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화와 기억 - 일제 말 친일 협력 문학의 재해석
김재용 지음 / 소명출판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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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 그렇게 우리나라는 일제에 대항하여 비폭력 만세 운동을 벌였다. 무장투쟁이든 비무장투쟁이든 일제에 반대한다는 데에서 공통점을 지닐 수 있는데, 3.1운동은 전국민적, 전국적인 운동이라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물론 3.1운동으로 인해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그 적통을 이어받아 지금 우리 대한민국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으니... 우리나라 헌법에는 3.1운동과 임시정부가 전문(前文)에 언급되어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친일문학 또는 반민족친일행위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논란이 많아진다. 도대체 친일이 무엇이냐? 당시에 친일을 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일제시대에 살았다는 것, 총을 들고 무장투쟁을 하거나 또는 눈에 띠는 독립운동을 하지 않은 대다수의 사람들 모두 친일을 한 것 아니냐는 반론이 늘 뒤따른다.
 
어쩔 수 없이 살기 위해서 친일을 한 것까지 응징해야 하느냐는 반론도 있고... 그렇게 많은 논란이 벌어지는 이유는 해방이 되고 나서 바로 친일청산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소위 친일파들을 안고 간 것이 아니라 그들이 우리 사회를 주도하게 하지 않았던가 반성하게 된다.
 
친일파들을 안고 가기 위해서는 먼저 친일파들의 통렬한 자기 반성이 있어야 한다. 자기 반성을 한 뒤 용서를 구해야 한다. 그들을 용서할 수 있을 때 그 다음에야 그들을 안고 가는데, 이런 과정 없이 반민특위는 해체되고 친일파들은 별다른 처벌 없이 우리 사회에서 주도적인 자리를 잡고 만다.
 
그 다음부터 친일에 관한 논의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각 학교 도서관에 친일인명사전을 비치하도록 하는 것도 좌파들의 책동이라고 하는 경우가 많으니, 도대체 이 나라에서 친일을 했다는 것은 그것도 주도적으로 친일을 했다는 것은 힘있는 자리에 계속 머무르면서 자손들에게 그 지위를 물려주었다는 얘기와 통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친일문학에 대해서 정리한 책이다. 어쩔 수 없이 친일을 했다고? 아니다. 이 책을 보면 이들은 자연스레 친일로 흘러들어간다. 자기 신념을 가지고. 이들에게 친일은 신념이다. 살기 위해서 한 어쩔 수 없는 행위가 아니다. 그냥 그 시대에 자기 논리를 끝까지 밀고 나간 결과가 친일이다. 친일이라는 말로 부족하다. 이 책에서는 그 단어를 '내선일체'로 본다. 
 
일본과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신념. 그 신념을 도처에 표시한 인물들. 네 사람을 든다. 이 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은 이광수다. 그러나 이광수 못지 않게 중요한 사람은 유진오이고. 나머지 두 사람은 해방 후 우리 사회에 그다지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으니... 장혁주와 최재서.
 
이광수야 조선 3대 천재로 인정받으면서 우리나라 젊은이들에게 선생님으로 통했던 사람이니... 근대문학을 확립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고, 2.8독립선언문을 기초한 사람이기도 하고, 상해임시정부에서 독립신문 발간에도 참여한 사람. 안창호를 따르던 그런 사람. 그러나 나중에 창씨개명을 하고, 우리나라 젊은이들에게 전쟁에 참여하라고 독려한 사람. 해방이 되고 나서도 본인은 조선을 위해서, 조선인을 위해서 친일을 했다고 강변했다는 사람.
 
벌을 받기 위해 강변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신념이 그러했다는 것을 이 책에서 알 수 있다. 그는 곳곳에서 이런 자신의 신념을 내비친다. 
 
저자는 친일 행위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누고, 다시 두 가지로 세분한다. 즉 친일의 양상이 네 가지가 있는 셈이다.
 
동화형 친일과 혼재형 친일... 동화형은 다시 문화와 혈통으로, 혼재형은 종족이냐 지역이냐로 나뉘는데... 문화적 동화형은 이광수, 혈통형 동화형은 장혁주, 종족형 혼재형은 유진오, 지역형 혼재형은 최재서로 대표된다고 한다. 
 
동화형이야 일본에 동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니 말할 것도 없고, 혼재형은 조선의 특성은 지키되 일본과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이니, 조금 다르다고 해도 일본에 종속된다는 점에서는 친일에 해당할 수밖에 없다.
 
동화형 중에서도 문화적 동화를 주장하는 이광수는 일본문화에 조선문화를 동화시킬 것을 주장한다. 일본이 동양정신의 정수를 계승 발전시켜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일본문화로 동화됨으로써 우리나라는 동양정신을 구현하고 서양에 맞설 수 있다는 주장이다. 혈통형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으련다.
 
혼재형 친일 중에서 유진오는 종족을 앞세운다. 내선일체를 주장하더라도 완전히 같아질 수는 없다는 것. 그래서 각자의 독자성을 유지하면서 융합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 이 논리는 어쩌면 유럽통합의 논리와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독립국들이 연합하는 것과 식민지가 식민본국과 융합한다는 논리는 완전히 다르다.
 
식민지는 어쩔 수 없이 식민본국을 따르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탄압을 받으니. 이런 상태에서 자신들의 독자적인 문화를 유지하면서 식민본국과 하나가 되는 길은 쉽지 않다. 아니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장기적으로 보면 식민본국 문화에 동화될 수밖에 없고, 식민정책은 강압이든 비강압이든 그런 쪽으로 정책이 흘러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들이 어떤 말을 해도 친일을 한 것은 변명이 될 수 없다.
 
그것도 자신들의 내재적인 논리에 의해서 친일로 나아갔으니... 앞에서 왜 유진오가 중요하다고 언급했냐면 유진오는 우리나라 제헌헌법을 기초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가 문학에서 손을 떼고 법에 전념했다고 하지만, 친일을 그렇게 주장했던 사람이 해방이 되고 나서 우리나라 헌법을 세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 친일청산이 멀어진 큰 이유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네 가지 유형의 친일이 나오지만, 이들의 공통점은 바로 '내선일체' 그리고 '황국신민화'에 이은 '대동아공영'이라는 말로 압축이 된다고 한다.
 
다 일본의 논리를 따라가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조선의 독자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일지라도 궁극적으로는 일본에 동화되는 것이다. 일본적인 것, 천황으로 귀일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들 주장이 닿는 끝지점이다. 그러니 친일이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3.1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 친일은 서서히 풍화되어 우리들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다. 하지만 사라져서는 안 된다. 친일은 기억해야만 한다. 그래야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 책은 일제시대 문인들의 친일행위가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했던 행위가 아니라 자신들의 논리를 따라서 적극적으로 행한 행위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친일행위를, 친일행위자를 기억해야만 한다.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역사이기 때문이다.
 
덧글
 
읽다가 소소한 오타가 눈에 들어왔는데... 그거야 문장에서 그냥 넘어갈 수 있다고 해도, 이 문장에 나오는 인물 이름은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둘 다 실제 인물이고 우리 문학사에서 언급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235쪽. 혼재형 친일 협력의 대표적인 문인인 유진오와 최서해는... 이라고 되어 있는데... 최서해가 아니라 최재서다. 이건 꼭 고쳐야 한다. 
 
최서해 : 본명 최학송. '탈출기, 홍염,기아와 살육' 등으로 유명한 소설가. 1932년 사망. 이 책은 1938년 이후를 이야기하기 때문에 최서해가 나오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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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2 11: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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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4 16: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얄라알라북사랑 2019-01-12 11: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사실, 학자이자 교수가 쓴 최근 인문서에서 그 저자가 인용한 학자 성명이 잘못된 걸 보고 눈을 의심했어요. 그럼 인용할 수도 없죠....꽤 많은 페이지를 할애했는데 정작 이름을 잘못알고 언급하다니

2019-01-14 16: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서 씨는 진짜 사랑입니다
엘리자베스 버그 지음, 박미경 옮김 / 나무의철학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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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밝았다. 새해엔 따스함이 넘쳤으면 좋겠다. 그래 새해 시작을 하는데 온기가 넘치는 글로 시작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책에는 늘 온기가 흐른다고 생각하지만.

 

소설이다. 마음이 따스해지는 소설. 사랑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는, 아니 생각이 아니라 마음으로 느끼게 하는 소설이다.

 

85세 된 노인. 세상을 살 만큼 산 사람이다. 부인이 얼마 전에 죽었다. 무덤에 간다. 늘. 함께 점심을 먹으러. 그들이 함께 살아온 과정에 대해서는 소설에서 간간이 나온다. 그렇게 서로를 받아들이며 서로에게 맞장구 치며 살아온 사람들이다.

 

먼저 간 부인. 단지 먼저 가 있을 뿐이다. 앞에 있지 않고 뒤에 있을 뿐. 이편과 저편이 완전히 갈라져 있을 것 같지만 그냥 고개 한번 돌리면 된다. 그렇게 늘 곁에 있다. 사랑하는 사람은 마음 속에 늘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인 이름은 놀라. 할아버지 이름은 아서.

 

무덤가에 오는 소녀가 한 명 있다. 소녀가 무덤가에 온다는 것, 노인이 오는 것과 참 거리가 멀다. 무덤가는 무언가를 마친 사람들이 쉬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삶이 들어 있는 무덤에서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끼는 소녀. 매디.

 

하지만 무덤가에 찾아오는 소녀에게 무슨 문제가 없을 수가 없다. 어릴 적 엄마를 잃은 매디. 아빠와는 소원한 관계다. 아마도 아빠는 아내를 잃은 슬픔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했나 보다. 여기서 매디의 아빠와 아서의 차이가 드러난다.

 

아서는 아내를 잃었어도 아내를 간직한다. 아내와 함께 한다. 하지만 매디의 아빠는 아니다. 그는 아내를 잃은 슬픔을 스스로 이겨내지 못한다. 아내의 분신인 딸에게 사랑을 쏟을 수 있을텐데, 그렇게 하지 못한다.

 

자기 슬픔에 갇혀 있다. 그러니 매디 역시 겉돌 수밖에 없다. 아빠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학교에서도 괴롭힘을 당하고 심지어 남자친구에게도 차이고, 아이는 뱃속에 있고. 힘들게 살아갈 조건을 다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매디는 제대로 인생을 살고자 한다. 왜? 그녀에겐 그를 온전히 받아들여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교사도 그렇고, 무덤가에서 만난 아서도 그렇다. 아서의 집에서 살게 되는 매디. 여기에 이웃집 할머니인 루실도 함께 살게 된다.

 

자, 가족이 무엇인가 생각하게 한다. 도대체 핏줄로만 연결된 것이 가족인가. 아니다. 가족은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며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새로운 가족이 만들어진다. 이들은 때로는 갈등도 겪지만 함께 살아간다.

 

세대가 다른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지내게 되는 것. 그렇게 되기까지는 상대를 인정해야 한다. 상대를 받아들여야 한다.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그렇게 힘께 지내는 것.

 

이것이 사랑이다. 이런 사랑으로 묶여 있는 관계, 이것이 바로 가족이다. 매디는 가족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아서 역시 마찬가지다. 그에게도 딸이 생긴 것이고, 이웃집 할머니 루실에게도 딸이 생긴 것이다.

 

이렇게 무언가를 잃은 사람들이 무언가를 찾고 함께 만들어가는 모습이 소설 속에 나타난다. 따스하게 서로를 보듬어 준다. 무덤가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아서가 읽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렇게 자신을 온전히 남에게 내어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온전히 내어주기, 내것만을 강요하지 않기, 다름을 인정하기, 그리고 함께 살아가기. 매디는 슬픔을 서서히 극복해 가고 또 하나의 가족을 만들어 간다. 이제는 사랑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십대 소녀가 팔십대 노인들을 만나 가족을 이루고 사랑을 깨달아가며 스스로 살아가게 되는, 그녀가 나은 딸이 '놀라'가 된다. 아서의 아내. 그리고 아서와 놀라는 아마도 하늘에서 별이 되어 매디와 놀라를 내려다 보고 있겠지.

 

이승에서의 헤어짐이 영원한 헤어짐이 아니라는 것. 언제든 무덤가에서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것. 굳이 무덤가가 아니더라도 마음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

 

소설 속에서 핏줄로 엮인 가족이 아니라 이해와 배려,사랑으로 묶인 가족. 그렇다. 그렇게 온전히 내어주는 사랑, 내어줌으로써 받아들이는 사랑, 그런 사랑을 아서가 보여주고 있다. 그런 사랑은 넘치고 넘쳐서 다른 존재들의 마음을 적시게 된다.

 

새해에 이런 아서와 같은 사랑이 넘치는 그런 관계들... 그런 관계가 넘쳐나는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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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01 11: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01 1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태원 아이들 바다로 간 달팽이 5
데이비드 L. 메스 지음, 정미현 옮김 / 도서출판 북멘토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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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아팠다. 읽다가 도중에 포기할까 하는 생각도 여러 번 했다. 마음이 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확한 용어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혼혈아를 튀기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다.

 

어릴 적 미군부대가 있는 곳에서는 어김없이 백인을 닮은 아이와 흑인을 닮은 아이가 있었다. 이들은 우리나라 사람이라고도 미국인이라고도 할 수 없는 자리에 있었다. 특히 흑인을 닮은 아이들은. 그들은 피부가 검다는 이유로 깜둥이로 불렸다. 피부가 하얀 아이들은 어느 정도 질투의 감정이 실린 놀림을 받았다면, 피부가 검은 아이들은 그냥 놀림, 무시의 대상이었다.

 

소설은 그렇게 이태원에서 흑인의 피를 받은 아이가 태어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아니, 시작 문장은 간결하지만 너무도 많은 슬픔의 역사를 담고 있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조 윈터의 어머니는 창녀였다.' (10쪽)

 

기지촌에서 미군을 상대로 생계를 이어가야 하는 여인. 그 여인은 흑인을 닮은 아이를 낳자마자 죽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원치 않게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아이.. 병석이...

 

그는 이태원에서 살아가는 부랑아라고 할 수 있다. 살기 위해서 무엇이든 해야 하는 아이. 그런 그를 착취하는 사람이 있다. 늘 그렇다. 없는 사람 등골을 빼먹고 사는 존재들이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소설 처음 부분이 많은 것을 말해주지 않는가. 조 윈터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것. 이것은 그가 성장했을 때 이야기다. 그는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생존의 정글에서 살아남은 것.

 

그렇게 되기까지 자신의 노력도 있지만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다. 세상은 나쁜 사람들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 진흙 속에서 연꽃이 필  수 있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는 것.

 

병석은 자신과 반대로 피부가 하얀 혼혈아를 만난다. 미희. 이들은 서로 의지할 수밖에 없다.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피부색이 다르다는 것은 이방인이라는 것, 국외자가 된다는 것이니, 그들은 한국인이지만 한국인이 아닌 미국인 대접을 받고 또 미국인이지만 미국인이 아닌 상태로 살아가게 된다.

 

둘이 마음을 열고 서로를 위하며 살아가기 위해서 그들은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가. 여기에 온갖 멸시를 피부색으로 인해 받는 병석과 오히려 그런 피부색과 얼굴 모습으로 남자들의 눈요기거리로 욕망의 대상이 되는 미희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혼혈아들이 겪어야 했던 불행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을 거쳐 미국에 가서 그들은 살아남을 것이다. 살아남아 자신들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당당한 삶의 주체로.

 

소설을 쓴 사람이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놀라울 지경이다. 이태원 하면 지금은 번화가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관광명소가 되었지만 60-70년대 우리나라 이태원은 기지촌에 불과했던, 몸 파는 사람들과 그에 빌어먹는 온갖 군상들이 모여 살던 곳. 여기에 곳곳에 버림받은 아이들이 온갖 핍박을 받으며 살아가던 곳.

 

그런 사정을 이렇게 자세하게 까발릴 수 있다니... 잊고 있었던 과거를 소설은 되살려주고 있다. 이건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고. 지금도 우리나라 곳곳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다만 미군의 사생아들에서 이제는 다문화란 이름으로 포장이 되어 있을 뿐이지만, 그들을 과연 온전한 우리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아니 우리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남을 자신에게 동화시키는 폭력적인 발상이라면 그들의 다름을 그대로 인정하고 함께 살아가려 하고 있는가.

 

다름을 인정하고 함께 어울리는 것, 버려진 아이들, 까만 피부건, 하얀 피부건, 사지가 멀쩡하건, 어딘가 장애가 있건, 그들은 스스럼  없이 어울리며 서로를 도우며 사는 모습을 보여준다. 소설에선 그런 그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태원 아이들... 기지촌 아이들이라고 해도 좋다. 그런 그들이 자신의 삶을 찾기까지 얼마나 험난한 길을 걸어야 했는지. 그 길에서 만난 수많은 나쁜 사람들과 또 좋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세상은 그래도 좋은 사람들이 있어 아직은 살 만하다는 것을 생각하게도 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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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의 축제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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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서 의미를 찾으면 더 잘살 수 있다고 한 건, 빅터 프랭클. 삶의 의미를 찾아야지만 삶을 지속시켜 나갈 수 있다는 것인데, 그런데 거꾸로 이 소설은 무의미의 축제다.

 

축제라는 것은 즐거움이다. 즐거움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기보다는 그냥 즐기면 되듯이, 삶 역시 하나하나 의미를 찾기보다는 무의미들의 연속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 보게 된다.

 

시작부터,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첫부분부터 별다른 의미가 없다. 유행하는 옷들, 배꼽을 내놓은 옷을 입은 처녀들을 보면서 배꼽에 대해서 생각한다. 배꼽, 삶과 삶을 이어준 흔적. 그런데 이런 배꼽에 무슨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배꼽은 어떤 역할을 할까?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생명을 이어준 존재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지만 더이상 의미를 추구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주인공들이 등장하여 이끌어가는 이야기들이 그렇게 큰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다. 연극을 가장하여 얼토당토 하지 않은 파키스탄말을 하는 주인공도 있고, 계속 배꼽에 대해서 생각하는 주인공도 있고, 병이 없음에도 병이 있는 것처럼 속이는 인물도 있고.

 

그렇게 우리들 삶은 별다른 의미없는 행동들이 연이어 일어나면서 이루어지기도 한다. 그렇게 이루어지는 삶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물론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내가 세상에 나올 때 어떤 의미를 지니고 나온 것은 아니다. 내가 나오게 된 것은 내 의지가 아니다. 그냥 나오게 됐다. 무의미다. 그렇다고 죽음에 이르는 순간도 역시 내 의지가 작동하기는 힘들다. 몇몇은 자신의 의지로 제 죽음을 이끌어가기도 하지만, 소설에서 알랭의 어머니처럼 죽음 순간에도 어떤 무의식적인 행위가 작동하기도 한다.

 

수많은 무의미들이 모여 삶을 구성하는데, 그 무의미들이 의미를 이루는 것이 바로 우리 삶이다. 삶은 그렇게 지속된다. 그러므로 '무의미의 축제'가 바로 삶이다.

 

작고 하찮은 것들, 내겐 전혀 의미가 없어 보이는 것들이 삶의 한 구성 요소라는 것, 그것이 바로 의미라 하는 것, 무의미의 축제는 그래서 내 삶에 관여하는 모든 것들이 삶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무의미라는 것에서도 의미를 발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삶이다. 그러므로 프랭클이 말한 의미치료, 즉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은 이 소설에서도 부정되지 않는다.

 

나중에 엄마와 화해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알랭의 모습에서 그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삶에서 숱한 무의미들을 만난다. 무의미하다고 여기고 그렇게 그냥 흘려보내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들이 모여 우리 삶의 의미를 구성한다는 것.

 

소설에서 일어나는 일상들, 언뜻 보면 아무런 의미없는 행위들이 결국 우리 삶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그렇게 쿤데라는 소설을 통해, 거시적인 것이 아니라 - 소설에서 그는 스탈린과 칼리닌을 등장시켜 그들을 희화화 함으로써 거시적인 것의 무의미함을 통렬하게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 작은 것들, 무시하고 지나치는 것들 속에 우리 삶이 있음을, 우리는 그런 무의미한 것들을 통해 삶을 지속해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쿤데라의 다른 소설처럼 참 읽기 편하다. 그가 지닌 장점이자 매력일 것이다. 이야기꾼. 도대체 왜 이야기가 여기서 나오지 하는 생각이 들게 하지만, 읽기에 힘이 들지 않게 하는 전개. 그러나 의미를 찾으려면 고생을 하게 하는 그런 소설.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읽기는 편하지만, 의미를 찾으면서 읽으려면 쉽지만은 않은 그런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냥 나처럼 자기 식으로 해석하면 되기도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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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것들의 신 - 제19회 부커상 수상작, 개정판
아룬다티 로이 지음, 황보석 옮김 / 문이당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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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것들의 신... 사람이 살아가게 하는데 가장 필요한 요소지만 그것은 다른 큰것에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되거나 사라지게 된다.

 

그런 작은 것을 지키는 신, 크지 않다. 결국 작은 것들의 신은 소멸의 신이다. 이 세상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들을 사랑하는 신.

 

힘이 없는 신. 그러나 작은 것이기 때문에 사라지지 않고, 우리들 삶에 늘 붙어 있는 신. 존재를 지켜주지는 못 하나, 존재와 함께 있으며 함께 사라지는 신.

 

그런 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런 신이 깃들인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작은 것들의 신이 깃들인 사람은 그 사회의 주류가 아니다. 비주류다. 중심에서 빗겨난 사람들. 그러나 중심에 있는 사람과 똑같은 사람들.

 

중심에 있는 사람들, 큰사람들과 같은 감정을 지니고, 같은 욕망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게는 그러나 같은 감정, 같은 욕망, 같은 생활이 용납되지 않는다. 이들은 작은 것들, 흔히 작은 것들을 하찮은 것들, 무시해도 좋은 것들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소설은 이런 작은 것들이 결코 작은 것들이 아니고 우리 삶을 이루는 가장 큰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 아무리 우리가 작은 것들이라고 무시해도 그것 없이는 사람이 살아갈 수가 없다. 자기보다 약한 존재, 비천한(?신분이 존재하는 사회, 계급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존재라고 해도 그들에게도 같은 삶이 있다는 사실을, 같은 삶을 살아가려 했다는 이유로 파멸해 가는 인물들을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

 

소설 구성이 제목과도 어울린다. 얼핏 추리소설 구성을 택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는데, 추리소설이라기보다는 사건들 하나하나를 순서대로 배열하지 않았을 뿐이다.

 

작가는 1997년(무려 20년도 더 전의 일이다) 한국어판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저는 소설이 복잡한 세상을 가장 단순하게 표현하는 방법이라고 믿습니다. ... 이 소설은 저의 세상이며 제가 세상을 보는 방식입니다. 또한 이 책은 장소나 관습에 관한 것이 아니라 들과 땅과 공간에 관한 것이며, 어떤 특정한 사히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인간 본성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소설을 읽으며 퍼즐조각 맞추기가 떠올랐다. 단순한 조각들이 전체 그림에서 부분 그림을 이루고 그 부분 그림들을 먼저 맞춘 다음 전체에서 어울리는 자리에 갖다 맞추면 나중에 한편의 완성된 퍼즐이 되는.

 

그래서 이 소설은 읽어가면서 점점 형태가 명확해 진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왜 벌어졌는지를 알게 된다. 또 문장 자체들이 짤막짤막하고 경쾌하게 진행되고 있고, 작가가 적절히 개입해서 사건 전개를 알려주고 있기에 읽기에 힘들지는 않다.

 

다만 작은 것들의 신이라는 개념이 잘 들어오지 않는데, 약한 존재들과 함께 하는 신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서 약한 것들은 금방 소멸해가는 존재이니, 이들의 사랑이 지속될 수 없다고 여기기로 했다.

 

인도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작가의 말대로 굳이 인도가 아니어도 된다. 이런 사랑의 비극은 어디에도 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든 작은 것들은 큰것들에 의해 하찮은 것으로 무시당하기 일쑤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소설은 어떤 측면에서 읽어야 하나? 그런 작은 것들이 파멸해 가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작은 것들은 작은 것에 만족하고, 제 분수를 지키며 살라고 하나? 아니, 그렇지 않다.

 

작은 것들도 큰것들과 다르지 않음을, 작은 것들의 삶도 그들과 같음을, 그래서 존중받아야 함을 생각해야 한다.

 

작은 것들은 소멸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도 신이 있으므로...

 

소설보다는 정치평론으로 먼저 만난 작가, 아룬다티 로이... 그가 쓴 "9월이여, 오라"를 잘 읽었는데, 시간이 한참 지나서 읽은 이 소설, 출간된 지 20년이 넘었지만, 개정 번역판이 나왔다는 것은 여전히 작은 것들은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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