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싫어서 오늘의 젊은 작가 7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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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두 문장으로 정리하면 '한국이 싫어서, 내 행복을 찾아 떠났다.'가 된다. 행복을 찾아 떠나는 나라가 어느 나라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소설에서는 호주를 예로 들었지만, 그것은 한때 호주 이민을 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지, 호주가 딱히 행복을 보장해주는 나라는 아니다.

 

소설에서 주인공은 이 나라에서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한국이 싫다고 호주로 떠난다. 호주에 가서 영주권과 시민권을 획득해 호주시민으로 살아갈 결심이다. 시민권을 따고 거기에 정착하기까지 한국과 호주에서 있었던 일을 빠른 문체로 표현하고 있다.

 

참 무거운 주제고, 진지한 주제임에도 소설은 경쾌하게 넘어간다. 이 경쾌함이 때로는 씁쓸함을 자아낸다. 어쩌면 성공담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 호주 시민이 된 것으로 설정이 되었기에, 한국에서 하는 정도의 노력이면 충분히 영어공부를 하고 호주 시민권을 딸 수 있을 거라는 것... 이것이 역설적으로 한국이 참 힘든 나라임을 드러내 준다.

 

소설 속 화자가 호주에서 겪은 일들이 결코 가볍지 않다. 순탄한 일만 겪은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것들은 자신의 노력으로 이겨낼 수 있었다. 그런데 한국은? 이런 질문을 하면 한국에는 개인의 능력에 다른 외적인 것들이 더해짐을 생각해야 한다.

 

이제는 해체된 '학벌없는 사회'. 학벌없는 사회가 되었기 때문에 해체된 것이 아니라 이미 경제적 세습으로 학벌이 세습되는, 손을 댈 수 없는 지경이 되었기 때문에 '학벌없는 사회'라는 단체가 해체된 것이다. 학벌만으로 우리나라를 설명할 수 없기에.

 

이 소설에서는 학벌이 여전히 중요함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 학벌에는 부모들의 능력이 뒷받침되고 있음 역시 잘 보여주고 있다. 결국 학벌의 대물림이 고착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런 곳에서 '개천에서 용 났다'는 표현은 사전 속에나 존재하는 말이 되었다.

 

거꾸로 이야기하자. 왜 개천에서 용이 나야 하는가? 개천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미꾸라지나 다른 물고기들, 그리고 다른 생명체들이 되면 안 되나? 꼭 개천을 좁게 여기는 용이 되어야 하나?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개천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나라라면 '한국이 싫어서' '행복해지기 위해' 다른 나라로 갈 이유가 없을 것이다. 이 소설에서 표현한 한국은 개천에서 행복하게 살 수 없는 나라다. 그러니 자신의 행복을 찾아 떠날 수밖에 없다.

 

그것이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쳐야 이룰 수 있을 테지만, 그마저도 하지 못하는 곳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렇다고 환상을 갖지는 말자. 그만큼 자신이 노력을 해야 한다. 소설 속에서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들, 동포를 등처먹는 사람도 있고, 유색인이라고 차별을 당하는 일도 있으며, 시민권을 얻더라도 번듯한 직장을 얻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가능성이 있다. 직업으로 서열이 정해지지는 않으니까. 적어도 겉으로는 모두에게 기회가 주어지니까.

 

소설 화자를 통해 직설적으로 우리나라를 비판하기도 하지만,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한국 사회는 우리가 꼼꼼하게 살펴봐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를 거울처럼 비추고 있으니까.

 

'한국이 싫어서, 행복해지기 위해 떠났다'라는 말을 '행복해지기 위해 한국에 살겠다'라는 말로 뒤집을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 사회가 그렇게 변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수월하게 읽히는 이 소설이 결코 가벼운 소설이 아님을, 우리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행복해지기 위해서 어떤 자세를 지녀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 바로 이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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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의 꿈 이청준 문학전집 중단편소설 3
이청준 지음 / 열림원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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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이런 비평을 만나면 절망한다. '해설'이란 이름을 달았지만, 해설이 더 어려운 경우. 대학교수들이 소설에 대해서 해설을 쓸 때 왜 그리도 현학적인지. 도무지 모를 말들을 나열하면 그것이 잘된 해설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학자들이라서 그런 어려운 말들이 자신에게는 쉬운 말이기 때문일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읽고 이해할 수 있는 '해설'을 해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해설이란 그 글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쉽게 알 수 있도록 해주는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청준 소설은 결코 쉽지 않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래서 여러 번 읽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해설'의 도움을 빌리려 하는데, 이 놈의 '해설'이 사람 속을 뒤집어놓는 경우가 있다.

 

이 작품집의 경우를 보자. 이렇게 '해설'에 쓰여 있다.

 

... 이 소설집의 텍스트들은 대개 세 가지 측면에서 주목에 값한다. 1. 탈난 세계의 한계 억압 체증 양상의 재현 가능성. 2. 탈난 세계에서 탈난 개인의 탈의 한계 효용 체감 양상의 재현 가능성. 3. 억압의 한계 체증과 탈억압의 한계 체감 사이의 대립 상황에서 소설의 한계 체험에 대한 반성적 질문의 유효성 등 셋이 바로 그것이다. (370쪽)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잘 이해가 안 된다. 언뜻 물리학 법칙 같이 정리를 해서 간명해 보이기는 하나, 도무지 '한계 억압 체증'이라든지, '한계 효용 체감 양상'이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가 없다. 이 말을 한번 풀어서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런데 여전히 어렵다.

 

다시 말해 우리는 <가면의 꿈>을 읽으면서 다음과 같은 작가의 문제의식과 마주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의 의미와 그 서사적 형상화 양상, 그리고 그런 문제의식과의 새로운 비판적 대화 등이 이 소설집 독서의 핵심사다. (370쪽)

 

하여간 소설 속에 나타난 내용을 비판적으로 읽으면서 작가가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파악하라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 말인데, 여전히 어려운 말들이 나열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또 한번 설명하고 있다.

 

예컨대 이런 질문들이다. 자유롭기를 열망하는 개인을 억압하는 탈난 세계의 억압 기제는 어떻게 작동되는가, 그 억압 기제는 허구적 현실을 어떻게 구성하는가, 억압의 구성적 상징은 어떤 서사 효과를 묘출하는가, 탈난 억압 현실에서 개인은 어떤 탈을 쓰게 되는가, 그 탈은 '환부다운 환부가 없는' 환자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을 것인가, 개인의 탈마저 억압되는 상황에서도 개인의 탈주는 가능한가, 이런 문제적 현실에서 소설은 무엇을 어떻게 꿈꾸고 재현할 수 있는가…… (370쪽)

 

'해설' 시작이 이렇다. 시작에서 어려운 말들이 다 나왔다. 그 다음부터는 구체적인 작품을 예로 들어 설명하기 때문에 이렇게 현학적인 말들보다는 훨씬 이해하기 쉽다. '해설'의 앞부분도 좀 간결하고 쉬웠으면 하는 생각을 하는데...

 

그만큼 이청준 소설을 이해하는 방법이 다양하다는 것이다. 그가 사용한 표현방식이나 소재가 다양하기도 하고.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이 1960년대에서 70년대 창작되었기 때문에 지금으로 보면 좀 오래되었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그 당시 상황을 잘 모르고 있기도 하니까.

 

그렇지만 이 소설집 소설을 읽으며 몇 가지는 파악할 수가 있다. 사람들을 옭아매고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 그것이 사회적인 것이든 개인적인 것이든 책임은 개인이 질 수밖에 없다는 것.

 

첫소설 '굴레'에서부터 그렇게 개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모습이 나타나는데, 그 개인이 그러한 굴레에 어떻게 대응하는가를 표현한 작품들이 있다. '굴레'를 비롯하여 오히려 제목을 굴레라고 붙였으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가학성 훈련' 그리고 자신은 언제든지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말도 그렇게 하고 있지만 막상 자신의 굴레를 벗어던지지 못하는 '보너스'라는 소설. 이런 굴레에 속한 소설로 '가면의 꿈'과 '엑스트라'와 '들어보면 아시겠지만'을 들 수 있겠다.

 

천재 소리를 들으며 자라 성공가도를 달리던 주인공이 등장하는 '가면의 꿈'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굴레(짐)은 너무도 무거워 가면을 써야지만 안심하게 된다. 하지만 가면도 쓰면 쓸수록 효용성이 떨어진다. 효용성이 덜어지는 가면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파멸해가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주는 '가면의 꿈'

 

더 많은 소설들이 있지만, 남북관계를 의미하는 듯한 소설(새를 위한 악보 중 돌담 이야기)도 있고, 당시 비틀어진 사회 모습을 비판하는 소설 (새를 위한 악보 중 웃음 선생)도 읽을 만하다.

 

무엇보다도 이 이청준 소설집에서 생각해야 하는 것은 개인이다. 결국 소설은 사람의 이야기 아니겠는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소설이다. 그러니 해설에서 말한 탈난 세상이라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돕고 사는 평화로운 공동체가 무어진 세상이라는 뜻이고, 그런 세상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소설이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청준 소설은 그런 세상에서 개인들이 굴레에 매여 있으며 가면을 쓰고 살아갈 수밖에 없고, 그것에서 벗어나기가 힘들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정확이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들.

 

문제는 있는데, 그 문제가 어떻게 생겼는지, 어떻게 해야 해결이 되는지를 도무지 알 수 없는 세계에 우리가 살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렇지만 거기에 대해서 포기하지 않고 나름대로 궁리를 하는 인물들이 바로 이청준 소설의 인물들이다.('배꼽을 주제로 한 변주곡'에서 이런 점이 잘 나타나 있다)  

 

이청준 특유의 문체가 있어서 거기에 익숙해지면 읽기에는 무리가 없다. 편하게 읽을 수는 있다. 그렇게 읽어가면서 이청준이 무엇을 표현하고자 했는지는 생각해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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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제6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정지돈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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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알라딘 중고서점에 들른다. 그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이 있으면 망설이지 않고 고른다. 소설을 멀리한 지는 꽤 되었고, 삶이 소설보다 더 극적이라고 느끼고 있는 요즘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소설을 읽으면서 남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을 포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소설은 어쩌면 드라마에 비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많은 작품들에서 거부감을 보이면서도 눈을 떼지 못한다는 것, 자꾸만 빠져들어가게 되어서 결말까지 가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는 것.

 

최근 소설들에서 요즘 삶의 모습들이 표현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소설을 읽으면서 삶을 거꾸로 발견하는 경우도 있으니, 드라마 역시 소설과 비슷한 역할을 하기도 하니까 둘은 비슷하다. 그럼에도 의식적으로는 멀리하려고 하기도 하니...

 

2015 제6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이다. 이번에 선정된 작품들은 내용이 다 달라서 어떤 공통점을 찾기가 힘들다. 자신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야의 소설에 마음이 더 갈 수밖에 없는 작품집인데, 그럼에도 이토록 다양한 삶들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 중에 특별한 용어를 보고서는 관심을 갖게 되었다. 정지돈이 쓴 '건축이냐 혁명이냐'는 소설인데, 작가 소개와 해설을 금정연의 소개에 '후장사실주의'라는 말이 나왔다. '후장 사실주의?'

 

사실주의니까 리얼리즘이라는 뜻인데, 후장은? 후장? 우리가 아는 장의 맨 뒤. 소위 직장 쪽인가?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정지돈, 금정연 등이 후장사실주의를 표방하고 나섰단다. '후장 사실주의'란 잡지도 냈다고 하는데, 읽어보기는커녕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으니... 2015년 시네21 인터뷰에 이런 글이 있다.

 

2013년 <문학과사회> 신인상에 <눈먼 부엉이>가 당선돼 등단했을 때 정지돈이 쓴 당선소감엔 후장사실주의의 탄생설(!)이 나와 있다. “2012년 여름 오한기와 후장사실주의 그룹을 결성했다. 통화 중에 우연히 나온 것으로 내가 후장사실주의를 결성하자고 말하자 오한기는 핸드폰을 손에 쥐고 데굴데굴 굴렀다. 후장사실주의는 <야만스러운 탐정들>(로베르토 볼라뇨)에 나오는 내장사실주의의 패러디다.” 기성문단을 공격하고 기성질서를 파괴하길 서슴지 않았던 로베르토 볼라뇨가 20대 초반 초현실주의를 패러디해 인프라레알리스모(밑바닥사실주의-내장사실주의)를 결성했고, 정지돈과 오한기는 다시금 로베르토 볼라뇨의 말을 패러디해 후장사실주의를 만들었다. 더불어 에 실린 정지돈의 글을 인용해 후장사실주의를 설명하면 이렇다. “내가 제일 잘하는 건 인용이다. 문학은 세계의 인용이다. (중략) 후장사실주의는 문학의 인용이다. 그러므로 후장사실주의는 세계의 인용의 인용이다.”

 

(출처 :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82409)

 

후장 사실주의? 어려운 말이다. 그런데 쉽게 이야기하면 사실주의에 똥침을! 정도로 하면 안 되겠나 싶다. 사실들은 사실들인데, 그것들을 어떤 논리적 관계로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무작위로 배열하는 것. 그래서 사실적이기는 한데 도무지 사실적이지 않은 느낌을 주는 소설. 이 정도 아닐까?

 

이 수상작품집에 실린 정지돈의 '건축이냐 혁명이냐'를 보면 도시개발이 되기 시작하는 서울의 건축을 이야기하는 것, 그런 서울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이 소설이지만, 소설은 기존의 사실주의를 넘어서고 있다. 여러 사실들이 나열되고 중첩되고 있는데, 이런 사실들이 모자이크 식으로 또는 몬드리안의 추상화처럼 표현되고 있다. 그래서 낯선 느낌을 주는데, 그 점이 이 소설의 장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소설집에서 공통점을 찾으라면 바로 이런 '낯섬'이 아닐까 한다. 가까이 있지만 서로에게는 낯선 존재이기만 한 관계들.

 

최은미의 '근린'이 이 점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한 공간에 같은 시간에 모여 있지만, 이들은 육체적 거리는 가깝지만 마음들은 서로 닫혀 있다. 몸은 가깝고 마음은 먼 상태. 그래서 '근린'이라는 가까운 이웃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이 제목이 가까이 지내지만 서로 낯선 존재로 지낼 수밖에 없는 현대인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낯섬은 사람 이름을 제목으로 삼은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주인공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게 거리를 두고 지낼 수밖에 없는 현대인 또는 사람들.(이장욱, 우리 모두의 정귀보. 김금희, 조중균의 세계) 한 집에서 지내더라도 서로에게 자신을 완전히 열어보지 못하고,  서로의 영역을 지키며 지내야 함을 어느 가정에 보모로 들어가 지내는 사람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손보미의 '임시 교사', 함께 지내더라도 이해한다고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상대를 자신의 틀에 가두려고 하는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윤이형의 '루카'. 그리고 백수린의 '여름의 정오'

 

일곱 편의 소설들이 각기 다른 내용으로 다가오지만, 그래서 다른 삶들을 엿보고, 내 삶을 돌아보는 역할을 하게 하지만, 공통적으로 현대인들은 서로에게 '거리'를 두고 있다는, 가깝지만 결코 가깝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2015 제6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새로운 용어를 만나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반가운 소설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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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 박사 2 - 한 친구가 이야기하는 독일 작곡가 아드리안 레버퀸의 생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5
토마스 만 지음, 임홍배.박병덕 옮김 / 민음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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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에 이어서...

 

1권의 막바지에 악마와 계약하는 장면이 레버퀸의 글을 통해서 전달되고 있다. 이에 레버퀸은 이제 대단한 작품을 낼 것이며, 사람들은 열광에 빠질 것이고, 그는 정점에 올랐다가 악마에게 영혼을 빼앗길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게 된다.

 

이런 예상에 맞게 소설은 전개된다. 다만, 레버퀸이 급작스레 죽지는 않는다. 레버퀸은 치매 상태에 빠진다. 자신의 기억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 그 과정까지에는 두 죽음이 자리잡고 있다. 악마와 계약할 때 레버퀸에게 금지된 것이 바로 '사랑'이다. 이런 '사랑'을 하는 순간 그는 파멸을 맞을 수밖에 없다.

 

두 죽음이 비중있게 다뤄진다. 레버퀸이 정점에서 몰락하는데 일조하는 죽음이다. 소설 속 화자보다 더 가까운 관계가 되는 바이올리니스트 슈베르트페거와 조카 네포무크. 결국 이 두 죽음은 그를 치매와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런 파멸의 과정을 2권에서 풀어가고 있다.

 

이런 줄거리, 대부분 유럽 사람들이 알고 있는 줄거리로 괴테라는 유럽에서 인정받는 작가가 이미 쓴 파우스트 이야기를 또 쓴다는 것은 무언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레버퀸이라는 천재 음악가를 통해 토마스 만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뭘까? 그게 소설을 읽어가면서 우리가 계속 해야 할 질문이다.

 

이 책 작품해설에서 번역한 사람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작품만큼 난해한 작품이 없다고. 그래서 작가인 토마스 만도 이 작품을 이렇게 읽으면 좋겠다고 했다고.

 

토마스 만 자신도 이 소설의 난해성을 의식했는지 한 가지 독법을 추천했는데, 일단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통독해서 전체적인 개요를 조망하고, 작품의 결말을 다 아는 상태에서 처음부터 다시 아주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기를 권했다. 시간이 있는 독자들은 그렇게 읽는 방법이 최선책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음악에 관심과 흥미가 있는 독자들이라면, 이 소설에서 비교적 길게 언급되는 다양한 음악 작품의 해당 부분들을 직접 들으면서 소설을 읽어 나가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528쪽)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 읽기도 힘든 이 작품을 두번 세번 읽을 독자는 흔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엄청난 시간과 인내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소설을 전문적으로 분석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이토록 긴 소설을 여러 번 읽는다는 것은 거의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 동원하는 한 방법. 시대와의 관련성을 찾아보는 것. 그래서 작가의 의도와 작품의 전개를 연결짓는 것이 필요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소설을 너무도 도식적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많다. 소설을 소설로 읽지 못하고, 작가의 논설로 읽게 될 위험성이 있는 것. 작품해설에서 이렇게 이 작품의 창작동기를 이야기하고 있다.

 

망명기의 토마스 만이 가장 고심했던 것은 학문과 예술을 숭상해 온 문명국가 독일에서 어떻게 히틀러 정권과 같은 극단적인 야만 세력이 등장했으며, 20세기에 들어와 두 차례나 세계 대전을 일으키는 반인간적 핼위를 자행했는가 하는 문제였다. 토마스 만은 바로 이 문제와 정면 대결하기 위해 근현대 독일 정신의 전통과 독일인의 정체성 문제를 비판적으로 조명하는 소설 [파우스트 박사]의 집필을 결심했다. (510쪽)

 

그러나 이것은 창작동기일 뿐이다. 소설 속에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의 독일 이야기가 나오고, 그것에 대해서 비판적인 서술이 많이 있기는 하지만, 꼭 작가가 말하고 있는 창작동기와 연관지어서 읽을 필요는 없다.

 

이 해설을 작품에 도입하면 작품은 레버퀸은 독일이고, 독일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려고 국가가 해서는 안 될 일을 해서 한때 성공했지만, 결국 파멸의 길로 돌아서게 된다라는 단순한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 이런 도식 사이사이에 있는 많은 은유들, 표현들, 등장인물들의 갈등 등을 쉽게 넘어가게 된다.

 

이때는 작가가 제시한 읽기 방법을 적용할 필요가 있다. 이미 줄거리는 다 안다. 결말도 안다. 이것은 이 작품을 끝까지 읽지 않아도 이미 '파우스트 이야기'에 내재되어 있는 결론이다. 그렇다면 그 결말을 내기 위해서 중간중간에 작가가 어떤 장치를 했는지 그것을 찾는 읽기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소설의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결코 쉽지 않은 방법이지만.

 

우선 이 소설은 1000쪽에 달하는 방대한 양이다. 거기다 온갖 음악 지식들이 나오고 있다. 여기에 곳곳에 숨어 있는 독일적인, 또는 유럽적인 비유, 상징들이 있다. 그것들을 꿰고 있어야만 작품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 난해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도 당연하다.

 

난해한 작품이지만 '파우스트 이야기'가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무한을 꿈꾸기에 이런 이야기가 계속 우리 곁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무한을 추구하면서 자신이 이 세계를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 이야기가 말해주고 있다.

 

이는 한계를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이 어쩌면 인간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그 한계 내에서 자신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다양한 방식들을 찾는 것이 더 행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이 소설의 주인공인 레버퀸이 대단한 작품을 냈다고는 하지만, 그는 작품을 내기 위해서 빛을 보지도 못하고, 극심한 두통 속에서 지내게 된다. 인간적인 행복은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다.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을 생각해 보라. 잠시 동안의 성공. 그러나 그 성공이 독일 국민들을 행복하게 해주었던가.

 

작품을 얻는 대가로 레버퀸이 밝은 세상을 잃고 심한 두통을 얻었듯이, 독일 국민들은 전쟁으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과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의 죽음, 그리고 다른 국가들의 원망을 사지 않았던가. 그것이 바람직한 것일까?

 

치매 상태에 빠져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는 죽음과 같은 상태에 빠진 레버퀸이 치뤄내야 할 결과는 그가 악마과 계약한 데서 비롯한 것이다.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고, 거기서 더 나아가고자 했던 결과. 그 결과는 결코 행복일 수가 없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하는 것. 결국 우리가 무리하게 추구하는 일이 사랑과 행복에서 멀어진다는 것을 레버퀸의 생애를 통해 알 수 있다.

 

길고 난해한 작품이지만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겠단 생각을 버리고 그냥 주인공의 삶을 따라가면 읽을 만하다. 그 다음에 더 생각나면 천천히 읽으면서 더 많은 이해를 추구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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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27 10: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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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 박사 1 - 한 친구가 이야기하는 독일 작곡가 아드리안 레버퀸의 생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4
토마스 만 지음, 임홍배.박병덕 옮김 / 민음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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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 악마와 거래를 한 사람. 악마의 도움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지만 자신의 영혼을 악마에게 줄 수밖에 없는 사람. 결국 악마와 하는 거래란 자신의 영혼을 잃는 행위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영혼을 잃더라도 불멸의 작품을 얻을 수 있다면? 이 때는 판단을 쉽게 할 수 없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지만 무한을 꿈꾸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비록 자신의 육체가 영원하지는 못하더라도 자신의 이름만은, 또는 자신의 무엇인가만은 영원하길 바란다.

 

그럴 때 영혼마저도 팔 수 있단 생각을 한다. 물론 보통사람들은 절대로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않는 것이 아니고 못한다. 영혼을 팔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이미 비범한 사람이다. 이 사람들은 악마와 거래를 하기 전에도 이미 다른 사람보다는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다. 주인공 아드리안 역시 남들과 다른 능력을 지니고 있다.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지만, 그 능력은 인간의 영역에서 존재한다. 이것은 인간을 초월할 수가 없다는 한계를 지닌다. 이 한계는 절망을 부르고, 절망은 결국 악마를 불러내게 된다. 인간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능력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이 악마를 불러내고, 악마와 계약을 하는 것이다.

 

세속적인 인간다운 삶을 죽이는 대신 영원한 그 무엇을 얻어내기 위해서. '파우스트'란 이름을 보면 그런 존재를 떠올리게 된다. 서양에서 '파우스트'가 악마와 계약을 한 존재로 널리 알려져 있다고 하는데, 우리는 '파우스트'하면 괴테가 쓴 '파우스트'를 떠올린다.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더불어.

 

이 소설은 괴테 소설과는 다르게 한 예술가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작은 제목이 '한 친구가 이야기하는 독일 작곡가 아드리안 레버퀸의 생애'다. 아드리안 레버퀸이라는 사람이 뛰어난 음악을 남기고 죽었는데, 그 과정을 전기문이라는 형식으로 어린시절부터 함께 지냈던 친구가 쓴다는 형식으로 써내려간 소설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줄곧 친구인 '나'가 이끌어가는데, 아드리안의 천재성과 그런 그가 어떻게 성장해 가는지를 친구의 시선으로 서술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1권 마지막 부분에 즉 이 소설에서 구분한 장으로 치면 '25'에서 아드리안의 목소리가 직접 나온다.

 

그가 쓴 글을 인용하는 형식으로 아드리안의 작품 세계에 대해서 드디어 설명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니 1권은 그냥 전기적인 형식을 띤 소설로,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 파우스트와 관련이 되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읽는데, 드디어 25에 가면 아, 이래서 파우스트와 관련이 되는구나 하게 된다.

 

괴테는 메피스토펠레스를 불러냈다면, 토마스 만은 사마엘을 불러낸다. 사마엘은 '죽음의 독을 선사하는 천사'라는 뜻이야. (442-443쪽)라고 하니, 결국 인간에게 인간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능력을 주지만, 그를 인간의 세계에 머물게 하지 않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주인공인 아드리안에게 제시하는 조건은 그래서 사랑을 포기하라는 것이다.

 

내가 내세운 조건은 명확하고 공정했어. 지옥의 당연한 질투에 의해 정해진 조건이지. 사랑이라는 게 따뜻한 인간미를 지닌 것인 이상 자넨 사랑을 해선 안 돼. 자네의 삶은 냉정해야 하니까. 그래서 자넨 누구도 사랑해선 안 돼. (483쪽)

 

메피스토펠레스는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상태라고 말하는 순간 그 영혼을 가지겠다고 했는데, 사마엘은 사랑을 하면 안 된다고 한다. 그렇다. 사랑을 한다는 것은 인간의 세계에 머무른다는 것이니... 결국 괴테의 파우스트를 구원하는 것은 사랑인데... 그러니 후대에 나온 작품에서 사랑은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제한 조건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사랑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이 경멸하는 병에 걸려야 한다. 아드리안이 에스메랄다라는 사람을 찾아가 잠을 자고 매독에 걸리는 일. 그 일부터 악마와 계약이 성립하기 시작한다. 왜 그런 병일까? 사마엘은 말한다.

 

사람들에게 내보이기를 꺼려 하는 추잡하고 은밀한 병이야말로 세상과 평범한 삶에 비판적으로 맞설 수 있게 해 주고, 시민적 질서에 아이러니의 정신으로 반항하게 하며, 자유로운 정신과 책과 사색에서 피난처를 찾게 하지. (451쪽)

 

예술가는 범범자와 광인의 형제야. 범범자와 미치광이의 생태를 이해하지 못하고서 일찍이 그럴싸한 예술 작품이 나온 적이 있다고 생각하나? (459쪽)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힘을 증대시켜 주는 비(非)진리는 불모성의 어떤 도덕적 진리보다 낫다는 거야. 천재성을 발휘하게 하는 창조적인 병, 모든 장애를 당당히 뛰어넘어 대담한 도취 상태서 종횡무진 활약하는 이 병이야말로 좀스럽게 꼼지락거리는 건강보다 백 배 천 배 더 멋진 인생을 보장한다 이 말이야. 병적인 것에서는 병적인 것밖에 나올 수 없다는 말은 정말 멍청한 소리지.  ... 생의 활력이라는 원칙을 기준으로 보면 병과 건강의 구별은 무의미해. 건강을 앞세우는 족속들은 병든 덕분에 독창성을 얻은 병적인 천재의 작품 앞에서 맥을 못 추지. 그런 무리들은 오히려 병적인 천재의 작품에 감탄하고, 찬양하고, 높이 받들고, 받아들이고 변화시켜서 문화유산으로 전승하지. (471쪽)

 

이제 2권에서 아드리안은 보통 사람들이 상상할 수도 없는 작품을 창작할 것이다. 마치 우리나라 근대 소설가인 김동인이 '광염소나타'라는 작품에서 비정상적인 상태에서만 명곡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주인공처럼. 하지만 그 순간은 영원하지 않을 것이다. 악마와 한 계약은 끝이 있다.

 

자네는 우리에게서 시간을 얻었어. 독창적인 시간, 고귀한 시간을. 우리는 이십사 년이라는 시간을 자네한테 전적으로 제공한 거야. 자네가 목적지에 도달하는 시간인 셈이지. 이 시간이 만료되면, 물론 그게 언제가 될지는 예측할 수 없고, 따라서 시간은 곧 영원이라 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자네를 데려가겠네. (481쪽)

 

이런 계약으로 인해 이 소설의 서술자는 60세가 된 때 먼저 세상을 떠난 아드리안의 이야기를 글로 쓴다. 그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알려줄 필요가 있다고.

 

어떻게 다음 내용이 펼쳐지는지는 2권으로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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