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인문학 수업 : 멈춤 - 바쁜 걸음을 멈추고 나를 둘러싼 세계와 마주하기 퇴근길 인문학 수업
백상경제연구원 지음 / 한빛비즈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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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 인문학 수업-멈춤

 

퇴근길 인문학 수업 시리즈로 두 번째 만남이었던 것 같다. 권태기라는 표현을 빌려와 하는 말로 책태기라는 말이 있더라. 어쩌면 내게도 책태기가 지나가고 있는지 모른다. 책이 잘 들어오지 않는 몇 개월의 시간이 아주 천천히 유유자작하게 흘러가는 중이다. 물론 개인적으로 문제도 있고해서 책을 통한 위로를 생각할만한 여유가 부족한 게 사실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변명이지만 이 또한 현실이다.

퇴근길 인문학 수업시리즈-멈춤을 며칠 들고 다녔다보다. 재미있는 듯, 혹은 살짝 몰입이 되지 않는 듯했지만 어쨌든 인문학에 대한 호기심과 욕심일랑은 조금이라도 채워가는 시간이지 않았을까도 싶다.

 

기억하고 싶은 몇 가지 이야기를 적어보자. 생존과 공존에서 강안이 펼쳐내는 이야기 ‘너와 나 그리고 우리’와, 대중과 문화에서 최은의 ‘스크린으로 부활한 천재들’, 안나미의 ‘조선의 대중문화’에 대한 이야기들이 허전한 마음에 와 닿았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말이다. 문학창작 강의를 해왔으며 전업작가로 동화와 에세이를 쓰며 영화인문학 등등 다양한 분야에서 소통을 주제로 강연을 하고 있다는 강안의 이야기가 왜 그렇게 따뜻한 울림으로 다가왔는가에 대한 이유를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느낌이란 이렇게 오묘한 것인가. 누군가가 그랬듯 이 문제는 어디까지나 취향의 문제일일 수도 있겠지만, 그의 글은 묘한 매력이 있는 것은 분명해보인다. 강안은 삶의 모습을 담아내는 영화를 통해 대중의 폭력성, 개인의 무력감, 집단의 히스테리가 만들어내는 공포, 살벌하게도 냉혹하기만한 개인주의, 물질만능 주의의 화려함 속에 감추어진 어두운 그늘 등등 다양한 측면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이야기를 통해 인간은 저마다의 긍정의 요소인 희망을 노래하는 이상적인 존재라는 것을 재확인하며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세상은 아직 따뜻하다는 것인가.

이를테면 ‘이 세상 누군가 울고 있다’(118p)와 같은 상황과 마주했을 때 어디에선가 누군가는 울고 있는 이에게 손을 내밀어 주고 있다는 이야기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선함에서부터 출발하는 인간 본연의 당위성을 상기하게끔 한다. 그러니까 말이다. 그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이 지니는 가장 기본적인 선한 심성과 따뜻한 시선이 만들어내는 가볍지 않은 울림을 살짝 엿보았다고 할 수 있을까. 강인의 이야기는 그런 배려가 담겨있다.

 

그런가하면 인간이 추구하는 아름다움과 내면의 상처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최은의 이야기 역시 결코 가볍지 않게 다가온다. 인간이기에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살아갈 권리와 함께 살아가는 동안 뜨겁게 피워내는 그들의 예술혼을 볼 때, 어찌보면 보통의 삶에서 터무니없이 날카롭게 상충되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한 상황을 굴레라고 한다면 그 굴레는 자의적일 수도 있고 타의적일 수도 있다. 누군가는 굴레에 갇혀 생을 마감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스스로 굴레에서 벗어나오기도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피카소의 여인들과 조각과 로댕의 연인으로 등장하는 ‘까미유 끌로델’의 이야기가 그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흑백사진으로 된 까미유 끌로델의 얼굴을 찾는다. 우수에 찬 듯한 깊은 눈매와, 수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듯 무거워보이지만 오히려 한없이 가냘픈 그녀의 입술이 눈에 들어온다. 완벽하지 못했던 사랑과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인해 반평생을 정신병원에서 보내야 했던 그녀의 삶은 무엇으로 보상받을 수 있을까.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내 눈에는 그런 면면들만 보이는가싶다. 아니다 몇 가지가 더 있다.

한문학자인 안나미가 소개하는 이야기도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안나미는 조선의 한류를 소개하고 있었다. 물론 당대의 문화는 지금과는 많이 달랐지만 분명하게도 당시 중국과 조선의 문화교류가 활발히 오고갔다는 것을 간과하면 안 될 듯하다. 매화꽃이 등장하고, 시가 등장하며, 문인 이정귀가 등장하고, 여기에 허균과 허날선헌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어우야담에 등장한다는 조선인어의 이야기, 다시 등장하는 풍운아 허균의 색다른 이력(도문대작-1611년 허균이 전국의 식품과 명산지에 관하여 적은 책/네이버 )을 알아가는 대목이기도 하다. 오늘날로 치면 백종원 정도의 격으로 이해가능할지 모르겠다.

 

그 외 책은 자연과 생존, 연극, 경제, 종교와 철학 등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동성애와 안락사에 대한 이야기도 생각할 거리를 남겨주는 좋은 주제였던 것 같기도 하다. 아. 그런데 제출용 리포트가 아닌이상 이만큼만 하자. 속속들이 알고 싶은 호기심을 위해서라도 이쯤에서 말줄임표가 필요하지 않을까.

 

책태기를 걷고 있는 요즘 쓴다는 일이 부담으로 다가오기 시작하면 다시 초심으로 돌아갈 시기가 왔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읽는 일이 힘들게 다가오기 시작하면 이 역시 사심이 가득차서 버려야 할 것들이 많아졌다는 신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중이다. 오늘은 날이 좋다. 좀 걷다 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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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그레이트북스 81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 / 한길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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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무거운 주제를 담아내고 있는 책이다. 책을 읽으며 처음 들었던 생각은 어쩌면 전쟁의 잔인함과 그 안에서 발현되는 인간의 복잡한 내면의 충돌에 대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책은 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 학살에 관여한 인물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 기록을 담은 기록의 총체적 결과물이다. 저자는 한나 아렌트로 정치철학자인 동시에 그녀 역시 유대인이었으며 독일의 유대인 학살로부터 탈출한 동시대를 살아온 현 증인이었다. 그녀는 교양잡지 뉴요커의 지원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건너가 아이히만의 재판을 참관하게 된다.

 

책은 아이히만의 생애와 전범일 수밖에 없는 그가 스스로 무죄를 주장하게 되는 계기를 군대의 특수한 상황에 적용해 왜 그런 생각과 판단의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는지에 대해 상세하고 논리적으로 기술하고 있어보였다. 다만 뭐랄까. 번역에 문제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깔끔하지 않아 읽기가 그렇게 쉽지는 않게 다가온다. 길게 늘어지는 장문과, 인용 및 부수적인 설명부분에 대한 편집도 마찬가지다.

딴은 단순히 재판의 기록문만 정리한 것이 아니고 당시 상황에 대한 많은 정보제공이 뒷받침을 하고 있어 책이 보여주고 있는 범주는 제법 광범위하다고 볼 수 있다.

그 중에 몇 가지 생각해봐야 할 것들을 추려볼 수 있을까.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할지 조금은 막연하다. 군인으로서 자신의 임무를 충실히 해왔을 뿐, 자신에게는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아이히만에게 죄의 유무를 판단하는 기준을 무엇으로 할지 문득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가하면 독일이 왜 그토록 유대인 학살에 열을 올렸어야 했던가. 그 근원적인 이유 아닌 문제를 생각했던 것은 두 번째의 의문이었다. 그리고 늘 그렇듯 전쟁시가 아니더라도 삶의 어느 구석진 곳에서 일어날법한 생경스럽고 낯선 반전으로 인해, 오히려 더 강렬하게 생겨나는 인간의 진정한 신념에 대한 의구심 같은 다소 우울한 감정들을 끄집어냈던 것도 같다.

책에서 보면 독일의 히틀러가 자행한 유대인 학살 과정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유대인과 같은 민족소속이었던 ‘유대인 공동체(유대인 위원회)’의 이중적 양면성이 드러나고 있다. 이들은 나치스와 협력했고, 나치스의 도구화로 변질되어갔다. 강압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개인과 어느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어떤 정치적 혹인 경제적 아니면 사회적 이익의 순위를 위해 같은 민족을 배반하고 위협하는 행위는 비단 유대인학살과 관련한 유대인 공동체에 한해서만은 아닌 듯하다. 생각해보면 우리도 비슷한 역사와 비슷한 경험을 갖고 있지 않은가말이다. 모든 역사와 모든 인간의 이중성이 서로 닮아 있다는 건 아이러니하면서도 동시에 우울한 일이다.

 

더불어 독일이 잔인한 홀로코스트를 자행하고 있을 때 주변국들이 보여주었던 암묵적인

행태에 대해 생각해봐야 할 것도 같다. 이 시기에 자행된 모든 유대인 학살의 문제가 단순히 독일 안에서의 인종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 문제는 당대 유럽 전역에서 팽배하게 부풀었던 순수혈통의 보전이라는, 다소 맹목적으로 작용했던 유럽의 민족주의(민족 이기주의) 측면에서부터 출발하고 있었던 것도 같다.

시작이야 독일이 먼저였을지는 몰라도 주변국들의 암묵적 지지로 인해, 수많은 유대인들은 자신의 집과 자산을 빼앗기고 자신의 고향을 떠나 수용소로 끌려가게 되는 운명과 마주하게되었던 것이다.

 

“모든 국가 당국과 마찬가지로 유대인위원회도 아주 빠르게 ‘나치스의 도구’가 되어버린 네덜란드에서는 10만 3000명의 유대인이 죽음의 수용소로 이송되었고, 대략 5000명은 테레지엔슈타트로 통상적인 방법을 통해 이송되었는데, 이는 물론 유대인 위원회의 협력을 받아서였다.”-p197

작가 한나 아렌트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유럽사회에서 발생한 나치스의 전반적인 도덕적 붕괴’라고 정의내리고 있다.

이 시기에 자행되었던 유대인학살과 관련한 개인과 나라. 그 안에 존재했던 수많은 비 유대인들의 생각들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정말 그들만의 민족적 우월함을 추구했던 것이었을까. 아니면 한나 아렌트의 지적처럼 강력한 압력으로부터의 타협과, 무심함으로 인한 무지만을 쫒았던 것일까.

자 이제 유대인의 강제이주에 깊이 관여하고 유대인 학살에 직접적으로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무죄다’, 라고 말했던 아이히만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그는 어디까지나 군인으로서 자신의 임무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라는 말을 남겼다. 일반인의 신분이었다면 분명 죄인이었겠지만, 군인의 신분으로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죄가 되지는 않는다는 이론을 주장한 이 사람을 두고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한다.

누구나 악을 행할 수 있다. 누구나 악해질 수 있다. 악한자라고 해서 얼굴이 특별히 악마처럼 생기거나 어떤 표식이 있는 것은 아니며, 그저 평범한 사람도 어느 순간 어느 계기를 통해 악해질 수 있다는 이야기가 바로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악의 평범성에 깔린 이론일 듯하다.

악의 세력이 우리 자신을 찾아왔을 때(악과 직면했을 때)선과 악을 제대로 분별하고 판단하며 사유할 수 있는 힘을 갖는 것이 인간으로서 가장 절실하게 지켜내야 하는 신념이자 정의가 아닐까하는 것이 아렌트가 말하고 싶은 내용일지도 모른다. 평범했던 한 사내가 전범의 신분으로 재판을 받고 사형을 받은 이 역사의 기록 앞에서, 작가는 인간의 무사유의 위험성을 지적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유하지 않은 행위는 그 어떤 악보다도 위험하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같은 내용을 조금은 더 쉽게 풀어쓰면 어땠을까. 이 문제는 번역의 문제일까. 아니면 편집의 문제일까. 그도 아니면 책의 무게를 내가 다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일까.

어쨌든 읽고 생각해볼만한 가치는 충분한 책이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이 아쉽다.

각설하고 시종 횡설수설한 듯해서 빨리 마무리를 짓고 가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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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터라이프 2020-10-31 0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나 아렌트가 자신의 민족으로부터 불행했던게 기존의 과격 유대인들의 시오니즘에 반대하고 주변 팔레스타인들에게 온정적인 태도로 인해 거의 백안시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그래서 한나 아렌트를 다른 정치철학자들보다 특별하게 생각하는데요. 나치와 유대인 학살을 심층적으로 연구하여 그것에 걸맞는 명성을 얻었음에도 과격하고 보수적인 유대인들에게도 똑같이 비판한 점은 그녀의 양심이 실로 대단하다고 여겨지더군요. 하여튼 이른 아침에 한나 아렌트를 기억하게 해주셔서 감사드려요. 제가 매일 들고다니는 노트북 배경화면이 그녀가 담배연기를 내뿜는 흑백사진이기도 합니다.

월천예진 2020-10-31 10:54   좋아요 0 | URL
그러셨군요. 저도 책을 접하면서 책과 더불어 한나 아렌트 관련한 자료를 더 찾아보고 있어요. 묘한 끌림이 있더군요. 한나 아렌트라는 사람~~~
 
악령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57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박혜경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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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령(상)

 

 

표도르 도스또예프스끼. 거장의 이름을 다시 불러본다. 조금 거창한가. 아니다. 어쩐지 조금 어색하다. 그의 장편소설 ‘악령’은 전권 3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아쉽게도 집에 있는 책은 첫 번째 상권 하나뿐이다. 지금에서야 생각하는 것이지만, 책을 구입할 때의 당시 상황에서 느꼈던 묘한 분위기와 흐름에 대해 이제는 충분히 그럴만했다, 라는 생각이 드는 게 솔직한 고백이다. 이런 걸 뒤늦은 후회라고 하는 것일까.

물론 점원의 멘트가 심오한 계산이 포함된 것인지, 단순한 판매수익에 따른 멘트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계산대 앞에서 책 권수를 확인하는 점원이 했던 말은 ‘상권만 하시는 건가요?’ 였다. 그 순간 어떤 의도가 숨겨졌는지는 알 수 없는 게 사실이지만, 지금 나는 무심하게도 여느 책과 더불어 악령의 상권만 구입했던 과오에 대해 후회하고 있다는 걸 말하는 중이다.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을 많이 접하진 못했다. 딴은 그 명성만큼이나 그의 작품이 늘 육중한 무게감으로 다가오는 것처럼, 어떤 하나의 선입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는 내 자신을 바라보게 되는가싶다. 생각할 것들이 많은 만큼 깊이감은 깊어지고, 아이러니하게도 비탄과 함께 탄식이 또 그 이면에서의 알 수 없는 탄성이 교차된다.

안타깝게도 상권에는 전체 장편의 스토리중 도입부분에 많은 지문을 할애하고 있기에 사건의 시작을 알리는 전개는 책 말미에서부터 서서히 시작된다. 으레 그렇듯 전반부는 등장인물들을 사귀어가는 시간이다. 우스갯소리를 하자면 이런 거다. 인물이 갖는 본명도 길고 복잡한데다 두서넛 대는 예명까지 익혀야하는 고충도 언제나 여전하니, 이 또한 사소한 고충이지 않은가말이다.

 

지방의 유지로 있는 중년여성 바르바라 빼뜨로브타 스따브로기나는 20년 가까이 스째빤 뜨로피모비치 베르호벤스끼의 둘도 없는 친구이자 동료이며 후원자로서 그의 곁을 지킨다. 이들이 주인공인가 싶지만 사실 소설 상권에서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 내용은, 바르바라의 아들 스따브로긴(니꼴라이 프세볼로도비치, 예명으로 자주 언급됨)의 추문과 관련한 사람들의 오해와 의심, 의혹, 증오와 분노 혹은 알 수 없는 질투와 같은 부정적인 면이 강조된 의구심들의 표출이 거의 대부분이다.

젊은 남녀 사이에 있을 법한 염문설. 그것이 가지고 오는 의혹은 시간이 갈수록 커지게 되고, 이로 인해 얽히고 꼬이는 인간관계. 표면적으로 작품 악령이 그려가는 스토리는 남녀의 사랑과 이를 둘러싼 계급과 신분의 이질감. 그에 따라 변질 될 수밖에 없는 인간성 정도로 접근해볼 수도 있을 것도 같다. 그러나 기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악령의 존재감은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아보인다.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소개문을 읽어보면 악령이라는 제목이 지니는 의미는 상당히 상징적이다.

-성서에 등장하는 돼지 떼에 들린 악령들처럼, 러시아를 휩쓴 서구의 무신론과 허무주의가 초래한 비극을 러시아의 어느 지방 소도시를 배경으로 보여주고 있는 소설이다.-

(출처-열린책들 www. openbook.co.kr)

 

어느 시대에서였던가. 어느 시기에서였던가. 혹은 누군가에서였던가. 익숙하지 않은 신문물은 새로움의 호기심과 더불어 불온한 의혹과 불안감을 조성하곤 한다. 당대 러시아가 직면해야했던 시대적 정치사회적 흐름에서 작가 도스또예프스끼는 물밀 듯 빠르게 밀려드는, 새롭지만 불안함으로 쏟아져오는 흐름 앞에서, 흔들리는 인간군상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혹 누군가가 앞에 소개하는 소개문 전문을 읽어본다면, 인용에 있어 작품의 상,중,하 중 상권에 맞는 분량만큼을 발췌했음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도싶다.(물론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아직 남아있는 책이 두 권이나 있기에 뒤에 따라오는 해설은 잠시 뒤로 밀어두기로 하자. 전체 작품을 읽기도 전에 해설에만 매달리고 싶지는 않다. 전문을 읽어보지 못해서 인물에 대한 평가를 먼저 내리기도 무모한 노릇이고, 인물이 갖는 성격분석도 아직은 애매한 부분이 있다고 판단한다.

선과 악으로 구분 짓는다해도 과연 누가 선이며, 누가 악인지 명백하지 않다. 저마다 음흉하면서도 측은할 정도로 숨기고 싶은 비밀들이 눈에 보이더란 말이다.

 

알 수 없는 진실의 내면을 감추면서 가면을 쓰고 다가오는 사람들의 이야기. 작가는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가게 될까. 이 지독한 끌림에서 한동안 벗어나기 어려울 듯하다. 서둘러 나머지 책을 구입해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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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0-10-19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척 라이크요~
좋은 밤 되세요~

han22598 2020-10-20 0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머지 2권에 대한 리뷰도 궁금해요 ^^

월천예진 2020-10-20 07:50   좋아요 0 | URL
네. 저도 나머지 책들이 읽고 싶은데 잠시 쉬어가기?를 하고있네요. ^^;;;

월천예진 2020-10-20 0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우리가 살아 있는 모든 순간
톰 말름퀴스트 지음, 김승욱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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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아 있는 모든 순간

 

자전적 소설이라고 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써내려간 글이다. 그러나 그것이 작품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데 있어 어떤 선입견이나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중요한 포인트로 작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었다.

작가가 스웨덴 출신으로 시인이자 대중음악가로 활약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책의 안내가 보인다. 한때는 아이스하키 선수였다고도 적혀있다. 이력이 독특하다.

 

주인공 톰은 아내 카린과 대학에서 만났고 동거를 시작한다. 넉넉하지 않은 경제적 환경에서도 첫 아이의 출산을 앞두고 설레던 순간, 아내인 카린이 급성 백혈병에 걸리게 되면서 이야기는 빠르게 진행된다.

소설은 앞서 언급했듯이 빠른 전개가 전체적인 분위기를 단단하게 잡아가고 있다. 동시에 개인의 감정선이 깊이감과 섬세함으로 드러나기보다는, 건조할 정도로 인물의 감정을 절제한 채 그려내고 있다. 반면에 병원의 분위기, 환경, 병원 안에서 느끼고 생각하는 다양한 경험의 묘사는 상당히 디테일하다. 병원이라는 곳이 환자와 보호자 그리고 의료진들이 뒤섞여 수많은 사건과 함께 서로 다른 입장에서 비롯된 갈등이 비집고 들어차있는 곳이라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소설에서 그려지는 병원의 분위기와 이를 감당해가는 인물의 심리는 조금은 낯설게 다가오기도 한다. 어쩌면 이는 소설 속에서 발현되는 작가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차분하고 때로는 냉정함을 자아내는 분위기 역시 작가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소설의 전반부가 카린의 응급한 상황과 딸 리비아의 출생, 그리고 남겨진 톰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면, 후반부에 갈수록 주인공 톰의 가족사에 집중하게 된다. 과거 유년시절 겪어야 했던 아버지와의 갈등, 현재 병들고 나약해진 부모의 존재 그리고 마지막의 그 아버지의 죽음까지. 소설은 톰이라는 인물이 경험하는 지난한 삶의 모습을 통해, 과거와 현재 안에서 한 개인이 끌어안을 수밖에 없는 무언의 삶의 성찰을 보여주는 듯하다.(성찰이라는 단어를 쓰고보니 어쩐지 종교적 색채가 강하게 느껴지지만-.-) 작품은 혼자가 된 톰이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홀로 당당하게 딸아이를 키우며 소소한 일상에서 행복을 발견해가며 끝을 맺는다.

 

작품에 대한 평가는 사뭇 고저적이다. 자전적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감정에 치우치지 않음을 높이 사는 분위기이다. 감정에 치우치거나 혹은 치우치지 않는다는 조건이 얼마나 작품에서 중요한 요소로 자리하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다면, 딴은 이러한 요소로 인해 작품에 대한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다는 것도 지적해봄직하지 않을까.

지나친 침잠과 감정의 깊이감은 흔히 작품이 신파문학으로 갈 문제를 걱정해야 하겠지만, 때로는 문학의 큰 힘이자 궁극적인 목적의 방향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상기하게끔 한다. 그러나 이 또한 개인의 취향이자 시대의 흐름과는 별개의 일이다. 사실 모든 것이 다 그렇듯 각자의 몫이다. 사견이고, 그렇다는 말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책에 대한 언론의 반응을 실어둔다. 책에 대한 느낌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역시 개인의 취향에 달린 문제다.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읽고, 느끼고, 생각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다듬어지지 않은 감정, 불안감, 감동을 번갈아 보여주는 말름퀴스트의 작품을 사랑과 애도에 대한 긴 명상과 같다. 깊은 감정과 감동이 있는 소설이다.”- 커커스 리뷰

 

“상실에 대한 깊고 개인적인 이야기,(……)요즘 인기를 끄는 자전적 소설이나 회고록 형식은 자기중심적이라기보다 우리 모두가 지니고 있는 인간적인 모습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다.” -가디언

 

가장 공감하는 글이다.

“딸의 출생과 아내의 사망이라는 고통스러운 교차점에 걸린 한 남자의 삶. 급박하고, 가슴 아프지만, 살아 있음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소설” -파이낸셜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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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국내 출간 30주년 기념 특별판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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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오래전부터 버벅거리던 스피커가 완전히 먹통이 됐다. 아무리 두드려보아도, 선을 다시 꽂아보아도, 먼지를 털어보아도 전혀 반응하지 않는다. 듣고 싶은 음악을 듣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갑자기 밀려드는 낭패감이라니. 이 낡은 스피커가 이미 오래전부터 고장이 날 조짐이 있어왔던 것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장 서운해진다. 스피커가 뭐라고. 그러나 나는 잠시의 주저함을 뒤로하고 핸드폰으로 음악을 듣고 있는 중이다. 이 또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지 않은가. 후후

 

책은 민음사에서 다시 특별판으로 나온 듯한 분위기다. 빳빳한 양장본의 겉표지를 자랑하며 프랑스어 비슷한 글씨가 그림처럼 그러져있다. 책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보면 분명 대학시절 즈음에 동일한 책을 구입을 했던 기억이 있으며, 읽다가 너무나 빨리 지쳐 외면했더라는 약간은 비굴한? 기억도 가지고 있다. 그 젊은 시절에 왜 그리 빨리 이 책을 외면했던 것일까. 숨이 막힐 것 같은 답답함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이십여 년이 넘게 지난 지금에 와서는 그 시절에 나를 도망치게 했던 그 답답함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중이다. 놀라운 변화인지 자연스러운 이치인지 나는 아직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이번 책은 철학적이면서도, 깊이 있는 다양한 이야기와 주제를 담고 있다. 때문에 이 모든 것들을 정리해내기란 다소 버거워 보인다. 조금 더 천천히 생각해보자. 그리고 작품에 대한 이해와 해석은 개인의 사견임을 미리 밝혀둔다.

우선 비유와 상징 그리고 은유의 방식에 소설의 스토리를 가져와 작업한 듯한 느낌을 받는다. 세상의 절반은 남자이고, 다시 남겨진 절반은 여자라는 말이 생각나다. 책은 남자와 여자. 이들의 가장 근본이 되는 성적인 욕망과 이 욕망을 뛰어넘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감정을 보여준다. 물론 이 사랑이라는 이름의 감정에 대한 가치에 대해서는 인물들이 각자 느끼는 차이가 크게 작용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소련군의 점령으로 공산화가 되어가면서 무너져가는 이들의 조국 프라하. 작품의 배경으로는 전쟁으로 혼란의 시기를 겪어야 했던 시절을 보여준다. 전쟁이란 특수한 상황에서는 개인의 가치 뿐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존재와 가치, 그 사회가 지니는 사상의 가치를 포함해 모든 것들이 뿌리 채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근원에서부터 울려오는 이 모든 불안감은, 눈부시게 밝은 빛 뒤에 그림자처럼 따라오는 어둠과 조우하게 된다. 말 그대로 허우적거릴수록 더 깊이 빨려 들어가게 되는 수렁과 같은 이 어둠이란(사상의 검증, 도청, 비밀경찰, 정치적 회유와 위협으로부터의 도피), 실상 인물들이 멈추지 않고 극복하며 성장해가야 하는 어떤 당위성을 상징한다고 볼 수도 있다.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 작가는 잔인하게도 주인공들을 비열함과 처절함 그 한 복판에 묶어놓았다는 생각을 한다. 인물들은 각자의 본질적인 존재론적 가치에 대한 번뇌와 고통을 끌어 앉은 채, 다시 힘들게 당대의 시대적 사회적 암울하고 힘겨움을 두 배 세 배로 짊어지고 있는 모습이다.

 

누군가는 그 상황에서 벗어나려 했고 그것이 자신이 추구하는 진정한 가치라 판단했으나, 다른 누군가는 그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다시 깊이 파고들어가야만 했다. 이를 두고 생각하기를 필연일까, 가벼운 운명일까, 아니면 진정한 사랑일까. 그도 아니면 그저 너무나도 불안했기에 스스로를 감당하기조차 힘겨워했던, 가벼운 존재들이 서로가 서로를 외면할 수 없었기에 생겨난 아이러니의 결과물에 지나지 않은 어떤 것일까∼∼. 다시 생각이 많아진다.

 

인간은 완벽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아름답다, 라고 했던 문장이 생각난다. 인간은 감정에 의해 흔들리고, 분노하며,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하는 나약하면서도 강인한 존재다. 때로는 인간이 스스로가 그런 나약하고 완벽하지 못한 존재라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고자 고군분투하는 삶을 선택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개인적인 사견이 과연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지 모르겠다.

 

“인간에 대한 그의 뿌리 깊은 불신(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고 판단할 권리가 있는가에 대한 회의)이 그가 직업을 선택하는 데 이미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P301

 

“보다 합리적이고 보다 은근하게 전략적으로 해야 한다는 거죠. 그들은 서명하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동시에 서명을 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비난을 받을까 두려워합니다.”P351

 

“보헤미아 역사와 유럽 역사는 인류의 치명적 체험 부재가 그려 낸 두 밑그림이다. 역사란 개인의 삶만큼이나 가벼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깃털처럼 가벼운,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가벼운, 내일이면 사라질 그 무엇처럼 가벼운 것이다."P364

 

"인간의 삶이란 오직 한 번뿐이며,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딱 한 번만 결정을 내릴 수 있기 때문에 과연 어떤 것이 조은 결정이고 어떤 것이 나쁜 결정인지 결코 확인할 수 없을 것이다." P365

 

인간이 자신의 삶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가에 대한 책임과 결과는 신의 의지에 국한 된 것만은 아닌 듯하다. 물론 어느정도의 개입은 있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결론적으로 마지막 선택의 주체는 인간 존재라는 사실은 중요하다. 모든 갈등과 고뇌와 기쁨과 희열 속에서 각자 자신의 존재에 희열을 느끼다가도 끝없는 추락의 공포를 동시에 느끼게 되는 이런 그로테스크함의 본능적 감성은, 인간의 삶이 가벼워 보이지만 절대 가벼울 수 없으며 결국 인간이란 존재는 이 모든 갈등의 순간을 극복하는 존재임을 보여주는 의미로 재차 각인된다. 무엇인가를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한 채 불안함 속에서, 가벼움과 무거움을 함께 들고 버텨야 하는 순간 흔들리는 자아를 발견하게 될 때 아마도 이 문구를 기억하게 되지 않을까. 이토록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또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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