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 연예인 이보나
한정현 지음 / 민음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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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편의 소설이 묶여 있다. 다 다른 내용이다. 그런데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겹치고, 사건들도 어느 정도 겹치기도 해서 연작소설이라는 느낌을 주는 소설집이다. 분명 연작소설은 아님에도.


등장인물의 이름이 같지만, 내용은 소설마다 다르다. 그러니 이 소설들은 서로 연결이 되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이상하게 연결이 된다.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주는 연결성인지, 각 소설에서 펼쳐지는 내용이 서로 연결을 해주는지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아마도 이 둘이 소설과 소설을 이어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소설을 이어주는 이런 요소들은 결국 사랑이다. 있는 그대로의 사랑. 누군가의 편견으로 굴절된 사랑이 아니라, 누군가의 기대대로 행해지는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받아들이면서 나아가는 사랑. 그런 사랑들이 이 소설집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각 소설들은 독립되어 있으면서도 느슨한 연결망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리고 이런 연결망 속에서 우리는 '사랑'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삶의 다른 이름이 사랑이라면, 이 소설집을 통해서 삶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각자의 삶은 각자의 삶이 있다. 함께 살아가면서도 우리는 절대적인 개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내 삶을 누군가 규정할 수 없는 것이다. 내 삶을 온전히 내 삶으로 받아들여 줄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내가 원하는 삶이기도 하다. 그런 삶이 바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사람을 사람으로 보기보다는 어떤 틀에 맞춰서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이미 사회에 존재하고 있는 관점이라는 안경을 통해서 보는 경우. 그런 경우 그 사람을 그 사람으로 보지 않고 사회라는, 틀이라는 관점에서 비틀어서 보게 된다.


즉 틀에서 벗어난 사람을 배제하고 도외시하게 된다. 틀에서 벗어난 사랑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틀에 맞추려고 한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둔갑되어 행사되기도 한다. 사랑이 아니라 폭력인데도, 폭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분위기가 팽배한 사회에서는 틀에 맞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억압받고 배제된다.


그런 모습들이 이 소설집에서 잘 형상화되어 있다. 따라서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은 무겁다. 읽어가면서 무거운 압력을 느낀다. 짧은 소설이라 금방 읽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아니다, 글자들, 문장들이 계속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잡는다.


한걸음 한걸음 소설을 읽어나가는 일이 버겁다. 소설의 무게에 눌려 더 천천히 읽게 된다. 그러면서 과거-현재의 틀을 계속 의식하게 된다. 이 틀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앞으로도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이 소설집에 나오는 인물들을 통해서 실감하게 된다.


이 소설집에 나오는 인물들은 대부분 소수자들이다. 틀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틀에서 벗어나 있다고 틀 속에 갇히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틀에서 벗어나 있기에 편견 없이 다른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다.


"아무렴 어때!" 삶은 삶일 뿐이다. 모두에게 모두의 삶이 있을 뿐이다. 그런 삶은 부끄러운 것도,억압받고 배제되어서도 안 되는 삶이다. 그렇게 있는 그대로 보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그런 사랑이 소설에 스며들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은 무겁지만, 주저앉게 하지 않는다. 무겁지만 한발 한발 나아가게 한다. '우리의 소원은 과학 소년'이라는 소설 속 인물이 하는 말이 마음에 새겨진다.


"이름을 기억할 것" "낙관할 것" (276쪽)


그렇다. 이들은 모두 이름을 지니고 살아가려 한다. 주어진 이름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이름을 짓기도 한다. 소설집 제목에 나오는 '이보나'라는 이름 역시 인물이 직접 지은 이름이다. 이름을 갖는다는 것, 이것은 배제하려는 사회에 맞서 자신을 지키고, 자신도 있음을 알리는 일이다.


트랜스젠더인 인물이 스스로 이름을 '제인'이라고 짓듯이 (제인은 이 소설집 여러 곳에 등장한다. '소녀 연예인 이보나'에서 제인은 자기 스스로 이 이름을 짓고 그렇게 살아가고자 한다), 또한 '우리의 소원은 과학 소년'에서 죽어가는 엄마가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달라고 하고 주인공이 스스로 '안나'라는 이름을 짓듯이, 자신을 같은 사회에서 살아가는 뚜렷한 한 존재로 인식하려는 의도가 이 이름을 짓고, 기억하는 것에 달려 있다.


누군가가 지어준 이름이 아니라 자신이 지은 이름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인물들의 삶은 무겁다. 무겁지만 희망이 있다. 


이 소설집에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기억해야 할 아픈 사건들이 나온다. 그런 사건을 통해서 약한 사람이 더욱 힘들어지는 현실을 작가는 보여주고 있다. 광주민주화운동과 공권력에 의해서 자행된 성추행(성고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등은 물론이고, 성소수자들에 대한 탄압이 얼마나 그들의 삶을 파괴했는지도,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얼마나 폭력적이었는지도 소설을 통해서 잘 드러내고 있다.


무겁지만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래서 소설을 읽으면서 희망을 버리지 않게 된다. 다만 앞으로 나아가는 길에 많은 장애물이 있음을, 결코 빨리 갈 수는 없음을 소설 속 인물들을 통해서 깨닫게 된다.


[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를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보다 나중에 나온 소설인데 읽는 순서가 바뀌었지만, 발표 순서와는 관계 없이 소설 속 현실은 지금-여기에서 우리가 겪고 있는 일임을 잊지 않게 한다.


책을 내려놓기 싫은 마음이 드는, 천천히 각 소설들의 인물들을 따라서 자꾸 뒤돌아보면서 그렇지만 앞을 향해 뚜벅뚜벅 나아가는 읽기를 하게 한 소설집이다.


좋은 작품을 쓴 작가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찾아서 꼭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읽고 난 후에도 여전히 마음에 묵직하게 남아 있는 무거움을 느끼게 한 소설들이니... 그 무거움이 앞으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게 한다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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