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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1월 21일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이 사망했다. 올해 2024년은 레닌 서거 100주년이다. 20세기 레닌은 혁명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이후 등장한 수많은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레닌은 위대한 혁명가이자 이론가로서 존경받았다. 레닌이 죽고 난 다음 소련 공산당에서 최종적으로 최고지도자의 자리에 오른 인물은 이오시프 스탈린(Joseph Stalin)이었다. 레닌 사후 소련 공산당 내에서는 당내투쟁이 있었다. 트로츠키(Trotsky), 부하린(Bukharin), 지노비예프(Zinoviev) 그리고 스탈린이 경쟁했는데, 스탈린이 승리했다. 


이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트로츠키의 이데올로기를 따르는 트로츠키주의자(Trotskyist)들이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스탈린에 대해 비난할 때 사용하는 소재 하나가 있다. 바로 ‘레닌의 유언’이다. 즉, 스탈린이 레닌의 유언을 조작했다거나, 스탈린이 레닌의 유언을 제대로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트로츠키 및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주장들은 서구의 부르주아 학자들도 잘만 인용 및 이요하며 스탈린을 헐뜯기 바쁘다. 이 부분에 대한 반론도 있다. 과연 트로츠키와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말하는 이른바 레닌의 유언의 진실이 무엇인지 보도록 하자.


사실 레닌은 트로츠키에 대해 안 좋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이를 알기 위해선 19세기 말 20세기 초 러시아 사회주의 세력들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1898년 벨라루스 민스크에서 노동자계급해방투쟁동맹 전 러시아 대회는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창당의 기초를 마련했다. 1903년 영국 런던에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이 창당됐고, 이후 당 내에서 레닌과 마르토프를 중심으로 파가 분리됐다. 당시 레닌이 이끄는 세력을 러시아어로 다수파를 의미하는 볼셰비키라 불렀고, 마르토프가 이끄는 세력을 러시아어로 소수파를 의미하는 멘셰비키라 부르게 됐다. 당시 트로츠키는 레닌을 비방하고 헐뜯는 멘셰비키파에 있었다. 트로츠키가 볼셰비키로 노선을 바꾼 것도 1917년 러시아로 귀국한 다음이었다.


트로츠키가 1917년 10월 혁명에 참가했으며 적백내전에서 붉은 군대를 지휘한 공로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로가 스탈린에게 전혀 없는 것일까? 그것 또한 아니다. 스탈린 또한 적백내전에서 소련의 붉은군대를 지휘했다. 특히나 1919년 5월에는 유데니치가 지휘하는 백군에 맞서 페트로그라드의 방어를 지휘하기 위한 전권을 볼셰비키로부터 물려받았다. 또한 차리친(현재 볼고그라드)에서 그는 붉은군대 지휘관으로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리고 1921년부터 1923년 동안 볼셰비키 공산당에서 레닌 다음의 2인자는 스탈린이었다. 


스탈린은 1922년 4월 23일 레닌의 추천에 의해 총서기장에 임명됐고, 당시 중앙위원회, 정치국, 조직국 위원이자 볼셰비키 공산당의 총서기장이었던 인물은 스탈린이 유일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스탈린이 레닌의 유언을 조작했다고 자주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 진실은 무엇일까? 


우선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킨 이후 레닌의 건강상태를 알 필요가 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킨 레닌은 1년 뒤인 1918년 8월 러시아 사회혁명당원인 핀야 카플란의 암살 시도 때문에 총상을 입었다. 그 때문에 1922년 4월 23일 총탄들의 하나를 처치하기 위한 외과수술을 받았으며, 1달 뒤 그의 오른쪽 손과 발이 마비됐다. 1922년 12월 16일 레닌은 두 번의 위험한 발작을 겪었고 12월 23일에 또 한 번의 발작이 있었다. 1923년 3월 10일 레닌은 새로운 발작 때문에 신체 절반이 마비되었고, 언어 능력도 앗아갔다. 그렇게 해서 레닌은 더 이상 정치적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으며, 1924년 1월 21일 사망했다. 따라서 레닌은 1922년부터 생과 사를 오갔으며, 유언을 작성했다. 그 유언으로 알려진 문서가 있는데, 이 유언이 작성된 문서의 시점을 볼 필요가 있다.


소위 ‘레닌의 유언’이라고 알려진 문서는 1922년 12월 23일과 31일 사이에 구술됐다. 1923년 1월 4일에 한층 보충되었으며, 이는 그가 발작을 겪어 건강상태가 안 좋던 시기였다. 특히나 공산주의의 적들이 ‘레닌의 유언’이라고 말하는 것은 1922년 12월 23일부터 25일까지의 기간 동안 구술된 것이다. 1922년 12월 22일 스탈린은 레닌에게 선별적인 정보의 조각들을 가져다 주는 것에 대해 전화로 레닌의 아내 크룹스카야를 힐책했다. 결과적으로 이 전화 통화가 크룹스카야로 하여금 카메네프에게 스탈린의 무례함에 대해 불평하는 글을 쓰게 된 원인이었다. 


그러나 서구의 부르주아 학자 내지는 작가들은 레닌의 유언에 집중했다. 여기서 서구 학자들은 레닌이 유언에서 트로츠키를 위해 스탈린의 제거를 요구했다는 것이다. 벨기에 왕립군사학교의 명예 교수인 앙리 베르나르는 다음과 같이 책에 썼다.


“정상적으로는 트로츠키가 레닌을 계승했어야 했다.... (레닌은) 그를 후계자로 여겼다. 레닌은 스탈린이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출처는 어디일까? 바로 트로츠키 자신이다. 트로츠키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스탈린이 당에 숨긴 레닌의 유언과 관련해 분개했다. 그러나 1922년 12월 23일과 1923년 1월 5일 사이에 레닌이 구술한 서신을 보면 내용이 다르다. 아래의 내용을 보자.


“나는 중앙위원회의 신망을 두텁게 하기 위해, 우리의 행정 기구를 충분히 개선하기 위해, 그리고 중앙위원회 분파 간의 갈등이 당의 미래에 과도한 영향을 끼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우리 당이 노동계급 출신에서 50명에서 100명의 중앙위원회 위원을 요구할 모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것들은 ‘분열을 막는 방책’이 될 것이다. 나는 이러한 관점에서 안정성의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들은 스탈린과 트로츠키와 같은 중앙위원회의 그러한 위원들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들 사이의 관계가 분열의 위험에서 커다란 부분을 차지한다고 생각한다. 이론적인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면 끝이 없다.”


뿐만 아니라 레닌이 진술한 전문을 보면, 스탈린이 크룹스카야에게 보인 태도를 비판하기는 했지만, 트로츠키가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그 어디에도 없다. 레닌은 스탈린이 크룹스카야에게 보인 행동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1923년 3월 5일 새로운 서신을 구술했다.


“존경하는 스탈린 동지. 귀하는 전화상으로 나의 아내를 호출하여 질책하는 무례함을 저질렀습니다. 나는 나에 대해 저질러진 일을 쉽게 용서하지 않을 것이며, 나는 내 아내가 당한 것이 또한 내가 당한 것으로 생각한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나는 귀하가 말한 것을 취소하고 사과하는 것에 기꺼이 동의하는 지, 혹은 우리 사이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을 선호하는지에 대한 여부를 귀하가 신중하게 숙고하기를 요청합니다. (레닌)”


레닌은 이러한 구술 서신을 남겼지만, 역사학자 이안 그레이에 따르면 크룹스카야는 비서에게 그 서신을 스탈린에게 전달하지 말라고 요청했다. 그렇게 해서 스탈린에게 전달이 안됐던 것이다. 거기다 레닌이 진술한 유언에서 트로츠키에 대해 비볼셰비즘이라고 비난하고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가 10월 혁명(레닌이 주도한 러시아 혁명) 동안에 했던 실수에 대해 우연적인 것이 아니었다고 말한 사실은 잘 알려지지도 않았다. 반면에 스탈린에 대해선 크룹스카야에게 보인 무례함을 지적하기는 했으나, 스탈린이 실수들을 했다는 것에 대한 단 한마디도 없었다. 참고로 트로츠키는 말년에 “스탈린이 레닌을 죽였다.‘는 억지스러운 주장을 했다. 앞서 언급한 벨기에 제국주의자 앙리 베르나르는 이와 같은 트로츠키의 억지주장을 다음과 같이 상상력을 추가하며 책에 서술했다.


“나는 이와 같은 사건의 경과를 어느정도 상상해본다. 레닌은 1923년 2월 말에 독약을 요구했고, 겨울이 다가오자 레닌은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햇으며 그의 언어 기능은 돌아오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권력의 다음 차례였다. 그의 목적이 가까워졌으나, 레닌으로부터의 나오는 위험은 훨씬 더 가까웠다. 이런 때에 스탈린은 지체 없이 행동에 옮겨야 되는 결심을 해야 했다. 레닌이 회복할 가망이 없다는 의사들의 이야기를 듣고 스탈린이 레닌에게 독약을 주었는지, 아니면 스탈린이 보다 직접적인 수단에 의존했는지는 나는 모른다.”


애초에 1923년 3월 6일부터 레닌이 죽을 때까지, 거의 완전히 마비되었고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의 아내인 크룹스카야와 그의 누이 그리고 그의 비서들은 그의 침대 곁에 있었다. 즉, 레닌은 그들 몰래 독약을 먹을 수 없었으며, 스탈린이 암살할 수 있는 상황이 전혀 아니었다. 그러나 트로츠키와 이를 받아 적는 부르주아 학자들은 이와 같은 상상력을 발휘해 스탈린이 레닌을 죽였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따라서 무슨 레닌이 자신의 후계자를 트로츠키로 임명했다거나, 레닌이 그의 유언을 통해 스탈린을 공격하는 등 반스탈린 투쟁을 했다는 주장이나 스탈린이 레닌을 독살했다는 주장은 완전히 날조된 사실이다. 이러한 부분에 대해 사하로프라는 러시아 학자가 잘 반박했으며, 이는 서구 역사학계에서도 유명한 스티븐 코트킨 또한 높게 평가하는 자료다. 스탈린에 대한 얘기 중 하나는 그가 소련 공산당에서 인기가 없었다는 얘기가 있다. 이는 말 그대로 엉터리 주장이다. 마지막으로 빌 블랜드의 말을 인용하며 마치겠다.


“세계의 지도적 맑스주의자로서 레닌의 논박에도 불구하고 서기장의 자리로부터 스탈린의 제거에 대한 그의 유언에서의 요구는 소련 공산당 제13차 대회에 의해 거부되었다는 사실은 그 문서가 쟁점이 된 환경들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스탈린이 당으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고 있다는 것에 대해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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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은 인류역사상 최초로 가장 많은 사망자와 부상자가 속출한 대규모 전쟁이었다. 4년간 치러진 이 전쟁으로 1,000만 명이 죽고, 2,000만 명이 부상당했다. 총 3,000만 명의 사상자가 이 전쟁에서 나왔다. 흥미롭게도 러시아는 이 전쟁에서 빠지게 됐는데, 이는 1917년에 발생한 러시아 혁명의 여파 때문이었다. 19세기부터 낙후된 농업 국가였던 러시아는 독일과의 전쟁에서 많은 희생을 치렀다. 전쟁 초기 독일은 슐리펜계획에 따라 대부분 병력을 서부전선에 투입했으나, 예상외로 잘 버틴 프랑스와 영국에 의해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짐으로써, 전쟁은 4년간이나 지속됐다. 


러시아군은 수적으로는 우세했으나, 독일군과의 전투에서 적잖은 패전을 거듭했다. 1915년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독일군은 수적으로 불리했음에도 동부전선에서 유리한 전세를 잡았으며, 1914년에서 1917년까지 러시아군은 총 200만 명이 전사하고 또 다른 200~300만 명이 부상당했다. 총 500만 명의 사상자가 속출한 것이다. 그러나 1917년에 시작된 2월 혁명은 로마노프 왕조를 무너뜨렸고, 러시아는 점차 전쟁을 수행하지 않는 쪽으로 가게 됐다. 특히나 1917년 레닌과 볼셰비키가 주도한 10월 혁명은 인류 최초로 사회주의 국가를 등장시켰고, 소비에트 러시아를 건설한 레닌은 “즉각적인 전쟁 중단!”을 외쳤다.

(아르헨겔스크에 상륙했던 미군 사진, 성조기를 들고서 이렇게 기념 사진도 찍었었다.)


1918년 3월 더 이상 전쟁을 하지 않으려 했던 소비에트 정권은 단독으로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독일과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의 체결은 러시아가 더 이상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렇게 해서 제1차 세계대전을 진행중이던 영국·프랑스·미국·일본 등 제국주의 열강들이 소비에트 러시아를 침공하며 백군을 지원했는데, 이렇게 해서 발발한 것이 바로 적백내전(Russian Civil War)이었다. 적백내전은 사회주의 혁명을 수호하려는 소비에트 러시아와 이에 맞서는 차리즘 복권 세력 간의 전쟁이었다. 볼셰비키 입장에서 보았을 때, 근본적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수호하기 위한 전쟁이었고, 제국주의 열강들의 불법 침공이었다.


1918년에 시작된 내전에서 소비에트 러시아는 백군 세력·체코 군단·영국·미국·프랑스·일본·폴란드·그리스·에스토니아·이탈리아로 구성된 반란군 및 침략군대를 무찔렀고, 1920년에서 1921년 사이에 승기를 잡았으며, 궁극적으로 내전에서 승리를 쟁취했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미국은 적백내전에 병력을 보냈다. 그 이유는 바로 미국이 적색공포에 빠졌기 때문이다. 러시아 혁명 이후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미국 내에서 이른바 좌파 색출작업을 단행했는데, 그 결과 적잖은 좌파 운동가들이 감옥에 갔으며, 미국 내에서의 반공주의 정서가 극심해졌다. 우드로 윌슨 정부는 1918년 러시아에 미군을 보냈다. 말 그대로 혁명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침략군을 보낸 것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 파견된 간섭군들, 열병식을 하는 이들 중에는 미군들도 있었다.)


윌슨 정부는 총 13,000명 정도의 미군을 러시아에 보냈다. 1918년 9월 러시아 북부에 있는 아르헨겔스크와 극동에 있는 블라디보스토크에 미군 병력이 상륙했으며, 이들의 임무는 러시아 백군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13,000명의 미군 병력 중 5,000명은 아르헨겔스크에 주둔했고, 나머지 8,000명은 극동지역인 블라디보스토크에 주둔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러시아로 파견된 미군들 또한 전투를 치렀다. 1918년 10월 붉은 군대는 미군을 공격하여 적잖은 사상자를 안겨주기도 했는데, 미군들은 아르헨겔스크에서 전투에 투입됐던 병력의 10% 정도를 잃었다. 총 110명의 미군이 전사했고, 30명이 실종되었으며, 또 다른 70명은 당시 유행하던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했다. 2021년 프랑스에서 나온 르몽드 기사에 따르면, 부상당한 미군은 눈보라치는 숲속에서 구조를 기다리다 얼어 죽었고, “그해 가을과 겨울 미군은 이미 끝난 전쟁에서 미국 정부에 의해 잘못된 길로 들어섰고 장교들에게 속고 동맹국에 혹사당했으며, 적과 싸우기에는 태부족이었다.”

(아르헨겔스크에 배치된 미군 사진)


아르헨겔스크에 배치된 미군 대다수는 흥미롭게도 겨울 날씨에 잘 버티는 미시간 출신의 병사들이 많았다고 한다. 실제로 미군 지휘관들은 이들이 아르헨겔스크의 추운 겨울을 잘 버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들은 배치되기 전 영국에서 훈련을 받았는데, 당시 이들이 받았던 훈련 중에는 영하 기온에서 버티는 방법도 있었으며, 이걸 교육한 사람은 남극을 탐험한 경험이 있는 베테랑 탐험가 에르네스트 섀클턴(Ernest Shackleton)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 또한, 아르헨겔스크에서의 군생활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이들 중 하나였던 헨켈맨과 3명의 병사는 연대장에게 최후통첩을 썼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919년 3월 15일까지 전선에서 철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러시아 적군들과 싸우지 않겠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둔다.”

(미국에서 만든 시베리아 파병 미군 병사 관련 프로파간다, 이 프로파간다는 시베리아에 있는 미군들 지원하기 위해 전쟁우표를 살 것을 요청하고 있다.)


소비에트의 붉은 군대는 1919년 1월에 아르헨겔스크에 있는 미군을 몰아내기 위한 공세를 게시했다. 7일간의 공세 기간 동안 미군 병력은 8 대 1이라는 수적 열세에 처해 있었고, 이 미군들은 바가 강을 포함하여 지키고 있던 여러 곳에서 북쪽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볼셰비키의 점진적인 공세는 5월에도 지속됐고, 미군은 1919년 6월 15일 아르헨겔스크에서 철수를 마쳤다. 아르헨겔스크에서 9개월간 주둔했던 미군은 총 235명이 전사했다. 그러나 윌슨은 시베리아 지역에서 미군을 주둔하며 백군을 지원하고자 했다. 


2019년 스미소니언 매거진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당시 시베리아에 주둔 중이던 콜차크 제독의 백군들은 점령한 지역에서 백색테러를 했다고 한다. 대량 처형이나 고문 등이 대표적이었으며, 기사에 따르면 “코사크 장군 출신인 그리고리 세메뇨프(Grigori Semenov)나 이반 칼미노프(Ivan Kalmikov)가 지휘하는 백군 병사들은 일본군의 비호하에 점령한 지역과 마을을 배회하며 사람들을 죽이고 약탈했다.” 일각에서는 당시 미군들이 백군 세력을 도와 볼셰비키를 지지하는 주민들을 학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1920년 1월 우드로 윌슨 정부가 시베리아에서의 철군을 결정하면서, 미군은 4월 1일에 철수를 완료했다. 시베리아에 있던 미군 병력은 전사자 189명을 남긴 채 철수했다.

(현재 러시아 아르헨겔스크에 있는 간섭군대 관련 묘비)


적백내전기 미군 전사자 숫자는 344명에서 424명 정도로 추정되며, 부상자도 최소 300명 이상인 것으로 알려졌다. 적백내전기 미군의 파병은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적백내전은 볼셰비키 세력의 승리로 끝났기 때문이다. 1921년 내전에서 승리한 볼셰비키는 1922년에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USSR) 즉, 소련(Soviet Union)이라는 나라를 탄생시켰다. 적백내전 또한 제1차 세계대전 만큼이나 참혹했다. 대략 1,000~1,200만 명이나 되는 인명이 사망했는데, 1921년에서 1922년에 강타한 기근으로 최소 500만 명이 아사하는 일이 벌어졌다. 군인 전사자도 100만 명을 넘었다. 이러한 숫자를 보더라도 제1차 세계대전 못지 않게 참혹한 전쟁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놀랍게도 이 내전의 존재를 아는 유럽인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은 것 같다. 어쩌면 서양 현대사마저도 루소포비아적 시각에서 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참고문헌


단행본

쉴라피츠패트릭, 고광열 옮김, 『러시아 혁명 1917-1938』, 사계절, 2017.

R.B 에스프레이, 편집부 옮김, 『세계게릴라전사 1』, 일월서각, 1993.


기사

마이클 M.필립, “볼셰비키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미군들”, 르몽드, 2021.07.30.,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14830>.

Blake Stilwell, “The United States' Invasion of Russia Was a Yearlong Freezing Hell for the Troops”, Military.com, 2022.06.28.,

<https://www.military.com/history/united-states-invasion-of-russia-was-yearlong-freezing-hell-troops.html>.

Erick Trickey, “The Forgotten Story of the American Troops Who Got Caught Up in the Russian Civil War - Even after the armistice was signed ending World War I, the doughboys clashed with Russian forces 100 years ago”, Smithsonian Magazine, 2019.02.12., <https://www.smithsonianmag.com/history/forgotten-doughboys-who-died-fighting-russian-civil-war-180971470/>.


인터넷 사이트

https://en.wikipedia.org/wiki/Allied_intervention_in_the_Russian_Civil_War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i401650&code=kc_age_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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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22년 김남섭 교수가 번역한 제프리 로버츠의 저서인 『스탈린의 전쟁(Stalin's Wars: From World War to Cold War, 1939-1953)』의 내용을 바탕으로 겨울전쟁을 요약한 글입니다.)


세계사를 공부한 사람들이라면, 1939년 8월 몰로토프와 리벤트로프가 맺은 독소 불가침 조약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할 것이다. 또한 스탈린 정부의 폴란드 분할과 핀란드 침공에 대해서도 당연히 부정적으로 볼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한 서방의 입장은 “1939년 히틀러와 스탈린은 동맹이었고, 부당한 제국의 팽창을 했다.”로 요약된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반론은 없는 것일까? 당연히 반론도 존재한다. 오늘은 소련의 핀란드 침공의 또 다른 면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겨울전쟁 당시 전선 지도)


1930년대 당시 이오시프 스탈린의 일관된 정책은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의 팽창에 맞서 국방력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대회를 통해 이른바 인민전선 노선을 채택한 것도 파시즘에 맞선 새로운 전략이었고, 실제로 1936년 프랑코가 파시스트 쿠데타를 일으키자 공화파를 지원했다. 스탈린은 프랑코의 파시즘에 맞서 싸우기 위해 약 2,000명의 소련군을 파병했으며, 보병의 지원을 중심으로 이루는 탱크 부대도 보냈다.


스페인 내전 뿐만 아니라 스탈린은 겨울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도 아시아와 유렵에서 전쟁을 치렀다. 우선 만주와 몽골 쪽에선 하산호와 노몬한에서 일본군에 맞서 승리를 거두었고, 1939년 폴란드 분할 당시 소련군은 병력을 보내 폴란드의 절반을 접수했다.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사실이지만, 사실 스탈린은 핀란드와의 겨울전쟁을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제프리 로버츠에 따르면, 스탈린은 갈등을 촉발한 국경과 안보 문제를 협상으로 해결하고 싶어 했다. 안타깝게도 정치협상은 파탄이 났고, 그 결과가 군사적 행동이었던 것이다.

(스탈린과 보로실로프)


1939년 10월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를 방문한 핀란드 대표단은 협정에 대한 요구만 받은 것은 아니었다. 소련은 핀란드에게 해군 방어 시설을 구축하기 위해 핀란드만의 몇몇 섬을 조차하거나 임차하고 싶다는 요구를 내밀었다. 가장 중요한 사항으로 스탈린은 레닌그라드에서 30km 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소련-핀란드 국경을 북서쪽으로 옮기기를 원했으며, 그 보상으로 핀란드에 극북의 소련령 카렐리야 영토를 주고자 했다.


협상을 준비하면서 소련 외무부는 일련의 최대 요구와 최소 요구를 세밀하게 작성했다. 최대 요구에는핀란드에서의 군사기지, 북부 핀란드의 페차모 니켈 광산 지역 양도, 발트해 연안의 핀란드 군사 시설에 대한 거부권이 포함되었다. 물론 핀란드 대표단은 양보를 하더라도 아주 조금만 할 준비가 되어 있었을 뿐이었다. 반면 소련은 소련-핀란드 상호 원조 협정까지 포기하며 최소한의 영토를 요구하는 쪽으로 물러났다. 즉, 소련은 핀란드에게 협상에서 양보를 하는 쪽으로 노선을 정했던 것 같다.

(소련-핀란드 전쟁 관련한 영문 서적)


그러나 협상은 궁극적으로 깨졌으며, 어떤 긍정적인 결과를 내놓지 못했다. 오히려 핀란드는 10월 중순에 군대를 동원했고, 핀란드 내에 있는 공산주의자들을 다수 체포했다. 핀란드가 이렇게 나가자, 스탈린과 소련 국방 인민 위원 보로실로프는 결과적으로 전쟁의 길을 선택했다. 보로실로프는 11월 20일까지 소련군을 레닌그라드 지역에 완전히 집결시켰고, 지역 사령관들은 11월 21일까지 기동 준비를 끝내라고 명령했다. 소련군은 핀란드군 사이에서 벌어진 국경 충돌에서 개전 이유를 찾았으며, 11월 28일 몰로토프는 1932년에 맺은 소련과 핀란드의 불가침 협정을 폐기했다. 이렇게 해서 소련과 핀란드 사이의 전쟁이 벌어졌고, 소련은 1,500대의 탱크와 3,000대의 항공기 지원을 받는 100만 명의 병력을 동원했다.

(소련-핀란드 전쟁 당시 소련군의 진격을 재현한 사진)


초기 공격은 실패했고, 준비된 핀란드군 또한 제법 잘 싸웠다. 로버츠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쁜 날씨에 소련군의 공격은 서툴렀고 조율도 억망이었다. 그러나 그해 2월 스탈린이 세묜 티모셴코를 소련의 핀란드 공격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면서, 핀란드가 만들어 놓은 만네르하임선을 깨뜨리는 데 성공했고, 핀란드군을 잘 갖추어진 전선에서 후퇴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의 사상자가 핀란드군 보다 많았다는 점을 보자면, 군사적 손실 측면에서 핀란드가 이겼다고 보는 것도 아주 불가능한 표현은 아닐 것이다.


제프리 로버츠에 따르면, 1940년 3월까지 소련의 붉은 군대는 핀란드 방어의 남은 부분을 붕괴시키고 수도 헬싱키로 진격한 다음 온 나라를 짓밟고 점령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스탈린은 그걸 선택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스탈린은 핀란드의 평화 협상 타진에 반응하여, 종전 조약을 협상해서 체결하기로 했으며, 1940년 3월 12일에 맺은 조약의 조건에 따라 핀란드는 소련의 주요 영토 요구를 들어주었으나 독립과 주권을 보전했고, 여느 발트국가들과는 달리 상호 원조협정을 맺는 일과 본토에 소련 군사기지를 설치하는 일은 하지 않아도 됐다. 스탈린은 비교적 겨울전쟁 종전에 대한 온건한 입장을 취했다고 할 수 있다.

(소련-핀란드 전쟁 당시 소련군의 T-26 전차)


제프리 로버츠의 책 『스탈린의 전쟁』에서는 비교적 짧게 언급된 부분이 있다. 앞서 언급한 핀란드 정부의 공산주의자 탄압이다. 많은 사람들이 정말 모르는 사실이지만, 현재 우리가 아는 핀란드는 레닌 시절 적백내전 속에서 탄생한 국가였다. 당시 핀란드는 레닌을 지지하는 볼셰비키 좌파와 반공성향의 우파가 내전을 벌였는데, 1948년의 대한민국처럼 우파가 승리했다. 내전 당시 양측의 민간인 학살이 있었는데, 적색테러로 죽은 사람이 1,650명인 반면, 백색 테러로 죽은 사람은 무려 8,250명에 달했다고 한다. 즉, 백색 테러의 규모가 적색 테러보다 몇 배는 더 컸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배경에서 보자면, 핀란드 정부는 명실상부 반공 성향의 우익 정부였다. 일각에서는 소련의 부당한 침공을 지적할 수 도 있겠으나, 그렇다고 해서 겨울전쟁 이후 핀란드가 나치 독일에 협력한 역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핀란드는 나치 독일에 빌붙은 아주 충실한 반공 성향의 동맹국가였다. 겨울전쟁 이후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자, 핀란드는 나치 독일을 돕기 위해 수많은 병력을 파병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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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4-03-25 22: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북유럽 복지국가의 대명사로 알려진 핀란드도 추축국이었다니!
 
스탈린의 전쟁 -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냉전까지, 스탈린은 소련을 어떻게 이끌었나
제프리 로버츠 지음, 김남섭 옮김 / 열린책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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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시프 스탈린. 한국 사회에서 이오시프 스탈린 하면 가장 강조되는 이미지는 무엇일까? 아마도 스탈린에게 붙는 수식어는 학살’, ‘독재’, ‘숙청’, ‘폭군과 같은 부정적인 표현들이다. 당장 세계사 관련 강의에서 스탈린 관련 강연을 들어보면, 하나같이 하는 얘기들이 앞서 말한 수식어에 전부 다 끼어 들어간다고 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 대기근, 대숙청, 고려인 강제 이주, 독소 불가침 조약, 냉전의 시작 등 이러한 소재는 스탈린 개인을 강력히 비난하기 위한 서방측의 소재 중 하나다. 그런 이미지와 더불어 한국에서 강조되는 스탈린에 대한 인식은 “1950625일 김일성의 불법 남침을 허용한 분단의 원흉이라는 주장이다. 마찬가지로 서방 사회가 가진 스탈린에 대한 이미지 또한 앞서 언급한 수식어들에 다 맞아 들어간다. 이들이 하는 주장을 보면, 스탈린은 항상 학살자여야만 하고, 독재자여야만 하며, 긍정적으로 서술돼야 할 부분이 하나도 없는 인물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오시프 스탈린은 소위 서방 사회가 주장하는 그러한 이미지만 가지고 해석이 가능한 인물이 아니다. 특히나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승리를 생각해보면 말이다. 한번 생각해보자, 1941622일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한 시점부터 194559일 독일이 공식적으로 연합국에게 항복하는 시점까지 스탈린이 지휘했던 소련군은 과연 무엇을 했는지 말이다. 히틀러의 소련 침공으로 세계 역사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파괴와 살상을 경험했다. 히틀러의 군대는 현대화된 수만 대의 항공기와 수만 대의 탱크와 장갑차 그리고 서부전선에서 훈련된 수백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소련을 침공했다. 나치의 진격으로 소련은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그리고 스탈린그라드까지 전선이 밀렸으나, 모스크바 전투와 스탈린그라드 전투 그리고 쿠르스크 전투에서의 승전을 통해, 동부전선 곳곳에서 파시스트 침략자들을 격퇴했고, 1945년에 궁극적으로 승리했다.

 

이 모든 과정에서 단순히 소련군과 소련군 장성들 그리고 이들과 함께한 민중들의 힘으로만 가능한 일이었을까? 이런 점을 생각해보자면, 이오시프 스탈린은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소련의 지도자였다. 스탈린을 비난하기 바쁜 인물들은 1939년 독소 불가침 조약과 1941년 독일군의 침공으로 밀린 전선과 그에 따른 막대한 인명피해를 지적한다. 그러나 이러한 비난은 어떤 면에선 서구사회의 단편적인 역사해석에 가깝다. 우선 독소 불가침 조약을 예로 들자면, 과거 서구 학계는 1939년 독소 불가침 조약이라는 소재를 통해 스탈린을 히틀러와 같은 폭군이자 학살자로 묘사하고 싶어 했다. 여기에는 냉전시대 소련에 대해 흑색선전과 비난을 하던 인사들도 합류했다.

 

하지만 독소 불가침 조약의 맥락에는 파시즘 위협을 대비하기 위한 시간벌기라는 목적이 있었다. 1938년 뮌헨 협정 이후 나치 독일에게 양보만 보이던 서방의 모습에 스탈린은 그 누구보다 비판했던 인물이었으며, 스페인 내전 당시에도 적어도 서방보다 지원을 더 많이 했다. 1930년대 파시즘이라는 위협속에서 스탈린은 어떻게든 이들에 맞설 시간을 벌고자 했고, 그 과정에서 체결한 것이 소위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으로 알려진 독소 불가침 조약이었다. 물론 이것이 나치독일과 소련 양국의 군사적 혹은 이데올로기적 동맹을 뜻하는 것은 전혀 아니었으며, 스탈린은 독일의 침공을 대비하기 위해 최신식 전차와 항공기 등의 생산가동을 강화했으며, 1938년 당시 150만 명이었던 붉은 군대는 1941년엔 500만 명으로 증가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생길 것이다. 왜 스탈린은 예상되는 전쟁을 대비했음에도, 독일군의 기습 공격 시점 자체를 빗나갈 정도로 파악하지 못했을까? 답은 간단하다. 당시 히틀러는 영국과의 전쟁을 끝내지 않은 상태였다. 1940년 프랑스 점령 이후 독일은 영국을 상대로 항공전을 벌였고, 결과적으로 항공전에서 패배했다. 항공전에서 승리하지 못한 상태에서 독일이 곧바로 침공하지 않을 거라는 게 스탈린의 판단이었다. 생각해보면, 스탈린의 판단은 제법 합리성을 가지고 있었다. 1812년 러시아를 침공한 나폴레옹과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빌헬름 2세가 겪은 양면전선은 결국 패배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히틀러는 스탈린의 합리적인 판단을 초월하는 전무후무한 침략자였다. 그래서 1941622일 독소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스탈린의 지도력은 탁월했다. 비록 스탈린은 소위 대테러라 불리는 대숙청을 단행하여, 무고한 희생자를 불러오긴 했지만, 독소전쟁 시점에선 소련의 장성 및 군사 전략가들과 협력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스탈린은 개인적으로 매우 부지런하게 일하는 사람이었고, 오히려 밑에 있는 사람이 그 열정을 따라가기 힘든 예도 있었다. 적어도 독일군이 모스크바 외곽까지 진격했음에도 탁월한 용기와 지도력을 보여, 소련 인민들을 파시스트에 맞서 단결시켰고, 독일군에게 쓰라린 패배를 맞보게 했다. 그 이후에도 스탈린의 보인 지도력 덕분에 소련의 군사전략가들은 자율적이고 창의적으로 군사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스탈린에 대한 제프리 로버츠의 평가를 보자.

 

스탈린은 매우 유능하고 대단히 성공적인 전쟁 지도자였다. 스탈린은 많은 실수를 저질렀고 야만적인 정책을 추구하여 수많은 인민의 죽음을 야기했지만, 그의 리더십이 없었다면 소련은 나치 독일에 맞선 전쟁에서 패배했을 것이다. 처칠, 히틀러, 무솔리니, 루스벨트, 그들은 모두 군사 지도자로서 대체 가능한 인물이었지만 스탈린은 그렇지 않았다.”

 

출처: 스탈린의 전쟁 p.7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은 군인 1,000만 명과 민간인 1,700만 명을 포함해 2,700만 명에 달하는 인명이 목숨을 잃었다. 독소전쟁으로 무려 2,500만 명의 소련인이 집을 잃었고, 1,700여 개의 도시와 소읍, 7만 이상의 촌락, 32,000개 이상의 공장, 65,000km의 철도, 10만의 콜호즈와 소호즈가 파괴 또는 소실됐다. 히틀러의 침공으로 소련 국부의 1/3이 날아가버렸다. 이러한 인명손실에 가려지기는 했지만, 독일이 동부전선에서 받은 군사적 손실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동부 전선에서 전쟁을 치르는 동안 소련군은 600개 이상의 적군 사단(독일군은 물론이고, 이탈리아, 헝가리, 루마니아, 핀란드, 크로아티아군을 포함해)을 괴멸시켰다. 특히 독일의 경우 동부전선에서 300만 명의 사망자를 포함해 1,000만 명의 사상자를 냈고(독일 총 전쟁 사상자의 75%), 히틀러의 추축 동맹국들은 100만 명을 잃었다. 붉은 군대는 48,000대의 적군 탱크, 167,000문의 대포, 77,000대의 항공기를 파괴했다.”

 

출처: 스탈린의 전쟁 p.45~46

 

1942년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1943년 쿠르스크 전투 그리고 1944년 레닌그라드 포위전에서의 승리는 스탈린과 소련군 장성 그리고 소련군대가 군사적으로 탁월한 군대로 성장해나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19446월부터 8월까지 소련군이 동부전선 전역에서 반격한 일명 바그라티온 작전에는 제1, 2, 3 벨라루스 전선군들과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이 동원됐다. 4개의 전선군은 240만 명의 병력과 5,200대의 탱크, 36,000문의 대포, 5,300대의 항공기로 구성됐다. 이 과정에서 소련군은 벨라루스의 수도 민스크를 탈환했고,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를 탈환했으며, 우크라이나의 중심지인 리보프를 탈환했다. 그 결과 동부전선 전역에 있는 수많은 곳이 소련군에 의해 해방됐고, 독일의 추축국 동맹은 점차 와해되기에 이르렀다. 소련군이 이렇게 많은 지역을 파시스트 침략자에 맞서 해방할 당시, 영미 연합군은 그해 6월 프랑스 북부 해안 노르망디에 상륙하여 겨우 제2 전선을 구축했을 뿐이었다. 소련군의 이러한 군사적 성공에는 스탈린의 지도력이 한몫했다.

 

스탈린그라드 때부터 쭉 있었던 일은 스탈린이 더 많이 귀를 기울였고, 자문이 좋을수록 그것을 더 잘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스탈린뿐 아니라 소련 장군들도 전쟁 1일 차부터 가파른 학습 곡선을 그리고 있었는데, 바로 이 쓰라린 패배 경험을 통해 장군들은 더 좋은 사령관이 되었고 스탈린은 더 나은 최고 사령관이 되었을 뿐이다.”

 

출처: 스탈린의 전쟁 p.278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이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에 맞서 승리할 수 있는데 크게 기여한 지도자는 바로 이오시프 스탈린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오시프 스탈린이 제2차 세계대전 승리에 기여한 역사는 서방세계에서 아직도 공정하게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따라서, 이런 문제점을 아주 잘 잡아주는 책이 이번에 열린책들 출판사에서 번역한 제프리 로버츠의 책 <스탈린의 전쟁>이다.

 

사실 글쓴이는 이 책이 국내에 출판되기 전 제프리 로버츠에 대해 알고 있었다. 이 책이 출판되기 몇 년 전 국내 언론사가 보도한 기사를 읽었는데, 그 기사가 바로 제프리 로버츠가 내리는 스탈린에 대한 평가였기 때문이다. 제프리 로버츠는 소련의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이 잔혹한 독재자이지만, 2차 세계대전 당시 가장 뛰어난 전시 지도자였고, 전쟁 이후 평화를 추구했다고 얘기했다. 그래서 제프리 로버츠라는 인물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러던 중 올해 베트남을 여행하다가 우연히 페친을 통해 제프리 로버츠의 책이 국내에 번역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글쓴이는 귀국하자마자 책을 구매했고 너무나도 흥미롭게 이 책을 읽었다.

 

사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의 업적을 재평가한 책은 국내에 있긴 하다. 리처드 오버리의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이나, 데이비드 글랜츠의 <독소전쟁사 1941-1945>가 대표적인 예시다. 그러나 이 책들은 주로 군사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었지, 당시 소련군을 총괄적으로 지도하며 승리에 기여한 스탈린의 헌신과 노력은 크게 다루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제프리 로버츠의 책은 여러모로 큰 의미를 지니는 책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로버츠의 책은 스탈린 인물에 대한 평가를 담은 국내 출판물 중에 가장 읽어볼 만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로버트 서비스의 <스탈린 강철권력>이나 올레크 흘레브뉵의 <스탈린 독재자의 새로운 얼굴> 등은 이오시프 스탈린 개인에 대한 비판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스탈린이 보인 지도력과 냉전시기 평화를 위한 노력 등은 기본적으로 생략된 느낌을 지우기 힘들었다. 반면에 로버츠의 책은 스탈린의 노력을 드러내고자 하는 노력과 헌신이 보였다. 그런 점에서도 참으로 훌륭했다.

 

특히나 냉전시대에 대한 제프리 로버츠의 평가는 상당히 탁월하고 훌륭하다. 냉전시기 서구사회는 냉전의 책임을 소련에게 전가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나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저서들에서 주장한 바와 같이 소련과 스탈린은 반파시즘 인민전선 투쟁에서 얻은 전유물 한에서만 세력을 넓혔지, 다른 곳에 깊숙이 개입하지는 않았다. 이것이 바로 소련의 경쟁자 미국과는 분명히 달랐다. 로버츠 또한 냉전의 책임은 스탈린이 아닌 영국과 미국에게 책임이 더 있다고 본다. 1946년 처칠의 철의장막 연설이나 1947년 트루먼 독트린의 선포는 스탈린을 전적으로 자극하는 행위였다. 처칠의 철의장막 연설이 있고나서, 스탈린은 이에 대한 항의의 반박문을 프라우다지 등 소련 기관지에 실었다. 19466월 몰로토프는 미국과 서방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항의하기도 했다.

 

세계에 미국이 안 보이는 구석이라곤 없습니다. 미국은 가는 곳마다, 아이슬란드, 그리스, 이탈리아, 튀르키예, 중국, 인도네시아 등지에 공군기지가 있고, 태평양에는 더 많은 공군 기지와 해군 기지가 있습니다. 소련의 군대는 중국을 비롯해 다른 외국 영토들에서 철수했습니다만, 미국은 아이슬란드 정부에 항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슬란드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중국에서도 병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는 진정한 팽창주의의 증거로, 제국주의 정책을 꾀하는 어떤 미국 집단의 노력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출처: 스탈린의 전쟁 p.506

 

당시 소련과 스탈린이 미국과 달리 개입주의적 성격을 띠지 않은 이유에 대해 제프리 로버츠에 따르면 냉전 초기 유럽 내에서 사회주의 세력이 급증했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알바니아는 전쟁 전에 비해 공산당원이 1,000명에서 12,000명으로 급증했다. 중립국으로 유명한 오스트리아는 16,000명에서 132,000, 벨기에는 1만 명에서 12만 명, 영국은 15,000명에서, 5만 명, 프랑스는 34만 명에서 100만 명, 독일은 30만 명에서 80만 명 등으로 증가했다.서유럽만 해도(알바니아는 동유럽이니 여기서는 논외) 공산당원의 숫자가 급증했으며, 동유럽에서의 당원 증가비율은 어마어마했다. 전쟁 이후 유럽에서 실행된 선거 결과를 보자.

 

유럽 공산주의자들이 보여준 이 인상적인 전후의 실적은 전쟁 후 실시된 선거 결과에서도 그대로 되풀이되었다. 동유럽 수치만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불가리아의 경우, 194511월 선거에서 공산주의가 이끄는 조국전선이 투표의 88%를 득표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경우, 19465월 공산주의자들은 투표의 38%를 획득했다. 헝가리에서 공산주의자들은 194511월에는 불과 15%의 투표만 획득했지만 19478월 선거에서는 22%까지 증가했고, 당이 이끄는 좌익 블록은 의석이 66%를 얻었다. 19471월 폴란드 선거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이끄는 민주블록은 80%의 표를 받았다. 루마니아의 경우, 194611월에 공산주의자들이 이끄는 민주주의 정당 블록이 투표의 80%를 득표했다. 유고슬라비아의 경우, 194511월에 야당이 선거를 보이콧하여 대안 후보가 없었음에도 유권자의 90%가 공산주의자들의 인민전선에 투표했다.”

 

출처: 스탈린의 전쟁 p.422~423

 

비록 책 본문에서는 크게 강조하지 않았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은 반식민주의 해방운동과의 연관성을 땔 수 없는 것 같다. 1943년 코민테른은 해체되었지만, 그것을 구성하던 조직적 요소들 중 많은 요소는 이전처럼 계속 기능을 했다. 또한 1947년 쯤 코민포름이라는 것이 구성되면서, 식민지 해방운동과도 연계가 됐고, 식민지 지배로부터 해방된 지역에서의 인민민주주의 정권이 들어서게 되는 요소로도 작용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인도차이나 반도나 한반도 이북에서 인민민주주의적 개혁이 이루어졌던 것을 생각해보면,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1935년 코민테른 제7차대회에서 결정된 인민전선이 식민지 해방운동 속에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반면에 미국이 지원한 세력들은 지주와 자본가를 중심으로 하는 친식민주의 혹은 친파시즘적 세력이었다는 점에서 소련과는 명확한 차이점을 보인다. 아래는 안드레이 즈다노프가 코민토름 회의에서 한 연설이다.

 

우리가 전쟁의 종결로부터 멀리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전후 국제 정치에서 두 가지 기본 지향이 더욱더 분명히 두드러지는데, 이는 두 개의 기본 진영으로의 분열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제국주의ㆍ반민주주의 진영이 하나이고 반제국주의ㆍ민주주의 진영이 다른 하나입니다. 제국주의 진영을 이끄는 주요 세력은 미국입니다. 제국주의 진영의 근본적인 목표는 제국주의를 강화하고 새로운 제국주의 전쟁을 준비하고 사회주의와 민주주의에 맞서 싸우고 반동적ㆍ반민주주의적ㆍ친파시즘 체제와 운동을 전면적으로 지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제국주의 진영은 모든 나라에서 반동적ㆍ반민주주의적 분자들에 의지하고, 자신의 전시 동맹국들에 반대하여 이전의 전쟁 적국들을 지지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반제국주의ㆍ반파시즘 세력은 다른 진영을 구성하는데, 이 세력의 중추는 소련과 신민주주의 국가들입니다. 이 진영의 목표는 새로운 전쟁과 제국주의 팽창의 위협에 맞서 싸우고 민주주의를 공고히 하며 파시즘 잔재를 뿌리 뽑는 것입니다.”

 

출처: 스탈린의 전쟁 p.526~527

 

앞서 강조했듯이 제프리 로버츠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스탈린이 보인 리더쉽에 대한 재평가와 냉전시대에 대한 재해석이다. 그러나 글쓴이가 보기에 로버츠의 책 또한 몇몇 부분에서는 한계를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스탈린이 1930년대 단행했던 강제 이주 정책에 대해 인종청소라고 표현한다든지, 1943년 나치 독일이 주장한 카틴 대학살에 대해 소련 측 학살만을 주장하는 자료만 인용한다든지, 전쟁 말기 소련군의 전시 강간을 다루는 부분에서 유고슬라비아의 친미 반공주의자인 밀로반 질라스의 검증되지 않은 증언을 액면 그대로 인용한다든지 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이런 부분에선 제프리 로버츠 또한 역사해석에 있어서 한계가 있다.

 

또한 냉전을 다루는 파트에서 한국전쟁을 다루는 파트도 너무 서구의 일방적인 시각으로 집필된 느낌을 버리질 못했다. 저자 제프리 로버츠가 서양 현대사에서 소련사를 전공으로 하고 스탈린에 관해 주로 연구한 사람이다 보니, 한반도 상황에 대해서 너무 단편적으로만 접근했다. 한국전쟁에 대해 스탈린의 실패라는 구절을 쓰는 건 둘째치고, 굳이 김일성의 침공 부분만 강조할 필요가 있었을까? 로버츠 또한 김일성의 증언을 토대로 일부 남로당들의 무장투쟁을 잠시나마 언급했는데, 최소한 해방 이후 미국이 이승만 정부를 세우는 과정에서 저지른 제주 4.3학살을 포함한 서방 쪽의 심각한 폭력에 대해선 왜 언급조차 안 했는지 다소 불편했다. 저자가 이쪽으론 비전공자니 보이는 한계라고 단순히 생각해야 하는 건지 정말 모르겠다.

 

물론 제프리 로버츠가 이러한 한계점을 보인다고 해서, 책 자체를 헐뜯고 싶지는 않다. 다만 그런 한계점들은 여전히 좀 아쉬움이 남을 뿐이다. 책의 저자는 현재까지도 서방 사회가 무작정 폄하의 대상으로만 보는 이오시프 스탈린의 또 다른 이면을 조명하기 위해 큰 노력을 했고, 그러한 노력의 결실이 책을 통해 보였다. 특히나 스탈린이라는 인물을 주제로 다룬 국내 번역서 중에 2·3차 가공된 책이 이 정도로 스탈린에 대해 재평가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로버트 서비스나 올레크 흘레브뉵의 경우만 봐도 스탈린에 대해 재평가는커녕, 비하하기 바쁘다. 반면에 로버츠는 스탈린의 리더쉽과 외교술을 조명하기 위해 여러 자료와 근거들을 인용하고자 한 것이 보인다. 그런 점에서 로버츠의 <스탈린의 전쟁>은 서방 사학자가 쓴 스탈린 관련 책 중에 제법 읽어볼 만한 가치가 높은 책이라 생각한다. 또한, 이 책을 통해 제법 얻을 만한 점들도 많다고도 본다.

 

따라서 세계사와 역사에 관심이 많은 이들과 스탈린에 대한 재평가가 궁금한 이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적극적으로 권하는 바이며, 앞으로도 이런 훌륭한 스탈린 관련 서적이 국내에 많이 나오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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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여행 도중에 국내에서 스탈린 관련 신작이 나왔다 해서, 인터넷 검색을 통해 이 책이 어떤 책인지 찾아봤다. 알고보니 내가 3년 전 어떤 페친이 알려준 기사를 통해 알게 된 인물이었다. 그 기사는 "비록 스탈린이 독재자지만, 유능한 군사 지도자"임을 역설하는 기사였다. 그래서 흥미로웠다.

 

이번에 제프리 로버츠의 책을 김남섭 교수가 번역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내심 기뻤다. 귀국하자마자 바로 인터넷 구매를 했으며 읽는 중이다. 비록 내가 보기에 서구 학계의 한계라 할 수 있는 관점들도 있는데, 그래도 지금까지 국내에 출판된 스탈린 관련 책들 중에 가장 훌륭한 책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스탈린이 어떻게 해서 유능한 군사 지도자인지, 어떻게 대중을 단결시켰는지 아주 훌륭하게 입증했다. 그리고 세간에서 히틀러스탈린의 동맹으로 모함하는 독소불가침 조약이나 폴란드 분할 그리고 겨울전쟁에 대해서도 기존 서구 부르주아 학계와는 다른 입장을 견지한다.

 

이 책에 따르면 소련과 독일의 폴란드 분할은 독소불가침 조약에 따른 것이고, 소련에 편입된 영토들 대다수는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의 자치 영토로 편입되었으며, 편입된 영토들은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계 주민들의 환영을 받기도 했다는 것이다.

 

겨울전쟁에 대해서도 흥미롭다. 우선 소련이 침공한 것은 무작정 침공한 것이 아님을 잘 알 수 있었다. 오히려 핀란드에게 영토적으로 양보하는 입장을 협상과정에서 조건으로 내세웠지만, 거부한 측은 핀란드였고 핀란드는 자국 내에 공산주의자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거기다 당시 핀란드 정부는 극우 정부였으며, 1918년 적백내전기 좌파들을 학살하며 탄생한 우익정부였다. 아니나 다를까 소련이 핀란드를 침공하자, 서구 제국주의 세력은 소련을 막는다는 핑계로 극우 핀란드를 지원했고, 심지어 핀란드는 나치 독일의 대대적인 지원도 받았다. 오죽하면 1940년 말 소련이 독일과의 국가적 협상에서 핀란드 내에 있는 나치 독일군 철군을 요구했겠는가?

 

즉 이런 점에서 이번에 김남섭 교수가 번역한 제프리 로버츠의 <스탈린의 전쟁>은 제법 읽어볼만한 책이다. 비록 스탈린에 대한 여전히 악의적인 비방이 책에 있기는 해도, 이 책의 일독을 당연히 나 같은 좌파들에게 추천할만한 책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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