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팔꽃
강병철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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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허구다. 소설은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소설은 진실을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소설을 읽으며 감동을 받는다. 소설을 읽을 때 주인공에게 먼저 눈길이 가고 마음이 간다. 주인공의 삶에 자신의 삶을 대입해 보기도 한다. 감정이입은 물론이다. 그래서 주인공들이 잘살게 되기를 바란다. 소설의 결말이 행복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또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꿈들을 소설 속에서나마 이루고 싶어하기도 한다. 그렇게 우리는 소설 속에서 자신의 다른 모습을 보기도 하고, 자신의 희망을 실현하려고도 한다. 소설이라는 문학 갈래가 지금까지도 우리 곁에 계속 남아 있는 이유가 이것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고 현실이 소설과 같이 전개될까? 그렇지 않다. 우리는 가끔 다른 사람에게 그건 소설에서나 가능한 일이야, 이게 소설인 줄 아니? 와 같은 말을 한다. 그만큼 소설과 현실은 같지 않음을 우리 모두 인식하고 있다.

 

현실과 다름에도 소설은 감동을 준다. 소설을 읽으면서 자신이 살아온 시대를 반추하기도 하고, 자신의 삶을 성찰하기도 한다. 적어도 소설은 반면교사 역할을 한다.

 

이 소설집 역시 그렇다. 한국 현대사에서 민중들이 겪어온 사건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가고 있다. 주요 배경은 충청도다. 물론 충청도에서 끝나지 않는다. 학병 또는 징용으로 끌려가면 외국까지 나가니 말이다. 그럼에도 주인공들은 충청도 사람들이다.

 

충청도 하면 제일 먼저 말이 느리다는 것이 떠오른다. 느릿느릿한 말투. 하지만 소설은 빠르게 전개된다. 문장도 길지 않다. 그리고 이 사건에서 저 사건으로, 이 인물에서 저 인물로 빠르게 전환하고 있다.

 

충청도와 반대되는 문장 서술이다. 또 소설에서는 소위 사회 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을 다루지 않는다. 학교를 다녀도 고등보통학교 정도에서 그친다. 그렇다면 주인공들은 민중이라고 할 수 있다. 전면에 나서서 자기 주장을 펼치기 보다는 제 자리에서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던 사람들.

 

총 세 편의 소설이 묶여 있는데, 시대 순으로 소설이 나열되어 있다. 일제시대, 1960년데, 그리고 정황상 2000년대. (나팔꽃, 한머리, 숨소리)

 

고등보통학교 학생으로서 겪는 일, 일제 말에 충량한 황국신민이 되라는 교육 속에서 그래도 졸업장을 받기 위해 아등바등 대는 학생들. 그럼에도 민족감정은 남아 있어서 조선인을 비하하는 일본 학생을 폭행하기도 하는 학생들. 독립운동 전면에 나서지는 않지만 친일을 하지도 않는.

 

주인공은 이런 학교 생활을 거쳐 학병으로 전투에 참여한다. 소련군과의 전투. 탈출. 조선으로 들어와 해방이 된 조국을 맞이하게 되는 그들.

 

얼핏 행복한 결말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나팔꽃이란 제목을 달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나팔꽃은 해가 있을 때만 피는 꽃 아닌가. 소설의 끝부분에 이런 표현이 나온다.

 

숨어 있다가 일제히 고개를 드러낸 나팔꽃들이 한꺼번에 댕강댕강 떨어질 것 같은 불길함도 가시지 않는다. 완전히 끝난 것은 단 한 가지도 없었다. (100-101쪽)

 

이렇게 해방이 되어서도 민중들은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한다. 좌우 대립을 거쳐 전쟁을 겪게 된다. 두번째 소설에서는 전쟁이 끝나고 1960년대 박정희 독재가 막 시작될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산업화가 되어가는 그 때 충청도 시골 마을에서 벌어지는 일. 소소한 일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소설에서는 한 마을 사람들 이야기가 펼쳐진다. 어린이의 눈으로 본 어른들의 세계이기도 하지만, 이 속에서 알려지지 않았던 근대사의 이면이 잘 드러나고 있다.

 

낙관도 비관도 하지 않고 작가는 소설 속에서 산업화되어 가는 농촌 마을의 모습을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다. 농사를 짓는 사람이 몰락할 수밖에 없는 과정, 딸이라고 해서 차별을 받는 모습, 아들을 낳아야만 한다는 가부장적 사고방식... 여기에 간간이 노근리 학살 사건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래저래 자신의 말을 잃고 사는 민중들. 여기에 그래도 말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인물이 나온다. 주인공의 누나. 하지만 이 누나가 고등학교에 진학할지는 모른다. 아마, 하지 못했으리라. 딸이라는 이유로 이중의 억압을 받아야 했던 우리 현대사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렇다고 결말을 내지 않고, 그냥 그렇게.

 

마지막 소설에서는 삼청교육대 사건이 나온다. 아니 학교 폭력 문제라고 해도 좋다. 학생들끼리 세력 다툼을 하는 모습을 서술하는 가운데 아버지 이야기가 나온다. 한때 주먹을 좀 썼다는 아버지. 이 아버지가 삼청교육대 경험을 한 것. 결국 세상이 바뀌어도 민중들은 계속 힘들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음을 세 소설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지금은 어떤가? 민주화되었다는 지금 과연 민중들의 삶은 나아졌는가? 민중들이 제 목소리를 내고 있는가? 혹 민중들의 목소리를 대변한답시고, 제 이익을 목청껏 외치는 자들이 여전히 판치고 있지는 않은가.

 

소설을 읽으며 어려운 시절을 견디어 낸 민중들의 삶을 만나며, 지금 우리 삶을, 우리 민중들의 삶을 생각하게 된다.

 

덧글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이다. 소설을 통해서 우리나라 현대사를 관통하는 사건들, 또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좋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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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잡이들의 이야기 보르헤스 전집 4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 민음사 / 199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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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 하면 환상적인 소설을 떠올리는데, 이 소설은 환상보다는 사실에 가깝다고, 그것도 라틴아메리카 현대사를 소설에 반영하고 있다.

 

읽다 보면 라틴아메리카의 현대사가 피로 얼룩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독립전쟁뿐만이 아니라, 독립을 이룬 다음에도 연방주의와 중앙집중주의로 나뉘어 또 서로 싸우고, 독재로 인해 오랜 세월 동안 고통을 받아왔음도 알 수 있다.

 

역사책을 읽지 않아도 이 소설집을 읽다보면 그러한 사실들을 알 수 있는데, 제목을 '칼잡이들의 이야기'라고 붙인 것이 이해가 된다.

 

칼잡이들은 칼을 써야 한다. 쓰지 않고 이기는 칼잡이가 진정한 고수라고 하지만, 라틴아메리카 칼잡이들은 칼을 쓴다. 소설에서 결투 장면이 많이 나오고, 칼을 통해서 상대를 죽이는 일들이 다반사다.

 

이 중에 '마가복음'이란 제목을 달고 있는 소설을 읽으면 보르헤스가 사실주의적인 소설을 쓰더라도 환상적인 요소들을 제거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글을 모르는 가족들에게 마가복음을 읽어주는데, 노아의 방주 부분과 지내고 있는 곳에 홍수가 나는 것, 그리고 그들은 십자가에서 처형된 예수가 모두를 용서해준다는 말을 듣고 대들보를 뜯어 십자가를 만들어내는 것.

 

카르카의 '유형지에서'를 떠올리게 하기도 하는 소설인데, 종교가 무엇인지,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그리고 소설을 읽으면서 결투를 하거나 사람을 죽이면서도 그것을 가지고 내기를 하는 그런 인물들을 만나면서 '칼잡이'라는 말에서 우리나라 '검사'를 떠올리기도 했다.

 

소설 속 인물들은 그야말로 불한당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에게 교양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들은 그냥 자신들이 할 일을 한다. 사람을 죽이는 것을 동물을 죽이는 것만큼 쉽게 한다. 그런 칼잡이들이다.

 

반면 우리나라 검사들은 교양인이다. 지성으로 무장한, 세속적인 칼은 쓰지 않는 엘리트 집단이다. 이들과 소설 속 인물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그런데 말이 된단 생각이 든다.

 

검사(劍士)와 검사(檢事). 한자로야 다르게 표기되지만 한글로는 같지 않나. 하는 일이 비슷하지 않나. 칼로 사람을 베는 것이나 언어라는 판결로 사람을 베는 것이나. 말이 칼이 되기도 하니, 劍士나 檢事나 사람들에게 위협적인 존재이기는 마찬가지다.

 

이들 역시 장기가 사람을 베는 것 아니겠는가. 벤다는 의미는 그 사람을 옴짝달싹 못하게 한다는 것일 테니 보르헤스가 진짜 칼잡이들을 통해서 라틴아메리카 현대사를 구현해 냈다면, 우리나라 검사들이 지내온 한국 현대사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는 않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나만의 생각이었으면 좋겠다. 검사들이 劍士들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단 생각을 한다. 이제 라틴아메리카에서는 교황도 배출했다. 아직도 혼란스러운 모습을 많이 보이고 있지만, 적어도 이 소설에 나타나는 인물들처럼 살아가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여 이상하게도 보르헤스의 이번 소설집을 읽으면서 칼잡이라는 말에서 검사를 떠올리게 되었으니, 우리나라도 과거에서 많이 벗어나 있을 테니... 독재가 판치던 우리나라에서 지식인들은 라틴아메리카 현대사, 혁명을 공부했었다.

 

그만큼 통하는 면이 있었을 것이고, 환상적인 소설로 잘 알려진 보르헤스가 그런 라틴아메리카 현대사의 어두운 면을 소설로 표현하기도 했음을 이 소설집을 통해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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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들 - 역사 테마 소설집 바다로 간 달팽이 9
강기희 외 지음 / 북멘토(도서출판)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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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들"

 

역사 테마 소설이라고 하는데, 제목이 참, 허균이 주장한 호민(豪民)도 아니고, 벌레라니. 제목과 역사가 잘 연결이 안 되었는데, 이 소설집 마지막에 실린 소설이 '벌레들'이란 제목을 갖고 있다. 뒤 설명에 의하면 '벌레들'은 '카프카의 여인'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약간 고친 것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벌레들은 카프카 소설 '변신'에 나오는 벌레를 의미한다. 그냥 벌레라는 단수가 아니라, 즉 그레고리 잠자가 아니라 그레고리 잠자인 것이다.

 

벌레 하면 떠올리는 것은 징그럽다, 우리와 다르다, 그래서 격리하거나 처치해야 한다 등등 부정적인 생각을 더 많이 하는데, 카프카 소설에서도 그렇다. 벌레가 된 잠자는 가족에게도 배척을 받고 결국 죽을 수밖에 없다.

 

밀려나는 존재, 밀려나게끔 인식되는, 남들에게 함께 있어서는 안 될 존재로 여겨지는 그런 존재가 바로 벌레다. 벌레들이라고 하면 우리 역사에서 그만큼 밀려난 존재들을 의미하지 않을까? 그런데 누가 밀려났지?

 

그레고리 잠자가 누구인가? 평생 가족을 위해서 일만 한 존재 아닌가. 노동자 아닌가. 사회에서 위를 구성하지 못하고 밑을 구성하는 하위층이라고 할 수 있는, 세상을 돌아가게 만드는 존재이지만 그만큼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 아닌가.

 

역사를 구성하고,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살아남았던 민중들이 벌레들이란 말인가? 아니면 민중들을 벌레 취급하는 소위 지배층, 기득권층이 벌레들이란 말인가. 아니 인간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가 벌레들인데, 서로를 벌레라고 경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드는 제목이다.

 

소설은 총 7편이 실려 있다. 우리 역사와 관련하여 우리들에게 비극으로 다가왔던 사건들을 주로 다루고 있다. 단지 과거의 일을 반추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관련지어 소설은 전개된다. 역사는 과거에 끝난 사건이 아니라 현재도 진행되고 있는 삶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소설의 제목만 보고는 우리나라 역사의 어느 지점과 연결 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소설을 읽어 보아야 아, 그 사건이구나 할 수 있다. 그런 사건에 대해 알지 못했다면 소설을 마음으로 느끼는데 더한 수고를 해야 한다. (한편 한편 소설이 끝나면 그 역사적 사건에 대한 설명이 실려 있다. 간략하게.. 더 알고 싶으면 수고를 더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앎에 대한 자세다)

 

이해를 통해 감상으로, 머리를 거쳐 가슴으로, 그리고 다시 발로 가는데 걸리는 시간은 너무도 길다고 고 신영복 선생은 말했다. 그러나 소설을 읽는데 머리에조차도 도달하지 못한 사람이 많다. 역사 지식에 대해서 깜깜이인 사람이 천지다. 아무리 역사 교육을 강조해도 그것은 시험용일 뿐이다.

 

역사가 우리 삶에 중요한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시험지 속에, 책 속에 갇혀 있다. 그래서 이모양 이꼴이다. 세상 돌아가는 꼴이. 역사는 역사, 현재는 현재, 그리고 도덕과 윤리는 책 속에만 있는 것. 역사에서 도대체 무엇을 배웠는지, 머리에도 닿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머리에 닿아야 그 다음에 가슴으로 가든지 말든지 할텐데...

 

이 소설을 읽으며 그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소설 속에 서술된 사건들이 여전히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이미 청산되어 더 나은 곳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있는 이 현실이 답답하기만 하다.

 

제목을 보자. 그리고 어떤 역사적 사건인지 생각해 보자.

 

'동몽군, 빼앗긴 죽음, 손님,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 돼지 아빠, 붉고 푸른 못, 벌레들'

 

알 수 있는 사건이 있는가? 없어도 좋다. 소설이 역사를 직설적으로 드러내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을 읽기 위해서도 역사 공부는 필요하다. 작품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도 그렇다.

 

동몽군... 동몽과 군이라는 말이 합쳐진 말. 동몽은 '동몽선습'이라는 책을 떠올리면 아이들이라는 (어린아이라기보다는 결혼을 하지 않은이라는 의미) 말을 의미한다고 유추할 수 있고, 군은 군대니까, 아이들로 이루어진 군대?

 

사람 대접을 받지 못했던 천민, 여인, 아이들도 동등한 인간임을 표방한 종교... 동학. 그렇다. 소설 '동몽군'은 동학혁명을 역사적 사건으로 삼고 있다. 이렇게 역사의 흐름 순으로 따라가면...

 

'빼앗긴 죽음'은 의열단원으로 일본 황궁 다리에 폭탄을 던졌으나 실패한 김지섭 열사의 이야기다. 죽음조차도 재판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빼앗길 수밖에 없었던 독립운동가의 비애. 영화 [동주]를 보면 진술서에 서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절차... 자신들을 합리화 하기 위한 그 절차에 옭아매인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 빼앗긴 죽음은 그래서 더 슬프다. 여전히 의열단 단장이었던 김원봉은 당당한 독립운동가로 훈장을 받지도 못하고 있다. 이 무슨 일이란 말인지...

 

'손님'? 혹 황석영의 '손님'을 읽은 사람은 6.25전쟁을 떠올릴 지도 모르겠다. 비슷하다. 역사적 배경이. 4.3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4.3에 대한 이야기는 직접적으로 서술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으려면 4.3에 대한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현기영의 '순이 삼촌'이나 영화 [지슬]을 보면 이 소설에서 엄마가 왜 제주도에 가려고 하지 않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소설 속 인물, 새끼 무당이라고 불리는 명희 언니의 해원 장면에서 코 끝이 찡해질 것이다.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 어찌 글로 서술할 수 있겠는가. 그 비참함을. 그 말도 안 됨을. 그런데도 그런 일이 일어났음을. 하여 소설가는 물푸레나무를 화자로 등장시킨다. 인간들이 하는 말도 안 되는 짓을 자연의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다. 너무도 비참하고 비극적인 그 장면을 차마 사람의 말로 전하지 못하기에... 그렇게... 국민보도연맹 학살 사건을 다루고 있는 소설.

 

이념이 사람이 사람을 얼마나 잔인하게 죽이게 됐는지, 그렇게 죽어가면서도 자신을 죽이라고 명령한 사람 만세를 부르는 그 비극적인 상황. 도대체 이 무슨 비극이란 말인가. 우리 역사에서 이런 비극을 겪었으면서 왜 우리는 아직도 이념의 잣대를 들이댄단 말인가.

 

사람이 먼저다라는 말은 천연덕스럽게 하면서도 자신들의 이익에 맞춰 이념의 칼을 들이대고 있는 것이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우리 현실 아니던가.

 

'돼지 아빠' 부마항쟁을 다루고 있는 소설이다. 광주민주화운동에 비해 덜 알려졌지만, 박정희 정권이 무너지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이 부마항쟁이다. 그러나 이런 부마항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을 받고 있는지, 그 고통이 지금도 지속되고 있음을, 이어서 '붉고 푸른 못'에서 박정희 아류인 전두환이 실시한 삼청교육대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이렇게 사람들 가슴에 붉고 푸른 못을 박았던 사람이 반성은커녕 오히려 더 큰소리를 치는 현실이 암담하다. 그걸 지켜보는 심정이 참 처연하다. 그런 존재를 처벌도 못하고 있는 이 현실이 더 슬프다.

 

마지막 '벌레들' 미선, 효순이 사건을 다루고 있다. 아니 미선, 효순이 사건이라기보다는 촛불 시위를 다루고 있다. 촛불 시위에 나온 사람들이 벌레들일지, 그것을 비꼬고 탄압하는 사람들이 벌레들일지... 아니면 그렇게 벌레들이라는 인식을 통해 서로가 다른 존재가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인지...

 

하지만 카프카 소설에서 벌레는 애초에 사람이었다. 가정에서 사랑받고, 인정받는 존재. 우리가 벌레 취급하는 존재들도 처음부터 그런 존재는 아니다. 그 점을 명심해야 한다.

 

하여 이 소설에서 주인공이 된 존재들은 대부분 약한 존재들이다. 사회에서 주류에 서지 못하고 비주류에 머물러 있는, 큰소리를 치기보다는 주로 당하는 그런 존재들. 하지만 그들도 그냥 '항민(恒民)'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들도 자기 목소리를 낸다. 이들은 '원민(怨民)'이 된다.

 

원민... 이 상태에 머무르면 자기들 억울함은 벗어날 수 있어도 다른 사람들의 억울함은 지속된다. 그러면 역사는 계속 반복된다. 약한 사람들은 계속 당할 수밖에 없다. 원민에 머무르지 않고 '호민(豪民)'으로 가야 한다. 그때서야 사회는 변하고, 역사는 반복되지 않는다.

 

아주 오래 전에 허균이 이미 '호민론'에서 전개한 논리다. 그 점을 이 테마 역사 소설집을 통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머리를 깨우치자. 그리고 가슴으로 보내자. 가슴에서 다시 다리로 가게 하자. 순차적으로, 또 동시적으로. 머리와 가슴을 동시에 자극하는 역사 알기, 그것이 바로 이런 역사 테마 소설을 읽는 일이다. 읽고 더 찾고 생각하고 현재를 살아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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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태엽 오렌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2
앤소니 버제스 지음, 박시영 옮김 / 민음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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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통'이란 말이 있다. 국립국어원에 있는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보면, 성장통이란 낱말 풀이가 이렇게 되어 있다.

 

1) 어린이나 청소년이 갑자기 성장하면서 생기는 통증. 주로 양쪽 무릎이나 발목, 허벅지나 정강이, 팔 따위에 생긴다. 4~10세 사이에 많이 나타나고, 1~2년이 지나면 대부분 통증이 사라진다.

2) 사물의 규모나 세력 따위가 커지면서 생기는 고통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사람, 특히 청소년들에게 쓰는 말인데, 첫번째 풀이는 육체적인 변화에 따르는 고통을 말하는 듯하고, 두번째 풀이는 사람에게라기보다는 집단이나 사물에 해당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우리가 흔히 쓰는 '성장통'에 해당하는 뜻풀이가 없다는 말이다.

 

청소년들이 겪는 성장통은 육체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인 것을 말한다고 보는 것이 좋다. 그것은 청소년기에 겪는 성장통이었다 하면 방황을 통해서 정신적으로 성숙해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런 '성장통'은 필요하다.

 

그런데, 이 소설을 읽으며 과연 어떤 성장통이 필요한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청소년기의 방황이 모두 성장통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청소년기의 일탈은 모두 성장통인가?

 

'시계태엽 오렌지'라는 제목의 뜻도 명확하지 않다. 어쩌면 청소년기에 일어나는 방황, 일탈 등이 논리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음을 보여주는지도 모른다. 제목 자체에서도 그냥 그대로 받아들여라, 여기에 어떤 이유를 붙이지 말아라는 의도가 보인다고나 할까.

 

알렉스라는 청소년이 소설의 화자이자 주인공이다. 그가 겪은 일을 독자들에게 알려주는 식으로 소설이 서술되고 있다.

 

총3부인데 1부는 알렉스 패거리가 벌이는 패악이 서술되고 있다. 그야말로 일탈이나 방황이 아닌 범죄다. 이것이 성장통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성장통과 범죄는 구분해야 한다. 성장통은 법 테두리 내에 있는 것이고, 범죄는 법 테두를 벗어난 것이다. 그럼에도 이 소설에서 알렉스의 방황, 일탈을 성장통으로 보자. 일종의 성장소설이라고 볼 수 있으니까.

 

마약에 준하는 약물에 취하는 청소년들, 거리낌없이 폭행하고, 강간하고, 약탈하는 모습이 1부에 나타난다. 도덕심이라고는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는 그런 모습들. 결국 살인까지 저지르는 알렉스. 패거리들에게도 배신당하고 감옥에 가야만 하는 지경에 이른다.

 

2부는 감옥에서의 생활이다. 국교(국립교도소를 줄여서 화자인 알렉스는 이렇게 말한다)에서 또다시 폭력을 행사하고, 새로 생긴 치료법의 대상자가 된다. 14년형을 받았지만, 이 치료를 받으면 2주만에 나갈 수 있다는. 루도비코 치료법을 받게 되는 알렉스. 이는 약물치료라고 할 수 있다.

 

폭력적인 장면이나 생각을 하면 몸에 고통을 유발하는 그런 치료법. 결국 고통을 겪지 않기 위해서 착한 행동이나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는. 이 치료를 하는 영화에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이 삽입되고, 알렉스는 이 음악을 들어도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된다.

 

우수한 치료 수료자로 두 주가 지나 사회로 나온 알렉스. 여기에 알렉스의 의지는 없었다. 그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진 것이다. 선을 행하든, 악을 행하든 어떤 선택도 할 수 없고, 그저 약물로 인한 변화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 알렉스.

 

비행청소년이었던 알렉스는 과연 선택을 했던 걸까? 그에게 선택의 여지가 그때도 없었던 것은 아닐까? 마찬가지로 교도소에서 알렉스 역시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없다.

 

선택의 권리가 없는 인간, 자유의지를 상실한 인간이다. 자, 이런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바람직한가? 이 질문에 답을 해야 한다. 지금 우리 사회도 흉악범들에게 약물치료를 하고(또는 하려고) 있지 않은가.

 

3부가 되면 사회에 나온 알렉스. 치료 효과가 신문을 통해 홍보가 되고, 알렉스는 과거 자신이 행패 부렸던 사람들에게 당한다. 당하면서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이런 약물치료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러나 그들 역시 알렉스를 이용하려고 하지, 그에게 어떤 선택권을 주지 않는다.

 

교도소에 갖다온 알렉스는 선택의 권리가 없는, 자유의지를 상실한 인간이 되어 버렸다. 인간? 그는 태엽을 감아줘야 움직이는 기계에 불과한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러니 태엽이라는 말 다음에 오렌지든, 사람이든, 원숭이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어차피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존재에 불과한 것이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온 알렉스. 자, 세월이 조금 흘렀고, 많은 경험을 했다. 그리고 다시 예전과 같은 모습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하는데, 불현듯 미래 자신의 모습이 떠오른다.

 

미래를 생각한다는 것, 이제 청소년기의 성장통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성장통에 시달리는 청소년은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현재만을 알고, 감정에 따라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소설은 알렉스가 자기 아이를 두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으로, 그런 삶을 살아가야겠다는 결심으로 끝난다.

 

지독한 성장통이구나! 우리나라 청소년들 가운데도 알렉스의 어린 시절과 같은 무시무시한 짓을 저지르기도 하는데, 이들도 이렇게 몇 년이 지나면 미래를 생각하면서 자신의 길을 바꾸게 될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가 미래를 설계하고 나아가는데, 알렉스 자신이 짓밟았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알렉스의 성장에 초점을 맞추면 이렇게 갖은 비행을 저지르더라도 결국에는 제자리로 돌아오게 된다는 쪽으로 읽기 쉽다.

 

너무 위험한 읽기다. 그들의 비행을 언젠가는 괜찮아질 거야 하면서 보아 넘겨만 줄 수는 없는 것이다. 청소년기는 '시계태엽 오렌지'와 같다면, 어떻게 태엽을 작동할지가 중요하다. 즉, 자기 의지로 행동을 조절하지 못한다면 외부의 힘으로 행동을 조절하게 해야 한다. 어쩔 수 없는 과정이라면 그때 제어할 수 있는 외부 환경이 중요한 것이다.

 

이런 쪽으로 초점을 맞추어 읽다보면 그렇다면 청소년들에게는 자유의지가 없는가라는 의문이 떠오른다. 아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자유의지가 있다. 이 자유의지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해 주되, 다른 사람들의 자유의지를 침해하지 않는 범주에 대해 인식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범죄는 자유가 아니다. 그 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

 

그러나 범죄를 저지른 청소년들을 언제까지나 범죄인 취급해서도 안 된다. 그들에게 반성과 변화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 비록, 그것이 희생자를 둔 사람에게는 너무도 힘든 일이지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알렉스가 1부에서 저지른 범죄의 희생자가 된 소설가에게서 볼 수 있다. 아내를 잃은 그가 얼마나 알렉스를 증오하고 있는지를. 아마도 이 소설이 성장소설이 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돌고 돌아 알렉스가 괴롭혔던 사람들에게 거꾸로 괴롭힘 당하는 장면이야 인과응보라 할 수 있어도 이 작가가 알렉스에게 한 행동, 그리고 그가 영원토록 겪어야 하는 고통을 생각하면, 청소년기에 했던 짓이 해서는 안 되는, 자유라는 말로 정당화될 수 없는 행동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소설의 말미에 알렉스의 말을 빌려 청소년기에 대해 말하고 있다.

 

'청춘은 가버려야만 해. 암 그렇지. 그러나 청춘이란 어떤 의미로는 짐승 같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아니, 그건 딱히 짐승이라기보다는 길거리에서 파는 쬐끄만 인형과도 같은 거야. 양철과 스프링 장치로 만들어지고 바깥에 태엽 감는 손잡이가 있어 태엽을 끼리릭 끼리릭 감았다 놓으면 걸어가는 그런 인형. 일직선으로 걸어가다가 주변의 것들에 꽝꽝 부딪히지만, 그건 어쩔 수가 없는 일이지. 청춘이라는 건 그런 쬐끄만 기계 중의 하나와 같은 거야.' (222쪽)  

 

자, 이게 청춘이라면 우리는 일직선 상을 정리해서 청춘이 부딪히지 않도록, 아니면 부딪히더라도 제자리로 올 수 있도록 정리를 할 수가 있다.

 

성장통을 피할 수 없다면, 그 성장통으로 인해 다른 사람의 자유가 없어지는, 생명이 없어지는 그런 일을 만들지 않도록 환경을 정비해야 한다. 성장하고 있는 개인에게 약물치료가 아니라, 그가 충분히 성장통을 겪을 수 있는 그런 환경을.

 

소설은 그래서 알렉스의 성장에 초점을 맞추어도 좋지만, 이런 청춘들의 성장통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환경을 만드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도 좋다.

 

알렉스와 같은 청소년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우려가 있다. 이 소설을 읽으면 기성세대들이 청소년들의 성장통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를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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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등 시민 - 엄마를 위한 페미니즘 소설 선집
모이라 데이비 엮음, 김하현 옮김 / 시대의창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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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등 시민"은 엄마를 위한 페미니즘 소설 선집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 '엄마를 위한'과 '페미니즘'이 함께 나오고 있는데...

 

9편의 소설을 뽑아 엮은 소설 선집이다. 그런데 읽다보니 장편소설에서 한 장이나, 한 부분을 발췌한 소설도 있다.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같은 경우 장편소설인데, 이 소설에서 세서가 아이를 낳는 장면을 싣고 있다. 그 소설 전체를 읽어야 이 부분이 이해가 될 텐데, 그 점이 좀 아쉽기는 하지만, 다른 소설들을 읽으며 엄마의 삶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어서 좋다.

 

여성이 아니라 엄마다. 아니 엄마인 여성이다. 아이를 낳아 기르는 여성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어떤 소설은 담담하게 또 어떤 소설은 분노를 담아 표현하고 있다.

 

아이를 낳아 살기 위해 바등거리다 아이와 거리가 멀어진 엄마 이야기를 다루는 소설도 있고, 아이를 낳는 과정을 다루는 소설도 있지만, 이 소설 선집에서 두 소설을 중심으로 생각을 하게 된다.

 

부치 에메체타가 쓴 [이등 시민]과 린다 쇼어가 쓴 [나의 죽음]이라는 소설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우선 [이등 시민]은 능력 있는 여자인 아다가 부모가 죽고 사회적인 압력에 또 자신이 살아가기 위해서 결혼을 하는데, 결혼한 남자가 능력이 없는 남자였던 것. 아이를 낳으러 병원에 왔지만, 남편이라는 작자는 자신밖에 모르고.

 

그럼에도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여성의 모습을 다루고 있는 소설인데... 남편의 부속물로서 살아가는 아다가 독립하려고 노력하는 모습, 꿋꿋하게 살아가려는 모습이 여성의 삶을 생각하게 한다. 토니 모리슨이 쓴 [빌러비드]에서도 세서가 겪는 삶에 대해서, 흑인, 여성, 엄마라는 중첩된 관계 속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이 [이등 시민]도 그런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여성들은 여전히 남성에 비해서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다. 직장에 나가는 여성이라고 해도 집에 돌아오면 남성들보다 더 많은 일, 아니 어쩌면 거의 대부분의 집안일을 해야 하니, 여성들이 겪는 어려움은 여전하다고 할 수 있다.

 

예술가로 살아가는 여성들도 마찬가지다. 그들 역시 예술가로서, 엄마로서 이중의 틀을 조화시키거나 한 쪽을 희생하거나 무시하거나 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엄마가 얼마나 힘들게 살아가는지를 처절하게 보여주는 작품이 [나의 죽음]이다. 자신이 죽었다고 하면서도 집안일과 아이들을 위해 하는 일을 멈출 수가 없다. 죽음까지도 집안일을 해방시키지 못하는 삶의 모습이 나와 있다.

 

엄마를 위한 페미니즘 소설이라고 하지만, 사실 이런 소설은 남성들이 읽어야 한다. 어떤 남성은 자신이 집 안에서 일을 많이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 이 책 부록에 실려 있는 한 글에 그런 내용이 나온다.

 

아내가 일주일간 집을 떠나게 되면서 집안일을 했던 남자가 그 전에 자신은 30%정도 집안일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직접 겪어보니 10%정도밖에는 일하지 않았다고 하는 이야기. (216쪽)

 

그러니 감정이입을 하게 만드는 문학이 소설이니, 이런 엄마들이 주인공이 되어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는 소설을 남성들이 읽어야 한다. 아니면 여성 중에서 이런 일을 겪지 않은 사람들... 돈이 많아 집안일을 남에게 맡기고 있는 사람들과 그와 비슷한 사람들도 이 소설을 읽어야 한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고 있는데, 아이를 키우는 것이 엄마만의 몫은 아니고, 또 남성과 여성 그리고 다른 성적지향성들이 모두 함께 세상을 지탱하고 있고, 그들 모두가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야 하는데, 누군가의 희생으로 다른 사람들이 편하게 지내지는 않았는지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성장기에 있는 사람들도 읽었으면 좋겠다. 엄마라는 존재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게 될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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