 왕자가 숙부에 의해서 쫓겨난 사람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에드먼드와 루시, 그리고 유스터스와 함께하는 과정이 나와 있다.


  모험을 통해서 성장해 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면, 이번 권에서는 유스터스의 변화가 눈에 뜨인다. 


  남의 감정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제 감정대로만 행동하려 했던 유스터스. 그러나 모험을 통해서 남들을 존중하는 마음을 지니게 된다. 용으로 변했을 때 이 점을 깨닫게 되는 데, 탐욕이 눈을 가리고, 자신을 다른 존재로 변화시킨다는 점을 알게 해준다고 할 수 있다.


  캐스피언 역시 아버지를 옹호하던 기사들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여러 일들을 겪는다. 가령, 노예제를 알게 되고, 그들이 얼마나 비참한 지경에 처해 있는가를 몸소 체험하게 되며, 탐욕으로 금으로 변해버리는 모습도 보고, 두려움으로 인해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할 때 그곳에서 멈추면 안 된다는 점도 깨닫게 된다.


이번 권은 여기까지는 없다는 점을 생각하게 해준다. 여기까지라는 말은 자신이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멈춘다는 말이다. 이는 잠을 자는 것과 같다. 자신은 만족해서 잠을 자겠지만, 남들이 보면 더이상 무언가를 하지 않는 상태에 불과하다.


즉 사람들은 계속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만 자신의 삶을 완성할 수 있다. 새벽 출정호의 모험은 생쥐 리피치트를 통해서 그 점을 명확히 보여준다.



6권 ---은의자


  또다른 인물이 등장한다. 이번에 등장하는 인물은 이 세계에 있는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질. 그리고 전 권에 나왔던 유스터스


  질은 다른 학생들의 괴롭힘을 피해 있다가 유스터스를 만난다. 그리고 둘은 나니아로 여행을 떠난다. 이번에는 사라진 왕자를 찾기 위한 모험.


  사라진 왕자를 찾는 과정에서 아슬란이 준 힌트가 있고, 그 힌트를 잘 따라가야 하는데, 막상 일에 닥치면 그렇게 되지 않는다.


  세상 일이 어디 뜻대로 되겠는가?계획한 대로만 일이 되면 좋겠지만, 늘 현실은 계획을 넘어선다. 이들의 모험도 그렇다. 


  나니아 이야기의 전 편들이 그렇듯이, 이번 편에서 함께 여행을 떠나는 인물이 등장한다. 어떤 생물이라고 말하기 힘들지만, 여기서는 마슈위글이라는 종족이라고 하는데, 이름은 퍼들글럼이다. 셋이서 떠나는 모험.


유혹에 굴복하기도 하지만 결국 이들은 지하세계에 갇혀 마법에 걸려 있는 왕자를 만나고, 마녀를 퇴치한 뒤 나니아로 돌아온다. 


거인들에게 잡혀먹힐 뻔하기도 하고, 지하세계를 탐험하기도 하는데, 이는 우리가 살면서 겪게 되는 위험을 이야기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위험을 이겨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현실의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음을 '은의자'에서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이야기의 힘이다. 질과 유스터스가 겪은 일들을 이야기라고 한다면, 질은 이야기를 통해서 현실을 이겨낼 힘을 키워냈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을 읽는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온갖 위험이 있는 모험 이야기. 그런 모험을 성공적으로 마치기 위해서는 늘 성공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어려운 지경에 빠지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도움으로 또는 포기하고 굴복하지 않는 마음으로 이겨낸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자연스레 힘을 얻게 된다.


6권을 읽으면서는 이런 이야기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7권 --- 마지막 전투


  나니아 나라 이야기 마지막 권. 나니아의 멸망을 다루고 있다. 

                              

  나니아의 멸망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세계의 시작이라고 해도 좋은데, 이것은 현세에서 내세로 넘어가는 이야기라 볼 수 있다.


  현세가 멸망하기 위해서는 혼란이 계속되어야 한다. 혼란을 부추기는 인물이 나온다. 원숭이 시프트가 그 인물인데, 이 원숭이는 우연히 얻은 사자 가죽을 당나귀에게 씌워 아슬란인 척하게 하면서,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를 얻는다.


  마치 적그리스도를 연상시키는 그런 발상. 그리고 혼란, 전쟁. 결과는 나니아의 멸망.


  단지, 나니아의 멸망으로 끝났으면 아이들에게 읽히기 힘들었으리라. 그래서 이야기는 새로운 세상으로 끝난다.


그동안 나왔던 인물들이 모두 나와 한자리에 모인다. 이들은 이제 새로운 세상에서 영원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천년왕국. 그것이 생각난다. 굳이 기독교 식으로 해석하지 않더라도 현세를 벗어난 내세가 펼쳐진다.


즉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전부는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데, 그것은 현실이 불만족스러울수록 더욱 강하게 자리잡게 된다.


현실과 다른 세상을 꿈꾸면서 현실을 바라보게 되면, 새로운 세상을 위해 한걸음 나아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냥 그 자리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세상, 모두가 함께하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힘. 이야기의 힘이다.


7권까지 오면서 많은 모험이 펼쳐지지만, 이야기를 관통하는 것은 바로 선(善)이다. 선을 추구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는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7권까지의 이야기를 통해서 보여주는데...


나니아라는 환상 속의 나라에서 펼쳐지는 모험. 그 모험을 통해 성숙해가는 아이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게 될 아이들.


이것이 바로 이야기의 힘이다. 그런 이야기의 힘을 느낄 수 있게 해준 [나니아 나라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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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퀴벌레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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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날 아침 영리하지만 전혀 심오하지는 않은 짐 샘스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거대 생물체로 변신해 있었다.' (13쪽)


카프카 [변신]에서 게오르그 잠자가 깨어났더니 벌레로 변해 있었다는 문장을 상기시킨다. 그렇게 시작은 변신으로 시작한다. 무엇이 변신했다는 말인가? 첫문장을 보면 잘 알 수가 없다. 카프카처럼 사람이 다른 존재로 변신한 것일까? 아니다. 소설을 읽다보면 곧 사람이 다른 존재로 변신한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가 사람으로 변신한 것을 알 수가 있게 된다.


짐 샘스는 사람 이름처럼 보이지만 사실 바퀴벌레 이름이다. 그리고 그가 변신한 거대 생물체는 바로 인간이다. 그것도 영국의 수상.


마찬가지로 다른 각료들도 바퀴벌레들이 변신한 존재로 나타난다. 몇 각료를 빼고는. 하지만 본래 인간이었던 장관은 그들의 세상에서 쫓겨난다. 그리고 바퀴벌레로 장악된 정부에서 역방향주의가 통과가 된다.


그렇다면 역방향주의란 무엇일까? 지금까지 해오던 것과는 반대로 가는 것이다. 어떤 것? 설명을 보면 이 소설은 영국의 브렉시트를 풍자하고 있다고 한다.


즉, 영국의 브렉시트는 세계가 나아가는 방향과 반대 방향이고, 그것이 과연 영국민의 행복을 보장할까에 대한 답을 내릴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이다.


소설에서 주인공들이 바퀴벌레의 변신으로 나오고, 또 그들의 정책이 역방향주의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작가는 브렉시트에 반대하고 있다.


여기에 미국 대통령으로 나오는 인물은 누가 읽어도 트럼프를 연상시키고 있으니, 영국과 미국에서 벌어진 경제 정책이 국민의 행복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정책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소설의 끝부분을 보라. 과연 역방향주의가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를 생각하게 하는데...


'우리는 우회적인 수단을 통해, 그리고 많은 실험과 실패 끝에, 인간의 파멸에 필요한 전제조건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전쟁과 지구온난화는 확실한 전제조건이고, 평화로운 시기에는 고착화된 계급, 부의 집중, 뿌리 깊은 미신, 루머, 분열, 과학과 지성과 낯선 이들과 사회적 협력에 대한 불신을 꼽을 수 있지요.' (123쪽)


이 말은 역방향주의는 개방이 아니라 폐쇄로, 협력이 아니라 갈등으로, 다수의 이익이 아니라 소수의 이익을 위한 정책임을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이것을 추구하는 것은 결국 인간이 불행하게 되는 방향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다음 구절을 보면 역방향주의가 누구를 위한 정책인지 알게 된다.


'역방향주의라는 광기가 일반 대중을 더 가난하게 만들면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 우리는 번성할 것입니다.' (123쪽)


이때 바퀴벌레를 우리가 아는 바퀴벌레로 생각하지 말자. 보통 사람들에게 기생해 사는 존재로 보면, 대다수의 국민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 바퀴벌레임을 알 수 있다.


이런 바퀴벌레들의 농간을 간파하지 못하면 우리들의 삶이 힘들어질 수밖에 없음을 소설은 잘 보여준다.


카프카의 [변신]에서 잠자는 결국 죽음에 이른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그들은 성공해서 의기양양하게 돌아간다. 자신들의 보금자리로...


그런데 이 소설에 나오는 미국 대통령이 왜 트럼프만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생각이 들까?  이 소설에 나오는 바퀴벌레와 같이 변신한 종족들이 우리들의 삶을 파탄으로 몰아가고 있지는 않나 하는, 이 소설이 꼭 영국의 브렉시트를 풍자한 소설로 국한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드니, 소설을 읽으면서 씁쓸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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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향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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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가 '투우사의 이름'이라고 한다. 이렇게 번역을 했으면 사람들의 흥미를 끌지 못했을 수도 있다. 물론 주인공의 이름이 후안 벨몬테인데, 이는 유명한 투우사의 이름이라고 한다. 작중에서 이름을 댈 때마다 사람들은 투우사의 이름을 들먹인다.


주인공이 왜 투우사의 이름을 같고 있을까? 투우가 무엇인가? 소와 정면으로 맞대면해서 결국 소의 등에 창(칼)을 꽂아 소를 죽이는 일을 하는 일 아닌가. 요즘은 동물학대라고 해서 많이 비판받고 있는데, 그 점은 언급하지 않더라도 투우는 한쪽의 목숨을 건 대결이다. 물론 사람이 죽는 경우는 드물다. 한쪽이 당하는 일. 결과가 잘 바뀌지 않는 일.


그렇다면 귀향은 무엇인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일. 단순히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장소의 이동이 아니라 예전의 생활을 되찾는 일까지 포함한 장소의 이동이 귀향이라고 한다면, '귀향'도 쉽지 않다. 소설 속 벨몬테 역시 제대로 된 귀향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배경은 독일과 칠레다. 전혀 연관이 없을 것 같은 이 두 나라가 '나치'에 의해 연결이 된다. 나치 부역자들이 남미로 많이 피신을 했었으니,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할 수 없다.


소설은 이 두 나라를 연결짓는 고리로 나치 시절에 금화를 훔쳐 달아난 독일인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들은 나치 치하에서 경찰이었지만 나치에 동조한다고는 할 수 없다. 나치가 숨겨둔 금화를 훔쳐 달아나려 한다. 어디로? 남미로...칠레로...


하지만 이들은 성공 단계에서 한 사람만 빠져나가고 한 사람은 잡히게 된다. 잡힌 사람이 끝까지 동료의 행방을 불지 않고 세월은 흘러 흘러 사회주의권이 붕괴되고 사건은 다시 시작된다. 이 금화를 찾으려는 사람들이 각자 자신들을 도와줄 사람을 고용한다.


그러니 소설은 두 축으로 시작한다. 금화를 가운데 두고 이를 찾기 위해 나서는 나치와 관련이 있는, 아니면 구동독 정보부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과 금화를 찾으려는 보험회사. 


갈린스키가 구동독 정보부를 대표한다면 벨몬테는 보험회사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갈린스키가 구동독 정보부를 대표하는 것은 맞지만 벨몬테는 보험회사를 대표한다고 할 수 없다. 그는 귀향을 꿈꾸기 때문이다.


남미의 민주화를 위해 싸웠던 게릴라 출신인 벨몬테. 그는 고문으로 말을 잃은 베로니카를 치료해준다는 조건에 일을 맡고 나선다. 그에게는 금화를 찾는 일은 귀향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귀향하는 곳이 독일이든 칠레든 아니면 그가 조건으로 내건 베로니카를 치료할 수 있는 덴마크 건 그것은 상관이 없다.


즉, 갈린스키에게 금화는 자신의 옛 영화를 대변하는 존재라면, 벨몬테에게 금화는 베로니카와 함께 귀향할 수 있게 해주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금화를 사이에 두고, 이들은 투우처럼 대치하게 된다.


원제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승자를 예측할 수 있다. 벨몬테가 승자가 된다. 그렇지만 그의 귀향이 이루어지는지는 알 수 없다. 칠레가 민주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완전한 민주화라고는 할 수 없다. 그 점을 세풀베다는 벨몬테를 빌려 이렇게 말하고 있다.


'조국은 민주주의 체제 하에 있었다. 하지만 그는 민주주의  체제가 <회복되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분 명 입 밖으로 토해 내지 않았다. 칠레가 민주주의 체제에 <있다>는 말은 그것이 좋은 길로 나가고 있다거나 , 그 반대로 그 길에서 당장이라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153쪽)  


자, 아직 진행 중이다. 그러니 벨몬테의 귀향도 진행 중이다. 그가 베로니카에게 가는 것으로 소설이 끝나고 있는 것은 그의 귀향이 진행 중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적인 사실에서부터 남미의 민주화 투쟁 시기를 금화를 둘러싼 두 인물을 통해서 소설은 긴박하게 전개된다. 


금화를 먼저 찾기 위한 여정, 두 사람에게 다른 의미를 지닌 귀향. 그렇지만 이렇게 긴박하게 진행되는 소설 속에서도 정지된 장면이 등장한다. 아니, 정지되었다기보다는 이런 쫓고 쫓기는 삶에서 한발 비껴선 이들의 삶.


금화를 숨긴 독일인이 숨어 살던 곳, 그곳에 살던 사람들... 이들은 "그 빌어먹을 것들을 어서 가져가시오."(212쪽)라고 한다. 이들에게는 과거의 금화, 또는 현재의 삶을 더욱 부유하게 해줄 금화는 필요없다. 그들에게는 평화롭게 살아가는 자신들의 삶이 더욱 소중하다. 그러니 그 금화를 빨리 갖고 사라지라는 말을 한다.


이들의 구성원이 깜빡깜빡하는 노인이나 듣지 못하는 여인들과 함께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즉 투우처럼 피비린내 나는 일에서 벗어난 삶을 사는 사람들. 자신들의 삶에 만족하고 남들을 돕고 사는 사람들. 


세풀베다는 작품의 말미에 이런 삶을 보여준다. 결국 베로니카에게 가면서 벨몬테가 생각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니 벨몬테가 베로니카와 만나는 순간, 그의 귀향은 완성될 수 있다.


'나의 사랑 베로니카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삶 앞에서 왜 죽음의 황금빛 섬광들만 바라보았는지를 생각하면서 걸어가고 있었다.'(213쪽)   


그렇다. 여기서 '투우'는 끝나고 '귀향'이 시작되며 완성된다. 죽음의 황금빛 섬광들을 과거로 여기고 이제는 삶에 충실하려는 모습... 벨몬테가 마지막에 만났던 사람들의 삶 아니던가.


세풀베다의 소설,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몇 권 읽을 때마다 좋은 느낌을 받는다. 재미도 있고, 생각할거리도 풍성하고...다른 작품들도 찾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2020년에 세상을 뜬 세풀베다를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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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제14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이미상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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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면서 미루고 미루다가 2023년이 다 갈 때쯤 되어서야 읽은 소설집. 젊은작가상이라는 이름에 맞게 등단한 지 얼마되지 않은 작가들의 작품집이다. 그런데도 이미 소설집을 여러 권 작가들이 많다. 문단에서 자리를 잡고 있다고 받아들여도 되겠지.


또 최근 소설의 추이를 알 수 있게 해주기도 한다는 점에서 가끔은 의무적으로라도 젊은작가상수상작품집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는데...


시와 소설의 홍수라고 해야 하나? 인문학이 죽어가고 있는 시대에, 문학 역시 인문학의 한 분야이니 죽어가고 있다고 해야 하는데,출판 분야를 보면 인문학이든 문학이든 참 많은 책들이 나온다. 그 많은 책들이 독자들에게 다가가고 있는지 물으면 그렇다라는 대답을 하기 힘들지만.


젊은작가상수상작품집도 마찬가지다. 소설의 홍수 속에서 그래도 의미 있다고 여겨지는 작품들을 선정해 책으로 발간했으니 많이 읽혀야 하는데... 많은 소설들이 많은 독작에게 가 닿지 못하고 작가와 평론가들의 세계에서만 머무는 경우도 많다.


그렇게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학교 교육이 중요한데, 요즘 학교 교육을 보면 소설이나 시를 수록한 교과서는 별로 없다. 


오로지 대학 입학을 위해서 국어(문학)공부를 한다고 하면 수능에서 문학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다. 문학보다는 다른 글들이 많이 실리고 문제도 많이 나오니, 이제는 학창 시절에 문학을 공부하는 비중도 적고, 그렇기 때문에 학교를 통해 문학과 만나고, 그 만남을 지속하는 경우도 드물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답은 없다. 소설이 사람들의 마음에 닿아야 하겠지. 요즘처럼 인터넷이 발달한 시대에는 평론가들의 평론보다는 일반 사람들의 말이, 글이 더 소설을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게 한다.


즉, 소설은 전문가들의 홍보가 아니라 일반 사람들의 홍보를 통해서 널리 퍼지게 되는데, 일반 사람들이 홍보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들의 마음을 건드려야 한다. 야, 이건 우리 이야기구나! 하거나 완전 내 이야기네 하는 마음이 들게 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젊은 작가상'은 일반인들의 마음에 다가갈 수 있는 여지를 더 많이 두고 있다고 하겠다.


첫소설인 이미상이 쓴 '모래 고모와 목경과 무경의 모험'은 그런 점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소설가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삶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 물론 이 소설을 읽으면서 모래 고모와 목경과 무경이 살아가는 모습을 생각하게도 된다. 그들의 삶이 바로 소설이라고 보면서...


목경은 우리와 비슷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보면 된다. 즉 목경을 평균적인 삶에 놓고 보면 모래 고모와 무경은 평균에서 벗어난 삶을 살아간다고 할 수 있다. 단편소설이라 무경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자세히 나와 있지는 않지만 무경은 사회 생활을 거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모래 이모도 마찬가지이긴 한데...


변변한 직업을 갖지 않고 가족을 돌보면서 생활을 하는 모래 이모, 그러나 모래 이모는 가끔 가출을 감행한다. 그 가출이 다른 가족에게로 가는 경우가 많지만 나중에는 공동체 생활을 하는 결말로 간다. 무경은 반대다. 무경은 가출을 하지 않는다. 무경은 원가족을 벗어나지 않는다. 원가족이 무경의 삶을 책임지게 한다.


이와는 다르게 목경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그냥 사회에 적응해서 살아가려는 사람... 그런데 소설은 '모험'이라는 말을 썼다. 어떤 삶이든 모험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의 삶도 하루하루가 모험이다. 이런 평범에서 벗어난 삶 역시 모험이다. 작가는 어떤 모험이 바람직한지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야기할 수도 없다. 우리네 삶 자체가 모험이라면...


그렇다면 소설 역시 이런 삶을 표현해야 한다. 이런 삶이 표현된 소설 역시 모험이다. 어떤 소설이든 모험일 수밖에 없다. 독자에게 다가가기 위한 모험... 삶의 모험과 소설의 모험이 이 소설을 읽으면서 겹쳐졌다.


"단편소설에서 결정적인 순간을 만든다는 것은 어떤 한 포인트를 융기시킨다는 것을 의미해요. 그 불쑥 솟은 한순간 아래 모든 문장과 장면이 깔리게 되는 거죠. 좀 비민주적이지 않아요?"(41쪽)


소설 속 동생인 작가가 하는 말이다. 그래서 한 포인트가 융기되지 않는 소설을 쓰기 때문에 인기가 없다고 한다. 그렇다고 그런 소설을 쓰지 않겠다고, 또는 쓰지 못한다고 하고 있으니, 우리 삶을 대비해 보자.


자신의 삶 속에서 어떤 한 순간이 융기했다면 나머지 삶들은 어떠했을까? 그 삶들은 융기한 한 순간을 위해 존재했을까? 아니다. 삶은 융기했든 평평했든 다 소중한 삶이다. 어떤 삶이든 다 모험이고, 순간순간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긴장된 순간이기도 하다. 그러니 삶에서 어떤 한 순간만을 만들어내려고 할 필요가 없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의 삶도 그렇다. 내 삶과 다른 사람의 삶을 비교하면서 저 사람의 삶은 저렇게 훌륭한데 왜 내 삶은 이다지도 형편없을까 라고 할 필요가 없다. 아니, 해서는 안 된다. 돋보이는 삶과 대비되는 보통의 삶들이 소중하지 않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삶도 소중하지 않은 삶이 없다. 그리고 이 세상에 나왔다는 자체만으로 삶은 모험이고, 누구에게나 소중한 체험이다. 그것을 알아줄 누군가를 만나는 일이 삶의 여정일 수도 있겠단 생각을 한다.


소설을 비롯한 문학도 마찬가지다. 특별히 융기한 작품이 아니라 쓰인 한편한편이 모두 소중한 작품이고, 그 작품들이 자신을 알아줄 존재를 찾아 모험을 하고 있다는 생각. 이미상 소설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작품집에 실린 다른 작품들도 여러 생각을 하게 해주고 있으니 이들의 모험을 만나볼 시간을 가지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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