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가 분명 이반 일리치는 죽었다고 했는데, 현실에서 이반 일리치의 '누가 나를 쓸모 없게 만드는가'를 읽으니, 굉장히 초현실적으로 되었다.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삶을 열심히 달려오다 되돌아봤을 때, 맞이하게 될 죽음이 겨우 그 허망함을 달랜다는 것은 이반 일리치의 '누가 나를 쓸모 없게 만드는가'와 아주 동떨어진 내용이 아닌 것에 놀랐다.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는 한병철 교수님의 '피로 사회'를 단박에 기억나게 했다. 두께도 비슷했다. 둘 다 두께가 아주 얇은데, 읽기 쉽지 않고, 앞 페이지로 몇 번씩 왔다 갔다 하게 만들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내용을 놓치기도 하고 - 앞 장을 아무리 왔다 갔다 해도 - 맥을 놓쳐서 눈으로 그나마 몇 페이지 광속으로 읽다 다시 정체를 맞이한다.
책 이야기로 좀 넘어와야겠다.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는 상품과 서비스가 대량생산되고 손쉽게 제공됨으로써 세상이 획일화되고 나아가 풍족한 재화 속에 대중은 오히려 자유를 잃어가는 것을 꼬집어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것을 '현대적 가난'이라고 말했다.
현대적 가난은 획일화된 공산품에서 선택의 자유가 이전보다 줄어들게 되었고, 의료, 주택과 같은 서비스가 법의 제도권 안에서 규정됨으로써 개인이 자유롭게 행하던 것들이 제한받게 되었다고 한다. 의료 면허가 없으면 함부로 진찰을 하면 안되고 당국의 허가 없이 주택을 짓거나 개조해도 안 되고 심지어 출산도 병원에서 해야 함으로써 기존에 가졌던 자유를 박탈당했다는 논지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전문가에 의해서 조절되며 그 전문가는 - 기득권을 말하는 것 같다 - 그들의 이익을 위해 인본주의를 저버리고 모든 것을 물화시킨다고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 많이 동의할 수는 없다.
첫 번째로, 상품과 서비스가 풍족해져서 더 많은 사람의 삶이 나아지지 않았던가? 최근 100년이 아닌 그 이전에 국민의 대다수는 농노, 노예, 백성이라는 이름으로 무거운 세금을 내고 병역과 노역에 시달리고 말 그대로 생계유지가 지상 최대의 과제였고, 누구에게나 평등한 의료 서비스는 부재했다. 다수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획일화가 필연적으로 따라왔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로, 저자 또한 굉장한 상류사회의 엘리트이다. 즉, 기득권이 되지 못한 전문가들이 상대적 박탈감을 가지고 비판을 위한 비판 같아 보였다. 전문가 집단 내의 자정 활동이나 투명함조차도 전문가들만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활동으로 간주하고 대안을 제시하지 못함은 생산적이지 못한 비판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세 번째로, 인간이 필요로하는 것에 대한 패러다임이 바뀌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아직도 최빈국이 있고, 식량과 물이 부족해서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우리가 도와줘야 하는 사람들이지 그 사람들의 문제가 인류가 가지고 있는 최우선의 고민 대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식량, 주거, 교통의 문제에만 중점을 두고 있어, 현재 인류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은 희석하는 것 같다.
나의 한국 현대사에서 말하는 것처럼 먹고사는 것이 힘들 때, 어떻게 민주주의를 생각했을까. 하지만, 먹고 사는 것이 삶에 문제가 되지 않을 때, 먹고 사는 것에 중점을 두고, 그것에서 의미를 찾는 것에 집착하면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얇고 작은 하지만 읽기 쉽지 않은 이 책은, 비판적 사고를 하며 읽기에 무척 좋은 것 같다.
뭉툭해진 스테들러 홀더펜으로 여백에 빽빽하게 적게 만드는 책은 마구 휘갈기며 비판하다가도 결국엔 사랑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