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의 모래바람 - 최경주 연작소설
최경주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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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에서 있었던 주바일 폭동사건(폭동사건이라고 하기보다는 노동자들의 항의 사건이라고 하는 편이 더 좋을 듯하다)을 주요 사건으로, 김대위란 인물을 주요 인물로 삼아 전개하는 연작 소설이다.

 

'김대위, 조선소 소요, 거간꾼들, 여우 가죽, 어느 전기공 이야기, 사막의 모래바람, 떠나는 자와 남는 자'

 

이렇게 일곱 편의 소설이 묶여 있다. 소설을 읽으면 나이 든 김대위의 회상으로 시작하여, 다시 현실의 김대위로 끝난다.

 

각 편이 독립되어 있지만 전체적으로 읽으면 연결이 된다. 시간 순서대로 배치되어 있기도 하고, 배경이 중동을 중심으로 되어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김대위라고 하여 지식인이 주인공일 것 같지만, 김대위는 서술자에 불과하다. 오히려 주인공들은 이름 없는 노동자들, 가혹한 노동 환경 속에서 일을 하는, 오로지 먹고 살기 위해서 억압을 견뎌내야 했던 노동자들이다.

 

그들의 삶이 미화되지도 않고 그렇다고 비참하게 그려지지도 않고, 딱 그렇게 노동자들이 그렇게 살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형상화되어 있다.

 

사우디에 가서도 술을 만들어 먹고 - 아랍은 금주다 - 고된 노동이 끝난 뒤에 많지도 않은 월급을 가지고도 화투판을 벌이고, 들개도 잡아먹는 그런 모습들, 열악한 환경, 관리자들의 횡포 속에서도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영위해 간다.

 

그런 삶들 속에서 더 견딜 수 없을 때 드디어 폭발하는 것이다. 이 폭발이 바로 주바일 폭동 사건이고, 이 사건으로 인해 강제추방되는 노동자들과 관리직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강제추방이라고 해도 노동자들은 귀국하자마자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가혹한 고문을 당하게 되지만, 관리자들은 보직 이동만 할 뿐이다. 결과까지도 이렇게 다를 수밖에 없는데... 소설에서 이 점을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다.

 

한때 중동신화를 들먹이고 대통령이 된 자가 있고, 대통령이 되고자 했던 자가 있다. 회장과 사장을 엮임했던 그들... 소설 속에서 돈에서만은 회장이 양보를 안 할 거라고 할 정도로 노동자들의 임금에, 그들의 처우 개선에, 노동 환경 개선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사람.

 

그 회장에 그 사장이라고 젊은 나이에 사장이 되어 온갖 무리한 공사를 했던 사람... 그런 사람이 주인공이 아닌 소설이라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사람이 운영하는 회사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각자 사연이 있지만, 이들은 아무리 가혹한 노동 환경이라도 인간적인 대우가 이루어진다면 관리직들을 적으로 돌리거나 폭동 같은 것을 일으키지 않는다.

 

인간 이하의 상황이었기에, 인간임을 알리는 소리를 내는 것 뿐이었다. 김대위가 베트남전에 참전했을 때, 베트남이 우리나라 경제를 살린다는 명목으로 많은 노동자들이 와 있었는데, 그들에게도 노동조건은 가혹했다고 한다. 자신들의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목소리를 내는 노동자들, 두번째 소설에 조선소가 나오는데 역시 노동자들의 항의가 나온다.

 

베트남 - 국내 - 중동으로 이어지는 장소의 바뀜. 그러나 노동자들이 처한 상황은 어디서나 똑같다. 그래서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말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에서는 장소는 다르지만 모두 우리나라 노동자들이지만.

 

그런데... 이 항의는 소설이 전개되는 몇 년에 걸쳐 나오지만 노동조합이 있어야 해라는 말만 나오지, 노동조합을 만드는 모습은 나오지 않는다.

 

1970년대.. 군인이 정권을 잡고 긴급조치라는 명목으로 반대하는 소리를 억압하고, 경제발전이라는 이름으로 노동자들의 희생을 강요하던 그 엄혹한 시대에 노동조합은 멀고 먼 이야기였다.

 

1970년대를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자신의 몸을 불태우며 시작했는데, 그런 불태움이 70년대 내내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기껏 노동조합을 결성해도 곧바로 들어오는 탄압과 블랙리스트...

 

그러니 소설 속에서 일거리를 찾아 다니는 건설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일은 있을 수가 없다. 이들은 그때 그때 상황 속에서 대표자를 뽑고, 이들의 협상으로 투쟁을 마무리한다. 그 마무리는 늘 자본측에, 권력측에 유리한 협상이 되었고, 대표자들은 처벌을 받고 현장에서 유리되고 마는 현상이 반복된다.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할 정당한 단체인 노동조합이 없는 상황이 얼마나 노동자들을 힘들게 하는지를 이 소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베트남이나 중동만이 아니었다. 국내에서도 노동조합은 제대로 결성되기 힘들었으며, 결성되었어도 온갖 탄압을 이겨내야만 했다.

 

이런 노동조합운동의 전사(前史)로 이 소설을 읽어도 된다. 힘들게 힘들게 자기들의 권리, 생존권을 지켜나갔던 노동자들이 있었음에 그나마 이정도 되는 노동 환경을 지니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하는데... 딱 여기까지다. 이런 말은 정규직들에게만 - 현재는 얼마 되지도 않는 정규직들에게만 - 해당하는 말이다.

 

비정규직들은 이 소설에 나오는 노동자들과 비슷한 환경에 처해 있다. 이들은 여전히 열악한 환경에서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으며 일을 하고 있다. 비정규직들에게 이 소설에 나오는 노동자들은 남들이 아닐 것이다. 바로 자신들의 이야기...

 

1970년대 일어났던 먼 과거, 지금은 웃으며 그땐 그랬지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지금도 끈질지게 계속되고 있는 노동 착취의 현장인 것이다. 그 모습을 소설 속에서 만나는 것이다.

 

그러니 이 소설은 현재진행형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이기도 하다. 소설은 노동조합이 건설되어 환경이 많이 개선되어 있는 것으로 끝나지만...

 

'수백 수천 명이 작업하는 대규모 현장에는 건설노동조합에서 걸어놓은 현수막이 펄럭이고, 긴 스피커를 얹어놓은 노동조합 승합차가 현장을 누볐다.' (380-381쪽)

 

이 노동조합이 비정규직 노동조합으로, 그들의 권리까지 지켜줄 수 있을 때 더 이 소설이 빛을 발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아직도 우리 노동환경은 1970년대에서 벗어나지 못한 곳이 많음을 생각해야만 한다.

 

덧글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이다. 마음 아프게 읽었다. 노동자들의 현실이 이 소설에 나타난 주바일에서 얼마나 많이 벗어나 있는지 생각하면서... 여전히 공고한 자본의 위력을 생각하면서 읽었다. 고맙게 잘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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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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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은 글쓰기를, 아니 그는 쓰기가 아니라 짓기라고 하는데, 건축에 비유하고 있다. 좋은 건축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듯이, 좋은 글 역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리라. 단지 감동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인식의 전환까지도 이뤄내는 것이 바로 좋은 건축, 좋은 글이리라.

 

이 책은 이런 신형철의 산문 모음집이다. 소설, 영화, 시를 비롯하여 우리 사회에 대한 것까지 전방위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글 하나하나가 제 자리를 잘 차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의 글짓기에 대한 생각이 글로 실현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글짓기에 세 가지 원칙을 제시한다. 첫째 인식을 생산해낼 것. 둘째 정확한 문장을 찾을 것, 셋째 공학적으로 배치할 것. 여기에 가치 있는 것을 줘야 한다는 것. (5-6쪽)

 

가치 있는 것, 그것이 무엇일까? 인간에게 가장 가치 있는 것은 생명인데, 생명을 줄 수는 없으니, 생명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 그것은 바로 시간이다.

 

신형철은 자신의 시간을 글에 투여해 우리에게 주고 있고, 우리는 그런 작가에게 다시 우리 시간을 준다. 우리가 시간을 주지 않으면 글은 그냥 화석이 된다. 화석이 의미있게 되기 위해서 우리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원칙에 입각해 쓴 글들을 모아놓았는데, 제목부터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이 말의 철학적인 의미를 생각하기보다는 우리나라에서 예전부터 전해내려오는 말을 떠올린다. '기쁨은 나누면 두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

 

그렇지만 세상에 가장 어려운 일이 타인의 슬픔을 이해하는 것이다.

 

'인간이 배울 만한 가장 소중한 것과 인간이 가장 배우기 어려운 것은 정확히 같다. 그것은 바로 타인의 슬픔이다.' (27쪽)

 

좋은 문장이다. 슬픔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사람과 함께 지내기가 힘들어진다. 그는 오만과 독선에 빠지기 쉽다. 자기만을 내세우는 사람, 그 사람에게 타인의 슬픔은 다가올 수 없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많은 사회에서는 슬픔의 총량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은 나누지 않으면 그대로라는 말이 아니라, 더 늘어난다는 말로 해석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남의 슬픔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능력, 그것은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치열한 공부를 통해 배우고 익혀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 사회는 더 좋아진다.

 

많은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어, 그 작품들을 만나고 싶은, 그 작품들에 내 시간을 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부록으로 소개된 책들고 읽고 싶은 마음이 들고. 이것이 바로 책이 지닌 의미이리라.

 

자신에게서 끝나지 않고 다른 책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그런 책들... 그리고 그런 글을 쓴 사람만이 우리에게 자신의 시간을 주는 가치 있는 활동을 한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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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개의 머리를 가진 여인 환상의 숲
막스 에른스트 지음, 이두희 옮김 / 이모션북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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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에른스트의 콜라주 소설이다. 소설이라고 하면 글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그림은 삽화라는 개념으로 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 소설은 그림이 주를 이루고 그림 밑에 길어야 세 줄 정도의 글들이 있다. 또 그 글들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연결이 되지 않는다. 그야말로 이게 뭐야?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소설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림과 글이 함께 있지만, 그림들의 연작이라고 하기도 그렇고, 글들이 이어진다고 하기도 그런 소설. 그야말로 콜라주다.

 

콜라주는 이렇게 사전에서 정의하고 있다.

 

근대 미술에서, 화면에 종이인쇄물사진 따위를 오려 붙이고, 일부에 가필하여 작품을 만드는 .

 

그렇다면 소설과 콜라주는 어울리지 않는다. 단편적인 것들이 어떤 논리적, 서사적 관계도 없이 자리를 차지하면서 배열되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소설과는 너무도 다르지만, 소설이 어느 한쪽으로 정의되지 않는 것이 소설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이 작품이 소설의 영역을 좀더 넓혔다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우리에게 어떤 감동을 주느냐가 문제인데, 감동을 준다기보다는 새롭다, 특이하다는 생각만 들게 하는 것이다. 즉, 소설이라는 틀에, 또 그림이라는 틀에 얽매이고 보지 않게 해준다는 것, 문학이든, 미술이든 참으로 다양한 방식이 쓰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준다는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림들도 뭐라 이해하기 힘든 그림들이 많은데... 다른 것은 몰라도 이 작품의 첫그림과 마지막 그림이 같다는 것, 그렇지만 글은 다르다. 이것은 우리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지만 그 돌아감은 처음과는 완전히 같지는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는데...

 

영원회귀, 어쩌면 우리 삶은 이렇게 돌고 도는 것은 아닌지. 아이 때의 모습과 어른이 된 모습이 얼마나 달라졌을까 생각하면 결국 그 자리에서 맴돌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내 삶도 이 소설처럼 이렇게 두서없이, 논리적이지도 않고 서사적이지도 않은 채 많은 사건들이 내 삶이라는 시간 선상에 놓여 있었던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참, 기괴한 소설. 그림. 그렇지만 우리들 삶도 이렇게 명확하게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 작품. 그래서 초현실주의 작품이라고 불리는지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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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시를 읽는가
프레드 사사키.돈 셰어 엮음, 신해경 옮김 / 봄날의책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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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시를 읽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바로 "저요."다. 그런데 "저요."하는 사람이 나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여야 한다. 즉, "누가 시를 읽는가?"라고 질문을 하면 "우리가요."라고 답해야 한다. 시는 우리 모두에게 다가오고, 우리 모두는 시를 읽으며 살기 때문이다.

 

살면서 시를 단 한 번도 만나보지 않은 사람, 읽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 학교를 다닌다면 시험 때문에라도 읽었을 거고, 학교에 한번도 가보지 못한 사람은 부모들에게서, 또는 이웃들에게서 시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눈으로 읽든 귀로 듣든 시는 우리와 오랫동안 함께 해왔다.

 

이렇게 시는 우리들의 삶과 떨어져 있지 않다. 다만 우리가 의식하느냐 하지 않느냐 차이일 뿐이다. 이 책은 누가 시를 읽는가라는 제목으로 시를 읽은 사람, 또는 시에게서 삶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 시와 자신의 관계를 쓴 글을 모았다.

 

5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각 분야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시와 자신에 대해서 쓴 글인데, 이 책을 읽다보면 시는 우리 삶에서 떼려야 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다못해 시하고 가장 먼 미국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에서도 시를 필수로 가르친다고 하니까 말이다.

 

읽어가면서 마음에 드는 구절이 수없이 많지만, 그 중에 하나를 고르면 아이 웨이웨이가 쓴 글에 나오는 이 말이다.

 

시를 경험하는 것은 현실 너머를 보는 것이다. 물리적인 세계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찾는 것이며, 다른 삶과 다른 층위의 감정을 경험하는 것이다. 세상을 경이롭게 여기는 것이며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는 것이며 가장 중요하게는 젊고 늙고 배우고 못 배우고를 떠나 타인과 나누는 것이다. (244-245쪽)

 

시인은 다른 세계를 본다. 그리고 그 다른 세계를 우리의 세계로 끌고 들어온다. 다른 세계를 우리에게 보여줌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이 세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가령 나희덕 시를 보자. 꽝꽝 언 호숫가에서 얼음을 지치는 일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다. 내 마음을 쳐내기만 하는 그대를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 호수는 잔잔하고 고요하고 맑고 깊고 그래서 포용적인데, 그 호수가 얼어버리면 내치기만 한다. 도무지 받아들일 줄 모른다.

 

최근에 정치판을 보면서 특히 공당이라고 주장하면서 다른 정당들과 대화하지 않으려는, 또 국민들이 무엇을 바라는지 전혀 생각하지 않는 꽉 막힌 모 정당의 원내대표를 보면서 나희덕의 '천장호에서'를 떠올렸다. 그들은 그야말로 얼어붙은 호수에 불과하다. 봄이 오고 여름이 와서 사람들이 물가에서 더위를 식혀야 하는데, 그들은 사람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자신을 더 굳게 얼리고 있을 뿐이다. 내치고 있을 뿐이다.

 

   천장호에서

 

얼어붙은 호수는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다

불빛도 산 그림자도 잃어 버렸다

제 단단함의 서슬만이 빛나고 있을 뿐

아무것도 아무것도 품지 않는다

헛되이 던진 돌멩이들,

새떼 대신 메아리만 쩡 쩡 날아오른다

 

네 이름을 부르는 일이 그러했다

 

나희덕, 그곳이 멀지 않다. 민음사. 1997년 1판 3쇄. 11쪽.

 

20년도 전에 쓰인 시가 지금 정치판을 떠올리게 한다. 이렇게 시는 문득 내게 현실을 보게 해주기도 한다. 그러니 시를 읽을 수밖에. 마음이 힘들 때 위안을 주는 시를 떠올리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시는 인류에게 많은 영감을 주기도 했지만 위안을 주기도 했음을, 또한 성인들의 말씀에도 시들이 많음을.

 

기독교 성경에는 시편이 있어서, 시적인 노래들이 전해 내려오고, 불교에서도 숫타니파타 역시 시라고 할 수 있으며, 법구경만 해도 시임에 틀림없다. 여기에 힌두교 경전으로 알려진 바가바드 기타 역시 천상의 노래라고 불리지 않는가. 역시 시다.

 

시는 우리들의 삶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굳이 내가 의식적으로 시를 읽지 않아도 이렇게 시는 우리들 삶 속에 있다. 가끔 의식하지 못한 시들이 의식으로 떠올라 나에게 다른 세계를, 또는 이 세계를 좀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시를 읽는다. 왜 읽는가.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우리가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존재가 시니까 읽는 것이다.

 

최근에 문재인 대통령이 스웨덴 의회에서 연설을 했다. 그 연설을 시작할 때 대통령은 신동엽 시인의 '산문시1'을 낭독했다.

 

외국 의회에서 우리나라 시인이 쓴 시를 낭독했다. 그만큼 시는 전세계적으로 보편적인 정서를 드러낸다. 그 감동... 그렇게 시는 누구나 읽어야 한다고, "누가 시를 읽는가?"라는 질문에 "우리 모두요."라고 답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한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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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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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로 시작하고 싶다. "이 소설은 내 소설이다"라고 제목을 쓴 작가의 말. 작가는 '소설을 쓰는 것이 한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라 믿었던 때가 있었다.' (171쪽)고 했다. 그는 창조주가 되어 자신이 원하는 세상을 창조하고, 사람들이 그가 창조한 세계에서 거닐기를 바라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다 어느날 자신이 창조주임에는 확실한데, 참 한심한 창조주라는 것을 깨닫는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마르코 폴로처럼 아무도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여행하는 것에 가깝다.' (171쪽)고 말하고 있다. 먼저 문을 열어주어야만 들어갈 수 있는, 또 그들이 떠나라고 하면 언제든지 떠나야 하는 여행자. 그런 여행자는 자신의 경험을 다른 세계의 한계 속에서만 할 수 있다. 소설가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작가는 이렇게 또 말하고 있다.

 

'소설가라는 존재는 의외로 자율성이 적다. 첫 문장을 쓰면 그 문장에 지배되고, 한 인물이 등장하면 그 인물을 따라야 한다. 소설의 끝에 도달하면 작가의 자율성은 0에 수렴한다. 마지막 문장은 앞에 써놓은 그 어떤 문장에도 위배되지 않을 문장이어야 한다.' (171-172쪽)

 

여기까지 작가의 말을 따라가니 이상하게 작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독자에 대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독자 역시 소설을 읽으며 자신이 새로운 세계에 들어가 있다고 느끼고, 그 세계 속에서 또다른 자신을 발견한다고 생각하지만, 철두철미하게 소설 속 인물이나 사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

 

작가는 그럼에도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내 소설이다. 내가 써야 한다. 나밖에 쓸 수 없다.' (172쪽)

 

독자 역시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내가 읽는 소설이다. 내가 읽어야 한다. 나만의 방식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소설은 독자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소설가에게 소설이 자신의 것이듯 독자에게도 소설은 자신의 것이어야 한다. 그렇게 소설을 읽어야 한다. 이렇게 장황하게 작가의 말을 인용한 것은, 너무도 잘 읽히는 이 소설이 도대체 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기억을 잃어버리는 살인자... 수많은 사람을 죽였지만, 어느 순간 살인의 세계에서 물러나 딸을 키우며 살아가던 살인자. 그러다 자신이 치매에 걸렸다는 것을 알고, 또다시 연쇄살인이 일어나는 마을에서 자신의 딸을 지키고자 하는 살인자.

 

과거의 살인자가 현재 살인자로부터 딸을 지키려고 한다. 그것도 자신이 죽인 부부의 딸을. 그는 마지막으로 살인을 기획한다. 딸을 지키기 위한 살인. 과거의 살인은 철저히 자신을 위한 살인이었다면 이번에 계획한 살인은 딸을 위한, 즉 남을 위한 살인이다.

 

그런데... 소설은 반전을 이룬다. 그에게 딸이 있었던가. 연쇄살인은 일어나고, 그에 대한 진실은 소설 후반부에 가면 밝혀진다. 그렇다. 기억을 잃어간다고 해도, 자신의 몸이 기억하고 있는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행위를 기억하지 못할 뿐, 행위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을 아무리 없는 것(無)으로 돌리려 해도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 다만, 기억하지 못할 뿐, 발견하지 못할 뿐이다.

 

살인자의 기억법은 그래서 기억하기 위해 글로 쓰거나 녹음을 하는 기억 장치들을 동원한다. 그런 장치들 역시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만 남긴다는 것을 알고 있는 우리는, 이런 기록들도 믿을 것이 못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런 장치들로 기억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는 소설을 읽어가면 알 수 있다. 또한 기억을 잃어가는 것이 자신의 행위를 지워가는 일이 될 수 없음을 알아가게 된다. 온전하지 못한 정신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기억을 하지 못할 뿐이다. 내면에 들어 있는 습성들이 어느 순간 터져 나오게 되는 것, 그런 행동을 하기 위해서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사건들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것.

 

사람은 무(無) 다시 무(無)돌아간다고 하지만, 처음의 무와 마지막의 무가 같을 수는 없다. 우리가 공(空)들어야 한다는 것은 바로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처음을 극복한 공(空)이 되어야 한다.

 

소설에 나오는 반야심경이나 금강경의 내용은 제자리 걸음을 하는, 또는 단순히 부정을 하는 무나 공이 아니다. 그것은 치열한 고민, 삶을 거쳐 깨달아야 하는 경지다. 그런 경지에 든 다음에 다시 자신이 있던 위치로 오는 것, 부처가 중생을 구제하러 세상으로 나오고, 예수가 민중들 속으로 들어가듯이 그래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깨우침인데,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망상 속에서 얻어지는 깨우침은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다. 행동이 변하지 않는, 자신을 변화시키지 않는 공에 대한 추구는 제자리 걸음일 수밖에 없다.

 

이 소설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꽤나 스릴 넘치고 반전이 있는 이 소설을 불교의 십우도에 비유하면 결국 무에서 무로 가는 과정인데, 십우도가 한 차원에서 다른 차원으로 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라면, 이 소설은 이 과정이 아닌 오로지 제자리 걸음을 하는, 망상 속에서만 다른 차원으로 가게 되는, 현실과 자신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상태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늘 같은 나같지만, 결코 같은 나가 아님을, 나는 망상 속에서만 달라진 나를 발견할 것인지, 아니면 현실에서 달라진 나를 발견할 것인지 고민해야 함을 소설이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술술 읽히는 소설이다. 재미도 있고. 그렇지만 무언가를 더 생각하게 하는, 찜찜한 여운이 남는 소설이기도 하다. 나는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고 생각하게 하는, 그러한 찜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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