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부메랑이었다.


2001년 9월 11일 아침

오전 8시 46분: 아메리칸 에어라인 11기가 세계 무역 센터 북쪽 타워 (타워 1)과 충돌했다.


The Morning of September 11, 2001

8:46 A.M.: A commercial jet, American Airlines Flight 11, crashed into the North Tower (Tower 1) of the World Trade Center.


오전 9시 3분: 유나이티드 에어라인 175기가 세계 무역 센터 남쪽 타워 (타워 2)와 충돌했다.

9:03 A.M.: Another jet, United Airlines Flight 175, crashes into the South Tower (Tower 2) of the World Trade Center.


오전 9시 37분: 어메리칸 에어라인 77기가 미국방성 펜타곤과 충돌했다.

9:37 A.M.: American Airlines Flight 77 crashes into the Pentagon, the headquarters of the United States military, in Arlington County, Virginia.


오전 9시 42분: 미국 영공이 셧다운 했다. 이륙도 할 수 없었고, 비행 중인 항공기는 가까운 공항으로 착륙해야 했다.

9:42 A.M.: United States airspace is shut down. No planes are allowed to take off and all aircraft in flight are ordered to land at the nearest airport.


오전 9시 59분: 세계 무역 센터 남쪽 타워가 붕괴되기 시작했다.

9:59 A.M.: The South Tower of the World Trade Center begins to collapse. 


오전 10:03: 마지막 네 번 째 비행기인 유나이티드 에어라인 93기가 펜실베니아 섕스빌에 추락했다. 그 비행기는 미 국회의사당이나 백악관을 목표로 했다고 알려졌다. 에어라인 93기의 승객들은 세계 무역 센터와 펜타곤의 항공기 충돌을 기내에서 들었다. 그들은 조정석을 부수고 들어가 테러리스트와 싸웠다.

10:03 A.M.: A fourth and final jet, United Airlines Flight 93, crashed into a field in Shanksville, Pennsylvania. It is later learned that Flight 93 was intended for either the United States Capitol building or the White House in Washington, D.C. Passengers on that plane had learned of the crashes at the World Trade Center and the Pentagon. They stormed the cockpit and tried to regain control of the plane from the terrorists.


오전 10:28분: 세계 무역 센터 북쪽 타워가 무너졌다.

10:28 A.M.: The North Tower of the World Trade Center collapses.


TIME LINE FOR THE MORNING OF SEPTEMBER 11, 2001 에서



3천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그날 죽었다.

Nearly 3,000 people killed that day.



1911년, 당시 영국 해군 장관이었던 처칠은 독일 해군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해군 함대의 연료를 석탁에서 석유로 모두 바꾼다. 석유는 석탄보다 부피도 덜 차지하고 열량도 높다. 하지만, 영국은 석유가 나지 않았다. 영국은 석유가 나는 중동으로 눈을 돌린다.

16세기경부터 오스만 제국이 아라비아 반도를 지배하고 있었다. 20세기 초반부터 영국의 지원으로 오스만 제국을 몰아내고 아랍 내부세력 간 주도권 싸움이 벌어진다. 리야드를 통치하던 사우디 가문이 메카의 하심 가문을 물리치고 아라비아 반도를 장악한다. 이후 영국이 사우디 가문의 아라비아 지배를 허용하면서 1932년 사우디아라비아라는 나라가 건국된다.

영국인 윌리엄 녹스 다아시는 1908년 불굴의 의지로 페르시아 남부의 마스제드솔레이만에서 대규모 석유를 발견한다.  이 발견으로 1909년 페르시아에 BP의 전신이 앵글로-페르시안이 설립된다.


영국은 20세기 중반까지 중동 지역에서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 했고 그 열매로 이 지역의 석유의 질서를 주도한다.


1941년 미국은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석유와 중동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미국은 당시 최고의 지질학자이자 석유 지질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에버렛 드골리에를 중동으로 보내 석유 매장량을 조사하게 한다. 드골리에는 임무를 수행하고 이렇게 말한다.


"중동 석유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포상'이 될 것이다" p23, <석유는 어떻게 세계를 지배하는가>


영국은 중동을 노리는 소련의 위협을 홀로 방어하기 힘들어 미국이 필요했고, 양국은 다음과 같이 스케치했다.


"페르시아(이란) 석유는 영국이 갖고, 이라크와 쿠웨이트의 석유는 공유하며, 사우디 석유는 미국이 갖는다." p23 <석유는 어떻게 세계를 지배하는가>


미국은 사우디에 아람코라는 석유회사를 세우고, 이란에는 BP의 전신이 앵글로-페르시아 석유 회사가 독점적으로 사업을 지속한다.

이후 1950년대 후반까지 영미계의 7개 주요 석유회사와 미국과 영국이 유가를 포함한 세계 석유를 주도한다.


소련, 중동 내 종교와 민족 갈등으로 수많은 전쟁이 일어난다.


1차 중동전쟁

영국은 1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의 경제적 도움이 필요할 때는 그들의 염원이 시오니즘 Zionism(유대인의 독립 국가 건설 운동)을 실현해 주겠다고 약속을 하고, 아랍의 도움이 필요할 때는 아랍 민족의 독립 국가 건설을 지지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유대인에게 한 약속만 이행했다.

인도로 가는 고속도로이며 석유 운송로 차원에서도 중요한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를 온전히 지키고 소유하고 싶었기 때문에 우군이 필요했고, 결국 1948년 5월 이스라엘이 건국된다. 그리고 이를 막으려는 아랍민족과 이스라엘 간의 전쟁이 발생하는데, 이것이 1차 중동전쟁이다. 10개월 후 휴전했지만, 중동을 화약고라고 부르게 되는 시초가 되었다.


2차 중동전쟁

석유는 생산국과 소비국이 다르다. 그래서 운송로가 중요하고, 1950년대 후반 가장 중요한 운송로는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였다. 수에즈 운하는 1869년 프랑스 기술자 페르디낭 드 레셉스에 의해 완성된다. 1875년 이집트의 통치자 이스마일 파샤가 파산 위기에 처해 이집트 소유의 지분이 시장에 나오고 영국이 44퍼센트를 취득한다.  1952년 가말 압델 나세르가 쿠데타를 통해 왕정을 폐지하고 정권을 잡는다. 나세르는 1955년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열린 반둥 회의에서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 즉 제3세계 국가와 함께 비동맹주의를 주창한다. 미국은 이집트를 회유하기 위해 아스완댐 건설 지원을 약속하지만, 이집트가 소련으로부터 무기를 구매하고 중공을 외교적으로 승인하자 지원을 취소한다. 미국의 지원을 받지 못하자 나세르는 아스완댐 건설 자금 확보를 위해 영국과 프랑스 소유였던 수에즈 운하를 일방적으로 국유화한다. 

나세르는 영국과 프랑스가 수에즈 운하 수익의 대부분을 가져가는 것은 제국주의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영국은 주요한 석유 수송로가 막히게 되자 프랑스와 함께 그리고 이스라엘을 끌어들여 군사적 대응을 결정한다. 이것이 2차 중동전쟁이다. 

1956년 10월, 군사력이 압도적이었던 영국-프랑스-이스라엘은 간단히 수에즈 운하를 점령하지만, 나세르는 수에즈 운하 점령 직전 바위와 시멘트를 가득 선적한 선박을 침몰시켜서 수에즈 운하를 폐쇄한다. 이양하는데 수개월이 걸리는 이 거대한 장애물로 중동산 석유가 유럽으로 가는 길이 막힌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아이젠하워는 재선을 위해 평화의 사도 이미지를 구축하기를 바랐고, 전쟁을 중재하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말을 듣지 않는다. 소련도 런던과 파리에 핵 공격을 할 수 있다고 위협한다. 결국은 수에즈 운하가 막혀 석유가 공급되지 않은 유럽에 석유 지원 약속을 이행하지 않겠다는 미국의 협박성 회유에 전쟁은 종결된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집트에서 힘없이 물러나고 수에즈 운하는 이집트의 소유가 된다. 나세르는 전투에서 졌지만, 전쟁에서 이기면서 중동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3차 중동전쟁

석유라는 막강한 무기를 가진 아랍은 하나의 통일체를 구성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영국이 건설했고 미국의 핵심 우방이 된 이스라엘이 존재하는 한 아랍의 지리적 통일은 불가능했다. 단일한 아랍 국가를 꿈꾸는 나세르는 이스라엘을 점령하려 했다. 이집트는 시리아와 요르단, 이라크와 함께 이스라엘 침공 준비를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이를 간파하고 선제공격을 하고 이것이 3차 중동전쟁이다. 이스라엘 공군은 개전 세 시간 만에 17개 공군기지와 전투기를 폭격하여 아랍 공군력의 80퍼센트를 무력화한다. 개전 이틀 만에 이스라엘 공군은 이집트 전투기 300여 대를 포함해 아랍 전투기 418대를 파괴한다.

결국 아랍은 수만 명의 인명 피해를 입고 이집트는 시나이반도를, 시리아는 골란공원을, 요르단은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을 잃은 상태에서 유엔의 중재로 6일 만에 전쟁이 종료된다.


4차 중동전쟁

1970년에 수에즈 위기 때는 승리했지만 3차 중동전쟁에서 굴욕적으로 패배한 나세르가 물러나고 안와르 사다트가 대통령이 되고, 석유 시장의 변화를 등에 얻고 4차 중동전쟁을 일으킨다.  3차 중동전쟁의 패배 원인을 미국의 이스라엘 군사 지원과 이스라엘의 선제공격으로 생각한 사다트는 석유 무기화를 통해 미국의 지원을 최소화하고 선제 타격하는 계획을 세운다. 반면 이스라엘은 4차 중동전쟁 발발 가능성을 매우 낮게 보았다.

4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실제 침공을 위한 아랍의 군사력 전재를 훈련으로 오판하는 실수를 한다.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 중대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에 공급 제한을 요청하지만, 미국의 보호로 왕조를 유지하던 사우디는 동참하지 않았다. 하지만 1973년 10월 6일, 이스라엘의 종교 기념일인 욤키푸르일에 이집트와 시리아 등은 선제 기습으로 전쟁을 개시한다. 전쟁 초반, 이집트와 시리아는 선제 타격의 효과로 이스라엘을 압도한다. 이스라엘의 군사력은 3차 중동전쟁 때처럼 압도적이지 않았다. 미국과 사우디의 태도에 따라 전쟁의 향방이 결정되는 상황이었다.

이집트군이 이스라엘에 빼앗겼던 시나이반도를 탈환하고 이스라엘로 진입하기 시작하자, 이스라엘 총리 골다 메이어는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에게 이스라엘이 붕괴 위험에 놓였다며 다급하게 지원 요청을 한다. 하지만 미국은 망설인다. 석유 사업의 최대 파트너인 아랍 국가들의 눈치를 봐야 했다.

중동이라는 체스판에서 아주 중요한 말인 이스라엘을 잃게 생겼지만, 석유 때문에 개입을 못 하고 있을 때 소련이 이집트에 막대한 군수 물자를 지원한 것이 밝혀지고 이를 구실로 미국 또한 이스라엘에 대규모 군수 지원을 실시한다. 미국의 지원에 이스라엘은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에 나선다.

이때 사우디가 움직인다. 사우디도 석유 무기화에 동참하기로 한 것이다. 중동 석유계의 가장 주요한 인물인 사우디 석유 장관 야마니는 전쟁 발발한 10월부터 매월 5퍼센트씩 석유 감산을 시작했다.

이집트와 시리아군은 전열을 가다듬은 이스라엘에 밀려 되찾은 땅을 다시 뺏기고 후퇴하며 전세가 역전되었다. 이때 소련은 이집트 3군단이 전멸할 경우 전쟁에 개입하겠다고 시사한다. 한국전쟁처럼 중국의 개입으로 전쟁이 장기화되는 것을 우려한 미국의 키신저는 급히 모스크바를 방문해 소련과 전쟁을 종료하기로 합의한다. 이스라엘은 미국의 압력으로 더 이상 진격을 포기하고 종전에 합의한다.

아랍은 전쟁에서는 져서 영토 회복은 못 했지만, 1~3차 중동전쟁까지 형편없이 밀렸던 모습이 아닌, 대응하게 싸우는 모습을 보여 주며 긍지를 회복했고, 무엇보다도 가장 큰 소득은 강력한 무기인 석유의 힘을 드러낸 것이다. 전쟁 중 감산한 석유로 1차 오일쇼크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2000년대 가장 충격적인 테러의 장본인은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에 가장 우호적인 국가 사우디에서 등장합니다. 바로 오사마 빈 라덴입니다." p237 <석유는 어떻게 세계를 지배하는가>


이란은 1979년 이전까지 미국과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호메이니가 친미적인 이란 정권을 비난했듯이, 빈 라덴도 친미적인 사우드 왕가를 축출 대상으로 규정한다. 빈 라덴도 호메이니처럼 조국에서 추방당했다. 호메이니는 1979년 이란으로 돌아와 이슬람 혁명을 통해 이란을 반미 신정 국가로 돌려세웠지만, 빈 라덴은 돌아가지 못한 채 전 세계를 떠돈다.

빈 라덴이 미국을 상대로 지하드(성전)를 결심한 계기는 미군의 사우디 주둔이었다. 1945년 사우디가 석유의 중심지로 떠오르자 미국은 군대를 주둔시킨다. 독일과 일본에 이어 최대 규모였다. 1990년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자 약 50만 명의 미군이 이슬람의 양대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에 다시 들어온다. 외국 군대가 주둔한다는 것은 민족주의 시각에서는 굴욕이었고 이교도의 군대가 이슬람의 성지에 주둔하는 것은 목숨을 건 지하드의 이유가 된다.

빈 라덴은 1988년 테러 조직 알카에다를 결성한다. 사우디에서 쫓겨난 빈 라덴은 1991년 수단으로 건너간다.

1990년 걸프전을 위해 미군이 사우디에 주둔한 이후, 빈 라덴의 알카에다는 반미 조직의 성격을 굳힌다. 그는 수단을 거점으로 알카에다를 운용하면서 건설업 등의 수익 사업으로 자금을 확보하고 미국에 테러를 실행한다. 미국은 수단을 압박하고 빈 라덴은 아프간으로 이동한다.

1996년 5월 빈 라덴은 아프간으로 건너가 탈레반을 이끄는 지도자 물라 오마르를 만난다.  당시 아프간은 1989년 소련군 철수 이후 내전 상태에 있었다. 친미 성향의 사우디 정부와 파키스탄 정부의 지원을 받은 탈레반과 반미를 지향하는 빈 라덴은 공존하기 힘들었고, 탈레반의 오마르는 빈 라덴을 사우디에 넘길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아프간에 온 빈 라덴은 CNN, ABC 등의 서구 언론과 빈번하게 인터뷰하며 이슬람의 목소리를 대변하기 시작한다. 빈 라덴은 이슬람 세계에 잠재되고 억압된 욕구를 파악하고 그것에 호소하며 자신을 그에 맞게 이미지화한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수십 년간 누적되어 있던 이슬람의 반서구 정서를 자신의 자원으로 가져온다. 빈 라덴의 세력이 커지자 탈레반의 오마르는 불편했고, 빈 라덴을 사우디에 넘겨주겠다는 입장을 수정하지 않았다. 

빈 라덴은 1998년 8월 7일 케냐 수도 나이로비의 미국 대사관에 트럭 테러를 했고, 미국인 12명을 포함해 213명이 사망한다. 미국은 빈 라덴의 거처를 확인 후 1998년 8월 17일 아라비아해에서 75대의 토마호크 미사일을 아프간으로 발사했다. 그러나 공격은 실패로 끝났고 빈 라덴은 살아남았다. 그리고 이제 빈 라덴은 더부살이에서 탈레반의 핵심 인물로 바뀐다.

그리고 탈레반의 비호 아래 빈 라덴은 오랫동안 구상한 테러를 치밀하게 진행한다.

2011년 9.11 테러이다.



2019년 9월 30일, 볼티모어의 컨퍼런스가 있어 갔었고, 거기에서 찍은 사진이다.


TOGEHTER WE REMBER THE PEOPLE OF MARYLAND WHO PERRISHED ON 9.11.2001


9.11테러로 희생당한 메릴랜드 주 사람들을 기억하자는 것이다.

9.11테러로 3,000명이 희생당했고, 세계 무역센터가 무너지는 것을 전 세계가 지켜보았다.

나는 아르바이트로 일하던 회사에서 늦게 귀가하고 퇴근길에 잠시 들른 팀장님의 집에서 그 영화 같은 장면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처럼 이것은 영화의 한 장면이겠지라며.


2차와 3차 중동 전쟁의 사망자들을 보면 다음과 같겠지만, 민간인은 얼마나 희생되었는지 정확하게 통계도 낼 수 없을 것이다.


제2차 중동전쟁

이스라엘 231명 사망

영국 16명 사망

프랑스 10명 사망

이집트 1,650명 ~ 3,000명 사망, 민간인 1,000명 부상


제3차 중동전쟁

1,000명 이하의 연합군 사망, 아랍군 20,000명 이상 사망, 시리아인 100,000명과 팔레스타인 300,000명의 난민


아래 통계 사이트를 보면, 이스라엘과 아랍의 분쟁으로 지난 세월 동안 민간인과 군인의 사망자는 10만 명이 넘는다. 집계된 숫자만 말이다.


Vital Statistics: Total Casualties, Arab-Israeli Conflict



3천 명의 목숨을 잃은 것도 우리는 분노해야 하지만, 왜 3천 명이 무고하게 죽게 되었는지도 생각해야 한다.

10만 명과 3천 명에 등식 따위는 없다. 생명은 숫자로 가치를 따질 수 없다. 단 한 사람의 미국인도 소중하고 30명의 중동지역 사람들도 소중하다.


미국을 비롯한 주요 선진국이 세계의 정치, 경제 전반을 주도하고 달러를 비롯한 기축통화가 그 움직임의 지표가 되고, 그 지표 아래에는 석유나 식량과 같은 주요 자원이 근간이 된다.

그리고 그들의 이권 다툼에 진실이 왜곡 되기도 하고 은닉 되기도 한다. 그래서 그들은 미디어를 장악하고 장악한 미디어를 통해 진실을 요리한다. 독이 되는 것도 맛있는 음식에 몇 방울 떨어뜨리기도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이 9.11 테러를 세상에 보여주며 아랍을 규탄했지만, 빈 라덴 또한 서구의 미디어를 통해 아랍을 대표하는 인물로 성장할 수 있었다.

1944년 루스벨트 대통령이 주미 영국 대사 핼리팩스를 불러 중동 산유국 위에 스케치하며 석유의 이권을 챙기기 시작하며, 아랍에 편을 가르고 전쟁을 부추기고 전쟁에 개입하고 테러를 종용한 것이 2001년 9월 11일 아침 부메랑으로 돌아온 것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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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1-10-30 16:0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근대, 현대 세계의 역사에서 평화의 붕괴와 전쟁의 원인이 거의 영국에 의해서 야기된것 같아요^^
잘 정리된 글로 석유와 중동의 복잡함을 잘 이해하게 되었어요.
감사합니다^^

초딩 2021-10-31 11:16   좋아요 0 | URL
아 감사합니다. 이 글을 쓰는데 책을 다시 펼치고 통독했어요 ㅎㅎ
맥락의 흔들림 없이 써내려간 저자의 전문성에 다시 한 번 놀랐습니다.
저는 중동전쟁 위주로 썼지만 이 책은 오일쇼크 셰일유 그리고 오바마와 트럼프의 정책
미국의 최대 산유국이 된 후 역 세계화까지 아주 폭 넓게 다루고 있는 정말 훌륭한 책 같아요 :-)

mini74 2021-10-30 17:0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분란이 생기면 그 곳이 어디든 영국이 뿌린 씨앗이 있다는 글을 본 기억이 ㅠㅠ 석유가 가져온 부, 극단적 종교, 정치 등등 저도 아 그렇군. 하면서 잘 읽었습니다 *^^* 즐거운 토요일 보내세요 ~

초딩 2021-10-31 11:21   좋아요 1 | URL
미국도 영구과 호주로부터 기인했다고 하면 이 참흑함을 빚어낸 원죄적 존재가 영국 같습니다 :-)
좋은 책을 더 잘 전하지 못하 부끄럽지만 도움이 되셨다니 좋습니다~

베터라이프 2021-10-31 00: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많은 글에서 오사마 빈 라덴이 예전 CIA와 협력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죠. 이를 두고 반미주의자들은 미국이 벌을 받은 것이라고 하는데 그건 터무니없는 소리고 다만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닌가 생각해 보네요. 미국이 그동안 자신들과 이질적인 중동에 개입해 온게 석유 때문이기도 하죠. 좀 더 올라가보면 중동이 난장판이 된 연유에는 영국이 있고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정교분리도 제대로 안되는 이슬람주의의 폐쇄성도 문제고 일개 종교가 저리 편협하니 국제 사회에서 여론을 받지 못하는 거겠죠. 석유와 이슬람주의 그리고 폐쇄적 권위주의, 거의 파국의 트라이앵글입니다. 여기 중동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