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우스트 박사 1 - 한 친구가 이야기하는 독일 작곡가 아드리안 레버퀸의 생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4
토마스 만 지음, 임홍배.박병덕 옮김 / 민음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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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 악마와 거래를 한 사람. 악마의 도움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지만 자신의 영혼을 악마에게 줄 수밖에 없는 사람. 결국 악마와 하는 거래란 자신의 영혼을 잃는 행위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영혼을 잃더라도 불멸의 작품을 얻을 수 있다면? 이 때는 판단을 쉽게 할 수 없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지만 무한을 꿈꾸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비록 자신의 육체가 영원하지는 못하더라도 자신의 이름만은, 또는 자신의 무엇인가만은 영원하길 바란다.

 

그럴 때 영혼마저도 팔 수 있단 생각을 한다. 물론 보통사람들은 절대로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않는 것이 아니고 못한다. 영혼을 팔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이미 비범한 사람이다. 이 사람들은 악마와 거래를 하기 전에도 이미 다른 사람보다는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다. 주인공 아드리안 역시 남들과 다른 능력을 지니고 있다.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지만, 그 능력은 인간의 영역에서 존재한다. 이것은 인간을 초월할 수가 없다는 한계를 지닌다. 이 한계는 절망을 부르고, 절망은 결국 악마를 불러내게 된다. 인간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능력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이 악마를 불러내고, 악마와 계약을 하는 것이다.

 

세속적인 인간다운 삶을 죽이는 대신 영원한 그 무엇을 얻어내기 위해서. '파우스트'란 이름을 보면 그런 존재를 떠올리게 된다. 서양에서 '파우스트'가 악마와 계약을 한 존재로 널리 알려져 있다고 하는데, 우리는 '파우스트'하면 괴테가 쓴 '파우스트'를 떠올린다.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더불어.

 

이 소설은 괴테 소설과는 다르게 한 예술가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작은 제목이 '한 친구가 이야기하는 독일 작곡가 아드리안 레버퀸의 생애'다. 아드리안 레버퀸이라는 사람이 뛰어난 음악을 남기고 죽었는데, 그 과정을 전기문이라는 형식으로 어린시절부터 함께 지냈던 친구가 쓴다는 형식으로 써내려간 소설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줄곧 친구인 '나'가 이끌어가는데, 아드리안의 천재성과 그런 그가 어떻게 성장해 가는지를 친구의 시선으로 서술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1권 마지막 부분에 즉 이 소설에서 구분한 장으로 치면 '25'에서 아드리안의 목소리가 직접 나온다.

 

그가 쓴 글을 인용하는 형식으로 아드리안의 작품 세계에 대해서 드디어 설명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니 1권은 그냥 전기적인 형식을 띤 소설로,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 파우스트와 관련이 되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읽는데, 드디어 25에 가면 아, 이래서 파우스트와 관련이 되는구나 하게 된다.

 

괴테는 메피스토펠레스를 불러냈다면, 토마스 만은 사마엘을 불러낸다. 사마엘은 '죽음의 독을 선사하는 천사'라는 뜻이야. (442-443쪽)라고 하니, 결국 인간에게 인간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능력을 주지만, 그를 인간의 세계에 머물게 하지 않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주인공인 아드리안에게 제시하는 조건은 그래서 사랑을 포기하라는 것이다.

 

내가 내세운 조건은 명확하고 공정했어. 지옥의 당연한 질투에 의해 정해진 조건이지. 사랑이라는 게 따뜻한 인간미를 지닌 것인 이상 자넨 사랑을 해선 안 돼. 자네의 삶은 냉정해야 하니까. 그래서 자넨 누구도 사랑해선 안 돼. (483쪽)

 

메피스토펠레스는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상태라고 말하는 순간 그 영혼을 가지겠다고 했는데, 사마엘은 사랑을 하면 안 된다고 한다. 그렇다. 사랑을 한다는 것은 인간의 세계에 머무른다는 것이니... 결국 괴테의 파우스트를 구원하는 것은 사랑인데... 그러니 후대에 나온 작품에서 사랑은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제한 조건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사랑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이 경멸하는 병에 걸려야 한다. 아드리안이 에스메랄다라는 사람을 찾아가 잠을 자고 매독에 걸리는 일. 그 일부터 악마와 계약이 성립하기 시작한다. 왜 그런 병일까? 사마엘은 말한다.

 

사람들에게 내보이기를 꺼려 하는 추잡하고 은밀한 병이야말로 세상과 평범한 삶에 비판적으로 맞설 수 있게 해 주고, 시민적 질서에 아이러니의 정신으로 반항하게 하며, 자유로운 정신과 책과 사색에서 피난처를 찾게 하지. (451쪽)

 

예술가는 범범자와 광인의 형제야. 범범자와 미치광이의 생태를 이해하지 못하고서 일찍이 그럴싸한 예술 작품이 나온 적이 있다고 생각하나? (459쪽)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힘을 증대시켜 주는 비(非)진리는 불모성의 어떤 도덕적 진리보다 낫다는 거야. 천재성을 발휘하게 하는 창조적인 병, 모든 장애를 당당히 뛰어넘어 대담한 도취 상태서 종횡무진 활약하는 이 병이야말로 좀스럽게 꼼지락거리는 건강보다 백 배 천 배 더 멋진 인생을 보장한다 이 말이야. 병적인 것에서는 병적인 것밖에 나올 수 없다는 말은 정말 멍청한 소리지.  ... 생의 활력이라는 원칙을 기준으로 보면 병과 건강의 구별은 무의미해. 건강을 앞세우는 족속들은 병든 덕분에 독창성을 얻은 병적인 천재의 작품 앞에서 맥을 못 추지. 그런 무리들은 오히려 병적인 천재의 작품에 감탄하고, 찬양하고, 높이 받들고, 받아들이고 변화시켜서 문화유산으로 전승하지. (471쪽)

 

이제 2권에서 아드리안은 보통 사람들이 상상할 수도 없는 작품을 창작할 것이다. 마치 우리나라 근대 소설가인 김동인이 '광염소나타'라는 작품에서 비정상적인 상태에서만 명곡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주인공처럼. 하지만 그 순간은 영원하지 않을 것이다. 악마와 한 계약은 끝이 있다.

 

자네는 우리에게서 시간을 얻었어. 독창적인 시간, 고귀한 시간을. 우리는 이십사 년이라는 시간을 자네한테 전적으로 제공한 거야. 자네가 목적지에 도달하는 시간인 셈이지. 이 시간이 만료되면, 물론 그게 언제가 될지는 예측할 수 없고, 따라서 시간은 곧 영원이라 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자네를 데려가겠네. (481쪽)

 

이런 계약으로 인해 이 소설의 서술자는 60세가 된 때 먼저 세상을 떠난 아드리안의 이야기를 글로 쓴다. 그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알려줄 필요가 있다고.

 

어떻게 다음 내용이 펼쳐지는지는 2권으로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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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건 여자들뿐이거든요 바통 3
강화길 외 지음 / 은행나무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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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사라지는 건 여자들뿐이라니? 남자와 여자가 함께 일을 해도 빛을 보는 건 남자들이고, 늘 남자들 뒤로 사라지는 게 여자들이라는 의미일까? 페미니즘이라는 말을 하지 않더라도 자신이 한 만큼 인정을 받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현실을 형상화한 작품집이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제목이었다.

 

그런데, 읽다보니 아니다. 이 정도면 여자이기 전에 사람이라는, 동등한 인간으로서의 대우를 주장하는 인물들이 등장하고, 그들이 겪는 일들이 전개되어야 하는데, 이 소설집은 그 방향과는 다르다. 여성들이 겪게 되는 고통이나 공포를 다루고 있지만, 그들에게 이런 고통, 공포를 유발하는 존재는 기존 관념과는 달리 여성들이다.

 

여성이 여성에게 고통을 일으킨다. 여성에게 공포의 존재는 여성이다. 이런 소설이 나오게 된 것은 이제 여성도 어느 정도 사회적 약자의 자리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 실질적으로 여성은 아직도 약자의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몇몇 남성의 자리를 차지한 여성이 권력을 지닌 것처럼 보여, 여성이나 남성이기 전에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착시현상에 불과할 뿐이다 -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 소설집에는 8편의 소설이 실려 있고, 모두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이 소설집에서 여성을 괴롭히는 존재로 엄마를 들고 있는 소설이 있고(강화길, 산책. 최진영, 피스. 지혜, 삼각지붕 아래 여자), 엄마를 살해하는 딸의 모습을 그린 소설(천희란, 카밀라 수녀원의 유산)도 있다. 여성의 적은 여성인 소설, 여성의 삶을 더욱 힘들게 하는 존재로 등장하는 여성들을 표현함으로써 이 소설은 여성들의 공포가 외부에서만이 아니라 자신들의 내부에서도 일어남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겉으로는 온화한 여성지도자이지만 알고보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것들을 짓밟는 존재가 등장하는 소설(임솔아, 단영), 또 자기처럼 희생당하는 여성들을 지켜보는 소설(손보미, 이전의 여자, 이후의 여자)도 실려 있다.

 

거기에 여성을 질투하는 모습을 표현하는, 여성과 여성이 함께 유대하지만, 그런 모습을 질투하는 유령을 등장시키는 소설(최영건, 안(安)과 완(完)의 밤)이 있으며, 여성들이 실종되지만, 그에 대해서 무관심한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허희정, 숲속 작은 집 창가에)이 있다.

 

모두들 여성들이 겪는 고통을 이야기하지만, 이 소설들에서 여성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남성이나 또는 사회적 제도라기보다는 그 사회에서 살아남은 여성들일 수도 있다는 것을 공통 주제로 하고 있다.

 

소설의 소재를 더 넓힌 소설집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여성 스릴러물이라기에는 조금 약하다는 생각이 든다. 몸을 오싹하게 만드는 공포는 나타나지 않는다. 여기에 유령이 등장한다든지, 개연성이 없는, 도대체 죽은 자들의 이야기가 나온다든지 하는 장면들이 나와 몰입을 방해하기도 한다.

 

무언가 생각하지 못했던 반전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세상의 절반이라고 하지만 여성들이 그동안 받아왔던 차별과 억압들이 그들의 삶에 극적인 상처를 남기지 않더라도 은연중에 두려움으로, 공포로 새겨졌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쩌면 이 소설집은 그렇게 드러내놓고 공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들에게 그동안 내재되어 왔던 억압과 차별들이 그들 몸에 박혀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정말 무서운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억압이 아니라 드러나지 않는 억압, 그래서 상대의 동의를 얻어 행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지금까지 여성들의 삶은 어쩌면 그렇게 드러나지 않는. 안으로 안으로 쌓인 차별과 억압들이 그들에게 공포로 다가왔음을, 이제서야 그런 공포를 소설로 표현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이런 생각을 하면 이 소설집은 다시 읽어볼 가치가 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여성 억압에 대해서 더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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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와 현대 발터 벤야민 선집 7
발터 벤야민 지음, 최성만 옮김 / 길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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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 자신도 쉽지 않은 사람인데, 그 사람이 카프카에 대해서 글을 썼다니...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고 생각한 사람들인데, 이렇게 연결이 되다니.. 그것도 벤야민이 카프카에 대해서 이토록 열광을 했다니.

 

현대를 연구하는 학자,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에 대해서 이야기한 학자, 그런 학자인 벤야민이 카프카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 것은 카프카가 현대를 대변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점에서 카프카가 현대를 대변한다고 생각했을까?

 

카프카 작품을 현대 사회를 표현한 작품으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오히려 기괴한 작품으로 파악하고 제쳐두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벤야민이 카프카에서 본 것은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는 삶이 아니었을까?

 

무엇이든 결론을 내지 못하고 과정 중에 있는, 그 과정에서 미래를 실현하려고 하지만 결코 미래를 현재에 실현할 수 없는 현대를 카프카의 작품에서 찾았던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현대라는 괴물에 한없이 작아지기만 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는 어떤 논리도 통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가려고 발버둥치지만 제자리에서 맴돌던지, 어떤 알지 못할 힘에 휩쓸려 사라져버리든지, 아니면 끊임없이 나아가고는 있지만 제한된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런 현대인들. 그러니 현대인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벌레로 변하거나 하지 않았던가.

 

벤야민이 브레히트와 대화한 것을 기록한 내용에서는 아킬레스와 거북이 이야기가 나온다. 절대로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는 아킬레스. 하지만 카프카 소설에서 브레히트는 말 타기의 행위로 이야기를 대체한다고 한다.

 

말 타기의 행위가 아주 작은 부분들로 - 우발적 사건들은 차치하고라도 - 이루어진 것으로 본다면 어느 누구도 이웃 마을에 도달하지 못한다. 이러한 말 타기를 하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 하지만 여기서 잘못은 '어느 누구도'에 있다. 말 타기가 세분화되듯이 말 탄 사람도 세분화 되기 때문이다. 인생의 통일성이 사라지듯이 인생의 짧음 또한 사라진다. 인생이 짧으면 짧은 대로 두어도 된다. 그래도 상관없다. 왜냐하면 길을 떠난 사람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이 마을에 도착하기 때문이다. (303-304쪽)

 

이 말을 카프카 소설에 대입하자면 소설을 너무 부분으로 나누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소설을 이해할 수 없다. 소설 속 장면 속에 갇혀 나올 수가 없게 된다. 수많은 담장 안에 갇혀 아무리 밖으로 나가려 해도 나갈 수 없는 카프카 소설 속 사람처럼 되어 버린다.

 

이때는 과감하게 부분들을 포기해야 한다. 건너뛸 수 있어야 한다. 어쩌면 카프카는 이렇게 단편 속에 갇힌, 부분 속에 갇힌, 전체가 아닌 부분들로 나뉜 사람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미래를 작품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현대는 이렇게 사람들을 부분으로 나누는 것인지도 모른다. 전체를 파악할 수 없는 사람들. 따라서 카프카는 이런 현대인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비극을 작품에서 표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부분에 갇힌 현대인들. 그런 모습을 표현하기에는 그동안의 소설로는 부족했다고 여겼을지도.

 

그러므로 벤야민에게 '도식적으로 말해 카프카의 작품은 표현주의와 초현실주의 사이의 매우 보기 드문 연결고리를 보여주는 작품들 중 하나이다'(310쪽)라는 평가를 받는지도 모른다.

 

굳이 벤야민이 해석한 카프카를 따라갈 필요는 없다. 다만 카프카를 이렇게 보기도 한다는 것을 알면 된다. 학자나 평론가가 주장한 내용을 따라가는 것은 아킬레스와 거북이 경주와 같다. 부분들로만 나누어, 부분들로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절대로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이길 수 없다.

 

하지만 작품을 그렇게 부분으로만 쪼개서 볼 수는 없다. 카프카를 역시 여러 부분으로만 보아서도 안 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카프카 작품을 읽는 것이다. 읽고 자신이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 생각들에 다른 사람의 의견을 보태는 것이다.

 

그런 모습을 벤야민이 이 책에서 보여주고 있다. 카프카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 그는 혼자만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친구나 다른 비평가와도 토론을 한다. 많은 서신을 교환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다듬는다. 우리는 그래서 카프카를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자료를 더 첨가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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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 정유정 장편소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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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정 소설을 읽고 있는 중. [28]을 읽다. 제목이 무슨 뜻일까 생각하면서 읽는데, 단순하게 읽으면 감염병이 돌고 봉쇄된 화양이라는 도시의 28일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고립된 도시에서 겪게 되는 28일.

 

작가와의 인터뷰 기사를 보면 28은 여러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원제는 <화양 28> 이었어요. 화양이라는 단어가 오해의 소지가 있어서 빼기로 했어요.(웃음) ‘28’은 독자들한테 성질 나면 한번씩 이 제목을 읽어 보라는 배려라고 할까.(웃음) 그리고 2하고 8을 더하면 0이에요. 아무 것도 없는 제로 상태. 화양이라는 도시가 완전히 폐허가 되는 과정이기 때문에 제로상황이 되는 걸 보여준다, 숫자적인 풀이는 그래요. 의학적으로도 28일은 뭘 할 수가 없는 기간이에요. 변종 바이러스가 나타나면, 원인균을 밝혀내는 데에도 오래 걸려요. 그걸 밝혀야 백신이니 진단키트가 나오는데. 에이즈 원인 바이러스를 밝히는 데에도 4년이 걸렸어요. 그러니까 28일은 살기 위해서 투쟁하는 기간이에요. 개와 인간이 살기 위해서 투쟁하고, 공명해 가는 시간

(출처:  http://news.kyobobook.co.kr/people/writerView.ink?sntn_id=7208)

 

소설은 중후반까지 굉장한 흡입력으로 나를 이끌었다. 읽으면서 여러 사건들이, 여러 소설들이 겹쳐 떠오르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카뮈의 [페스트]도 떠오르고, 사라마구의 [눈 먼 자들의 도시]도 떠오르고, 우리나라 광주민주화운동도 떠오르고, 지금 전세계가 겪고 있는 코로나19로 인한 판데믹도 떠오르고, 작가의 말에서처럼 구제역이나 조류독감으로 살처분을 당한 동물들도 떠오르고.

 

여러 사건들, 여러 소설들이 이 소설에 들어있고, 또 작가가 쓴 소설, [내 심장을 쏴라]에 나오는 인물도 나오기도 하고, 특이하게도 재난 상황이라면 인간 중심의 소설이라고만 생각하는데, 개가 화자로 나오기도 한다.

 

인수공통감염병이라는 빨간 눈의 괴질이라는 병에서 이상하게도 반공이데올로기가 떠오르고,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사람들을 맹목적으로 격리시키는 힘이 있음도 생각하게 된다. 인수공통감염병이기 때문에 당연히 동물도 주인공이 되겠거니 했는데, 이 소설의 주인공 중 하나인 개 '링고'는 감염병이라기보다는 개를 괴롭히는 인간들에 저항하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자신이 사랑하던 개 '스타'의 죽음을 이끈 인물들에게 복수를 하는 '링고' 여기에는 인간들의 잘못으로 인해 죽어가는, 또는 죽임을 당하는 동물들에 대한 연민이 드러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도, 소위 우리가 욕을 할 때 쓰는 '개만도 못한'이라는 표현이 무색하리만큼 링고는 뚜렷한 목표와 한없는 인내심을 지니고 행동하는 개로 나온다.

 

 

인간을 부끄럽게 하는 개다. 그러니 우리가 별다른 죄책감없이 살처분을 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가를 소설을 통해서 생각하게 한다.

 

재난이 발생했다. 원인은 모른다. 질병에 걸리면 며칠 내로 죽는다. 어떻게 감염이 되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게다가 걸리면 대부분 죽는다. 이때 가장 간단한 방법은 봉쇄다. 대체로 감염병이 창궐할 때 하는 대책이다. 더이상 외부로 확산되지 않도록 하는 방법. 그러나 갇힌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지 않는 봉쇄는 혼란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극심한 공포 속에서 자신만은 살겠다고 몸부림치는 상황. 이런 상황에서 치안은 붕괴된다. 치안이 붕괴되는 모습을 노수진이라는 간호사를 통해 잘 보여준다. 재난으로 인한 봉쇄, 대책 없는 봉쇄는 여성들에게 얼마나 고통으로 다가오는지를 노수진 간호사를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 [눈 먼 자들의 도시]에 나오는 약탈과 강간 장면이 연상되는 부분이기도 하고.

 

그럼에도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은 있다. 구급대 팀장인 한기준 같은 사람.그런 사람들을 통해 재난 속에서도 사람들은 견딜 수 있을지도 모른다. 봉쇄된 화양에서 사람들은 시청에 모인다. 그것은 서로가 서로를 의지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공간이 시청 앞 광장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재난 상황에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 광주민주화 운동 때 도청 광장에 모였던 사람들을 연상시키는 장면.

 

여기에 동물 편에 서 있는 서재형 같은 인물로 인해 동물을 무작위로 살처분하는 것이 얼마나 비인도적이고 감염병을 치유하는데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언론의 문제는 김윤주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데, 기사가 얼마나 큰 파급력을 지니는지, 또 한 사람의 인생을 파탄낼 수 있는지를 김윤주의 기사를 통해서 생각하게 된다. 여기에 사이코패스라고 할 수 있는 박동해.

 

작가는 박동해의 행동을 통해 우리가 감염병에 대처하는 방식이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음을 생각하게 하고 있다.

 

이런 여러 가지가 복합되어 있지만 후반부로 가면 사건이 단순해진다. 링고의 복수, 군인들의 발포. 이것이 끝이다.

 

감염병이 어떻게 해결되는지, 정부는 어떻게 이 사태를 마무리하는지를 보여주지 않는다. 아니 보여줄 수가 없다. 그것은 살아남은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다. 마치 광주민주화운동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는 것과 같이, 이 소설 역시 결말은 그렇게 미완으로 끝난다.

 

다시 생각하자. 극한의 재난 상황에서 사람들은 어찌해야 할까? 우리는 결코 고립되어 살아갈 수 없다. 재난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다. 서로 돕는 모습을 통해 재난을 극복해갈 수 있다. 일방적인 통고나 혼란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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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을 쏴라 (리커버 특별판) - 2009년 제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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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우리가 경험하기 힘든 곳이 정신병원일 것이다. 우선 정신병원 그러면 정상적이 아닌 이라는 생각부터 한다. 온전한 정신이 아닌 사람들이 있는 곳. 비정상이 판치는 곳. 그들에게는 권리도 제한된다. 그러니 보통 사람들이 정신병원에 입원해 그곳을 경험하기는 참 힘들다.

 

정신병원이라고 정신이 이상한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미쳐서 들어왔거나 들어와서 미쳤거나'라는 말이 있듯이 이곳에서는 소위 정상적이라는 생활을 할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소설을 읽어보라. 그들도 정상인들과 똑같이 협력하기도 갈등하기도 한다. 그들이 있는 곳도 세상일 뿐이다.

 

작가는 정신병원에서 일하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 물론 소설을 쓰기 위해서였겠지만, 그래도 정신병원이라는 곳을 직접 경험한 사람이다. 환자로서가 아니라 환자를 지켜보는 사람의 처지에서. 아마도 그런 경험을 통해 정신병원도 사회의 일부임을 자각했으리라.

 

소설은 환자의 처지에서 쓰였다. 그럼에도 환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방식으로 내용을 전개한다. 정신병원에서 하는 환자의 말. 믿을 수 있을까? 어디까지 서술자의 진술을 신뢰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읽게 된다. 특히 이 소설은 심사위원회에서 자신이 여기서 어떻게 지냈는지를 진술하는 내용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것이 감정을 이입하는데 도움이 된다.

 

소설 말미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그는 세상에 나오기 위해 준비를 한다. 이제 그도 당당한 존재로 자신을 인정하고 세상에서 함께 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글을 쓴다. 나갈 준비로. 하지만 쓰면서 그것이 바로 자신들의 이야기임을 깨닫게 된다.

 

자신의 이야기임을 깨닫는다는 것, 자신 속에 갇혀 있는 또다른 자신을 밖으로 내보내고 그와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면에서만이 아니라 삶 속에서. 그런 힘을 이야기가 주고 있다.

 

승민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해 여름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볼펜 한 다스가 사라졌다. 노트는 열 권으로 불어났다. 그 사이 나는 무한히 자유로웠다. 이야기를 하는 동안, 온전히 나 자신이었다. 인생의 표면을 떠돌던 유령에게 '나'라는 형상이 부여된 것이었다. 그것이 내 안에서 나갈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333-334쪽)

 

이렇게 내 안에 있던 또다른 나로 인해 고통받던 나에서, 그를 또다른 나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자신의 여러 모습을 확인하고 인정하게 된 것. 이 과정에 이르기까지 '나'에게는 '승민'이라는 자신의 길을 가는 존재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와 나의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세상에 발을 디딜 수 있게 된 것이다. 소설은 정신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중심으로 펼쳐지는데, 정신병원에 입원한 사람들끼리 맺는 관계들이 소위 정상인이라고 하는 사람들과 다르지 않음을. 그들을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고, 규정짓는 것이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아무리 가두어 두려고 해도 가둘 수 없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 인간은 본래 자유로운 존재라는 것. 따라서 자유를 잃은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은 존재가 되는 것. 정신병원에서 끊임없이 말썽을 부리는 것은 그들이 주장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자유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점점 시력을 잃어가는 승민. 그러나 자신이 글라이더로 하늘을 자유롭게 날았던 기억을 버리지 못하는, 다시 한번 완전히 실명하기 전에 하늘을 날고 싶어하는 승민을 통해, 자신 속에 자신을 가두었던 '나'는 세상 밖으로 나갈 용기를 얻게 된다.

 

승민과 함께 탈출한 다음 주인공인 '니'는 자신을 가두었던 진실과 대면하게 된다. 더이상 진실을 회피하지 않고, 또 왜곡하지도 않고 그 진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진실을 받아들이게 되면 이젠 더이상 사회에서 도피할 필요가 없다. 사회에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자신을 두려움에 떨게 하던 것들에게 가슴을 쫙 펴고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된다. "내 심장을 쏴라" 그렇다.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 두려움 속에 자신을 감추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감추어진 자신을 계속 가둘 수만은 없다. 그런 자신을 대면해야 한다. 물론 두렵고 어렵겠지만 대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하여 이 소설은 정신병원에 갇혀 있던 사람을 주인공으로 삼아 이야기를 펼쳐가지만, 정신병원을 사회로 확장하고 등장하는 인물들을 함께 살아가는 사람, 그리고 '나'를 바로 우리 자신으로 바꾸어서 읽으면 좋다. 우리들 삶도 이렇게 비틀려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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