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8월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이후 만주에 있던 소련군은 대규모의 진공 작전을 전개했다. 몇 개월 전부터 전쟁준비를 마친 소련군은 곳곳에서 명실상부 일본군 주력부대나 다름없던 관동군을 손쉽게 궤멸시켰고, 만주와 중국 일부, 몽골, 남사할린, 쿠릴열도 그리고 한반도 북부까지 진격했다. 이러한 진격은 작전을 개시한지 불과 10일도 안 되는 사이에 전개됐다. 당시 만주에서 군사작전을 지휘한 인물이 있었다. 그가 바로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다.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는 1895930일 러시아 볼가 강 유역에 있는 이바노프 주 노바야골리티하에서 성직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성당 성가대의 지휘자로, 나중에 러시아정교회 신부로 임명되었을 정도로 신앙심이 깊은 인물이었다. 수입이 좋지 않았던 바실렙스키의 가족은 어려서부터 형제들과 농장에서 일해야 했고, 바실렙스키도 마찬가지였다. 1909년 여름 신학교를 졸업한 바실렙스키는 아버지의 말에 따라 또다른 신학교에 입학했다. 이 시기 그는 학생운동과 자본가의 착취에 반대하는 파업 시위 같은 각종 활동에 참가했고, 이런 경험은 바실렙스키에게 큰 변화를 주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그는 군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19152월 모스크바로 가서 훗날 프룬제 군사 아카데미로 이름이 바뀌는 알렉세예비치 군사 학교에 들어간다. 거기서 4개월 동안 속성 훈련을 받았고, 졸업 후 곧바도 예비군에 배치되어 준위 계급장들 달았다. 1916년 그는 전선에 투입되어 오스트리아-헝가리 연합군과 전투를 치렀고, 러시아 제국 군대가 연이어 패배하면서 후퇴를 거듭했다. 그러던 19171110월 혁명과 부대 안에 있던 볼셰비키 세력의 영향을 받은 바실렙스키는 계급장을 내놓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19194월 적백내전이 격화되자 징집되어 붉은 군대의 군관에 임명되었다. 이렇게 하여 소련 붉은 군대와 그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붉은 군대에 들어가게 된 바실렙스키는 이른바 소련-폴란드 전쟁에서 전투를 치렀고, 부대내에서 활약한 공로를 인정받아 군단장, 참모 등을 거쳐 소장자리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바실렙스키는 군인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1939년 소련의 침공으로 시작된 소련-핀란드 전쟁 즉 겨울전쟁에서 총참모부의 작전부 부부장 신분으로 겨울전쟁 작전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겨울전쟁 이후 바실렙스키는 히틀러와 독일이 가장 위험한 적이 될 가능성을 염두해두고 있었는데, 그의 예상은 1941년에 실현되었다.

 

1941622일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바실렙스키는 작전부장과 참모부총장에 임명된다. 그해 10월 초 그는 모스코프스키 지역으로 가서 후퇴한 부대를 모아 방어 전선을 구축하기도 했다. 모스크바 공방전 당시 작전 참모팀의 책임자였던 그는 뛰어난 성과를 올려 중장으로 승진하기에 이른다. 19425월 소련 참모총장이 된 바실렙스키는 전쟁 중에 나타난 여러 가지 문제를 구체적으로 해결하는 데 힘썼고, 스탈린그라드 전투에도 참가하여 194322일 독일군 수십만 명을 포위하기도 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바실렙스키는 각 부대의 지휘관들과 함께 돈바스 전투, 쿠르스크 전투, 크림 전투 그리고 벨라루스 전투 등을 지휘햇다.

 

벨라루스 전투는 소련이 겪은 전투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으며, 준비 과정에서 이른바 바그라티온이라는 명칭을 가진 바그라티온 작전 계획을 세웠다. 이 작전을 통해 소련군은 군사 본부가 더욱 효과적으로 각 부대를 제어할 수 있게 하고, 새로 편성된 부대의 사령관을 맡을 인재오 추천했다. 이 작전이 성공함에 따라 벨라루스 전체가 독일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 19454월 바실렙스키는 극동 작전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으며, 그해 7월엔 소련 극동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해 8월에 있던 작전에서 바실렙스키는 150만 명 이상의 소련군을 지휘하여 만주에 있던 일본 관동군을 궤멸시키기에 이른다. 결국 일본은 1945815일 소련의 만주 진격에 따라 전의를 잃고 항복을 하게 되었다.

 

전쟁 이후 바실렙스키는 참모총장, 국방부 제1부부장, 국방부 총감 등의 직위를 거쳤고 소련의 군사력을 강화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이렇게 남은 여생을 보내던 바실렙스키는 197725일 사망하여, 소련군에서 세웠던 공로에 따라 모스크바 크렘린 벽 묘지에 안장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차 세계대전 초기에 일어난 카틴숲 학살은 독소 불가침 조약과 더불어 서방에서 소련과 나치즘을 동급 취급하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주제입니다. 보통의 경우 카틴숲 학살은 1940년 소련의 NKVD에 의해 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즉 소련의 NKVD가 수천 명이나 되는 폴란드 장교를 처형하고 암매장했다는 것이죠. 그러나 이와 같은 폴란드 측과 서방의 주장에 대해 반박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실 저는 카틴숲 학살에 대해 잘 모릅니다. 어느 측이 맞는지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다만 이러한 반박도 있다는 사실을 알 뿐입니다. 따라서 오늘은 그리스공산당(KKE)에서 주장하는 카틴숲 학살에 대한 반론을 올려보고자 합니다.

 

1. 카틴숲(Katyn Forest)에서의 나치의 잔학행위

 

카틴은 스탈린주의 범죄와 대학살의 극히 일부를 보여준다.(아브지 신문, 200931)”

 

스몰렌스크(Smolensk) 지역에서 폴란드 전쟁포로 수천 명이 학살된 것에 관해, 벨로루시 공화국은 최근 반공산주의 선전의 최전선으로 복귀했다. 안드레이 바이다(A. Wajda)의 영화 카틴(Katyn)” 및 카틴과 관련하여 소련이 유죄인 것처럼 보이는 자료를 온라인에 게시한 것이다.

 

그리스 언론에서는 또한 소련에 대한 악명 높은 독일 히틀러 선전상인 괴벨스한테 받았던 지원 일체를 다시 받기 위해 이 기회를 지나치지 않고 덤벼들었다. 많은 기회주의자들은 이 상황에서 특유의 열정을 보여준다. 실제로, 지금의 모든 나치 변호론자들의 주장은 1943년 나치 조사의 발견에 근거를 두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믿을 수 없는 것이고, 적어도 1992년에 제출됐던 그 자료는 나치가 문서위조를 한 치명적인 증거가 있기 때문이다.

 

2. 나치의 카틴에서의 집단 매장지 발견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보자. 카틴은 벨로루시의 스몰렌스크 지역에 있다. 이 지역에서 소련은 폴란드 전쟁 포로를 수용소에 가둬 두었다. 그러나 19416월 소련에 대한 독일의 공격 이후, 이들 영토는 독일의 통제 하에 있게 되었다. 2년 뒤인 19434월 스탈린그라드에서 나치가 패배 하고 두 달 뒤에 베를린에 있는 나치 라디오 방송국은 카틴에서 폴란드 장교 3천명의 집단 매장지를 발견했다는 뉴스를 보도했다. 1년 뒤에는 그 희생자들이 25천명에 달했다! “유대인 볼셰비즘은 이 범죄에 대한 범인으로 확인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집단 매장지 발견 시기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만 다음으로 넘어가겠다.

 

괴벨스가 말하고자 했던 거처럼, “이 선전 재료들의 더 폭넓은 선전을 위한 그의 가르침에 따라 나치는 국제적인 차원의 조사기구를 가지고 그들의 주장에 대해 객관성을 더하고자 했다. 그러한 목적 하에 그들은 한 명의 스위스인을 제외하고는 독일의 동맹국들에서 온 성원들로 구성된 국제위원회를 만들었다. 국제적십자사는 거부했던 반면 조사에는 폴란드 적십자사가 참가했다.

 

그 위원회는 폴란드에는 겨우 이틀 동안만 머물렀고 나치가 이미 골랐던 시신 9구만 조사했다. 그것이 바로 과학적 결론이 만들어지는 방법이었다. 나치의 거대한 선전 공세에도 불구하고, 폴란드 망명 정부만이 사건에 대한 나치의 견해를 채택했다. 타임지는 그 위원회의 결론을 인정하는 모든 태도를 다음과 같이 비판하기조차 했다.

 

3. 괴벨스 선전기구의 교활함과 능수능란함을 그렇게 잘 아는 사람들, 제 덫에 자기가 걸린 이들에 대한 놀라움과 안타까움

 

또한 반공주의 정서가 깊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 윈스턴 처칠 또한 그 당시에 나치가 수행한 모든 조사가 조작으로 된 것이고 그 결론은 테러의 산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이후 국제 위원회 중 두 사람(불가리아인 엠 마르코프와 체코인 하젝)은 그 결과가 조작되었고 자신들은 압박과 두려움 때문에 서명을 했다고 증언하면서 위원회를 탈퇴했다. 그리고 위원회 대표인 부취(G. Butch)는 독일에 의해 1944년 처형됐기 때문에 영원히 입을 다물게 되었다.

 

4. 진실이 드러났다

 

나치 주장에 대한 소련의 첫 번째 반응은 1943419일 프라우다 신문에 다음과 같은 기사로 즉각 나왔다.

 

평화적 시민에 대한 대량학살, 특히 유대인 학살에 대한 진보적 인류 전체의 분노를 의식한 독일은 지금 속이기 쉬운 인민들의 반유대인 증오를 불러일으키려 한다. 이 때문에 그들은 이른바 1만 명의 폴란드 장교 살해사건에 연루됐던 유대인위원회라는 전체 집단을 발명했다. 그렇게 노련한 날조자들이 레프 르이바크(Lev Rybak), 아브람 브로드닌스키(Avraam Brodinsky), 차임 피네베르그(Chaim Fineberg)와 같이 결코 존재하지도 않았던 사람들의 이름을 발명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런 사람들은 통합국가정치국(OGPU) 스몰렌스크부(Smolensk department)”나 내무인민위원회(NKVD, 범죄자를 기소하는 소련 국가기관)의 어디에도 없었다. 미국중앙정보국(CIA) 분석조차도 희생자의 상당 부분이 폴란드 유대인이라고 확인함으로써 유대인 볼셰비즘에 대한 나치 주장의 결함을 인정했다.

 

적군에 의해 폴란드가 해방된 후 소련은 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부르덴코(N. Burdenko) 교수를 위원장으로 하는 과학위원회를 설립했다. 조사는 19439월에 시작되어 19441월에 완료됐다. 위원회 조사결과는 폴란드인들에 대한 처형 책임이 전적으로 나치에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우리는 소련측 조사의 다음과 같은 핵심 사항을 거론한다.

 

법의학 조사는 나치가 주장했듯이 폴란드 장교들이 1940년에 매장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증명했다. 시신의 부패 정도에 따라 1941~1942년 초에 매장됐음이 틀림없다. 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1941년 가을 그 지역이 독일 점령 하에 있을 때 폴란드인들이 처형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수십 명의 목격자들은 1940년 봄 이후에도 폴란드인들을 보았다고 주장하면서 위원회에 증언했다. 다음과 같은 사례가 있다.

 

한 농부는 19418~9월에 폴란드인들이 철로에서 작업하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한 교사는 1941년 강제수용소에서 탈출했던 한 폴란드인을 그녀의 집에 숨겼다고 증언했다. 만약 독일 보고서가 사실이라고 본다면 이 폴란드인은 1940년 봄 소련군에 의해 처형됐던 3,796명의 명단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유령이었음이 틀림없다! 또한, 사망자 수에 들어갔던 1,105명은 수년 동안 잘 살아있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증인들 중에는 독일 보고서의 목격자로 서명하라고 게슈타포가 강요했다고 증언한 사름들도 몇 명 있었다.

 

소련의 조사로 오늘날까지도 카틴 사건에 관해서 소련에 대한 나치의 선전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독일은 “1940년에 볼셰비키가 폴란드 전쟁포로들과 성직자들의 집단 처형에 관해 정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독일 경찰에게 내용을 제보하면 사례금을 줄 것이라고 했던 것이다. 돈을 제공했다는 것은 독일이 증인을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폴란드인들이 학살당했던 시기라고 독일에서 말하는 1940년 봄과 독일 침공 시기 이후의 문서(편지, 증서)가 시신에서 발견되었다. 조사를 통해 나타났던 증거들이 미국 대표단에 의해 분명히 확인되었다고 영국의 역사학자 G. 로버트(G. Robert)는 이야기했다.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의 딸이며 미국 대표단에 참여했던 캐서린 해리먼의 기록을 보면, 나치 주장처럼 시신이 3년 전에 매장됐던 것이 아니라고 확인했다. 로버트에 따르면 해리먼 미국 대사는 미국 대표단의 결론을 다시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전체적 증거와 증언으로부터 캐서린과 대사관 직원은 어떤 경우라도 독일에 의해 학살이 진행되었다고 확신한다.”

 

5. 괴벨스에서 자유세계까지

 

1945년까지 카틴 사건은 미국 외교 문서에는 나치의 선전으로 언급됐고, 뉴욕타임즈와 같은 미국과 영국의 언론에서는 이 사건을 나치의 흉악한 사기로 묘사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날 즈음, 과거의 제국주의 동맹국들이 소련에 대한 태도가 변화되면서는 자신들의 반공주의 병기고에 카틴숲 학살을 추가하여 이 사건에 대한 태도를 바꾸었다. 이러한 태도에 대한 첫 번째 조짐은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드러났다. 미국과 영국 측이 재판에서 카틴 사건을 포함시켜 조사하자는 소련의 요청을 거부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심문절차는 6(소련 범죄에 대해서 3, 나치에 대해서 3건의 증언)으로 한정되었다.

 

1951~1952년 한국전쟁 시기에 매든위원회(Madden Committee)”가 미국 하원에 설립되었는데 위원회는 폴란드 장교들이 소련에 의해 처형되었다고 결론을 내렸으며 소련을 국제재판소에 출석시키자고 제안했다. 매든위원회에서 증원했던 신뢰할 수 있는증인들 중에는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괴링의 변호를 맡은 오토 슈타머 박사도 있었다! 또한 19527월 미국 내무부 비밀 보고 문건에는 유엔에서의 공통 전략 수립에 관한 미국-영국 간의 회담이 포함되어 있다. 거기에는 카틴 사건을 포함하여 반소선전을 위해 유엔을 활용할 필요성이 명시되어 있다.

 

종전 후 지금까지도 제국주의자들은 괴벨스를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한 편, 공산주의자가 아닌 사람 중에도 역사 왜곡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주목할 만한 내용으로 런던으로 추방되었던 차르 지지자 후선인 알렉산더 위스가 있는데, 그가 1964년에 출판했던 저서 전쟁기의 러시아: 1941-1945(Russia at War: 1941-1945)”에서는 카틴 사건이 소련의 책임이라는 주장에 대한 반대와 우려를 분명히 제기했다. 또한 그는 카틴에서의 대량학살 기법과 서유럽의 다른 나치 처형 사건의 유사점을 지적했다. 역사적인 진실을 뒷받침하는 두 번째 증언자는 동부전선(Eastern Front) 전투에 참여했던 독일인으로 그는 1971년 카틴 사건에 대해 타임(Times)지에서 시작된 논쟁에 편지로 참여했다.

 

역사적인 자료들을 통해 알 수 있듯 요제프 괴벨스는 많은 사람들을 속였습니다. 어쨌든 이것은 그의 업무였고, 그것에 있어서 그의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는 능력을 의심할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더 놀라운 사실은 30년이 지난 후에도 (괴벨스의 기만술이) 타임지 지면에 여전히 등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경험을 통해 볼 때, 전쟁 막판에 괴벨스가 카틴 사건에 대해 러시아의 많은 독일군 병사들을 속일 수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독일 군인들은 속으로는 사형 집행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 독일 군인들은 폴란드 장교들이 다른 이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들에 의해 몰살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6. 반혁명과 증거서류의 발견

 

반혁명이 승리하자 괴벨스(Gobbels)의 현대 추종자는 그들이 1943년 이래로 기다려 왔던 해명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소련 유죄의 증거가 드디어 발견됐다”! 특히 1992년 소련 공산당이 위헌 기구인지를 판정하기 위해 러시아 연방 헌법재판소가 심판 과정에 있을 때 보리스 옐친의 법률팀은 카틴에서의 폴란드 장교 살해에 대한 소련 공산당 지도부, 그리고 당연히 스탈린의 책임이 입증된 일급 기밀문서들을 방금 공문서보관소(Archives)에서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소련 공산당을 변호했던 변호사들은 사본으로 제출됐던 그 문서들의 진위에 대해 처음부터 심각한 의문을 제기했다. 결국 그 문서들은 원본의 형태로 제출되지 않았으며 헌법재판소는 판결에 그 문서를 포함시키지 않았다. 소련 공산당에 반대하는 조작된 상황에서조차도 이들 문서들은 증거로 채택될 수가 없었다. 물론 그들의 문서 조작을 밝히는 다른 증거들이 나왔을 때처럼 이번에도 제국주의자들과 그 추종자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실제로 2010년 러시아 정부는 디지털 사진의 형태로 이 악명 높은 문서를 인터넷에 게시했다. 원본은 아직 제출하지 못했다.

 

7. 위조의 네트워크

 

이 범죄에 대해 소련이 유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나치 선전의 주장 이상으로 할 수 있는 말이 없고, 아니면 잘해야 매든 보고서의 내용을 반복할 뿐이다. 반대로 역사적 진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오늘날까지도 새롭게 나타나고 있는 정보로 자신들의 입장을 강화한다.

 

2005년 포돌스크(Podolsk)에 있는 국방부 중앙문서보관소를 연구하던 러시아 역사학자들은 카틴에서 폴란드인의 처형에 직접 참여했던 독일군 장교의 증언을 문서로 기록한 전체 파일의 존재를 발견했다. 20106, 러시아연방공산당 B 일류친(B, Ilyuchin) 하원 의원은 기자회견에서 충격적인 폭로를 했다. 그는 며칠 전 카틴 사건의 문서 위조자 한 명과 접촉했다는 발표를 했다. 특히, 그가 당시 폭로했던 바에 따르면, 1990년 초 당시 대통령이던 옐친의 안보국 비호 아래, 수많은 문서를 위조하기 위한 임무를 지난 특수 조직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 조직은 처음 반혁명 이전에는 나고르나야(Nagornaya)라는 농촌마을에서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소속된 기관으로 일하였는데 나중에는 자레취(Zarechie) 지역으로 이전했다. 보안군과 대통령 기구의 인원들로 구성된 이 위조 조직은 문서를 새로 만들거나 위조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이듬해부터 수십만 건에 달하는 위조문서가 러시아공문서보관소로 이식되었다.

 

[카틴 : 위조의 증거]

 

1992년 발표된 문서에서 이른바 소련의 범죄라고 입증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a. 194053일 날짜로 된 내무인민위원 베리아가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에 폴란드 포로 25,700명의 사형집행을 제안한 4장짜리 문서.

 

b. 같은 날인 194053일 베리야의 요청이 승인된 정치국 제13차 회의록 발췌문

 

c. 그리고 그 서류의 파기에 대해 195933일 날짜가 찍힌, KGB 국장 알렉산드르 셸레핀이 니키타 흐루쇼프에게 보낸 당시 편지.

 

그 문서의 진위에 대한 법학자들과 역사연구자들의 수많은 견해 중에서 다음의 것을 식별할 수 있다.

 

- 위조를 나타내는 중요한 표시로 베리아의 사형집행 제안에서부터 정치국의 결정까지 전체 날짜가 동일한 것이었다. 소련 역사상 그런 일이 일어난 적은 절대 없었다. 만일 그 토론이 최종 승인됐다면, 그 서류의 발송에서 정치국 토론 사이의 시간 간격이 있었다. 여기에 걸리는 기간은 적어도 5~6일이었다. 법학자인 즐로봇킨에 따르면, 이 과정의 상세한 기록은 공판 소송기록에서 베리아의 제안이 19403날짜가 포함되었던 것으로 나중에 정정됐다. 그 문서는 이러한 형태로 오늘날까지 존재한다.

 

- 그 문서들은 엄격한 관례와 특정한 양식에 따라 작성되었다. 일련의 이러한 특징들이 제출된 문서에서는 빠져 있다. 예를 들어 흐루쇼프에게 보낸 알렉산드르 셸레핀의 서신에는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도장이나 등록번호, 혹은 그 문서들의 평상시 어떠한 표시(가령, 기밀의, 비공개의 등)도 없다.

 

- 마지막으로 200711월에 시작되어 2009331일에 끝난 독립적 법의학 분석은 베리아의 문서에 다른 타자기가 사용되었고, 위조 가능성이 현저하게 높아졌음을 보여 줬다.

 

증인은 1940년대에 생산된 종이들, 중앙위원회의 다양한 문서들, 위조된 도장, 심지어 기밀문서 해제 대상이 아니라고 기밀 표시된 전체 파일과 같이, 자신의 증언을 확인할 수 있는 물적 증거를 제공하였다. 그는 심지어 폴란드 전쟁포로를 처형하려는 베리아의 요청을 볼셰비키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이 승인하는 결정을 위조하는 것에도 참여했다. 위조 네트워크에 참여했던 구체적인 인물의 신원과 증거까지 동반된 이러한 중대한 주장은 여전히 카틴 사건과 관련된 문서들의 진위에 대해 더욱 더 의심할 수밖에 없도록 한다.

 

폴란드인들이 나치에 의해 처형당했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수많은 증거들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하게끔 한다. 왜 이러한 모든 것이 언론이나 역사책에 적어도 피상적으로나 객관성이라는 이유로든 언급되지 않는가?

 

그 대답은 과학자들, 문화적 인물들이나 오로지 나치 선전을 위해 돈을 받은 사람들이든 역사적 진실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그 편리성이 드러났던 나치의 선전은 민주주의적 자본주의 국가들에 의해 신속하게 채택이 됐는데, 그것이 전체주의에 대한 비과학적인 개념인 두개의 극단주의라는 역사적 이론을 제공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카틴 사건은 파시즘-나치즘과 동급으로 사회주의를 비방하는 역사 위조의 무기가 되었다.

 

출처 : 소련 사회주의에 대한 진실과 거짓 p.133~14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쏘련인상 - 현대한국학연구소 자료총서 8
백남운 지음 / 도서출판선인(선인문화사) / 200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소련은 냉전이 시작되면서 자본주의 국가 미국하고 정치, 경제 그리고 군사적으로 대립했다. 자본주의 국가였던 미국은 소련에 맞서 반공을 바탕으로 하는 자본주의 국가들을 확장했고, 사회주의 국가였던 소련은 미국에 맞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사회주의 국가들을 확장해나갔다. 미국에 힘입어 반공국가였던 대한민국은 냉전시기 소련의 위협을 더 많이 강조했고, 그런 역사적 내지는 정치적 관점은 지금도 그 영향력이 강력하게 남아있다. 따라서 우리는 미국이 개입한 사례보다 소련이 영향력을 확대한 사례를 세계사 시간에 배우게 된다. 그렇다면 대한민국과 서방에서 기본적으로 깔고 있는 그러한 전제들은 과연 정확한 판단인 것일까? 

 

여기에 대해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것은 미국과 서방 중심의 판단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서방 중심이 판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역사학자이자 경제학자인 백남운이 집필한 쏘련인상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백남운이 집필한 쏘련인상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이 수립되고 난 이후 김일성을 중심으로 북한 정치인들이 소련을 방문했던 것을 기록으로 남긴 책이다. 사실 백남운이 쓴 쏘련인상이라는 책 이전에도 소련 방문기를 다룬 책으로는 월북한 문학작가 이태준이 쓴 쏘련기행도 있지만, 지도부를 중심으로 북한 정치인들이 공식적으로 만난 부분을 다뤘다는 점에서 다른 점이 있다.

 

쏘련인상은 이태준 작가의 쏘련기행처럼 분명히 개인 저술이기는 하지만, 북한 정부 수립 이전에 집필된 이들 방문기와는 그 성격과 간행 취지가 다르다. 쏘련인상은 북한 정부 수립 직후 국가적 당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추진된 북한 내각의 최초의 공식 소련 방문 일정과 성과를 정부 각료의 입장에서 정리하였기에 기본적으로 공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방문 보고서다. 그리고 쏘련인상은 이태준 작가가 처음 방문하여 썼던 쏘련기행하고도 시대적인 차이도 분명히 보이고 있다. 이태준 작가가 소련을 처음 방문할 당시는 냉전이 점차 시작하려던 시기였고, 한반도의 분단정부 수립이 되기 이전이었던 반면에, 백남운의 쏘련인상은 냉전초기 미국의 제국주의적 개입이 노골화 되고, 한반도 분단 정부가 남북한에 수립된 상태였다.

 

여기서 국제적인 동향을 얘기하자면, 백남운이 김일성, 박헌영 그리고 홍명희와 더불어 북한 정치 지도부로써 소련을 방문하던 1949년은 제국주의국가 미국의 개입과 폭력성이 아주 극명하게 드러나던 해였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후임자인 해리 트루먼은 19473무장한 소수 세력이 기도하는 정복에 저항하는 자유 국민을 돕는 것이 미국의 정책이다.”라는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한 시점으로 그리스 내전에 제국주의적 개입을 노골화 했다. 또한 한반도에서도 여운형의 좌우합작운동과 남북협상과 같은 자주통일을 위한 시도를 실패로 끝나게 만들었고, 이승만을 내세워 단독정부를 수립했다. 더 나아가 제주4.3항쟁에서 빨갱이를 소탕한다는 이유를 들어 광란의 학살극을 벌였으며, 여수와 순천에서도 잔혹한 학살극이 미국의 지원세력들에 의해 일어났다. 또한 1946년 장제스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중국의 제2차 국공내전에서 미국은 막대한 자금과 군사물자를 장제스 세력에게 지원하여 반공의 보루를 강화했다.

 

이처럼 백남운이 소련을 방문하던 1949년 초의 미국은 제국주의적 개입과 간섭을 통해 세계 패권을 장악하려는 야심에 놓여있었던 것이다. 미국의 수법은 정말로 간악하고 사악했다. 그들은 반공이라는 이름아래 인권, 민주주의라는 수식어가 붙은 개념을 내세워 자신들의 제국주의적이고 패권주의적인 개입을 합리화했으며,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인권탄압과 학살도 자연스럽게 합리화됐다. 쏘련인상에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개입이 얼마나 사악하고 추악한지를 아주 잘 묘사하고 있다. 저자 백남운은 마르크스주의적 경제학자 내지는 역사학자답게 이와 같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모순을 매우 잘 지적하고 있으며, 이것이 왜 거짓과 위선인지를 증명하고 있다. 책에 있는 내용들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자본주의국가의 소위 원조정책은 미제의 마샬안이 대표적인 것이다. 마샬식 원조의 특징은 상대국가의 식민지화와 미제의 반공파쇼제 확립이 그것이다. 말하자면 달러를 구세주로 광신하는 채귀인 셈이다.”

 

출처 : 쏘련인상 p.105

 

쏘베트정부의 평화정책은 미영 반동도당들의 격렬한 저항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제국주의국가들은 전쟁준비정책을 실시하면서 전쟁 전시기에 비하여 군사비 지출을 현저하게 증가시켰습니다. 미제예산에 있어서 1948~1949년도 군사비 지출은 1939~1939년도에 비하여 거의 15배로 증가되었습니다. 1949~1950년도에는 국회에 제출한 대통령의 교서에 지적된 바와 같이 군사비 지출은 예산총액의 38%에 달하며, 군사적 목적을 포함한 다른 항목의 지출을 총계하면 1949~1950년도의 미국군사비는 국가예산의 반액 이상에 달하는 것입니다. 1949년도의 영국군사비는 1939년도에 비하여 3배로 증가되였습니다. 이상의 숫자들은 북미합중국과 영국의 현재의 지도자들의 침략적 정책을 여실히 증시하는 것입니다.”

 

출처 : 쏘련인상 p.149

 

세계대전의 전범자들을 완전히 처단하기도 전에 그 처단을 약속한 미제가 오늘은 전쟁방화를 일삼고 있다. 세계평화 옹호의 세력이 나날이 장성되여 가는 오늘에 있어서 반쏘전쟁뿔럭인 북대서양동맹(NATO)을 체결한 미제는 소위 세계제패의 야망을 방공선결성에 빙자하여 엄폐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구파쇼 두목이였던 히틀러 강도배의 수법을 되푸리라는 신파쇼 두목인 미제의 전략태세인 것이다. 미제의 제2 ‘방공선즉 동양침략선은 그 거점인 하와이로부터 인도양과 호주 비율빈(필리핀) 등을 거쳐 유구(오키나와) 열도의 중거점과 연결하고 거기서 다시 조선 동해안을 거쳐 화태에 이르기까지의 일본지대를 행동의 제일선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출처: 쏘련인상 p.210

 

따라서 저자 백남운이 지적하듯이 미국이 자유와 인권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수식어를 붙여 내세우는 개념은 일종에 제국주의자들이 내세우는 기만적 행위였던 것이다. 현재 우리가 배우고 있는 소위 미국이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세력의 방어를 위해 개입했다.”는 식의 논리는 제국주의 세력들이 기만적이고 위선적인 행위인 것이다. 그에 반해 소련과 사회주의 국가들의 관계는 미국과는 달리 소련이 제국주의적으로 어떠한 국가를 지배하는 위치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한국이나 서방에선 마치 소련이 지배적인 위치에 있으면서, 팽창주의적 야욕을 드러낸 것처럼 역사를 왜곡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Eric Hobsbawn)의 저서 극단의 시대에서 나오는 바와 같이 실제로 소련이 지배적인 영향력을 휘두른 것은 티토의 유고슬라비아와 엔베르 호자의 알바니아 정도였으며,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자신들이 나치로부터 해방시킨 동유럽을 중심으로만 사회주의 라인을 형성했을 뿐이다. 즉 트루먼 독트린처럼 공산주의를 막겠다는 구실로 타국의 침략하고 정복하는 행위를 소련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런 역사적 사실과는 반대되는 학습과 교육을 받는 것은 그만큼 대한민국 사회에 반소 반북주의가 퍼져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위에서 상술한 것처럼, 소련이 한 국가를 지배하는 형태가 아니라는 것은 백남운을 포함한 북한 지도부가 소련의 스탈린과 회담했던 기록에서 알 수 있다. 쏘련인상은 스탈린과의 회담에서 보고 느낀 백남운의 감정을 담고 있다. 그는 스탈린과의 회담에서 그 회담이 조소(북한과 소련)관계에 있어 양국간의 친선관계를 더욱 공고화했다고 얘기하며, 동등적이고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실제적 요구와 민주적 원조가 통일적으로 결부되는 형태로서 회담이 진행된 것임을 강조한다. 이것은 분명히 미국에게 모든 것을 다 넘기고 무조건적으로 친미만 외치던 친미제국주의자 이승만하고는 분명히 다르며 매우 차이가 나는 지점이다. 저자 백남운은 회담에서 자신의 받은 인상을 요약했는데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회담은 오후 8시로부터 920분까지 계속되엇던 것이다. 나는 이 회담 중에서 받은 인상을 요약하려 한다. 첫째로 조쏘 양국간의 친선관계를 더욱 공고화하는데 있어서 실질적으로 구체적 계획성이 일층 강화된 것을 지적할 수 있다. 즉 결코 외교적으로 빠게인하는 것이 아니라 동등적인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실제적 요구와 민주적 원조가 통일적으로 결부되는 형태로서 회담이 진행된 것이다. 그러므로 서로 신뢰감이 더욱 두터워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쏘련정부의 최고지도자의 성의있는 태도에 경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쓰딸린 대원수의 차관에 관하여 직접 말한 민주적 원조의 원칙이 타민족의 자주 독립권을 존중하고 보장하여 주는 쏘련정부의 대외정책이 기본이 되는 것을 절실히 나는 체감한 바 있었다.

 

둘째로 위대한 쓰딸린의 말하는 모습은 토막 토막 그치는데 그것이 붉은 실로 짼 구실처럼 원칙으로 일관된 것이다. 인류의 신사회를 창조하는 최고의 기사인 만큼 세계 노동인민의 태양으로서 숭앙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어니와 사물에 정통하는 태양이 그 두뇌 속에 서리고 있는 듯이 세계 정치사정을 꿰뚫으고 있는 천재적 정치가인 인상을 받게 되였다. 회담하는 중에 두 번이나 쓰딸린이 입을 빙그레 하고 눈우슴을 보냈다. 조선사정에도 정통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내가 보기에는 미제의 조선에 대한 침략행동이 가소롭다는 표정인 듯하였다. 쓰딸린의 일언일소는 실로 세계 민주정치의 역사적 발전방향의 지표인 인상을 직각할 수 있었다. 조선의 정치 경제 및 문화 협조에 대한 기본적 원칙으로서 해명되지 못할 것이 없었다. 이 회담의 결과로 대표단의 방쏘 목적이 달성될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는 우리 조국의 통일발전을 위하여 불가능이 없다는 자신을 더욱 굳게한 바 있었다.

 

세째로 회담하는 분위기가 마치 친숙한 동지들이 공사를 상의할 때 정색하는 정도로 그렇게 막이 없는 분위기이였다. 그것은 쏘련정부가 조선문제에 대한 일호의 야심이 없는 까닭이며, 그렇기 때문에 조선 정부 대표단이 전폭적으로 신뢰하게 된다는 까닭이였다. 그러므로 조쏘 양국간의 영구 친선관계를 더욱 공고화하는 것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통일독립을 보장하는 유일의 정치노선이라는 원칙이 이 회담으로써 다시금 재확인될 뿐 아니라 전진하고 발전시키는 계기로 되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출처 : 쏘련인상 p.86~87

 

그 외에도 쏘련인상은 이태준이 쓴 쏘련기행처럼 레닌박물관을 포함한 소련의 여러 박물관들을 포함한 관광지들을 본 것과 학교 및 공장시설을 방문한 것에 대한 기록들이 담겨있다. 여기서 백남운이 보게 된 소련은 남녀평등이 실현되고 인종차별이 철폐된 그리고 인민이 생각보다 자유롭고 평등하게 복지혜택을 받으며 사는 사회였다. 쏘련인상에서 가장흥미롭게 다가왔던 부분은 소련의 농업관련 분야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 고 있는 소련의 농업분야는 발전적이지 못하고 풍족하지 못하다는 편견일 것이다. 그러나 저자 백남운이 접하게 된 소련의 농업은 우리가 생각한 것 보다 괜찮은 상황이었고, 무엇보다 전후재건을 마친 소련의 농업생산은 예전에 공업화를 추진하던 시기와 전쟁 이전의 시기보다도 훨씬 더 풍족한 상황이었다. 즉 전후재건이 성공적이었다는 얘기다. 저자는 소련의 농업이 발전했다는 것을 책에서 설명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꼴호즈 조직의 창조자인 쓰딸린의 창안에 의하여 192712월 제15차 당대회에서 농업집단화의 방침이 결정되였던 것이며 1929년부터는 꼴호즈 조직이 실현되기 시작한 것이였다. 그리하여 전전인 1940년도의 쏘련농업은 벌써 7천여 개소의 농기지정소와 53만대의 뜨락또르와 182천대의 꼼바인 228천대의 화물자동차가 작업하였다. 그리하여 농업기계화의 수준이 미국을 훨씬 능가하였던 것이다.

 

1940년도에 쏘련 꼴호즈에서는 쏘련 토지경작의 4분지 3과 모든 파종면적의 절반 이상을 뜨락또르로 수행하였고 곡물면적의 절반을 꼼바인으로 추수하였다. 1940년도에 미국에서는 대지주의 자본주의적 농업체제로서 토지경작의 절반과 파종면적의 3분지 1만을 뜨락또르로 수행하였던 것이다. 또한 농업기계의 능률에 있어서 미국 뜨락또르의 1마력이 5.8헥타르의 면적을 경작한다면 쏘련 뜨락또르의 1마력은 32.6헥타르의 면적을 경작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농업노동의 기계화는 농업노동의 생산성을 비약적으로 제고시킨 것이다.”

 

출처 : 쏘련인상 p.111~112

 

쏘베트정부는 대독전쟁을 세계사적으로 승리한 이후 새로운 전후 5개년계획에 있어서 꼴호즈와 쏘호즈의 생산조직을 재건할 뿐 아니라 전전의 수준을 초과하기 위한 모든 방책을 쓰고 있던 것이다. 이 전후 5개년계획을 수행하는 동안에 농업부문에 있어서 1940년도에 대비하여 1950년도의 말기에는 토지경작의 기계화가 70%로부터 90%로 장성하게 되며 기계화된 춘기 및 추기 파종은 59%로부터 70%로 곡물에 대한 꼼바인의 추수는 43%로부터 50%로 휴간지의 재경과 전지의 추경은 71%로부터 90%로 장성하게 되어 있다. 1949년도의 농업부문에서는 15만대의 뜨락또르와 29천대의 꼼바인과 160만대 이상의 견인기계 기타 농업기계를 받았다. 농기 농구의 거대한 기술적 발전은 그 품질의 개진과 새로운 구조형을 가져온 것이다. 그리하여 1949년도의 농촌경제는 전전인 1940년도보다도 4배 이상의 뜨락또르 기타 농기를 받았던 것이다.”

 

출처 : 쏘련인상 p.112

 

이처럼 백남운과 북한 정치인들이 비춰진 소련의 모습은 역동적으로 발전하고 있고, 사회주의적인 가치가 실현된 사회였다. 남녀평등이 실현되고 인종차별이 철폐되었으며, 파시즘적임 침략을 무찌르고 급속도로 전후재건에 성공한 소련이 백남운을 포함한 북한 정치인들에게 이상적인 사회로 비추어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바로 이것이 초기 북한 정치인들이 추구했던 사회였고, 실질적인 목표로 삼았던 과제였다. 그런 영향 때문인지, 현재 북한은 비록 미약하긴 하지만 무상교육과 무상의료를 아직도 실행하고 있다. 북한도 이런 소련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책의 저자 백남운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백남운은 한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과 사회과학의 개척자로서, 1930년대 초 한국의 역사와 현실을 과학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론과 역사상을 창도하여 한국 근현대 학술사의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조선사회경제사조선봉건사회경제사 상은 마르크스주의적 역사학과 사회과학을 조선에 뿌리심어 놓은 책이었다. 그 또한 일제의 탄압을 받았고 감옥살이를 했다. 해방 이후 그는 조선신민당에서 활동했고,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했던 여운형과 협력했으며 1947년 그가 창당한 근로인민당에서도 활동했다. 여운형 암살과 좌우합작운동 실패 이후 단독정부 수립이 본격화되면서 그 또한 월북의 길을 선택했다. 이후 그는 김구가 주도한 남북협상에도 참가했고, 북한에서 여러 직책을 맡았으며, 초기 북한의 교육을 담당했다. 1961년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1967년에는 최고인민회의 의장 그리고 1972년까지 최고인민회의를 관장했다. 1974년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의장을 역임했고, 19798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처럼 백남운은 북한 정권에서 여러 직책을 맡은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글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는 지금까지 사회주의 국가 소련에 대해 서방의 왜곡되고 편견에 가득찬 시선으로만 바라보았다. 마르스크주의 역사학자이자 경제학자 백남운이 쓴 쏘련인상은 그러한 편견들로부터 역사적 진실을 바로잡을 수 있는 좋은 자료이고, 북한 정권 초기 인사들의 소련 방문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도 매우 높다. 따라서 소련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을 알기 위해선 문학가 이태준의 쏘련기행과 더불어 같이 읽어야할 책이다. 그 책과 같이 읽으면 반소주의와 반북주의의 편협한 제국주의관을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태준 전집 6 : 쏘련기행 중국기행 외 이태준 전집 시리즈 (소명출판) 6
이태준 지음, 상허학회 엮음 / 소명출판 / 201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레닌의 러시아 혁명으로 탄생한 소련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더불어 세계 최강대국으로 부상했다. 히틀러 파시스트 도당의 침략을 받았던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피해를 입었지만, 전쟁이 끝나기가 무섭게 엄청난 전후재건의 속도를 보여줬다. 소련이 전 세계에 보여준 변화상은 놀라운 수준이었고, 이념적으로 대립하던 서방 제국주의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냉전시기 소위 반공 제국주의 진영에 섰던 나라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보여준 소련의 놀라운 변화상을 자랑할 이유가 전혀 없었으며, 오히려 소련을 경제적으로 고립시키고자 했다. 이는 당연히 1948년 정부수립부터 강력한 반공국가를 유지해왔던 대한민국 또한 마찬가지였다.

 

1948년 반공주의자 이승만을 중심으로 탄생한 대한민국은 분명히 좌익이라는 존재와 가치를 파리나 벌레만도 못한 대상으로 취급하던 극단적 매카시즘 국가였지만, 정부가 탄생하기 이전까지 한반도의 민중 70%가 사회주의를 지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 남한에서 친일 경찰에 탄압을 받으면서 많은 좌익인사들이 월북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또 많은 이들이 월북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월북을 선택했던 이들 중에는 20세기 한국 문학의 상징적 지표인 이태준이 있었다. 해방 이후 민주주의민족전선에서 문화부장으로 활동했던 이태준은 좌우대립이 남한 내에서 극명하게 나타나던 19468월 월북했다. 월북을 하게 된 이태준은 북한에 들어간지 얼마 되지 않아 또 다른 길에 오르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북한에서 만든 방소문화사절단의 일원으로써 소련을 여행하고 오는 일이었다. 이 여행 과정에서 이태준은 자기가 직접 보고 체험하고 느낀 것을 기록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쏘련기행(The Trip of The Union of Socialist Republics)’이었다.

 

이태준 작가가 쓴 쏘련기행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번째는 19468월부터 10월까지 방소문화사절단의 일행으로 경험했던 소련 기행문이고, 두 번째는 10월 혁명 32주년을 맞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쪽 일원으로 방문했을 당시의 소련 기행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46년 미군정의 탄압을 피해 월북하게 된 이태준은 월북한지 얼마 되지 않아 곳바로 소련여행을 떠나게 됐다. 소련에 가기 위해 평양에 있는 비행장에서 비행기를 타게 된 이태준은 비행기에 탑승하기 전 소련 제1극동전선군의 제25군 사령관이자, 소련군정 최고 사령관인 치스차코프로부터 자기 나라에 가면 무엇보다 그동안 일본의 대소선전이 옳았는가, 옳지 못하였는가를 보아 달라는 말을 듣게 된다.

 

이태준이 소련을 처음 방문하던 1946년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이 점차 가속화되고 있던 시기였다. 19463월 영국의 정치인이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시 지도자였던 윈스턴 처칠이 미국 미주리주 풀턴시에서 발트 해의 슈체친에서 아드리아 해의 트리에스테까지 유럽 대륙에 철의 장막이 드리워져 있다라는 이른바 철의장막(Iron Curtain) 발언을 하면서 미국과 소련의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었다. 아직은 미국의 반소 반공정책인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이 발표되진 않은 시점이었지만, 세계 곳곳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갈등은 심화됐다. 이는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해방을 맞은 한반도 또한 마찬가지였고, 특히 한반도 이남을 점령한 미국은 자신들이 점령한 지역에 친미정권을 세우고자 했으며, 여기서 친일파들의 힘을 빌렸다.

 

35년간 조선을 식민 지배했던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1917년 레닌의 볼셰비키 혁명으로 탄생한 국가 소련을 매우 적대시했다. 1920년대 이른바 문화통치 시기에 접어들면서 식민지 조선에도 많은 사회주의 단체들과 학생운동들이 일어났고, 일제는 이들을 탄압하는데 온 힘을 다했다. 이들은 민족주의 계열보다 사회주의 운동을 탄압하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왜냐하면 사회주의는 노동자·농민·프롤레타리아트의 단결을 주장하며, 대중과 민중속에 파고들어 일본 제국주의 체제의 근간을 흔들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사회주의자들이 동경하는 소련을 당연히 악마화했다. 일본 제국주의에 부역하는 친일파 민족반역자세력도 그 당시 이 흐름을 따랐다.

 

일제가 패망하고 나서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해있던 친일파들이 미군정과 결탁하였던 친일파들은 과거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제국주의 국가 미국에 부역하며 반소선전과 반공선전을 일삼았다. 즉 해방 후 미군정을 등에 업고 반소선전을 했던 친일파들의 거짓말과 선전은 35년간 조선을 지배했던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했던 반소선전과 일맥상통했다. 필자가 보기에 소련군정 최고사령관 치스차코프가 이태준 작가에게 자기 나라에 가면 무엇보다 그동안 일본의 대소선전이 옳았는가, 옳지 못하였는가를 보아 달라고 말했던 것은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해방 후 친미 제국주의자들이 하는 반소선전의 거짓말이 어떤 것인지를 소련에 가서 직접 알아보라는 얘기였던 것이다.

 

이태준이 소련을 처음 방문하던 1946년 소련의 상황은 솔직히 말하자면 아주 처참했다. 무엇보다 히틀러 파시스트 도당이 일으켰던 독소전쟁으로 모든 것이 초토화 된 상황이었고, 4년간의 반파시스트 항쟁에서 2700만이나 되는 소련인민이 죽었다. 나치가 소련을 침공하며 저지른 만행은 씻을 수 없는 인류 최악의 전쟁 범죄였다. 그러나 단결한 소련 인민들은 침략자 히틀러에 맞서 군대와 인민이 단결했고, 소련의 육··공군은 파시스트 침략자들을 영웅적으로 무찔렀다. 책의 저자 이태준은 10월 혁명 32주년에 맞춰 두 번째로 소련을 방문했을 때,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소련군 퍼레이드를 보게 되었는데, 이들을 본 이태준은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단마다 선두에 말굽소리 달리며 사령관의 열병을 맞이하는 우라!” 소리가 성벽을 진동하며 일어났다. 뒤이어 역사박물관 쪽으로부터 자동차에 실린 낙하산부대와 대지를 뒤흔드는 탱크부대가 들어섰다. 탱크들은 앞에 내뻗은 포열마다 적의 비행기와 탱크를 쳐부순 수효대로 비행기와 탱크의 흰빛으로 그렸는데 하나같이 10여대씩 그린 영웅 탱크들이었다. 서구에서 10여 국가들을 침략하였고 이 위대한 10월에서 탄생했으며 레닌과 스탈린에게 영도되는 쏘련을 감히 유린해 들어오던 히틀러 야만들을 꺼꾸러뜨린 영용한 군대와 병기들이 바로 이 군대와 이 병기들이며 동양에서 반세기 동안 우리 조선을 비롯하여 여러 약소민족들에게 악독한 흡혈귀 노릇을 하던 일제를 쳐부순 것도 저 성스러운 군대와 병기들이었다.”

 

출처 : 쏘련기행 p.222

 

이태준 작가의 말대로 소련의 탱크와 비행기 대포는 히틀러 파시스트 도당을 멸망시킨 일등공신이었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소련은 이 전쟁에서 수많은 산업기반이 전시 초기에 파괴되었고, 2700만이나 되는 인명이 이 전쟁에서 죽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소련은 경제적으로 다시 재건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당시 소련의 지도자였던 이오시프 스탈린은 이른바 전후재건을 위한 5개년 계획에 착수했고, 전쟁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련인민들은 전후복구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태준이 방문했던 1946년 소련은 분명히 전후재건을 진행하는 중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생활을 구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즉 낙후성을 던져버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이유로 들어 간악한 서방 제국주의자들은 반소선전의 목소리를 높였지만, 이들은 항상 편향된 자료와 관점을 가지고 거짓선전을 일삼았다. 그러나 이들은 항상 소련민중이 왜 스탈린과 소련사회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지를 놓쳤다. 그것은 바로 소련 사회가 자본주의 국가가 책임지지 않는 의무를 책임지고자 했기 때문이며, 또한 진보적인 성과물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태준은 쏘련기행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민족들의 연맹에의 가맹과 탈퇴는 자유이며 민족들의 선진, 낙후의 차별이 없이 절대평등이 원칙으로, 자민족문화 중심으로의 발전의 자유, 그리고 이런 자유와 평등을 실제화 시키기 위해서는 낙후민족의 경제 상태를 비약시키지 않을 수 없으므로 농본지대를 농공지대화, 혹은 공농지대화의 중대한 과입이 생긴 것이라 한다. 전 연방 내에서 러시아공화국 같은 선진민족으로도 자기만 경공업에까지 손을 대어 인민의 일반 소비면을 윤택하게 해주지 못한 것은, 그래서 외부인들이, “소비에트 인민들의 생활이 무엇이 풍족하냐?”고 성급히 보아버릴 수도 있게 된 원인은, 실상은 16공화국이 다 잘살 수 있는 광범하고 평등한 공업기초에부터 전력을 집중해온 때문이었다. 그 결과 낙후된 민족들이 그동안 얼마나 자라고 있었는가는, 키르키스스탄 공화국이 혁명 전에는 제유공장 1, 치즈공장 1, 제혁공장 2 모두 수공업적인 4개 공장이던 것이 1945년에는 대소 5천 공장이 생기었고, 그중 4백여 공장은 전 연방적으로 유력한 공장들이라 한다. 이 낙후된 농본지대였던 키르키스는 지금 국민경제의 70%가 공업생산에 의존되는 것이라 했고 이런 부력의 비약은 모든 문화의 조건을 또한 비약시켰을 것은 필연의 사실이었다.”

 

출처 : 쏘련기행 p.55~56

 

그의 언급에서 알 수 있듯이 소련은 1930년대 공업화를 통해 이른바 중앙아시아에 있는 연방과 그 약소민족들에게 많은 혜택을 부여했고, 자본주의가 하지 않는 사회적 의무를 책임지고자 했다. 의료와 보건은 무상이었으며,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국가가 전액을 지원하는 무상교육을 체계적으로 진행했다. 이러한 무상교육의 혜택은 소련에서 유학하는 외국인들에게도 적용되었고, 이태준이 만났던 소련서 유학하고 있던 조선인 대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현재까지도 천문학적인 학비를 유학생들뿐만 아니라 자국민에게 요구하는 천박한 자본주의 국가 미국하고는 매우 다른 모습이다. 또한 책에서 나온 소련은 원주민과 유색인종에게 인종차별을 마음껏 발산하던 제국주의 국가 미국하고는 매우 다른 모습을 보였으며, 인종차별은 철폐되었고, 소련에 사는 소수민족의 권리가 증진되었으며 이들의 교육율도 매우 높았다. 이것이 바로 지금까지도 외면당하는 사회주의 국가 소련의 진실이다. 쏘련기행에선 당시 미국에 살던 아메리카 원주민과 소련의 소수민족들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아주 정확하게 얘기하고 있다.

 

아르메니아의 예레반에서도 보았지만 25(인구)밖에 안 되는 도시에 전문대학이 아홉, 중학교가 60, 영화관과 극장이 열, 이런 고도의 문화시설은 그만한 경제력의 배경 없이는 불가능할 것으로 아르메니아의 단독실력으로는 이런 비약적 건설을 도저히 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공장이라고는 넷밖에 없던 키르키스스탄공화국이 공장 5천을 가진 것이나, 이것은 1940년에 미국 '트라이셀'이란 평론가가 지적한 것이지만, 1913년대에 아메리카 인디언들과 소비에트의 타자키스탄공화국이 문맹비율이 동일했었는데, 17년 후 1930년에 이르러, 아메리칸 인디언은 문맹이 2%가 줄었고 소비에트의 타지크는 문맹이 60% 가 줄었다는 것이 우리는 어떤 감상을 가질 수 있는 것인가?”

 

출처 : 쏘련기행 p.114

 

19468월부터 10월까지 이태준을 포함한 방소문화사절단은 격리촌부터 시작하여, 이르쿠츠크, 치타, 모스크바, 아르메니아공화국, 그루지야공화국 그리고 스탈린그라드(현재 볼고그라드)와 레닌그라드(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돌아보고 왔다. 2달 동안의 여행과정에서 이들이 보게 된 소련의 모습은 비록 전후재건 중이고, 경제적으로 풍요롭지는 않지만, 적어도 인민의 당연한 권리가 적어도 자본주의 국가보다 훨씬 인정되고, 인식되는 국가였다. 무엇보다 히틀러 침략으로 인한 상상을 초월하는 타격을 입고도 전후재건에 나서는 소련사람들의 모습은 그들에게 매우 감동적으로 다가왔으며, 그런 감동적인 감정들이 책에 묻어나 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49년 이태준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조선 문화 활동가 대표의 한 사람으로 소련을 방문하게 됐는데, 그가 보게 된 소련의 모습은 불과 3년전 하고도 매우 달랐으며, 더 많은 방면에서 발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가 처음 방문하던 1946년까지만 해도 소련은 물자가 풍족하지 않아 배급제를 실시했지만, 1949년 시점에는 소비재 부분도 많이 성장하여 배급제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국영상점들이 늘었으며, 소련 자체생산 기술로 조립된 자동차들이 많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태준은 이런사실들을 책에서 묘사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3가지 내용들을 인용하고자 한다.

 

호텔 건너편에는 큰 식료품점이 있어 마주 건너다 보였다. 김 서린 진열창에 포장 화려한 식료품들은 온실 속의 화초 같았고 자정 가까울 때까지 문이 열려 있는데 자동차를 세우고 들어가는 사람도 많았다. 우선 나의 시야는 호텔 주변에 국한된 것이나 왕래하는 시민들의 의복이나 신발이 3년 전에 볼 때와는 월등히 우수해졌고 식료품 상점 앞에서도 배급을 타러 줄지어선 광경은 다시 볼 수 없는 옛말이 되고 말았다.”

 

출처: 쏘련기행 p.201

 

이튿날 우리는 모스크바의 중요한 거리들을 자동차로 한 바퀴 돌았다. 네거리를 만날 때마다 앞을 가로 건너는 자동차의 떼로 한참씩 기다리게 되는데 3년 전과 비교하여 자동차는 10배 이상 많아 보였고 쏘련 차보다 외국차가 더 많던 것이 이번에는 바뀌되 외국차는 어쩌다 한대씩 볼 수 있는 정도다. 물론 국영들이나 상점이 부쩍 늘었고 길 가면서도 사기 쉽게 필수품들은 이동 점포들이 많았다. 전에는 사람즐이 표를 들고 물건을 따라가 줄지어 섰었으나 오늘은 물건들이 이동점포로 줄지어 다니며 사람들을 따르고 있었다.”

 

출처 : 쏘련기행 p.213

 

노동자들은 하나같이 혈색이 좋고 명랑한 기분드로 일하였다. 그전 일제 때 조선서 전매국에 다니는 여공이라면 으레 담뱃독에 찌들은 것 처럼 얼굴빛 누르고 한참 학교 다닐 소년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이곳 담배공장에는 그런 과로와 빈혈의 여공들은 볼 수 없었다. 모두 흰 작업복들을 입고 먼지 없는 작업장에서 유쾌히들 일하고 있었다. 누가 누구에게 착취되는 노동이 아니라 자기들의 공장에서 자기들의 행복을 위햐 하는 노동이며 더욱 세계 전체를 착취 없는 사회로 개조하는 위업에 선두에 나선 쏘련 노동자다운 긍지들로 차 있었다. 2천 명 노동자중에 약 2백 명우 벌써(1110) 연간 계획량의 200프로를 초과완수하고 있었다. 노동임금은 최하 견습공이 5백 루블부터요 숙련공은 2천 루블까지 있었다. 모스크바서 승용차 한 대에 7천 루블이라 하니 숙련공의 석달 반 월급이면 자동차 한 대를 살 수 있는 것이다.

 

공장 안에는 식당이 있는데 빵고기우유맥주사이다케이크 등이 실비로 제공되고 있었고 식당은 김 서리는 접시들과 함께 따스하고 정갈하였다. 공장 곁에 있는 노동자 주택을 가보았는데 군데군데 자동 엘리베이터가 있고 부엌 식당 침실 목욕간 등과 스팀 전열 가스 수도의 완비와 가구들의 호화로움은 물질생활의 높은 수준을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라디오, 손풍금, 바이올린 등 악기들과 책상 위에는 문학 서적이 많을 것을 보아 이 공장 노동자들의 문화 정도의 높음도 엿볼 수 있었다 어떤 노동자의 집에는 사진기도 걸리었고 오토바이와 사냥총도 있었다.

 

이런 공동주택을 이웃하여 탁아소와 아동공원이 있었다. 탁아소는 조선에도 많이 있거니와 아동공원이란 세 살부터 일곱 살까지 학교에 들기 전 어린이들이 오는 유치원 셈이다. 여기는 아이들 놀기 좋고 자연과 친할 정원이 있고 집안에는 노래하는 방, 유희하는 방, 낮잠 자는 방, 밤에 자는 방, 식당 등이 있다. 아이들은 오면 똑같은 옷으로 갈아 입었고 집에서 다니는 아이와 여기서 자며 있는 아이들도 있었다.

 

출처: 쏘련기행 p.244~245

 

많은 사람들이 소련하면 오로지 군사력만 투자한 국가로 생각하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하지만 문학가 이태준이 쓴 쏘련기행을 읽어보면 그것은 확실한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비록 자본주의 국가에 비해 풍요롭진 않더라도 미국보다 민중의 권리와 복지를 훨씬 더 많이 책임지고 있었으며, 전쟁의 폐허속에서도 그러한 가치들을 지키고 실천했다. 즉 사회주의 국가 소련은 당시 경쟁자였던 자본주의 국가 미국보다 인종차별, 교육, 의료, 주거면에서 훨씬 더 진보적이고 인민들에게 많은 부분을 챙겼다. 이것이 바로 반공주의자들이 항상 외면하는 소련의 진실이며, 소련의 어떤 사회였는지를 알려주는 아주 명확한 팩트다. 그런 점에서 이태준 작가의 쏘련기행은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었던 소련의 진실이 무엇인지를 알려 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러시아혁명 1917-1938
쉴라 피츠패트릭 지음, 고광열 옮김 / 사계절 / 2017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들어가며

 

20세기 역사에 있어서 러시아 혁명이 가지는 의미는 매우 크다. 1917년 인류최초의 성공한 사회주의 혁명은 1789년 자유, 평등, 우애라는 가치아래 전개되었던 프랑스 혁명이 현재 21세기를 살아가는 인류에게 가지는 의미만큼 그 못지않게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가진 사건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힘들 것이다. 프랑스 혁명이 소위 민주주의라는 국가에 큰 영향을 주었다면, 러시아 혁명은 세계 혁명과 사회주의 국가들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중국 혁명과 쿠바 혁명, 베트남 혁명 그리고 그 외의 제3세계에서 일어난 각종 민족해방투쟁들은 20세기 러시아 혁명의 영향아래 일어난 것이다. 책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사에서도 러시아 혁명은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혁명가 레닌이 식민지 민중에게 주장했던 가치들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수많은 사회주의 혁명가들을 탄생시킨 계기였기 때문이다.

 

긍정과 부정의 시각을 떠나서 러시아 혁명이 프랑스 혁명 못지않게 전 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1924년 레닌 사후 소련을 지도하게 된 이오시프 스탈린과 그가 단행했던 공업화와 대숙청까지를 혁명의 일환으로 판단하는 것에는 의견을 달리하는 경우가 있다. 실제로 서방학계에서 스탈린의 대숙청과 러시아 혁명을 연결해서 보려하지 않았던 경우도 있었고, 심지어 서구에서 독자적인 좌파조직을 만들어 좌파운동을 해왔던 토니 클리프류의 트로츠키주의 조직은 레닌의 사후를 끝으로 스탈린 집권 시기를 아예 반혁명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러나 서방 학계에서는 1980년대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소련의 문서고가 개방되면서 1990년대 수정주의 학파들이 많은 연구 성과물을 냈다. 개방된 소련의 문서를 통해서 서방세계에 과장되서 알려진 대숙청(The Great Purges)이 매우 과장되어 알려졌다는 사실을 밝혀낸 아치 게티(Arch Getty)가 바로 그러했다. 아치 게티 외에도 소련 역사를 수정주의적으로 접근을 시도한 또 다른 인물이 있었다. 그가 바로 쉴라 피츠패트릭(Sheila Fitzpatrick)이다. 그는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수정주의 역사학의 대표로서 목소리를 냈고, 그가 쓴 개설서 러시아 혁명 1917~1938(The Russian Revolution)’은 러시아 2월 혁명부터 1936~1938년에 일어난 스탈린의 대숙청까지를 수정주의적 접근으로 해석한 대표적인 책이다. 그가 쓴 러시아 혁명사는 어떠한 점에서 다른지를 얘기해볼 필요가 있다.

 

2. 근대 러시아의 상황과 러시아 혁명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러시아 혁명은 20세기 역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이유는 분명했다. 대다수 민중의 삶이 매우 가난하고 어려웠기 때문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영토를 가지고 있는 러시아는 강대국인 동시에 매우 낙후된 나라였다. 러시아의 낙후성은 1931년 이오시프 스탈린이 했던 연설을 보면 알 수 있는데. 그 연설중 발췌한 일부는 다음과 같다.

 

러시아는 몽골의 칸에게 패배했습니다. 러시아는 투르크의 베이에게 패배했습니다. 러시아는 스웨덴의 봉건 통치자들에게 패배했습니다. 러시아는 폴란드-리투아니아 귀족들에게 패배했습니다. 러시아는 영국과 프랑스 자본가들에게 패배했습니다. 러시아는 일본 귀족에게 패배했습니다. 이 모든 패배가 러시아의 후진성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스탈린의 주장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인구 대다수가 농민을 차지하던 러시아가 산업혁명의 바람을 맞은 것은 19세기 후반이었고, 도시 노동자 계급의 탄생도 영국이나 프랑스 독일 등의 서구 열강에 비해 매우 늦었다. 대다수의 자본주의 국가들이 그랬듯이 19세기 러시아 또한 자본주의적 모순이 극단적으로 드러났고, 전제정 또한 유지됐으며 황실과 귀족들의 부정부패와 사치는 말도 못하는 수준이었다. 이러던 1905년 아시아의 신흥강국 일본에게 쓰라린 패배를 맛본 러시아에선 이른바 피의 일요일이라고 불리는 ‘1905년 혁명이 일어났다. 물론 이 혁명은 차르와 그 지지자들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당하면서 실패로 끝났다.

 

1905년 혁명 이후 차르 또한 일정부분 굴복했는데, 전국적으로 선출된 의회 두마를 설립함과 동시에 정당과 노동조합을 합법화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이 노동자와 혁명가들에 대한 탄압을 중지한다는 뜻은 당연히 아니었기에 비밀경찰의 활동으로 탄압당하기 일쑤였다. 1905년 혁명은 차르 정권의 무자비한 진압과 일정부분 두마 허용으로 마무리 되었지만, 러시아 제국은 또 다른 소용돌이 속에 빠져 들며 혁명을 막지 못하는 상황으로 가게 됐다. 1914년 제국주의 열강들끼리 벌이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19148월 유럽에서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프랑스·영국 사이의 전쟁이 발발하자, 러시아는 현대화된 전쟁에서 싸우게 됐다. 1차 세계대전의 학살을 동반한 무기의 현대화는 구식에 머물러 있던 러시아 제국군의 극심한 사상자를 만들어 냈다. 독일군은 제국의 서부 영토를 깊숙이 뚫고 들어왔고 1914년에서 1917년까지 러시아 제국은 총 500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거기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경제적 궁핍함과 그 과정에서 라스푸틴과 황후의 추문 및 부정부패는 민중을 분노하게 했고, 2월 혁명을 성공시킴으로써 케렌스키를 중심으로 하는 임시정부 내각을 구성했다.

 

민중이 혁명을 했던 이유에는 경제적 궁핍함과 차르 정권에 대한 불만이 있었지만, 전쟁에서 빠져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2월 혁명으로 세워진 정부는 독일과의 전쟁을 멈추지 않았고, 19176월에서 7월 초에 케렌스키가 감행한 러시아의 갈리시아 공세는 20만 명으로 추산되는 사상자를 내고 실패했다. 이러는 과정에서 스위스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혁명가 레닌이 그해 4월 페트로그라드 핀란드역에 도착하여 크세신스카야 저택으로 가서 4월 테제를 주장하고 선언한다. 볼셰비키 레닌이 주장한 4월 테제의 핵심은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였고, 또 다른 구호 , 토지, 평화또한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책에선 레닌의 4월 테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레닌은 소비에트가 새 혁명 지도부하에서 활력을 되찾아야만 부르주아지에게서 프롤레타리아트로 권력을 이양하는 핵심 기관이 될 수 있다고 예측했다. 레닌이 4월 테제에서 제시한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는 사실상 계급 전쟁을 요구하는 구호였다. 레닌이 4월에 제시한 다른 구호인 , 토지, 평화에 담긴 혁명적 함의도 비슷했다. 레닌의 용법에서 평화는 제국주의 전쟁에서 철수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러한 철수가 자본의 전복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했다. ‘토지는 지주의 재산을 몰수하여 농민들 스스로 재분배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농민이 자발적으로 토지를 장악하는 형식과 매우 가까웠다. 한 비판자가 혁명적 민주주의 도중에 내전의 깃발을 꽂는다고 레닌을 비난한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출처 : 러시아 혁명 1917-1938 p.104

 

19177월 갈리시아 공세가 처참한 패배로 끝난 후 페트로그라드에서 다시 한 번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이것이 7월 봉기다. 최대 50만 명에 이르렀던 군중은 크론슈타트 수병·병사·페트로그라드 공장의 노동자 조직으로 구성됐고, 볼셰비키의 지도를 받았다. 이들은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라는 깃발을 들었지만, 실패로 끝났다. 7월 봉기 이후 임시정부는 이들을 검거하기 시작했고, 결국 레닌은 다시 망명길에 올라 핀란드로 도피했다. 다음해 8월에는 전제주의자 코르닐로프가 반혁명적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실패로 끝났고, 이후 러시아로 돌아온 레닌과 그의 볼셰비키 동료들은 10월 혁명을 주도하여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을 완수했다.

 

10월 혁명 이후 볼셰비키는 제헌의회 선거에 도전하여 25%의 득표를 얻었지만 40%를 얻은 사회혁명당쪽에 선거에서의 패배를 맛보았다. 물론 볼셰비키는 선거에서 완벽히 이기지 못했다는 이유로 사퇴하지 않았고, 통치의 위임이라는 면에서 볼셰비키는 자신들이 대표한다고 자임하는 집단은 주민 전체가 아니라고 반박할 수 있었다. 궁극적으로 볼셰비키는 의회를 해산하게 된다. 분명한건 볼셰비키는 노동계급의 이름으로 권력을 잡았다. 제헌의회 선거를 통해 확실히 알 수 있는 사실은 다른 어떤 정당보다 노동자계급의 표를 더 많이 얻어냈다는 사실이었다.

 

3. 적백내전과 신경제정책

 

세계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한 볼셰비키는 실제로 진보적인 정책들을 해나갔다. 그러나 볼셰비키는 정권을 잡자마자 곧바로 전쟁에서 빠져나오지는 못했다. 독일과의 전쟁은 19183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하면서 빠져나왔지만,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스 혁명 정권이 치러야 했던 전쟁처럼 혁명을 수호하기 위한 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게 바로 적백내전이다. 1918년에 시작된 적백내전은 러시아 전역에서 벌어졌고, 볼셰비키는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등의 제국주의 국가들의 간섭과 방해 그리고 차르주의자들에 맞서 싸워야 했다.

 

적백내전으로 인해 러시아의 경제는 더 나락으로 떨어졌다. 19세기부터도 낙후되었고, 1차 세계대전에서도 타격을 받았던 러시아의 경제는 내전을 통해 말 그대로 초토화됐다. 1921년엔 기근이 일어나 수백만이 아사했으며, 비슷한 시기 크론슈타트에선 수병들의 반란이 일어나 진압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었다. 적백내전을 통해 볼셰비키가 얻은 또 다른 결론이 있었다. 군의 현대화와 공업화 중심의 경제 발전 모델의 추진이었다. 또한 적백내전을 거치며 많은 이들이 볼셰비키에 가입했다. 1927년 기준으로 볼셰비키 총 당원 중 33%1917~1920년에 가입한 반면, 1917년 이전에 가입한 당원은 1%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은 적백내전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볼셰비키를 지지했다는 반증이다.

 

트로츠키와 스탈린 그리고 그 외의 당시 볼셰비키들이 지휘했던 붉은 군대는 내전을 통해 그 규모가 늘어났다. 내전 중에 50만 명이 넘는 공산주의자가 한때라도 붉은 군대에 복무했다. 내전 기간에 노동자와 공산주의자가 처음으로 징집됐고 내전 기간 내내 이들은 전투부대에서 높은 비율을 차지했으며, 내전이 끝날 무렵에 붉은 군대는 주로 농민 징집병으로 이루어진 500만 명이 넘는 병력의 거대 기구가 됐다. 비록 1/10만이 전투부대였고(붉은 군대든 백군이든 전선에 배치된 부대가 10만 명을 초과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나머지는 보급, 수송, 행정 일을 맡았지만, 군대의 성장은 놀라운 성과였다.

 

크론슈타트 반란 진압 이후 볼셰비키는 기존의 전시 공산주의적 방식을 버리고 신경제정책 이른바 네프(NEP)를 추진했다. 물론 네프라는 것은 공산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네프는 후퇴였다. 네프를 통해 소련 사회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다시 복귀했기 때문이다. 네프에서도 문제점이 없진 않았지만, 분명한건 1926년에서 1927년 당시에는 상당한 부분의 경제 회복을 거쳤다. 최소 1926년에서 1927년 기준으로 소련의 경제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경제력을 회복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네프가 진행되는 동안 볼셰비키의 지지층도 늘었다. 1927년에 이르면 공산당은 100만 명이 넘는 정규 당원과 후보 당원을 거느리게 되는데, 그중 39%는 현재 노동자였으며 56%는 당에 가입했을 때의 직업도 노동자였다는 점에서 볼셰비키가 민중에게 지지를 받았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4. 스탈린의 공업화와 대숙청

 

그러나 볼셰비키에게 있어 네프가 영구적인 대안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사회주의를 위한 하나의 후퇴였을 뿐이다. 즉 일보전진을 위한 이보후퇴였다고 볼 수 있다. 레닌과 스탈린 그리고 트로츠키를 포함한 볼셰비키들은 낙후된 러시아가 공업화 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일각에서는 스탈린만 공업화를 추구한 것처럼 얘기하지만, 당시의 공업화는 소련을 매우 낙후된 사회에서 벗어나기 위한 볼셰비키들이 추구한 대안이었다. 책에 따르면 옛 트로츠키주의자였던 유리 퍄타코프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개별 농업의 틀 안에서는 농업의 틀 안에서는 농업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농업집단화를 극단적인 비율로 채택해야만 한다. 우리는 내전 수준의 방법을 채택해야 한다. 물론 나는 우리가 내전의 방식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각자는계급의 적과 무장 투쟁을 하며 일했던 시기에 우리가 지녔던 것과 똑같은 긴장을 지니고 일해야 한다. 사회주의 건설의 영웅다운 시기가 도래했다.”

 

출처 : 러시아 혁명 1917-1938 p.247

 

1924년 레닌이 죽고 나서 볼셰비키는 스탈린과 트로츠키 그리고 카메네프, 지노비예프를 중심으로 권력투쟁이 있었는데, 여기서 최종적으로 승리한 인물이 바로 이오시프 스탈린이었다. 즉 스탈린이 단행한 공업화는 볼셰비키들이 추구했던 1차적 과제를 수행함을 의미한 것이었다. 스탈린은 기존에 실행하던 네프를 포기하고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29년에 추진했다. 공업화와 농업집산화가 이 과정에서 이루어졌고, 거기에 대한 쿨락이라 불리는 부농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1929년 말에 이르면 당은 농업을 집단화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해 12월에 스탈린이 선언했듯이, 쿨라크의 착취 경향은 더 이상 용납되지 않았다. 쿨라크는 계급으로서 박멸돼야만 했던 것이다.

 

그들의 저항 및 일탈로 1932년과 1933년 사이에 우크라이나와 카자흐스탄, 북부 카프카스 그리고 볼가강 중류 지역에서 기근이 발생하여 최소 300~400만이 아사하는 일이 벌어졌다. 기근은 엄청나게 혹독한 유산을 남겼고, 볼셰비키 또한 이들을 막는데 여념이 없었지만, 그렇다 해서 그 기근 자체가 어느 한 집단이나 민족을 의도적으로 학살하겠다는 차원에서 일어난 것은 아니었으며, 스탈린이 기근을 명령했다는 자료는 전혀 없다. 비록 공업화 과정에서 기근과 같은 혹독한 사태가 있었고, 공업화 자체도 여러 문제점들이 있긴 했자만 공업화의 성과물은 고무적인 것이었으며 최종적으로 성공했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일부 반대가 있었지만, 그것이 대다수 민중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수만 명의 공산주의자와 도시 노동자들(주로 모크스바, 레닌그라드, 우크라이나의 대공장에서 모집된 그 유명한 이만오천인을 포함)이 콜호즈 조직자나 의장직을 맡기 위해 농촌에 긴급히 동원됐고, 1932년에 농가의 62%가 집단화됐으며, 그 수치는 1937년에 이르러 93%까지 상승했다. 집단화를 거치며 콜호즈 생산량에서 조달량은 곡물의 40%에 이르거나 예전에 농민들이 시장에 팔았던 비율의 두 배에서 세배에 달할 정도로 증가했다.

 

소련의 지도부는 공업화와 집단화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자화자찬이 포함된 주장을 했다. 적 계급은 박멸됐고, 실업은 사라졌다. 초등교육은 보편적으로 의무가 됐고, 성인 문해율은 90%까지 올랐다고 주장했다. 15개년 계획 동안 도시는 맹렬하게 성장했다. 옛 산업 중심지는 광대하게 확장됐고, 조용하던 지방 도시에 거대한 공장이 출현했으며, 새로운 공업·광업 지대가 소련 전체에서 출몰했다. 대규모 금속 공장과 기계 제작 공장이 건설 중이거나 이미 운영을 시작했다. 투르크시브 철도와 거대한 드니프로 수력발전 댐도 지어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스탈린은 이른바 문화혁명을 추진했다. 물론 이 문화혁명은 1960년대 마오쩌둥이 주도한 문화혁명과는 비교적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책 저자의 주장이다. 문화혁명 기간 동안 대한 수의 노동자들이 산업 경영진으로 발탁됐고, 소비에트난 당의 관리가 되거나 중앙정부 및 노동조합 관료제에서 숙청당한 계급의 적자리에 임명됐으며, 1933년 말에 소련에서 지도 간부직이나 전문직으로 분류된 861,000명 중에서 1/6이 넘는 14만 명 이상이 5년 전만 하더라도 생산직 노동자였다. 15개년 계획 동안 사무직으로 옮겨간 총 노동자 수는 최소한 150만 명으로 변화가 있었다.

 

스탈린은 젊은 노동자와 공산주의자를 상위 교육기관에 보내는 집중적인 운동도 개시했다. 이는 대학과 기술학교에서 엄청난 격변을 일으켰으며, ‘부르주아교수들은 분개하게 했고, 15개년 계획이 지속되는 동안 사무직 종사자 가정 출신의 고등학교 졸업생은 고등교육을 받기 어렵게 됐다. 15개년 계획 동안 약 15만 명의 노동자와 공산주의자들이 상위 교육기관에 진학했고, 니키타 흐루쇼프, 레오니드 브레즈네프, 알렉세이 코시긴과 같이 미래의 소련 지도부로 등극하게 되는 인물들이 바로 이 문화혁명의 수혜자였다. 즉 문화혁명은 교육혁명이라는 부분에서 상당한 성과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문화 혁명 기간 소련의 도시 인구는 1929년 초의 2,900만 명에서 1933년 초에는 거의 4,000만 명으로 4년 간 38%나 급상승했으며, 모스크바의 인구는 1926년 말 200만 명을 넘었는데 1933년 초에는 370만 명으로 뛰어 올랐다

 

이러한 변화를 겪으며 소련은 1936년 새 헌법을 만들어 내어 헌법상 동등한 권리를 1918년보다 일정부분 더 많이 부여했다. 이로써 모든 소련 시민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하고 사회주의에 어울리는 자유를 보장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물론 여기서 얘기하는 자유란 일반적인 자유민주주의적 개념하고는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마치고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실행하던 1936년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오시프 스탈린은 마지막 분기인 세 번째 혁명을 진행하는 데, 그게 바로 대숙청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 스탈린이 단행한 대숙청이 일방적인 무차별 학살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민간인을 대상으로 하는 대중 테러와도 차이점이 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그는 프랑스 혁명 시기 로베스피에르가 단행했던 프랑스 혁명의 자코뱅 테러처럼, 이는 왕년의 혁명 지도자들을 주로 겨냥한 국가 테러였다고 주장한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로베스피에르는 테르미도르로 본인 또한 테러의 희생자가 되었다면, 이오시프 스탈린은 그렇지 않았다는 점일 것이라고 저자는 얘기하고 있다. 또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스탈린이 예조프를 희생시켰다고 하지만, 그가 숙청이 통제를 벗어났다고 느꼈다든지 스스로가 위험에 처했다고 느꼈다든지 아니면 예조프를 단지 마키아벨리식 신중함 때문에 없애버렸다는 증거는 없다고 한다. 대숙청의 또다른 사실은 1980년대 소련의 문서고가 개방되면서 드러났다. 바로 일각에서 알려진 숙청의 희생자는 분명 억울한 사례도 있지만, 그 수치가 과장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저자의 책을 보면 알 수 있는데, 그의 책을 인용하자면 실제 대숙청과 굴라그의 수치는 다음과 같다.

 

고위직에 있던 공산주의자만 숙청에 희생된 것은 아니다. 인텔리겐치아(부르주아인텔리겐치아와 1920년대 공산주의 인텔리겐치아, 특히 문화혁명 활동가 모두)도 크게 당했다. 모든 러시아의 혁명적 테러의 유력한 용의자였고, 1937년처럼 명확하게 용의자를 명시하지 않았을 때조차 유력한 용의자였던 계급의 적출신도 마찬가지다. 어떤 이유로든 공식 살생부에 이름을 한 번이라도 올린 사람은 결국 희생자가 됐다. 해외에 친척이 있거나 외국에 연줄이 있는 사람들이 특히 위험했다. 스탈린은 상습범, 말 도둑, 종교적 분파주의자를 포함한 수만 명의 쿨라크 출신과 범죄자를 체포해서 총살하거나 굴라그로 배내라는 특별 비밀 지령까지 내렸다. 게다가 현재 굴라그에 수감 중인 상습범 1만 명도 총살당했다. 서양 학자들은 소련 문서보관소가 개방된 후 그동안 어림짐작해온 대숙청의 전체 규모를 확인하게 됐다. NKVD 문서보관소에 따르면 굴라그 교정노동수용소의 수감사 수는 19371180만 명에서 193911일에는 130만 명으로, 2년간 50만명이나 증가했다. 굴라그 죄수의 40%반혁명범죄로 기소됐고, 22%사회적으로 해롭거나 위험한 분자로 분류됐으며, 나머지 대부분은 일반 범죄자였다. 그러나 그보다 많은 대숙청 희생자가 감옥에서 처형되어 굴라그까지 가지도 않았다. NKVD1937~1938년에 감옥에서 처형된 사람이 68만 명이 넘는다고 보고했다.”

 

출처 : 러시아 혁명 1917-1938 p.295

 

물론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대숙청에는 분명 억울한 사례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 서방에서 주장했던 수치는 반공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결합되면서 과장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매우 힘들 것이다. 또한 스탈린의 대숙청도 프랑스 혁명에서 로베스피에르의 혁명적 테러라는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이해할 만한 부분이 있다. 어쨌든 이오시프 스탈린은 마지막 혁명인 대숙청을 1938년에 마무리 했고, 이로써 저자 쉴라 피츠패트릭이 주장한 러시아 혁명의 마지막 단계는 마무리 됐다.

 

5. 무엇이 서방의 다른 책들과 다른가?(장점과 한계)

 

서방의 대표적인 수정주의 학자 쉴라 피츠패트릭의 러시아 혁명은 기존에 나온 러시아 혁명 자료들과는 다른 접근법을 시도하여 러시아 혁명을 해석한 책이다. 1917년 러시아 혁명과 1938년 종결된 대숙청의 연결점을 여러 자료들을 통해 접근하여, 대숙청 또한 러시아 혁명의 일부분으로 생각하는 저자의 주장은 나름 신선했다. 한국 사람들이 스탈린의 대숙청을 접근하년 방식은 1차원적인 해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이른바 대숙청이 일어난 시대사적 맥락이나 환경 그리고 배경을 판단하기 보단 학살, 범죄, 스탈린 개인 독재의 강화라는 맥락으로만 판단하기 때문이다.

 

스탈린의 단행한 대숙청을 학살, 범죄, 스탈린 개인 독재로만 해석하는 것은 비단 극우파들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국내 시중에 많이 출판된 토니 클리프류의 국가자본주의론에 입각한 좌파들의 서적들 또한, 이런 기본적인 맥락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아마도 그것은 소련에서 도망 나온 사람들과의 인터뷰나 일부 출판되어 있는 자료만을 가지고 연구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다보니 이런 토니클리프류 좌파들 또한 미국 주류학계의 핵심 주장에서 비슷한 견해를 보인 것이다.

 

물론 이 책의 저자 또한 마르크스-레닌주의자가 아닌 서방의 학자이기에, 레닌이나 스탈린에 대해 강력한 권위주의 혹은 공산당 사람으로만 대체하는 프롤레타리아트 관료 독재라는 점으로 해석한 다는 점에서 필자의 생각과는 다르다. 그리고 소련 자체가 국제 혁명을 신경쓰지 않았다는 식의 주장이나, 코민테른이 입장이 기존 러시아 제국의 관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주장에도 분명히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자의 진일보성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저자는 오히려 스탈린에 대한 서방의 전체주의론적 접근을 일정부분 거부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대숙청의 과장된 기존의 반공 학설을 따르지 않았고, 그것을 혁명의 일부로 보았다는 점에서 필자는 쉴라 피츠패트릭의 진일보한 견해를 높게 평가해주고 싶다.

 

당연히 필자가 책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부분은 스탈린의 공업화와 문화혁명 그리고 대숙청 파트였다. 스탈린의 대숙청을 1794년 테르미도르 이전 로베스피에르의 혁명적 테러라는 맥락과 동일선상에서 본 것이 매우 흥미로웠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저자의 주장에 다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스탈린의 대숙청을 프랑스 혁명의 자코뱅 테러와 같은 맥락에서 보는건 필자의 견해와 상당부분 일치한다. 그리고 문화혁명 관련한 것도 상당히 흥미로웠다. 이 자료는 소련사에 있어서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는데 책을 번역한 역자가 밝혔듯이, 일반 독자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는 자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화혁명에 관한 내용은 쉴라 피츠패트릭 책의 또 다른 장점이다.

 

6. 결론

 

필자가 읽은 이 책은 사회주의자가 쓴 책이 아니다. 호주인 역사학자가 쓴 러시아 혁명 개설서다. 비록 서방의 학자가 쓴 책이라는 일부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그 나름의 진일보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읽어볼 가치가 높은 책이다. 저자가 말한 러시아 혁명에 대한 필자의 견해를 붙이자면 당시 볼셰비키가 추구했듯이, 공업화는 1차적으로 완수해야할 과제였다. 위에서 스탈린의 연설문을 인용했듯이, 1931년 스탈린은 10년 안에 그 격차를 따라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연설을 바탕으로 일각에서는 스탈린이 착취를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라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지만, 전쟁의 위협은 그만큼 공업화의 필요성을 증명해 준다.

 

1931년 일본은 만주사변을 계기로 극동의 소련 안보를 위협했고, 1933년 독일에서 정권을 잡은 히틀러는 노골적으로 반볼셰비즘을 표방하며 사회주의에 대한 적대감을 거리낌 없이 발산했다. 스탈린의 연설은 예언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불과 2년 뒤인 19416월 히틀러의 군대는 소련을 침공했다. 이것은 스탈린의 예언적인 연설이 있은 지 10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따라서 1941년 히틀러의 소련 침공을 생각해봤을 때, 공업화를 통한 군사력 증강과 군대개편 밑 현대화는 필수적일 수밖에 없는 조치였던 것이다.

 

레닌 사후 소련에 등장한 스탈린 체제는 전쟁의 위협이라는 맥락에서도 볼 필요가 있다. 또한 1918년에 일어났던 적백내전에서의 경험은 전시의 위협과 그것이 가져올 파괴력과 경제적 타격이 무엇인지를 입증했다. 거기다 러시아는 그런 경제적 타격을 받고, 공업화라는 달성해야만할 과제까지 가지고 있었기에 이들이 쥐고 있던 부담과 그 어려움은 상당했다. 저자 또한 스탈린이 러시아를 그 후진성에서 끌어낸다는 목표가 얼마나 성취하기 어려웠는지를 책에서 밝히고 있다. 따라서 소련사를 볼 때, 그 맥락을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책에 대해서 결론을 내리자면, 몇몇 부분에서는 동의할 수 없는 관점들이 있었고, 사회주의자가 쓴 책이 아니라는 부분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진일보한 성과물이다. 서방학계의 수정주의 학파가 어떤 성과를 학술적으로 만들어 냈는지를 알고 싶다면 읽어볼 가치가 매우 높다. 시대사적 내지는 환경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스탈린 혁명이 어떻게 해서 러시아 혁명이 일부분이었는지 알고 싶은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쿠자누스 2020-09-25 19: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을 읽고 있는데 두 권을 비교해보면 흥미롭겠어요

제1권력 2 - 자본, 그들은 어떻게 혁명을 삼켜버렸는가 | 제1권력 2
히로세 다카시 (지은이),김소연 (옮긴이)프로메테우스 2011-11-04
원제 : ロマノフ家の黃金 ― ロシア大財閥の復活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38617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