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수학특성화중학교 시즌 1. 1~3 세트 - 전3권 수학특성화중학교
이윤원.김주희 지음, 녹시 그림 / 뜨인돌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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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특성화중학교'


수학 영재를 키운다고 세울 수 있는 학교다. 과학고가 있으니 수학고가 없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하지만 현실에서 수학고는 없다. 과학고에 수학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영재고가 있는데, 이 영재고가 바로 수학과 과학에 뛰어난 학생들이 있는 학교 아니던가.


고등학교도 그런데 수학특성화중학교라고 하면 특목고가 아니라 특목중이다. 이런 학교가 있다면 어떨까 생각을 해보기도 하지만, 글쎄?


제목은 이렇지만 수학특성화중학교답게 수학 문제를 푸는 일이 많은 학교로 설정이 되어 있지만, 소설은 중학생들을 중심으로 사건을 서술하고 있다.


진노을, 허란희, 임파랑, 박태수, 한아름이라는 중학생 다섯이서 겪는 갈등과 호감이 한 축을 이루고, 여기에 교사로 나오는 정태팔, 김연주, 류건과 관련된 사건이 또 한 축을 이룬다.


그리고 이 두 축이 맞물려 사건이 전개된다. 1권은 비교적 가볍게. 요즘 인공지능이라고 할 수 있는, 거의 알파고를 넘어서도 한참 넘어서는 '피피'라는 이름의 프로그램이 노을에게 발견되는 과정이, 2권에서는 류건과 관련된 제로라는 단체와의 갈등이 심화되고, 3권에서는 그러한 갈등이 해결이 된다.


이런 서술 과정에서 수학 문제가 간간이 나오는데... 물론 중학교 수준의 문제다. 그래서 소설을 읽으면서 함께 문제를 풀어볼 수 있다.


즉, 수학을 어렵게만 여기던 학생들에게 수학에 대한 흥미를 불어넣어 주려는 의도가 담겨 있는 소설이라고 보면 된다.


그렇다고 수학 문제가 많이 나오면 아마도 중학생들은 책을 덮고 말 것이다. 그래서 적당하게 문제를 배분하고 있다. 많이가 아니라 적게, 필요할 때, 즉 모험을 할 때 힌트를 주는 식으로, 그 힌트가 바로 수학과 관련이 있게 만들고 있다.


무엇보다 학생들 사이에 벌어지는 호감과 갈등이 중학생들의 흥미를 이끌어내고 있으며, 여기에 컴퓨터와 관련된 다양한 사건들이 펼쳐져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수학특성화중학교라는 제목에 수학에 관련된 이야기가 많을 거라고 하지만, 학생이 수학 천재이고, 그런 학생들에게 수학과 관련된 행사를 많이 한다는 설정으로, 수학이 우리 생활에서 얼마나 밀접한 관련이 있는지를 보여주려는 의도라고 보면 된다.


보통 학생들보다 배경이 좋은 인물들이 설정되었다는 점에서 아마도 학생들이 감정이입을 하기보다는 자신과는 다른 멋진 학생들의 이야기를 본다는 관점에서 읽을 가능성도 많지만, 오히려 그것이 수학과 거리를 두어서 좀더 객관적으로 수학을 볼 수 있게 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한다.


이것저것 다 떠나서 중학생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들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 소설이다.


청소년들의 모험과 성장소설이라고 해야할까, 여기에 수학이 양념처럼 가미되어 있는 소설이다. 중학생들이 좋아할 만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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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견자들
김초엽 지음 / 퍼블리온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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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디스토피아다. 지구의 지상에서 살아갈 수 없게 된 인간. 외계에서 온 범람체들에 의해 지상을 빼앗기고 지하로 스며들어 살아가는 인간 세계가 나온다. 범람체들은 거의 무한증식이다. 자신들과 접촉한 대상에 들어가 그 대상을 지배한다.


그렇게 여겨지는 범람체들과 공생할 수 없는 인간들은 그들을 피해 지하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지상을 찾으려는 노력을 한다. 지상을 찾기 위해서 지상을 탐색할 파견자들을 내보낸다. 파견자들은 지상을 탐색하고 범람체들을 없애는 방법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지하에서도 계속해서 범람체들에 의해 감염되는 사람들이 나온다. 이들은 인간들과 함께 살 수 없다. 광증이라고 표현한다. 미친 사람. 그런 사람은 격리되어야 한다. 그들은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격리시설로 옮겨진다. 그 격리시설을 가족들조차도 방문하지 못하지만.


지상은 범람체들에 의해 잠식당했고, 지하에서도 범람체들에 감염되는 사람이 속속 나오는 상황에서 인간들은 범람체를 없앨 연구를 한다. 지상을 되찾으려 한다.


파견자들은 그러한 막중한 임무를 띤 사람들이다. 그런 파견자가 되고 싶은 태린이 있다. 이제프를 사랑하는, 그래서 이제프와 함께 지상을 거닐고 싶은.


파견자 시험을 보는 와중에 태린은 자신의 머리 속에서 다른 존재를 감지하게 된다. 그 존재와 대화를 하게 되기도 한다. 의존하기도 하지만 시험 마지막에 자신이 이름 붙인 '쏠'이라는 존재에 휘둘려 폭주하고 만다. 대형사고를 친 것이다.


태린에 대한 징계는 이제프의 도움으로 추방이 아니라 파견이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아주 위험한 임무를 띠고 두 명의 파견자들과 함께 파견되는 태린. 여기서 태린은 다른 세계를 인식한다. 자신의 머리 속에 있는 존재의 정체도 깨닫게 된다.


지상과 지하, 범람체들과 인간, 그 사이에 있는 범람화된 인간들. 그렇다. 이제 지구에는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존재들이 탄생하기 시작했다. 그들을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문제. 이는 공생이냐 파괴냐의 갈림길에 서게 한다.


공생의 조건. 서로 다른 존재임을 인정하면서 자신을 지키면서 자신을 내어줄 수 있어야 한다. 즉 범람체들도 인간을 완전히 잠식해서는 안 되고, 인간 역시 범람체들을 인정하지 않아서는 안 되고 지구에서 영원히 몰아내려 해서도 안 된다.


이 사이에 범람화된 인간이 있다. 범람화된 인간 중에서도 태린과 같이 범람체와 공생하는, 두 자아가 동시에 한 몸에 존재하는 존재들도 있다. 바로 태린과 선오가 그런 인물들이다.


인류는 어떤 선택을 해야할까? 소설은 범람체로 인해 지하로 쫓겨난 인간들의 세계인 디스토피아에서 시작한다. 그렇다. 인간은 자신들이 살던 터전에서 쫓겨났다고 여긴다. 그들은 지상을 다시 찾아야만 한다고 한다.


그 과정은 범람체와 인간의 전쟁일 수밖에 없다. 이런 전쟁을 막으려는 존재들이 나온다. 변화를 인정하고, 다름을 받아들이면서 함께 살아가자고 하는 존재들. 범람체들 역시 인간을 이해하는 과정을 거치고, 인간들 역시 범람체들을 이해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해하기 위해서는 접촉이 있어야 한다. 접촉 없는 이해는 없다. 이런 접촉을 이끄는 존재가 바로 태인이다. 선호다. 이들은 지상에서 오는 신호를 감지하고 이를 이해하려 한다. 그런 과정에서 범람체들과 또 범람화된 인간들을 만나게 된다.


만남에서 오는 이해, 특히 쏠과 공생하면서 다른 존재를 받아들인 태린. 이들은 전쟁이 아닌 공생을 택한다. 자신이 사랑하는 이제프를 희생시키면서도...


집단과 개인의 공생. 집단 속에 개인이 완전히 녹아들지도 않고 또 개인을 위해 집단을 없애지도 않은 함께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과정이 소설에서 펼쳐진다.


범람회된 인간들은 인간이 아닌 것이 아니라 변한 인간, 즉 다른 형태의 인간일 뿐이라는 인식으로 가는 지난한 과정. 세 존재들이 경계를 정하고, 또 서로 경계를 허물면서 살아가게 되는 과정을 소설은 보여주고 있다.


디스토피아에서 유토피아로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유토피아는 단일성에서 오지 않음을, 유토피아는 다양함에서, 다양함을 인정하는 관계 속에서 만들어짐을 생각하게 한다.


중간지대의 확장이 유토피아로 가는 길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이는 태린이 경계지역에서 범람체들과 인간들을 연결짓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에 인간들의 인식이 범람화된 인간들도 인간이라고 바뀌어 간다. 


'그들은 우리를 움직이는 징그러운 시체라고 생각해. 그래서 그냥 땅속에 파묻어버려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이왕 파묻을 거면 무기로 써먹고 묻겠다는 거지. 하지만 우리는 죽은 게 아니야.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게 됐다. 그걸 원하지 않았다고 해도.' (363쪽)


범람회된 인간, 즉 전이자들은 이런 대우를 받고 있었다. 그러다 경계지역이 생기고 점차 서로 접촉하면서 사람들의 생각은 변한다. 바로 이렇게.


'경계 지역에서 새롭게 살아가는 전이자들의 삶을 목격하자, 도시 사람들의 생각도 바뀌었다. 그것도 삶이라는 것. 단지 다른 방식의 삶일 뿐이라는 것을 직접 보았으니까.' (418쪽)

 

그렇다고 한번에 확 변하지 않는다. 유토피아는 결과가 아니다. 과정이다. 디스토피아가 결과라면 변해가는 과정, 서로가 서로를 이해해 가는 과정이 바로 유토피아다. 


'앞으로도 그 균형이 지금처럼 유지되리라는 법은 없었다. ... 태린은 경계 지역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이 그 답을 찾아내주기를 바랐지만, 어쩌면 아이들도 명확한 답에는 다다르지 못할지도 모른다. 단지 불균형과 불완전함이 삶의 원리임을 받아들이는 것, 그럼에도 끊임없이 움직이며 변화하는 것, 멈추지 않고 나아가는 것만이 가능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419쪽)


이렇게 소설은 태린이 점차 각성해가면서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잇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이는 디스토피아에서 유토피아로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결코 쉽지 않은, 어쩌면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존재를 잃는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나아가야 하는 길일 수도 있다.


그렇게 김초엽은 다른 생명체에 잠식당하는 지구의 모습을 그리면서 그것이 정복이 아니라 공생으로 갈 수 있음을, 우리가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야 함을 소설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결코 쉽지 않겠지만.


이를 현실에 반영하면 사람들의 이주를 생각하면 된다. 이주민들을 자신들의 삶을 위협하는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새로운 삶을 만들어가야 함을. 그들과 소통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고민해 봐야 함을. 이주민이 우리 사회에 많이 유입되고 있는 이때, 그들과 어떻게 지내야 할지를 범람체, 인간, 그리고 전이자들의 관계로 치환해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결코 상상 속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 현실의 이야기가 소설 속에서 펼쳐진다는 생각이 든다. SF소설은 공상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현실을 반영하는, 우리에게 이 현실에서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소설이기도 하다.


SF소설은 공상이 아니라 상상임을, 이렇게 다른 관계로 치환해서 생각해 볼 수 있음을, 이 소설이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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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기의 끝 그리폰 북스 18
아서 C. 클라크 지음, 정영목 옮김 / 시공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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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F소설인데 제목이 '유년기의 끝'이다. 유년기라고 하면 어린 시절 아닌가. 그런 유년기의 끝이라면 성장이 되는 시기인 청소년기를 말해야 하는데, 청소년기는 어른에게서 독립해서 나아가려는 시기로 정의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유년기란 무엇인가? 행복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은 의식하지 못하지만 행복으로 충만한 시기. 인류의 역사로 따지면 황금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유년기의 끝은 인류에게 다른 세계로 나아가는 때가 왔다는 말인데...


그런 시기에 닥친 인류는 행복할까? 유년기를 벗어나 청소년기, 중장년기를 거쳐 노년기에 이르는 동안에 사람은 많은 일들을 경험하게 된다. 이때 그런 시기를 거치는 인간은 개인이다. 다들 이런 시기를 보편적으로 거치지만 경험은 개인적으로 하게 된다.


즉 잘 기억하지 못하는 유년기를 제외하면 청소년기부터는 자아라는 개인의 경험으로 세상을 살아가게 된다. 그러니 집단이 아닌 개인으로서의 삶을 영위하게 된다. 즉 유년기의 끝은 보편성에서 개별성으로 전환되는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한데 이 소설은 반대다. 개별적인 인간들이 보편적인 인간처럼 개성을 잃어가면서 행복하게 살던 시대가 중간에 나온다.1부가 '지구와 오버로드'이고 2부가 '황금시대', 3부가 '최후의 세대'다.


지구에 외계인이 나타난다. 엄청난 과학기술의 발전을 앞세워 그들은 인류에 개입한다. 즉 전쟁을 없애고, 지구연합을 결성하게 한다. 선의를 지닌 독재자가 된다. 그들을 인류는 오버로드라고 부른다. 여기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다.


지구연합으로 평화를 이루는 것도 좋겠지만, 개별성을 잃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잃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즉 인간의 자율성을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에서 전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가, 굶주림으로 죽어간 사람들은. 국경으로 인해 나타난 여러 폐해들은?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오버로드의 뜻대로 지구연합을 결성한다.


그것이 1부다. 지구엔 이제 전쟁은 없다. 살육도 없다. 굶주림도 없다. 그야말로 황금시대다. 누구나 원하는 만큼 일하고 쉬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시대. 그럼에도 이런 황금시대에도 그런 행복이 외부로부터 왔다는 사실에 불편해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간 스스로 찾아낸 행복이 아니다. 오버로드들에 의해 주어진 행복이다. 이런 결과에 완전히 거스르지는 않지만 자신들만의 자율 공동체를 결성해 살려는 사람들이 나온다. 2부에 그런 내용이 펼쳐진다.


여기에 오버로드들과 교류하는 인간도 나오고, 도대체 오버로드들이 왜 지구에 왔는지는 밝혀지지 않는다. 몰래 오버로드의 별로 가는 사람도 나온다. 그리고 지구에서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3부에서는 어린아이들을 중심으로. 어린아이들은 기존 어른들과 다르게 성장한다. 그들은 개인이 아니라 집단으로 변해간다. 즉 의식의 공유라고 해야 하나. 개별적인 몸이 그들에게는 더이상 중요하지 않다. 그러니 가족이란 개념도 이제는 사라져야 할 시기다. 유년기의 끝이다. 우리 인간이 성장하는 모습과 반대 방향으로.


우리에게는 유년기의 끝은 보편성에서 개별성으로 나아가는 시기라면, 이 소설에서 유년기의 끝은 개별자로 존재했던 인류가 보편적 인간이 되는 시기를 의미한다.


이제 개인 인간은 없다. 의식을 공유하는 보편 인간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지구에 있을 필요가 없다. 지구는 그들에게 중요한 요소가 아니니까. 지구는 사라진다. 그 사라짐을 2부에서 오버로드들의 우주선을 타고 그들의 행성까지 갔다 온 잰이라는 사람의 눈을 통해 서술한다.


이렇게 소설은 오버로드라고 불리는 외계인이 지구에 나타난 순간부터 지구가 사라지는 순간까지를 서술하고 있다. 지구의 시간으로 하면 100년이 넘는 시간. 그 과정에서 인류가 살았던 지구는 사라진다.


그러나 다시 태어난 인류는 우주에서 계속 살아간다. 오버로드를 통제하고 있는 존재를 오버마인드라고 부르는데 그렇게 하나가 된 정신을 다른 우주로부터도 계속 충원하고 있는 존재를 부르는 말이다.


1950년대에 발표된 소설인데, 이것을 디스토피아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외계인에 의해 잠시 행복한 순간을 맞이하지만 지구가 사라져버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


행복은 외부에서 올 수가 없겠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자신이 추구하지 않고 그냥 주어진다면, 또는 생각을 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그냥 받아들여야만 한다면, 그것을 행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여기에 자신들의 운명에 개입하지도 못하고 휩쓸려 살아갈 수밖에 없을 때 과연 그것이 바람직한 삶일까?


인류보다 고도로 발전한 지성체인 오버로드들도 오버마인드를 알지 못한다. 그들 역시 오버마인드가 왜 인류를 새롭게 개조했는지 모른다. 그만큼 불확실만이 현실인 세상이다. 


아마도 1950년대 역사적 불확실성 속에서 작가는 인류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 여기서 길을 잃으면 인류의 종말로 나아가게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을 표현하고 있단 생각이 들지만...


지금 우리 현실은 소설과 다르다. 소설에서처럼 우주 개발을 오버로드들에 의해 하지 못하게 되었던 인류가 아니라 다시 달을 기지로 활용하고자 달에 가려고 하고 있으며, 그런 달을 기반으로 삼아 화성에 인류를 보내겠다고 하고 있으니.


우주에 우리가 모르는 생명체가 있을 수 있고, 다른 문명이 있을 수 있지만, 발전된 문명에 의해서 조종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힘으로 비록 느릴지라도 서서히 탐구해나가는 것이 인류의 본 모습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소설에서처럼 외계 생명체에 의한 행복이 과연 황금시대라 될 수 있을지 그런 오버로드들을 다른 대상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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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길이라 부르는 망설임 - 카프카 드로잉 시전집 민음사 세계시인선 리뉴얼판 58
프란츠 카프카 지음, 편영수 옮김 / 민음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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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시집이다.


카프카가 시를 썼다고? 아직도 발견되지 않은 카프카 작품이 있단 말인가?


호기심. 그가 쓴 소설들이 결코 단순하지 않기에, 시도 역시 살아 있을 적에는 시집으로 발표한 적이 없을테니, 곳곳에 남겨진 그의 글들 속에 시라고 포함되어 있었을 듯.


그런 작품을 찾아 하나로 묶어 책으로 내었으니, 다시 카프카다.


어떤 몽환적인 느낌을 주는 작가. 이 시집에는 카프카가 직접 그렸다는 그림이 실려 있다. 그런 그림을 보는 재미도 있고.


왼쪽에는 독일어 원문이 있고 (카프카는 현재로 말하면 체코 작가라고 할 수 있지만, 그는 독일어로 작품을 썼다. 체코 작가 하면 떠오르는 세 사람. 한 사람은 카렐 차페크 - 그는 체코어로 작품을 썼고, 카프카는 독일어로 작품 활동을 했고, 밀란 쿤데라는 체코어와 프랑스어로 작품을 썼다고 한다) 오른쪽에 한글로 번역된 작품이 있다.


원문 시와 번역된 시를 비교하면서 읽을 수 있게 해 놓은 것이 장점이다. 독일어를 몰라서 독일어로 해석은 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원문이 있는 시집이 좋다.


그냥 읽는다. 무슨 생각을 할 필요도 없다. 그러다 마음에 드는 구절이 있으면 기억해 놓으면 된다. 그래서 몇 작품 적어 놓는다. 내 마음에 든 작품들.


지금 시대와도 연결이 되기도 하는 시들이니.


43

목표는 있으나,

길은 없다.

우리가 길이라고 부르는 것은,

망설임이다. (69쪽)


51

사랑은,

당신이 내게

칼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그 칼로

내 마음을 들쑤신다. (77-79쪽)


68

가시나무 덤불은

옛날부터 길을 막아 왔다.

네가 계속 나아가려면,

가시나무 덤불은 불태워져야 한다 (123쪽)


69

신앙을 가진 자는,

기적을 체험할 수 없다.

대낮에는

별이 보이지 않는다. (123쪽)


92

진실의 길은

공중 높이 매달려 있는 밧줄이 아니라,

땅바닥 바로 위에

낮게 매달린

밧줄 위에 있다.

그것은 걸어가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처럼 보인다. (161쪽)


92라고 붙은 시. 진실을 알았을 때 그 진실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들이 있다. 걸려 넘어져 더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들. 그러나 진실의 길로 계속 걸어가야 하기 위해서는 68라고 붙은 시처럼 가시나무 덤불을 불태워야 한다. 


대낮에 별이 보이지 않겠지만 가시나무 덤불은 보이니, 69라고 붙은 시에서 말하듯 기적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자신의 길을 가야 한다. 그것이 사랑이고 51시처럼 내 마음을 들쑤시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가야 한다. 43시다. 우리가 길이라고 부르는 것은 망설임이지만, 그 망설임 속에서도 우리는 가야 한다. 우리는 길 위에 있으므로.


가끔 책을 펼쳐 아무 부분이나 읽고 생각에 잠기고 싶어지는 그런 시집이다. 여전히 카프카는 매력적임을 보여주는 책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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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4-03-24 03: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51번 시詩가 내 무릎을 치게 합니다. 대학시절, 날 버린 여인은 내 마음을 무자비하게 난도질했거든요, 결국 그게 나의 욕심임을 깨닫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다행이었지만.

kinye91 2024-03-24 06:40   좋아요 0 | URL
호시우행 님이 극복한 경험을 카프카의 시가 떠올리게 하고. 호시우행 님의 마음을 더욱 단단하게 하지 않았나 싶네요. 이런 시를 만나면 저는 좋더라고요.

호시우행 2024-03-24 0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그래서 명시라고 평가받지요.

그레이스 2024-03-25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카프카의 시집이네요!

kinye91 2024-03-25 20:54   좋아요 1 | URL
네. 카프카 시를 모아놓았더라고요. 카프카 시집이라니 생소하지만, 그래서인지 더 좋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맨홀 사계절 1318 문고 78
박지리 지음 / 사계절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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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리 작가의 [합*체]는 경쾌하다. 키 작은 아이들의 키 크는 프로젝트로 봐도 좋지만, 그 아이들이 성장해 가는 이야기로 읽을 수 있으니, 청소년들에게 부담 없이 읽으라고 할 수 있는 소설이다.


그런데 이번 소설 [맨홀]은 청소년 소설이라고 하지만, 청소년들에게 쉽게 읽으라고 권하기 힘들다. 경쾌함, 발랄함과는 거리가 먼 질척거리면서 계속 자신과 또 다른 사람들과 거리를 두는,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버리는 사람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을 루카치의 말을 빌리면 '문제적 개인'이라고 할 수 있고, 소설에서 주로 등장하는 인물이고, 이런 인물이 어떻게 살아가느냐를 보여주는 소설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성찰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성찰의 힘은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오랜 시간 갈고 닦아야 한다. 홀로가 아니라 함께. 그 점을 소설 속 주인공을 통해 알 수 있다.


소설 속 주인공은 가정폭력에 시달린다. 폭력을 휘두르는 아빠, 속수무책으로 맞고만 사는 엄마, 여기에 함께 폭력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는, 죽도록 아빠를 증오하게 되는 남매.


그런데 어느 순간 아빠가 죽는다. 소방관이던 아빠는 화재 현장에서 사람을 구하고 죽는다. 우습다. 다른 사람을 구하는 직업을 지닌 아빠, 어떤 순간에도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 아빠가 가족에게는 공포 그 자체다.


다른 사람에게는 구원의 표상이 집안 사람들에게는 죽음의 표상이 된다. 그런 아빠가 죽었다. 구원이다. 구원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아빠는 죽어서 영웅 소리를 듣는데, 이제 가정을 폭력으로 휘감던 폭력이 사라졌는데, 평화가 오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 폭력에 저항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폭력에 저항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가슴에 메울 수 없는 구멍만 파 놓은 상태. 엄마는 계속 무력한 상태고, 누나는 집을 나가 자신만의 생활을 한 상태.


어린 시절 누나는 이를 연극 상황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은 연기를 한다고 했다. 그 상황을 나름대로 극복하려는 모습이지만, 이것은 극복이 아니라 봉합이다. 즉 자신의 의지를 죽이고, 그냥 상황을 넘기는 모습. 그러니 기회가 되자 연극을 한다는 명목으로 집을 나간다. 탈출이다. 극복이 아니라 탈출.


그래도 누나는 남의 얼굴로 살아갈 수 있다. 누나는 자신의 가슴에 뚫린 맨홀에 뚜껑을 닫아버렸다. 닫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메워버렸다. 이제는 다른 삶을 살아가겠다고, 연극을 통해서 즉 누나는 다른 사람의 삶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객관화 할 수 있는 힘을 서서히 얻었다.


이런 힘이 어디에서 나왔을까? 그것은 어렸을 때 아빠에게 반항하는 누나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 아빠로 인해 마음에 구멍이 생겼지만, 누나는 스스로의 힘으로 그 구멍을 메우고 뚜껑을 닫아버릴 수 있었다.


그런 힘을 연극이 주었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삶을 통해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제 삶의 방향을 잡아나가는 예술의 힘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서술자이자 주인공인 나는 그렇지 못했다. 아빠에게 한번도 제대로 맞서지 못했다. 또한 주인공으로 나서지도 못했다. 늘 어정쩡한 자세로, 이도 저도 아닌 자리에서 스스로 마음을 닫아버리고 말았다.


이런 상태에서 주인공의 마음에는 큰 맨홀이 생겼다. 결코 메울 수 없는, 뚜껑으로 덮어버릴 수도 없는. 주인공은 사람의 몸에 구멍이 몇 개냐고 질문하지만, 이는 물리적인 구멍을 의미하지 않는다. 물리적인 구멍 외에도 마음에 뚫린 구멍, 결코 메울 수 없는 구멍이 있음을 말한다.


하지만 구멍은 메울 수 있다. 그 구멍을 제대로 응시한다면. 그건 제 삶을 성찰하고 실천했을 때 간능해진다. 그래야 하는데 주인공은 결심은 하지만 실행은 못한다. 말을 하려고 하지만 말을 하지 못한다. 늘 끌려다닌다. 남에게도 그렇고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구멍으로 늘 빨려들어간다.


그 결과가 뜻하지 않는 살인이다. 의지로 행한 살인이라면 나았으려나? 아니다. 살인으로 가는 길은 이미 자신의 구멍에 침식당한 경우다. 주인공은 스쿠터의 맨 뒷자리에 간당간당 앉아가면서도 손을 놓고 떨어지는 장면을 상상하면서도 단 한번도 실행하지 못한다.


그에게는 실행할 의지가 없다. 아니 의지가 맨홀에 갇혀버렸다. 그 맨홀 뚜껑을 스스로 열고 스스로 닫고, 메워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냥 구멍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이런 일이 왜 생겼을까? 자신이 이유 없는 폭력의 희생자이면서 자신보다 약한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했어야 하나?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에게 맞서는 경험을 한번이라도 했어야 하나?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주인공을 통해서 작가는 보여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누나가 연극으로 나아가는 것일지도.


그렇다면 주인공이 살인까지 가지 않으려면 어떻게 했어야 하나? 폭력에 시달리던 가족들의 모습에서 길을 찾을 수 있다. 그들은 폭력을 당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외면한다. 그나마 누나에게 마음을 여는 주인공은 어린시절 누나와 함께 폭력을 당하면서 서로 의지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 경험을 계속 이어나가 폭력에 맞서는 방식으로 또는 폭력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을 감싸고 위로해주는 모습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여기서 가정폭력을 가족 구성원 개개인이 해결하려고 하면 절대로 해결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엄마는 끝까지 모르쇠로 일관하고, 누나는 집을 나가는 것으로 해결을 한다. 그렇게 남아 있는 주인공에게는 그 상황에서 자신을 놓아버리는, 구멍 속으로 자신을 던져넣는 길밖에는 남는 방법이 없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겉돌게 되는, 겉으로는 성실하지만 그 내면에 있는 구멍은 철저히 뚜껑으로 가리고 있는 주인공을 남들은 이해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주인공 자신도 이해할 수 없다. 매번 후회하고 반성하고 다르게 살리라고 결심하지만 막상 현실에 닥쳐서는 예전과 같은, 그것도 자신이 미워했던 아빠와 비슷한 행동을 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소설의 마지막에 엄마가 아들이 무섭다고 하는 말에는 바로 이런 진실이 담겨 있다. 가장 큰 폭력이 사라졌지만 그 가족에게는 또 다른 폭력이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는. 자신들이 폭력에 맞서지 않을 때 폭력은 재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이 소설은 끝까지 여운을 남긴다. 어떻게 해야 마음 속 구멍을 메울 수 있을까? 그 구멍에 빠져 허우적거리지 않을 수 있을까? 또 그런 구멍을 어떻게 발견해낼 수 있을까? 철저하게 가려져 있는 구멍들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을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소설이다. 폭력이 얼마나 많은 마음에 구멍을 내는지, 그 구멍들이 메워지지 않고 구멍을 지닌 채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하게 하는 소설. 우리는 그런 보이지 않는 구멍을 찾아 메워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참 힘든 일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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