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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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로 시작하고 싶다. "이 소설은 내 소설이다"라고 제목을 쓴 작가의 말. 작가는 '소설을 쓰는 것이 한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라 믿었던 때가 있었다.' (171쪽)고 했다. 그는 창조주가 되어 자신이 원하는 세상을 창조하고, 사람들이 그가 창조한 세계에서 거닐기를 바라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다 어느날 자신이 창조주임에는 확실한데, 참 한심한 창조주라는 것을 깨닫는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마르코 폴로처럼 아무도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여행하는 것에 가깝다.' (171쪽)고 말하고 있다. 먼저 문을 열어주어야만 들어갈 수 있는, 또 그들이 떠나라고 하면 언제든지 떠나야 하는 여행자. 그런 여행자는 자신의 경험을 다른 세계의 한계 속에서만 할 수 있다. 소설가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작가는 이렇게 또 말하고 있다.

 

'소설가라는 존재는 의외로 자율성이 적다. 첫 문장을 쓰면 그 문장에 지배되고, 한 인물이 등장하면 그 인물을 따라야 한다. 소설의 끝에 도달하면 작가의 자율성은 0에 수렴한다. 마지막 문장은 앞에 써놓은 그 어떤 문장에도 위배되지 않을 문장이어야 한다.' (171-172쪽)

 

여기까지 작가의 말을 따라가니 이상하게 작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독자에 대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독자 역시 소설을 읽으며 자신이 새로운 세계에 들어가 있다고 느끼고, 그 세계 속에서 또다른 자신을 발견한다고 생각하지만, 철두철미하게 소설 속 인물이나 사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

 

작가는 그럼에도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내 소설이다. 내가 써야 한다. 나밖에 쓸 수 없다.' (172쪽)

 

독자 역시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내가 읽는 소설이다. 내가 읽어야 한다. 나만의 방식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소설은 독자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소설가에게 소설이 자신의 것이듯 독자에게도 소설은 자신의 것이어야 한다. 그렇게 소설을 읽어야 한다. 이렇게 장황하게 작가의 말을 인용한 것은, 너무도 잘 읽히는 이 소설이 도대체 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기억을 잃어버리는 살인자... 수많은 사람을 죽였지만, 어느 순간 살인의 세계에서 물러나 딸을 키우며 살아가던 살인자. 그러다 자신이 치매에 걸렸다는 것을 알고, 또다시 연쇄살인이 일어나는 마을에서 자신의 딸을 지키고자 하는 살인자.

 

과거의 살인자가 현재 살인자로부터 딸을 지키려고 한다. 그것도 자신이 죽인 부부의 딸을. 그는 마지막으로 살인을 기획한다. 딸을 지키기 위한 살인. 과거의 살인은 철저히 자신을 위한 살인이었다면 이번에 계획한 살인은 딸을 위한, 즉 남을 위한 살인이다.

 

그런데... 소설은 반전을 이룬다. 그에게 딸이 있었던가. 연쇄살인은 일어나고, 그에 대한 진실은 소설 후반부에 가면 밝혀진다. 그렇다. 기억을 잃어간다고 해도, 자신의 몸이 기억하고 있는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행위를 기억하지 못할 뿐, 행위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을 아무리 없는 것(無)으로 돌리려 해도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 다만, 기억하지 못할 뿐, 발견하지 못할 뿐이다.

 

살인자의 기억법은 그래서 기억하기 위해 글로 쓰거나 녹음을 하는 기억 장치들을 동원한다. 그런 장치들 역시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만 남긴다는 것을 알고 있는 우리는, 이런 기록들도 믿을 것이 못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런 장치들로 기억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는 소설을 읽어가면 알 수 있다. 또한 기억을 잃어가는 것이 자신의 행위를 지워가는 일이 될 수 없음을 알아가게 된다. 온전하지 못한 정신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기억을 하지 못할 뿐이다. 내면에 들어 있는 습성들이 어느 순간 터져 나오게 되는 것, 그런 행동을 하기 위해서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사건들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것.

 

사람은 무(無) 다시 무(無)돌아간다고 하지만, 처음의 무와 마지막의 무가 같을 수는 없다. 우리가 공(空)들어야 한다는 것은 바로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처음을 극복한 공(空)이 되어야 한다.

 

소설에 나오는 반야심경이나 금강경의 내용은 제자리 걸음을 하는, 또는 단순히 부정을 하는 무나 공이 아니다. 그것은 치열한 고민, 삶을 거쳐 깨달아야 하는 경지다. 그런 경지에 든 다음에 다시 자신이 있던 위치로 오는 것, 부처가 중생을 구제하러 세상으로 나오고, 예수가 민중들 속으로 들어가듯이 그래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깨우침인데,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망상 속에서 얻어지는 깨우침은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다. 행동이 변하지 않는, 자신을 변화시키지 않는 공에 대한 추구는 제자리 걸음일 수밖에 없다.

 

이 소설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꽤나 스릴 넘치고 반전이 있는 이 소설을 불교의 십우도에 비유하면 결국 무에서 무로 가는 과정인데, 십우도가 한 차원에서 다른 차원으로 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라면, 이 소설은 이 과정이 아닌 오로지 제자리 걸음을 하는, 망상 속에서만 다른 차원으로 가게 되는, 현실과 자신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상태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늘 같은 나같지만, 결코 같은 나가 아님을, 나는 망상 속에서만 달라진 나를 발견할 것인지, 아니면 현실에서 달라진 나를 발견할 것인지 고민해야 함을 소설이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술술 읽히는 소설이다. 재미도 있고. 그렇지만 무언가를 더 생각하게 하는, 찜찜한 여운이 남는 소설이기도 하다. 나는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고 생각하게 하는, 그러한 찜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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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아름다울 때 내 곁엔 사랑하는 이가 없었다
김경주 지음 / 열림원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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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극, 낯선 장르다. 요즘은 거의 사라지다시피한 장르가 아닌가 싶다. 사실, 몇몇을 제외하고는 연극을 보러 가는 사람도 줄어들었는데, 시극이라니...

 

시와 극이 합쳐진 말이라고 하겠지만, 그런 말보다는 오히려 시적인 극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작품이다. 연극으로 공연이 되지 않고 읽히는 작품이기도 하고.

 

폐허가 된 해수욕장에 있는 파출소. 이미 낡아가고 무너져 가는, 잊혀가는 존재다. 여기에 근무하는 파출소 직원, 나이도 지긋하다. 그 역시 점점 소멸되어 가고 있다. 그가 업어온 김씨. 다리가 없는, 다리에 고무를 달고 땅을 기어다니는 사람이다.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에 머무르는 사람이다. 그에게 땅은 자신의 온몸과 맞닿아 있는 곳, 하늘을 보며 별을 꿈꾸기도 하지만 그는 땅에 붙어 살 수밖에 없다.

 

또 정체불명의 사내. 소년이기도 하고 청년이기도 한 사내. 그 역시 사회에서는 멀어진 사람. 즉 이 시극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쇠락한 존재들이다.

 

그들에게 가장 아름다울 때는 언제였을까? 그것을 찾을 필요가 없다. 그들에게 가장 아름다울 때는 서로가 서로를 받쳐줄 때다. 그럴 때 사랑하는 이는 없었다. 아니 사랑하는 이가 없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에게 기댈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결핍된 존재들이 서로 기대며 서로를 인정할 때 가장 아름다울 때일 수 있다. 이렇게 시극은 빠르게 진행된다. 짤막한 대사들로 눈 내리는 날, 파출소에서 각자 떠밀린 삶을 산 사람들이 한 장소에 모여 서로에게 기대게 된다.

 

결핍을 서로 보듬으며 이들이 가는 곳, 그곳이 어디인지를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이들에게는 자신들이 살아가고 있는 그곳이 가장 낮은 곳일테니...

 

이런 대사가 나온다.

 

김씨 : 사람은 바닥에 닿으면 그때서야 자신의 가슴이 가장 따뜻하다는 걸 배우죠. (129쪽)

 

자신이 가장 낮은 곳, 가장 힘든 상황에 있을 때에도 자신의 가슴은 따뜻하다는 것, 그렇게 서로를 보듬을 수 있다는 것, 사람에게는 어쩌면 잘 나갈 때가 아니라, 그 시절을 지나 쇠락에 접어들었을 때 따스한 자신을 찾고, 느끼고 함께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무거운 분위기임에 분명한데, 작품은 경쾌하게 읽힌다. 작품을 읽으면서 장면을 머리 속에 그리고, 그리고 낮은 곳에서 따스함을 발견하게 된다.

 

김씨의 얼굴에 발자국을 남기는 사람, 밑을 보지 않는 사람이 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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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끝에서 사라지다
윤동수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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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사 진상 규명 위원회'라는 정부 기구가 있었다. 2000년에서 2004년까지 존재했던 위원회인데, 줄여서 '의문사위'라고 부른다.

 

밝혀지지 않은 여러 죽음에 대해서 진상을 규명하려고 설치한 기구였고, 많은 조사를 하려 했지만 여러 한계가 있었다고 한다. 한시적인 기구였기에 그 다음에는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로 2005년부터 2010년까지 활동을 했다고 하고, 지금은 행정안전부 과거사 관련 업무지원단으로 이관한 상태라고 한다.

 

이런 기구가 존재했다는 것 자체가 우리 역사에서 알려지지 않은 죽음, 석연치 않은 죽음이 많았다는 반증이 된다. 그만큼 독재정치가 펼쳐졌다는 얘기도 되고.

 

민주화가 되었다고 자부하는, 대통령도 이제는 탄핵을 할 수 있는 지금 이 나라에서 여전히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들이 해명이 되지 않고 있는 경우가 많다.

 

광주민주화운동만 해도, 여전히 발포명령자가 밝혀지지 않았으니, 그동안 실종된 수많은 목숨들에 대한 진실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에서도 함께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조성우란 인물이 세월이 흐른 뒤에 이러한 위원회에서 하진무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규명하려 한다. 그러나 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의 청구는 기각되고 마는데... 과연 진실을 규명하는데 꼭 가족의 요청이 있어야만 하는가? 가족의 요청이 없더라도 국가가 나서서 밝혀야 하는 것 아닌가. 그것이 이런 위원회를 만든 이유이지 않나.

 

아마도 작가는 그만큼 진상 규명이 밝혀지기 힘들다는 것을 소설 속 인물 조성우를 통해, 또 오인희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소설은 여기서 출발한다. 죽음조차도 밝혀지지 않은 실종자.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사라져 버린 사람에 대한 이야기.

 

독재정권, 그 중에서도 유신시대에 최소한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활동을 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사라져 버린 사람, 하진무를 주인공으로 삼아 소설은 전개된다.

 

살아남은 하진무의 애인이었던 오인희가 하진무에 대해서 알아가려 추적하는 과정이 삽입되면서 소설은 대부분 하진무의 말로 전개된다. 즉 실종된 하진무가 자신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이다.

 

여기에 오인희가 그 당시 관련 있던 사람들을 찾아가 그 사람들의 당시 이야기를 듣는 내용이 중간중간에 들어가 있고.

 

그래서 이야기가 시간 순서대로 진행되기보다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현재로 자꾸만 돌아오고 있다. 즉, 현재에서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아니, 이야기는 현재에도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에 소설은 하진무의 형, 하승무를 등장시켜 과거 운동권들의 모습을 비춰주기도 한다. 한일협정 반대로 감옥 생활을 하고, 독재 정권에 탄압을 받았던 하승무가 현재에는 독재자의 정치를 계승한 정당에 몸담고 있는 현실.

 

작가는 어쩌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그와 관련된 사람을 상기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더라도 당시에 자신이 지녔던 신념이 세월이 흐르면서 어떻게 변질되어 가는지를 하승무를 통해서 보여주는지도 모른다.

 

이런 하승무와 같은 사람들의 변절이 있었기에 여전히 의문사는 진상이 완전히 밝혀지지 않는다는 사실도.

 

권력에 아부하고 기생하는 집단이 있음도, 그들이 막강한 힘을 아직도 지니고 있음을 소설은 보여주고 있다. 그렇게 사라져 간 사람을 소설 속에서 살려내고 있다.

 

제목이 '길 끝에서 사라지다'이다. '길 끝' 더이상 갈곳이 없는 곳. 이것은 독재 정치가 직면해야 할 상황일텐데, 이상하게도 민주화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맞닥뜨린 현실이 된다. 그리고 길을 더이상 만들지 못하고 사라져 간다.

 

다음에도 나오지 못하게... 사라져 갔지만, 과연 그것으로 끝났을까? 소설은 그렇지 않음을, 그 사라짐이 영원히 계속될 수 없음을, 한참 세월이 흐른 뒤에도 하진무를 잊지 못하고, 그에 대해서 계속 알아가려 하는 오인희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스러져간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이정도나마 민주화된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길 끝에서 사라져 간 그 많은 사람들을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설은 이렇게 우리에게 과거 길 끝에서 사라져 간 사람을 다시 살려내 보여주고 있다.

 

이들이 결코 사라져서는 안 된다고 작가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소설을 읽다보면 길 끝에서 사라져야 할 사람들이 누군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사라져야 할 것은 사라지고, 나타나야 할 것은 나타나는 것, 이것이 민주주의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소설이다.

 

덧글

 

출판사에서 보내준 소설이다. 과거 유신시대 또 전두환 정권 시대에 관한 소설을 읽고 싶지 않은 마음이 많았다. 너무도 마음 아픈 사연들이 많으니... 이제는 그것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정도로 해결이 되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에...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남아 있는 이런 현실이 더 마음 아프기에...

 

그럼에도 읽어야지, 과거를 묻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불러내야지. 보복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래에 다시는 그런 과거가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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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리뷰어 2019-05-13 12: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 제목을...차라리...[길 중간에서 사라지다]로 바꿨으면...
그들은 결코 그들의 길을 끝까지 가보지도 못하고...사라졌기에...

kinye91 2019-05-13 13:53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그들의 길을 끝까지 가지도 못하게 한 현실, 그 역사를 잊지 말아야겠지요.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6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지음, 곽광수 옮김 / 민음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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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에 이어 2권을 시작한다. 이제는 황제의 죽음까지다. 그런 생애를 요약할 필요는 없다. 이상하게 이 작품은 소설인데, 읽으면 읽을수록 소설이 아니라 진짜 회고록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아마 어떤 작가는 우연히 서점에서 이런 책을 발견했다고 하면서 이 책을 시작할지도 모르겠다. 유르스나르는 '친애하는 마르쿠스'로 시작한다. 양자로 맺어진 친족 관계로 따지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하드리아누스에게 손자뻘이 된다. 우리나라 말로 하면 세손이 되는 셈이다.

 

이렇게 시작하니, 이 작품을 소설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읽으면 역사적 사료로 착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유르스나르는 이렇게 말하면서 이 작품이 소설임을 강조한다.

 

'역사소설을 별도의 범주에 넣는 사람들은, 소설가가 하는 일이란 역사와 같은 자료로 짜여진 상당수의 과거사들과 추억들 - 의식적인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개인적인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을 자기 시대의 방식의 도움으로 해석하는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다' (254-2555쪽)

 

그러니 이 작품은 소설이다. 사실이 아니다. 그런데 아니 사실이다. 작가가 얼마나 많은 역사적 자료들을 참조했겠는가.

 

시오노 나나미가 쓴 '로마인 이야기 9권'을 먼저 읽었으면 이 소설을 읽으면서 시오노 나나미가 이 책을 얼마나 참조했는지 잘 알게 된다. 아니, 그들은 어쩌면 같은 사료들을 가지고 작업을 했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시오노 나나미는 이 책을 참조할 수도 있었느니, 유르스나르보다 더 많은 자료를 이용할 수 있는 행운이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 시오노 나나미는 역사책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썼고, 유르스나르는 소설이라는, 자신은 문학 활동을 한다는 생각으로 이 작품을 썼으니, 이 작품이 시오노 나나미의 작품보다 표현이 더 풍부하다고 할 수 있다.

 

2권에서는 안티노오스라는 젊은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것도 상당한 분량을 차지한다. 자기 부인인 사비나에 대한 이야기가 아주 적게 나오고, 오히려 어머니 뻘인 플로티나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이 나오니, 하드리아누스에게 영향을 준 여인은 트라야누스의 부인인 플로티나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그에게 부인인 사비나보다는 자신이 마음을 줄 수 있는 대상이 필요하다. 그런 대상으로 곁에 다가온 젊은이가 안티노오스. 하드리아누스는 그를 만나고 곁에 두지만 그는 20세라는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죽음으로 안티노오스는 영원한 젊음으로 하드리아누스에게 남았다는 사실.

 

누군가에게 기억할 만한 인물이 있기 마련인데, 하드리아누스에게는 안티노오스라는 젊은이가 그런 인물이었다는 것. 그렇다고 그에게 푹 빠져 다른 일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는 자신의 일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티노오스 이야기와 유대 반란 이야기, 예루살렘에 살던 유대인들을 쫓아내는 황제, 팔레스타인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는 황제가 바로 하드리아누스이고, 자신의 몸이 좋아지지 않자 후계자를 선정하는 작업을 하는 황제의 모습.

 

이 과정에서 그는 인간 사회가 어떻게 변해갈지 모른다는 생각을 내비친다. 아마도 작가인 유르스나르의 생각이겠지만... 이 문장들은 여러 생각할거리를 제공한다.

 

'인간의 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우리들의 연약한 노력은 우리들의 후계자들에 의해 산만하게 계승될 뿐일 것이다. 반대로 선(善) 자체 내부에 포함되어 있는 과오와 멸망의 씨앗은 제(諸) 세기를 거치면서 엄청나게 자라날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싫증난 세계는 다른 주인들을 찾게 될지도 모르고, 우리에게 현명하게 보였던 것이 신통치 않은 것으로, 아름답게 보였던 것이 추악한 것으로 보이게 될지도 모른다.' (154쪽)

 

신중하게 고른 후계자가 일찍 죽어버리고, 결국 다시 후계 작업에 들어가야 하는 상황, 여기에 후계의 후계까지 고려해 안토니누스를 양자로 받아들이고, 그에게 아우렐리우스를 양자로 받아들에게 하는 과정이 서술되어 있다.

 

자식을 낳지 못해서 양자를 들여 후계자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지만, 어쩌면 이것은 로마의 발전을 유지하는 최선의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 핏줄에 의해 황제 지위를 계승하는 것이 그다지 좋은 결과를 이끌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식이 없는 것에 대해서 아쉬워 하지 않는다.

 

이런 과정을 거쳐 죽음에 이르기까지, 죽음에 대면해서 그가 견뎌내는 장면이 이 작품의 마지막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렇게 로마 시대 오현제라 불리는 황제들 중 세번째 황제인 하드리아누스의 이야기는 끝난다.

 

이처럼 회고록이라는 제목을 지닌 이 소설을 통해 로마 오현제 시대의 정점에 있던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다가갈 수 있다. 이 소설이 지닌 장점이 바로 이것이다. 작가는 이 책 후반부에 창작 노트를 실어두고 있다. 이 작품을 쓸 때 견지했다는 규칙.

 

'이 작품을 쓰는 데 있어서의 규칙: 관계되는 일체의 것을 연구하고 읽고 조사할 것. (256쪽)

 

이밖에 창작 노트에서 몇 가지를 인용한다.

 

만약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세계 평화를 유지하지 못하고 제국의 경제를 개혁하지 못했다면, 그의 개인적인, 행복하고 불행했던 일들은 나에게 덜 흥미로울 것이다. (260-261쪽)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보다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일기'가 더 좋았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행동적인 사람이 일기를 쓰는 것은 드문 일이라는 것을 잊고 있는 것이다. 행동적인 사람은 거의 언제나 나중에, 행동을 잃어버리게 된 시기의 끝에 와서야 옛날 일들을 회상하고 적고 또 대개의 경우 놀라는 것이다. (267쪽)

 

나는 내가 한 위인의 생애를 쓰고 있다는 것을 재빨리 깨달았다. 그 때문에 나는 진실을 더욱 존중했고, 더욱 조심스러웠으며, 나 쪽에서의 개입을 더욱 삼갔다. (2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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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5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지음, 곽광수 옮김 / 민음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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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노 나나미가 쓴 '로마인 이야기 9권'을 읽다가 이 책 제목을 보았다.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등극할 때 벌어진 정적에 대한 살해 사건을 다루는 부분에서였다.

 

소설이라고 하는데,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사실적이라는 이 작품에 대해서, 작가가 조사를 많이 하고, 사실(史實)에 기반해서 소설을 썼다고 하는, 시오노 나나미가 극찬하는 작품이었다.

 

어찌 읽어보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좋은 책이란 그 책을 읽음으로써 다른 책을 읽게 만들지 않는가. 책들의 연쇄. 이 책에서 저 책을 소개하고, 다시 다른 책으로 건너가게 하는 책들이 좋은 책이다.

 

로마인 이야기 다음 권으로 넘어가기 전에 하드리아누스 황제에 대한 소설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 그렇게 해서 이 책을 읽기 시작.

 

로마인 이야기를 읽었기 때문에 대략 하드리아누스 황제에 대한 지식은 있는 셈. 그렇다고 많이 알지는 못하니, 회상록이라는 형식으로 쓴 소설인데, 진짜 회상록을 읽는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손자뻘이라고 할 수 있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에게 쓰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 이 작품은,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생각과 일생을 표현하고 있다.

 

그가 어린 시절부터 황제가 되어 평화를 유지할 때까지의 기간을 다루고 있는 것이 1권이다. 2권에서는 황제가 되어 로마를 다스리게 되는 중후반 이야기가 나오게 될 것인데, 1권에서는 황제가 되기까지 그가 겪었던 마음 고생, 그리고 황제가 되자마자 벌였던 살해가 정당화되고 있다.

 

그는 방어를 중심으로 로마를 다스리고자 했다. 정복으로 영토를 확장하기보다는, 이미 확보한 영토를 확고하게 지키는 방향으로 로마를 이끌어가고자 했던 황제.

 

그러니 방대한 영토를 지닌 로마를 수도에서만 머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재위 기간 중 많은 기간을 영토 순방에 나서는데, 순방에 나서서 그 지역에 맞는 해결책들을 제시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믿음을 주는 사람들을 총독이나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이렇게 그는 제도로써 로마를 안정시키려고 한다. 그가 지속적으로 지방 순방을 다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는 자신의 선대인 트라야누스 황제와는 반대의 길을 가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트라야누스는 장군으로서의 황제라면, 하드리아누스는 황제로서의 장군이라고 할 수 있다. 아직 로마가 안정이 되지 않았을 때 군사력으로 로마의 힘을 과시한 것이 트라야누스라면, 그런 정복 전쟁 다음에 로마를 안정시키는 황제의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 하드리아누스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그의 모습, 황제로 등극하기 전까지 트라야누스와 반대되는 사고를 했던 하드리아누스의 모습이 전반부에서 잘 표현되고 있다. 전임자를 딛고, 전임자를 넘어서야만 자신의 존재 위치를 각인시킬 수 있는 하드리아누스.

 

다른 길을 가되, 로마를 안정시키는데는 목표가 같았던 두 황제. 그리고 황제가 된 이후에 자신이 어떤 일을 해왔는지를 계속 설명하고 있는 소설.

 

사실에 기반해서 썼기 때문에, 어쩌면 이 소설을 통해 하드리아누스 황제에 대해서 더 잘 알아갈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명심해야 할 것은 이 작품은 회상록이 아니라 소설이라는 것.

 

회상록도 철저하게 자신의 처지에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할 수도 있으니, 이 소설을 통해서 하드리아누스 황제에 대해서 다 알았다고 하면 그건 잘못된 읽기일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다만, 회상록이라는 형식을 통해 제정이 안정기에 접어드는 로마, 그 나라를 다스리는 황제의 고민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는 점은 좋다.

 

머리 속을 떠나지 않고 있는 문구... 이 작품 1권에서 법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다.

 

'고백하거니와 나는 법을 거의 신뢰하지 않는다. 법이 너무 엄격하면 인간은 법을 거기에 되고, 또 그것은 당연하다. 법이 너무 복잡하면, 인간의 간지(奸智)는 그 약하고 축 늘어진 그물 틈으로 빠져나갈 방도를 쉽사리 발견한다. ... 너무 자주 위반되는 법은 어떤 것이나 나쁜 법이며, 그러한 사리에 어긋나는 법령이 당하는 무시가 더 타당한 다른 법들에 확산되지 않도록, 입법자는 그것을 폐기하거나 개정해야 한다. 나는, 불필요한 법은 신중하게 검토하여 없애버리고 확고하게 공포할 적은 일군의 현명한 법규들은 제정할 것을 목적으로 하기로 작정했다. 모든 오래된 법들을 인류의 이익을 위해 재평가할 때가 온 것처럼 보였다.' (197-198쪽)

 

이랬던 하드리아누스 황제다. 그러니 그가 오현제 중의 한 사람으로 기록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가 이런 자세를 끝까지 견지했을까?

 

이제 2권으로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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