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들 - 역사 테마 소설집 바다로 간 달팽이 9
강기희 외 지음 / 북멘토(도서출판)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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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들"

 

역사 테마 소설이라고 하는데, 제목이 참, 허균이 주장한 호민(豪民)도 아니고, 벌레라니. 제목과 역사가 잘 연결이 안 되었는데, 이 소설집 마지막에 실린 소설이 '벌레들'이란 제목을 갖고 있다. 뒤 설명에 의하면 '벌레들'은 '카프카의 여인'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약간 고친 것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벌레들은 카프카 소설 '변신'에 나오는 벌레를 의미한다. 그냥 벌레라는 단수가 아니라, 즉 그레고리 잠자가 아니라 그레고리 잠자인 것이다.

 

벌레 하면 떠올리는 것은 징그럽다, 우리와 다르다, 그래서 격리하거나 처치해야 한다 등등 부정적인 생각을 더 많이 하는데, 카프카 소설에서도 그렇다. 벌레가 된 잠자는 가족에게도 배척을 받고 결국 죽을 수밖에 없다.

 

밀려나는 존재, 밀려나게끔 인식되는, 남들에게 함께 있어서는 안 될 존재로 여겨지는 그런 존재가 바로 벌레다. 벌레들이라고 하면 우리 역사에서 그만큼 밀려난 존재들을 의미하지 않을까? 그런데 누가 밀려났지?

 

그레고리 잠자가 누구인가? 평생 가족을 위해서 일만 한 존재 아닌가. 노동자 아닌가. 사회에서 위를 구성하지 못하고 밑을 구성하는 하위층이라고 할 수 있는, 세상을 돌아가게 만드는 존재이지만 그만큼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 아닌가.

 

역사를 구성하고,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살아남았던 민중들이 벌레들이란 말인가? 아니면 민중들을 벌레 취급하는 소위 지배층, 기득권층이 벌레들이란 말인가. 아니 인간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가 벌레들인데, 서로를 벌레라고 경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드는 제목이다.

 

소설은 총 7편이 실려 있다. 우리 역사와 관련하여 우리들에게 비극으로 다가왔던 사건들을 주로 다루고 있다. 단지 과거의 일을 반추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관련지어 소설은 전개된다. 역사는 과거에 끝난 사건이 아니라 현재도 진행되고 있는 삶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소설의 제목만 보고는 우리나라 역사의 어느 지점과 연결 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소설을 읽어 보아야 아, 그 사건이구나 할 수 있다. 그런 사건에 대해 알지 못했다면 소설을 마음으로 느끼는데 더한 수고를 해야 한다. (한편 한편 소설이 끝나면 그 역사적 사건에 대한 설명이 실려 있다. 간략하게.. 더 알고 싶으면 수고를 더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앎에 대한 자세다)

 

이해를 통해 감상으로, 머리를 거쳐 가슴으로, 그리고 다시 발로 가는데 걸리는 시간은 너무도 길다고 고 신영복 선생은 말했다. 그러나 소설을 읽는데 머리에조차도 도달하지 못한 사람이 많다. 역사 지식에 대해서 깜깜이인 사람이 천지다. 아무리 역사 교육을 강조해도 그것은 시험용일 뿐이다.

 

역사가 우리 삶에 중요한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시험지 속에, 책 속에 갇혀 있다. 그래서 이모양 이꼴이다. 세상 돌아가는 꼴이. 역사는 역사, 현재는 현재, 그리고 도덕과 윤리는 책 속에만 있는 것. 역사에서 도대체 무엇을 배웠는지, 머리에도 닿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머리에 닿아야 그 다음에 가슴으로 가든지 말든지 할텐데...

 

이 소설을 읽으며 그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소설 속에 서술된 사건들이 여전히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이미 청산되어 더 나은 곳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있는 이 현실이 답답하기만 하다.

 

제목을 보자. 그리고 어떤 역사적 사건인지 생각해 보자.

 

'동몽군, 빼앗긴 죽음, 손님,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 돼지 아빠, 붉고 푸른 못, 벌레들'

 

알 수 있는 사건이 있는가? 없어도 좋다. 소설이 역사를 직설적으로 드러내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을 읽기 위해서도 역사 공부는 필요하다. 작품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도 그렇다.

 

동몽군... 동몽과 군이라는 말이 합쳐진 말. 동몽은 '동몽선습'이라는 책을 떠올리면 아이들이라는 (어린아이라기보다는 결혼을 하지 않은이라는 의미) 말을 의미한다고 유추할 수 있고, 군은 군대니까, 아이들로 이루어진 군대?

 

사람 대접을 받지 못했던 천민, 여인, 아이들도 동등한 인간임을 표방한 종교... 동학. 그렇다. 소설 '동몽군'은 동학혁명을 역사적 사건으로 삼고 있다. 이렇게 역사의 흐름 순으로 따라가면...

 

'빼앗긴 죽음'은 의열단원으로 일본 황궁 다리에 폭탄을 던졌으나 실패한 김지섭 열사의 이야기다. 죽음조차도 재판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빼앗길 수밖에 없었던 독립운동가의 비애. 영화 [동주]를 보면 진술서에 서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절차... 자신들을 합리화 하기 위한 그 절차에 옭아매인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 빼앗긴 죽음은 그래서 더 슬프다. 여전히 의열단 단장이었던 김원봉은 당당한 독립운동가로 훈장을 받지도 못하고 있다. 이 무슨 일이란 말인지...

 

'손님'? 혹 황석영의 '손님'을 읽은 사람은 6.25전쟁을 떠올릴 지도 모르겠다. 비슷하다. 역사적 배경이. 4.3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4.3에 대한 이야기는 직접적으로 서술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으려면 4.3에 대한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현기영의 '순이 삼촌'이나 영화 [지슬]을 보면 이 소설에서 엄마가 왜 제주도에 가려고 하지 않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소설 속 인물, 새끼 무당이라고 불리는 명희 언니의 해원 장면에서 코 끝이 찡해질 것이다.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 어찌 글로 서술할 수 있겠는가. 그 비참함을. 그 말도 안 됨을. 그런데도 그런 일이 일어났음을. 하여 소설가는 물푸레나무를 화자로 등장시킨다. 인간들이 하는 말도 안 되는 짓을 자연의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다. 너무도 비참하고 비극적인 그 장면을 차마 사람의 말로 전하지 못하기에... 그렇게... 국민보도연맹 학살 사건을 다루고 있는 소설.

 

이념이 사람이 사람을 얼마나 잔인하게 죽이게 됐는지, 그렇게 죽어가면서도 자신을 죽이라고 명령한 사람 만세를 부르는 그 비극적인 상황. 도대체 이 무슨 비극이란 말인가. 우리 역사에서 이런 비극을 겪었으면서 왜 우리는 아직도 이념의 잣대를 들이댄단 말인가.

 

사람이 먼저다라는 말은 천연덕스럽게 하면서도 자신들의 이익에 맞춰 이념의 칼을 들이대고 있는 것이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우리 현실 아니던가.

 

'돼지 아빠' 부마항쟁을 다루고 있는 소설이다. 광주민주화운동에 비해 덜 알려졌지만, 박정희 정권이 무너지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이 부마항쟁이다. 그러나 이런 부마항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을 받고 있는지, 그 고통이 지금도 지속되고 있음을, 이어서 '붉고 푸른 못'에서 박정희 아류인 전두환이 실시한 삼청교육대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이렇게 사람들 가슴에 붉고 푸른 못을 박았던 사람이 반성은커녕 오히려 더 큰소리를 치는 현실이 암담하다. 그걸 지켜보는 심정이 참 처연하다. 그런 존재를 처벌도 못하고 있는 이 현실이 더 슬프다.

 

마지막 '벌레들' 미선, 효순이 사건을 다루고 있다. 아니 미선, 효순이 사건이라기보다는 촛불 시위를 다루고 있다. 촛불 시위에 나온 사람들이 벌레들일지, 그것을 비꼬고 탄압하는 사람들이 벌레들일지... 아니면 그렇게 벌레들이라는 인식을 통해 서로가 다른 존재가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인지...

 

하지만 카프카 소설에서 벌레는 애초에 사람이었다. 가정에서 사랑받고, 인정받는 존재. 우리가 벌레 취급하는 존재들도 처음부터 그런 존재는 아니다. 그 점을 명심해야 한다.

 

하여 이 소설에서 주인공이 된 존재들은 대부분 약한 존재들이다. 사회에서 주류에 서지 못하고 비주류에 머물러 있는, 큰소리를 치기보다는 주로 당하는 그런 존재들. 하지만 그들도 그냥 '항민(恒民)'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들도 자기 목소리를 낸다. 이들은 '원민(怨民)'이 된다.

 

원민... 이 상태에 머무르면 자기들 억울함은 벗어날 수 있어도 다른 사람들의 억울함은 지속된다. 그러면 역사는 계속 반복된다. 약한 사람들은 계속 당할 수밖에 없다. 원민에 머무르지 않고 '호민(豪民)'으로 가야 한다. 그때서야 사회는 변하고, 역사는 반복되지 않는다.

 

아주 오래 전에 허균이 이미 '호민론'에서 전개한 논리다. 그 점을 이 테마 역사 소설집을 통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머리를 깨우치자. 그리고 가슴으로 보내자. 가슴에서 다시 다리로 가게 하자. 순차적으로, 또 동시적으로. 머리와 가슴을 동시에 자극하는 역사 알기, 그것이 바로 이런 역사 테마 소설을 읽는 일이다. 읽고 더 찾고 생각하고 현재를 살아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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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태엽 오렌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2
앤소니 버제스 지음, 박시영 옮김 / 민음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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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통'이란 말이 있다. 국립국어원에 있는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보면, 성장통이란 낱말 풀이가 이렇게 되어 있다.

 

1) 어린이나 청소년이 갑자기 성장하면서 생기는 통증. 주로 양쪽 무릎이나 발목, 허벅지나 정강이, 팔 따위에 생긴다. 4~10세 사이에 많이 나타나고, 1~2년이 지나면 대부분 통증이 사라진다.

2) 사물의 규모나 세력 따위가 커지면서 생기는 고통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사람, 특히 청소년들에게 쓰는 말인데, 첫번째 풀이는 육체적인 변화에 따르는 고통을 말하는 듯하고, 두번째 풀이는 사람에게라기보다는 집단이나 사물에 해당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우리가 흔히 쓰는 '성장통'에 해당하는 뜻풀이가 없다는 말이다.

 

청소년들이 겪는 성장통은 육체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인 것을 말한다고 보는 것이 좋다. 그것은 청소년기에 겪는 성장통이었다 하면 방황을 통해서 정신적으로 성숙해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런 '성장통'은 필요하다.

 

그런데, 이 소설을 읽으며 과연 어떤 성장통이 필요한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청소년기의 방황이 모두 성장통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청소년기의 일탈은 모두 성장통인가?

 

'시계태엽 오렌지'라는 제목의 뜻도 명확하지 않다. 어쩌면 청소년기에 일어나는 방황, 일탈 등이 논리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음을 보여주는지도 모른다. 제목 자체에서도 그냥 그대로 받아들여라, 여기에 어떤 이유를 붙이지 말아라는 의도가 보인다고나 할까.

 

알렉스라는 청소년이 소설의 화자이자 주인공이다. 그가 겪은 일을 독자들에게 알려주는 식으로 소설이 서술되고 있다.

 

총3부인데 1부는 알렉스 패거리가 벌이는 패악이 서술되고 있다. 그야말로 일탈이나 방황이 아닌 범죄다. 이것이 성장통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성장통과 범죄는 구분해야 한다. 성장통은 법 테두리 내에 있는 것이고, 범죄는 법 테두를 벗어난 것이다. 그럼에도 이 소설에서 알렉스의 방황, 일탈을 성장통으로 보자. 일종의 성장소설이라고 볼 수 있으니까.

 

마약에 준하는 약물에 취하는 청소년들, 거리낌없이 폭행하고, 강간하고, 약탈하는 모습이 1부에 나타난다. 도덕심이라고는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는 그런 모습들. 결국 살인까지 저지르는 알렉스. 패거리들에게도 배신당하고 감옥에 가야만 하는 지경에 이른다.

 

2부는 감옥에서의 생활이다. 국교(국립교도소를 줄여서 화자인 알렉스는 이렇게 말한다)에서 또다시 폭력을 행사하고, 새로 생긴 치료법의 대상자가 된다. 14년형을 받았지만, 이 치료를 받으면 2주만에 나갈 수 있다는. 루도비코 치료법을 받게 되는 알렉스. 이는 약물치료라고 할 수 있다.

 

폭력적인 장면이나 생각을 하면 몸에 고통을 유발하는 그런 치료법. 결국 고통을 겪지 않기 위해서 착한 행동이나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는. 이 치료를 하는 영화에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이 삽입되고, 알렉스는 이 음악을 들어도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된다.

 

우수한 치료 수료자로 두 주가 지나 사회로 나온 알렉스. 여기에 알렉스의 의지는 없었다. 그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진 것이다. 선을 행하든, 악을 행하든 어떤 선택도 할 수 없고, 그저 약물로 인한 변화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 알렉스.

 

비행청소년이었던 알렉스는 과연 선택을 했던 걸까? 그에게 선택의 여지가 그때도 없었던 것은 아닐까? 마찬가지로 교도소에서 알렉스 역시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없다.

 

선택의 권리가 없는 인간, 자유의지를 상실한 인간이다. 자, 이런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바람직한가? 이 질문에 답을 해야 한다. 지금 우리 사회도 흉악범들에게 약물치료를 하고(또는 하려고) 있지 않은가.

 

3부가 되면 사회에 나온 알렉스. 치료 효과가 신문을 통해 홍보가 되고, 알렉스는 과거 자신이 행패 부렸던 사람들에게 당한다. 당하면서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이런 약물치료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러나 그들 역시 알렉스를 이용하려고 하지, 그에게 어떤 선택권을 주지 않는다.

 

교도소에 갖다온 알렉스는 선택의 권리가 없는, 자유의지를 상실한 인간이 되어 버렸다. 인간? 그는 태엽을 감아줘야 움직이는 기계에 불과한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러니 태엽이라는 말 다음에 오렌지든, 사람이든, 원숭이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어차피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존재에 불과한 것이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온 알렉스. 자, 세월이 조금 흘렀고, 많은 경험을 했다. 그리고 다시 예전과 같은 모습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하는데, 불현듯 미래 자신의 모습이 떠오른다.

 

미래를 생각한다는 것, 이제 청소년기의 성장통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성장통에 시달리는 청소년은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현재만을 알고, 감정에 따라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소설은 알렉스가 자기 아이를 두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으로, 그런 삶을 살아가야겠다는 결심으로 끝난다.

 

지독한 성장통이구나! 우리나라 청소년들 가운데도 알렉스의 어린 시절과 같은 무시무시한 짓을 저지르기도 하는데, 이들도 이렇게 몇 년이 지나면 미래를 생각하면서 자신의 길을 바꾸게 될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가 미래를 설계하고 나아가는데, 알렉스 자신이 짓밟았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알렉스의 성장에 초점을 맞추면 이렇게 갖은 비행을 저지르더라도 결국에는 제자리로 돌아오게 된다는 쪽으로 읽기 쉽다.

 

너무 위험한 읽기다. 그들의 비행을 언젠가는 괜찮아질 거야 하면서 보아 넘겨만 줄 수는 없는 것이다. 청소년기는 '시계태엽 오렌지'와 같다면, 어떻게 태엽을 작동할지가 중요하다. 즉, 자기 의지로 행동을 조절하지 못한다면 외부의 힘으로 행동을 조절하게 해야 한다. 어쩔 수 없는 과정이라면 그때 제어할 수 있는 외부 환경이 중요한 것이다.

 

이런 쪽으로 초점을 맞추어 읽다보면 그렇다면 청소년들에게는 자유의지가 없는가라는 의문이 떠오른다. 아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자유의지가 있다. 이 자유의지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해 주되, 다른 사람들의 자유의지를 침해하지 않는 범주에 대해 인식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범죄는 자유가 아니다. 그 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

 

그러나 범죄를 저지른 청소년들을 언제까지나 범죄인 취급해서도 안 된다. 그들에게 반성과 변화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 비록, 그것이 희생자를 둔 사람에게는 너무도 힘든 일이지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알렉스가 1부에서 저지른 범죄의 희생자가 된 소설가에게서 볼 수 있다. 아내를 잃은 그가 얼마나 알렉스를 증오하고 있는지를. 아마도 이 소설이 성장소설이 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돌고 돌아 알렉스가 괴롭혔던 사람들에게 거꾸로 괴롭힘 당하는 장면이야 인과응보라 할 수 있어도 이 작가가 알렉스에게 한 행동, 그리고 그가 영원토록 겪어야 하는 고통을 생각하면, 청소년기에 했던 짓이 해서는 안 되는, 자유라는 말로 정당화될 수 없는 행동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소설의 말미에 알렉스의 말을 빌려 청소년기에 대해 말하고 있다.

 

'청춘은 가버려야만 해. 암 그렇지. 그러나 청춘이란 어떤 의미로는 짐승 같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아니, 그건 딱히 짐승이라기보다는 길거리에서 파는 쬐끄만 인형과도 같은 거야. 양철과 스프링 장치로 만들어지고 바깥에 태엽 감는 손잡이가 있어 태엽을 끼리릭 끼리릭 감았다 놓으면 걸어가는 그런 인형. 일직선으로 걸어가다가 주변의 것들에 꽝꽝 부딪히지만, 그건 어쩔 수가 없는 일이지. 청춘이라는 건 그런 쬐끄만 기계 중의 하나와 같은 거야.' (222쪽)  

 

자, 이게 청춘이라면 우리는 일직선 상을 정리해서 청춘이 부딪히지 않도록, 아니면 부딪히더라도 제자리로 올 수 있도록 정리를 할 수가 있다.

 

성장통을 피할 수 없다면, 그 성장통으로 인해 다른 사람의 자유가 없어지는, 생명이 없어지는 그런 일을 만들지 않도록 환경을 정비해야 한다. 성장하고 있는 개인에게 약물치료가 아니라, 그가 충분히 성장통을 겪을 수 있는 그런 환경을.

 

소설은 그래서 알렉스의 성장에 초점을 맞추어도 좋지만, 이런 청춘들의 성장통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환경을 만드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도 좋다.

 

알렉스와 같은 청소년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우려가 있다. 이 소설을 읽으면 기성세대들이 청소년들의 성장통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를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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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등 시민 - 엄마를 위한 페미니즘 소설 선집
모이라 데이비 엮음, 김하현 옮김 / 시대의창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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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등 시민"은 엄마를 위한 페미니즘 소설 선집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 '엄마를 위한'과 '페미니즘'이 함께 나오고 있는데...

 

9편의 소설을 뽑아 엮은 소설 선집이다. 그런데 읽다보니 장편소설에서 한 장이나, 한 부분을 발췌한 소설도 있다.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같은 경우 장편소설인데, 이 소설에서 세서가 아이를 낳는 장면을 싣고 있다. 그 소설 전체를 읽어야 이 부분이 이해가 될 텐데, 그 점이 좀 아쉽기는 하지만, 다른 소설들을 읽으며 엄마의 삶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어서 좋다.

 

여성이 아니라 엄마다. 아니 엄마인 여성이다. 아이를 낳아 기르는 여성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어떤 소설은 담담하게 또 어떤 소설은 분노를 담아 표현하고 있다.

 

아이를 낳아 살기 위해 바등거리다 아이와 거리가 멀어진 엄마 이야기를 다루는 소설도 있고, 아이를 낳는 과정을 다루는 소설도 있지만, 이 소설 선집에서 두 소설을 중심으로 생각을 하게 된다.

 

부치 에메체타가 쓴 [이등 시민]과 린다 쇼어가 쓴 [나의 죽음]이라는 소설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우선 [이등 시민]은 능력 있는 여자인 아다가 부모가 죽고 사회적인 압력에 또 자신이 살아가기 위해서 결혼을 하는데, 결혼한 남자가 능력이 없는 남자였던 것. 아이를 낳으러 병원에 왔지만, 남편이라는 작자는 자신밖에 모르고.

 

그럼에도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여성의 모습을 다루고 있는 소설인데... 남편의 부속물로서 살아가는 아다가 독립하려고 노력하는 모습, 꿋꿋하게 살아가려는 모습이 여성의 삶을 생각하게 한다. 토니 모리슨이 쓴 [빌러비드]에서도 세서가 겪는 삶에 대해서, 흑인, 여성, 엄마라는 중첩된 관계 속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이 [이등 시민]도 그런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여성들은 여전히 남성에 비해서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다. 직장에 나가는 여성이라고 해도 집에 돌아오면 남성들보다 더 많은 일, 아니 어쩌면 거의 대부분의 집안일을 해야 하니, 여성들이 겪는 어려움은 여전하다고 할 수 있다.

 

예술가로 살아가는 여성들도 마찬가지다. 그들 역시 예술가로서, 엄마로서 이중의 틀을 조화시키거나 한 쪽을 희생하거나 무시하거나 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엄마가 얼마나 힘들게 살아가는지를 처절하게 보여주는 작품이 [나의 죽음]이다. 자신이 죽었다고 하면서도 집안일과 아이들을 위해 하는 일을 멈출 수가 없다. 죽음까지도 집안일을 해방시키지 못하는 삶의 모습이 나와 있다.

 

엄마를 위한 페미니즘 소설이라고 하지만, 사실 이런 소설은 남성들이 읽어야 한다. 어떤 남성은 자신이 집 안에서 일을 많이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 이 책 부록에 실려 있는 한 글에 그런 내용이 나온다.

 

아내가 일주일간 집을 떠나게 되면서 집안일을 했던 남자가 그 전에 자신은 30%정도 집안일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직접 겪어보니 10%정도밖에는 일하지 않았다고 하는 이야기. (216쪽)

 

그러니 감정이입을 하게 만드는 문학이 소설이니, 이런 엄마들이 주인공이 되어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는 소설을 남성들이 읽어야 한다. 아니면 여성 중에서 이런 일을 겪지 않은 사람들... 돈이 많아 집안일을 남에게 맡기고 있는 사람들과 그와 비슷한 사람들도 이 소설을 읽어야 한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고 있는데, 아이를 키우는 것이 엄마만의 몫은 아니고, 또 남성과 여성 그리고 다른 성적지향성들이 모두 함께 세상을 지탱하고 있고, 그들 모두가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야 하는데, 누군가의 희생으로 다른 사람들이 편하게 지내지는 않았는지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성장기에 있는 사람들도 읽었으면 좋겠다. 엄마라는 존재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게 될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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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러비드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6
토니 모리슨 지음, 최인자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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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토니 모리슨이 타계했다. 외국 작가들에 대해서 별 관심은 없었지만, 우리나라 언론이 다룬 작가들은 꽤 알려진 작가라는 생각, 그리고 토니 모리슨에 대해서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었기에, 타계 소식을 듣고 모리슨이 쓴 작품을 읽어 본 적이 없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 작품은 예의상(이런 말을 하는 것보다는 호기심에... 도대체 노벨문학상을 받는 작품들이 어떤지 알고 싶다는 그런 마음) 읽어보곤 했는데, 어째서 이 작가 작품은 읽어본 적이 없을까?

 

아마도 편견 때문이었을 것이다. 흑인 작가라서, 흑인들의 비참한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 어쩌면 먼 과거의 이야기를 읽는다는 느낌을 받지 않을까 하는, 이미 과거 속으로 사라진 이야기를 재구성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선입견이 작동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흑인에 관한 이야기가 과거라고? 이미 지나간 이야기라고, 아니다... [헬프]라는 영화나 [히든 피겨스]라는 영화 또는 책이 다 흑인들이 겪어야 했던 과거를 다루고 있지만, 그것이 아주 먼 이야기, 과거 속에만 존재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너무도 많은 과거가 있지만(이런 표현은 이 책에도 나온다), 이들이 언제든 과거에만 갇혀 살아서는 안 된다. 이들에게는 그 과거는 현재를 살아가는데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되고, 또 미래를 살아가는데도 장애물로 작용해서는 안된다.

 

이 소설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주인공은 '세서'가 살고 있는 집에 두 사람이 방문한다. 순차적으로. 한 사람은 과거 백인 주인의 집에서 함께 살았던 '폴 디', 또 한 사람은 자신이 죽인 딸이라고 추정하는 '빌러비드'

 

둘 다 과거와 관련된 인물이지만, 이들이 세서를 대하는 태도는 다르다. 폴 디는 미래로 나아가는, 즉 현재에 충실하게 살아가게 하는, 세서를 사회로 나서게 하는 역할을 하는 인물이다. 그와 함께 세서는 페쇄된, 유령이 나온다고 하는 124번지 집에서 나오게 되는데, 바로 이때 빌러비드가 등장한다.

 

밖으로 나오려는 세서를 다시 안으로 몰아가는 인물. 빌러비드와 폴 디는 함께 할 수 없다. 결국 폴 디가 쫓겨나고 세서는 빌러비드와 함께 집 안에만 있게 된다. 직장도 그만두게 되고... 계속 자신의 과거를 끄집어내 이야기하게 된다.

 

현재 함께 살아가고 있는 딸 덴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수많은 과거를 현재에 하나하나 반추하면서 살아가는 세서는 점점 약해질 수밖에 없다. 과거 속에 갇힌 인물은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세서를 구해주는 인물은 바로 딸 덴버다. 이대로 가다가는 죽어버릴 수밖에 없다고 느낀 덴버가 어려운 발걸음을 떼고 밖으로 나온 것.

 

덴버가 밖으로 나옴으로써 안에 갇힌 세서의 일이 알려지고 결국 세서는 빌러비드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자신을 옭아매던 과거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 그렇다고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그것은 지극히 힘든 일이다. 그럼에도 희망은 있다. 소설은 그 희망을 이야기한다.

 

빌러비드에 의해 쫓기듯이 나갔던 폴 디가 다시 돌아와 세서를 돌보겠다고 한 것. 집 안에만 있다가 밖으로 나온 덴버가 이제는 어엿한 사회생활을 하게 된 것. 물론 여전히 갈 길은 멀지만...

 

환상적인 장면과 현실적인 장면이 겹쳐지면서 소설은 묘미를 더해가는데... 세서의 삶을 통해, 또 폴 디의 삶을 통해서 남북전쟁 전후를 살아가는 흑인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들을 만날 수가 있다.

 

백인 주인에게 잡혀가게 하느니 자신의 손으로 자식을 죽이겠다는 세서의 행동을 중심으로 소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고 할 수 있는데... 착한 백인, 나쁜 백인으로 구분할 수 없다.

 

인종차별주의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주인으로 나오는 가너도 결국은 백인일 뿐이며, 흑인들의 탈출을 돕는 보드윈에게 세서가 달려드는 것도 그런 이유때문이다.

 

개인의 좋고 나쁨으로 흑인들의 삶이 행복하다 말다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보드윈은 노예제를 반대한다. 그래서 흑인들의 탈출을 돕는다. 이런 사람에게 달려드는 세서의 행위는 특정 개인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노예제, 인종차별제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다.

 

그것이 가해자에게 분노를 폭발하기보다는 자기 자식들에게 해를 가하는 쪽으로 행했던 과거의 행동과는 달라진 것이다. 세서가 현재를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이는 것이 바로 이 결말 쪽의 행동이다.

 

그렇다고 자식을 죽인 세서의 행동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 우리나라 영화 [황산벌]의 마지막 장면에 계백이 아내와 자식들에게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죽으라고 하는 장면에서, 아내가 거부하고, 결국 계백이 칼을 휘두르는 장면이 나오는데...

 

[황산벌]과 이 소설이 지닌 차이는 계백은 죽어서 더이상 고통을 받지 않는다. 자기 손으로 죽인 가족에 대한 고통을, 하지만 이 소설에서 세서는 살아 있기에 계속 고통을 받는다. 주변 사람으로부터, 또 살아남아 자기 곁에 있는 딸인 덴버에게도.

 

이 장면이 이 소설의 장면과 겹쳐지면서 여러 생각을 하게 한다. 자신이 겪었던 인간 이하, 동물처럼 취급당했던 일들을 자식들이 겪에 할 수 없다는 절박한 생각. 그 생각에 백인에게 끌려가게 하느니 차라리 죽어서 함께 저 세상에서 살자고 하는 몸부림.

 

그렇게까지 나아가게 했던 노예제의 비극. 흑인들이 몸으로 겪어야 했던 결코 잊을 수 없는, 사라지지 않는 고통들. 그 고통들을 소설은 전달하고자 한다. 독자들에게 그 고통이 전해졌을 때 읽는 이는 형식적인 노예제는 사라졌지만 암암리에 벌어지고 있는 인종차별이 노예제와 별로 다르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한 차별이 극한의 고통으로 몰아가게 됨을, 그래서 쉽게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함을, 우리는 이 소설을 읽으며 흑인들이 옛날에 참 힘들게 살았구나 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차별들이 이 소설의 주인공들이 겪어야 했고, 또 지니고 살아야 했던 고통과 같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나라는 개인이 아니라 우리라는 집단이 알게모르게 차별을 조장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아야 한다. 나는 착한 쪽이라고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소설을 통해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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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푸가 - 파울 첼란 시선
파울 첼란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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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많이 들은 시인. 파울 첼란. 유대인으로 태어나 학살을 경험하고,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시를 쓴 사람.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는 불가능하다는 말을 아우슈비츠를 바탕으로 서정시를 쓴 사람으로 알려진 시인.

 

그러나 독일어로 쓰인 시를 우리말로 번역을 하면 의미만이 아니라 시가 주는 울림도 제대로 전달되기 힘들다. 시를 번역하는 것이 그만큼 힘든 일일지도 모른다.

 

첼란은 시를 유리병 편지에 비유했는데, 유리병 속에 담긴 사연은 길 수가 없다. 짧다. 그 짧음을 해석해 내는 것. 바로 시를 읽는 사람의 역할이다.

 

우리말로 번역된 이 시집 역시 마찬가지다. 바다 건너 저 편에서 온 유리병 편지를 읽어내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

 

그럼에도 언어는 어떤 울림을 준다. 그냥 자신의 마음에 들어오는 시들이 있다. 우선 파울 첼란이 시에 대해서 한 말을 보자.

 

시는, 언어의 한 현상 형태로, 그 본질상 대화적이기 때문에 일종의 '유리병 편지' 같습니다. -분명 희망이 늘 크지는 않은 - 믿음, 그 유리병이 언젠가, 그 어딘가에, 어쩌면 마음의 땅에 가 닿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유리병에 담아 띄우는 편지요. (223쪽)

 

시는 하나의 타자에게로 가려 합니다. 타자를, '마주 섬'을 필요로 하지요. 시는 그걸 찾아갑니다. 자신을 그것에게 줍니다.

타자를 향해 있는 시에게는 사물 하나하나, 사람 하나하나가 그대로 타자의 형상입니다. (240쪽)

 

이 말들을 통해서 그의 시를 받아들이고자 한다. 이 시선집에 실린 마지막 시 제목이 '시 닫고, 시 열고'이다.

 

시집을 닫으면서 시는 열리고 있는 것이다. 닫힘과 열림이 함께 있다.

 

시(詩) 닫고, 시(詩) 열고

 

여기서 빚깔들은

보호받아 본 적 없는

맨이마

유대인에게로 간다

여기 떠오르고 있다

가장 무거운 사람이.

여기 내가 있다. (218쪽)

 

또 한 편의 시가 있다. 말들이 난무하는 시대, 말들을 막아서도 안 되지만, 말도 안 되는 말들이 나돌아 다니게 하는 것도 문제라는 생각이 드는데... 첼란이 의미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이 시가 해석될 수도 있다.

 

우리는 말이 칼이 되는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파리 하나, 나무도 없이

베르톨트 브레히트를 위하여

 

이 무슨 시대란 말인가

대화가

거의 범죄이니

그 많은, 이미 말해진 것을

포함하기에. (208쪽)

 

유리병 편지가 오는 동안 시대가 바뀌었고, 말에 대한 판단이 바뀌었다. 정말 이 무슨 시대란 말인가. 말이 아닌 말들이 말이라는 탈을 쓰고 돌아다니고 있는 이 시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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