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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모비 딕
허먼 멜빌 지음, 김석희 옮김 / 작가정신 / 2013년 7월
평점 :
판매중지
Call me Ishmael
"나를 이슈메일이라고 불러 달라"를 어떤 보편성을 살려 "내 이름을 이슈메일이라고 해두자"라고 명 번역한 것이 눈길을 끈다.
이슈메일은 히브리어로 읽으면 이스마엘이 된다. 유대민족의 시조 아브라함은 아내가 자식을 낳지 못하자 하녀에게서 아들 이스마일을 얻지만, 후에 아내가 아들을 놓자 하녀와 이슈메일은 추방되어 팔레스타인의 사막을 방랑하게 된다. 그리고 작가는 그 이스마엘, 즉 이슈메일을 어떤 특정한 이유 없는 니힐리즘적인 도망자의 보편성을 뜻하며 이름 지었다고 한다. 보편성이란 무엇인가. 보편성은 '모든 것에 두루 미치거나 통하는 성질'로 universality 로 볼 수 있다.
Universality: the quality of involving or being shared by all people or things in the world or in a particular group.
세상이나 한정된 그룹 안에서 모든 사람 또는 모든 것에 관계되는 성질로, 즉 우리 모두에게 당연시되는 것을 말한다.
본처가 아닌 하녀에게서 '대체'하기 위해 태어났지만, 본처의 자식이 생기면 그 '대체'의 영광은 아무런 이유 없이 허무하게 버려지고 마는 것은 저 유명한 프랑켄슈타인에서 인용한 실낙원의 절규를 우리 모두가 공리처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제가 청했습니까, 창조주여, 흙으로 나를 인간으로 빚어달라고?
제가 애원했습니까, 어둠에서 끌어올려달라고?
- 실낙원", 프랑켄슈타인
그래서 "Call me Ishmael"은 이 땅 위의 우리 인간이면 누구나 짊어지고 있을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하겠다는 선언과도 같을 것이다. 그래서 역자는 그 보편성을 함축한 첫 문장을 '가정', '전제'로 "내 이름을 이슈메일 이라고 해두자'로 번역한 것이다.
그 방랑자이자 도망자는 구약성서 '열왕기'에 포악한 왕으로 등장하는 아합을 영어식으로 읽은 '에이해브' 선장의 배를 탄다. 에이해브는 자신의 다리를 앗아간 모비딕을 죽음과도 바꿀 만큼 증오하고 쫓는다. 쫓는 자, 공격자인 에이해브도 결국 우리 인간의 보편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증오로만 이루어진 심장을 가졌고, 복수로 된 말만 하고, 가차 없이 종횡무진 하지만, 복수 대상 종족의 뼈를 추하게 박고 있는 외다리만 가진 에이해브와 스타벅의 대화를 보라. 복수심에 눈이 멀어버린 에이해브를 제압해서 자신과 모든 선원과 피쿼드호를 구하려 했던 성직자 같은 스타박은 에이해브와 가장 큰 대립 구도를 가지는데, 이제 모두 수장의 소용돌이에 모든 것이 자명하게 빨려 들어갈 것이 명확한 추적 셋째 날에 그 둘은 모든 것이 해갈되었지만 그 해갈은 끝은 비극을 용해하고 뚫고 나아가지 못한 채 가슴 아프게 대화할 뿐이다.
“어떤 자는 썰물에도 죽는다. 어떤 자는 얕은 물에도 빠져 죽고, 어떤 자는 홍수에도 죽는다. 나는 지금 가장 높은 물마루에 도달한 파도 같은 기분일세. 스타벅, 나는 이제 늙었네. 자, 우리 악수하세.”
“오오, 선장님, 나의 선장님! 고귀하신 분이여, 가지 마세요. 제발 가지 마세요! 보세요. 용감한 사나이가 울고 있습니다. 당신을 설득하는 고통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p910
에이해브의 복수심과 증오와 분노가 모멘텀을 서서히 가속시켜 '행동'이 가열되어 나아간다. 그 감정들은 감정일 뿐. 시간이 지나고 바닷새와 지고 뜨는 해를 보고, 자신과 무관한 자연의 바다와 그 바닷속의 생명을 보다 보면 그 감정들은 결국 시간 앞에서 그 허무함의 베일을 벗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감정으로 이미 가속된 모멘텀은 이제 그 연료였던 감정이 없어도 더욱더 빠르고 광폭하게 돌아갈 뿐, 결코 멈출 수 없다. 그 모멘텀에 연결된 행동도 그리고 그 행동의 끝에 말려져 걸려있는 운명마저도 멈출 수 없다. 그래서 에이해브는 자신에게 두 에이해브가 있다 했던가.
어제의 영광은 원래부터 없었고 알 수도 없는 이유로 사라지고 내몰리어 목적지도 안식처도 없이 방랑하는 이슈메일은, 동력을 지속시킬 연료와도 같은 분노도 증오도 모두 사그라져 버렸건만 이제 그 모멘텀의 불가항력적인 가속으로 덧없지만 벗어날 수 없는 이룰 수 없는 그리고 죽음만이 결과로 기다리고 있는 복수를 향해 달려가는 에이해브를 '관찰'한다.
이 소설에서 이슈메일은 결코 주인공들에 낄 수 없다. 그가 이스마엘로서 자신의 삶이라고 여겼던 무대에서 벗어나 '아무것도 아닌' 방랑자가 되었듯이, 이슈메일은 에이해브를 스타벅을 스터벅을 퀴퀘그를 그리고 그들의 피쿼드호를 바라보고 서사할 뿐이다.
고래의 분류와 신체 각 부위, 몸속의 장기와 머릿속, 습성 등에 대한 온갖 지식과 고래의 어장, 포경선과 보트, 각종 도구, 잡은 고래의 처리 과정과 그 귀한 기름의 정유 과정, 회사 등 포경에 대해 총망라한 서사와 고래에 관한 수많은 역사와 인물 등 그 모든 것을 고래의 분수공에서 뿜어져 나오는 거대한 물줄기처럼 쏟아내지만, 정작 모비딕을 만나 싸우다 덧없이 이슈메일을 제하고 모두 수장되는 것은 몇십 페이지일 뿐이다. 이 또한 얼마나 허무한가. 수백 페이지에 걸친 모든 지식의 분출은 잡힌 고래든 도망친 고래든 모든 쫓는 자들을 산산조각 낸 고래든 그 모든 고래에게서 뿜어져 나와 저 대양에 그들 각 고래의 운명과는 무관하게 흩어져버린 물줄기처럼 덧없다.
북아메리카 원주민 최초로 백인에게 항쟁하다 전멸한 최초의 부족 이름을 딴 피쿼드호를 타고 우리 인생의 니힐리즘을 내용과 전개가 천차만별의 다층성과 인물과 사물의 이름이 중의적이고 복잡한 중층성 의미를 그 '허무함'을 가득 실어 그 수장의 소용돌이로 마치 우리의 죽음의 그 끝의 홀로 두텁게 내던진다. 그 첫 문장의 보편성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