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곡 - 연옥편 - 단테 알리기에리의 코메디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51
단테 알리기에리 지음, 박상진 옮김, 윌리엄 블레이크 그림 / 민음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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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을 거쳐 이제는 '연옥'에 도달한다. 여전히 길잡이는 베르길리우스다. 그는 연옥까지는 함께 할 수 있다. 다만 천국에는 함께 갈 수 없다. 아직 그는 천국에 이르를 수 없기 때문이다.

 

연옥의 입구, 지옥의 비탈에서 통과에 그곳에 도착한 그들은 입구를 지키는 존재를 만나게 된다. 연옥에도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것.

 

다시 지옥에 떨어지느냐 아니면 연옥에서 일정한 기간을 거쳐 천국에 이르느냐는 입구에서부터 시험된다. 단테는 사후 세계를 두루 볼 수 있는 특혜를 지녔기에 연옥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럼에도 그의 이마에 p자를 일곱 개 새기게 된다.

 

이는 인간이 저지른 죄악이라고 하는데...p는 이탈리아어로 '죄'  의미하는 'peccato'의 첫글자로서, 연옥의 일곱 비탈에서 씻어야 하는 오만, 시기, 분노, 태만, 인색, 낭비, 탐식, 애욕의 죄를 가리킨다 (316-317쪽 옮긴이 주에서 - 죄는 일곱이 아니라 여덟이다. '탐식'에 빠져 있던 사람들과 '낭비'를 저지른 사람이 함께 있는 장면이 있다) 고 한다.

 

즉 연옥에서는 지옥에 떨어질 만한 죄는 아니지만 살아가면서 우리가 통상 저지르게 되는 일들에 대해서 참회를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연옥은 곧 현실세계다. 현실세계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천국이냐 지옥이냐가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의 삶이 어떻게 녹록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러니 연옥편에서 천국에 가는 길은 가파른 비탈로 표현되어 있다.

 

또 각자의 죄에 따라서 짐을 지고 그 비탈을 올라가야 하는 것이다. 살아 있는 육신으로 연옥을 통과해 천국으로 가는 단테도 처음에는 힘들어 한다. 길잡이인 베르길리우스조차도 길을 몰라 물어봐야 할 지경.

 

현실의 삶은 이렇게 힘들다. 또 한 비탈을 올랐다고 끝나지 않는다. 이러한 비탈이 일곱 개나 있다. 하나하나 다 극복해야만 천국에 도달할 수 있다.

 

삶에서 순간 방심하거나 포기하거나 하면 곧장 지옥에 떨어지지 않을지라도 한참을 더 여기서 고통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연옥에는 특이한 점이 하나 있다. 자기 행동으로 인해 한참을 연옥에 머물러야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해주는 진실한 기도에 의해 기간을 단축할 수 있다는 것.

 

사람은 홀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진실한 관계를 맺으며 사는 사람이 얼마나 축복받은 존재인가를, 그래서 진실한 관계를 맺어야 하는 노력을 해야 함을 연옥편에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단테는 올라갈수록 이마에 새겨진 p자가 하나 하나 줄어들어가게 되고 비탈을 오르는데 덜 힘이 들게 된다. 그만큼 하나하나 욕망을 극복해갔다는 얘기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다. 처음에 참는 것이 힘들다. 무언가를 할 때 첫걸음을 내딛고 그것에 성공하기까지가 힘들지, 그 다음부터는 조금씩 수월해지기 시작한다.

 

작심삼일(作心三日)는 말, 결심이 사흘을 넘기지 못한다는 말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삼일을 넘기기가 어렵지 한번 삼일을 넘기면 그 다음에는 좀더 쉽게 결심을 유지할 수 있단 말로 받아들일 수 있다.

 

어떤 결심을 실행하는데 첫비탈, 첫고비가 바로 삼일이라는 말로 볼 수 있는데, 이 비탈을 넘으면 좀더 가벼워진 몸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완전히 올랐다고 할 수 없다. 여전히 높고 가파른 비탈이 눈 앞에 펼쳐지니 말이다. 하지만 한번 성공하면 그 다음에는 자신감이 생긴다. 더 수월하게 실행할 수 있다.

 

우리와 비교해 생각해 보니 p자가 일곱인 것은 우리 전통에서 죽으면 사십구재를 지내는 것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일곱단계에 다시 7을 곱하면 49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한 업보에다가 주변 사람들의 기도까지 합쳐져 어디로 갈 것인지 결정하는 때, 49일... 바로 연옥이 우리에게는 49재에 해당하지 않을까...

 

천국이냐 지옥이냐 아니면 계속 연옥이냐 하는 결정을 받게 되는 날 49일째... 그것을 49재라고 한다면 단테에게는 p자를 지워가는 비탈들 일곱이 거기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이 비탈 오르기를 포기하면 연옥에 계속 머무르거나 아니면 지옥에 떨어질 수 있으니 말이다.

 

배경지식이 적어서 이 작품을 깊게 이해하기는 힘들다. 너무도 많이 나오는 서양 문화 전통과 서양 사람들에 대한 지식이 적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주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이 작품을 깊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로마 신화, 성서, 이탈리아 역사와 인물, 기독교 역사 등등을 알아야만 한다. 괴테가 쓴 '파우스트'을 읽을 때 지녀야 할 배경지식과 비슷하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이 작품을 읽기 위해서는 너무도 많은 공부를 해야 하겠지만, 작품으로 읽는 독자 입장에서는, 그렇게까지 할 수는 없고... 그냥 전체적인 틀을 따라가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왜 단테가 이 작품을 썼는지, 그것은 계속 말하지만 지금-여기에서 잘 살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어떤 사람이 연옥에서 헤매고 있는지,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하기 위해서 이 작품을 썼다고 보면, 그 점을 파악하면 실천한다면 독자로서 할 만큼 했다고 할 수 있다.

 

이제는 천국으로 간다. 연옥편 뒤부터 드디어 베아트리체가 나왔다. 베르길리우스와 교대해 단테를 이끌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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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10-17 22: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대학 들어가기전에 <연옥>까지 읽고 아직 <천국>은 못 읽었는데...읽으려면 다시 읽어야할듯 하네요! 베아트리체가 넘 좋아서 짝사랑하는 애를 ‘베아트리체’라 불렀답니다 ㅋㅋ

2018-10-18 08: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알벨루치 2018-10-18 08:19   좋아요 0 | URL
그래서 고전인가 봅니다 ^^
 
신곡 - 지옥편 - 단테 알리기에리의 코메디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50
단테 알리기에리 지음, 박상진 옮김, 윌리엄 블레이크 그림 / 민음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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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중의 고전이라 불리는 "신곡"을 읽는다. 대충 줄거리는 아는, 그렇지만 제대로 읽은 적은 한 번도 없는 그런 작품.

 

단테와 베아트리체라는 이름으로만 기억하는 작품이다. 이제 어느 정도 세월이 흘렀고, 이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기로 한다.

 

고전에 대한 갈망이라기보다는 요즘 세상이 과연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할까 하는 생각. 너무도 많은 종교들이 있음에도 왜 세상은 갈등으로 넘쳐날까 하는 생각에...

 

중세시대 종교관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 작품을 읽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고나 할까? 스웨덴의 스베덴보리가 쓴 "천국과 지옥"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하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단테 작품은 상상력의 소산이라고 다들 인정하고 있으니, 별 논란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당시 사람들의 생각이 어느 정도 들어가 있다고 생각하고. 먼저 지옥편을 읽는다. 지옥편을 읽는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지옥에서부터 연옥을 거쳐 천국에 올라가면 상승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단테가 이런 순으로 책을 썼기(?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순으로 출판이 되었으니 그렇게 생각한다) 때문이다.

 

지옥... 사람이라면 누구도 가고 싶어하지 않는 곳일 것이다. 사후 세계가 있다고 믿는다면 누구나 천국에 가고 싶어하겠지.

 

종교들은 대부분 사후 세계를 인정하고, 사후 세계가 지금 살고 있는 기간보다 훨씬 더 긴 세월일 거라고 말하고 있으니, 그렇게 오랫동안 지내야 할 세계에서 불행하고 지내고 싶은 사람은 없으리라.

 

지옥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것은 짧은 이 현세의 삶에서 제대로 살아야 죽어서 긴 세월 동안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게 하기 위해서다. 거꾸로 이야기하면 현세에서 잘 살라고 지옥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결국 지옥이야기는 현실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지금 권세가 있다고, 돈이 있다고, 명예가 있다고, 사랑을 받고 있다고, 죽어서도 그럴까라는 질문을 하게 하는 것이다.

 

단테는 베르길리우스의 도움을 받아 지옥을 여행한다. 베르길리우스 역시 천국에 있지 않다. 그는 예수가 태어나기 전 사람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태어나기 전 사람들, 기독교를 믿고 싶어도 존재하지 않았기에 믿을 수 없었던 사람들. 이 사람들도 지옥에 있다.

 

물론 가장 낮은 단계의 지옥이고 이들은 천국으로 올라갈 수 있는 기회도 가질 수 있다. 이게 중세 시대 사람들이 지닌 인식이다. 그리스도가 나오기 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 그렇다고 이들이 착하게 살았으면 천국에 갔다고 말을 할 수는 없다.

 

그렇게 말하면 기독교를 믿지 않아도 착하게 살면 천국에 갈 수 있기에 기독교 신앙의 근간을 흔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지옥에 영원히 떨어져 있다고 할 수도 없다. 이들은 그리스도 존재 자체를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니 타협한 부분이 바로 지옥의 첫번째 단계에 있다는 것.

 

이미 그 전에 죽었기에 지옥에 있지만 이들은 이 지옥에 영원히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 천국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것.

 

반대로 교황이나 추기경, 수도사, 왕들은 어떤가? 비리, 배신, 음모 등을 일삼았다면 이들이라고 해도 지옥에 있을 수밖에 없다.

 

 

1300년대 시작. 단테가 살던 시대. 이미 그 시대에 신앙의 힘은 많이 약해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작품으로 교황이나 추기경, 수도사들이 지옥에 있다고 이야기할 정도가 되었으니 말이다.

 

그냥 이 직위에 있다고 해서 천국에 가는 것은 아니라는 서술, 이것은 기독교인들에게 하느님을 믿는 순간 천국에 간다는 말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렇다. 천국에 가는 것은 믿음을 선언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을 실천하는 데 있는 것이다.

 

진정한 종교인은 말로 존재하지 않고 행동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단테가 지옥편에서 보여주는 종교관은 바로 이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치인들 중에서도 배신을 일삼은 사람, 아첨만 한 사람 등은 지옥에 있다. 당연한 일이다. 말로 사람들을 현혹시킨 정치인들, 신곡 - 지옥편을 읽을 일이다.

 

단테가 이탈리아 사람이라는 점에서 이 지옥편에서는 우리 예상을 벗어난 사람들이 나온다. 바로 그리스 영웅들이다. 특히 트로이를 멸망시킨 영웅들.

로마는 트로이에서 살아남은 아이네이아스가 세웠다고 되어 있으니, 트로이를 멸망시킨 사람들을 이탈리아 사람인 단테가 천국에 보내기는 좀 그랬나 보다.

 

이렇듯 지옥편에는 다양한 종류의 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나온다. 단테는 베르길리우스의 안내를 받아 지옥의 끝까지 간다. 흔히 우리는 지옥을 9단계로 나누는데... 밑으로 갈수록 더 큰 죄를 저지른 인간들이 가는 곳이다. 벌도 더 가혹하고.

 

그런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지옥편은 그 점을 생각하게 만든다. 종교들이 아무리 많아도, 천국을 약속해도 정당한 삶을 살지 않으면 천국에 가지 않고 여기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래, 단테의 지옥편을 읽는 이유는 지금-여기에서의 삶을 잘 살기 위해서다. 굳이 미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지금-여기에서 잘 살면 행복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옥에 가지 않는 것은 그것에 따라오는 보상이라고 해도 좋고...

 

서사시라고 하기에는 그렇고, 극시라고 해야 할 작품인데... 읽기에는 편하다. 그냥 시를 읽는 기분으로 주욱 읽어나가면 되기 때문이다.

 

다만, 엄청나게 많은 인물과 사건들이 자세한 설명없이 툭툭 나오기 때문에 전체적인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기는 힘들다.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존재들과 기독교 관련자들과 이탈리아 사람들에 대해서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슨 상관이랴? 이들을 몰라도 왜 이들이 지옥에 와 있는지는 유추할 수 있으니... 그럼 됐다.

 

책 뒷부분에 번역자가 주를 통해 해설을 달아놓아서 주를 찾아 읽으면 많은 인물이나 사건에 대해서 알게 되니... 그리 걱정하지 않고 읽어도 될 작품이다. 이제 연옥, 천국으로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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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6 09: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0-16 1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트] 캐치-22 - 전2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7
조지프 헬러 지음, 안정효 옮김 / 민음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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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제 2차 세계대전이다. 장소는 물론 작가가 창조한 공간이겠지만, 이탈리아 전선이라고 보면 된다.

 

주인공들은 공군 장교들이고, 그 중에서 폭격을 담당한 요사리안이 소설을 전체적으로 이끌고 있다. 이들은 전쟁에 참전하고 있지만, 빨리 귀국하고 싶어한다. 이미 전쟁의 승패는 결정이 된 상황이고, 이들에게 한 번의 출격은 목숨을 담보로 하기 때문이다.

 

30회의 출격을 마치면 귀국시켜 준다는 명령, 그러나 이런 명령은 지켜지지 않는다. 처음이 30회의 출격은 아니었다. 적은 출격횟수에서 점차 출격횟수는 계속 늘어가기만 한다.

 

전쟁에서 공을 세우려는 지휘관들의 욕심이 출격횟수를 계속 증가시키는 것이다. 이 출격횟수는 소설 말미에 가면 70회로 늘어난다.

 

30회라고 해도 많은데, 70회라면 어마어마한 횟수다. 한 번 출격할 때마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하는 공군들에게 70번이나 자신의 목숨을 맡기는 일은 견디기 힘든 일이다.

 

그럼에도 국가라는 이름으로 공군에게 강요한다. 조종사들만이 아니라 항행사, 그리고 폭격수까지, 이들은 모두 국가를 위해서 출격을 해야 한다.

 

그런데, 이 소설을 읽다보면 도대체 적군이 누구인가 생각하게 된다. 2차 세계대전에 미국의 적군은 독일군이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는 독일군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모두 공군 기지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간혹 공습 장면이 나오지만 이 공습 장면에서도 독일군의 모습이 묘사되지 않고 비행기 안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 묘사되어 있다.

 

흔히 긴박하고 긴장감 넘치며 장엄한 비행기 안 모습을 상상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그렇지 않다.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 치는 요사리안의 모습이 잘 드러나고 있을 뿐이다.

 

그는 공습에도 목숨을 걸지 않는다. 그의 특기는 어떻게 하면 대공포가 없는 곳으로 도망치나 하는 것이다. 자신의 목숨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의무를 소홀히 하지는 않는다. 그것을 소홀히 했다가는 자기 목숨도 위태롭기 때문이다.

 

군대에서 우정을 쌓았던 친구들이 하나둘 죽어나간다. 이미 고국으로 돌아가 후방에 있어야 할 사람들이 지휘관이 터무니없이 증가시키는 출격 횟수 때문에 공습에 나섰다가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적군은 이미 독일군이 아니라 점차 출격횟수를 늘리는 지휘관들이다. 이 지휘관들에게 반항하게 된다. 하지만 그런 반항은 전쟁 상황에서는 통할 수가 없다.

 

그렇게 되면 미치거나 죽거나, 전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이것뿐이다. 하지만 이 마저도 쉽지 않다. 병원에서만 지내길 원하는 요사리안이지만 그는 미쳤다는 판정도 받지 못한다. '캐치-22'라는 이상한 규정...

 

실제 존재하지 않는 규정이지만 이 규정은 모든 군인들을 옭아매고 있다. 이 규정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적은 이제 독일군이 아니다. 이 '캐치-22'를 적용시키는 아군 지휘관들이다. 이들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

 

수많은 군인들이 죽어나가고... 그럼에도 비극이라기보다는 무언가 웃음을 유발하는 이 소설은, 상황을 삐딱하게 표현하고 있는 작가의 서술 때문에 전쟁을 비판적으로 보게 된다.

 

전쟁에서 이득을 얻는 사람은 누구인가? 사회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은 국가를 위해서 전쟁을 한다고 하지만, 정작 그들은 전쟁으로 죽어가거나 쫓겨가거나 길거리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직접 전쟁에 참여하는 군인들도 마찬가지다. 이들 역시 제정신을 가질 수가 없다. 이 소설에 이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는 것은 바로 전쟁이 우리에게 온전한 정신을 가질 수 없게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전쟁을 배경으로 전쟁에 반대하는 소설이 바로 이 소설이다. 전쟁이 얼마나 인간을 파괴하는지, 그리고 전쟁으로 인해 이득을 보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게 해준다.

 

결국 결말부분에서 요사리안은 탈영을 시도한다. 그러면서 소설이 끝난다. 오래 전에 쓰인 소설이지만 전쟁이 일으키는 끔찍한 일들을 이렇게 비꼬면서 표현한 소설은 흔치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란 말이 있듯이 전쟁에서 '캐치-22'로 대변되는 지휘관의 자의적인 명령이 사람들을 얼마나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갈 수 있는지를 이 소설을 통해 알 수 있다.

 

지금 우리는 이런 전쟁의 위험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을까? 이 소설을 읽으며 전쟁은 절대로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좋은 반전(反戰) 소설이다. 전쟁의 모습을 풍자하고 있는 소설이라고 보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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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화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6
치누아 아체베 지음, 이소영 옮김 / 민음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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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누아 아체베가 쓴 소설이다. 아프리카 나이지리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소설. 아프리카 소설이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우리처럼 근대화가 될 때 고난을 겪는 사실을 소설로 표현한 작품은 어떤 동질감을 느끼게 한다.

 

이 소설 역시 마찬가지다. 영국 지배에 있는 우무아로족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우무아로족이라고 하지만 이들은 하나의 부족이 아니다. 여러 부족이 하나의 신을 섬기면서 뭉쳐 있다고 해야 한다.

 

즉, 서로 전쟁을 하면서 죽이던 여러 종족이 울루신을 정점으로 전쟁을 그치게 되고 이들을 통합하는 대사제로 에제울루를 두게 된다. 에제울루에 의해 이들 종족들은 서로 평화를 지키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만 지속되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여기에 백인이 간섭을 하게 된다. 영국이 아프리카를 식민지 삼아서 정책을 펼치는데, 식민정책에는 늘 종교도 따라오니 기독교가 이들 전통적인 관습과 대결하게 되고, 또한 영국 정책이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변해야 한다. 분명 시대는 변해가고 있다. 그렇다면 이 변화를 누가 이끌어야 하는가? 이 종족이 별 갈등없이 변화를 추구하려면 에제울루의 역할이 중요하다.

 

중요한 위치에 있고, 또 대사제라는 직함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통합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반목하고 있는 부족들이 있기도 하고...

 

그런데 에제울루는 이런 변화를 이끌 능력이 없다. 그는 과거에 매여 있다. 울루신을 중심으로 그 자신의 영향력을 확인하려고만 한다.

 

백인들이 그들의 삶에 깊게 들어왔음에도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한다. 그가 얼마나 시대의 변화에 무지한지를 왼손으로 글씨를 쓰는 백인에 대한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백인 중에 단지 왼손잡이가 왼손으로 글을 쓸 뿐인데.. 그는 왼손으로 글씨를 쓰는 것을 무슨 특별한 능력으로 여기게 된다.

 

기독교 또는 백인의 생각을 알고 대처하기 위해 자기 아들을 교회에 보내기도 하지만 그는 제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 아들에게 왼손으로 글씨를 쓸 정도로 잘 배워두라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문화의 차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지도자의 모습을 보게 된다.

 

마찬가지로 그는 변화하는 시대에 과거에 얽매어 추수할 시기가 지나도 사람들에게 추수를 하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마을이 굶주림으로 시달리게 된다. 그냥 율법에만 얽매인 모습이다. 분명 추수를 할 수도 있을텐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 마을 원로들이 와서 융통성 있는 방법을 제시하지만 그는 거절한다. 그것이 개인적인 원한이든 뭐든 그는 과거에만 매여 있다. 그러니 마을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수가 없다. 자신의 가족에게도 고통을 주게 되고.

 

결국 아들이 죽고, 그 죽음으로 인해 그는 정신을 놓게 된다. 정신을 놓게 되면서 소설은 끝나는데, 소설 끝부분에 사람들이 공물을 교회에 바치면서 추수를 하는 것으로 끝난다.

 

과거에 매인 지도자의 고집이 결국 그들의 삶을 서양의 삶에, 백인의 삶 속으로 집어넣고 만 것이다.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식민지로 전락했던 우리의 상황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기도 한데...  과거에 통합을 이루는데 큰 역할을 했던 에제울루가 시대가 변하면서 오히려 그들을 식민이라는 구렁텅이로 몰아갈 수도 있음을, 그래서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하는 지도자가 얼마나 해악을 끼칠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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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메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0
존 바스 지음, 이운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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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고 환상적인, 신화에 버금가는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기존에 알고 있는 신화에서 얼마나 멀어질 수 있을까?

 

이미 알고 있는 내용에서 벗어나려면 어떤 형식을 취해야 할까?

 

'키메라'  양, 사자, 뱀의 모습을 모두 지니고 있는 신화속 괴물. 벨레로폰에게 퇴치된다고 신화에는 나와 있는데... 이런 키메라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어쩌면 문학 아닐까? 작가는 이런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신화를 빌려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제목은 "키메라"인데, 이 소설집에는 '두냐자디아드, 페르세이드, 벨레로포니아드'라는 세 소설이 있다. 제목에 키메라는 나오지 않는다. 키메라가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괴물이라면 이 소설 역시 세 신화로 이어져 있다.

 

그리고 키메라처럼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쉽게 접근하려고 해도 불을 내뿜어 사람들을 물리치는 키메라처럼 소설은 신화라고 생각하는 것을 거부한다. 신화처럼 단순 명쾌한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읽기 시작했다가 낭패를 당하게 만든다.

 

그렇지만 키메라는 하늘 위에서 화살을 쏘아 물리칠 수 있다. 이 작품 역시 너무 가까이 들어가서는 숲 속에서 길을 잃듯이, 나무들은 보지만 숲은 보지 못하듯이 헤맬 수밖에 없다.

 

멀리서 봐야 한다. 신화의 자리에 서서 이 소설을 읽으려고 한다. 그래도 희미하긴 하지만... 숲 속에서 그냥 헤매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든다.

 

'두냐자디아드'는 아라비안나이트를 차용한 작품이다. 세헤라자드가 여인들을 구하기 위해 이야기로 왕을 변화시키는 내용.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천일야화다. 하지만 소설은 세헤라자드가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 동생인 두냐자데가 서술자이다.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들은 여성을 죽인 남성을 처벌하려고 한다.

 

여성주의라고 할 수도 있는 이 소설은 하지만 남성의 관용으로 자신들의 행위가 계속 이어져 왔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실제로 일어난 행위와 그 행위 이면에 숨어 있는 의미의 차이. 그 차이를 찾아내야 하는 이야기꾼.

 

소설은 그래서 겉으로 드러난 것만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겉보다는 숨어 있는 의미를 찾아야 함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숨어 있는 의미를 찾는다는 것,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이야기꾼인 세헤라자데를 서술자로 삼지 않고 동생인 두냐자데를 서술자로 삼은 까닭은 세헤라자데의 이야기에 숨어 있는 의미를 찾으라는 것이다. 그렇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데...

 

이미 아는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기법, 이 소설은 첫번째 소설에서 그 점을 보여주고 있다.

 

두번째 소설과 세번째 소설은 이야기 속 이야기로 계속 관계를 맺는다. 서로가 연결되어 있지만, 실제로 영웅과 영웅이 되고자 하는 인물이 행하는 차이가 서술되고 있다.

 

영웅인 페르세우는 40이 되어 이미 늙어버린 자신에게 환멸을 갖는다. 신화 속에서 머무를 때는 영웅이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그런 사람이 자신의 영웅성을 찾아가는, 그러나 결코 그것이 완결되지 못하는 과정을 '페르세이드'에서 펼쳐보이고 있다면, '벨레로포니아드'에서는 페르세우스와 다른 길을 가는 영웅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영웅이 되고 싶은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벨레로폰 이야기를 비틀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야기 속 영웅을 추종하는 사람이 진정한 영웅으로 살아가기가 얼마나 힘든지, 어쩌면 인간으로서 살아가려고 하는 행동 속에서 영웅이 나오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이미 알고 있는 신화를 이리 비틀고 저리 비틀어 다양한 이야기가 중첩되게 만들고 있는 작품이다. 여전히 숲을 발견하지는 못하고, 나무 사이에서 헤매고 있지만, 그래도 읽는 재미는 있다. 더 고민하면서 생각하면서 다시 읽는다면 숲의 모습을 어렴풋이나마 볼 수 있을런지...

 

이 소설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 보르헤스의 소설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읽은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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