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 주파수 - 청소년 테마 소설 문학동네 청소년 41
구병모 외 지음, 유영진 엮음 / 문학동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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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테마 소설집이다. 청소년기에 느끼는 불안을 주제로 일곱 명의 소설가가 쓴 소설을 모아놓았다. 청소년기에 느끼는 불안은 청소년들마다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이런 테마 소설집에서 동일한 주제라고 하여도 다양한 내용을 다룰 수밖에 없다.

 

소위 말하는 정통 리얼리즘 기법으로 쓴 소설도 있고, 환상적인 기법이 나타나는 소설도 있다. 그럼에도 청소년기에 느끼는 불안이 어떤 것인지 알려고 그것에 주파수를 맞춰 읽게 된다. 물론 주파수가 알려져 있지 않기에 정확히 맞춘다는 보장은 없다.

 

이것이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청소년들마다 느끼는 불안은 다를 수밖에 없고, 그들이 우리에게 보내는 신호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 이 청소년에게 잘 적용되었던 것이 다른 청소년에게는 부작용을 일으킬 수도 있다. 그러니 해법은 하나다. 주파수가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

 

우리가 여행을 가면 동일한 방송이라고 할지라도 지역에 따라서 주파수가 달라진다. 주파수를 옮겨야지만 그 방송을 들을 수가 있다. 청소년기에 느끼는 불안도 마찬가지다.

 

진형민, 헬멧

최영희, 단추인간 보고서

구병모, 유리의 세계

오문세, 거울 속에 있다

최상희, 어디에도 있는

김진나, 나딸

송미경, 마법이 필요한 순간

 

이렇게 일곱 편의 소설이 있는데... 청소년기에 접하게 되는 다양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헬멧'은 오토바이를 쉽게 연상할 수 있게 한다. 청소년기에 질주 본능을 어쩌지 못해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폭주족들을 연상하지 않아도 아르바이트로 오토바이로 배달을 하는 청소년들도 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는 가장 최소한의 요소가 바로 헬멧이다. 귀찮더라도 써야 할 것.

 

'단추인간 보고서', 환상적인 표현인데, 사람의 몸에 단추 구멍이 생긴다. 똑딱이 단추. 그것이 몸의 구멍을 닫고 있는 데 단추를 열어본다는 것. 그것이 무엇일까? 자신의 본질을 들여다보고,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으로 살아간다는 것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을 들여다보기를 두려워하는지도 모른다. 그런 점, 자신의 내면, 또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솔직하게 파악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모습이 청소년기에 불안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유리의 세계'에서는 기존의 관습에 저항하는 청소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어쩌면 불필요한 유리 상자 속에 갇혀 사는 어른들과 달리, 유리 상자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세상은 쓸모만으로만 구성되지 않고 쓸모없음이 함께 할 때 더 아름다울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으니, 청소년기에 겪는 일들이 꼭 쓸모 속으로 가둬버릴 수 없음을, 그렇게 쓸모 속에 갇혀 있는 것에 대한 불안을 다루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거울 속에 있다'와 '어디에도 있는'은 외모와 학교라는 곳에서 불안을 느끼는 청소년의 모습을, 나딸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 자라나는 청소년의 불안을, '마법이 필요한 순간'은 세상을 멈춰버리고 싶은 욕망에 휩싸이는 청소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불안, 삶에서 완전히 없앨 수 없다. 아니 불안을 없애서는 안 된다. 이 불안은 우리 삶에 꼭 필요하다. 다만 이런 불안을 인식하고 그것을 정면에서 마주치고 이겨내려고 해야 한다.

 

그럼에도 청소년기에는 불안함을 느낀다. 그런 불안함이 삶과 함께 하고 있음을 이 청소년 테마 소설을 통해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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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 썰록
김성희 외 지음 / 시공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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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는 문학보다는 영화에서 더 유행했다. 세상이 각박해질수록 좀비가 예술에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 '월드 워 Z'가 있고, '부산행'이 있고 또 기타 등등 많은 좀비 영화들이 있었는데, 물론 좀비 영화도 문학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좀비는 인간이었던 존재, 지금은 인간이 아닌 존재다. 우리나라 귀신과 좀비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데 다른 점은 귀신은 주로 밤에 나타난다면 좀비는 시도때도 없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또 귀신은 자신에게 해를 입힌 존재를 응징하는 역할을 주로 한다면 좀비는 불특정 다수를 공격한다.

 

이런 점에서 차이가 많이 나는데, 지금은 귀신의 시대가 저물고 좀비의 시대가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세상이 명확한 인과관계로 맺어지기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너무도 얽히고설켜 무엇이 원인이고 결과인지 정확하게 가를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니 좀비가 등장해 아무나 눈 앞에 보이는 존재를 물어뜯고 마는 것. 어쩌면 세상에 좀비와 같은 존재들이 득시글거리고 있는 현실을 예술로 승화시켜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예술 작품에서 좀비가 많이 등장하고 유행한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에 좀비와 비슷한 존재들이 있음을 우리들이 무의식 중에 자각하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 책은 우리나라 소설을 좀비를 등장시켜 재탄생시킨 작품들을 모아 놓았다. 고전소설이라고 하는데, 근대소설에 들어가는 작품도 있으니, 우리 소설과 좀비의 만남 정도 되겠다.

 

대상이 된 우리나라 소설은 (아니 다섯 편이 모두 소설이라고 할 수는 없다, 관동별곡은 정철이 쓴 가사 작품이니까. 가사 작품은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시와 수필의 요소를 갖추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정철의 관동별곡, 김시습의 만복사저포기. 주요섭의 사랑 손님과 어머니,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황순원의 소나기다.

 

이들을 각자 좀비와 만나는 작품으로 재탄생 시켰는데... 기존 작품의 틀을 유지한 작품도 있고, 기존 작품에서 빈 틈을 찾아내 메운 작품도 있다.

 

관동별곡, 강원도 관찰사로 가는 정철의 이야기...갈 때 만나는 좀비, 좀비들을 퇴치할 수 있는 약(김치)을 만드는 것. 관료들의 무책임. 이런 것들을 잘 버무린 김성희가 쓴 소설인데... 제목을 영화 부산행을 연상할 수 있게 '관동행: AMA TO GWANDONG'이라고 했다.

 

이 소설을 읽으며 우리가 학교 다닐 때 죽어라 외웠던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을 쓴 정철을 떠올리기보다는 몰락한 양반, 꾀죄죄한 양반을 떠올리지만, 그럼에도 단점을 장점으로 만들어내는 주인공에게 공감할 수가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로 일컬어지는 김시습의 '금오신화'에 실려 있는 작품 중 하나인 만복사 저포기를 비틀어서 '만복사 좀비기'로 바꾼 정명섭의 소설. 소설에서는 부처님과 내기에 이겨 귀신과 결혼하는 사람이야기지만, 여기서는 그 자신이 좀비로 죽임을 당하는 쪽으로 내용이 바뀌었다. 좀비와 인간의 구분은 보통 아주 명확하게 나오는데, 이 소설에서는 끝에 가서야 좀비와 인간의 구분을 알 수 있는 추리적인 요소까지 겸비하고 있다. 만복사 저포기의 기본 축을 바탕으로 내용을 뒤집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로도 만들어지고 지금은 옥희의 말투를 재미있어 하기도 하는 '사랑 손님과 어머니'를 비튼 소설 '사랑 손님과 어머니, 그리고 죽은 아버지'라는 작품은 전건우가 썼는데, 예전 관습을 거스르지 못하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원작 소설을, 자신에게 주어진 한계를 스스로 탈피해 나가는 여성 주인공으로 어머니를 내세운 것이 특징이다.

 

좀비 앞에서도 결코 당황하지 않고 당당하게 그들을 물리치는 여성 주인공. 소설에서는 아버지가 죽은 것으로 나오지만 이 작품에서는 아버지가 살아 있고, 결국 죽음에 이르고 좀비가 되는, 가부장의 모습 그리고 그에 동조하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다. 가부장적 사회가 여성에게는 좀비처럼, 또는 좀비보다도 더 무서운 족쇄였음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조영주가 쓴 '운수 좋은 날'은 제목을 그대로 따왔다. 다른 작품들이 제목을 조금씩 변형했다면 이 소설을 제목을 그대로 쓴 대신 내용은 크게 변형했다. 아마도 제목을 다른 것으로 했다면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을 떠올리기 힘들지도 모른다. 물론 작품의 끝부분에 김첨지가 등장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두 소설의 연관성을 짐작하기가 쉽지는 않다.

 

이 작품이 지닌 참신성은 김첨지가 오래도록 살아남은 데 있다. 좀비는 오래 살아남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피가 공급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끊임없이 살아있는 인간의 목을 물어 뜯는다. 피를 먹어야 하기 때문. 그렇기에 그들은 인간에게 위협이 되고, 인간과 좀비는 목숨을 걸고 서로를 없애려고 한다. 피, 고기. 육식성의 극한, 살인. 그것이 좀비다.

 

이 작품은 이런 틀을 벗어난다. 채식 좀비의 등장이다. 좀비가 채식을 한다? 그렇다면 인간과 적대적일 이유가 있을까? 없다. 오히려 육식을 하는 인간을, 그런 좀비를 거부하려 한다. 그게 이 작품이다. 새로운 좀비를 제시한 작품.

 

차무진이 쓴 '피, 소나기'는 슬프다. 원작 '소나기'도 슬프지만 이 소설은 좀비가 된 소녀가 또 죽게 되는 데서 슬픔은 배가 된다. 좀비이기 때문에 공격적이고 피를 원하는 것은 공통적이지만 말을 할 수 있는 좀비. 이를 이해하는 소년. 소년에게만은 공격하지 않는 소녀 좀비.

 

또 한번의 죽음을 맞으며 '죽기 직전에 제 할아버지한테 자기가 죽거든 입었던 옷을 꼭 함께 묻어달라고." (330쪽)말했단 구절, 소나기의 마지막 구절을 다시 한번 만나게 하는 것으로 소설의 결말을 삼은 작가는 소녀의 첫번째 죽음을 우리에게 불러옴으로써 소녀의 죽음을 좀비의 죽음으로 치환하지 않게 한다.

 

이런 식으로 다섯 편의 작품이 예전 작품을 토대로 새롭게 탄생했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작품을 이런 식으로 비튼 것들은 우리 문학이 지속적으로 재탄생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도 다양한 활동들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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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제10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박상영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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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으로 최근 소설의 경향을 경험한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젊은 작가라 함은 나이를 뜻하기보다는 (물론 나이도 어느 정도는 관계 있다) 등단한 지 오래되지 않은 작가를 의미하는데, 이 책은 뒤에 실린 심사평을 보면 등단한 지 10년이 넘지 않은 작가들의 중단편 가운데 일곱 편을 뽑은 작품집이라 하니, 그래도 최신 경향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소설을 읽으면서 현실에서 벗어나 현실을 생각하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 작가들이 작품에서 표현하고 있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우리 사회를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이 실려 있다고 할 수 있는데...

 

박상영, 우럭 한 점 우주의 맛

김희선, 공의 기원

백수린, 시간의 궤적

이주란, 넌 쉽게 말했지만

정영수, 우리들

김봉곤, 데이 포 나이트

이미상, 하긴

 

이렇게 일곱 편의 소설들. 각자 나름의 특성을 지니고 있는 소설인데, 하나하나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이들 작품들에서 공통적으로 '폭력'을 느꼈다면 지나친 감상일까? 동성애에 관한 부정, 이건 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공공연하게 드러나는, 국민을 대변한다는 국회에서, 그것도 집권여당에서 나름 주도적인 자리에 있던 국회의원이 동성애를 대놓고 반대하는, 논쟁이 되는 정당과는 손잡을 수 없다는...아예 우리나라 국회에는 성소수자를 대변하는 국회의원은 없어야 한다는 말로 들리는 그런 말을 공공연하게 했으니...이보다 더 심한 폭력이 있을까?

 

박상영과 김봉곤의 소설에서 이런 폭력을 느꼈다면, 백수린과 이주란의 소설에서는 말이 지닌 폭력, 아니 우리들의 말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지도 생각지도 않고 무심히 뱉어버린 말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날카로운 칼은 말일 수도 있다. 물질로서의 칼이 육체를 벤다면, 말은 마음을 베어버리고 쉽게 봉합하거나 아물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김희선과 정영수 소설에서는 딱히 폭력을 느꼈다고 하기는 힘든데, 김희선 소설에서 언론이 어떻게 조작될 수 있는지, 현실과 희망이 어떻게 전도될 수 있는지, 그렇다면 희망에 따라 현실을 왜곡하는 것 역시 폭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

 

정영수 소설에서 '우리들'이라고 하지만,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글쓰기를 통해서 자기 구원에 이르는 것 같지만, 그것은 자신들의 세계로만 들어가는, 남들을 배제하는 그런 상황을 합리화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그래서 소설 속에 '내년'이라는 미래가 나왔을 때 그 말과 더불어 남들이 자신들의 시야에 들어오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닫아버린 세계 역시 폭력이 아닐까.

 

'폭력'이란 이름으로 이 수상작품집을 꿰려는 무리한 오독을 하면, 그 정점에 있는 소설은 바로 이미상이 쓴 '하긴'이란 소설이다.

 

빛바랜 이야기 같지만, 아니다. 여전히 우리 사회를 주름잡는 사람들은 세칭 86세대들이니, 이들이 자신들의 관점을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강요하고 있는지 (물론 겉으로 강요하지 않는다. 그것은 독재다. 전체주의다. 바로 헤게모니라는 말, 자발적 동의를 얻어내는 그런 과정을 거친다. 폭력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폭력, 이것이 더 무서운 폭력이다) 소설을 읽으며 느낄 수 있다.

 

섬뜩하다. 후일담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아니다. 이건 후일담이 아니다. 86세대가 지닌 모습을 풍자가 아니라 적나라하게 드러낸 소설이다 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대학입시라는 것을 통해 기성세대의 위선을 비판하는 것 같지만, 중심은 86세대다. 그들이 얼마나 오만하게 자신들의 세상을 살아가는지를...그것도 자신들이 비판했던 모습과 비슷하게.

 

이 소설을 읽으면 당연히 86세대가 떠오르고, 여기에 김누리 교수가 했던 말이 함께 겹친다. 우리나라는 68혁명을 겪지 않았다고. 그래서 생활 민주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언어유희를 좀 하면 정치 민주주의와 생활 민주주의를 구현한 세대가 68세대라면, 뒤집힌 86세대는 정치 민주주의도 생활 민주주의도 이루지 못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김누리,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해냄. 책 참조)

 

그래서 무서워졌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는.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들 답게 한편 한편이 다양한 표현방식과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인간 사회에서 없애지 못한 것이 폭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도 하고 있다. 다른 작품들에서 공통점을 찾아내려고 어거지로 짜 맞추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알게 모르게 얼마나 많은 폭력이 발현되고 있는지 생각하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 다 떠나서 이 작품집을 읽으며 참 좋다고 생각한 것은 소설이 있고, 그 소설을 쓰게 된 작가의 말이 있고, 그 작품에 대한 젊은 작가에 상응하는 젊은 평론가들의 글이 있다는 것이다. 심사평이야 이런 수상작품집에는 늘상 있는 것이니 논외로 하고.

 

그래서 좋다. 소설도 읽고, 작가의 육성도 들을 수 있고, 이 소설에 대한 비평도 읽을 수 있으니. 각 소설의 내용이 궁금하면 읽어보면 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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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꽃
보들레에르 지음 / 자유교양사 / 199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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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우울'을 읽은 다음 '악의 꽃'을 읽다. 아주 오래 전 그것도 프랑스 시인의 작품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으로 읽으니 시를 완전히 이해할 수가 없다.

 

이해라기 보다는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다른 시대, 다른 나라, 다른 상황에 처해 있는 것과 또 다른 언어를 쓴다는 것에서 차이가 나지 않나 싶기도 하다. 시는 보편적인 인간 감성을 노래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극복해 내기도 하지만.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서 어렴풋이 인식할 수 있는 것에 만족하고, 보들레르가 시인을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시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 시집의 첫 부분 제목이 '우울과 이상'인데, 우울은 현실과 이상 사이에 거리를 느낄 때 찾아오는 것, 현실에 완전히 만족하지 못하고 이상을 추구하지만 이상 세계에 도달하지 못했을 때, 그 간격이 자신에게 다가왔을 때 그 틈을 파고드는 것이 우울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우울은 민감한 감성의 소유자가 느끼는 감정이다. 자신에게서 거리를 두고 볼 수 있는 사람, 어느 한 쪽에도 완전히 빠져들 수가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이 우울을 느낄 수밖에 없다.

 

세상은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며, 또한 자기 뜻대로 되는 세상이 좋은 세상도 아닐 테니, 우울은 시인들에게는 천형과도 같은 감정이지 않을까 싶다. 시인들 대다수가 이러한 우울을 기본 감성으로 지니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데...

 

그런 그가 시인을 사로잡힌 알바트로스에 비유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알바트로스를 신천옹(信天翁)이라고 번역하기도 했는데... 이 시집에서도 알바트로스를 신천옹이라고 번역했다. 그리고 알바트로스는 바로 시인이기도 하다.

 

  신천옹(信天翁)

 

흔히 재미삼아 뱃사람들은

커다른 바닷새, 신천옹을 잡는다.

태평스런 여행의 이 동반자는

깊은 바다 위로 미끄러지는 배를 따른다.

 

일단 갑판 위에 내려놓으면

이 창공의 왕들은 어색하고 수줍어

가련하게도 크고 흰 그 날개를

노처럼 그들 옆구리에 끌리게 둔다.

 

이 날개 달린 나그네

얼마나 어설퍼 기가 죽었는가!

전엔 그처럼 아름답던 그가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추한가!

어떤 친구는 파이프로 부리를 건드려 약을 올리고

다른 친구들은, 창공을 날던 이 병신을 절름대며 흉내낸다.

 

시인도 구름의 왕자와 같아서

폭풍우를 다스리고 사수(射手)를 비웃지만

야유 소리 들끓는 지상으로 추방되니

거대한 그 날개는

오히려 걷기에 거추장스러울 뿐.

 

보들레르, 악의 꽃, 김인환 역,자유교양사. 1993년 중판. 24쪽.

 

현실에서 시인이 처한 위치, 다른 사람들이 시인을 대하는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뱃사람에게 잡혀 날지 못하고 있는 새.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날기를 꿈꾼다. 비록 몸은 지상에 묶여 있지만 언젠가는 창공을 훨훨 날아 이 지상을 내려다 보기를 바란다.

 

그러니 우울할 수밖에. 지상의 추함에, 그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음에... 하여 그는 거리의 여인들, 거리의 사람들을 시로 표현한다. 그들을 두고서는 홀로 날아갈 수가 없기에. 그러니 우울은 그의 시를 관통할 수밖에 없다.

 

'악의 꽃'

 

프랑스에서 필화 사건을 겪은 유명한 시집인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표현의 강도가 그리 심하다고 할 수 없겠지만, 그 시대에는 문제가 될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다. 시대에 굴복하지 않고, 시대를 넘어서려고 하는 존재, 시인.

 

지금도 수많은 시인들이 있고, 그들 역시 이렇게 현실과 이상 속에서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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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우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8
샤를 보들레르 지음, 윤영애 옮김 / 민음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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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산문시'라고 한다. 우리가 시라고 하면 대체로 운문이라고 하고 짧은 시를 떠올리는데, 산문시는 행과 연이 구분이 없는 좀 긴 시를 떠올린다. 여기에 서사기라고 하면 사건이 있는 소설과 비슷한 시라고 생각하고. 그런데 여기에 '소'자가 붙으면 작은 산문시, 또는 짧은 산문시라는 뜻이 될텐데... 그런 시 장르가 무엇인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한때 '이야기시' 또는 '담시' 아니면 '단편서사시'라는 개념이 있었다. 시에 이야기가 들어 있는 것이고, 그런 시를 통해서 소설에서 느꼈던 삶들을 시에서도 찾고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시들과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읽어보면 짧은 산문시도 있지만, 4쪽 정도에 걸치는 산문시도 있는데, 그것도 짧다고 해야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시인이 자신의 생각을 풀어놓을 형식으로 선택한 것이니, '소산문시'란 개념도 통할 수 있다고 인정하고 읽는다.

 

어떤 형식을 택하든 시인이 자신의 감정을 언어에 실어 표현하고 있는 것이 '시'고, 다른 글에 비하면 짧을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보들레르의 시도 마찬가지다. 파리의 우울. 근대화된 도시 파리에서 시인이 느끼는 감정을 표현한 시다. 총 50편의 시가 모자이크 식으로 나열되어 있는데, 아르센 우세에게라는 프롤로그 격인 글이 있고, 마지막에는 에필로그가 있다.

 

시작과 끝 속에서 시들이 50편, 각자 제목을 달고 배치되어 있는데, 시인의 생각과 시인이 만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밝은 분위기와 어두운 분위기, 칭찬과 비난, 화려함과 비속함이 교묘하게 대비를 이루고 있는 시들이 많은데... 이 책은 시 한 편 한 편마다 주석을 달아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보들레르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고, 자연스레 보들레르의 다른 작품들도 만나게 된다.

 

군중 속에서도 개인을 발견하는 존재.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수 있는 존재. 자연스러움에 맞서 싸울 줄 아는 존재. 그래서 시인은 발전하는 도시 파리에서 우아하고 화려한 사람들을 보기도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소외된 사람들을 보게 되고, 자신과 소통할 수 없는 사람들에 절망하기도 한다.

 

이런 시인의 모습을 드러내는 구절들이 몇 있는데...

 

당신도 깨지는 듯한 유리 장수의 소리를 샹송으로 번역해 보고 싶은 유혹을 느끼지 않았소? 이 소리가 거리의 가장 높은 안개를 가로질러 다락방까지 보내는 모든 서글픈 암시들을 서정적 산문으로 표현해 보고 싶은 유혹을 말이오. (18쪽)

 

무자비한 마술사. 늘 이기는 자신만만한 라이벌, 자연이여, 나를 놓아주오! 나의 갈망과 나의 자부심을 시험하는 일을 그쳐주오! 아름다움의 탐구는 일종의 결투, 예술가는 두려움으로 비명을 지르며 패하고 마는. (31쪽)

 

시인은 거의 초자연적이라고 할 수 있는 영혼의 예외적 순간, 자연의 모든 사물로부터 '사물의 말 없는 언어'를 들을 수 있다. (주석에서. 42쪽)

 

시인은 제멋대로 자기 자신일 수도 있고, 동시에 타인이 될 수도 있는 비길 데 없이 훌륭한 특권을 누린다. 육체를 찾아 방황하는 넋처럼 그는 자신이 원할 때 다른 사람 속에 들어간다. 그에게만은 모든 것이 비어 있는 것과 같다. (75쪽)

 

인간이 악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약간의 가치가 있다. 가장 돌이킬 수 없는 악덕이란 어리석음에서 악을 저지르는 것이다. (174쪽)

 

열린 창문을 통해 밖에서 들여다보는 사람은 결코 닫힌 창문을 바라보는 사람이 발견하는 것만큼 많은 것을 보지 못한다. 촛불로 밝혀진 창문보다 더 깊고, 더 신비하고, 더 풍요하며, 더 어둡고, 동시에 더 눈부신 것은 없다. (214쪽)

 

이렇게 '파리의 우울'을 읽으며 보들레르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됐다. 사실 보들레르의 작품은 읽어 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그의 이름은 많이 들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를 퇴폐, 세기말과 연결지어 생각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작품을 직접 읽어보니 그를 퇴폐와 세기말과 연결시키기보다는 세상을 좀더 깊이 있게 보고,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눈을 지닌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열린 창문을 통해서 세상을 본 것이 아니라 닫힌 창문을 통해서 본 것이리라. 또한 한낮의 뜨겁고 밝고 강한 태양 아래서 세상을 본 것이 아니라 어둡고 은은한 달빛을 통해 세상을 본 것이리라. 그렇게 느껴졌다.

 

그러므로 그의 시에서는 세상의 밝은 면을 이야기하더라도 꼭 어두운 면이 함께 나온다. 그런 존재들에 대한 애정이 시에서 묻어난다. 이렇게 세상은 어느 하나로 구성되어 있지 않고 밝음 속에 가려진 어둠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듯이.

 

이 '파리의 우울'을 읽어 보니 '악의 꽃'을 읽고 싶어졌다. 두 작품이면 보들레르를 만났다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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