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혁명의 역사적 특성은 혁명이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라는 두 절차로 구분되는 데 있다. 지금에 있어서 그 첫걸음은 벌써 일반적인 민주주의라는 것이 아니라 중국적인, 특수한 새 형태의 민주주의인 신민주주의다. 그렇다면 그 역사적 특성은 어떻게 형성되었고, 그것은 100년 전부터 있었던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후에 와서 생긴 것인가? 중국과 세계의 역사적 발전을 연구해본다면 이 역사적 특성은 결코 아편전쟁 때부터 있은 것이 아니라 그 후에 와서, 즉 제1차 제국주의 세계대전 및 러시아 10월혁명 후에 와서야 형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제 그 형성과정을 연구해보기로 한다.


중국 현 사회의 성격이 식민지, 반식민지, 반봉건적 성격인 이상 그것이 중국혁명을 두 절차로 구분하지 않을 수 없도록 규정짓고 있다는 것은 아주 명백한 일이다. 첫걸음은 이 식민지, 반식민지, 반봉건적인 사회형태를 독립적인 민주주의 사회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두 번째 걸음은 혁명을 더 발전시켜 사회주의 사회를 창립하는 것이다. 목하 중국의 혁명은 그 첫걸음을 걷고 있는 중이다.


이 첫걸음의 준비단계는 벌써 1840년의 아편전쟁 때부터, 즉 중국사회가 봉건사회로부터 반식민지, 반봉건적 사회로 전환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태평천국운동, 중국-프랑스전쟁, 청일전쟁, 무술변법, 신해혁명, 5·4운동, 북벌전쟁, 토지혁명전쟁을 거쳐 오늘의 항일전쟁에 이르기까지 거의 100년이나 걸린 이 많은 개별적 단계들은 어떤 점에서 말한다면 모두가 이 첫걸음을 실천했던 것이며, 중국인민들이 각각의 이들 시기에서 봉건세력을 반대하고 독립적인 민주주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투쟁한 것이며 첫걸음의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투쟁했던 것이다. 그리고 신해혁명은 보다 더 완전한 의미에서 이 혁명을 개시한 것이다. 이 혁명은 그 사회적 성격으로 본다면 무산계급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 자산계급 민주주의 혁명이다. 지금 이 혁명은 아직 완수되지 못하고 있으므로 계속 더 많은 힘과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이 혁명의 적이 아직도 매우 강대하기 때문이다. 손중산 선생이 “혁명은 아직 성공하지 못하였으니 동지들은 계속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러한 자산계급 민주주의 혁명을 두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중국 자산계급 민주주의 혁명은 1914년에 제1차 제국주의 세계대전이 폭발되고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에 의해 지구의 1/6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사회주의 국가가 창건된 후부터 변화가 일어났다. 그 이전까지 중국 자산계급 민주주의 혁명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었으며 낡은 세계 자산계급 민주주의 혁명의 일부분이었다. 그 이후부터 중국 자산계급 민주주의 혁명은 새로운 자산계급 민주주의 혁명의 범주에 속하게 되었으며 혁명의 진영으로 말하면 세계 무산계급 사회주의 혁명의 일부분이 되었다. 왜 그런가? 그것은 제1차 제국주의 세계대전과 맨 처음으로 승리한 사회주의 10월 혁명이 전반 세계의 역사적 방향을 개변시켰으며 전반 세계의 역사적 시대를 갈라놓았기 때문이다.


세계 자본주의 전선이 이미 지구의 한 모퉁이에서 (이 한 모퉁이는 전 세계의 1/6의 땅을 차지하고 있다) 붕괴되었고 그 나머지 모퉁이에서도 그 부패성이 충분히 발로되고 있는 시대에 있어서, 아직 남아 있는 이러한 자본주의 부분들도 식민지, 반식민지에 더한층 의존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게 된 시대에 있어서, 사회주의 국가가 이미 창건되었고 또 그가 모든 식민지, 반식민지의 해방운동을 원조하여 투쟁할 것을 선포한 시대에 있어서, 자본주의 국가의 무산계급이 나날이 사회제국주의적 사회민주당의 영향으로부터 해방되어 나오고 있는 동시에 그들이 식민지, 반식민지의 해방운동을 찬조할 것을 선포하고 있는 시대에 있어서 이러한 시대에 있어서 어떠한 식민지, 반식민지 국가에서든지 만일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즉 국제 자산계급을 반대하며 국제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혁명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더는 낡은 세계 자산계급 민주주의 혁명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범주에 속하며 더는 낡은 자산계급 및 자본주의적 세계혁명의 일부분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혁명의 일부분 즉 무산계급 사회주의 세계혁명의 일부분인 것이다. 이러한 혁명적인 식민지, 반식민지는 이미 세계 자본주의 반혁명전선의 동맹군으로 간주할 수 없으며, 그것은 벌써 세계 사회주의 혁명 전선의 동맹군으로 전환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식민지, 반식민지 혁명의 제1단계, 즉 첫걸음은 그 사회적 성격으로 볼 때는 기본상 여전히 자산계급 민주주의적인 것이며 그 객관적 요구는 자본주의의 발전을 위한 길을 닦은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러한 혁명은 이미 낡은, 자산계급에 의하여 영도되는, 자본주의 사회 및 자산계급 독재 국가를 건립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혁명이 아니라, 새로운 무산계급에 의하여 영도되는 혁명으로써, 제1단계에 있어서는 신민주주의 사회를 건설하고 각 혁명적 계급들간의 연합독재의 국가를 창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혁명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혁명은 또한 사회주의의 발전을 위하여 더욱 광활한 길을 닦아주는 것이다. 이러한 혁명은 그 진행과정에 있어서 적정 및 동맹군의 변화로 인하여 또 약간의 단계로 구분되기는 하지만 그 기본적 성격은 변화되지 않는다.


이러한 혁명은 제국주의를 철저히 타격하는 것이기 때문에 제국주의는 이것을 용서하지 않고 반대한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그것을 용서하며 사회주의 국가와 사회주의적 국제 무산계급은 그것을 원조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혁명은 무산계급 사회주의 세계 혁명의 일부분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중국혁명은 세계혁명의 일부분이다”라는 이 정확한 명제는 1924~1927년의 중국 제1차 대혁명 시기에 이미 제기된 것이다. 이 명제는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제기한 것으로서 당시 반제 반봉건적 투쟁에 참가한 모든 사람들의 찬동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 이론의 의의가 아직 전개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문제를 애매모호하게 인식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러한 ‘세계혁명’은 이미 낡은 세계혁명(낡은 자산계급 세계혁명은 이미 끝났다)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혁명이며 사회주의적 세계혁명이다. 마찬가지로 이 ‘일부분’이라는 것은 이미 낡은 자산계급혁명의 일부분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주의 혁명의 일부분이다. 이것은 극히 큰 변화이며 세계적으로나 중국에서나 유사 이래 유례없는 큰 변화이다.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제기한 이 정확한 명제는 스탈린의 이론에 근거한 것이다. 스탈린은 일찍이 1918년 10월 혁명 1주년을 기념하여 쓴 자신의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10월 혁명의 위대한 세계적 의의는 주로 다음과 같은 점에 있다. 첫째, 민족문제의 범위를 확장하여 이것을 유럽에서의 민족적 압박과의 투쟁이라는 부분적 문제로부터 피압박 민족과 식민지 및 반식민지를 제국주의로부터 해방하기 위한 일반적 문제로 전환시켰다. 둘째, 서방과 동방의 피압박 민족을 제국주의와 승리적 투쟁의 공동궤도로 끌어들여 그들의 해방을 위한 광범한 가능성과 현실적인 길을 열어놓음으로써 그들의 해방위업을 대단히 쉽게 해주었다. 셋째,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 사회주의적 서방과 예속된 동방 간에 다리를 놓았고, 서방의 무산자들로부터 러시아 혁명을 거쳐 동방의 피압박 민족들에 이르는 세계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새로운 혁명전선을 결성케 하였다.”


이 논문을 발표한 후에 스탈린은 또 식민지, 반식민지 혁명이 낡은 범주를 벗어나서 무산계급 사회주의 혁명의 일부분이 된 것에 관한 이론을 여러 차례 거듭 전개하였다. 그중에서도 해석이 가장 분명하고 명확한 것은 스탈린이 1925년 6월 30일에 발표한, 이 논문은 장중실이 번역한 《민족문제에 관한 스탈린의 논술》이라는 책에 수록되어 있으며 그 제목은 <다시 한번 민족문제에 대하여>이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쎄미치는 스탈린이 1912년 말에 쓴 소책자 《마르크스주의와 민족문제》 가운데서 한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그 책에는 “대두하는 자본주의의 조건하에서의 민족적 투쟁은 자산계급들 상호간의 투쟁이다”라고 쓰여 있다. 그는 이문구로써 현 역사적 조건하에서의 민족운동의 사회적 의의를 규정한 자기의 공식이 옳다는 것을 암시하려고 기도하였다. 그러나 스탈린의 이 소책자는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있어서 민족문제가 아직 전 세계적 의의를 가진 문제로 생각되지 않던, 또 자결권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기본 요구가 무산계급혁명의 일부분으로가 아니라 자산계급 민주주의 혁명의 일부분으로 평가되던 대인 제국주의 전쟁 전에 쓴 것이다. 따라서 그 이후 국제정세가 근본적으로 변했다는 것. 또 한편으로는 전쟁과 다른 한편으로는 러시아에서의 10월 혁명이 민족문제를 자산계급 민주주의 혁명의 일부분으로부터 무산계급 사회주의 혁명의 일부분으로 전환됐다는 것을 보지 않았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일찍이 1916년 10월 레닌은 <자결에 관한 토론의 총결>이라는 자기 논문에서 말하기를, “자결권이라는 민족문제의 기본사항은 이제는 일반적 민주주의 운동의 일부분이 되어 있지 않고 그것은 이미 일반적인 무산계급 사회주의 혁명의 구성부분으로 변했다”고 하였다. 나는 레닌이나 또 러시아 공산주의의 기타 대표자들이 민족문제에 관한 그 후의 저서들에 대하여서는 더 이상 새삼스레 말하려 하지 않겠다. 모든 것이 그렇다면 러시아에서의 자산계급 민주주의 혁명 시기에 쓴 스탈린의 소착재에서 주지하다시피 앞에서 소개한 것을 쎄미치가 인용했다는 것은 우리가 새로운 역사적 환경으로 말미암아 새 시대, 즉 무산계급혁명의 시대로 들어온 지금에 있어서 어떠한 의의를 가질 수 있는지를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그러한 인용이 가질 수 있는 의의라는 것은 다만 쎄미치가 공간과 시간을 떠나서 산 역사적 환경과는 관련없이 인용하고 있는 것이며, 그러함으로써 그는 변증법의 초보적인 요구도 지키기 않고 있는 것이며, 또한 역사적 환경에서의 옳았던 것이 다른 역사적 환경에 있어서는 옳지 못한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고려치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이로써 두 가지 종류의 세계혁명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첫째 종류는 자산계급 및 자본주의 범주에 속하는 세계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혁명의 시기는 이미 지나갔다. 그것은 벌써 1914년 제1차 제국주의 세계대전이 폭발되었을 때, 특히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 때 종결되었다. 그 후부터는 둘째 종류의 세계혁명, 즉 무산계급 사회주의 세계혁명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혁명은 자본주의 국가의 무산계급을 그 주력군으로 하며, 식민지, 반식민지의 피압박 민족을 그 동맹군으로 한다. 피압박 민족 내부에 있어서 혁명에 참가하는 그 계급, 정당 또는 개인들이 어떠한 계급, 정당 또는 개인이거나를 막론하고, 또 그들이 이 점을 의식하고 있거나 못하고 있거나를 막론하고, 오직 그들이 제국주의를 반대하기만 한다면 그들의 혁명은 무산계급 사회주의 세계혁명의 일부분이 되며 그들은 무산계급 사회주의 세계혁명의 동맹군이 된다.


오늘에 와서 중국혁명은 그 의의가 한층 더 커졌다. 오늘날은 자본주의 경제적 위기 및 정치적 위기로 말미암아 세계가 나날이 제2차 세계대전으로 끌려들어가고 있는 때이며, 사회주의를 거쳐 공산주의로 이행하게 될 소련이 전 세계 무산계급 및 피압박 민족을 영도하고 원조하여 제국주의 전쟁에 반항하며, 자본주의적 반동에 타격을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때이며, 자본주의 국가들의 무산계급이 자본주의를 타도하여 사회주의를 실현시키려고 준비하고 있는 때이며, 중국의 무산계급, 농민계급, 지식인 및 기타의 소자산계급들이 중국 공산당의 영도하에 이미 위대한 독립적인 정치적 역량이 형성되고 있는 때이다. 오늘날 이러한 시기에 처해있는 우리로서는 중국혁명의 세계적 의의가 더한층 커졌다고 평가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 아니겠는가? 나는 당연히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중국혁명은 세계혁명의 위대한 일부분인 것이다.


중국혁명의 이 첫단계(그것은 또 많은 작은 단계로 구분된다)는 그 사회적 성격으로 말한다면 아직 무산계급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 새 형태의 자산계급 민주주의 혁명이지만 이미 무산계급 사회주의 세계혁명의 일부분이 되었고, 현재에 와서는 더욱 이러한 세계혁명의 위대한 일부분이 되었으며, 이러한 세계혁명의 위대한 동맹군이 되었다. 이 혁명의 첫걸음, 즉 제1단계는 결코 중국 자산계급 독재의 자본주의 사회를 건설하려는 것이 아니고 또 그럴 수도 없으며, 중국 무산계급을 그 영도자로 하는 중국의 각 혁명적 계급들의 연합독재의 신민주주의사회를 건설하자는 것이다. 이것으로 제1단계에 대한 설명을 마치려고 하며, 이를 다시 제2단계로 발전시켜 중국에다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시키고자 한다. 이것이 목하 진행되고 있는 중국혁명의 가장 기본적인 특성이며, 20년 이래(1919년 5·4운동으로부터 계산해서)의 새로운 혁명과정이며, 목하 중국혁명의 생동하고도 구체적인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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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폰다입니다. 저는 지난 두 주 동안 베트남민주공화국을 방문했습니다. 많은 곳을 보았고, 많은 계층의 다양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눴습니다. 노동자, 농민, 예술가, 학생, 무용가, 역사가, 저널리스트, 영화배우, 군인, 의용소녀, 여성동맹 단원 그리고 작가들을 만났습니다. 나는 누에고치가 길러지고 비단이 짜지는 협동농장, 그리고 하노이 방직공장과 유치원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문예궁전에서 베트남 전통무용을 감상했고, 저항의 노래를 들었습니다. 나는 거기서 남쪽 밀림의 게릴라들이 적군을 공격하기 위해 벌을 훈련시키는 것을 극화한, 잊을 수 없는 발레를 보았습니다. 벌들은 여자무희들이 춤을 추었는데 매우 아름답게 표현되었습니다.

 

나는 문예궁전에서 베트남 배우들이 아서 밀러의 나의 아들2막을 연기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미제국주의자들이 그들의 나라를 폭격하고 있는 와중에도 그들은 적국인 미국의 희곡을 번역하여 연출하고 있었다는 이 사실! 그것은 너무도 감동적이었습니다. 나는 공장의 지붕 꼭대기에서 수줍음을 타고 얼굴을 붉히는 의용소녀 하나가 베트남의 푸른 하늘을 찬양하는 힘찬 노래를 부르고 있었던 인상적인 모습을 기억합니다. 이들은 부드럽고 시적이며 목소리고 꾀꼬리 같았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폭격기가 그들의 도시를 쑥밭으로 만들어 버릴 때는 그들은 씩씩한 전사로 변모합니다.

 

나는 미국의 폭탄이 떨어질 때 적국의 여자인 나를 감싸안고 방공호로 뛰어들어갔던 한 농부의 따스한 손길을 소중하게 기억합니다. 우리들은 팔과 팔, 뺨과 뺨을 부비고 있었습니다. 나는 남 딘(Nam Dinh)의 길목에서 학교, 병원, , 공장, , 관개제방 등 모든 민간 시설이 모두 무참히 파괴되는 현장을 목격했습니다. 내가 두 주전에 미국을 떠날 때, 닉슨은 미국인들에게 베트남전을 종료시키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남 딘의 어지러운 폐허에서 나는 그의 말은 살인자의 음험한 감언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의 팔을 꼭 붙잡고 매달리는 어린 한 베트남 소녀의 뺨을 부비면서 나는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베트남과의 전쟁일지 모르지만, 이 모든 비극은 결국 미국의 것일 뿐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의심할 수 없는 자명한 진리로서 이 나라에 깨닫게 된 하나의 사실은 닉슨은 결코 이 땅의 사람들의 정신을 파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미국은 북베트남이든 남베트남이든 폭격과 침략 어떠한 방식의 공략으로도 미국의 식민지로 만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떨어진 폭탄 하나는 결국 이 땅의 사람들을 저항의 의지만 단호하게 만들 뿐입니다. 나는 녹둑의 농부들로부터 그런 의지를 확인했습니다.

 

내가 만난 농부들은 과거 그들의 삶은 지주에 소속된 노예일뿐이었으며, 교육과 의료의 혜택이 전혀 없었고, 그들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될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폭격에도 불구하고, 닉슨이 그들에게 저지르는 범죄 행위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국민은 자신의 토지와 학교를 갖고 있습니다. 문맹은 사라졌고 프랑스 식민지 시절 창녀 노릇했던 여성들이 용감한 전사로 변했습니다. 인민은 자신의 손에 스스로 권력을 쥐고 있으며, 삶의 진정한 주인이 되었습니다.

 

베트남 인민은 4천년 동안 자연과 외국 침략자들을 상대로 줄기차게 싸워왔습니다. 프랑스와 식민투쟁에서도 이겼습니다. 베트남의 완전한 자주 독립을 스스로 쟁취해나갈 것입니다. 리차드 닉슨이 베트남 역사와 베트남의 시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호찌민이 쓴 시를 잘 읽어 음미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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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을 기점으로 한국에선 이른바 페미니즘(Feminism)이라는 주제가 국가적 혹은 사회적으로 이슈가되었던 것 같다. 2016년에 나온 소설 ‘82년생 김지영은 상당히 많은 인기를 끌었고, 그 이후 미투운동과 더불어 페미니즘이라는 담론이 우리 사회에 상당히 많은 영향을 끼쳤다. 앞에서 언급한 ‘82년생 김지영2019년 영화화 되어 개봉했었다. 나 또한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이 있었는지 아니면 그냥 싫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 영화를 보는 게 좀 거리감이 생겼었다. 뭐 그래도 몇몇 영화평론가들이 상당히 과학적 분석을 한 영화평들을 내놓다보니 나 또한 이 영화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고, 영화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늦긴 했지만, 어제 저녁에 이 영화를 혼자서 보게 되었다.

 

영화의 주인공 김지영이 살고 있는 사회는 물질적으로 부족하지 않고, 매우 풍요롭다. 적어도 김지영의 삶은 좁지 않은 아파트와 적잖은 급여를 받는 공무원 남편 그리고 그의 가족과 일가친척들도 자신들 나름의 풍요로운 삶은 영위하고 있다. 그러나 물질적으로는 풍부하지만 주인공 김지영은 불편한 진실에 항상 마주치게 된다. 이것은 여자로서 가지게 되는 사회적인차별과 주변에서 느끼게 되는 차별적인 인식이다. 즉 능력이 되더라도 여성이기 때문에 사회에서의 신분상승이 제동이 걸리는 현실과 육아라는 부담 때문에 일을 망설이게 되는 현실 말이다. 일각에서는 남자들 또한 고생하는데 왜 여성이 겪는 것만 강조하냐 혹은 편향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수 도 있지 모르겠다. 물론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는 남성들이 겪는 현실에서의 문제도 있지만, 여성들이 겪었던 이러한 사회적인 한계와 제도는 지금까지 등한시 되어온 측면이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러한 문제제기는 사실상 의미가 없다고 본다.

 

영화상에서 김지영이 겪는 차별은 육아라는 측면에서도 많이 나타났던 것 같다. 육아 휴가를 쓰고자 했던 남편이 결국 김지영의 시어머니 때문에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는 상황은 결국 육아의 문제를 여성에게만 전가시켰던 사회의 문제라는 생각이 정말 많이 들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당시 사회주의 혁명가들이 문제제기를 했던 문제가 여기서도 겹친다. 즉 러시아 혁명 당시 혁명가들이 주장했던 그런 문제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는 82년생 김지영도 92년생 김지영도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위에서 상술한 바와 같이 김지영의 삶은 절대로 물질적으로 부족하지 않다. 그의 가족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김지영의 삶은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왜일까? 여성 차별 때문일까? 사회의 전반적인 문제인가? 가부장주의에 찌들어있는 남성들 때문일까? 많은 지점을 생각해보게 된다. 누군가는 젠더의 관점에서 김지영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난 젠더 혹은 페미니즘적인 관점 보다는 자본주의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 즉 한 지배계급으로서 나타난 형태가 그러한 차별과 편견의 시선을 창조하고 재생산해냈다는 생각이 영화를 보면서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실제로도 그러하다. 과거 우리의 교육에선 가정에 대해 배울 때 남성은 직장을 다니며 돈을 벌어오고, 여성은 집에서 가정 일을 도맡아 하는 것을 일반적인 가정의 모습으로 배워왔다. 하지만 그 예외의 사례에 대해선 알지 못하게 예외의 시선으로 보는 것 같고, 또 사회가 그렇게 조장하는 것 같다. 즉 이런 것이 바로 사회가 만들어낸 편견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영화 김지영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두 인물이 있다. 바로 김지영의 엄마와 김지영의 남동생이다. 김지영의 엄마는 전형적인 박정희 시대 산업화의 피해자다. 어린시절 공부도 잘해서 교사가 되겠다던 꿈이 있었지만, 그 꿈은 현실이라는 장벽 앞에 무너져 내렸다. 왜냐하면 오빠들을 우선적으로 대학에 보내야 했기 때문에 그 학비를 젊은 시절 김지영의 엄마가 벌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김지영의 엄마는 산업화 시기 가장 많은 핍박과 착취를 받던 여공으로 일을 해야 했다. 나는 이 부분에서 산업화 시기 교육의 균등한 기회를 제공받지 못하여 그래야만 했던 사람들이 생각이나 너무나도 안타깝고 슬펐다. 결국 그 시기 좋은 교육을 받지 못한 건 돈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런 문제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 시절은 더 심했다.

 

김지영의 동생이 유난히 기억에 남는 건 과거 혹은 현재의 내모습과 오버랩 되는 측면이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할머니나 중년여성들에게 예쁨을 받는 모습이나, 엄마와 친누나가 하는 일을 도와주는 역할이 상당히 내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거기다 운전까지 해서 심부름으로 물건을 갖다 주기까지 하니 최근 들어 운전을 시작한 내 모습과 겹쳤다. 거기다 친누나한테 조금 대드는 장면도 뭔가 나를 보는 것 같아 조금 찔리기 까지 했다. 누군가는 이 장면을 놓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김지영의 동생으로부터도 자연스럽게 측은지심을 느꼈다. 아마도 이것은 나또한 그런 현실과 마주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에 나오는 김지영의 남편은 정말이지 걷잡을 부분이 없는 아주 완벽한 남편이다. 물론 영화에서처럼 서로가 이해하려고 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즉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를 걱정해주고, 보듬는 일말이다. 그러나 많은 여성들이 안타까움을 느끼겠지만, 그런 남성은 이 세상에 많지 않다. 아니 찾기 매우 힘들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남성 여성을 떠나서 서로가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의 감정과 심정을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과거엔 그러지 못한 가정이 많았다면 이제는 바꿔야 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적잖게 슬펐다. 비단 김지영 뿐만 아니라 너나 할 것 없이 불편하고 편협한 틀 속에서 사회를 살아가는 것 같았다. 영화를 보는 것에 따라서 누구는 페미니즘에 입각한 관점으로 혹은 다른 관점으로도 볼 것이다. 난 개인적으로 이 영화가 사회의 전반적인 문제 그리고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문제라는 측면에서 많이 다가왔다. 결국 김지영이라는 인물도 자본주의 사회의 피해자였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 자체를 내가 다 동의한다고는 말할 수는 없다. 나 또한 남성이라는 생물학적 특성 및 한계를 못 벗어난 것일까?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어떤 부분에선 조금의 불편함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큰틀에서 보았을 때 영화상에서 공감되는 부분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아무튼 사회를 살아가며 고통을 받는 한 여성의 삶도, 남편의 삶도, 남편, 아내 그리고 남녀 회사원의 삶이 슬펐다.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불편한 진실이기 때문일까? 아마도 그런 것 같다. 오랜만에 정말 의미 있는 영화를 보았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 영화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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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0-11-26 04: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 잘 읽었습니다. ^^ 제가 님이 쓰신 글에 대해서 잘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영화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하에 발생되는 계급에 대한 저항보다는, 한 사회에서 양산된 자본이 어떤 식으로 분배가 이루어지는 지에 대한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본을 발생시키는 노동이나 서비스 형태가 남녀간의 차이가 있고, 그리고 그것들의가치를 부여하고 댓가로 수여받는 자본의 분배가 젠더간의 차이가 발생되어 진다는것입니다. 따라서 자본의 크기에 따른 지배계급을 형성하는 자본주의의 자체의 문제라고 지적하기 보다는 자본의 형성과 분배과정중에 발생되는 불균형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

NamGiKim 2020-11-26 13:47   좋아요 1 | URL
뭐 그렇다고도 볼 수 있겠죠. 결론적으로 문제는 분배의 문제인데, 분배의 문제에서 생기는 젠더의 갈등이니까요. 근데 그것은 남녀평등적이지 못하게 조성해온 사회의 문제도 크겠지요.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근래에 들어 한국에선 소위 페미니즘이라는 주제가 많이 주목받았던 것 같다. 물론 페미니즘이라는 담론이 비단 한국에서만 나타나는 사회현상은 아니지만, 현실적인 공간에서의 남녀차별 및 여러 사회적 모순에 대한 반작용으로써 나타난 것도 분명히 있다. 아마 한국에서 페미니즘이 전사회적인 영역에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2015년 메갈리아의 등장이 컸던 것 같다. 물론 그 방법론에 있어서 시민들에게 충격과 혐오를 준것도 사실이지만, 이 계기를 통해서 페미니즘이라는 주제가 사회적으로 이슈화되면서 연결되어 온 것 또한 사실이다.

페미니즘에 대해 좋고 싫고의 단순한 감정을 떠나서 페미니즘이라는 사회의 한 현상이 전 사회적 영역으로 확산되었다는 점은 분명히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 필자는 생각한다. 아닌게 아니라 페미니즘 진영에서 가장 많이 강조하는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영화로 만들어질 정도니 말이다. 물론 그렇다 해서 페미니즘에 대한 반대급부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매우 강력하게 존재를 드러냈다. 그것이 바로 안티 페미니즘이라 할 수 있다.

안티 페미니즘은 원래부터도 일간베스트와 같이 차마 입으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저급한 반동조직에 항상 존재해 왔지만, 페미니즘의 부상과 더불어 일부 인사들의 주장에 살이 붙어 사상화 되었고, 조직화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올해 봄에 강남역에서 열렸던 안티 페미니스트들의 집회를 예로 들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들은 페미니즘에 대한 반대급부로 엄청나게 조직하고 세력을 부풀렸지만, 일간베스트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로부터 전혀 벗어나지 못했고, 오히려 더 타락의 길을 걸었다. 왜냐하면 반공주의라는 극단적 반혁명 사상이 머리에 주입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들은 페미니즘=사회주의라는 이상한 주장을 하기도 한다. 여성에 대한 맹목적인 혐오심을 드러내고 있고, 좌파에 대한 혐오를 부추기며, 심지어 뉴라이트의 역사관을 계승받아 이승만과 그의 반공사상을 내세우고 있는 중이다. 그들의 반북관 또한 마찬가지다. 아니 그냥 안티페미니즘=반공주의라는 공식이 대체로 성립할 수 있는 수준이다.

이처럼 이번에 강남역에서 혐오집회를 벌였던 한국의 안티 페미니즘 진영은 본질적으로 반동이며, 사회적으로 청산해야할 암덩어리고 우리가 연대해야할 대상이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현재 주류 페미니즘의 의견을 다 동의하거나,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다는 것은 절대 아니며, 그들이 범하는 일부 비과학적 접근은 상당히 경계해야 한다 생각한다. 그리고 나 또한 이쪽 분야에 대해선 학습이 부족하기에 어디까지나 개인의 생각을 적어놓는 수준에 그치고 있지만 말이다.

내 sns 친구들 중에는 페미니스트들도 있고, 안티 페미니즘의 주장에 상당부분 공감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그들의 주장을 양면 다 보려고 하는 쪽이다. 그 과정에서 생기는 오류도 있겠으나, 이쪽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나로선 그것이 최선이다. 그러나 난 본질적으로 페미니즘의 진영보다 안티 페미니즘 진영에 반감이 더 강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나부터가 좌파를 자칭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치녀'나 '보슬아치' 등등의 단어들을 쓰는 이들 그리고 반공을 내세우는 그들을 지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제 슬슬 결론을 내리자면 반공을 중심으로 두고 있는 한국의 안티 페미니즘은 당연히 청산해야할 대상이다. 따라서 이들은 동맹세력이 아니라 사회주의에 있어서 적이고 반동이다! 이들을 분쇄하지 않는 이상 사회주의가 얘기하는 여성해방과 남녀평등은 실천되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주류 페미니즘에 대한 이론적 그리고 과학적 비판과 더불어 이들에 맞선 투쟁도 당연히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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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20-11-26 13: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국 페미니즘도 신-신보수주의로 볼수 있지요..

NamGiKim 2020-11-26 13:57   좋아요 1 | URL
그런 측면도 없지는 않겠죠. 어디가 되었든 문화 탈레반이 되서는 안되겠죠.
 
아옌데의 시간
카를로스 레예스.로드리고 엘게타 지음, 정승희 옮김 / 아모르문디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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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최초로 국민투표를 통해 집권한 사회주의 체제는 칠레였다. 1970년 9월 5일 칠레를 강타한 투표는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세계최초로 투표를 통해 사회주의자 대통령이 탄생했기 때문이다. 당선된 이는 바로 칠레 사회당 소속의 지도자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였다. 그는 1952년과 1958년 그리고 1964년까지 총 네 번의 대통령 선거 출마 끝에 당선된 인물이었다. 대통령으로 당선된 아옌데는 국민들에게 점진적인 사회개혁과 무상의료 무상교육 등과 같은 사회주의적인 복지를 약속했다.

아옌데의 사회주의는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의 사회주의하고는 좀 달랐다. 우선적으로 그의 정권은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당선되었고, 의회민주주의를 유지했으며, 우익들의 활동을 아주 체계적으로 분쇄하지는 못했다. 그 때문에 좌파내부의 갈등과 비판도 적잖게 있었지만, 한편으론 민중의 대대적인 지지를 얻기도 했다. 그의 인민연합은 각종 좌파세력들을 결집함으로써 사회주의 체제를 수호하고자 했고, 칠레를 착취하고 억압하는 기업들에 대해 국유화를 단행했었다. 따라서 아옌데 정권은 개혁을 얘기하면서도 사회주의로의 이행이라는 목표에 있어선 절대로 벗어나지 않았다.

아옌데의 이러한 노력은 초반부터 난관에 부딪쳤다. 우선 지배계급으로 있던 우익과 기득권층은 민중의 삶을 악화시키기 위해 가뜩이나 부족한 물자 및 생필품들을 대대적으로 사재기하여 민중들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뜨리고자 했다. 이들은 당연히 라틴아메리카에 제2의 쿠바를 막고자 했던 미국의 지원을 받았다. 거기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하고 있던 상황이라 남미에 대한 개입을 통해 사회주의가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미국은 CIA를 통해 칠레의 극우세력과 파시즘 세력들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을 이용함으로써 흑색선전도 일삼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옌데는 포기하지 않았고, 초기에 많은 성과를 내기도 했다. 아옌데 정부는 토지개혁을 실시했고, 칠레의 핵심자원인 구리를 국유화하여 외국기업의 착취로 부터 벗어나고자 했다. 아옌데 정권은 대농장을 몰수하여 정부와 협동조합이 관리하도록 하거나 농민들에게 배분했다. 따라서 아옌데는 대농장을 포함한 4,400개가량의 토지를 몰수하고 보상, 분배 그리고 국유화하였다. 아옌데는 미국의 케네코트와 아나콘다 사의 재산을 몰수하는 절차를 거쳐 이런 기업들을 국유화했다.

따라서 미국은 칠레 문제에 개입하여 사회주의 정권을 타도하고자 했다. 미국이 개입하여 주도한 위장파업과 아옌데 암살 시도 등은 아옌데에 대한 민중의 지지율을 하락시키지 못했다. 오히려 지지율을 상승해갔다. 그것은 아옌데 정권이 민중에게 많은 신뢰를 주었기 때문이다. 결국 미국이 선택한 것이 바로 군사 쿠데타였다. 쿠데타를 일으킨 미국과 피노체트 세력은 수도 산티아고에 있는 아옌데의 대통령궁을 전투기로 폭격하고 탱크로 포위하여 신속히 군대를 포위했다. 결국 아옌데는 “칠레 만세! 민중 만세! 노동자 만세!”라는 말을 남기고 피델 카스트로가 준 AK-47 소총으로 자결은 선택했다. 이렇게 해서 아옌데의 사회주의는 끝이 났고, 칠레에는 피노체트가 주도하는 군사 독재 정권이 들어섰다.

이 책은 아옌데가 집권한 1,000일을 아주 생생히 다룬 그래픽 노블이다. 존 니치라는 미국인 기자의 눈을 통해 아옌데의 1,000일을 아주 생생히 기록하고 그렸다. 책의 시작은 1973년 9월 11일 피노체트가 보낸 전투기가 아옌데가 있는 대통령궁을 폭격하면서 시작한다. 그러면서 다시 1970년 칠레에서 있던 대통령 선거 시점으로 돌아와 얘기가 진행된다. 아옌데가 집권한 1,000일은 제국주의와 부조리에 맞선 민중들의 투쟁의 기억이다. 책을 읽다가 순간 울컥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진보의 꿈이 무너지는 순간에선 나의 눈물샘을 아주 격렬하게 자극했다.

2020년 10월 26일 칠레에선 새로운 일이 일어났다. 바로 피노체트 헌법을 국민의 힘으로 폐지한 것이다. 1973년 군사 쿠데타로 잡았던 피노체트는 17년간 군사독재를 해왔고, 반대파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 및 민간인 학살을 게시했다. 그의 집권기간 동안 수만 명이 학살당했다. 빅토르 하라 같이 칠레의 예술가들은 목숨을 잃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죽고 고문당하고 고통 받았다. 이처럼 칠레의 현대사는 아옌데가 죽고 난 뒤 끊임없이 비극의 비가 내렸다. 2019년에 칠레에서 시작된 집회는 아옌데의 유산을 다시 부활시켰다. 그 결과 칠레 민중은 자신들의 힘으로 피노체트 헌법을 폐지했다. 참으로 기쁘고 감동적인 일이다.

대통령 선거 당시 아옌데를 지지하는 측에서 불렀던 노래가 있다. 그 노래가 바로 “우리는 승리하리라!”라는 이름을 가진 <벤세레모스>다. 진보의 꿈을 버리지 않은 이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하며 마지막으로 벤세레모스의 가사를 공유하면서 서평을 마치도록 하겠다.

1절

Desde el hondo crisol de la patria
조국의 깊은 시련으로부터
se levanta el clamor popular,
민중의 외침이 일어나네
ya se anuncia la nueva alborada
이미 새로운 여명이 밝아와
todo Chile comience a cantar.
모든 칠레가 노래 부르기 시작하네
Recordando al soldado valiente
불멸케 하는 모범을 보여준
cuyo ejempla lo hiciera inmortal
한 용맹한 군인을 기억하며
enfrentemos primero la muerte,
우리는 죽음에 맞서
traicionar a la patria, jamás!
결코 조국을 저버리지 않으리!
Venceremos, venceremos,
우리는 승리하리라, 우리는 승리하리라,
mil cadenas habra que romper.
수많은 사슬은 끊어지고,
Venceremos, venceremos,
우리는 승리하리라, 우리는 승리하리라,
la miseria sabremos vencer.
우리는 비극을 이겨내리라.
Venceremos, venceremos,
우리는 승리하리라, 우리는 승리하리라,
mil cadenas habra que romper.
수많은 사슬은 끊어지고,
Venceremos, venceremos,
우리는 승리하리라, 우리는 승리하리라
la miseria sabremos vencer.
우리는 비극을 이겨내리라.

2절

Campesinos, soldatos y mineros,
농부들, 군인들, 광부들
la mujer de la patria tambien
그리고 이 땅의 모든 여성과
Estudiantes, empleados, obreros,
학생, 노동자들이여
cumpliremos con nuestro deber.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의무를 완수할 것이다
Sembraremos las tierras de gloria,
영광의 땅에 씨를 뿌리자
socialista sera el porvenir,
사회주의의 미래가 열린다
todos juntos seremos la historia;
모두 함께 역사를 만들어 가자
a cumplir, a cumplir, a cumplir!
이룩하자, 이룩하자, 이룩하자!
Campesinos, soldatos y mineros,
농부들, 군인들, 광부들
la mujer de la patria tambien
그리고 이 땅의 모든 여성과
Estudiantes, empleados, obreros,
학생, 노동자들이여
cumpliremos con nuestro deber.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의무를 완수할 것이다
Sembraremos las tierras de gloria,
영광의 땅에 씨를 뿌리자
socialista sera el porvenir,
사회주의의 미래가 열린다
todos juntos seremos la historia;
모두 함께 역사를 만들어 가자
a cumplir, a cumplir, a cumplir!
이룩하자, 이룩하자, 이룩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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