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녀장의 시대
이슬아 지음 / 이야기장수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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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경쾌하다.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을 이렇게 가볍게 할 수가 있다니. 역시 가장 무서운 비판은 웃음을 동반한 비판이다. 정치인 중에 이런 비판을 가장 잘했던 사람이 고 노회찬이었지.


이 소설은 그렇게 고 노회찬의 웃음을 동반한 날카로운 비판을 떠올리게 한다. 소설의 시작이 '태초에 가부장이 있었다'다. 


가부장제. 당연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되지만, 아직도 가부장제는 공고하다. 소설은 '슬아가 태어나서 가장 먼저 배운 말은 '할아버지'였다.'(7쪽)로 시작한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다. 이 첫장을 제외하면 가부장은 나올 수가 없다.


가부장이 아니라 '가녀장'이 나온다. 딸인 이슬아가 집안을 이끌어간다. 출판사를 차리고 직원을 고용하는데, 직원은 달랑 둘이다. 바로 엄마인 복희와 아빠인 웅.


그렇다. 딸이 모부를 먹여살린다. (이 소설의 강점은 부모라고 하지 않고 순서를 바꾸어서 모부라고 한다.) 모부 역시 딸을 사장으로 여기고 자신들이 맡은 일을 한다.


복희는 살림을, 웅이는 청소 및 운전, 배달을 맡아 일을 한다. 살림을 맡은 복희는 정규직원이기 때문에 그에 합당한 보수를 받는다. 가부장제에서는 상상도 못할 살림이 공식 노동으로 인정된다. 


이렇게 소설은 가녀장을 통해 소위 집안일이라고 하는 살림 역시 노동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가족이 가부장이라는 위계로 지탱되는 것이 아니라, 가녀장을 중심으로, 즉 일을 중심으로 유지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가족 관계를 '서로에게 정중한 타인'(307쪽)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누가 누구에게 속한 존재가 아니라 함께 하지만 존중받아야 할 타인임을 소설은 그들의 관계를 통해서 보여준다. 


'지구에서 우연히 만난 그들은 무엇보다 좋은 팀이 되고자 한다. 가족일수록 그래야 한다는 걸 잊지 않으면서.'(308쪽)


아마도 소설의 거의 마지막에 있는 이 표현이 새로운 가족 관계를 표현하고 있는 말이리라. 가족이 되기까지의 우연, 그리고 그런 우연을 통해 맺는 관계가 종속적인 관계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관계가 되는 상호의존적인 관계임을, 가부장이라는 용어를 폐기하고 가모장이라는 용어를 쓰는 대신, 가녀장이라는 용어를 쓴 이유이기도 하리라.


이런 가족이 만들어가는 일상들이 소설에서 유쾌하게 펼쳐진다. 그렇다고 소설은 가족 관계만을 다루지는 않는다. 가족이 확장되면 사회가 되듯이, 가족이 겪는 일들이 사회적 사건들에서 동떨어질 수가 없다.


따라서 소설은 이들의 모습을 통해서 여전히 우리 사회에 남아 있는 가부장적인 모습들을 생각하게 한다. 무겁지 않게, 웃으면서 비판하는 그런 표현으로. 특히 '남의 찌찌에 상관 마'와 '혼란스러운 가부장', '헷갈리는 식탁 예절'은 가정에서 사회로 시야를 확대하게 해준다.


분명 무거운 주제인데 무겁지 않게 낄낄 웃으면서, 그렇지만 무언가 진한 여운을 느끼면서 읽을 수 있는 부분들이다. 


이렇게 소설에서 다양한 사건들이 벌어지는데, 이 소설을 읽으면서 한편의 '시트콤'을 떠올렸다. 이 소설을 대본으로 바꾸면 그대로 시트콤이 될 수 있음을. 


그냥 웃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웃음 뒤에 바꿔야 할 무엇이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소설이다. 가부장제에 대한 풍자소설이라고 해도 좋은 소설인데.


무엇보다도 이들 가족이 맺어가는 튼튼한 관계가 다른 인물들에게도 자연스레 녹아들어가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어서 좋다. 


시도때도 없이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생기면 연락을 하거나 찾아오는 미란이라는 친구의 모습에서,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있음이 얼마나 행복한지, 또 이것저것 안 해본 일이 없는 웅이가 살다보니 자연스레 그렇게 되었다고 하는, 자신의 일을 하기 위해 타인의 처지가 되어본 사람만이 지니게 되는 삶의 기술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자신과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도 스스럼없이 받아들이는, 자신의 관념을 저항 없이 수정해가는 복희를 작가가 잘 보여주고 있다.


하여 소설은 가족도 정중한 타인이 되어야겠지만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정중한 타인이 되어야 함을 생각하게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웃음을 놓을 수 없는 소설이다. 유쾌, 통쾌, 상쾌라는 말이 통할 수 있는 소설. 촌철살인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오랜만에 웃으면서 읽은 소설. 


우울한 마음을 한꺼번에 날려버린 소설이었다.


덧글


재미있게도 이 소설에는 출판을 하면서 겪는 파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원고를 정확히 넘겼음에도 인쇄 과정에서 페이지가 뒤섞여 그것을 해결하는 내용. '책을 사랑하고 두려워하기'


그런데 소설의 이 부분에서 어라, 이게 작가의 의도인가? 아니면 그냥 실수인가 하는 부분이 있으니, 바로 173쪽. 


'잘 몰랐으니까. 몰라서 무턱대고 씩씩하게 

수 있었다. 지금의 슬아는 그렇지 않다'로 되어 있는데, 씩씩하게와 수 있었다가 줄바꿈이 되어 있는데, 이 사이에 '할'이 들어가야 하지 않나? 


'씩씩하게 수 있었다'가 아니라 '씩씩하게 할 수 있었다'라고 해야 하는데, 이것이 작가의 의도였다면, 정말, 이런 유머를 소설에서 구사하다니 하고 더 웃을 수 있을 테고, 작가의 의도가 아니더라도 출판에 관한 부분에서 이런 일이 생기다니 이런 우연이 하면서 웃을 수 있으니, 이래저래 웃음을 유발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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